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래도 괜찮아. 마지막 순간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테니까.”“넌 정말 잔인한 여자야!”명우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차 있었다.이것이 바로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소은지의 모습이었다. 더없이 잔인한 여자였다. 과거엔 설선비에게, 그리고 지금은 설유나에게...“그래, 나 잔인해.”소은지가 담담히 인정했다.그렇다면 엔데스 명우는 어떤가? 엔터스 가문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누리며 자랐고 가문의 권력을 가지지 않아도 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스스로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 건지 알 리가 없었다.그가 망쳐버린 건 단순히 누군가의 사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은지가 잃어버린 건 자신이 온 마음을 쏟아 쟁취해낸 그녀의 삶 그 자체였다.“그러니까 앞으로 조심해. 알겠어?”소은지가 가볍게 경고했다.“꺼져!”“...”소은지는 차분한 표정으로 명우를 바라보더니 옷을 단정히 여미고 차에서 내리려 했다. 내리기 직전,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돌아보며 말했다.“설유나를 잘 숨겨.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조차 내가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엔데스 명우의 눈빛은 폭풍이 일었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차에서 내려 사라졌다.좁은 차 안에 차가운 기운이 짙게 드리워졌다. 소은지... 좋아.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소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배천명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소은지는 옷의 주름을 정리하며 배천명에게 위태로운 미소를 던졌다.그리고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은 마치 불태우려는 듯 강렬했다.차 안.배천명은 잠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여섯째 도련님.”“설유나는 어때?”엔데스 명우는 설유나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소은지의 말처럼 엔데스 명우는 어쩔 수 없이 설유나를 파리 밖으로 내보내 숨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사람이 바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배천명은 불안한 눈길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음울하게 빛나며 더없이 어두웠다.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며 권수미의 말을 모두 들은 것이 분명했다.“여섯째 도련님!”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얼음처럼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그는 손에 담배를 물고 연달아 깊은 연기를 내뿜었다. 설유나의 상태는 이미 위험한 상태에 다다랐지만, 소은지를 제외하고는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상황은 이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소은지는 차를 몰아 반산월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엔데스 현우의 차는 넓은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다. 소은지는 차 문을 힘차게 닫고 밖으로 내려섰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엔데스 현우가 잠이 덜 깬 듯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소은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얼굴에 드리웠던 표정을 조금 거둬들이며 말했다.“왔어요?”“네.”“아침은 먹었어요?”“아직이에요.”소은지는 고개를 흔들며 엔데스 현우 쪽으로 걸어갔다.자연스레 현우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집사들은 서둘러 소은지 앞에 식기를 차려냈다. 풍성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를 바라보던 소은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자신이 없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이미 습관적으로 소은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엔데스 현우는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현우가 아무리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를 풍겨도 소은지는 그에게 겁을 내지 않았다. 엔데스 명우와는 달랐다.2년간 엔데스 명우와 대립하며 소은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연스럽게 그를 향한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은지는 단 한 번도 엔데스 명우 앞에서 그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았다.그래서 매번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보며 이를 갈아도 결국 실패로 끝나곤 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미워하는 만큼 마찬가지로 엔데스 명우도 소은지를 증오하고 있는 게 아닐까?“설유나는 어때요?”남자가 무심하게 물었다.소은지는
“네, 유영이가 전한 바로는 그래요.”“...”그렇다면 지금 이유영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과거에는 알 수 없던 진실이 눈앞에 명확히 드러난 지금, 그 혼란스러움이 어찌 가슴을 뒤흔들지 않을 수 있을까? 소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강이한과 백연준, 이유영에게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그 10년 동안 소은지는 늘 궁금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왜 그의 곁에 있을 때 이유영은 늘 그렇게 힘들어 보였는지.당시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상황을 이제야 모두 알게 되었을 때, 소은지의 마음 또한 고통스러웠다.강이한은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10년이라는 세월은 단지 한 사람만을 위해 흘러간 게 아니었을 거야.”현우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어조로 답했다.“아니라고요?”“그러기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에요.”만약 단지 대체품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면 그 긴 세월 동안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소은지는 아마 지금과 다른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다.강이한은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상처 줬고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잘해줬지만, 이유영과 결혼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그렇다.정말로 사랑했다면 어떻게든 이유영과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 몇 년간 파리에 머물렀던 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박연준은 결혼을 강행하려 하지 않았다.백연준은 이유영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모든 의미가 변했다.이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무 의미도 없었다.단지 이유영을 대체품으로 여겼기에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일 수 있었다. 그는 이유영이 연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유영과 결혼하려하지 않은 것이었다.“맞아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죠. 그동안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강이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영이한테 상처를 줄 수 있었던 거예요.”한지음을 위해서, 한
월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얌전한 아이였다.임소미는 월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안의 보물인 월이는 집안 사람들과도 무척 친하게 지냈고 말투까지 귀엽기 그지없어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아침 식사 후.여진우는 이유영을 서재로 데려갔다.두 사람 사이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앞으로 무슨 계획이야?”여진우가 입을 열었다.계획. 그 한마디에 이유영은 고요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이유영은 눈앞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유영의 마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변화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이유영의 인식 전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렸기 때문이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이유영이 차분히 여진우의 물음에 답했다.“난 계획이 있어.”이 일은 이유영이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그게 박연준의 일이든, 아니면 강이한의 일이든.여진우의 얼굴에 순간 심각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유영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오빠.”“응?”“오빠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강이한은 예전에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박연준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정씨 집안으로 돌아오고 여진우는 또다시 한번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강이한도 좋은 사람이 못 된다고.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두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고 뒤에 이렇게 거대한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10년... 그 오랜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치밀한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여진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한 여자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나도 몰랐어.”여진우는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사실, 모두가 서주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서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만났었다면 박연준과 강이한의 정체는 의심받았을 거고 두 사람에 대한 이유영의 믿음 또한 계속 유
전기봉.지금은 아주 중요한 때다.‘전기봉’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 이유영의 눈빛에 살벌한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그 차가움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듯 날카로웠고 그 서늘한 기운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전기봉.서주에 있을 때, 이유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박연준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이유영이 박연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기봉이 박연준의 손에 있었다면 지금쯤 강이한을 상대로 이미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서주에 머물렀던 그 시간 동안, 박연준은 강이한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이는 전기봉이 아직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전기봉은 결정적인 인물이 분명했다. 이유영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모든 것이 뒤엉켜 버렸다.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서주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유영은 지금 백산 별장에 머물고 있었지만, 결코 한가롭게 있을 수가 없었다.특히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문서의 절반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더욱 그랬다.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뿐만 아니라 엔데스 가문의 다른 몇몇 주요 인물들, 예를 들어 엔데스 운빈조차도 강이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아직 전기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박연준은 전기봉을 찾는 와중에도 강이한과 엔데스 가문을 예의주시해야 했다.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대체 무엇을 줬길래 강이한 곁에 있기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이한은 문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신씨 가문까지 경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주 전체가 떠들썩했다.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곧 강이한과 결혼할 거라고.크리스탈 별장의 서재.신시욱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전기봉을 찾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찾더라도...”신시욱은 말을 차마 끝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 의미를 충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강이한은 이유영이 전기봉을 찾아낸 후 자신이나 박연준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이유영은 자신과 박연준에게 끝없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나가봐!”강이한의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 문제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박연준과 자신의 사이에 어떻든 간에, 이제 이유영은 더 이상 둘 중 누구도 믿지 않았다.신시욱이 나갔다.서재에 홀로 남겨진 강이한은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 갑 넘게 태웠지만 마음속 불안과 짜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이유영...”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상처가 묻어 있었다.이유영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가슴속 공허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유영이 남긴 모든 말은 이미 충분히 명확했다.이유영은 말했다.지난 생 마지막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설령 한지음이 모든 대가를 치렀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해도 이유영에게는 여전히 용서란 존재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전혀 주저 없이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과거에 자신이 이유영에게 준 상처만큼 지금의 이유영은 잔인했다. 이 또한 당연했다.잔인함...사실 따지고 보면 이유영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 강이현 역시 과거 이유영에게 품었던 증오 이상을 느꼈으니까.하지만 적어도 이유영의 눈엔 잔인함으로 비췄다.그러나 이유영이 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 이유영은 무슨 말을 들어도 더는 믿지 않을 것이었다.이유영은 이제 강이현을 자신의 세계에서 철저히 끊어내 버렸다.그야말로 냉정하고 단호하게.어두운 서재에서 강이한의 눈에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파리의 상황 역시 심상치 않았다.이유영은 뒤에 정씨 가문이 있었기에, 이유영은 돌아온 후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반면 소은지 쪽은... 엔데스 명우가 다시 반산월
그때 엔데스 명우는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그가 말했던 ‘결혼’이란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소은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은지!”엔데스 명우의 눈빛에는 위험한 기운이 번뜩였다.소은지는 담담히 말했다.“윤아를 구하는 건 내겐 어렵지 않은 일이야.”“조건은?”소은지가 입을 떼려는 순간, 명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소은지는 그 짧은 눈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설유나의 상황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만큼 절박해졌다.소은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탁해 봐.”주변의 공기가 순간 멎어버린 듯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소은지의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배천명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더욱 위험한 기운을 드러냈다.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은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아니고서야, 파리의 엔데스 가문 여섯째 도련님에게 이런 무모한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이건 너무도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 순간,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의 눈빛에는 위험을 넘어선 야수 같은 날카로움이 담겼다.당장이라도 소은지를 산산이 조각낼 기세였다.하지만 소은지에게선 위협의 기색조차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명우를 직시하며 여유롭게 비웃었다.긴 시간이 흘렀다.모두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드디어 명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정말 뻔뻔하군.”“뻔뻔한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지. 여섯째 도련님, 그래서 내 요구를 들어줄 수 있어?”여섯째 도련님의 ‘무릎’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명우가 과거에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떠올리면 무릎을 꿇는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물론 소은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소은지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설유나가 그의 마음속에서 아무리 소중한 존재라 해도 무릎을 꿇는 일만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이곳 파리에서 엔데스 명우가 그런 굴욕을 당한다는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
파리의 혼란과는 달리 용성시는 번화한 도시였다. 만가등불이 밝게 빛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 이유영은 물었다.“여기는 어디야?”“용성시.”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용성시이라는 곳을 들어본 적이 있지만 청하시와 너무 멀어서 여행을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용성시의 날씨는 우천시와 완전히 달랐다. 겨울이었지만 날씨가 매우 좋았다.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이유영은 따뜻한 기운을 느꼈고 뒤섞인 꽃향기를 맡았다.용성시는 유명한 꽃 도시였다.이곳에서는 많은 희귀한 꽃과 식물이 생산되었다. 용성시의 기후는 식물이 자라기에 매우 적합했다.“냄새 맡았어?”“응.”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의 대답에 박연준은 더욱 씁쓸해졌다.공항 곳곳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놓여 있었다. 아름다웠고 꽃 도시의 매력을 드러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유영은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고 오직 감각과 냄새로만 세상을 느낄 수 있었다.“시력을 되찾고 나면 여기서 함께 시간을 보내자.”“필요 없어.”박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언제나 그와 강이한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 했다.만약 눈이 보였다면 이미 오래전에 그들을 떠났을 것이다.지금 이유영이 그의 곁에 있는 것은 그녀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만약 눈이 보였다면 절대 그의 곁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그 생각을 하자 박연준은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유영도 그 숨 막히는 기운을 느꼈다.결국 그들은 용성시의 모이산에 도착했다.모이산은 박연준 소유의 유명한 숙소였다. 용성시에 여행을 온 사람 중 모이산에 묵을 수 있는 사람은 부유하거나 권력 있는 사람들이었다.이곳은 가격이 매우 비쌌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곳곳에서 나무 향과 꽃향기가 났고 민족적인 특색이 묻어나는 건물은 우지와 우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아가씨, 눈이 보이셨다면 분명 이곳을 좋아하셨을 거예요. 정말 아름다워요!”밤이 되자 모이산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만가등불이 빛나는 모습
겨울의 파리는 날씨가 좋지 않았고 눈이 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작은 눈송이들이 흩날렸고 지금은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였다.“쾅!”소은지는 차에서 내려 차 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여진우의 시선과 마주쳤다.온몸에 전율이 흘렀다.여진우는 소은지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억눌렸던 기억이 떠올랐다가 다시 순식간에 사라졌다.어둑한 눈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익숙함이 느껴졌고 마음속이 세차게 흔들렸다.여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익숙함 때문에 여진우의 시선은 강이한에게 고정되었다.소은지는 여진우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꼈고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아가며 물었다.“유영이는 돌아왔어?”“유영이를 찾는 거야?”여진우의 목소리도 익숙했다.소은지와의 접촉은 많지 않았고 특히 이렇게 어두운 공간에서는 더욱 그랬다. 소은지는 주로 이유영과 함께 있었고 여진우와 마주친 적은 몇 번 없었다.소은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정 선생님을 찾아왔어.”소은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그녀의 눈빛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여진우는 한눈에 소은지가 이 시점에 정국진을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소은지는 지금 현우의 아내였고 엔데스 가문은 중요한 시기에 있었다.그러니 소은지의 목적은 분명했다.“들어갈 필요 없어. 그는 너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소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말을 듣자, 소은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차가운 외모 아래, 누구도 그녀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끓어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지금 소은지에게는 정국진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만나봐야 알지 않을까?”소은지는 말하며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하지만 발을 내딛는 순간, 여진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소은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여진우의 차가운 옆모습을 바라봤다.말할 것도 없이, 키를 제외하고는 여진우는 이유영과 닮았다. 마치 복사본처럼 똑같았다.그 순간 소은지는 생각했다.만약 강이한과 박연준이 서주에서 여진우를 만났다면 이유영은 존재하지 않았을까?혹은 여진우와
서재 안에는 편안함 대신 긴장감이 가득했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정국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다 알아봤어?”“네.”“그 엔데스 가문...”정국진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엔데스 가문의 깊은 속셈은 아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정국진은 박연준이 이유영을 파리로 데려오기 전에 우천시에서 이유영과 결혼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엔데스 가문에서 일이 벌어지는 동안, 이유영 곁에 강이한과 박연준이 있었기에 그들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엔데스 가문은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권력 때문에 결국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송씨 가문은 이미 그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너는 용성시로 가.”정국진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여진우에게 말했다.여진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용성시에 가라고요?”“유영이에게 연락해야 해. 지금은 중요한 때야.”결국 남자는 여자가 분노에 차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유영은 지금 박연준과 강이한에게 분노로 차 있었고 그녀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연서는 이유영의 마지막 선이었다. 연서가 나타나면서 이유영은 자신과 강이한의 감정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깨뜨렸다.그런 깨진 감정 속에서 이유영과 엔데스 명우의 과거를 생각하니 정국진은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네, 알았어요.”여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정말 골칫거리였다. 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분노는 대단했고 서주에서 벌어진 일만 봐도 알 수 있었다.“어찌 됐든 이번에 유영이는 엔데스 가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야 해.”정국진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정국진은 엔데스 가문 때문에 과거에 쓴맛을 본 적이 있었기에 그는 파리에 살면서도 엔데스 가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여하지 않았다.심지어 엔데스 가문과 친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때로는 가족이 어떠한 친분보다 소중했다. 과거에는 가족이 없었기에 고려할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족이 있는 사람은 고려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정국진은 임소미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은 정말...”정국진은 지금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비록 말투는 단호했지만 여린 마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사실 그들은 강이한이 이유영의 눈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수술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강이한이 나선 것이다.여진우가 돌아왔을 때, 정국진과 임소미는 무거운 표정을 서로 마주 보았고 결국 정국진은 임소미에게 말했다.“제가 진우랑 서재에서 얘기할게요.”“그래요.”임소미는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던 임소미의 표정은 여전히 무거웠다. 누구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정국진과 여진우가 위층으로 올라갔고 때마침 월이가 밖에서 놀다가 들어왔다.“할머니.”작은 아이는 부드러운 몸으로 임소미에게 안겼다.임소미는 아이를 꼭 껴안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왜 이렇게 빨리 뛰어다녀. 여자아이는 넘어져서 흉터가 생기면 안 돼.”흉터라는 말이 나오자 임소미는 이유영의 온몸에 있는 상처들을 떠올렸다. 그 상처들은 모두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남긴 상처였고 그녀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의 증거였다.그렇게 생각하니 임소미는 강이한이 각막 수술에 대해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그래, 그건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빚진 것이다.그들의 관계에서 누가 누구를 이용했든, 감정은 결국 그들만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유영은 항상 강이한을 믿었지만 강이한은 결국 그녀의 믿음을 저버렸다.그래서 그들은 지금 이런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할머니.”“응?”“엄마는 언제 돌아와요?”작은 아이는 임소미를 애처롭게 바라봤다.임소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엄마가 보고 싶어?”“네, 너무 보고 싶어요.”강이한에 대한 감정과 달리 아이는 이유영을 매우 좋아했는데 석 달을 보지 못했으니 너무 보고 싶어 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하늘로 치솟는 순간, 이유영이 박연준에게 물었다.“우리 파리로 돌아가는 거야?”박연준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걱정 마, 널 어디에 넘기려는 건 아니니까.”이유영은 눈살을 찌푸렸다.이 비행기가 파리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유영은 찌푸렸던 미간이 더욱 깊어졌고 불쾌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수술하러 가는 거야.”“...”수술?파리로 돌아온 이후, 이유영은 피부든 눈이든, 끊임없이 수술이라는 단어와 마주해야 했다.그러나 막상 수술이 현실이 되자, 그녀의 마음속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공기는 정적에 휩싸였다.이유영은 손에 들고 있던 빨대 컵을 힘껏 들이켜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있어?”그녀는 각막에 관해 묻고 있었다.어둠 속에서 살아본 사람만이 그 희망이 얼마나 희박한지, 세상에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 시력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깨닫는다.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시 눈을 뜨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까?아버지는 여러 번 이유영에게 수술을 제안했지만 이유영은 매번 거절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특별 대우를 받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고 가장 평범한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다.기다리는 것,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기준이었다.“응.”박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박연준의 목소리에서 묵직한 기운을 감지하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살아 있는 사람의 장기를 이식받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그건 알고 있지?”“알아.”박연준은 이유영의 신분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의 입장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과의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그럼...”이유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고 박연준은 이유영의 텅 비어 있는 눈을 보며 그녀의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박연준은 이유영을 한참
우천시의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들었고 이유영은 몸을 움츠리며 떨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의 작은 몸짓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았다.언제부터 이유영의 작은 변화에도 이렇게 민감해졌을까? 누군가를 깊이 관심하게 되면 다 이렇게 되는 걸까?박연준은 누군가에게 마음이 흔들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그 감정은 예상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웠다.연서를 향했던 감정보다 더 깊고 복잡했다. 분노와 좌절은 전혀 다른 감정이었고 그가 이유영에게 느끼는 것은 오직 좌절과 안타까움뿐이었다.박연준은 목에 두르고 있던 회색 목도리를 풀어 이유영의 목에 감아주었다.그 목도리는 옥색 전통 복장과 어우러져 한층 더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박연준의 온기가 스며들자 이유영이 느끼던 추위도 서서히 사그라졌다.박연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조금은 따뜻해졌어?”“이러지 않아도 돼.”“...”이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예전 같았으면 이유영의 이런 차가운 태도에 상처를 받았겠지만 지금은 이미 익숙해진 듯했다.이건 그와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빚진 것이니 어떤 태도로 그들을 대해도 당연한 일이었다.“지금은 춥지 않은 것 같네.”박연준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청석판 길은 매끈하지 않았고 휠체어를 밀 때마다 돌출된 부분이 울퉁불퉁하게 전해졌다. 마치 공예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돌이었지만 이유영은 불편함을 느꼈다.청석판에서는 특유의 은은한 향이 풍겼다.“여기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 것 같아.”“왜 그렇게 생각해?”“여기가 도심 한가운데잖아? 그런데도 자연의 향기가 가득해.”이유영은 이곳의 향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박연준은 말없이 이유영을 바라보았고 눈빛에는 씁쓸함이 더욱 짙어졌다.냄새에 대한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고 눈이 보이는 사람조차도 쉽게 느낄 수 없는 감각이 있었다.이유영은 어둠 속에서 세상을 특별한 방식으로 인지하고 있었다.“유영아, 더 이상 애쓰지 마. 응?”박연준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났다.이유영이 애써 괜찮은 척할수록
연서가 없었다면 그때 일어났던 모든 일은 그녀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상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연서가 있었기에 모든 것이 달랐다.결국, 그녀는 연서로 인해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 휘말렸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었다.“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든 게 누구인데, 이제 와서 나 자신을 용서하라고?”“...”“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워?”자신을 용서하고 모든 걸 내려놓으라는 건 이유영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그들의 단순한 생각이 너무 우스웠고 증오스러웠다.“...”이미 창백했던 박연준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이유영과 강이한,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용서하고 모든 걸 놓아버리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기다림은 언제나 잔인한 법이었다.박연준은 이유영에게 파리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대신 꼬박 이틀 동안 강이한의 연락만을 기다렸다.하지만 강이한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한참 후에야 박연준은 문자를 받게 되었다.[예약한 병원으로 데려와.]전에 서재에서 박연준과 함께 예약한 병원이었다.결국 이런 결정을 내렸단 말인가?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박연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문기원이 방으로 들어왔고 그가 본 박연준은 검은색 긴 코트에 회색 머플러를 두르고 여전히 깔끔하고 고고한 기품을 풍겼지만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상실감은 감취지지가 않았다.그동안 벌어진 일들이 박연준의 마음에 이토록 많은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선생님.”박연준은 정신을 차리고 문기원을 바라보았다.그의 눈동자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떼었음에도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박연준도 아마 느꼈을 것이다. 그와 이유영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이제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모든 것을 이유영에게 주기로 한 것이다.“기원아.”박연준이 한동안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용성시로 갈 준비해.”“...”용성시로 가다니, 결국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고 만 것인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몰랐다고는 해도, 그래도 이유영의 딸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박연준이 침묵하자 이유영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내뱉었다.“너와 그 사람, 둘 다 내 인생에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야!”이미 숨 막힐 듯한 답답함이 가득한 가슴에 이유영의 말은 더욱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람은 감정에 휩쓸릴 때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된다. 과거 연서 사건으로 분노했던 것처럼 지금은 이유영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었다.“사실 네가 가장 증오해야 할 사람은 나야.”박연준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가장 증오해야 할 사람이 박연준이라고? 그는 자신이 증오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사실 박연준은 강이한과 마찬가지로 증오스러운 존재였다.“날 알프산에 데려갔을 때,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유영아.”“지금 와서 착한 척하며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려고 하네.”이유영의 말에는 냉소가 섞여 있었고 박연준은 그 냉소를 느끼며 가슴이 더욱 아팠다.“넌 그저 한지음을 그 사람 곁에 보냈을 뿐이라고 하며 누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그 사람의 마음의 저울이 결정할 거라고 했어.”답답했던 가슴은 이유영의 말에 더욱 아픔으로 퍼져 나갔다.맞다. 박연준은 한지음을 강이한 곁에 보냈을 뿐이었다. 강이한이 왜 한지음을 이유영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심지어 한지음의 딸을 이유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는지, 박연준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박연준도 이유영도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한지음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었다.“박연준.”“응?”“네가 아버지라면, 과연 누가 네 아이보다 더 소중할까?”박연준은 말이 없었다.누가 자기 자식보다 더 중요할까?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답만 존재했다. 누구도 자기 자식을 능가할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이유영에게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유영은 이미 화가 난 상태였고 그러니 그녀를…“유영아, 너도 한 번쯤은 스스로를 용서해 줘. 응?”“이온유는 아직도 그 사람 곁에
어둠 속에서 박연준은 담배를 연거푸 피웠지만 가슴속 답답함이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에 강이한의 번호가 떠올랐다. 곧 신호음이 울리더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시간이 됐어.”“언제 돌아올 거야?”두 사람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평온했다.참으로 아이러니했다.지난 몇 년 동안,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엔 언제나 칼날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고 두 사람 사이에 평화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모든 것은 연서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이유영 때문에 잠잠해졌다.하지만 그 평온함은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네가 와서 데려가.”박연준의 말이 끝나자, 공기는 순간 얼어붙었고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무겁게 울려 퍼졌다.강이한에게 이유영을 데려가라고? 박연준은 무슨 일을 꾸미는 걸까?“수술은 내가 할게.”박연준은 전화 너머의 강이한에게 말했다.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공기는 다시 정적에 휩싸였고 박연준은 그 말을 하는 데 온 힘을 다 쓴 듯 강이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어둠 속에서 박연준은 차갑고 외로운 기운을 내뿜었다.그는 모든 것을 잘못했다. 단 한 가지, 서주에 대한 인식만은 옳았다.서주는 마치 늪과 같았다. 하지만 그 늪은 결국 그와 강이한을 삼켜버렸고 그는 이유영까지 그 늪으로 끌어들였다.만약 빚을 따진다면… 그와 강이한 중,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은 박연준이었다.만약 그 음모와 계략이 없었다면 이유영과 강이한은 원래대로 행복했을 거지만 결국 박연준이 상황을 이렇게까지 몰아넣은 것이다그날 밤, 누구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아침 식탁에는 이유영을 떨리게 했던 쓴 약이 사라졌다.“내가 먹여줄게.”“싫어.”“유영아, 나에게 그렇게 냉정하지 마.”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연준의 감정은 분명히 이상했지만 어디가 이상한지는 이유영도 알 수 없었다.박연준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유영은 아직 어둠에 익숙하지 않았다.그때 박연준은 이유영을 도와주려고 했고 이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