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이렇게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행동으로만 봤을 때는 괜찮았는데... 애슐리가 서주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그래, 그들은 모두 애슐리가 서주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장혜주가 서주를 나서지 않는다면 이 사건을 알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그 일이 있은 후 애슐리는 분명 서주를 떠났다. 그래서 그들은 애슐리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결혼한 후 서주로 돌아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이번에 장혜주에게 걸릴 줄도 몰랐다.쿵.강이한은 화가 나서 차 문을 내리쳤다. 그의 눈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이유영... 이유영!’그는 이성을 잃었다. 강이한은 일이 이 지경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어쩌면 장혜주가 말한 것처럼 이유영이 서주에 온 후부터 모든 일은 결말을 향해 걷잡을 수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요.”“백남 별장으로 가.”백남 별장은 박연준이 사는 곳이었다....백남 별장.이유영은 눈앞의 박연준을 보면서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녀는 대충 얘기했다.“난 자고 싶어.”이유영은 정말 힘들었다.“유영아.”“응?”“왜 계속 조사하는 거야?”이유영이 눈썹을 움찔거렸다.핸드폰을 보니 아무 연락도 없이 조용했다. 그녀는 박연준을 보면서 일어났다.“가서 전화 좀 하고 올게.”“이유영!”박연준의 말투는 아까보다 더욱 진중해졌다.“...”“조사 안 하면 안 돼?”이유영은 원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박연준이 말을 들으니 더욱 짜증이 났다.그때 핸드폰이 마침 그녀의 손에서 진동했다.이유영은 박연준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전화가 울리는 순간 박연준이 흠칫 굳어버린 것을 발견했다.박연준은 바로 일어나서 이유영 곁으로 오더니 핸드폰 번호도 보지 않고 핸드폰을 빼앗아버렸다.“뭐 하는 거야!”“이 시간은 우리 둘만의 시간이야.”“돌려줘!”이유영이 화를 냈다.‘박연준 미친 거 아니야?’“집사!”박연준이 큰 소리로 집사를 부르자 집사가 나타났다.“네.”“사람을 준
박연준은 집사를 보면서 말했다.“가지. 얼른 준비해.”“박연준.”이유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원래 두통이 있었던 이유영은 머리가 더욱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일단 핸드폰을 이리 줘.”박연준의 모습을 본 이유영은 장혜주가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아까 전화가 장혜주였나...?’문기원이 떠난 후 박연준은 더욱 이상해졌다.이 사건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을 리는 없다. 장혜주는 확실히 실력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순간 이유영은 여진우가 어떤 가시밭길을 걸어서 지금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인지 알게 되었다.여진우 곁의 사람들을 보면 다 알 수 있었다.“알프산에서 돌아오면 줄게.”“너...”이유영은 화가 나서 박연준의 말을 듣고 완전히 무너져버렸다.그녀의 핸드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결국 박연준은 빠르게 이유영을 데리고 헬리콥터에 올라탔다.지면의 불빛들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유영이 말했다.“이렇게 하면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아?”그들이 이렇게 나올수록 이유영은 이 사건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이 사건이 정씨 가문과 연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박연준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난 널 막고 싶지 않아.”“하.”이유영이 차갑게 웃었다.지금 이 상황을 보면서도 막지 않는다고? 어느새 주변은 새카맣게 어두워졌다. 이유영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얼마나 가 있을 건데.”“유영아.”“알프산! 얼마나 가 있을 거냐고.”서주가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박연준은 이유영을 데리고 알프산에 가서 여행을 한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한 달, 어때?”‘한 달?’그건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이유영은 그를 바라보면서 비웃었다.“정말 나랑 알프산에서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을 것 같아?”“가능한지는 시도해보면 알지.”“...”이제는 이유영이 점점 화가 날 정도였다.이유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박연준이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얼굴을 마
“박연준 님이 사모님을 데리고 갔습니다.”아주 진지한 말투였다. 백남 별장으로 오는 길, 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수도 없이 많은 전화를 했다. 하지만 이유영은 한 번도 받지 않았다.그런데 박연준이 데리고 간 것이라니.강이한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장혜주도 똑같은 정보를 얻었다. 그녀도 강이한처럼 돌아오는 길에 이유영에게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지만 결과는 강이한과 똑같았다.강이한의 차 옆을 지나칠 때, 장혜주가 강이한을 보고 물었다.“반응이 과했다니까요. 이유영 씨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세요.”그 말을 마친 후 장혜주는 그대로 걸어 나갔다.강이한과 이시욱은 차에 멍하니 앉아있었다.장혜주는 그들이 걱정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유영의 성격을 생각하면, 서주는 이제 끝장이다.하지만 반응하지 않을 수도 없지 않은가.강이한은 이시욱을 보더니 얘기했다.“장혜주가 쉽지 않은 허들이 되겠어.”그 의미심장한 말에 이시욱이 입을 다물었다. 이시욱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박연준이 이유영을 데리고 갔다.강이한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어디로 갔는지 알아?”박연준은 이런 방식으로 이유영이 그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두 사람이 자기 시야를 벗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위험한 본능이 자꾸만 깨어났다.“숨기고 있습니다.”이시욱이 대답했다. 그 말인즉슨 아무도 박연준이 이유영을 데리고 어디를 간 것인지 모른다는 뜻이다.“...”강이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정말 아무도 모른단 말이야?’...다른 한편.파리에서 유일하게 안온해 보이는 것은 정국진이었다.서주는 혼란스럽지만 정국진은 저번에 서주로 가서 정씨 가문을 완벽하게 떼어내고 왔으니까 말이다.여진우는 로열 글로벌 그룹의 일에 착수하였다.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것은 이유영이다.하지만 감정 때문에 생긴 일은 처리하기 가장 어려운 일이다.지금 임소미와 정국진이 이유영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소월이를 잘 돌보는 것이다.하지만 강이한은 쉬
임소미는 원래도 화가 났는데 정국진의 말을 듣고 강이한이 그런 수법으로 이유영과의 관계를 해결하려고 한다고 생각하자 더더욱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미친 거 아니에요? 강이한 옆에는 신씨 가문과 이온유도 있잖아요!”그랬다. 이온유.이유영의 사람들은 이온유가 이유영의 역린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그런데 이때 강이한이 소월이를 이용해서 이유영을 협박하려고 하다니. 완전히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그만큼 조급한 모양이죠.”정국진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강이한은 확실히 조급했다.이유영은 박연준과 함께 서주에서 사라졌다. 게다가 박연준이 두 사람이 약혼 관계라는 것을 발표했으니 강이한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원래 이유영은 오로지 강이한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지금의 이유영은 그저 이유영이다. 그 누구도 그녀를 이용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없었다.그래서 강이한은 더더욱 조급해졌다.“지금 조급해해서 뭐 한대요? 예전에는 뭐하고 이제 와서 급해 한대요?”“...”“한지음 때는 넘어간다고 해도 이온유 때는요? 유영이가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면서 그런 짓을 하다니.”임소미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예전의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간다고 쳐도, 이온유는? 사람들은 그 점을 가장 이해할 수 없었다.“아이고...”정국진이 한숨을 내쉬었다.“됐어요, 그만 얘기해요.”자기 아내가 아이들 때문에 심란해지는 것을 본 그는 마음이 아팠다.요즘 들어 임소미는 정국진의 보호 아래 걱정 없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아이들 때문에 신경 써야 한다니.“나는 유영이가 영원히 저 자식을 용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남자와 여자는 생각하는 방식이 현저히 다르다. 정국진은 그냥 이 일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임소미는 강이한이 한 짓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두 사람 사이에 소월이가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임소미는 이유영의 엄마로서 강이한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반산월
“당신...”“지금부터 본가에서 나올 때까지, 이 거리에 익숙해지는 겁니다, 알겠어요?”“...”‘이게 무슨 뜻이지? 오늘 밤에 스킨십을 해야 한다는 뜻인가?’그 생각에 소은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왜요?”엔데스 현우는 소은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인 줄 알고 부드럽게 얘기했다.뜨거운 숨이 소은지의 목에 닿았다. 소은지는 그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걱정하지 마요.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요.”“그래요, 믿을게요.”“...”소은지는 또다시 설레었다.아무리 강한 여자라고 해도 이런 남자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되어 어린아이가 되어버리고 만다.소은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바르르 떨었다.두 사람의 사이가 약간 벌어지고 난 후, 소은지는 멍하니 엔데스 현우를 쳐다보았다. 그는 곧장 옆에 있는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코트를 벗고 정장 세트를 맞춰서 입었다.“...”소은지는 코피가 터질 것만 같았다.“밖에서 기다릴게요.”“여기서 기다려요.”“그, 그건...”소은지는 말을 더듬는 사람이 아니었다. 변호사로서 말을 논리적으로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엔데스 현우 앞에서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남자가...’“본가의 사람이 있으니 지금부터 연기해야 해요.”‘연기라니? 무슨 연기?’소은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엔데스 현우는 옷을 다 갈아입었다.그는 천천히 걸어오더니 소은지의 허리를 확 감아 안았다. 소은지는 처음 느껴보는 힘과 접촉에 그대로 굳어버렸다.“가야 해요.”귓가에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그녀의 신경이 곤두섰다.엔데스 현우는 정말 요물이 따로 없었다.사람들은 엔데스 현우와 소은지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순간 놀랐다.모든 여자들이 소은지를 부러워하고 있었다.소은지는 전에 갑자기 이곳의 사모님이 되었다. 게다가 엔데스 명우와 얽히고설킨 사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하지만 소은지는 결국 이곳의 사모님이 되었다. 그
엔데스 현우는 소은지를 보면서 얘기했다.“가문의 연회예요.”‘가문 연회?’“엔데스 가문의 연회는 보통 반년에 한 번 열려요. 그래서 전에 안 데리고 간 거예요.”엔데스 현우의 말투는 아주 부드러웠다. 그리고 전에 데려가지 않은 이유도 설명해주었다.그러자 소은지는 더욱 멍해져서 약간 부자연스럽게 대답했다.“사실 이런 건 얘기하지 않아도 돼요.”“당신은 지금 반산월의 사모님이에요. 엔데스 가문의 사모님이기도 하고요.”“...”소은지는 머리가 핑 도는 것만 같았다. 사모님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그녀는 한 번도 엔데스 가문의 사모님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전에 엔데스 명우의 곁에서 수많은 치욕을 견뎌왔다.가능하다면 엔데스 가문과 연을 끊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전에는 설선비 때문에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의 사이가 아주 복잡했다. 지금은 설유나의 원한까지 더해져 엔데스 명우와는 철저히 원수가 되어버렸다.“내가 주의해야 할 게 있나요?”소은지는 엔데스 현우를 보면서 물었다.“없어요.”‘없, 없다고?’소은지는 그제야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본가에 처음 가는 건데 선물 같은 거 필요 없나요?”“괜찮아요.”‘이것도 괜찮다고?’소은지는 가족이 없었기에 어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웃어른을 뵈러 가는 건데도 괜찮아요?”“네.”소은지는 여전히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준비하려고 해도 늦었다. 손등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당신이 이렇게 긴장할 때가 있군요.”마치 소은지는 영원히 긴장하지 않는 사람처럼 말했다.그녀가 말을 하기 전에 엔데스 현우가 얘기했다.“당신이 변론하는 모습을 봤었어요.”“...”그 말을 들은 소은지는 얼굴을 확 붉혔다. 엔데스 현우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논리가 정연하고 일리가 있는 게, 전혀 긴장해 보이지 않던데요.”“달라요!”소은지는 약간 부자연스럽게 얘기했다.
10년이다.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지만 박연준은... 서주는 기회다.박연준은 본인이 이유영에게 그 사건을 알리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유영에게 완전히 빠졌다는 것을.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저 예전의 그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가.“이온유의 병, 너랑 관련 있는 거야?”이유영이 차갑게 물었다. 박연준이 뭘 해도 이유영은 수그러지지 않을 것이다.“유영아!”“소월이랑 이온유, 그것도 네가 설계한 거야?”“...”“그런 거야?!”박연준은 차마 맞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박연준은 그녀가 뭘 가장 싫어하는지 잘 알았다. 그러기에 이유영과 강이한을 갈라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결국 박연준의 목표는 달성했다.그리고 총명한 이유영은 10년 전의 사건을 생각하면서 박연준을 떠올리게 되었다.“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은 나랑 상관없어. 그때의 난 목표를 이뤘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거든.”“...”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었다.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소우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이유영이 박연준이 소월이가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박연준은 강이한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을 것이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래.”이온유가 차갑게 얘기했다.“이온유는 이미 퇴원했어.”“...”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차가운 시선으로 밖을 내다보았다.“그 애가 네 곁에 있을 때, 행복했지?”박연준은 그 판을 깔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그 말을 들은 박연준은 멈칫했다.이유영과 강이한을 보면서, 박연준은 이유영이 이온유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았다.하긴, 한지음의 딸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박연준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난 그 아이를 본 적도 없어.”“그래?”“나한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거든.”“...”박연준은 아주 교활한 사
파리.엔데스산. 이곳의 모든 산맥은 엔데스 가문의 소유였다.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성채 같은 건축물들이 한눈에 들어왔고, 그 건축물들이 이뤄낸 장대한 풍경은 압도적이었다.소은지는 잠시 넋을 잃었다.여행을 좋아해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한눈에 한 가문의 역사와 문화적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처음이었다.엔데스 가문. 파리에서 백 년 넘게 이어져 온 유서 깊은 가문으로 알려져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녀는 눈 앞에 펼쳐진 이 모든 것들로 그들의 찬란했던 역사를 직접 마주하고 있었다.“가죠.”남자가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아끌며 안쪽으로 이끌었다.소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발걸음이 자꾸만 흔들렸다.만약 엔데스 현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균형을 잃고 넘어질 것만 같았다.평소에는 어디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만만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은…왠지 그의 옆에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남자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지만, 그 속엔 서늘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소은지는 그를 올려다보며 솔직히 말했다. “엔데스 가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엔데스 가문?” 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에 대해 떠올랐다. 최근 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 형제 사이의 긴장감을 통해, 이 가문에서 후계자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외관만 봐도 찬란함이 드러나는 이 집안은 말 그대로 위엄이 넘쳤다. “어떤 생각이 들었는데요?” 남자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소은지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들었던 소문이 있어요.” “말씀해 보시죠.” “듣기로는, 엔데스 가문에서 후계자가 확정되면 나머지 후보자들은 해외로 이주해야 한다고 하던데, 사실이에요?” 엔데스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대답했다. “네, 사실입니다.” 그녀는 침묵했다.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임소미의 가슴은 비수로 찔린 듯 아팠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끝에 다시 찾은 딸이니,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조금 전, 의사가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이유영 씨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의사의 한마디는 그녀가 실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정말 강이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임소미는 울먹이며 감정을 터뜨렸다.강이한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이 눈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강이한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을 감옥에 넣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유영도 그 끔찍한 화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는 지금껏 이유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딸의 흐릿해진 눈은 매 순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이유영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걸까?“그만하세요, 엄마.”강이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감정은 이제 미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몰랐다.이유영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자식이 상처받을 때 부모가 느끼는 그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바로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다.강이한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유영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더군다나 임소미는...어릴 적부터 이유영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딸이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본 순간 느꼈을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수술하면 안 되겠니?”임소미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다.그래, 수술.이 눈은 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 끔찍한 화재로 인해 이유영의 두 눈은 너무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기본 재활치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오직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엄마, 수술은 저한테도 위험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
온화하고 애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온몸에 모래투성이네. 어디서 놀다 온 거야?”“모래 놀이터요! 엄마도 갈래요?”아이는 보물을 자랑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이유영에게 말했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작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임소미는 이 아이를 정말 애지중지했다.아이가 파리로 돌아온 이후, 백산 별장의 뒷마당은 서서히 아이만의 놀이터로 탈바꿈했다.바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기구들이 이미 뒷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애정을 쏟는 곳은 모래 놀이터였다.“엄마는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시간 나면 꼭 같이 놀아 줄게, 알겠지?”이유영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작은 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멀어지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유영의 가슴속엔 따스한 온기가 서서히 스며들었다.과거에,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강이한에 대한 증오마저도 억누를 수 있었다.그 시절, 둘은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각자의 분노를 표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이한이 월이에게까지 손을 뻗어 그녀를 이온유 구출에 이용하려 했을 때, 이유영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고 이유영의 인내심은 그 끝에 다다랐다.더는 견딜 수 없었다.휴대전화가 진동하자 이유영은 화면을 천천히 확인했다.강이한이었다.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띠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신씨 가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유영은 장혜주에게 전기봉의 행방을 추적하게 했다.이유영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냉정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자초한 일?맞다.이유영에게 있어 강이한이 지금 겪는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었다.“그만해. 서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곳이 아니야.”“..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