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깐 출장을 다녀와야 해요. 내일 아침에는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곧 결혼하는데도 여전히 일에만 매달리는구나?”최정숙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도현은 양시은을 바라보며 조용히 설명했다.“황남시 쪽 거래처에서 만나자고 해서 그래. 이미 약속이 잡혀서 미룰 수가 없어.”양시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다녀와. 일찍 갔다가 일찍 돌아오고, 운전 조심해.”“아쉬우면서 아닌 척하는 거 아니야?”나도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아니거든.”양시은은 어이없다는 듯 씩 웃었다.두 사람은 밖으로 나섰다. 나도현은 주변을 재빨리 살피더니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양시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양시은은 난감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짧은 출장이라 이동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나도현이 호텔에 도착해 잠시 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호텔 직원이 와인 두 잔을 들고 서 있었다.“호텔 기념행사 중이라 와인을 손님께 무료로 드리고 있어요. 맛보시겠어요?”“들어와요.”나도현은 직원을 힐끗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기념행사라면서 밖에 홍보물이 하나도 없던데요?”직원은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아직 준비가 덜 돼서요. 천천히 드세요.”나도현은 더 묻지 않고 문을 닫은 뒤 침대에 몸을 뉘었다.한밤중, 문 쪽에서 사각대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순식간에 눈을 떴다. 누군가 키를 사용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기 때문이다.나도현은 재빨리 일어나 불을 켰다. 문가에 멈춰 선 사람의 움직임이 순간 굳었다.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임다혜 씨?”임다혜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약효가 막 오르려는 시점이라 여겼다.그녀는 팔을 늘어뜨려 실크 가운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깊게 파인 슬립 차림에 불같은 몸매를 드러낸 채, 나도현에게 달려들어 그를 끌어안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도현 씨, 지금 많이
나도현의 태도는 극도로 냉담했다.“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다고 생각하는데요.”임다혜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 그의 옷을 잡아당기는 동시에 자기 옷까지 마구 찢어대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가 어찌 나도현의 상대가 되겠는가? 나도현은 그녀를 소파에 밀어 넘어뜨린 뒤 문을 열었다.밖에는 경찰들이 도착해 있었다. 동시에 기자들도 사전에 연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준비된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었다.“이 여자가 무단으로 들어왔어요.”나도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었다.“게다가 제 방 카드까지 갖고 있었어요. 와인은 호텔 직원이 가져다 준 건데 약물이 있는 것 같으니 조사해서 처리해 줘요.”몇몇 경찰은 이런 상황이 처음이었는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감시 카메라 영상을 확인해 보니 지금까지의 정황은 나도현의 말과 일치했다.기자들 역시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나도현은 차가운 눈길로 그들을 흘겨보았다.“아마 기사 제목까지 정해 두셨겠죠? 유명 변호사, 결혼식 전날 밤 내연녀와 밀회 같은 거요.”기자들은 정곡을 찔린 듯 머리를 긁적이며 서로 눈치만 살폈다.“내일 그런 제목을 보게 되면 전부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겁니다.”나도현이 에이스 변호사로서 얼마나 많은 소송을 이겨 왔는지는 모두가 아는 터였다. 기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설마요, 변호사님. 저희도 직업 윤리는 지킵니다.”“그 외에 뭘 어떻게 쓰든 마음대로 하세요.”나도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주저 없이 자리를 떠났다.그 뒤 밤새 조사가 이뤄졌고, 나도현은 현지의 일을 마무리한 뒤 비행기에 오르려 할 무렵 경찰에게 전화를 받았다.“대략 파악이 끝났습니다. 와인에 최면제 성분이 들어 있었고, 호텔 직원이 매수되어 임다혜 씨에게 방 카드를 넘겼어요. 지금 임다혜 씨는 유치장에 있는데 변호사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네요.”“저는 시간이 없으니 법대로 처리해 줘요. 이후 제가 변호사를 붙여서 고소를 진행할 겁니다.”나도현의 냉정한 응대에 경찰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보였
나도현은 눈앞에 있는 양시은을 보았다.“그리고 줄 게 하나 더 있어.”“뭔데?”나도현이 내민 상자를 열자 안에는 반지가 있었고 그녀는 조금 당황하게 되었다.“지금 껴야 하는 거야? 하지만 이건 내일에...”“일단 먼저 껴봐.”나도현은 오래전부터 그녀를 위해 준비한 반지임을 설명해주었고 다만 그때 그녀가 자신의 곁에 없어서 주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했다.직접 사이즈를 재보고 산 것이 아니었기에 대충 짐작으로 반지를 맞추었고 정말로 그녀의 손가락이 맞는지는 몰랐다.그런 그의 설명을 들은 양시은은 마음이 녹아내릴 것 같았고 나도현이 말한 그때는 아마 그녀가 그를 떠난 그때일 것이다... 그때의 그녀는 이미 그와의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몰래 반지를 준비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그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더는 나도현을 거절할 수 없었고 눈물을 머금은 두 눈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목소리도 어느새 눈물에 젖어 있었다.“그럼 당신이 끼워줘. 그래 줄 거지?”“당연하지.”나도현은 대답한 후 양시은의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했고 이내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워주었다.은빛을 내는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빛을 냈다. 반지를 낀 손을 드니 자신의 인생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 같았고 반지에 이니셜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반지에는 대문자로 ‘N&Y'라고 적혀 있었다. 글자를 빤히 보는 양시은의 모습에 나도현이 살풋 웃으며 말했다.“우리의 성에서 하나씩 따온 거야. 마음에 들어?”양시은은 나직하게 대답했다.“응, 마음에 들어. 너무 마음에 들어.”두 사람은 밝은 달빛 아래서 서로 끌어안았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양시은은 일찍 일어났다.“오늘은 시은 씨가 새신부 되는 날이니까 제가 화장해 드릴게요. 오늘 하루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이쁜 신부가 되어드리게 하죠!”온지유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양시은은 입꼬리를 올렸다.“저도 지유 씨에게 부탁하려고 했었어요.”온지유는 그녀의 제일 친한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나도현이 지금 그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손을 꽉 잡으며 주위에서 들리는 축복 소리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온지유도 뒤에서 대기하던 차에 올라탔다. 몇 대의 차가 긴 줄을 이루며 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전부 비싼 자동차였기에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그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은 후 개인 SNS에 올렸다.[어느 집 도련님이 결혼하는 걸까. 이렇게 호화로운 차로 신부를 데리고 가다니. 너무 부럽네.]사진은 어느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고 각종 언론과 플랫폼에 오르게 되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기사를 보며 그저 평범한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라 그 유명한 나진 그룹의 대표님인 나도현이 결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어떤 네티즌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서로만을 기다리다가 오늘에야 결실을 보게 되었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인터넷엔 전부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축복과 감탄으로 가득했지만 핸드폰을 볼 시간이 없었던 양시은은 당연히 이 사실을 몰랐다.결혼식장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그저 십 분이 좀 넘는 거리였지만 그녀는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나도현은 그녀가 긴장감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채곤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긴장하지 않아도 돼.”양시은은 심호흡했다.“고마워. 덕분에 좀 나아진 것 같아.”빈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나도현이 손을 꼭 잡아주고 있으니 그녀는 전처럼 긴장하지 않게 되었다.결혼식장에 도착하고 나서도 나도현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차에서 내렸다. 하민이는 별이와 함께 예쁘게 차려입고 꽃바구니를 들었다.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이들은 꽃바구니에 있던 꽃을 작은 손으로 뿌려댔다. 꽃잎들이 바닥에 살랑살랑 떨어졌다. 하민이는 어제 여이현에게 배운 대로 말했다.“두 분 축하드려요. 백년해로하시고 자식도 순풍순풍 낳기를 바랄게요.”키가 허리에도 오지 않는 아이들이 귀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으니 양시은은
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이는 것 외엔 다른 대답을 할 생각이 없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고 은빛의 반지가 그녀의 손가락에 딱 맞게 들어갔다. 다음 순서로 그녀가 나도현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고 그제야 자신의 반지와 그의 반지에 새겨진 이니셜 디자인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의 반지에 새겨진 이니셜은 외관에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었지만 나도현의 반지엔 안에 새겨져 있었고 똑같이 도드라진 디자인이었다. 반지를 손가락에 끼면 그 이니셜이 살을 누르게 될 것이고 아픈 것은 물론이고 불편할 것이다.양시은은 그의 반지를 보곤 한참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나도현이 그녀의 정신을 돌아오게 해주었다.“미안해. 잠깐 다른 생각 해버렸어.”양시은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뒤 작게 사과했다. 나도현은 그녀의 팔을 잡아 자신의 팔에 팔짱 끼게 한 뒤 하객들에게 인사를 했다.“응. 알고 있었어.”그래서 다시 집중할 수 있게 살짝 친 것이었다. 다행히 몇 초간 넋 놓고 있었던 것이었던지라 대부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지만 유독 눈치 빠른 사람이 있었다.양채은은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창문 쪽은 사각지대였던지라 대부분 사람들이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고 사람들의 축복을 받고 있는 나도현과 양시은도 그러했다.그녀는 양시은이 잠깐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 유일한 사람이었다.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양채은은 양시은의 표정에서 놀라움을 보아냈다. 왜냐하면 그녀보다 자신의 언니를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다만 양채은은 양시은이 뭘 보고 놀란 것인지 굳이 짐작하지 않았다. 이미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양채은은 나도현이 반지에 이니셜을 새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언니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양채은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아름다운 양시은의 모습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다만 질투 때문에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정말로 부러워서 한 말이었다.그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샴페인 잔
하지만 자신의 동생이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순간 진정해질 수 있었고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도 조금 전처럼 어렵지 않았다.온지유는 양시은과 나도현과 함께 샴페인을 마시다가 제안했다.“두 사람 러브샷 하는 거 어때요? 그렇게 각자 술 마시는 것보단 러브샷 하면서 마시는 게 더 재밌잖아요. 안 그래요?”별이는 입안 가득 음식을 밀어 넣으면서도 온지유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맞아요!”양시은은 못 말린다는 얼굴로 온지유와 별이를 보았다.“별이가 누굴 닮은 건지 이제야 알겠네요.”온지유는 별이를 안아주더니 입가를 닦아주며 눈썹을 꿈틀댔다.“누굴 닮은 건지 이제야 알겠다니요. 전 그냥 두 사람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려는 것뿐이라고요.”물론 양시은은 결국에 온지유의 말대로 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나도현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그럼 이번은 러브샷 하는 거로.”조금 전부터 지금까지 나도현은 술을 아주 많이 마셨다. 그녀의 주량이 몇 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앞으로 내민 술은 그가 전부 마셨다.나도현도 새 술잔을 들었다. 별이는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았고 온지유는 그런 아이의 눈을 가려주었다.“어린이는 보면 안 돼요.”양시은은 나도현과 러브샷 한 뒤 술잔을 내려놓았다. 술이 몸으로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얼굴이 빨개지는 그녀였다. 주위에선 호응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의 얼굴이 더 빨갛게 익어버렸다.역시나 그녀의 주량은 약해도 너무 약했다. 고작 한 잔으로 벌써 정신이 해롱해롱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다만 아직 결혼식은 끝나지 않았고 술잔도 이제야 절반밖에 비우지 못했기에 취기가 오르는 몸으로 버티고 있었다. 물론 나도현의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양시은의 손목을 잡으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만 마셔.”양시은은 조금 더 마셔보려고 했다.“아니야. 아직 괜찮아...”그녀의 말에 나도현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그제야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술
양시은은 순간 감정이 벅차 올라왔고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 양채은을 한참이나 빤히 보았다.그 순간 그녀는 양채은의 이목구비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얼굴이 왜 그래? 혹시 화재 때문에 그런 거야? 아프지는 않았어...?”양채은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딱히 신경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얼굴이 예전과 달라졌을 뿐 목숨을 잃을 뻔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으니까.늘 이렇게 생각했던 양채은이었지만 아프지는 않았냐고 물어보는 양시은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결국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아파. 언니. 나 너무 아팠어.”그녀는 살면서 이렇게 아픈 적은 없었다. 불에 탈 때도 아팠고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을 때도 아팠다. 그 남자가 자신의 몸에 주입한 약 때문에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도, 폭행을 당할 때도 너무도 아팠다.양채은은 말하고 나니 서러움이 밀려왔다.“정말로 너무 아팠어. 매번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또 살아 돌아왔...”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양시은이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그녀를 안고 있는 양시은의 손이 덜덜 떨렸고 천천히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었다.“괜찮아. 다 지나간 일이야. 돌아온 거로 됐어. 이젠 아무도 널 해코지하지 못할 거야.”양채은은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한참 지나서야 웅얼대며 물었다.“언니. 내가 안 미워?”양시은은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언제 널 미워한 적 있어? 넌 쭉 내 동생이었는걸.”두 사람은 한참 앉아 대화를 나누었고 양채은에게 문해미를 찾았다는 소식도 전하면서 시간이 나면 보러 오라고 했다.양채은은 다소 망설여졌다.“지금은 안 될 것 같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거든.”“내가 도와줄 건 없어?”양시은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양시은은
다음 날이 되자 하민이는 양시은을 빤히 보았다. 너무도 빤히 보고 있어 양시은은 도저히 그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고 행여나 뭔가를 눈치챈 것이라도 아닐까 입을 열었다.“왜 그렇게 엄마를 빤히 보고 있어? 얼른 먹어. 자꾸 안 먹고 빤히 보고 있으면 지각할 거야.”하민이는 만두를 집어 먹으면서 여전히 그녀를 빤히 보더니 웅얼대며 말했다.“유치원 친구들이 저한테 그랬어요. 엄마랑 아빠 사이가 좋으면 하민이 동생이 생길 거라고요. 엄마, 하민이한테 동생이 생겨요?”아이의 말에 양시은은 하마터면 사레가 들뻔했다.가슴을 두드리며 진정한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순진한 하민이를 슬쩍 째려보았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얼른 아침이나 먹어.”“네.”하민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만약 양시은이 아이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를 전부 알고 있었다면 아마 이렇듯 가볍게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하민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난 그녀는 평소처럼 회사로 출근했다. 그녀를 본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양 비서님, 오늘 왜 회사로 오신 거예요?”기획팀의 직원 장은영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장은영의 눈빛은 꼭 눈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보는 듯했기에 양시은도 어처구니가 없었다.“여긴 회사고 제가 왜 여길 왔겠어요?”장은영은 우물쭈물하더니 이마를 짚었다.“하지만 양 비서님은 대표님과 이미...”장은영의 머릿속은 사실 아주 단순했다. 출근은 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이었고 아무도 출근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평생을 놀고먹고 살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있다면 누가 이렇듯 매일 회사로 출근하겠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말이다.눈치 빠른 양시은은 그녀의 눈빛에서 생각을 읽어내곤 못 말린다는 듯 말했다.“비록 제가 대표님과 결혼하긴 했으나 아직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니잖아요. 전 여전히 은영 씨에게도 익숙한 양 비서인걸요.”그녀는 그들이 자신을 예전처럼 대해주길 바랐다.양시은의 뜻을 이해한 장은영은 조금 미안한 듯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양시
기자회견이 끝난 후 양시은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때 나도현이 다가와 옆에 앉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는 격려의 표시였다.양시은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나 때문에 얼마나 투자했어?”“이건 스폰서의 권한이라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어. 시은아, 너만 마음먹으면 이건 정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나도현은 진지하게 말했다. 작은 일에 얽매여 괜한 고민하지 말고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는 뜻이었다.양시은은 곧 결심을 내린 듯 말했다.“알았어. 널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야.”“내가 아닌 너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해.”나도현은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양시은의 마음속에서 감동이 여울처럼 퍼졌다.이튿날 바로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변호사의 토론 대회는 심플했다. 한 문제로 찬성팀과 반대팀이 나뉘어 각자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었다.옳고 그름은 나뉘지 않는다. 주최 측은 일부러 애매한 문제를 선정해서 참가자의 언변을 시험했다.양시은은 운 좋게도 작은 로펌을 상대로 뽑았다. 무대로 올라간 다음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무대에 서 있으니, 자신감으로 넘쳐나던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그녀는 당당한 눈빛으로 무대에 서 있었다. 눈빛 속에는 법조인의 꿈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이 무대는 그녀의 전쟁터자, 그녀의 가치를 다시 증명하는 곳이다.“시작합니다!”MC의 말에 따라 토론이 시작되었다.상대는 경력이 풍부한 것이 분명했다. 논리 정연한 말은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마구 쏟아져나왔다.양시은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의 입장을 지켰고 실제 사례까지 들며 논리를 완성시켰다. 모든 말이 승리를 향한 발걸음이 되었다.무대 아래에서 지켜보던 관객과 심사위원은 보잘것없는 줄 알았던 신입 변호사인 그녀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그녀의 실력은 단순히 법에 대한 이해를 넘어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는 힘을 발산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갈망과 공정함
“네!”양시은은 들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었다.그러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가 그녀의 앞에 놓인 명패를 힐끗 보더니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나진 그룹 로펌도 이제 영 시원찮네. 아무나 막 끌어들이는 모양이야.”양시은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자신이 이 업계에서 출신이나 지위가 마땅히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경멸에 기죽을 생각은 없었다.그녀는 대형 로펌 변호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누구나 출발점이 있는 거잖아요. 중요한 건 얼마나 더 멀리 갈 수 있느냐가 아니겠어요?”그 변호사는 그녀의 침착한 태도와 단호한 눈빛에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분수를 모르는 신참 변호사를 비웃는 표정이었다.“어찌 됐든 올해 상은 다른 로펌에 가겠네요.”“글쎄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다른 몇몇 변호사들이 다가와 말했다.“뭐요?”대형 로펌 변호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오랜만이네요, 권변.”무리 중 리더 격인 변호사가 손을 내밀어 자연스럽게 악수했다.권 변호사는 그들을 슥 훑어보더니 상황을 이해한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나진은 투자자로서 스폰서 자격으로 두 팀을 내보낼 수 있는 거였네요. 수상 확률을 높이려고 한 일인 것 같은데 왜 이름도 없는 신인 변호사한테 기회를 줬어요. 이렇게 큰 무대를 연습장으로 삼다니, 나변도 참 통이 커요.”“과찬이십니다. 근데 뭐가 됐든 나 변호사님의 계획이 아닐까요.”리더 변호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저는 이해가 안 되는데요. 나진이 스폰서가 돼서 은변도 좋았죠? 근데 이 좋은 기회를 신인한테 넘기다니...”권 변호사는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 한번 크게 웃어넘긴 뒤 손을 내저었다.“그냥 헛소리였어요. 못 들은 걸로 해요.”은 변호사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답했다.“나 변호사님도 다 생각이 있으십니다. 부러우면 따라 해보시죠.”권 변호사는 더 말해봤자 손해만 볼 것 같았는지 형식적
최정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러자.”다행히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아서 약만 잘 바르면 되었다.집에 돌아온 후, 옆에서 놀고 있는 하민을 보고 있자니 최정숙은 조금씩 기운을 되찾았다.퇴근하고 돌아온 나도현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은아, 잠깐 서재로 와. 얘기할 게 있어.”양시은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대답했다.“응.”서재에 들어가자 나도현은 서류 가방에서 한 장의 문서를 꺼내 그녀 앞에 놓았다.“이거 한번 봐봐.”양시은은 서류를 받아 들고 빠르게 훑어봤다.“이게 뭐야?”“이 프로그램 들어본 적 있지? 변호사들이 참가하는 토론 대회인데 대상을 타면 업계 내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얻을 수 있어.”나도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들어봤지.”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대회에 참가하는 것도 까다롭다고 했잖아. 전에 자주 봤었어.”그녀는 꿈을 포기한 다음에도 변호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종종 생각하고는 했다. 끊임없이 이어가는 일상에서 점점 흐릿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눈앞의 서류를 바라보며 그녀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설렘과 함께 불안감도 뒤섞여 있었다.나도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기회가 왔는데 한번 도전해 볼래?”“참가자 자격 요건이 높은 거로 기억하는데 내가... 그걸...”양시은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로펌에 주어진 기회를 내가 가로채면 다른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지 않을까?”“그럴 리는 없어.”나도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아무한테도 피해가 가지 않아. 너만 원하면 네 이름으로 신청할게.”“좋아. 나 할래.”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동안 그녀는 법학 공부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양시은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속의 감동은 말로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기자, 그녀는 며칠 동안 열정적으로 공부하며 밤늦게까지 책을
최정숙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저희한테 잘해주기만 하면 된 거죠. 지난 시간 동안 다른 걸 바라본 적은 없어요.”“사랑이 밥 먹여 줘요?”계은경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결국 집안 좋고 능력 좋은 사람을 찾아야 하는 법이에요. 예를 들어 제 딸처럼요.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서 예의 바르고 외모까지 출중하다죠.”“그래요? 따님을 본 적은 없지만 은경 씨 닮아서 분명히 예쁠 것 같네요.”최정숙이 칭찬하듯 덤덤히 말을 받았다.반대로 계은경은 이 이상 더 노골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최정숙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살짝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막 이어서 얘기하려던 참이었는데, 문밖에서 양시은이 들어오는 게 보여 화제를 뚝 끊고 웃으며 한마디 건넸다.“벌써 돌아왔니?”“도현 씨 로펌에 일이 많아서요.”양시은은 가볍게 대답한 뒤 곧바로 가서 이것저것 챙겼다.그녀가 짐을 들고나오는데 마침 계은경도 따라나왔다.“시은 씨, 시간 좀 있어?”“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양시은이 덤덤히 뒤돌아보았다.계은경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제안했다.“우리 방으로 가서 이야기하자. 방안에 더 널찍하고 좋아.”양시은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나섰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계은경의 태도는 싹 달라졌다. 그녀는 양시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너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며?”양시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그래서요?”“네 시어머니만 아니었어도 넌 내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할 기회가 없었을 거다.”계은경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재벌 특유의 거만한 태도를 드러냈다.“돈 좀 있는 사람들이야 돈만 쓰면 여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지. 근데 끝까지 같이 갈 수 있는 건 결국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뿐이야.”양시은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그 말씀 무슨 뜻이에요?”“좋게 말할 때 물러나라는 뜻이야. 돈이라면 얼마든지 쥐여줄게. 자리만 비워준다면 네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을 받을 수 있을 거야.”계은경은 여전히
한편 양시은은 병원에서 박은희를 간호한 지 며칠이 지났다.박은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예전에는 왜 몰랐지...”양시은은 그녀가 예전의 일을 언급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얼른 웃으며 말을 잘랐다.“어머님,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언급하지 마세요.”“그래. 알겠다.”박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머금은 채 따듯한 죽을 먹었다. 그 따듯함이 그녀의 가슴에도 퍼지는 것 같았고 나날이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나도현은 점심이 되어서야 병실로 오게 되었다. 양시은과 박은희의 화목한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당연하지. 넌 내 며느리고 내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이지.”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지만 박은희가 웃으며 말했다. 양시은은 나도현을 힐끗 보며 미소를 지었다.“어머님 상태는 괜찮으셔. 며칠만 더 입원하면 퇴원할 수 있대.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응, 걱정 안 해.”나도현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그래도 쉬엄쉬엄해.”“박 여사, 오늘 몸 상태는 어때요?”이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두른 여자가 병실 앞에 서서 말을 걸었다. 여자는 바로 박은희가 입원해 있는 병실의 옆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VIP 병동엔 애초에 사람이 많지 않았던지라 요즘 자주 찾아오고 있는 손님이었다.“어머, 엄 여사. 얼른 들어와 앉아요.”박은희는 반갑게 인사했다.“혹시 제가 눈치 없이 찾아온 건 아니죠? 어머, 오늘은 아들이 찾아온 거예요?”옆 병실을 쓰고 있는 엄현숙이 말하면서 들어오더니 나도현을 위아래 훑어보곤 기쁜 얼굴로 말했다.“아들이 참 곱게 자랐네요. 꼭 연예인처럼 어디서 본 것 같네요?”박은희는 아들을 언급하는 엄현숙에 자랑스럽게 대꾸했다.“어느 잡지에서 본 것이겠죠. 우리 아들이 인터뷰를 몇 번이나 했었거든요.”“아, 생각나네요. 그때 그 유명한 엘리트 변호사 맞죠? 이제야 기억이 나네요. 젊은 나이에 모든 걸 다 가졌다니. 정말 보기 드문 인재
온지유는 비록 상심이 컸지만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김혜연과 함께 병원으로 왔다. 이번에도 인명진이 직접 김혜연에게 주의사항을 말해주며 진찰해주었다. 법로는 세상을 떠나기 전 김혜연의 아기를 아주 기대하고 있었다.법로는 온지유는 물론이고 별이와 온하윤도 잘 돌봤기에 온지유는 김혜연을 법로처럼 잘 돌봐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그러나 김혜연은 그녀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지유 씨에겐 돌봐야 할 아이들이 있잖아요. 아직 초기니까 저 혼자 저를 돌볼 수 있어요. 더구나 지유 씨 별장엔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신경 써줄 필요 없어요.”“안 돼요. 전에는 시간이 없어서 소홀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잘 돌봐야 하는 거죠. 전 혜연 씨를 최선을 다해 돌볼 거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말이에요.”법로를 언급하자 김혜연은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애당초 그녀가 신무열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법로가 직접 신무열과 이어질 수 있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갔다.행여나 김혜연이 무료함을 느낄까 봐 온지유는 권다솔도 불러왔다. 권다솔도 임신했던지라 배가 어느 정도 부른 상태였다.“저는 둘째한테 신경을 써줘야 하는 상황이라 혜연 씨한테 관심을 전부 쏟아부을 수 없어요. 그래서 다솔 씨를 부른 거예요. 두 사람 지금 모두 임신 중이잖아요.”제일 중요한 건 그녀가 온하윤을 임신했을 때 여이현이 그녀를 챙겨주고 돌봐주었던지라 여이현에게 돌봐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그렇게 김혜연과 권다솔은 친구가 되었고 셋이서 쇼핑도 하고 게임도 하면서 지냈다. 양시은은 현재 박은희를 간호해야 했기에 불러올 수 없었다. 만약 양시은도 시간이 되었다면 아마 넷이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여이현이 운영하고 있는 회사는 규모가 점점 더 커졌고 배진호의 회사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지선율은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기도 했다. 장다희도 어느새 톱스타가 되었다.다
온지유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법로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더니 이내 몸이 뒤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아, 아버지!”온지유는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쿵.법로는 그대로 모래사장에 쓰러지게 되었고 온지유의 목소리를 들은 신무열과 그들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법로는 힘겹게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기다려. 나 좀 기다려...”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숨이 멎어버렸다. 온지유는 그가 더는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온지유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김혜연도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이현은 온하윤을 안고 있었고 별이는 그동안 법로와 함께 지낸 시간이 많았던지라 이미 법로를 외할아버지로서 아주 좋아하고 있었기에 바로 눈물을 터뜨렸다.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이젠 법로를 보내줄 때가 된 것이다. 법로는 마지막을 바닷가에서 보내고 싶어 했기에 장례식을 바닷가에서 치러주려고 했다. 하지만 온지유는 법로가 그래도 태어난 곳에 묻히는 것이 낫지 않나 생각했다.그러나 신무열은 법로의 의사대로 해주려고 했다.“아버지는 경성에 묻히고 싶어 하셨어. 그러니까 아버지 의사대로 하자. 지유야, 아버지 의사대로 하는 게 너한테도 편할 거야.”“하지만 Y 국이야말로 아버지 고향이잖아요. 게다가 그곳엔 오빠도 있고요. 어머니도... 그곳에 묻혀 있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내뱉은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알지 못했다. 어릴 때 기억이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불완전한 상태였고 여전히 알지 못했다.신무열은 입술을 틀어 문 채 나직하게 말했다.“어머니의 죽음은 아버지에게 엄청난 고통이었어. 이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아버지가 원하셨던 대로 하자.”온지유도 법로가 이렇듯 갑자기 자신의 곁을 떠난 것이 너무도 괴로웠다.장례식은 다음 날에 치러졌다. 장례식장엔 오직 그들
법로는 여이현의 눈빛에서 확신을 얻었다. 그는 여이현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두 눈으로 온지유에게 잘해주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한번 또 한 번 당부했다.그는 살면서 얻은 것도 있었고 잃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자식들이었다. 분명 비흡연자에 술도 입에 대지 않았지만 하늘은 그의 목숨을 거두어가려 했다. 법로는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벌이라고 생각했다.법로와 여이현은 한참 얘기를 나누었다. 여이현은 짜증 내는 법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비록 신무열이 모든 걸 잘 해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당부했다.“앞으로 성질 좀 죽이며 살아. 내 빚은 네가 갚겠다는 마음을 가질 필요도 없고 남은 시간은 지유와 함께 보내고 싶어. Y 국엔 아직 네가 필요하니까 이만 가봐도 돼. 내가 지금 유일하게 바라는 건 네가 나 대신 Y 국을 잘 보살피는 거야. Y 국이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구나.”“혜연이도 좋은 아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싸우는 일이 있게 되어도 네가 먼저 사과해. 물론 싸우는 일이 없으면 더 좋고. 알콩달콩 잘 지내야 해. 유일하게 아쉬운 게 너희들의 아이를 내가 돌봐줄 수 없구나.”“별이의 성장 과정도 더 지켜볼 수도 없고... 게다가 난 하마터면 별이와 지유를 죽일 뻔했잖니. 노석명 쪽은 내가 죽은 후에 깔끔하게 처리하려무나.”법로는 신무열에게 많은 일을 맡겼다. 노석명의 일도 빼놓지 않았고 심지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시간에 대해서도 이미 계획을 세웠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그의 일생이 한 편의 영화처럼 눈앞에서 생생하게 재생되는 것 같았다.“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잖아요. 우리 이제 앞만 보고 살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런 생각 하면 할수록 더 괴로워질 거라고요.”신무열은 법로가 자책하는 것을 더는 바라지 않았다. 행여나 그가 말을 하
비서의 말에 인명진은 침묵했다. 잊지 못한 사람이 확실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한 사람만 존재했다. 온지유, 바로 그의 율이였다.다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온지유를 찾았을 땐 이미 여이현과 결혼한 상태였고 아이도 있었다. 나중에 여이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온지유는 변함없이 여이현을 사랑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온지유의 마음속에 들어 살 수 없었다.온지유만 떠올려도, 그녀가 행복한 모습만 봐도 그는 행복했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이 외로움은 너무도 괴로운 것이었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다만 인명진은 빠르게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드는 부정적인 생각을 지워버렸다.“내가 준 업무는 다 했어요? 아무래도 내가 일을 너무 적게 줬나 봐요. 나한테 이런 관심을 보일 정도면?”비서는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아니요.”인명진은 담담하게 말했다.“가서 할 일이나 하세요. 쓸데없는 것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요.”“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비서는 바로 자리를 옮겼다.며칠 후.김혜연과 신무열의 태아가 성공적으로 잉태되었다. 그 뒤로 모든 건 절차대로 움직였고 김혜연은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와 신무열에게 드디어 아이가 생겼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온지유는 법로를 부축해주고 있었다.“아버지, 좋은 소식도 들려왔으니까 꼭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저랑 오빠의 아이들을 아버지가 돌봐주셔야죠.”온지유는 말을 하고 나니 또 괜스레 눈물을 나올 것 같았다. 법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곁에 있어 주면서 아이들을 돌봐줄 생각이었다. 그녀와 여이현이 편히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쉴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돈도 아끼지 않고 썼다.법로는 심지어 집안의 작은 가구도 고민하지 않고 사주었다. 특히 아이들이 원하는 장난감이 있으면 바로 사주었다. 온지유는 자신과 법로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은 하늘이 조금 원망스러웠다.사실 법로도 하루라도 더 오래 살고 싶었다. 다만 그의 생명은 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