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데스 현우는 소은지를 보면서 얘기했다.“가문의 연회예요.”‘가문 연회?’“엔데스 가문의 연회는 보통 반년에 한 번 열려요. 그래서 전에 안 데리고 간 거예요.”엔데스 현우의 말투는 아주 부드러웠다. 그리고 전에 데려가지 않은 이유도 설명해주었다.그러자 소은지는 더욱 멍해져서 약간 부자연스럽게 대답했다.“사실 이런 건 얘기하지 않아도 돼요.”“당신은 지금 반산월의 사모님이에요. 엔데스 가문의 사모님이기도 하고요.”“...”소은지는 머리가 핑 도는 것만 같았다. 사모님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그녀는 한 번도 엔데스 가문의 사모님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전에 엔데스 명우의 곁에서 수많은 치욕을 견뎌왔다.가능하다면 엔데스 가문과 연을 끊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전에는 설선비 때문에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의 사이가 아주 복잡했다. 지금은 설유나의 원한까지 더해져 엔데스 명우와는 철저히 원수가 되어버렸다.“내가 주의해야 할 게 있나요?”소은지는 엔데스 현우를 보면서 물었다.“없어요.”‘없, 없다고?’소은지는 그제야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본가에 처음 가는 건데 선물 같은 거 필요 없나요?”“괜찮아요.”‘이것도 괜찮다고?’소은지는 가족이 없었기에 어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웃어른을 뵈러 가는 건데도 괜찮아요?”“네.”소은지는 여전히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준비하려고 해도 늦었다. 손등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당신이 이렇게 긴장할 때가 있군요.”마치 소은지는 영원히 긴장하지 않는 사람처럼 말했다.그녀가 말을 하기 전에 엔데스 현우가 얘기했다.“당신이 변론하는 모습을 봤었어요.”“...”그 말을 들은 소은지는 얼굴을 확 붉혔다. 엔데스 현우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논리가 정연하고 일리가 있는 게, 전혀 긴장해 보이지 않던데요.”“달라요!”소은지는 약간 부자연스럽게 얘기했다.
10년이다.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지만 박연준은... 서주는 기회다.박연준은 본인이 이유영에게 그 사건을 알리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유영에게 완전히 빠졌다는 것을.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저 예전의 그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가.“이온유의 병, 너랑 관련 있는 거야?”이유영이 차갑게 물었다. 박연준이 뭘 해도 이유영은 수그러지지 않을 것이다.“유영아!”“소월이랑 이온유, 그것도 네가 설계한 거야?”“...”“그런 거야?!”박연준은 차마 맞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박연준은 그녀가 뭘 가장 싫어하는지 잘 알았다. 그러기에 이유영과 강이한을 갈라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결국 박연준의 목표는 달성했다.그리고 총명한 이유영은 10년 전의 사건을 생각하면서 박연준을 떠올리게 되었다.“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은 나랑 상관없어. 그때의 난 목표를 이뤘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거든.”“...”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었다.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소우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이유영이 박연준이 소월이가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박연준은 강이한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을 것이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래.”이온유가 차갑게 얘기했다.“이온유는 이미 퇴원했어.”“...”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차가운 시선으로 밖을 내다보았다.“그 애가 네 곁에 있을 때, 행복했지?”박연준은 그 판을 깔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그 말을 들은 박연준은 멈칫했다.이유영과 강이한을 보면서, 박연준은 이유영이 이온유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았다.하긴, 한지음의 딸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박연준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난 그 아이를 본 적도 없어.”“그래?”“나한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거든.”“...”박연준은 아주 교활한 사
파리.엔데스산. 이곳의 모든 산맥은 엔데스 가문의 소유였다.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성채 같은 건축물들이 한눈에 들어왔고, 그 건축물들이 이뤄낸 장대한 풍경은 압도적이었다.소은지는 잠시 넋을 잃었다.여행을 좋아해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한눈에 한 가문의 역사와 문화적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처음이었다.엔데스 가문. 파리에서 백 년 넘게 이어져 온 유서 깊은 가문으로 알려져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녀는 눈 앞에 펼쳐진 이 모든 것들로 그들의 찬란했던 역사를 직접 마주하고 있었다.“가죠.”남자가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아끌며 안쪽으로 이끌었다.소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발걸음이 자꾸만 흔들렸다.만약 엔데스 현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균형을 잃고 넘어질 것만 같았다.평소에는 어디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만만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은…왠지 그의 옆에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남자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지만, 그 속엔 서늘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소은지는 그를 올려다보며 솔직히 말했다. “엔데스 가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엔데스 가문?” 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에 대해 떠올랐다. 최근 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 형제 사이의 긴장감을 통해, 이 가문에서 후계자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외관만 봐도 찬란함이 드러나는 이 집안은 말 그대로 위엄이 넘쳤다. “어떤 생각이 들었는데요?” 남자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소은지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들었던 소문이 있어요.” “말씀해 보시죠.” “듣기로는, 엔데스 가문에서 후계자가 확정되면 나머지 후보자들은 해외로 이주해야 한다고 하던데, 사실이에요?” 엔데스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대답했다. “네, 사실입니다.” 그녀는 침묵했다.
여자가 말을 하며 엔데스 현우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눈으로 소은지를 꼼꼼히 훑었다.이 광경을 본 소은지는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곧게 세웠다."이쪽은 큰형수님이십니다."엔데스 현우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로 소개했다.소은지는 곧바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형수님, 안녕하세요.""흥."여자는 낮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엔 친절함보다 미묘한 불쾌함이 묻어 있었다.여자는 소은지 앞에 멈춰 서서 위아래로 소은지를 살펴보더니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 속에는 다른 의도가 담긴 것처럼 보였다."막내가 당신을 데려올 거라고는 말을 안 했네요. 선물을 준비 못 했으니 이거 받아요.”말이 끝나자마자 여자는 소은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소은지는 놀라서 숨을 쉬지 못했다.여자는 자신의 손목에 있던 팔찌를 소은지의 손목에 끼워 넣었다.팔찌를 끼우는 순간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에 소은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그녀의 작은 반응은 주위의 공기를 한층 묘하게 만들었다."어머, 꽤 예민하네?"여자는 가볍게 웃으며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그녀가 떠난 후에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소은지에게로 쏠려 있었고, 그 시선들은 더 이상한 느낌을 자아냈다.특히 한 사람의 시선이 강렬하게 느껴졌다.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청초하게 생긴 여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그 시선은 소은지가 들어왔을 때부터 있었던 것 같았다.그리고 그 적대감은 방 안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강렬했다.소은지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엔데스 현우와 이 가문의 사람들 간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명백했다.겉으로는 화기애애해 보이는 분위기였지만,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복잡했다.소은지가 이 상황을 보며 느낀 첫인상이었다.시선을 엔데스 현우 쪽으로 돌렸다. 엔데스 현우의 눈빛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위험하게 느껴졌다.그런 모습을 본 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의 여러 남자들은 모두 자리를 비운 듯했고, 방에는 몇몇 여성들과 집사, 그리고 집사들이 배치한 하녀들만 남아 있었다. 하녀는 소은지에게 한 명씩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설명에 따르면 현재 엔데스 가문의 남자들 중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엔데스 명우와 다섯째 엔데스 예준뿐이라고 했다.나머지 형제들은 이미 결혼했으며, 엔데스 가문의 형제는 총 일곱 명이나 된다고 했다.그리고 엔데스 현우는 그들 중 막내였다.또한, 그는 세 명의 누나와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 모두 참석해 있었다."안녕하세요, 소은지 씨. 현우께서 정말 형수님을 잘 숨겨두셨네요. 아버지가 형수님을 데려오라고 했을 때도 끝까지 거절하더니."지금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지?큰일이었다.소은지는 사람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편이었다.예전에 낯선 사람들을 자주 만나던 일을 했던 후유증으로, 세 번 이상 연속으로 보지 않으면 상대방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래서 방금 하녀가 소개해 준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소은지는 당황하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마도 제가 예의에 익숙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그녀의 말투는 적당히 공손하면서도 딱히 나무랄 데 없는 태도였다.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소은지를 견제하던 큰형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막내는 원래 이렇게 세심한 아이죠. 그렇죠? 넷째?”“...”큰형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소은지가 방에 들어올 때부터 유독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던 여성이었다.‘넷째’라고 불린 그녀는 소은지의 시선을 피하며 눈길을 피했다.그때 다른 여성이 소은지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형수님, 큰형수님은 항상 그런 식이세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그리고 곧바로 큰형수를 바라보며 다소 가볍게 말했다."큰형수님도 참! 막내 형수님이 놀랄까 봐 걱정되네요." "그래, 막내 사적인 일에 내가 괜히 말이 많았네."위화영은 마치 사과하는 듯한
“저...” 아홉째 아가씨인 엔데스 란서는 미안한 듯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가보세요.”“그럼 막내 형수님, 돌아가는 길은 기억하시겠어요?”“...”솔직히 말하자면, 아까는 걷느라 정신이 없어서 길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엔데스 란서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까먹으셨군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자신을 부르러 온 하녀를 보며 말했다.“저기, 막내 형수님을 주 정원으로 모시고 가요.”“알겠습니다, 아가씨.”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엔데스 란서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고, 남겨진 하녀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소은지를 향해 말했다.“막내 형수님, 이쪽으로 오시죠.”“고마워요.”“형수님께서 저희에게 감사 인사를 하시다니요.”소은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조금 전, 엔데스 란서와 걷다 보니 꽤 멀리 온 듯했다.정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마치 미로처럼 복잡했다.“저기요.”“네, 형수님.”“정말 사모님께서 아이를 이렇게 많이 낳으셨나요?”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솔직히 말해, 아까 정원에서 하녀가 가족들을 소개할 때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대체 몇 명이야…”이렇게 많은 형제자매가 있는 가족에서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았다.앞서 걷던 하녀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어색하게 대답했다. “형수님께서는 모르셨나 보네요.” “뭐가요?” “여러 형제자매들이 모두 부인의 자녀는 아니에요. 사실...” 소커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하지만 소은지는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걸 이해했다. ‘역시 대가족은 이렇게 복잡할 수밖에 없지.’ 그녀는 속으로 머쓱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그동안 그녀는 엔데스 현우 곁에서 머무르며 주로 엔데스 명우에게 복수할 계획만을 고민했다. 게다가 그녀와 엔데스 현우의 결혼은 본래 거래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런 가문 내부 사정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복잡한 가족 관계에 대
그들은 모두 자유롭고 당당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 이곳의 규칙과 제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유영의 성격은 강이한의 곁에서 서서히 무너져갔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현우 씨는요?”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며 눈썹을 올렸다.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마음에 안 들어도, 끝날 때까지는 있어야 해요.”“아!”소은지는 다음에는 절대로 다시 이곳에 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오늘 저녁이 지나면 그녀는 꼭 엔데스 가문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특히, 현재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지켜보았다.두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너무나도 선명하고, 그들의 존재감은 누구보다도 강렬했다.그들을 지켜보는 엔데스 명우에게서는 적대적인 기운이 감돌았다.저녁 식사 중, 소은지는 드디어 전설 속의 엔데스 가주를 마주하게 되었다.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듯 보였다.이렇게 큰 가문 속에서, 엔데스 현우는 고령인 엔데스 가주의 옆에 앉았고, 소은지는 엔데스 현우의 옆에 앉았다.그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그녀는 분위기가 일순간 어색해짐을 직감했다.식사 중, 엔데스 가주는 소은지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소은지?”“네, 아버님.”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겉으로 보기엔 온화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마치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처럼 깊고 예리했다.한 가문을 이끌어 가는 사람의 기운은 무언의 압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엔데스 가문은 당신을 환영합니다.”“감사합니다, 아버님!”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소은지를 향해 집중되었고, 그들의 눈에는 분명 적대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엔데스 가문에서 여자의 위치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그렇게 큰 가문에서 새로 온 며느리가 가장에게 직접 질문을 받는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이 만찬이 단순한 가정의 식사가 아닌, 사실상 ‘엔데스 현우의 아내’를 맞이하는 자리라는 사실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엔데스 현
반산월로 돌아온 소은지는, 어떻게든 엔데스 현우와의 거래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끝내야겠다고 결심했다.오늘 밤, 그녀는 그 가문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누구든지 이 가문에 얽히지 않으려면, 그 안에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그것은 곧 진흙탕에 빠지는 것이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엔데스 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은지는 마음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며, 그가 자꾸 신경이 쓰여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제가 늪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정말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이 거래를 어떻게든 빨리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 모든 일이 끝난 후에도 그녀는 평온함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이제야 알았어요?”그렇게 말하는 엔데스 현우의 눈빛은 차갑고 무표정했다.소은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차분하게 들리며 이어졌다.“그의 곁에 있으면, 언젠가는 당신도 이 일에 끌려들게 될 겁니다.”소은지의 마음은 다시 한번 요동쳤다.“그렇지만 결국 이 일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당신이에요.”그녀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엔데스 명우가 자신을 진흙탕으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그녀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소은지는 그가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렇지만 이건 소은지가 선택한 길이었고, 결국 또다시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녀는 단연코 엔데스 현우의 곁을 선택할 것이다.절대로 그 남자의 수술대 위로 잡혀가기는 싫었다.“어떻게 된 거예요?”엔데스 현우는 침묵하는 소은지를 미소가 더 깊어졌다.소은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예요.”그녀의 마음은 이미 결정이 난 상태였다.오늘만큼은 그녀도 이 진흙탕의 시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일찍 자요. 저는 잠시 나가
“그때 소군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이를 낳지 말라고 했어.”그때 이유영의 주변 사람들은 이유영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며 설득하려 했다.하지만 아무리 주변에서 말려도 이유영은 끝까지 버텨냈다.“화상이 심했던 부위는 살을 도려내야 했어. 지금 내 몸에 남아 있는 움푹 패인 흉터들은 그때 생긴 상처를 치료하면서 생긴 거야.”“...”“마취를 할 수도 없었어.”마취를 할 수 없었다는 이 말 한마디는 강이한처럼 강인한 사람마저 몸을 떨게 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몸에 남아 있는 흉터들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상처의 넓은 면적을 직접 본 그는 이유영이 겪었을 고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취 없이 그 모든 과정을 견뎌야 했다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사람들이 그러더라. 아이는 여자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는 존재라고. 전엔 그 말이 와닿지 않았는데 월이를 통해 그 뜻을 알게 됐어.”그때 이유영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배 속의 아이를 지키겠다는 결심만큼은 굳건했다.이유영이 마음 깊은 곳에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가늠조차 어려웠다.“아무리 조심해서 약을 써도 내 몸 상태 탓에 결국 월이는 조산하게 됐어.”이유영은 마치 별일 아닌 듯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유영이 겪은 모든 과정이 너무도 무겁고 가혹하게 느껴졌다.“유영아...”강이한은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려 하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목구멍은 점점 더 조여 오는 듯했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알고 있어? 월이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거.”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던 건 착각이었다. 그 순간부터 새로운 고통과 불안이 시작되었다.건강한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하물며 조산아를 키우는 데는 그보다 훨씬
그러나 그 세 글자는 아무것도 메울 수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약을 단숨에 삼켰다.쓰디쓴 약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온몸을 떨리게 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약이 이유영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표정과 떨리는 몸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약을 삼킬 때마다 점점 더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처마 아래 놓인 흔들의자는 이유영이 특히 애착을 가지는 자리였다.강이한이 말했다.“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들어가자.”“대나무 향이 나.”은은하고 차분한 대나무 향기가 이유영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넌 지금 감기에 걸리면 안 돼.”강이한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하고 인내심이 담겨 있었다.“비는 언제쯤 그칠까?”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우천시에 대한 기억은 끝없이 내리는 비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 온 후로 비가 그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날씨 예보에 따르면 다음 주 내내 비가 온대.”“...”참으로 기묘한 날씨였다. 어떻게 이토록 비가 쉴 새 없이 내릴 수 있을까?우천시 사람들은 모두 이 기후에 익숙해졌을지 이유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우지 씨에게 수건 잘 말리라고 전해줘. 아침에 보니 수건에서 냄새가 나더라고.”사실 매일 수건을 잘 말리려 했지만 이곳의 습한 기후는 번번이 우지를 난처하게 했다.우지는 매일 정성을 다해 수건을 세탁하고 말렸지만 밤새 뽀송했던 수건도 아침이면 눅눅해지고 냄새가 배어 있었다.결국 매번 건조기에 넣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온전히 뽀송하지는 않았다.“알겠어.”강이한은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며시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결벽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홍문동에 있었을 때도 이유영은 항상 완벽한 청결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유영아.”“응?”“그 아이가 자라면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 좀 이야기해 줘.”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강이한의 가슴은 미어졌다.“네가 그걸 알 자격이
“기다려야 해!”강이한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강경했다.“...”이유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맴돌며 무겁게 울려 퍼졌다.강이한은 이어 말했다.“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났어. 지금은 우천시에 머무는 게 더 안전해.”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분명했다. 이유영은 이전에 엔데스 명우와 얽혔던 적이 있었고 강이한은 이유영이 다시 위험에 휘말릴까 걱정하고 있었다.지금 정씨 가문은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 어떤 현실이 숨겨져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이런 시점에서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험 속으로 돌려보낼 리 없었다.이유영은 낮게 읊조리듯 물었다.“돌아가셨어?”이유영도 대충 파리 쪽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대체로 그 문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엔데스 가문은 오래전부터 그 문제에 깊이 휘말려 있었고 지금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유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그렇다면 우리 집은...”“네 아버지는 신중한 분이니까 누군가에게 쉽게 휘둘리진 않을 거야.”강이한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지금 이유영이 얼마나 가족을 걱정하고 있는지는 강이한도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잠시 이유영의 얼굴을 살폈다.“그럼, 소은지는?”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이 소은지였다.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와 얽힌 원한뿐만 아니라 엔데스 현우와의 관계에서도 깊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의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지만, 상황은 오히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워질 줄은 몰랐다. 엔데스 가문은 이제 완전히 갈라진 듯했고 그 속에서 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바로 소은지였다.강이한은 미소를 가장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는 정말 모든 사람을 걱정하는구나.”이유영은 언제나 타인에겐 따뜻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무척 냉정했다.“...”이유영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
끝없는 어둠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유영의 마음은 서서히 조여 들었다.이유영을 기다리고 있는 건 길고 막막한 나날들이었다.어둠에 갇힌 사람에게 허락된 일은 너무나도 적었다.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둠을 마주하는 데에는 누구에게나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이유영은 지금 그 말을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이 어둠을 마주할 용기가 자신에게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나를 파리로 돌려보내 줘.”이유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담담히 말했다.강이한의 마음은 이미 어둠에 억눌린 상태였는데 이유영의 요구를 듣고 나니 더욱 숨이 막혀왔다.“유영아...”“염 선생님은 훌륭한 의사잖아. 그런데 약을 먹어도 전혀 좋아지는 기미가 없어.”이유영의 머릿속에는 수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나아질 기미조차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이유영의 말은 그녀의 상황이 얼마나 막막한지 그대로 드러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들으며 눈에 깊은 고통과 상처가 서렸다.“수술... 생각해 본 적 있어?”만약 정말 수술을 하게 된다면...수술이 성공한다면 다행이지만, 실패한다면?눈 수술은 다른 수술과 달랐다. 한 번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염 선생의 도움을 받으면 어쩌면 최소한의 희망은 있었다.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다시 수술을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지금 당장 수술을 하면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이한은 두려웠다. 강이한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유영과 관련된 일이었다.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강이한은 그걸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유영아, 나는 두려워.”강이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무겁게 말했다.그가 두려운 것은 이유영의 수술이 실패로 끝나는 일이었다.만약 수술이 실패한다면 이유영은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강이한은 그 끔찍한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현우는 송연미가 소은지를 괴롭혀 왔다고 믿고 있는 걸까?현우는 틀렸다. 소은지는 현우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소은지는 깊은숨을 고르고 나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송연미와 넷째 도련님의 관계는 이제 정말로 끝난 건가요?”송연미는 이전에 말했다. 넷째 도련님과의 관계는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고. 왜 그랬을까? 단순히 감정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송연미는 이런 방식으로 송씨 가문과 넷째 도련님 사이의 연을 끊으려 했다.분명한 사실은, 송연미는 강압적인 수단으로 넷째 도련님을 완전히 끊어내면서 넷째 도련님을 심각하게 적으로 돌렸다. 송씨 가문과 넷째 도련님의 관계는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 지금 현우가 송씨 가문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결과는 자명했다. 모든 일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 말이다.그러나 상황은 달랐다.지금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는 모든 희망을 회장님의 죽음에 걸었었다.그러나 회장님이 떠난 후, 상황은 더욱 복잡하고 무거워졌다.송연미와 넷째 도련님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현우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그건 그 사람들의 문제예요.”그 사람들의 문제라고? 현우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론 내린 것일까?아니면 과거에 소은지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었던 걸까? 그래서 현우가 송연미와 엔데스 운빈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게 된 걸까?만약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현우가 지금처럼 냉담한 태도를 보일 리가 없었다.소은지는 혼란스러웠다. 현우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그럼, 여섯째 도련님 쪽은 어떻게...”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언급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소은지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엔데스 명우가 소은지에게 남긴 심리적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가 보였다.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소은지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걱정하지 마요. 소은지 씨는 반산월에 잘 머물기만 하면 돼요. 알겠죠?”현우는 소은지에게 더 이상 많은 걸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
하지만 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정말 귀하고도 소중한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소은지는 한 걸음 다가서서 현우의 넥타이를 정성껏 매만졌다. 그녀의 숨은 막히듯 답답했고 가슴은 아팠다. 이런 불편함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저는 여전히 예전의 삶이 더 좋아요.”그때의 삶은 엔데스 명우에게 망가지기 전의 삶이었다.그때의 소은지는 자유로웠고 거침없었다.소은지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이었고 어떠한 방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이 깊은 나락 속에서 이런 절망을 경험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소은지 씨!”“엔데스 가문 자체가 심연과 같은 존재예요. 그리고 이 파리도 제게는 심연과 같아요.”소은지는 단호하게 말했다.소은지가 이렇게까지 파멸에 이른 건 파리 땅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였다.아프냐고?너무 아팠다.숨이 막히냐고?너무도 답답했다. 예전의 소은지는 한 번도 인생에 이렇게까지 기복이 심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소은지는 조심스레 현우의 넥타이를 정리한 뒤 말했다.“유영이의 세계는 이미 너무 흔들리고 있어요. 유영이를 더 힘들게 하지 마세요.”“...”현우는 침묵했고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소은지가 보기에 이유영은 정말 불쌍했다. 이유영은 강이한을 떠나려고 애쓰고 박연준을 떨쳐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하지만, 이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이유영을 얽어맸고 심지어 터무니없는 이유로 이유영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렸다.만약 강이한과 박연준이 없었다면, 이유영도 자신의 커리어를 쌓으며 당당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높은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강이한과 박연준 때문에 이유영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지금은 어둠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이유영이 안타까울 뿐이었다.“소은지 씨!”현우의 목소리가 더욱 단호해졌다. 소은지를 바로 보는 현우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현우가 소은지를 지키는 이유가 이유영 때문이라는 건가?“파리를 떠나고 싶어요.”현우의 표정은 굳어졌고 목소리는
결국 송연미는 사람들에 의해 떠나야 했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송연미의 눈빛은 무거움과 아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에 소은지의 마음도 잠시 흔들리고 말았다.그 순간 소은지는 문득 깨달았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송연미가 차갑고 냉정한 가면 뒤에 감춰 두었던 것이 무엇인지를.억지로 맺어진 인연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것은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닿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바뀔 수 없는 진실이었다.여자의 운명은 때로는 지나치게 가혹하다. 특히 자신의 미래조차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현우는 묵묵히 소은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이혼 합의서를 집어 들었다. 소은지를 놓아주던 현우의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현우가 서류를 찢으려는 찰나, 소은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잠깐만요.”“...”현우는 동작을 멈추고 소은지를 바라보았다. 소은지는 조용히 다가가 서류를 천천히 빼앗으며 말했다.“어차피 서명해야 할 서류잖아요.”“소은지 씨!”“엔데스 가문의 상황이 어떨지는 제가 잘 모르지만, 회장님의 죽음조차 이 싸움의 끝을 맺지 못했다는 걸 보면 일이 간단치 않다는 건 분명해요.”소은지는 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소은지의 가슴은 짓눌린 듯 아려왔다.현우는 소은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당신...”“엔데스 명우가 지금 당신과 맞서고 있는 거잖아요, 맞죠?”그 말이 떨어지자, 현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소은지는 그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방금 송연미가 소은지에게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엔데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야 했다.그리고 소은지는 그로 인해 자유를 완전히 되찾을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엔데스 회장은 끝내 어떤 결론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그렇게 가문은 단번에 분열되었고 문서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버렸다. 전기봉은 행방불명 상태였고 나머지 서류의 절반은 강이한의 손에 있
송연미에게는 더 이상 고귀함도 우아함도 냉정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인내심은 그 순간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지금의 송연미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현우가 돌아왔을 때, 그의 몸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만이 흘렀다. 오늘 장례식에서 벌어진 일이 그 원인이었음은 분명했다.송씨 가문 또한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기에 송연미가 이곳에 나타난 순간 현우의 눈빛은 한층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두 여자의 생각을 단숨에 현실로 끌어냈다.송연미는 고개를 들어 현우를 바라보았다.현우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오더니 탁자 위에 놓인 이혼 합의서를 보자 눈빛이 한층 더 서늘해졌다.송연미의 가슴은 긴장으로 꽉 조여졌고 소은지의 얼굴도 금세 창백해졌다.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송연미를 향해 입을 열었다.“내가 경고했지. 반산월에 오지 말라고.”현우의 말투는 냉혹하기 그지없었다.송연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핏기 없던 송연미의 얼굴은 그의 말에 더욱 하얗게 질려 갔다. 마치 얼어붙은 듯 멍하니 현우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현우는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걸까? 오늘 장례식에서 무슨 일이 터질 것을 예감이라도 했던 걸까?엔데스 가문의 모든 이가 참석했음에도 현우는 소은지를 가지 못하게 했다. 소은지를 보호하기 위해 송연미조차 반산월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 것인가? 모든 것이 변했다.현우는 이제 소은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은지는 현우에게 이토록 중요한 존재란 말인가?송연미는 고개를 들어 현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품에 안긴 소은지를 보며 송연미의 눈에는 깊은 고통과 실망이 서려 있었다.“이봐.”“일곱째 도련님, 무슨 일입니까?”“넷째 사모님을 집으로 바래다줘.”현우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소은지를 더욱 단단히 품에 안았다.그 무심한 행동이 송연미의 가슴을 날카롭게 찌르는 비수처럼 느껴졌다.숨이 멎을 듯 아팠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버렸
엔데스 명우가 어떤 사람인지 파리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소은지는 명우에게 가장 미움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현우와의 관계도 본래부터 경쟁적이었다.이런 상황에서 소은지의 일이 여섯째 도련님과 엮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둘 사이의 갈등은 더욱 격화될 가능성이 컸다.“소은지, 넌 무슨 자격으로 현우에게 보호받고 있는 거야?”송연미는 이성을 잃은 듯 소은지를 향해 소리쳤다.현우는 소은지를 보호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상호 관계가 현우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여섯째 도련님은 원한을 쉽게 잊는 사람이 아니었다.이런 상황 속에서 일은 점점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다.“...”보호한다고? 소은지를? 현우는 대체 왜 소은지를 보호하고 있는지, 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송연미는 몰랐다. 그러나 송연미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두면 안 됐다.“소은지, 제발 부탁이야. 한 번만이라도 내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될까? 나는 이미 그들에게 한 번 해를 입었어. 더 이상 현우까지 그들에게 해를 입게 할 순 없어...”송연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며 온몸이 떨렸다.송연미가 엔데스 운빈과의 결혼에서 받았던 심리적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갑자기, 이 여자가 보여주는 히스테리가 그렇게 미워 보이지만은 않았다.송연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너와 여섯째 도련님 사이의 일은 나는 다 알고 있어. 소은지, 여섯째 도련님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파리에서 멀리 떠나줘, 안 될까?”송연미의 관점에서는 소은지가 현우의 곁에 있으면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송은지가 현우의 곁에 있는 한, 그건 현우에게도 큰 상처가 될 터였다.“내가 떠난다고 해서, 그들 사이의 원한이 사라질 것 같아?”“하지만 네가 현우 곁에 있으면, 여섯째 도련님은 모든 책임을 현우에게 돌릴 거야. 이걸 정말 모른단 말이야? 그들은 이미 중요한 순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