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말을 하며 엔데스 현우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눈으로 소은지를 꼼꼼히 훑었다.이 광경을 본 소은지는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곧게 세웠다."이쪽은 큰형수님이십니다."엔데스 현우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로 소개했다.소은지는 곧바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형수님, 안녕하세요.""흥."여자는 낮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엔 친절함보다 미묘한 불쾌함이 묻어 있었다.여자는 소은지 앞에 멈춰 서서 위아래로 소은지를 살펴보더니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 속에는 다른 의도가 담긴 것처럼 보였다."막내가 당신을 데려올 거라고는 말을 안 했네요. 선물을 준비 못 했으니 이거 받아요.”말이 끝나자마자 여자는 소은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소은지는 놀라서 숨을 쉬지 못했다.여자는 자신의 손목에 있던 팔찌를 소은지의 손목에 끼워 넣었다.팔찌를 끼우는 순간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에 소은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그녀의 작은 반응은 주위의 공기를 한층 묘하게 만들었다."어머, 꽤 예민하네?"여자는 가볍게 웃으며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그녀가 떠난 후에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소은지에게로 쏠려 있었고, 그 시선들은 더 이상한 느낌을 자아냈다.특히 한 사람의 시선이 강렬하게 느껴졌다.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청초하게 생긴 여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그 시선은 소은지가 들어왔을 때부터 있었던 것 같았다.그리고 그 적대감은 방 안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강렬했다.소은지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엔데스 현우와 이 가문의 사람들 간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명백했다.겉으로는 화기애애해 보이는 분위기였지만,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복잡했다.소은지가 이 상황을 보며 느낀 첫인상이었다.시선을 엔데스 현우 쪽으로 돌렸다. 엔데스 현우의 눈빛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위험하게 느껴졌다.그런 모습을 본 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의 여러 남자들은 모두 자리를 비운 듯했고, 방에는 몇몇 여성들과 집사, 그리고 집사들이 배치한 하녀들만 남아 있었다. 하녀는 소은지에게 한 명씩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설명에 따르면 현재 엔데스 가문의 남자들 중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엔데스 명우와 다섯째 엔데스 예준뿐이라고 했다.나머지 형제들은 이미 결혼했으며, 엔데스 가문의 형제는 총 일곱 명이나 된다고 했다.그리고 엔데스 현우는 그들 중 막내였다.또한, 그는 세 명의 누나와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 모두 참석해 있었다."안녕하세요, 소은지 씨. 현우께서 정말 형수님을 잘 숨겨두셨네요. 아버지가 형수님을 데려오라고 했을 때도 끝까지 거절하더니."지금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지?큰일이었다.소은지는 사람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편이었다.예전에 낯선 사람들을 자주 만나던 일을 했던 후유증으로, 세 번 이상 연속으로 보지 않으면 상대방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래서 방금 하녀가 소개해 준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소은지는 당황하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마도 제가 예의에 익숙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그녀의 말투는 적당히 공손하면서도 딱히 나무랄 데 없는 태도였다.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소은지를 견제하던 큰형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막내는 원래 이렇게 세심한 아이죠. 그렇죠? 넷째?”“...”큰형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소은지가 방에 들어올 때부터 유독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던 여성이었다.‘넷째’라고 불린 그녀는 소은지의 시선을 피하며 눈길을 피했다.그때 다른 여성이 소은지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형수님, 큰형수님은 항상 그런 식이세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그리고 곧바로 큰형수를 바라보며 다소 가볍게 말했다."큰형수님도 참! 막내 형수님이 놀랄까 봐 걱정되네요." "그래, 막내 사적인 일에 내가 괜히 말이 많았네."위화영은 마치 사과하는 듯한
“저...” 아홉째 아가씨인 엔데스 란서는 미안한 듯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가보세요.”“그럼 막내 형수님, 돌아가는 길은 기억하시겠어요?”“...”솔직히 말하자면, 아까는 걷느라 정신이 없어서 길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엔데스 란서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까먹으셨군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자신을 부르러 온 하녀를 보며 말했다.“저기, 막내 형수님을 주 정원으로 모시고 가요.”“알겠습니다, 아가씨.”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엔데스 란서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고, 남겨진 하녀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소은지를 향해 말했다.“막내 형수님, 이쪽으로 오시죠.”“고마워요.”“형수님께서 저희에게 감사 인사를 하시다니요.”소은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조금 전, 엔데스 란서와 걷다 보니 꽤 멀리 온 듯했다.정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마치 미로처럼 복잡했다.“저기요.”“네, 형수님.”“정말 사모님께서 아이를 이렇게 많이 낳으셨나요?”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솔직히 말해, 아까 정원에서 하녀가 가족들을 소개할 때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대체 몇 명이야…”이렇게 많은 형제자매가 있는 가족에서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았다.앞서 걷던 하녀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어색하게 대답했다. “형수님께서는 모르셨나 보네요.” “뭐가요?” “여러 형제자매들이 모두 부인의 자녀는 아니에요. 사실...” 소커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하지만 소은지는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걸 이해했다. ‘역시 대가족은 이렇게 복잡할 수밖에 없지.’ 그녀는 속으로 머쓱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그동안 그녀는 엔데스 현우 곁에서 머무르며 주로 엔데스 명우에게 복수할 계획만을 고민했다. 게다가 그녀와 엔데스 현우의 결혼은 본래 거래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런 가문 내부 사정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복잡한 가족 관계에 대
그들은 모두 자유롭고 당당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 이곳의 규칙과 제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유영의 성격은 강이한의 곁에서 서서히 무너져갔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현우 씨는요?”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며 눈썹을 올렸다.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마음에 안 들어도, 끝날 때까지는 있어야 해요.”“아!”소은지는 다음에는 절대로 다시 이곳에 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오늘 저녁이 지나면 그녀는 꼭 엔데스 가문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특히, 현재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지켜보았다.두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너무나도 선명하고, 그들의 존재감은 누구보다도 강렬했다.그들을 지켜보는 엔데스 명우에게서는 적대적인 기운이 감돌았다.저녁 식사 중, 소은지는 드디어 전설 속의 엔데스 가주를 마주하게 되었다.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듯 보였다.이렇게 큰 가문 속에서, 엔데스 현우는 고령인 엔데스 가주의 옆에 앉았고, 소은지는 엔데스 현우의 옆에 앉았다.그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그녀는 분위기가 일순간 어색해짐을 직감했다.식사 중, 엔데스 가주는 소은지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소은지?”“네, 아버님.”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겉으로 보기엔 온화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마치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처럼 깊고 예리했다.한 가문을 이끌어 가는 사람의 기운은 무언의 압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엔데스 가문은 당신을 환영합니다.”“감사합니다, 아버님!”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소은지를 향해 집중되었고, 그들의 눈에는 분명 적대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엔데스 가문에서 여자의 위치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그렇게 큰 가문에서 새로 온 며느리가 가장에게 직접 질문을 받는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이 만찬이 단순한 가정의 식사가 아닌, 사실상 ‘엔데스 현우의 아내’를 맞이하는 자리라는 사실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엔데스 현
반산월로 돌아온 소은지는, 어떻게든 엔데스 현우와의 거래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끝내야겠다고 결심했다.오늘 밤, 그녀는 그 가문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누구든지 이 가문에 얽히지 않으려면, 그 안에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그것은 곧 진흙탕에 빠지는 것이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엔데스 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은지는 마음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며, 그가 자꾸 신경이 쓰여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제가 늪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정말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이 거래를 어떻게든 빨리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 모든 일이 끝난 후에도 그녀는 평온함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이제야 알았어요?”그렇게 말하는 엔데스 현우의 눈빛은 차갑고 무표정했다.소은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차분하게 들리며 이어졌다.“그의 곁에 있으면, 언젠가는 당신도 이 일에 끌려들게 될 겁니다.”소은지의 마음은 다시 한번 요동쳤다.“그렇지만 결국 이 일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당신이에요.”그녀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엔데스 명우가 자신을 진흙탕으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그녀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소은지는 그가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렇지만 이건 소은지가 선택한 길이었고, 결국 또다시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녀는 단연코 엔데스 현우의 곁을 선택할 것이다.절대로 그 남자의 수술대 위로 잡혀가기는 싫었다.“어떻게 된 거예요?”엔데스 현우는 침묵하는 소은지를 미소가 더 깊어졌다.소은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예요.”그녀의 마음은 이미 결정이 난 상태였다.오늘만큼은 그녀도 이 진흙탕의 시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일찍 자요. 저는 잠시 나가
“이제 조금 속이 풀렸어?” 박연준은 생각에 잠긴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이유영은 잠시 말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속이 풀리다니. 그럴 리 없지.”신씨 가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강이한에게 큰 선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의 눈 속에서 냉소적인 미소를 발견하고, 더 깊어진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이유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박연준,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박연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너는 정말...”그녀는 정말로 할 말은 다 하고, 해야 할 일은 다 하는 사람이다. 강이한과 박연준 모두에게 그렇게 당당했다.“강이한은 지금 너와 이런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을 거야. 그런데, 전기봉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전기봉!이유영이 엔데스 명우에게 넘겨준 그 파일, 이제는 엔데스 현우도 알고 있었다.박연준은 전기봉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전기봉이 그의 곁에 있지 않다는 것뿐이었다.전기봉이 엔데스 가문에 의해 잡히면 어떻게 될지, 그는 알 리가 없었다.“한마디 해줄게. 엔데스 가문이 그 파일을 원한다고 하지만, 나는 엔데스 가문이 네가 아니라 차라리 강이한과 손을 잡으려고 할 것 같아.”강이한은 엔데스 가문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여전히 이런 데 신경을 쓴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영은 박연준이 말하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너는 그 파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만 알지, 그게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는 것 같아.”이유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는 정말로 알지 못했다. 서주의 늪은 너무 깊었다. 어느 순간에는 자기가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저 표면만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그렇지만 네가
“너 진짜 신경 많이 썼네.”이유영이 무심하게 말했다.강이한보다는 확실히 신경을 쓰는 것 같았지만, 박연준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경계심이 생겼다.박연준은 그런 이유영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박연준.”“응?”“그 일, 너희한테는 도대체 무슨 의미야?”장혜주에게 부탁한 일, 바로 그 일을 말하는 거였다. 알프산에 오기 전에는 장혜주의 연락을 받지 못했지만, 박연준이 이렇게 급하게 자신을 데리고 온 걸 보면, 확실히 장혜주가 그 일을 알아낸 게 틀림없었다.그 전도 장혜주에게 조사를 부탁할 때 박연준과 강이한의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던 것 같았다. 그렇게 되니, 이유영은 점점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졌다.단순히 관계가 멀어지고, 서로 복수하려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 뒤에 더욱 큰 문제가 있는 것만 같았다.“유영아.”“응?”“적어도 이번 달은 묻지 마, 알겠어?”이유영은 말없이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묻지 말라니!?”“한 달 동안, 넌 나를 잘 지켜보고 알아가면 돼. 나머지 일은 한 달 후에 말하자.”한 달이라니… 너무 길었다.“아빠한테 전화 좀 하고 싶어.”“걱정하지 마,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내가 다 얘기해놨어.”“너...!” 이유영은 이미 짜증이 나 있었는 데다가 박연준이 이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차분해질 수 없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한 달…’이유영은 이제 알았다.박연준은 항상 말한 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었고, 하지 않겠다 하면 정말로 하지 않았다. ‘이건 정말…!’“한 달 이후에는 뭐가 되든 나는 돌아갈 거야!”이유영은 그 말에 극한까지 참으며 말했다.박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그녀가 결국 순순히 양보한 모습을 보자, 남자는 한숨 돌린 듯 보였다.계속 이러고 있으면, 머리도 아플 거니까.“이 알프산에서 못 구하는 게 많아서, 가져오는데 꽤 힘들었어. 내가 청하에서 데려온 요리사도 있어, 한번 먹어 봐.”
이유영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원래 복잡했던 관계가 박연준의 말로 인해 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짧은 한마디로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연준이 말한 뒷얘기를 듣고, 이유영은 그가 말하는 소은지를 엔데스 가문에 데려가는 일이 사실은 눈속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무슨 관계야?” 엔데스 현우는 예전에 이유영 곁에 있었던 사람이지만, 이유영은 엔데스 현우의 사생활에 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그 말을 마치자마자, 박연준은 깊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 속에서 이유영은 이들 사이에 숨겨진 복잡한 사연이 있다는 걸 느꼈다. 마치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처럼 말이다.정국진의 서재에 있는 그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이 예전엔 특별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왜 이렇게까지 멀어졌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엔데스 현우는 예전 그녀의 곁에서 뛰어난 비서 역할을 했던 사람인데, 이유영은 그가 숨기고 있는 것들에 대해 아무도 몰랐다. 그것들은 아마 믿을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다. 박연준은 앞에 있던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송연미랑 엔데스 현우는 대학 시절부터 알았고, 심지어 연애도 했었어! 하지만 결국 송연미는 엔테스 운빈이랑 결혼했지.” 이유영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거, 진짜 드라마 같네.” “왜?” 서로 사랑했던 두 사람이었고, 둘 다 엔데스 가문 사람이었는데, 왜 엔데스 운빈을 선택했을까? 박연준이 대답했다. “송연미와 엔테스 운빈 사이에 어떤 약속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송연미는 결국 그 사람과 결혼했어.” “헉!” 이유영은 그저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이 관계들은 말로 설명하기에도 믿기 힘들었다. “그럼 지금 상황은, 송연미가 엔테스 운빈에게 시집갔지만, 여전히 엔데스 현우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거야?” 이 말을 들으니, 이유영은 혼란스러워졌다. “그래, 그렇게 보는 게 맞지. 그렇게 되면 좀 엉뚱한 일이 되잖아?” 박연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임소미의 가슴은 비수로 찔린 듯 아팠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끝에 다시 찾은 딸이니,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조금 전, 의사가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이유영 씨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의사의 한마디는 그녀가 실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정말 강이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임소미는 울먹이며 감정을 터뜨렸다.강이한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이 눈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강이한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을 감옥에 넣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유영도 그 끔찍한 화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는 지금껏 이유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딸의 흐릿해진 눈은 매 순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이유영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걸까?“그만하세요, 엄마.”강이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감정은 이제 미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몰랐다.이유영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자식이 상처받을 때 부모가 느끼는 그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바로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다.강이한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유영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더군다나 임소미는...어릴 적부터 이유영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딸이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본 순간 느꼈을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수술하면 안 되겠니?”임소미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다.그래, 수술.이 눈은 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 끔찍한 화재로 인해 이유영의 두 눈은 너무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기본 재활치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오직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엄마, 수술은 저한테도 위험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
온화하고 애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온몸에 모래투성이네. 어디서 놀다 온 거야?”“모래 놀이터요! 엄마도 갈래요?”아이는 보물을 자랑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이유영에게 말했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작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임소미는 이 아이를 정말 애지중지했다.아이가 파리로 돌아온 이후, 백산 별장의 뒷마당은 서서히 아이만의 놀이터로 탈바꿈했다.바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기구들이 이미 뒷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애정을 쏟는 곳은 모래 놀이터였다.“엄마는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시간 나면 꼭 같이 놀아 줄게, 알겠지?”이유영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작은 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멀어지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유영의 가슴속엔 따스한 온기가 서서히 스며들었다.과거에,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강이한에 대한 증오마저도 억누를 수 있었다.그 시절, 둘은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각자의 분노를 표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이한이 월이에게까지 손을 뻗어 그녀를 이온유 구출에 이용하려 했을 때, 이유영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고 이유영의 인내심은 그 끝에 다다랐다.더는 견딜 수 없었다.휴대전화가 진동하자 이유영은 화면을 천천히 확인했다.강이한이었다.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띠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신씨 가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유영은 장혜주에게 전기봉의 행방을 추적하게 했다.이유영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냉정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자초한 일?맞다.이유영에게 있어 강이한이 지금 겪는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었다.“그만해. 서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곳이 아니야.”“..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