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하는 짐승을 길들이는 법의 모든 챕터: 챕터 601 - 챕터 610

916 챕터

제601화

이성준은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저 바람둥이 아니에요!”본의 아니게 멈춰 선 백아영은 그에게 붙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당황한 나머지 빼내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오히려 힘을 점점 더 세게 주었다.두 사람은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닿을 거리에 마주 보고 서 있었다.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끝없는 심연 같았고, 마치 소용돌이처럼 그녀를 빨아들일 듯싶었다.“오직 한 사람만 평생 바라볼 거예요.”남자의 시선을 마주한 백아영은 또다시 그 주인공이 자신일 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졌다.하지만 이성적으로 이 모든 건 거짓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왜냐하면 진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단지 연기가 너무 감쪽같았기 때문이다.“태윤 씨가 이럴수록 그녀한테 너무 불공평하잖아요.”“누구...?”이성준은 의혹이 가득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마침 물어보려던 찰나, 옆에 있는 서재에서 걸어 나오는 임소미를 발견했다.백아영은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온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뿌리쳤다.이내 당혹감과 억울함, 수치심이 뒤섞인 얼굴로 말했다.“소미 씨, 오해하지 마세요. 아까는 태윤 씨의 맥박을 짚어주느라...”이성준은 그윽한 시선으로 두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의혹이 그제야 풀렸다.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눈빛은 임소미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였다.“누가 함부로 집에 오라고 했지?”임소미는 겁을 먹은 나머지 자칫 무릎까지 꿇을 뻔했다.그녀는 벌벌 떨며 손에 든 USB를 보여주었다.“물건 가지러 왔어요...”비록 한태윤은 아직 완치되지 않았지만, 이성준이 한씨 일가의 뒤치다꺼리를 직접 처리하라고 으름장을 놓은 이상 그는 어쩔 수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일해야만 했다.USB에는 업무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자료가 들어 있으므로 꼭 필요했기에 임소미에게 가려오라고 시켰을 뿐, 운도 지지리 없게 백아영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죄송해요, 지금 바로 갈게요! 다신 오지 않을게요.”임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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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2화

이성준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고, 입을 떼자마자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그래서, 나 좋아하는 거예요?”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백아영은 수치심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이내 눈빛이 흔들리며 차마 똑바로 바라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말까지 더듬거리며 부인했다.“저, 전 단지 태윤 씨가 절 좋아하는 줄 알고...”하지만 정작 말하고 나니 부끄러운 나머지 몸 둘 바를 몰랐다.이성준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고, 낮게 깔린 목소리는 마치 인간을 심연으로 끌어들이는 마법이라도 깃들어 있는 듯 매혹적이었다.“만약 진짜 그렇다면 어떡할래요?”진짜라니?!백아영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결국, 넋을 잃은 채 제 자리에 얼어붙어 멍하니 서 있었다. 대체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너무 놀란 나머지 입까지 살짝 벌어진 그녀를 보자 이성준은 당장이라도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억눌린 욕망은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가 철창살을 부수려고 날뛰는 것처럼 통제하기 힘들었다.하지만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고 굳건히 페이스를 유지했다.그는 일부러 한 발짝 물러서며 미소를 쥐어짜 냈다.“걱정하지 마요, 농담이니까.”어색한 기류가 감돌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잔뜩 긴장하던 백아영도 그제야 안심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실망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일렁이는 파도처럼 퍼져나갔다....저녁이 되자 백아영은 이현무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아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하지만 녀석은 애니메이션 따위 안중에도 없었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백아영을 바라보았다.“엄마, 저랑 집에 돌아가면 안 돼요?”백아영과 이성준이 헤어진 이후로 이현무는 한 번도 고집을 피우거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또한, 그녀에게 집에 돌아가자거나 아빠를 용서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 이성준이 나타난 이후로 녀석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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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3화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누군가 백아영의 방문을 두드렸다.이성준과 성무열이 생활용품을 한아름 챙겨서 잇달아 들어섰다.기능이 거의 겹치는 다양한 생활용품을 보자 백아영은 할 말을 잃었다.“아영아, 내가 산 거 써. 디자인도 예쁘고 실용성도 있어서 저 사람 것보다 훨씬 나아.”성무열이 운을 먼저 뗐고, 이성준이 질세라 비아냥거렸다.“겉보기 좋으면 뭐 해요? 안 그래도 아영 씨가 요즘 피곤해서 잇몸이 붓고 피가 나는데, 특별히 주문 제작한 부드러운 칫솔이 더 좋지 않겠어요?”성무열은 말문이 막혔지만, 굴하지 않고 다른 물건을 추천했다.“아영아, 내가 일부러 핑크 쿠션을 샀는데 마음에 들어? 밤에 껴안고 자면 그렇게 편하대.”이성준이 불쑥 끼어들었다.“바디필로우가 몸에 더 좋아요.”두 사람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거렸고, 방 안의 분위기는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아슬아슬했다.그 모습을 지켜본 백아영은 넋을 잃고 말았다.당시 남원에서 제약 기계를 알아볼 때도 이성준과 성무열은 치열하게 다퉜다.시간이 흘러 이제 와서 똑같은 광경을 다시 한번 목격하자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반쪽 가면을 쓰고 있는 한태윤의 모습이 이성준과 점점 오버랩되면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에 마치 애초에 동일 인물인 것처럼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아영아, 어서 결정해. 누가 사준 용품을 쓸 거야?”성무열의 목소리에 백아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이내 정신이 번쩍 들면서 다시 한태윤을 바라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이성준과 다른 사람이었다.백아영은 저도 모르게 뺨을 톡톡 건드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고작 이성준을 한번 마주쳤다고 이 정도로 흔들릴 줄이야, 훤한 대낮에 환각이 보일 지경이라니.“안 물어봐도 돼요. 무열 씨가 준비한 물건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까.”이성준이 경멸이 가득한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식자재든 냄비든 전부 장식품에 불과하죠. 아영 씨는 요리를 잘 못 해요.”성무열은 발끈하며 되받아쳤다.“당신이 뭔데 아영의 요리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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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4화

어렸을 때는 양부모가 생일을 꼬박꼬박 챙겨주고 선물도 잊지 않았는데, 그때만 해도 제일 행복한 공주가 따로 없었다.하지만 백채영이 돌아온 이후로 양부모는 오로지 백채영의 생일과 선물만 정성껏 준비하고, 정작 그녀의 생일날에는 축하한다는 말조차 사치였다.기쁘게 생일을 지내는 백채영과 달리 그녀는 항상 구석에 서서 마냥 부러워했다.어쩌다 보니 그때부터 생일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염원 같은 존재가 되었다.“연구 시작하면 바빠서 생일 보낼 생각 없어요.”이성준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도와줄 사람 찾아줄게요.”백아영은 고개를 저었다.“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백아영이 거절하자 성무열은 이때다 싶어 웃음을 터뜨리며 비아냥거렸다.“한태윤 씨, 잘 보이려고 하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네요? 생일을 안 보내도 된다고 하니까 괜히 힘 빼지 마세요.”백아영의 두 눈에 담긴 씁쓸함을 이성준이 놓칠 리가 없었다.결국, 그는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교외의 자그마한 전원주택.선우경진이 마당에 놓인 침대식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깜짝 놀라 외쳤다.“의술을 익히고 싶다고요?”이성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선우경진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의학을 배우려면 천부적인 재능도 중요하지만, 어릴 때부터 다져진 기초와 반복적인 실천이 필요하죠. 성준 씨 나이대만 해도... 큼,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고작 며칠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성취를 이룬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거죠.”이성준이 대답했다.“성취는 필요 없고, 도움만 되면 돼요.”선우경진은 절망이 가득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아영이가 얼마나 뛰어난 의술을 가졌는지 알고 있죠? 게다가 이번에는 무려 신약을 연구하는데 잔심부름이라고 할지언정 결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약재 빻는 법을 배우면 되죠.”이성준이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선우경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그제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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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5화

한씨 일가를 밥 먹듯이 드나든 덕분에 백아영은 이미 경비원과 안면을 텄고, 경비원도 두말없이 문을 열고 그녀를 들여보냈다.별장으로 들어서자 2층 안방은 불이 꺼졌지만, 맞은편 방의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그녀의 예상대로 한태윤은 아직 일하고 있었다.정녕 본인이 환자라는 걸 모른단 말인가?이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불이 켜진 방을 향해 걸어갔다.한편, 안방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잠옷 차림의 임소미가 나타났다. 그녀는 마침 목이 마른 한태윤에게 물 떠주러 나가려던 참이었다.그러나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백아영을 발견했다.화들짝 놀란 그녀는 제 자리에 굳어버렸고,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문을 쾅 닫았다.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듯 새하얗게 질렸다.“소미야, 왜 그래?”한태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큰일 났어요.”임소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아영 씨가 왔는데, 약방 쪽으로 가고 있어요.”한태윤이 돌아온 이후로 이성준은 약방에서 가면을 쓰지 않고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아영 씨가 약방에 갔다가 성준 씨를 마주치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한태윤은 온몸의 피가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그때가 되면 신분을 사칭한 일이 탄로되기 마련이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만약 백아영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어떻게든 아영 씨를 속여야 해!”한태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고, 백아영의 발길을 붙잡아 어떻게든 어영부영 넘어가려고 했다.하지만 입구에 도착하는 순간 이미 방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백아영을 발견했다.‘망했다.’결국, 다리가 휘청이더니 벽에 기댔다.약방.안으로 들어서자 코를 찌르는 약 냄새가 진동했고, 창문 옆에 앉은 한태윤은 등을 돌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무언가를 조금씩 빻고 있었다.그녀는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 여태껏 밤새 업무 보고 일 처리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뭐 하는 거예요?”백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갔다.약재를 빻던 이성준이 흠칫 놀라면서 그대로 굳어버렸다.방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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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6화

이내 더는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커져갔다.이성준은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아영 씨가 자꾸 걱정해주면 저 착각할지도 몰라요. 혹시 날...”“아니에요!”백아영은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단지 환자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했을 뿐이에요.”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에 가까운 그녀의 모습에 이성준은 기분이 좋아져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백아영은 뺨이 후끈거릴 정도로 달아올랐다.“이만, 갈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뒤꽁무니를 내뺐다.허둥지둥 도망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성준의 눈에 감정이 소용돌이치면서 더는 억제하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아영 씨도 밤새우지 마요.”백아영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여섯째 날은 백아영의 생일이기도 했다.이른 아침부터 이성준은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백아영은 잠옷 차림에 잠이 덜 깬 눈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긴 왜 왔죠?”“생일 축하해요.”이성준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고, 고작 흔한 말에 불과했지만 마치 첼로 연주곡처럼 감미롭고 듣기 좋았다.생일 축하한다는 걸 대체 몇 년 만에 들어보는가?백아영은 흠칫 놀랐다.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던 상처가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곧이어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 냈다.“생일 보낼 여유가 없어요.”“아직 시간 많아요.”이성준은 주방으로 들어서며 자연스럽게 앞치마를 둘렀다.“어서 옷 갈아입어요. 아침은 제가 만들게요.”“그, 그건 좀...”이성준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예의 차릴 필요 있나요?”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받아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한 한태윤의 모습은 넋을 잃을 정도로 멋있었다.백아영은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하더니 귓불이 점점 달아올랐다.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당연히 예의 차려야 하지 않나? 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옷을 갈아입고 내려온 백아영은 이미 식탁 위에 차려진 먹음직스러운 국수 세 그릇을 발견했다.그녀가 좋아하는 비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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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7화

이성준은 백아영의 옆에 앉아 능숙한 동작으로 약재를 빻기 시작했다.절구가 통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나지막이 울려 퍼진 남자의 목소리는 심장을 간질거리게 했다.“아영 씨 일을 좀 덜어주면 생일 보낼 시간이 생기잖아요.”백아영은 흠칫 놀랐다.그동안 생일을 지내거나 챙겨준 사람이 없었기에 어차피 실망할 걸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태윤 씨의 성의는 정말 고맙고, 또 너무 기쁘지만 연구는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솔직히 큰 도움은 안 되죠. 이만 돌아가 줄래요?”이성준은 단호한 태도로 밀어붙였다.“아직 해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도움이 안 된다고 확신할 수 있죠?”연구실에서는 선우경진마저 불필요한 존재라 문외한인 한태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지난 며칠 동안 급하게 약재 빻는 법을 배웠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백아영이 어쩔 수 없이 설명을 보태려던 찰나, 이성준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방금 빻은 약 가루를 한 꼬집 집어 손바닥에 골고루 펼쳐 놓고는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의사 선생님, 어떠신가요?”고운 가루와 균일한 크기는 그녀가 직접 빻은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백아영은 입이 떡 벌어지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이제 배운지 며칠 되었다고 어떻게 전문가처럼 잘 빻을 수 있죠?”설령 수십 년 된 한의사라고 해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이성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오늘 밤 뭐 할지는 제가 정해야겠네요.”환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자 백아영은 숨이 멎는 듯했다.오늘 밤이라니?생일날에 한태윤과 보낼 줄은 몰랐던 지라 그녀는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밤, slov 레스토랑.통째로 예약한 커다란 레스토랑은 오로지 두 명의 손님밖에 없었고, 조용하고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바이올리니스트의 낭만적인 연주 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백아영은 수저를 내려놓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살짝 지었다.“태윤 씨, 고마워요. 맛있게 잘 먹었어요. 이렇게 멋진 생일은 처음이라 평생 추억으로 간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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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8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백아영은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고, 귓불이 어느샌가 빨갛게 달아올랐다.영화는 로맨틱한 내용으로서 행복한 전개와 달리 비극적인 결말로 끝났다.암에 걸린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일이 없게 하려고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났다. 결국 시간이 흘러 다시 이곳을 찾은 여자 주인공은 덩그러니 남아있는 남자 주인공의 무덤을 발견했다.그제야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여자 주인공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남자 주인공의 무덤 옆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엔딩크래딧이 올라가는 내내 백아영의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이성준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살며시 닦아주며 마치 맹세라도 하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아영 씨는 여자 주인공처럼 슬픈 결말을 맞이하지 않을 거예요.”살아남는다는 가정하에서는 그녀에게 평생을 약속하고, 아니면 죽게 된 이유에 대해 영원히 비밀로 간직할 것이다.눈물에 시야가 가려진 백아영이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형체만 흐릿하게 보였지만, 분위기는 고스란히 느껴졌다.심지어 평소에 마주했을 때보다 더 강렬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마음이 뒤숭숭하다가도 다시 차분해졌다.펑펑 울어서 목까지 잠긴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그녀도 여자 주인공과 같은 결말을 원치 않았고, 어떻게든 한태윤을 치료하리라 결심했다.“하지만 상대방이 죽어야 하는 운명이라면 마지막까지 함께하면서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요.”눈물을 닦아주던 이성준의 손이 멈칫하면서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이내 허스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렇게 되면 아영 씨가 힘들지 않을까요?”시야가 점점 뚜렷해지자 백아영은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에 수도 없이 빨려 들어갈 뻔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영화관이 너무 어두워서인지, 아니면 시야가 여전히 흐려서인지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구분조차 하기 힘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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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9화

이성준은 눈앞의 가녀린 여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한 마리의 날뛰는 맹수처럼 더는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었다.“아영...”그는 나지막이 물었다.“이름만 부르는 게 싫어요?”“아, 아니요...”백아영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지만,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어쨌거나 특정 사람만 부르는 게 호칭이라서 반감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앞에 있는 남자가 부르자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늦었으니까 얼른 쉬어요.”이성준은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내며 목걸이를 걸어주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이대로 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백아영은 혼란스러운 와중에 피부가 까진 남자의 손바닥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귀하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이 그녀를 위해 약재를 빻고, 밤을 새워가며 고생하다니... 게다가 손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그러자 문득 호칭 따위 뭐가 중요하냐는 생각이 들었다.차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걸어가는 내내 백아영의 머릿속은 뒤죽박죽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고,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눈을 감아도 한태윤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싶었다.이제 그녀도 더는 자기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생일이 지난 이후로 이성준은 매일같이 찾아와 백아영 대신 약재를 빻았다. 그녀가 바쁘냐고 물어볼 때마다 항상 아니라고 똑같은 대답만 들려왔다.한태윤과 위정이 이 말을 들었더라면 씩씩거리며 화를 냈을지 모른다.눈 깜짝할 사이에 며칠이 흘러 혈삼은 이미 바닥이 났고, 이성준의 병세도 많이 호전되었다.성무열은 잔뜩 기대하며 말했다.“드디어 끝났네? 아영아, 오늘 밤 현무와 남원에 돌아가도 되겠어!”이 말을 들은 백아영은 눈빛이 흔들리더니 무의식중으로 대답했다.“아직 실험할 게 남아 있어서...”“걱정하지 마. 화물 수송기로 기계를 전부 옮기도록 준비했으니 내일 아침부터 선우 일가에서 다시 연구를 이어갈 수 있을 거야.”말문이 막힌 백아영은 고개를 들어 한태윤을 바라보았다.이성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여느 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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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0화

‘이제 어떡하지?’설마 가짜 한태윤이 한씨 일가를 완벽히 장악하는 동안 진짜 한태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구석에서 불쌍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마냥 지켜봐야 한다는 건가?‘아니야!’그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절대로 용납할 수 없으며, 반드시 한태윤을 구해주리라 다짐했다.우선, 어떻게든 백아영을 다시 불러 들어야 했다.정호는 서둘러 회사로 돌아갔다. 이제 물불 가리지 않고 설령 사내 규정을 어기더라도 백아영의 연락처를 알아내기로 마음먹었다.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줘야만 다시 불러와서 진짜 한태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회사에 도착하는 순간 퇴근했을 직원들이 전부 야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다른 사람이 있는 앞에서 몰래 연락처를 확인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므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초조함이 극에 달하기 직전 누군가 다가와 서류 더미를 안겨주며 말했다.“얼른 도와주지 않고 멍하니 서서 뭐 해요? 대표님께서 오늘 저녁 남원으로 가신다고 하니까 얼른 프로젝트 마감해야 한단 말이에요.”이는 남원 이성그룹과 협력하는 프로젝트로서 얼마 전에 결정한 일이었다.원래는 내일 출발할 계획인데 갑자기 오늘 저녁으로 앞당겨진 것이다.“도련님도 남원에 가신다고요?”정호는 깜짝 놀랐다. 이내 눈살을 찌푸리더니 머리를 빠르게 굴려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저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게요. 남원으로 같이 갈래요.”...이성준이 한태윤의 신분으로 남원에 가기로 한 이상 진짜 한태윤은 어쩔 수 없이 정체를 숨기고 새로 채용한 비서실장인 척 한씨 일가를 총괄하게 되었다.임소미는 가면을 쓴 한태윤을 바라보며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남원에 돌아가고 나서는 성준 씨도 원래 모습으로 아영 씨와 만나면 되잖아요.”한태윤이 대답했다.“그렇게 되면 쫓겨날지도 몰라.”백아영이 탄 헬기가 남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성준의 헬기도 잇달아 착륙했다.위정은 익숙한 도시를 바라보며 연신 감탄했다.“드디어 돌아왔네요! 너무 좋아요. 사장님도 이제 완치할 가능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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