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에서 그 말은 너무나 공허하고 힘없었다. 그녀의 생각과 다르다고? 이유영은 차갑게 웃었다.자리에서 일어선 이유영은 차갑게 말했다. “신경 쓰든 말든 상관없어. 강이한, 네가 감히 또 은별이를 해치거나 나를 해치면 반드시.”그녀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강초한의 가슴은 텅 비어버린 듯했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유영은 말을 이었다. “당신을 산 채로 껍질을 벗길 거야.”그 말을 내뱉고 이유영은 차갑게 돌아서서 나가버렸다.강이한은 등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알았다. 모든 걸 알아버렸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그녀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던 걸까. 결국 그녀는 알아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상황이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그의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무너진 적은 없었다.맞다.이유영을 알게 된 순간부터 강이한은 확신했다. 이유영은 그의 운명이라고, 다시 시작된 인연을 반드시 지켜내겠다고.그런데 지금 왜?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박연준이가 왔을 때 강이한은 여전히 등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제 만족해요?”익숙한 기운을 느끼자 예전처럼 히스테리컬한 반응은 없었다. 이 순간 강이한은 마치 힘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슬프고 무거웠다. 박연준의 말을 듣자 그의 분위기도 순간 무거워졌고 눈빛에는 전에 없던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하지만 이런 복잡함 속에서도 그들 사이에는 수년 만에 처음으로 평온함이 감돌았다. “갔나요?” 결국 박연준이 입을 열어 물었다.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이한의 눈빛이 쏘아보듯 박연준에게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차가운 냉기로 가득했다. “박연준 씨, 그 여자는 연서가 아니에요.” 마침내 오랜 세월이 흘러 강이한은 박연준 앞에서 직접 연서라는 이름을 꺼냈다. 그동안 누구도 감히 강이한과 박연준 사이에서 연서를 언급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조차 금기시된 이름이었다.그 인간
한편으로 이유영은 크리스탈 별장을 나와 곧장 공항으로 갔다. 모든 진실이 밝혀진 이상 여기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벨 소리와 함께 핸드폰에서 여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 독한 여자네. 정말 포기할 수 있어요?” 액정에 뜬 이름은 신지수였다. ‘독하다고? 포기한다고?’ 신지수의 날카로운 물음에 이유영의 심장은 얼어붙는 듯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이유영은 말했다. “전에는 아마도.”그녀의 말은 결국 끝맺지 못했다. 그래. 예전에는 아마도 포기할 수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도 원래부터 이렇게 무정했던 건 아니었다. 대체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이유영은 마음속 답을 알고 있었다. “일단 끊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이유영의 말투는 담담했다.이유영의 냉정한 태도에 전화 속 여자는 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모질게 나오면 나도 껍데기만 남기고 싹 발라먹어 주겠어요.”신지수의 마지막 말에는 섬뜩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무슨 패를 쥐여준 건지 서주에서 감히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던 강이한, 박연준, 여진우까지… 그런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강이한과 엮였다니 믿기 힘들었다.무정하다고? 차갑다고? 강이한이 전에 이유영에게 했던 일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귓가의 휴대폰이 누군가에게 순간 빼앗기자 이유영은 본능적으로 돌아봤다. 박연준이 깊이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연준을 보는 순간 이유영의 차가워진 눈빛은 더욱 서늘하게 변했다. 분명했다. 그녀는 박연준이 쫓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손목에 힘이 느껴졌다. 남자는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너.”이유영은 그런 박연준를 보며 숨이 턱 막혔다. “당신을 서주에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이왕 온 이상 여기 있어.” 박연준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의 말에 속아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만해. 무슨 사실?” 이유영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연서에 관한 서류를 봤을 때 그녀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그 순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단순히 마음이 뒤집힌 게 아니라 더 큰 것은 굴욕감이었다. 그래. 굴욕감이었다. 엔데스 가문이 소은지에게 가한 모욕은 노골적이었다. 그는 소은지에게 왜 이렇게 대하는지 알게 했다. 하지만 강이한과 박연준은? 그녀에게 가한 모욕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전에 강이한과 함께였을 때 한지음이 나타나기 전, 그녀는 줄곧 자신이 강이한을 사랑하고 강이한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다.‘하지만 그 달콤했던 시간 동안 진짜 마음을 준 건 나 혼자였어.강이한은? 연서? 하. 모든 좋았던 기억들 심지어 박연준이 날 위험에서 구해준 순간들조차 다 내 얼굴 때문이었지.’ “결국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박연준 씨.” 이유영은 차갑게 이를 갈며 남자를 노려보았다.그 눈 속의 휘몰아치는 감정을 보고 박연준은 이유영이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에게도 이렇게 대하는데 강이한에게는 얼마나 더하겠는가. “우리 먼저 가자.” 남자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차분하게 이유영에게 제안했다. 본능적으로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이유영은 그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며 그에 대한 반감과 차가움을 드러냈다. 이제는 단순한 접촉마저도 그녀가 싫어하고 있었다.“유영 씨.” 박연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눈앞이 흐릿해졌다.이유영은 차갑게 몸을 돌렸다. 박연준이 손을 뻗었지만 허공을 잡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쫓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가 너무 차가웠다. 정말 너무나 차가웠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한편.이유영은 서주의 일을 알게 되자 이미 파리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모든 것을 알게 된 그녀는 그곳에 단 1초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구나. 강이한과 박연준이 서주를 완전히 뒤집어엎기 전까지 그곳으로 돌아가길 꺼렸던 이유가 지
소은지는 낮은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들고 있었다. 그녀 맞은편에는 엔데스 운빈의 아내이자 엔데스 가문의 넷째 며느리인 송연미가 앉아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여자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있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녀와 소은지가 가족 만찬 이후 매우 친밀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실 문이 닫히는 순간 실내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제 다 알았지?” 송연미는 우아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모든 몸짓에는 품격이 배어났다.하지만 말투는 너무나 차갑고 냉랭했다. 소은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의 말에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지금은 그와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소은지는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어쨌든 송연미와 지현우의 관계는 조만간 누군가 악용할 게 뻔했다. 더군다나 벌써 그들의 관계를 이용해 엔데스 현우를 깎아내리는 자들이 있었다.소은지의 말이 끝나자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잠시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은지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 의외였던 모양이다.‘대체 뭐지?’ 송연미는 점점 더 적대적인 눈빛으로 소은지를 쏘아보았고 소은지 역시 차가운 눈길로 송연미를 응시했다.소은지의 말은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정말 그 사람을 위한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할 텐데.” 그녀의 이지적이고 예리한 모습에 송연미의 눈은 더욱 가라앉았다. 한참 뒤 송연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러는 거지?”소은지가 차갑게 말했다.“어떻게 부르길 바라는 거야? 사모님 아니면 형님?”두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다. 송연미의 눈빛이 흔들렸다. 소은지는 그런 그녀를 보며 더욱 진하게 미소 지었다.이런 똑똑함과 냉철함이라니. 송연미는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질투심까지 불쑥 치밀어 올랐다. 그래 질투였다. 소은지와 지현우는 이젠 정식 부부였다. 송연미는 질투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하는 짓이 쇼라고 해도 소은지를 편하게 둘 순
소은지가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살기가 번뜩였다. 그 눈빛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서늘했다. 송은미가 말도 하기 전에 소은지가 쏘아붙였다. “나와 여섯째 도련님과의 관계가 어떻든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두어야겠어.”여기까지 말한 소은지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송연미를 향한 그녀의 시선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송연미는 마치 심장을 찔린 듯 숨이 막혀왔다. “그게 무슨.?”말을 멈추고 서늘하게 쳐다보는 소은지의 눈빛에 송연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진짜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그의 인생에서 이렇게 독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소은지가 전에 이혼 전문 변호사였고 어떤 이유로든 결혼이 깨지는 건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걸.지금 송은미의 이런 행동은 완전 소은지의 역린을 건드린 꼴이었다.소은지가 송은미를 매섭게 노려보며 또박또박 쏘아붙였다. “내가 여섯째 도련님하고 무슨 사이든 전 지금 일곱째 도련님의 법적 배우자라는 걸 잊지 마라.”법적 배우자란 말에 소은지는 특히 날이 서 있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송은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그녀가 뭐라 하기도 전에 소은지가 날카롭게 덧붙였다. “그리고 잊지 마. 넷째 도련님과 당신 사이의 그 관계를.”무슨 말인가? 바로 어떤 식으로 맺어진 인연이든 지금이 어떤 상황이든 기본적인 도리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건 도덕 강요가 아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때로는 도덕과 양심 앞에서 자신을 통제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다른 누구도 아닌 최소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송은미의 눈에서 폭풍이 휘몰아쳤다.“소은지.” 그 순간 그녀에게서 살벌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지만 소은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잘 생각해 보세요. 당신과 그분은 영원히 불가능한 사이예요.”“그럼 둘사이에 뭔가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생각해?” 소은지가 매서운 어조로
그녀를 바라보는 눈에는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에 엔데스 현우가 결혼하기 전 송연미와 엔데스 운빈의 관계가 얼마나 됐든 한결같이 기다려왔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 오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고 자신은 반드시 그때를 기다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 소은지의 존재와 그녀의 날카롭고 솔직한 말과 눈빛은 그녀에게 깊은 치욕감을 안겨주었다.하지만 지금 소은지의 존재와 그녀의 날카롭고 솔직한 말과 눈빛은 깊은 치욕감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더 이상 엔데스 현우 곁의 단 하나뿐인 존재가 아니었다. 이런 깨달음이 마음에 스며들 때 그 아픔은 참을 수 없었다. “둘의 사이가.”“내가 그 사람과 어떤 사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송연미의 말은 소은지에 의해 단호하게 잘렸다. “나는 그 사람 아내니까.”아내라는 두 글자가 송연미의 신경을 거세게 후려쳤다. 가슴이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나는 날카롭고 다른 하나는 차갑고 무감했다. 한참을 그렇게 대치한 뒤 송연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내라니. 하하.”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소은지는 송연미가 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그녀가 울다니.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밖에서 어수선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순식간에 남자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엔데스 현우였다.송연미는 엔데스 현우를 바라보는 순간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연약하고 가련한 여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소은지는 얼굴에 차가움이 가득했고 두 사람은 완벽한 대조를 이루었다.남자는 이 상황을 보자마자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소은지는 손의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으로 걸어가다 엔데스 현우 옆을 지나치면서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이 시간에 돌아왔으니 점심은 집에서 드시겠죠? 주방에 준비하라고 할게요.”이 말만 던진 채 엔데스 현우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소은지는 바로 그 자리를
엔데스 현우의 이미 찌푸려진 미간이 이제는 더욱 깊게 주름졌다. 눈앞의 가련한 모습을 보며 그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를 돕는다고? 지금 엔데스 가문은 그들 둘의 관계를 매우 미묘하게 보고 있었다. 이런 때 그녀가 소은지와 가까워지는 것은 분명 이런 식으로 그 루머들을 잠재우려는 의도였다.그때 엔데스 현우가 말했다. “돌아가요!” 고작 네 글자였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남자의 이토록 매정한 말에 송연미의 얼굴빛이 순간 굳어졌다.“당신.무슨 말이에요? 돌아가라니? 내가 생각하는 그런 뜻이에요?” 왜 지금 현우 씨가 이렇게 차갑게 구는 거지? 마치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처럼.송연미의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때 엔데스 현우가 말했다. “앞으로 반산월에는 다시는 오지 말아요.”“하지만.” 송연미의 말은 엔데스 현우의 차가운 목소리에 끊겼다. “똑똑한 사람이면 그런 헛소문에 넘어가지 않겠죠.” 그의 냉정한 말에 송연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슬픔과 억울함이 서려 있던 그녀의 눈빛은 히스테리컬한 폭풍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헛소문은 똑똑한 사람들한테서 멈춘다는 건가요? 설마. 소은지 때문이에요?“송연미는 쓴웃음을 지우며 말했다. 그녀가 소은지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엔데스 현우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좀 어이없군요.”송연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순간, 송은지와 엔데스 현우의 눈이 마주쳤다. 깊은 눈 속에는 무언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에게서는 차가운 기운만이 감돌았다.소은지가 부엌 정리를 끝내고 나오니 화실에 있던 엔데스 현우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손에 시가 담배를 든 채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그의 깊은 근심이 더욱 짙어 보였다. 소은지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엔데스현우는 소은지의 기척에 고개를 들고 손을 내밀었다.소은지는 남자의 넓고 두터운 손을 보
하지만 엔데스 현우가 보기에 소은지가 이런 능력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미 그의 예상을 넘어섰다. “대단한데요.” 남자는 자연스레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닿았고 그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 벽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을 느꼈지만 곧 이성을 되찾았다.자신과 엔데스 현우와의 이 접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일이 곧 끝날까요?” 소은지는 엔데스 현우의 품 안에서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조금 더 견뎌야 할 거 같아요.”외부인의 눈에는 지금 이 둘의 모습이 얼마나 완벽하고 조화로워 보일까.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실상은... “네.”생각보다 쉽지 않네.그러고 보니 그날 저녁 만찬에서 엔데스 가문 사람들을 다 봤는데 다들 보통내기가아니었다. 그러니 이 일이 어떻게 간단히 끝나겠어?점심 식탁.지현우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차려졌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소은지는 일할 때만큼은 진짜 제대로였다.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엔데스 현우에 대해 나름대로 파악한 듯 보였다.핸드폰 알림음이 울리자 소은지는 재빨리 확인하고는 엔데스 현우를 보며 말했다. “유영이 왔나 봐요.”엔데스 현우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빛이 순간 굳어지는 것을 소은지는 똑똑히 보았다. 입꼬리를 올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오후에 백산 별장에 갈래요.” “알았어요.” 남자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엔데스 현우는 소은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존중하는 편이었다.점심 식사가 끝나자 엔데스 현우는 자리를 떴다.최근 들어 그는 반산월에 거의 머물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시기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소은지는 비록 그의 행방에 대해 묻지는 않았지만 엔데스 현우와의 호흡은 완벽할 정도로 맞아떨어졌다. 현우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송연미가 왔다.두 사람이 다시 다시 마주 섰다.아침보다 더 냉랭하고 무거운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임소미의 가슴은 비수로 찔린 듯 아팠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끝에 다시 찾은 딸이니,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조금 전, 의사가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이유영 씨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의사의 한마디는 그녀가 실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정말 강이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임소미는 울먹이며 감정을 터뜨렸다.강이한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이 눈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강이한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을 감옥에 넣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유영도 그 끔찍한 화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는 지금껏 이유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딸의 흐릿해진 눈은 매 순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이유영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걸까?“그만하세요, 엄마.”강이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감정은 이제 미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몰랐다.이유영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자식이 상처받을 때 부모가 느끼는 그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바로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다.강이한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유영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더군다나 임소미는...어릴 적부터 이유영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딸이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본 순간 느꼈을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수술하면 안 되겠니?”임소미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다.그래, 수술.이 눈은 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 끔찍한 화재로 인해 이유영의 두 눈은 너무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기본 재활치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오직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엄마, 수술은 저한테도 위험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
온화하고 애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온몸에 모래투성이네. 어디서 놀다 온 거야?”“모래 놀이터요! 엄마도 갈래요?”아이는 보물을 자랑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이유영에게 말했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작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임소미는 이 아이를 정말 애지중지했다.아이가 파리로 돌아온 이후, 백산 별장의 뒷마당은 서서히 아이만의 놀이터로 탈바꿈했다.바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기구들이 이미 뒷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애정을 쏟는 곳은 모래 놀이터였다.“엄마는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시간 나면 꼭 같이 놀아 줄게, 알겠지?”이유영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작은 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멀어지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유영의 가슴속엔 따스한 온기가 서서히 스며들었다.과거에,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강이한에 대한 증오마저도 억누를 수 있었다.그 시절, 둘은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각자의 분노를 표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이한이 월이에게까지 손을 뻗어 그녀를 이온유 구출에 이용하려 했을 때, 이유영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고 이유영의 인내심은 그 끝에 다다랐다.더는 견딜 수 없었다.휴대전화가 진동하자 이유영은 화면을 천천히 확인했다.강이한이었다.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띠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신씨 가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유영은 장혜주에게 전기봉의 행방을 추적하게 했다.이유영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냉정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자초한 일?맞다.이유영에게 있어 강이한이 지금 겪는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었다.“그만해. 서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곳이 아니야.”“..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