하민의 설명을 듣고서야 양시은은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됐다.“널 데려간 이모 어떻게 생겼어?”“제 이모랑 닮았어요.”양시은은 손을 멈췄다.‘양채은?’그 이름이 떠오르자 묘하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제 겨우 가라앉았던 감정이 다시 요동치는 기분이었다.그때 나도현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됐어, 하민아 이리 와.”양시은의 표정이 안 좋아 보이자 하민은 잠깐 주춤했지만 결국 나도현 쪽으로 갔다.그는 하민을 달랜 뒤 양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우선 침착해. 하민이도 보고 있잖아.”마치 물속에 잠겨 있던 사람이 한순간에 공기를 마신 듯, 양시은은 큰 숨을 몇 번 들이쉬고는 괴로운 표정으로 돌아섰다.“나 먼저 방에 들어가서 좀 쉴게. 저녁은 이따가 먹어.”“엄마...”하민이 뒤따라가려고 했지만 나도현이 붙잡았다.양시은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밀폐된 공간 안에서 그녀는 문을 등지고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찬 기운이 옷을 뚫고 피부에 스며들어 저릿저릿했지만, 오히려 그런 감각이 지금은 감정적 혼란을 조금씩 잠재웠다.사실 그녀도 양채은이 살아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심지어 사람을 보내 수소문도 해 봤다.하지만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그녀를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하민을 보러 와 놓고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대체 왜 이럴까?’양시은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렴풋이 이유도 알고 있었다.나도현 때문이었다. 양채은은 아직도 그를 마음에 두고 있기에 세상을 등진 것처럼 그녀를 피하는 것이었다.양시은은 방 안에서 한동안 진정하고 저녁 무렵 식사하러 나왔다.표정은 다시 전처럼 돌아갔다. 하지만 하민은 뭔가 묻고 싶은 게 있어도 나도현이 조금 내버려두라고 한 말이 떠올라 잠자코 있었다.나도현 또한 별말 없었다. 그는 하민을 재우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양채은은 이제 완전히 풀려난 건가?”전에는 어딘가에 붙잡혀 있어서 나타나지 못한다고
비서는 전화를 받자마자 묘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을 찾는 전화입니다...”전화한 안내데스크 쪽에서는 누군가 꼭 나도현을 만나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중이라고 했다.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런 식으로 불쑥 찾아오는 사람을 일일이 다 만나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 종일 그런 식이라면 끝이 없을 테니까.그러나 막 거절하려던 참에 비서가 다음 말을 덧붙였다.“본인 이름이 양채은이라고 합니다.”나도현의 눈이 가늘어지며 잠시 날카로운 빛이 지나갔다.“올려보내.”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뒤 나도현은 응접실로 직접 향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개를 돌린 그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입을 뗐다.“너, 얼굴이...”눈앞의 사람은 양채은과 비슷한 체형이었다. 이목구비도 닮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특히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예전과 사뭇 달랐다.예전의 양채은은 이런 날카로운 느낌이 아니었는데, 방금 스쳐본 첫인상은 마치 칼을 뽑아 든 검사 같았다.양채은은 한쪽 앉았다.조금 더 가까이서 보니 예전과의 차이는 훨씬 두드러졌다.돌출된 쇄골, 한층 야윈 어깨뼈, 가녀린 몸에 검은 치마를 입고 앉은 모습이 꼭 밤의 장미처럼 날 선 아름다움을 풍겼다.“오랜만이네요. 그래도 저를 기억해 줘서 다행이에요.”양채은이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말이 곧 나도현의 추측을 인정하는 셈이었다.그는 잔뜩 찌푸린 미간을 약간 풀며 길게 숨을 뱉었다.“역시 너였구나.”양채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예전이랑 많이 달라 보일 거예요. 전신에 심각한 화상을 입어서 피부 조직의 70% 이상을 이식했거든요.”너무나 담담하게 꺼내 놓는 끔찍한 사실이었다.보통 사람이라면 말하기조차 힘든 과거일 텐데 양채은은 남 얘기인 양 태연했다.나도현의 눈빛이 더 어두워졌다.“그래도 태경 씨가 저를 바로 알아봐 줘서 기뻐요.”양채은이 살짝 웃었지만, 나도현은 즉시 얼굴을 굳히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막았다
양채은의 환상은 나도현의 한마디로 산산조각 났다.“아니.”“왜죠? 언니가 없었다면 제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주고 늘 곁에 있었을 거예요.”나도현은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너는 왜 그런지도 모르니까. 그게 바로 이유야.”양채은은 멍하니 굳었다.몇 초 후, 곧게 펴 있던 허리가 풀리듯 힘없이 내려앉았다.나도현의 단호한 말은 잔혹했지만 애매하게 매달려 있던 마음을 미련 없이 놓아주기에는 오히려 나았다.사실 그녀가 직접 말한 것처럼 한 번 죽음의 문턱을 다녀온 뒤로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나도현에게 품은 마음은 애정이라기보다 고집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약이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답변이 결국 집착을 깨뜨려 버렸다.한참을 침묵하던 양채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알겠어요.”문 쪽으로 거의 다 갔을 때 나도현의 목소리가 등 뒤로 날아왔다.“정말로 만나지 않을 거야? 어쨌든 네 언니잖아.”둘 다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고 있었다.양채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다면... 그날 가볼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문을 열고 조용히 사라졌다.나도현은 잠시 고민했다. 얼마 전 양시은이 감정 기복이 컸던 걸 떠올리자 이 사실을 굳이 말해 줄 필요가 있을지 망설여졌다.‘결혼식을 정말 하게 된다면 그때 만나도 늦지 않겠지.’그는 그렇게 결론짓고 양시은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했다.정작 양시은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그녀는 며칠 전부터 나도현이 던진 말 때문에 계속 마음이 흔들려 멍한 기색이 역력했다.“엄마, 요즘 기분 안 좋아 보여요.”어느 날 참다못한 하민이 물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이다.양시은은 아이의 걱정 어린 얼굴을 보자 살짝 마음이 짠해졌다.그녀는 가만히 쪼그려 앉아 하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하민아, 엄마가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근데 그 전에 네가 먼저 말해 줬으면 해. 넌... 아빠를 만나 보고 싶니?”하민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음...
양시은과 나도현에게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민이 거부하지 않으니 두 사람 다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그날 양시은은 마음을 굳히고 곧장 나도현에게 결심을 털어놓았다.그녀가 결혼하겠다고 응한 순간 나도현은 단숨에 그녀의 뒤통수를 끌어안고 깊이 입을 맞췄다. 오랜 입맞춤이 끝나고서야, 그는 거칠게 숨을 고르며 이마를 맞댔다.“드디어 네가 나랑 결혼해 주는구나.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는 걸 듣자 양시은은 가슴이 아릿해졌다. 사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떠나기로 한 것도 수없이 고민하고 망설인 끝에 겨우 내린 결정이었다.그래도 결국 이렇게 함께하게 되었으니 다행일 따름이었다.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했고 제일 먼저 알린 건 최정숙이었다.그녀는 별다른 감흥도 없이 왜 이제야 결혼하냐고 투덜거렸다. 나도현이 제구실 못 하는 거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지만 딱히 반대나 다른 반응은 없었다.양시은 쪽 부모님은 사정이 조금 복잡했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문해미는 온전히 회복되지 못했다.그래도 알려주는 게 도리라 여긴 양시은은 병세가 나아진 문해미 곁에 가서 천천히 설명했다.“엄마, 기쁜 소식이 있어요. 저 결혼하려고요.”문해미는 결혼이 뭔지 몰랐지만 양시은의 표정이 밝으니 따라서 웃었다.“우리 시은이 늘 행복해야 해.”그 모습에 양시은은 왈칵 울음이 터질 뻔했다.그다음에는 지인들에게도 연락을 돌렸다. 온지유나 인명진 같은 친구들은 단톡방에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결혼식 때 꼭 참석하겠다는 말도 빠지지 않았다.이렇게 연락을 돌려 보니 이제 정말 한 사람만 남은 듯했다.나도현이 그녀의 뒤에서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낮고 부드러운 톤으로 말했다.“사실... 나 며칠 전 만난 적 있어.”양시은은 움찔하고 돌아섰다.“왜 난 몰랐는데?”“네 앞에 나서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그래...”양시은은 몇 발짝 비틀거리듯 물러났다. 나도현이 재빨리 손을 뻗어 붙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나도현은 웨딩드레스를 양시은의 눈앞에서 살짝 들어 보였다.“딱 맞을 것 같네. 잘 보관해 둬.”그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웃음기와 의미심장한 뉘앙스가 깔려 있었다. 양시은은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이 사람은 늘 이렇다니까.’그래도 이 달콤함은 혼자였을 때는 결코 맛볼 수 없던 감정이었다.결혼식까지 남은 보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그사이 나진 그룹은 업무 처리에 열중하기보다 거의 전부 결혼 준비에 나선 듯했다. 이제 사내 누구나 양시은과 나도현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역시 양 비서님이에요. 저희는 죽어라 일만 했지, 양 비서님처럼 한 방에 대표님을 공략하기는 힘들걸요.”“그러게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거예요.”“맞아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우리 대표님의 그 차가운 표정을 어떻게 견디겠어요.”사람들은 장난스럽게 수군댔지만 대체로 축하하는 분위기로 가득했다. 샘내는 시선도 조금은 있었으나, 그런 건 양시은도 그냥 흘려듣기로 했다.결혼식 장소로 고른 곳은 한 호텔이었다. 나도현은 통 크게 전부 빌려 버렸고 호텔을 장식하는 데만 사흘이 넘게 걸렸다. 준비에 최고급 웨딩 전문팀이 투입됐고 하객 이동을 위한 차량 역시 꼼꼼히 마련했다.차는 그가 직접 준비한 것 외에 여이현이 몇 대를, 또 온지유 쪽에서도 몇 대를 더 보냈다. 행사 당일에는 그 차들이 웨딩카를 앞뒤로 호위하듯 따라갈 예정이었다.완벽하게 꾸며진 예식장을 둘러보던 양시은은 마음 한구석이 벅차올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달콤하고도 시큼한, 마치 꿀물 속에 푹 잠긴 기분이었다.“어때요? 감격스러워서 울 것 같죠?”나란히 서 있던 온지유가 슬며시 팔꿈치로 그녀를 찔렀다.“예식장 준비에 내 공도 꽤 들어갔어요.”양시은은 촉촉해진 눈가를 닦으며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고마워요, 다들 신경 많이 써 주네요.”“친구 사이에 무슨. 미안하다 싶으면 축의금을 줄여주든가요.”온지유는 장난스레 말했다.“그건 안 되죠. 축의금은 내야 해요. 대신 그날 지유 씨 테이블에 특별히
“오늘 밤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깐 출장을 다녀와야 해요. 내일 아침에는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곧 결혼하는데도 여전히 일에만 매달리는구나?”최정숙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도현은 양시은을 바라보며 조용히 설명했다.“황남시 쪽 거래처에서 만나자고 해서 그래. 이미 약속이 잡혀서 미룰 수가 없어.”양시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다녀와. 일찍 갔다가 일찍 돌아오고, 운전 조심해.”“아쉬우면서 아닌 척하는 거 아니야?”나도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아니거든.”양시은은 어이없다는 듯 씩 웃었다.두 사람은 밖으로 나섰다. 나도현은 주변을 재빨리 살피더니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양시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양시은은 난감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짧은 출장이라 이동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나도현이 호텔에 도착해 잠시 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호텔 직원이 와인 두 잔을 들고 서 있었다.“호텔 기념행사 중이라 와인을 손님께 무료로 드리고 있어요. 맛보시겠어요?”“들어와요.”나도현은 직원을 힐끗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기념행사라면서 밖에 홍보물이 하나도 없던데요?”직원은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아직 준비가 덜 돼서요. 천천히 드세요.”나도현은 더 묻지 않고 문을 닫은 뒤 침대에 몸을 뉘었다.한밤중, 문 쪽에서 사각대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순식간에 눈을 떴다. 누군가 키를 사용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기 때문이다.나도현은 재빨리 일어나 불을 켰다. 문가에 멈춰 선 사람의 움직임이 순간 굳었다.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임다혜 씨?”임다혜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약효가 막 오르려는 시점이라 여겼다.그녀는 팔을 늘어뜨려 실크 가운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깊게 파인 슬립 차림에 불같은 몸매를 드러낸 채, 나도현에게 달려들어 그를 끌어안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도현 씨, 지금 많이
나도현의 태도는 극도로 냉담했다.“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다고 생각하는데요.”임다혜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 그의 옷을 잡아당기는 동시에 자기 옷까지 마구 찢어대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가 어찌 나도현의 상대가 되겠는가? 나도현은 그녀를 소파에 밀어 넘어뜨린 뒤 문을 열었다.밖에는 경찰들이 도착해 있었다. 동시에 기자들도 사전에 연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준비된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었다.“이 여자가 무단으로 들어왔어요.”나도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었다.“게다가 제 방 카드까지 갖고 있었어요. 와인은 호텔 직원이 가져다 준 건데 약물이 있는 것 같으니 조사해서 처리해 줘요.”몇몇 경찰은 이런 상황이 처음이었는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감시 카메라 영상을 확인해 보니 지금까지의 정황은 나도현의 말과 일치했다.기자들 역시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나도현은 차가운 눈길로 그들을 흘겨보았다.“아마 기사 제목까지 정해 두셨겠죠? 유명 변호사, 결혼식 전날 밤 내연녀와 밀회 같은 거요.”기자들은 정곡을 찔린 듯 머리를 긁적이며 서로 눈치만 살폈다.“내일 그런 제목을 보게 되면 전부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겁니다.”나도현이 에이스 변호사로서 얼마나 많은 소송을 이겨 왔는지는 모두가 아는 터였다. 기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설마요, 변호사님. 저희도 직업 윤리는 지킵니다.”“그 외에 뭘 어떻게 쓰든 마음대로 하세요.”나도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주저 없이 자리를 떠났다.그 뒤 밤새 조사가 이뤄졌고, 나도현은 현지의 일을 마무리한 뒤 비행기에 오르려 할 무렵 경찰에게 전화를 받았다.“대략 파악이 끝났습니다. 와인에 최면제 성분이 들어 있었고, 호텔 직원이 매수되어 임다혜 씨에게 방 카드를 넘겼어요. 지금 임다혜 씨는 유치장에 있는데 변호사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네요.”“저는 시간이 없으니 법대로 처리해 줘요. 이후 제가 변호사를 붙여서 고소를 진행할 겁니다.”나도현의 냉정한 응대에 경찰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보였
나도현은 눈앞에 있는 양시은을 보았다.“그리고 줄 게 하나 더 있어.”“뭔데?”나도현이 내민 상자를 열자 안에는 반지가 있었고 그녀는 조금 당황하게 되었다.“지금 껴야 하는 거야? 하지만 이건 내일에...”“일단 먼저 껴봐.”나도현은 오래전부터 그녀를 위해 준비한 반지임을 설명해주었고 다만 그때 그녀가 자신의 곁에 없어서 주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했다.직접 사이즈를 재보고 산 것이 아니었기에 대충 짐작으로 반지를 맞추었고 정말로 그녀의 손가락이 맞는지는 몰랐다.그런 그의 설명을 들은 양시은은 마음이 녹아내릴 것 같았고 나도현이 말한 그때는 아마 그녀가 그를 떠난 그때일 것이다... 그때의 그녀는 이미 그와의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몰래 반지를 준비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그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더는 나도현을 거절할 수 없었고 눈물을 머금은 두 눈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목소리도 어느새 눈물에 젖어 있었다.“그럼 당신이 끼워줘. 그래 줄 거지?”“당연하지.”나도현은 대답한 후 양시은의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했고 이내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워주었다.은빛을 내는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빛을 냈다. 반지를 낀 손을 드니 자신의 인생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 같았고 반지에 이니셜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반지에는 대문자로 ‘N&Y'라고 적혀 있었다. 글자를 빤히 보는 양시은의 모습에 나도현이 살풋 웃으며 말했다.“우리의 성에서 하나씩 따온 거야. 마음에 들어?”양시은은 나직하게 대답했다.“응, 마음에 들어. 너무 마음에 들어.”두 사람은 밝은 달빛 아래서 서로 끌어안았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양시은은 일찍 일어났다.“오늘은 시은 씨가 새신부 되는 날이니까 제가 화장해 드릴게요. 오늘 하루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이쁜 신부가 되어드리게 하죠!”온지유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양시은은 입꼬리를 올렸다.“저도 지유 씨에게 부탁하려고 했었어요.”온지유는 그녀의 제일 친한
나도현이 그런 양시은에게 물었다.“정말로 혼자 다 할 수 있겠어? 어머니는 지금 거동이 불편하신 상태야. 간병인을 알아봐 주지 않으면 몸 뒤척거리는 것도 힘드시다고.”그러자 양시은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내가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잊었어?”하민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녀는 어떤 일이든 다 해보았다. 그랬기에 누군가를 간호하는 것은 그녀에게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양시은의 말에 나도현은 가슴이 아팠다.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든 아이의 병을 치료해보려고 했기 때문이다.“고생했어. 예전에는 미안했어...”조금 슬픔에 젖어버린 나도현의 목소리에 양시은은 그저 웃어넘길 뿐이다.“괜찮아. 나한테 사과하자고 모인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 그러니까 과거의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말자.”말을 마치자마자 양시은의 핸드폰이 울렸고 온지유의 연락이었다.“하민이와 함께 우리 집으로 놀러와요. 별이가 며칠 동안 계속 하민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온지유는 정말로 양시은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현도 온지유에게 연락해 양시은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었기에 그녀는 행사만 있으면 양시은을 불러 적응하게 할 생각이었다.양시은은 침대에 누워있는 박은희를 보며 거절했다.“미안해요. 요즘엔 바빠서 안 될 것 같네요. 바쁜 일 끝내면 찾아갈게요.”“그래요. 그럼 언제 한가해지면 연락해줘요.”“네, 알겠어요.”온지유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책을 읽던 여이현이 고개를 들어 그런 그녀를 보았다.“왜? 안 된대? 다른 사람이라도 알아볼까?”온지유는 고개를 저었다.백지희는 경성에 없었고 지선율과 장다희는 촬영일로 바빴다. 홍혜주와 용경호는 부대에 있었기에 비교적 한가한 그녀와 달리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에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양시은을 잘 부탁한다는 연락을 받았던지라 양시은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양시은도 바쁘다고 했다.“왜 그렇게 힘이 없어. 아니면 나랑 같이 여행이라도 갈까?”여이현은 온지유를
양채은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난 이미 내려놨어. 언니는 이젠 부잣집 며느리잖아. 설마 기자들에게 과거의 일로 고통받고 싶은 건 아니지?”문해미와 그녀는 분명 양시은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할 것이었다. 양시은은 양채은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들과 가족이었던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한 번도 문해미를 원망한 적도 없었기에 당연히 양채은도 원망하지 않았다.“채은아...”양시은이 여전히 그녀를 잡으려던 때 양채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됐어. 이런 말은 그만하자. 언니, 행복하게 사는 게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거야. 게다가 난 언젠가는 떠나야 할 운명이었다고. 1년이든 2년이든 시간을 미룰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니가 영원히 날 신경 쓰면서 살 수는 없잖아. 난 그냥 자유롭고 싶은 거야. 엄마랑 함께 말이야. 언니, 난 이미 결정했고 바꿀 생각 없으니까 이제 더는 그런 의미 없는 말은 하지 말아줘.”“알았어...”확고한 양채은의 모습에 양시은은 결국 타협하고 말았다. 그녀는 직접 양채은과 문해미를 배웅해 주었다.“그럼 어디로 가는지 꼭 알려줘야 해. 나중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어도 연락해야 해. 알았지?”양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양채은은 오늘 이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도시에 가서 자리를 잡고 산다고 해도 절대 양시은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고 연락도 하지 않을 것이다.양시은이 고생하면서 산 것에 비해 그녀는 나쁜 짓이 많이 저질렀기에 양시은이 행복하려면 자신이 사라져줘야 한다고 생각했다....양시은은 세 시간이 지나서야 병원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감정을 갈무리하고 들어갔다고 해도 나도현은 바로 그녀의 기분을 눈치챘고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며 나직하게 물었다.“양채은이 떠난 거야?”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무리 설득해도 양채은은 확고하게 거절했다. 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주었다.“아직 마음을 정리하기까지 시간이
양채은이 떠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하지만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 평생 과거에 묶여 살아갈 수는 없어. 채은아, 나한테 동생은 너 하나뿐이야.”양시은은 목구멍에 무언가가 꽉 막혀버린 것처럼 괴로웠다.옆에 있던 나도현이 들리는 통화 내용에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눈빛을 보냈다. 양시은은 잠시 망설였다.“채은아, 잠깐만 기다려줘. 내가 지금 바로 갈게. 떠나겠다고 해도 나랑 마지막 인사는 하고 가.”말을 마친 양시은은 빠르게 병실에서 나왔다. 병실엔 나도현과 박은희, 그리고 하민이만 남게 되었다. 하민이도 사실 양채은을 보러 가고 싶었다. 양채은이 그간 하민이에게 너무도 잘해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눈치 없이 나설 수는 없었다.양시은과 나도현이 결혼할 때도 양채은이 찾아오긴 했지만 결혼식장에 끝까지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양시은과 나도현은 겨우 이어지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양시은이 어떻게든 이 모든 것을 잘 해결하리라 생각했다.양채은이 문해미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으니 분명 문해미와 함께 있을 것이었다. 급하게 달려온 양시은은 양채은을 보게 되었다. 양채은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예전과 모습이 달라지긴 했지만 양채은이 웃는 순간 예전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된 것 같았다.“언니를 부를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도 왔네. 힘들지 않아? 출근도 하고 하민이도 돌봐야 하잖아.”“지난번에 이미 말했잖아. 괜찮다고. 그런 내가 그런 거 신경 쓸 것 같아?”양채은은 시원하게 웃었지만 양시은은 그럼에도 가슴이 아팠다.“네가 한 말은 잘 알겠어. 나도 괜찮아. 하지만 넌 내 하나뿐인 동생이잖아. 동생이 떠나겠다고 하는데 언니로서 어떻게 달려오지 않을 수 있어? 나는 네가 떠나지 말았으면 좋겠어. 넌 지금...”양채은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다. 만약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녀가 양채은인 것을 모를 것이다. 게다가 일도 해야 했다. 하민이도 건강해졌으니 양시은의 곁에 남아 있다면 일한 돈을 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민이
예전의 나도현과 양시은은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심지어 그는 강태경이라는 이름으로 양채은에게 접근해 하마터면 영원히 양시은과 평생 함께할 수 없게 될 뻔했었다.박은희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버렸다.“설령 우리가 앞만 본다고 해도 과거의 일이 기억에서 지워지는 건 아니잖니. 난 너희들에게 죄인이란다. 너희가 이렇게 날 보살필 필요 없어. 너희들이 바쁘다는 거 내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러니까 너희가 할 일을 하러 가.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돼.”박은희는 그들이 자신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길 바랐지만 양시은은 그런 그녀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녀가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나도현도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릴 것이고 더구나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도현의 어머니이지 아닌가.“저희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 누가 신경 써주는데요? 그런 의미 없는 말은 하지 마세요. 얼른 치료를 잘 받고 빨리 나으셔야죠. 안 그러면 우리 하민이를 누가 대신 봐줘요?”나도현은 하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족이 되었던지라 하민이도 그를 아빠라고 불렀고 그는 지금의 생활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그래. 알겠다.”박은희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양시은은 휴지를 뽑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이젠 가족이 되었으니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면 되는 거예요.”그녀의 말은 박은희에게 아주 큰 행복으로 다가왔다.한편 양채은은 문해미를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문해미의 모습을 보니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더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양시은의 집에 남아 있으면 양시은의 걱정만 늘어가리라 생각했다.양시은은 그녀의 번호를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양채은은 받지 않았지만 양시은은 그녀의 전화라면 바로 받았다. 이번에도 양시은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언니, 내가 엄마를 데리고 가려고. 언니는 행복하게 살아. 우리 사이에 할 얘기는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앞으로도 과거의 일로 자꾸 연락하지 말았으면 좋겠
양시은은 당연히 박은희가 보여주기식으로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와 나도현의 일에 더는 간섭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 뒤로 박은희는 완전히 달라졌다.“알아요. 알고 있어요. 그동안 어머님은 늘 하민이를 돌봐주셨잖아요.”말을 하고 나니 양시은의 눈가가 어느새 붉어졌다. 박은희도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하민이는 내 손자니까. 내가 그동안 못 해준 게 많으니까 더 늦기 전에 해주고 있는 거야. 그래야 내가 느끼는 부채감도 덜어지는 것 같아서 그래.”양시은을 받아들이기로 한 후로 그녀는 더는 나도현과 양시은의 사이를 훼방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에 했던 어리석은 짓 때문에 매일 누군가 가슴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아프고 괴로웠다.매일매일 후회하고 있었다. 조금 전 그녀는 거의 망설임도 없이 양시은 앞에 나섰다. 머릿속엔 오로지 양시은이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이다. 양시은이 자기 아들과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지나간 일은 전부 지나간 일이잖아요. 이제 더는 과거에 연연하실 필요 없어요. 저희가 지금 당장 병원으로 모셔다드릴 테니까 그만 말씀하세요. 곧 괜찮아질 거예요.”양시은은 어느새 울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박은희가 그녀와 나도현의 사이를 훼방하긴 했으나 박은희는 나도현의 어머니였다. 그녀도 한 아이의 어머니였던지라 만약 그녀가 박은희였어도 어쩌면 같은 행동을 했으리라 생각했다.그랬기에 온지유와 만난 후로 온지유와도 속 깊은 얘기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친구로 될 수 있었다.그들은 빠르게 박은희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광기남을 경찰 조사하고 나니 단순히 세상을 향한 보복 행위였다... 나도현은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인맥도 많았기에 광기남은 남은 생 감방에서 보내게 되었다.한편 병원으로 온 뒤 지석훈이 직접 상태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빠르게 병원으로 오고 응급처치도 마쳤던 터라 박은희의 목숨엔 지장이 없었다. 다만 회복이 느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쉬어야 했다.나도현은 원래 간병인을 알아봐
“하민아, 할머니한테 뽀뽀해줄래?”박은희가 먼저 하민이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 그러나 하민이는 고개를 저었다.“싫어요!”아이의 대답에 박은희의 표정이 잠깐 섭섭한 표정으로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랬기에 그녀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그래. 그럼 이렇게 찍자꾸나.”사진작가가 사진을 계속 찍으려던 순간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어 문 쪽으로 다가가 소리를 쳤다.“조용히 좀 하세요!”말을 마치자마자 광기를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카메라를 빼앗더니 그의 머리로 내리쳤다.순간 당황한 사람들이었지만 양시은은 무의식적으로 하민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어딘가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은 그들이 화목하게 가족사진을 찍는 모습에 괜스레 질투가 나 더 광기 어린 모습을 보이며 소리를 질렀다.“너희들은 뭔데 이렇게 행복하냐고! 왜!”두 사람은 깜짝 놀라게 되었고 양시은은 얼른 하민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광기를 보이는 사람이 달려들자 정신을 차린 나도현이 양시은과 하민이를 밀치며 지켜주었다.조금 전까지 달려들기 전 광기남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건장한 남자이자 바로 걸음을 멈추었고 이내 방향을 틀어 양시은 쪽으로 달려들었다.양시은은 놀란 얼굴로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흉기를 들고 달려오는 광기남을 보았다. 나도현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 전에 한 행동이라 막아서기에도 늦어버린 후였다.일촉즉발 한 상황에서 박은희가 갑자기 그녀의 앞으로 달려오더니 광기남을 막아주었다.광기남의 흉기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비릿한 피 냄새가 스튜디오 안에 퍼졌다. 양시은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박은희를 보았다.“어머님!”다행히 찔린 곳은 허리였고 깊지 않았기에 생명엔 큰 지장이 없었다. 광기남은 행복한 그들의 모습에 더 광기를 보이며 계속 흉기를 들고 달려들려고 했지만 나도현이 그런 남자를 막아섰다. 광기남의 손목을 꽉 잡은 뒤 제압하려고 했다.양시은은 박은희를
이날은 나도현이 회사로 출근하지 않은 날이었다. 그는 양시은을 재촉하고 있었다.“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으니까 얼른 가자.”양시은은 하민이를 안은 채 다급하게 나왔다.“다 됐어. 가자.”예쁘게 꾸민 그녀의 모습을 본 나도현은 웃으며 칭찬해주었다.“점점 더 예뻐지네.”양시은은 그의 말에 입꼬리가 귀에 올라갈 정도로 웃었다.“당신은 언제부터 말을 예쁘게 할 줄 알게 된 거야?”나도현이 피식 웃었다.“솔직히 말한 건데 말을 예쁘게 한 거야? 당신은 아직도 본인이 얼마나 예쁜지 모르나 보군.”양시은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알았으니까 가자.”나도현은 원래 차에 오르려고 했지만 그녀와 자신의 옷을 훑어보곤 고개를 저었다.“안 되겠어. 내가 입은 옷이 너랑 어울리지 않아. 이래서는 너랑 부부로 안 보이잖아.”“그럼 갈아입으려고?”양시은은 눈썹을 튕겼다.“응. 갈아입어야겠어. 당신이 골라줘.”나도현은 웃으며 말했다.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지라 두 사람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와 비슷한 톤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만족한 듯 거울을 보았다.“그래. 이제야 부부 같네.”두 사람은 하민이와 함께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화기애애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박은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박은희는 교대한 운전 기사에게 물었다.“하민이를 데리고 어디를 간대요?”“교대하던 기사님이 사진관 간다고 말해주더라고요.”“그럼 나도 그 사진관으로 데려다줘요.”박은희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가족사진을 찍을 거라는 것을. 그녀는 조금 기대하는 마음으로 차에 올라탔다.사진관에 도착하고 나니 어느새 오후가 되었고 스튜디오는 아주 컸다. 미리 예약했던지라 VIP 통로로 들어갈 수 있었고 사진작가가 열정적인 모습으로 맞이해 주었다.“어서 오세요. 제가 가족사진 아주 예쁘게 찍어드리겠습니다.”두 사람을 따라 들어가자 여러 가지 배경이 있었다.“자자, 세 분 나란히 앉으시고 일
나도현은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보았다. 이내 박은희가 문을 닫았다.혼란스러워 보이는 나도현을 보며 박은희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자꾸 아버지한테 화를 내지 마. 네 아버지도 그냥 말만 그렇게 하시는 분이야. 그동안 네가 변호사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도 말만 그렇게 할 뿐이지 속으로는 은근 자랑스러워했어.”나도현은 박은희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줄곧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형언할 수 없었다.물론 이런 상황을 누구나 다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그렇게 나도현은 저녁도 먹지 않고 바로 본가에서 나와버렸다. 양시은은 당연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민이는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양시은이 옆에서 말 못 하게 막아버렸다.집에 도착하고 침대에 서로 기대앉고 나서야 양시은은 본가에서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기분은 좀 괜찮아?”나도현의 목소리가 한참 지나서야 들려왔다.“괜찮고 안 괜찮고 할 것 없어.”“알겠어.”양시은은 그런 그를 꽉 안아주었다. 이런 기분을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양채은이 살아 있다고 했을 때 이런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그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에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다.“그래도 이젠 알게 되어서 다행이네. 부모님이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냥 말로 표현하기 어려우셨던 거야. 하지만 부모님의 자식 사랑은 깊고 영원한 것이니 아버님도 그러리라 생각해.”“응...”나도현도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나용민의 상태는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갑작스러운 고혈압으로 잠깐 정신을 잃은 것일 뿐 며칠 동안 편히 쉬고 있으면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었다.양시은이 하민이를 데리고 나용민을 보러 갔을 때 나용민은 하민이와 놀아주기도 했다. 매일 본가엔 할아버지와 손자의 웃음소리만 울려 퍼졌다.나도현과 나용민의 사이도 점차 달라지기도
양시은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실수를 저질러 부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긴장이 풀린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주변 식당을 탐색한 후 보여주었다.“그럼 여기로 가자.”나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하민이도 데리고 가자. 오후엔 유치원에 갈 필요 없이 하민이 선생님께 말씀도 드리고. 점심을 먹고 나면 본가로 가야 해.”양시은은 왜 본가로 가야 하는지를 묻지 않았다. 나도현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사람을 몇 없었기에 나용민에 관한 일로 가는 것임을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점심을 먹은 후 그들은 나씨 가문 본가로 출발했다.하민이는 본가로 처음 가는 것이 아니었지만 양시은과 함께 가는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아주 흥분한 상태였고 차 안에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참고 있던 양시은이 결국 장난기 가득한 하민이를 꽉 잡으며 말했다.“하민아, 똑바로 앉아. 움직이지 말고.”하민이는 바로 얌전히 제자리에 앉은 후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엄마, 이번에 본가로 하면 할머니 만날 수 있어요?”나도현이 자신의 아빠라는 것을 알게 된 하민이는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던 박은희가 자신의 친할머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양시은은 그런 아이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다가 머리를 다듬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래. 할머니를 뵙고 나면 우리 하민이 머리 다듬으러 갈 거야.”하민이는 머리를 자르는 것에 딱히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오로지 박은희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들떠 있을 뿐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나씨 가문 본가 대문 앞에서 멈춰 섰다. 하지만 분위기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가볍지 않았고 오히려 무거웠다.그들이 들어왔을 때 박은희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나용민의 모습에 양시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님은요?”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항상 이미지를 신경 쓰던 사람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박은희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보았다. 그녀의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