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엔데스 현우가 보기에 소은지가 이런 능력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미 그의 예상을 넘어섰다. “대단한데요.” 남자는 자연스레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닿았고 그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 벽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을 느꼈지만 곧 이성을 되찾았다.자신과 엔데스 현우와의 이 접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일이 곧 끝날까요?” 소은지는 엔데스 현우의 품 안에서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조금 더 견뎌야 할 거 같아요.”외부인의 눈에는 지금 이 둘의 모습이 얼마나 완벽하고 조화로워 보일까.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실상은... “네.”생각보다 쉽지 않네.그러고 보니 그날 저녁 만찬에서 엔데스 가문 사람들을 다 봤는데 다들 보통내기가아니었다. 그러니 이 일이 어떻게 간단히 끝나겠어?점심 식탁.지현우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차려졌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소은지는 일할 때만큼은 진짜 제대로였다.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엔데스 현우에 대해 나름대로 파악한 듯 보였다.핸드폰 알림음이 울리자 소은지는 재빨리 확인하고는 엔데스 현우를 보며 말했다. “유영이 왔나 봐요.”엔데스 현우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빛이 순간 굳어지는 것을 소은지는 똑똑히 보았다. 입꼬리를 올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오후에 백산 별장에 갈래요.” “알았어요.” 남자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엔데스 현우는 소은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존중하는 편이었다.점심 식사가 끝나자 엔데스 현우는 자리를 떴다.최근 들어 그는 반산월에 거의 머물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시기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소은지는 비록 그의 행방에 대해 묻지는 않았지만 엔데스 현우와의 호흡은 완벽할 정도로 맞아떨어졌다. 현우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송연미가 왔다.두 사람이 다시 다시 마주 섰다.아침보다 더 냉랭하고 무거운
느낌? 어떤 느낌이란 말인가?송연미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 순간 소은지의 말에 돌이켜보니 부인할 수 없었다. 분명히 뭔가가 달랐다.“당신들.”입술을 움직여 뭔가 말하려 했지만 말이 입가까지 왔다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소은지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놓아주시지?”송연미의 차갑고 창백한 얼굴을 보며 소은지는 그녀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마음이 없었다. 송연미의 머릿속은 완전히 뒤집혀버렸다. 결국 소은지의 손목을 꽉 붙잡고 있던 힘이 조금씩 풀어졌다. “더 이상 배웅하지 않을게.”소은지는 말을 던지고 곧바로 조용히 떠났다. 그 의연한 뒷모습은 사람에게 매우 깔끔하고 단호한 느낌을 주었다.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마치 그녀는 영원히 상처받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시원스럽고 깔끔한 모습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를 붙잡아두고 싶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바로 그것이었다.송연미는 지금 소은지에 대해 바로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데 하물며 남자라면? 그러면 지현우는? 이런 생각이 들자 송은미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계속해서 폭풍에 휘말리고 있었다. 너무나 아프고 너무나 괴로웠으며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무언가가 송연미의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부딪치고 있었다. 어떤 돌파구를 찾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은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30분 후.소은지가 백산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이유영의 문자를 받았다. 이유영은 자신이 반산월 앞에 있다고 했다.예전 같으면 이런 이웃 관계가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30분 후.소은지가 반산월에 들어섰다. 이유영은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돼지 한 마리를 품에 안은 채 무심하고 지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런 애완 돼지에 대해 유독 애착을 보이는 것 같았다. 소은지가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
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흔들림은 순식간에 확고한 믿음으로 바뀌었다.“대역은 정말 존재하는구나. 그런데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유영아.” 소은지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연서라...” 이유영이 비웃듯 말했다.연서란 사람 얘기가 나오자 또 와인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소은지는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그 사람은 누구야?” “강이한과 박연준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지.”“그만 마셔.” “거짓말이야. 알아?”이유영이 취기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영아.”이 순간, 그녀는 이해했다. 이유영이 이번 서주 여행에서 알게 된 것들이 무엇인지. 소은지는 와인병을 들려는 이유영의 손목을 잡았다. “이제 그만 마셔.”그동안 그녀가 아무리 잊고 무시하고 냉담하게 굴었다고 해도 그 10년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의 마음속에는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깊은 상처 때문에 그 10년을 잊으려 애썼지만 모든 것이 다시 그녀 앞에 놓이자 이유영은 전례 없는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10년이란 세월 동안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다.그런데 강이한이든 박연준이든 모두 가짜였다니 이유영은 물론이고 소은지마저 그 소식에 크게 놀랐다. “그럼. 그 사람들 눈에는 네가 그저 연서 대역에 불과했던 거야?”거기다 강이한 이란 사람은 너무 속을 알 수 없었다. 소은지가 강이한을 처음 만났을 때 변호사로서의 직감으로 그가 이유영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그런 거였어.그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유영에게 접근했던 거였구나.돌이켜보면 그녀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강이한은 처음부터 이유영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10년이란 세월이 우습지 않아?” 이유영의 말투에는 비통함이 가득했다. 우습다고? 이건 우스운 게 아니라 비극적인 현실이었다.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깊은 구렁텅이 속으로 몰려 십 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 ‘십 년의 감정과 십 년의 모략이라
이유영은 술에 잔뜩 취했다. 소은지는 그날 밤 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유영의 곁을 밤새도록 지켰다. 한밤중에 이유영이 심하게 토하기 시작했다. 우지와 우현은 속이 타들어 갔다. 아가씨 몸이 원래 약한데... “아가씨, 우리 아가씨 좀 말려주세요. 몸도 약하신 분이 술을 마시면 어떻게 해요?” 원래 눈도 안 좋은데 이렇게 마시다가 큰일 날 것 같았다.소은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정리하고 나서 우율과 우선이 내려가고 소은지는 침대에 누운 창백한 얼굴의 이유영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기꾼들, 모두 다 사기꾼이었어.”그녀의 세계에서 강이한과 박연준 그저 사기꾼이란 존재가 아니었나? 하지만 이런 존재가 얼마나 사람을 아프게 하는지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이유영이 거기에 감정을 안 쏟았을 리가 없다. 오히려 너무 많은 감정을 쏟아부었기에 이런 고통을 겪는 순간 이토록 괴로운 것이다. 바로 지금의 이유영은 너무 아팠다.부르르르.소은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꺼내보니 엔데스 현우의 전화였다. 소은지가 전화를 받았다. “네.”“어디예요?' “유영이가 취했어요. 오늘은 여기서 유영이를 돌봐줘야 겠어요.” 소은지는 자연스레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말이 끝나자 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알았어요.” 소은지가 뭔가 더 말하기도 전에 전화 너머의 남자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세상이 조용해졌다. 남은 건 이유영의 작은 잠꼬대뿐이었다. “사기꾼.”“아.”소은지는 한숨을 쉬며 안쓰럽게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졌다. 도대체 얼마나 심한 상처를 받은 거야. 취해서 자면서도 이렇게 괴로워하는 걸까.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사건은 이유영에게는 충격 그 이상이었다.이런 진실이 눈앞에 펼쳐지자, 지난날의 상처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 지난날의 그 일들이 대체 뭐였단 말인가?하룻밤 과음 후 이유영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심한 갈증에 잠에서 깨어나니 물 한 잔이 그
모든 것이 뒤엉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완전히 뒤틀려버렸다.이전엔 상상조차 해본 적 없고, 고려해 본 적도 없던 문제들이 이제 눈앞에 현실로 닥쳐왔다.소은지는 이유영의 질문을 들은 뒤,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너 정말 모르겠어?”“뭘?”“아직도 강이한과 박연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이유영은 당황하며 말했다.“그게...”“아니면 아직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있는 거야?”‘그 사람’은 바로 강이한이었다.소은지가 생각하기엔 그랬다.이유영은 어릴 때부터 늘 차분하고 냉정한 아이였다.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평소와 달랐다.결국, 모든 이유는 결국 강이한에게 있었다.강이한을 만난 뒤로 이유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남자가 이유영에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유영은 가슴이 약간 답답해지기 시작했다.“그런 거 아니야!”이유영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십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다. 단순히 떠나보낸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한지음을 위해 포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이 모든 소식은 이유영에게 너무 갑작스러웠다.소은지는 이유영의 작고 여린 얼굴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너라면, 절대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걸 모조리 빼앗아버리겠어.”소은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태연하게 들렸다.하지만, 이 여유로움은 아마도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의 관계가 그리 복잡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증오로 엮인 관계였다. 엔데스 명우가 조은지를 붙잡았을 때, 조은지에게 안긴 건 증오와 고통뿐이었다.그렇기에 소은지는 복수할 기회를 잡자마자 기꺼이 그 고통을 되갚아주려 했다. 하지만 이유영의 상황은 달랐다.“은지야!”“너와 나는 달라. 강이한... 그 사람은!”지금 이 순간에도, 소은지가 강이한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이유영은 멈칫했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어떤 존재였던 걸까?지금 상
그렇다.이유영은 아이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소은지는 이유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믿기 어렵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내 체념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큰 선물을 강이한에게 줄 수 있다면, 이제 내가 더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그 선물은 신지수와 신씨 가문이었다.서주에서 그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서주 사람들은 물론이고 파리 지역 사람들조차 다 알 정도였다.그러니 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기 전부터 강이한에게 조금의 사정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이유영은 신씨 가문이 강이한에게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그러므로 지금… 이유영이 혼란스러워하는 건 단지 그 십 년의 시간이라는 이유였을 것이다.그게 소은지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그 십 년이 만약 소은지의 인생에 일어났더라면 소은지도 이유영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십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길었다.그렇게 오랜 세월 쌓아온 감정이 결국 거짓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무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유영뿐만 아니라 소은지도 마찬가지다.시간은 이미 침전되었고 그 속에 얽매이다 보면 박연준이든 강이한이든 결국 마주할 것은 더 거센 파도일 뿐이었다.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이유영의 평온함을 더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결국 그들 손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었다.“도대체 신씨 가문에 뭘 준 거야?”소은지는 호기심에 이유영에게 물었다. 이유영이 도대체 신씨 가문에게 뭘 주었는지 너무 궁금했다.강이한이 어떤 사람인지 소은지는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지금껏 신씨 가문과 얽혀 있는 일은 피해 왔었다. 그리고 그의 성격상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었다.그래서 소은지는 더욱 궁금해졌다.도대체 신씨 가문에 뭘 줬길래 강이한이
벤츠 옆에 서 있던 배천명이 깊이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소은지는 배천명의 공손한 태도에 잠시 멍하니 말을 잇지 못했다.엔데스 명우가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이야.“일곱째 사모님...”“비켜.”소은지는 차갑게 두 글자를 뱉었다.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힐끗 바라보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자신의 차로 향했다.차 문을 열려던 순간, 배천명이 공손하게 다가와 차 문을 닫아주었다. 그의 행동은 오히려 소은지의 화를 돋웠다.“여섯째 도련님께서 이미 한 시간째 기다리고 계십니다.”배천명의 목소리는 공손하면서도 냉정했다.한 시간? 소은지는 속으로 혀를 찼다. 현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젯밤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두 알게 됐을 터였다.결국, 소은지는 체념한 듯 엔데스 명우의 차에 올랐다.겉보기에도 웅장했던 차량 내부는 기대 이상으로 널찍하고 화려했다.차에 올라탄 순간, 소은지는 목덜미에 닿는 강한 힘을 느꼈다. 곧이어 소은지의 시야가 휘청거리더니 뒷좌석에 강하게 눌렸다.남성 특유의 날카롭고 위협적인 기운이 소은지를 완전히 에워쌌다. 소은지는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으로 엔데스 명우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잔혹함을 마주하며 소은지의 입가에는 도발적인 미소가 떠올랐다.“여섯째 도련님, 이게 무슨 짓이지? 얼마나 바람둥이인지 파리 사람들한테 더 확실히 각인시키고 싶은 거야?”“소은지.”엔데스 명우는 이를 악물며 무겁게 소은지의 이름을 불렀다.소은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응수했다.“난 다른 여자들과 달라. 잘 생각해.”“어떻게 다르다는 거지?”평소도 차갑던 엔데스 명우의 기운은 소은지의 말을 들은 뒤 더욱 서늘해졌다.“난 네... 제수씨야.”엔데스 명우의 머릿속에 ‘쾅’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폭발할 듯 피가 서린 눈빛으로 소은지를 노려보았다.그 말은 엔데스 명우의 신경을 강하게 건드렸다.“너... 현우랑 잤어?”그의 목소리는
이번 일로 인해 엔터스 회장님이 엔데스 명우를 혐오하게 되더라도 소은지 또한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간신히 얻어낸 기회마저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이 남자의 차가운 위협에도 소은지는 여전히 태연하고 당당했다. 소은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전혀 상관없어!”“...”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뻔뻔한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내가 왜 이렇게까지 살아가는지 알아? 잘살아 보겠다고? 우스운 소리 하지 마.”그랬다.‘잘살아 본다’는 말은 소은지의 세계에서는 그저 우스운 농담일 뿐이었다.소은지는 느릿하게 손톱을 살피며 남자의 날카로운 얼굴선을 손끝으로 천천히 훑었다.“예전에 말하지 않은 건 내 실수였어.”“...”“엔데스 명우, 넌 내 인생에서 너무 많은 걸 망가뜨렸어! 네 곁에 있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네가 있는 한, 난 한순간도 평온할 수 없어. 내가 죽는다 해도 네 가죽 한 겹은 벗기고 갈 거야!”소은지의 말이 이어질수록 명우의 눈빛은 점점 얼음처럼 차가워졌다.남자의 손아귀는 점점 강해졌고 소은지는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소은지는 목이 조여오는 고통 속에서도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당장 날 죽여봐. 장담하건대, 내일이면 넌 파리에서 쫓겨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지금은 엔터스 가문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파리를 떠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남자의 손에 더 강한 힘이 실렸고 눈빛은 더욱 잔혹해졌다.소은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도발적인 웃음이 가득했고 그 도발은 처음 조은지를 곁에 둔 순간부터 계속되어 왔다.무엇이 소은지를 이렇게 끈질기고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를 길들이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어떤 방법을 써도 무용지물이었다. 소은지가 질식으로 정신을 잃어가던 순간, 명우는 소은지를 세게 밀어냈다.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임소미의 가슴은 비수로 찔린 듯 아팠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끝에 다시 찾은 딸이니,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조금 전, 의사가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이유영 씨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의사의 한마디는 그녀가 실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정말 강이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임소미는 울먹이며 감정을 터뜨렸다.강이한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이 눈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강이한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을 감옥에 넣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유영도 그 끔찍한 화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는 지금껏 이유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딸의 흐릿해진 눈은 매 순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이유영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걸까?“그만하세요, 엄마.”강이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감정은 이제 미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몰랐다.이유영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자식이 상처받을 때 부모가 느끼는 그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바로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다.강이한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유영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더군다나 임소미는...어릴 적부터 이유영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딸이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본 순간 느꼈을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수술하면 안 되겠니?”임소미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다.그래, 수술.이 눈은 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 끔찍한 화재로 인해 이유영의 두 눈은 너무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기본 재활치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오직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엄마, 수술은 저한테도 위험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
온화하고 애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온몸에 모래투성이네. 어디서 놀다 온 거야?”“모래 놀이터요! 엄마도 갈래요?”아이는 보물을 자랑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이유영에게 말했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작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임소미는 이 아이를 정말 애지중지했다.아이가 파리로 돌아온 이후, 백산 별장의 뒷마당은 서서히 아이만의 놀이터로 탈바꿈했다.바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기구들이 이미 뒷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애정을 쏟는 곳은 모래 놀이터였다.“엄마는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시간 나면 꼭 같이 놀아 줄게, 알겠지?”이유영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작은 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멀어지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유영의 가슴속엔 따스한 온기가 서서히 스며들었다.과거에,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강이한에 대한 증오마저도 억누를 수 있었다.그 시절, 둘은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각자의 분노를 표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이한이 월이에게까지 손을 뻗어 그녀를 이온유 구출에 이용하려 했을 때, 이유영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고 이유영의 인내심은 그 끝에 다다랐다.더는 견딜 수 없었다.휴대전화가 진동하자 이유영은 화면을 천천히 확인했다.강이한이었다.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띠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신씨 가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유영은 장혜주에게 전기봉의 행방을 추적하게 했다.이유영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냉정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자초한 일?맞다.이유영에게 있어 강이한이 지금 겪는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었다.“그만해. 서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곳이 아니야.”“..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