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피우는 그녀의 모습은 지독히 유혹적이었다.키가 작아서 카리스마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만의 치명적인 매력이 강조되었다.그가 아는 유영은 단아하고 품위 있고 사려심 깊은… 술과 담배와는 거리가 먼 여자였다.그런데 집게손가락으로 담배를 들고 눈을 가늘게 뜬 그 모습은 마치 오랜 고독을 삼키며 살아온 쓸쓸한 여인처럼 비춰졌다.“당신은 좋아서 피우잖아.”“이유영!”“그 여자 누구야?”유영이 웃으며 물었다. 딱히 그 여자가 신경 쓰여서 물어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그런 태도에 강이한은 가슴이 아팠다.“딱 보니까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던데 당신이랑 어울리네. 진 여사님 안목은 항상 탁월하지.”“그만해!”남자가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준수했던 얼굴이 분노로 험하게 일그러졌다.반면 유영은 덤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그 여자한테 망막을 내놓는 대가로 세강의 안주인 자리를 준다고 하면 그 여자는 어떻게 나올까?”남자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당신은 줄곧 그런 식으로 나를 대했잖아. 난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마음대로 짓밟아도 좋다고 생각한 거 아니야?”비난이 아닌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말투였다.강이한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지난 번에 싸운 뒤로 그는 다시는 그녀의 앞에서 망막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그녀가 먼저 그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강이한이 변명하듯 말했다.“일시적으로 빌려주는 거고 내가 다시 돌려놓겠다고 했잖아.”하!광명을 한지음에게 빌려주라고?일시적인 거라고?이 남자는 참 쉽게도 잔인한 말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유영은 채 타지도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뒤돌아서 밖으로 향했다.“어딜 가겠다는 거야?”뒤돌아선 유영이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일시적인 거라고. 참 웃기는 말이야. 안 그래?”“그럼 그 여자한테 가서도 그렇게
“여보세요.”“네가 이런 말 듣기 싫어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우리 가문은 더 이상 유영 그 아이를 품어줄 수가 없어!”진영숙은 대놓고 말했다.줄곧 마음에 들지 않았던 며느리였는데 드디어 그녀를 내쫓을 기회가 생겼으니 놓칠 수 없었다.강이한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머니는 그럼 누가 마음에 드세요? 유경원? 걔는 마음에 들어요?”“그래! 경원이 정도면 우리 가문에 어울리지.”진영숙이 기고만장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그때 내 말 듣고 경원이랑 결혼했으면 얼마나 좋아? 적어도 이런 수치스러운 추문에 발목 잡힐 일은 없었을 거잖아?”강이한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경원이 너 결혼한 뒤로도 너만 기다리며 살았어. 여자가 그 정도 했으면 남자로서 책임을 보여줄 때야.”강이한은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유영이 전처럼 말 잘 듣고 고분고분했으면 이런 태클 정도는 얼마든지 막아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외부의 조그마한 압박에도 그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옛말이 그른 것 하나 없었다.“그렇게 걔가 좋으면 어머니가 데리고 살면 되겠네요.”“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진영숙의 앙칼진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내가 몇번이나 말했잖아요. 난 이유영이랑 이혼할 마음 없어요. 유경원한테 특별히 책임질 일도 한 적 없고요. 엄마가 그렇게 마음에 들면 본가에서 엄마가 걔를 데리고 살면 되잖아요. 어차피 우리 집에 돈은 넘쳐나니까 집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다고 집이 망하지는 않아요.”“이 무례한 녀석이! 넌 미쳤어, 미쳤다고!”수회기 너머로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이 들려오자 강이한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어머니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알고 있었다.그걸 알면서 그는 유영과 본가 식구들 사이에서 한 번도 중재를 한 적 없었다.그는 성격 좋은 유영이 이 복잡한 관계를 잘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본가의 가족들도 그녀를 인정
강이한은 끊어진 전화기를 노려보다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바닥에 던졌다.이렇게까지 양보했는데도 아직도 부족한 걸까?어떻게든 살살 달래서 홍문동으로 돌아오게 할 계획이었다.세강의 안주인인 그녀에게 집은 이곳뿐이어야 했다.망막 기증을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그것 역시… 양보할 생각이었다. 이래도 뭐가 부족한 걸까?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쨍그랑!옆에 있던 화분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 던졌지만 화가 사그라들지 않았다.그는 더 이상 과거의 우아하고 자상한 남편, 강이한이 아니었다.반면, 유영은 순정동으로 바로 가는 대신, 소은지에게 전화를 걸어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다.조금 짜증 나는 일이 많았지만 전생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일을 해냈으니 축하받아 마땅했다.“팀원들에게는 일찍 돌아가서 쉬라고 하고 내일 회식해요.”유영이 조민정에게 말했다.조민정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그래야죠. 수정한다고 다들 수고 많았으니까요.”성공한 오너의 배후에는 함께 노력하고 성장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유영에게는 비록 첫번째 창업이었지만 세강의 오너인 강이한과 오랜 세월 함께한 경험이 있기에 옆에서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예전에 강이한도 큰 건을 하나 해결하면 직원들에게 포상휴가를 주고 회식비를 지원했었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소은지는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유영이 포르쉐에서 내리는 것을 본 순간,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뭐야? 이 씀씀이는? 그래, 어차피 아껴줘도 다른 여자가 쓸 거, 네가 쓰는 게 낫지!”물론 예전에도 유영은 근검절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지금처럼 명품 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구매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소은지로서는 친구의 이런 결과가 신기하고 대견할 따름이었다.유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외삼촌이 선물한 거야. 그 사람이랑은 상관없다고.”“외삼촌이?”“그렇다니까?”“조카를 이 정도로 예뻐하는 외삼촌이 세상에 있다고?”소은지가 부
강이한에게는 뼈 아픈 실패이자, 유영을 지지하는 소은지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소은지는 생각할수록 흥이 올랐다.유영이 말했다.“얼굴 뒤집어진 건 당연한 거고 핸드폰 바닥에 막 던지는데 내가 다 소름이 돋더라고.”입찰 결과가 나왔을 때 보았던 강이한의 똥 씹은 얼굴을 생각하면 유영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지금쯤 얼마나 화가 나고 억울할까?전에 그녀에게 넌 절대 강성건설이 요구하는 도면을 그려내지 못할 거라고 장담했던 그였다.그는 라이벌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능력치를 얕잡아본 사람이라면 아내인 유영이 유일했다. 그는 전업주부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던 여자에게 뼈 저리게 패배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우리 유영이, 오구오구 잘했어.”소은지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다독이며 칭찬해 주었다.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술을 마시다 보니 술맛마저 달게 느껴졌다.그렇게 클럽에서 신나게 마시고 노는 모습은 그대로 세강 오너 일가에게 전해졌다.또 한차례 집안이 뒤집힌 순간이었다.한편, 유영은 늦은 아침에 눈을 떴다. 어제 마구 달리다가 언제 순정동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정장 차림의 집사와 메이드복 차림의 고용인들이 공손히 계단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그녀의 외삼촌 정국진은 대놓고 화려함을 추구하는 성격이었다.그는 평소 고용인들의 예의범절과 품위에도 매우 엄격했다.“아가씨 일어나셨어요?”유영을 발견한 집사가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강이한과 함께 살면서 세강 일가도 꽤 화려하게 사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다.처음에는 그런 화려하고 대접하는 삶에 적응하기 무척 힘들어했다.그런 그녀에게 쏟아진 것은 진영숙 일가의 매정한 비웃음이었고 시간이 길어지자 고용인들마저 그녀를 우습게 아는 상황이 발생했다.그때는 그들의 삶이야 말로 최상의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굳이 비교를 하자면 정국진은 평소에도 품위나 예의범절을 따지는
정국진의 평소 일 처리 방식이라면 기사가 나가기 전에 막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먼저 유영의 의사를 묻는 것을 택했다.사실 정국진은 유영을 이미 로열 글로벌의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가르치고 있었다.그래서 결정권을 유영에게 맡긴 것도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단호함과 대처 능력을 길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소식을 알게 된 뒤로 유영에게 전화 한 통 해주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그가 예상했던 대로 문제에 봉착했을 때, 유영은 먼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일단 알겠어요.”유영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조민정이 물었다.“어떻게 할 거예요?”전에 그녀가 사람을 고용해서 잔인한 수단으로 상간녀를 응징했다는 기사가 떴을 때, 그녀는 이혼 서류를 공개하면서 여론을 순식간에 뒤집었다.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일단은 무시해요.”“무시하라고요?”“그 기사가 나한테 안 좋은 영향이라도 끼쳤나요?”“그건 아니죠.”그러고 보니 딱히 위협이 되는 건 아니었다.어차피 그들이 운영하는 오로라 스튜디오는 정국진의 인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유영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그들을 흔들 수 없었다.유영은 곧장 차로 향하며 조민정에게 물었다.“왕 대표님 쪽에서 계약 해지 통보가 왔었다고 했죠?”“그래요.”조민정은 이 상황에서 거래처를 걱정하는 유영의 행보에 살짝 당황했다.하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강이한이 왕 대표를 협박한 증거를 찾아내요.”“알았어요.”조민정은 그제야 유영의 의도를 파악했다.어차피 지금 그쪽과 진흙탕 싸움을 해도 그들에게 좋을 게 없고 오히려 품위만 떨어진다. 이쪽에서 차라리 무대응으로 일관하면 저쪽은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당황하게 될 것이다.유영은 할 일이 많은 사람이고 누구처럼 남자 하나에 목매어 일을 그르칠 생각이 없었다.청하시는 또 한 번 뒤집어졌다.유영이 사과하러 한지음의 병실로 찾아갔다는 건 그녀가 납치 사실을
강이한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그녀를 방치했지만 지금은 언제 어디를 가든 정국진의 든든한 그림자가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이런 가족애가 그녀에게 큰 안정감을 주었다.정국진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한 뒤, 유영은 덤덤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진영숙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영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어차피 용건이야 들어보지 않아도 욕하려고 전화한 게 뻔했기에 받을 필요도 없었다.몇 번 끊어버렸더니 상대는 끈질기게도 계속 전화를 걸어대다가 그것도 통하지 않자 문자를 보냈다.[당장 본가로 와. 안 그러면 소은지 걔 청하에서 일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거니까.]문자를 확인한 유영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역시 비열한 것으로 세강 사람들을 따라갈 자가 없을 것 같았다. 무엇이든 상대에게 통하는 협박이라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결국 유영은 자신의 포르쉐를 끌고 강이한의 본가로 찾아갔다.저택을 관리하는 아주머니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외제차를 보고 유경원인 줄 알고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하지만 차에서 내린 사람이 유영인 것을 확인한 순간, 입가에 지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충격으로 바뀌었다.유영은 싸늘한 표정으로 아줌마를 바라보았다. 진영숙과의 관계가 이 정도로 틀어진 데는 이 아줌마의 입김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었다.“오셨어요? 큰 사모님께서 오래 기다리셨어요. 뭐가 그리 바쁘다고 얼굴 한번 안 비춰준다고 큰 사모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요.”예의 없이 어른을 기다리게 한다고 핀잔하는 듯한 말이었다.유영은 자신보다 키가 큰 아줌마를 올려다보았다.그녀가 이 집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이유는 키가 작은 탓도 한몫했다.하지만 지금은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것뿐인데도 아줌마가 오히려 압박감을 느꼈다.“날 기다린 건 아닐 테고,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어요?”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전에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고용인을 대한 적 없던 유약한 며느리였다.“유경원 씨랑 같이
진영숙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그리고 실제로 세강의 안주인 자리는 청하시에 사는 모든 여자들이 꿈꾸는 자리였다. 그런데 유영이 보잘것없다는 식으로 말하니 속이 뒤집어졌다.“그럼 싫은데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는 거니? 싫으면 당장 이한이랑 이혼하지 그러니?”“지금 이혼을 거부하는 건 그 사람이거든요? 벌써 잊으셨나요?”“너!”진영숙은 말문이 막혔다.자신을 전혀 공경하지 않는 유영의 태도에 화가 나는데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전에는 화풀이 상대로 제격이었는데 지금은 하는 말마다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니 갑갑해서 미칠 것 같았다.유영은 씩씩거리는 진영숙을 심드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날 여기로 부른 용건이 뭐예요?”소은지를 들먹이며 협박까지 했으니 뭔가 용건이 있는 건 분명했다.짝!자리에서 일어선 진영숙이 서류 뭉치를 유영의 얼굴에 던졌다.유영은 무심한 눈으로 바라만 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진영숙이 입을 열었다.“동교 신도시 프로젝트, 대체 어떻게 된 거니?”“이미 다 들어서 아시면서 왜 굳이 나한테 물어보세요?”세강그룹 내부에 진영숙의 눈과 귀가 있는 건 전에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소식이 이렇게 빨리 그녀의 귀까지 들어간 건 놀라웠다.진영숙은 유영이 박연준을 도와 동교 프로젝트 입찰에 성공하면서 강이한을 엿 먹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진영숙은 씩씩거리며 다가오더니 손을 들어 유영의 귀뺨을 때렸다.짝!유영의 고개가 돌아가고 입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진영숙의 분노한 고함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네가 뭔데 그 프로젝트에 끼어들어?”“너 같은 애는 정말 질색인데 아직 이한이랑 이혼하기도 전에 외부인과 결탁해서 내 아들을 엿 먹이는 거야? 너 우리 세강을 망하게 할 생각이야?”“너 같은 걸 남자들이 정말 예뻐서 잘해주는 것 같아? 너 이한이랑 이혼하면 그 남자들도 목적 달성했다고 가장 먼저 너한테서 등 돌릴 거야!”이미 이성을 잃은 진영숙은 온갖 비난을 유영에
어제 홍문동에서 보였던 당황함은 온데간데없고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모습이었다.진영숙은 그런 유경원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경원이 보고 좀 배워!”진영숙은 일부러 유영을 자극하려고 비웃음을 날렸다.나긋나긋하고 온순한 유경원과 비교하니 사사건건 자신과 부딪히는 유영이 더 한심하고 추악해 보였다.물론 유영이 과거에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는 이미 까맣게 잊은 진영숙 여사였다.유영이 뒤돌아서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에 들면 끼고 사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발작을 일으키려는 진영숙을 내버려두고 현관을 나섰다.꼴에 부부라고 어쩜 저렇게 비슷한 말을 하면서 속을 뒤집어 놓는 건지!진영숙은 가슴을 부여잡고 통증을 호소했다.“쟤 말하는 것 좀 봐! 내가 그렇게 가르쳤는데 하나도 보고 배운 게 없어!”“이래서 서민은 들이면 안 된다는 거야!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애들과는 비교도 안 되지!”진영숙은 말할수록 짜증만 치밀었다.유영은 비웃음을 머금으며 대문을 나섰다.유영이 돌아간 뒤, 유경원은 진영숙을 위로하느라 진땀을 뺐다.“아줌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어차피 곧 이혼할 건데 그 여자한테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나요?”“그렇긴 하지만 쟤 하는 걸 보면 화가 안 나게 생겼어? 내가 그동안 그렇게 가르쳤는데 하나도 달라진 게 없잖아.”“그래요. 아줌마는 좋은 마음에 잔소리 좀 한 건데 이유영 씨가 나빴네요.”유경원은 진영숙이 무슨 말을 하든 일단은 치켜세웠다.그제서야 진영숙의 노기가 조금은 사그라들었다.그녀는 만족스러운 눈빛을 하고 유경원을 바라보았다.유영이 외부인과 짜고 세강을 물먹인 걸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외출하고 돌아온 강서희는 유경원과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디저트를 만드는 진영숙을 보며 순간 표정이 표독스럽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언니 왔어? 오기 전에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딸을 본 진영숙의 표정이 조금 더 환해졌다.“경원이 좀 보고 배워.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
그때 엔데스 명우는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그가 말했던 ‘결혼’이란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소은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은지!”엔데스 명우의 눈빛에는 위험한 기운이 번뜩였다.소은지는 담담히 말했다.“윤아를 구하는 건 내겐 어렵지 않은 일이야.”“조건은?”소은지가 입을 떼려는 순간, 명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소은지는 그 짧은 눈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설유나의 상황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만큼 절박해졌다.소은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탁해 봐.”주변의 공기가 순간 멎어버린 듯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소은지의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배천명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더욱 위험한 기운을 드러냈다.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은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아니고서야, 파리의 엔데스 가문 여섯째 도련님에게 이런 무모한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이건 너무도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 순간,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의 눈빛에는 위험을 넘어선 야수 같은 날카로움이 담겼다.당장이라도 소은지를 산산이 조각낼 기세였다.하지만 소은지에게선 위협의 기색조차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명우를 직시하며 여유롭게 비웃었다.긴 시간이 흘렀다.모두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드디어 명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정말 뻔뻔하군.”“뻔뻔한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지. 여섯째 도련님, 그래서 내 요구를 들어줄 수 있어?”여섯째 도련님의 ‘무릎’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명우가 과거에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떠올리면 무릎을 꿇는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물론 소은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소은지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설유나가 그의 마음속에서 아무리 소중한 존재라 해도 무릎을 꿇는 일만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이곳 파리에서 엔데스 명우가 그런 굴욕을 당한다는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강이한은 이유영이 전기봉을 찾아낸 후 자신이나 박연준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이유영은 자신과 박연준에게 끝없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나가봐!”강이한의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 문제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박연준과 자신의 사이에 어떻든 간에, 이제 이유영은 더 이상 둘 중 누구도 믿지 않았다.신시욱이 나갔다.서재에 홀로 남겨진 강이한은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 갑 넘게 태웠지만 마음속 불안과 짜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이유영...”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상처가 묻어 있었다.이유영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가슴속 공허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유영이 남긴 모든 말은 이미 충분히 명확했다.이유영은 말했다.지난 생 마지막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설령 한지음이 모든 대가를 치렀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해도 이유영에게는 여전히 용서란 존재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전혀 주저 없이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과거에 자신이 이유영에게 준 상처만큼 지금의 이유영은 잔인했다. 이 또한 당연했다.잔인함...사실 따지고 보면 이유영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 강이현 역시 과거 이유영에게 품었던 증오 이상을 느꼈으니까.하지만 적어도 이유영의 눈엔 잔인함으로 비췄다.그러나 이유영이 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 이유영은 무슨 말을 들어도 더는 믿지 않을 것이었다.이유영은 이제 강이현을 자신의 세계에서 철저히 끊어내 버렸다.그야말로 냉정하고 단호하게.어두운 서재에서 강이한의 눈에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파리의 상황 역시 심상치 않았다.이유영은 뒤에 정씨 가문이 있었기에, 이유영은 돌아온 후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반면 소은지 쪽은... 엔데스 명우가 다시 반산월
전기봉.지금은 아주 중요한 때다.‘전기봉’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 이유영의 눈빛에 살벌한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그 차가움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듯 날카로웠고 그 서늘한 기운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전기봉.서주에 있을 때, 이유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박연준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이유영이 박연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기봉이 박연준의 손에 있었다면 지금쯤 강이한을 상대로 이미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서주에 머물렀던 그 시간 동안, 박연준은 강이한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이는 전기봉이 아직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전기봉은 결정적인 인물이 분명했다. 이유영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모든 것이 뒤엉켜 버렸다.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서주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유영은 지금 백산 별장에 머물고 있었지만, 결코 한가롭게 있을 수가 없었다.특히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문서의 절반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더욱 그랬다.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뿐만 아니라 엔데스 가문의 다른 몇몇 주요 인물들, 예를 들어 엔데스 운빈조차도 강이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아직 전기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박연준은 전기봉을 찾는 와중에도 강이한과 엔데스 가문을 예의주시해야 했다.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대체 무엇을 줬길래 강이한 곁에 있기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이한은 문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신씨 가문까지 경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주 전체가 떠들썩했다.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곧 강이한과 결혼할 거라고.크리스탈 별장의 서재.신시욱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전기봉을 찾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찾더라도...”신시욱은 말을 차마 끝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 의미를 충
월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얌전한 아이였다.임소미는 월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안의 보물인 월이는 집안 사람들과도 무척 친하게 지냈고 말투까지 귀엽기 그지없어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아침 식사 후.여진우는 이유영을 서재로 데려갔다.두 사람 사이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앞으로 무슨 계획이야?”여진우가 입을 열었다.계획. 그 한마디에 이유영은 고요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이유영은 눈앞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유영의 마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변화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이유영의 인식 전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렸기 때문이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이유영이 차분히 여진우의 물음에 답했다.“난 계획이 있어.”이 일은 이유영이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그게 박연준의 일이든, 아니면 강이한의 일이든.여진우의 얼굴에 순간 심각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유영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오빠.”“응?”“오빠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강이한은 예전에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박연준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정씨 집안으로 돌아오고 여진우는 또다시 한번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강이한도 좋은 사람이 못 된다고.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두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고 뒤에 이렇게 거대한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10년... 그 오랜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치밀한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여진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한 여자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나도 몰랐어.”여진우는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사실, 모두가 서주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서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만났었다면 박연준과 강이한의 정체는 의심받았을 거고 두 사람에 대한 이유영의 믿음 또한 계속 유
“네, 유영이가 전한 바로는 그래요.”“...”그렇다면 지금 이유영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과거에는 알 수 없던 진실이 눈앞에 명확히 드러난 지금, 그 혼란스러움이 어찌 가슴을 뒤흔들지 않을 수 있을까? 소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강이한과 백연준, 이유영에게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그 10년 동안 소은지는 늘 궁금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왜 그의 곁에 있을 때 이유영은 늘 그렇게 힘들어 보였는지.당시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상황을 이제야 모두 알게 되었을 때, 소은지의 마음 또한 고통스러웠다.강이한은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10년이라는 세월은 단지 한 사람만을 위해 흘러간 게 아니었을 거야.”현우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어조로 답했다.“아니라고요?”“그러기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에요.”만약 단지 대체품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면 그 긴 세월 동안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소은지는 아마 지금과 다른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다.강이한은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상처 줬고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잘해줬지만, 이유영과 결혼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그렇다.정말로 사랑했다면 어떻게든 이유영과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 몇 년간 파리에 머물렀던 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박연준은 결혼을 강행하려 하지 않았다.백연준은 이유영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모든 의미가 변했다.이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무 의미도 없었다.단지 이유영을 대체품으로 여겼기에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일 수 있었다. 그는 이유영이 연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유영과 결혼하려하지 않은 것이었다.“맞아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죠. 그동안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강이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영이한테 상처를 줄 수 있었던 거예요.”한지음을 위해서, 한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배천명은 불안한 눈길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음울하게 빛나며 더없이 어두웠다.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며 권수미의 말을 모두 들은 것이 분명했다.“여섯째 도련님!”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얼음처럼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그는 손에 담배를 물고 연달아 깊은 연기를 내뿜었다. 설유나의 상태는 이미 위험한 상태에 다다랐지만, 소은지를 제외하고는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상황은 이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소은지는 차를 몰아 반산월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엔데스 현우의 차는 넓은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다. 소은지는 차 문을 힘차게 닫고 밖으로 내려섰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엔데스 현우가 잠이 덜 깬 듯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소은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얼굴에 드리웠던 표정을 조금 거둬들이며 말했다.“왔어요?”“네.”“아침은 먹었어요?”“아직이에요.”소은지는 고개를 흔들며 엔데스 현우 쪽으로 걸어갔다.자연스레 현우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집사들은 서둘러 소은지 앞에 식기를 차려냈다. 풍성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를 바라보던 소은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자신이 없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이미 습관적으로 소은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엔데스 현우는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현우가 아무리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를 풍겨도 소은지는 그에게 겁을 내지 않았다. 엔데스 명우와는 달랐다.2년간 엔데스 명우와 대립하며 소은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연스럽게 그를 향한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은지는 단 한 번도 엔데스 명우 앞에서 그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았다.그래서 매번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보며 이를 갈아도 결국 실패로 끝나곤 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미워하는 만큼 마찬가지로 엔데스 명우도 소은지를 증오하고 있는 게 아닐까?“설유나는 어때요?”남자가 무심하게 물었다.소은지는
“...”“뭐, 그래도 괜찮아. 마지막 순간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테니까.”“넌 정말 잔인한 여자야!”명우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차 있었다.이것이 바로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소은지의 모습이었다. 더없이 잔인한 여자였다. 과거엔 설선비에게, 그리고 지금은 설유나에게...“그래, 나 잔인해.”소은지가 담담히 인정했다.그렇다면 엔데스 명우는 어떤가? 엔터스 가문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누리며 자랐고 가문의 권력을 가지지 않아도 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스스로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 건지 알 리가 없었다.그가 망쳐버린 건 단순히 누군가의 사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은지가 잃어버린 건 자신이 온 마음을 쏟아 쟁취해낸 그녀의 삶 그 자체였다.“그러니까 앞으로 조심해. 알겠어?”소은지가 가볍게 경고했다.“꺼져!”“...”소은지는 차분한 표정으로 명우를 바라보더니 옷을 단정히 여미고 차에서 내리려 했다. 내리기 직전,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돌아보며 말했다.“설유나를 잘 숨겨.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조차 내가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엔데스 명우의 눈빛은 폭풍이 일었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차에서 내려 사라졌다.좁은 차 안에 차가운 기운이 짙게 드리워졌다. 소은지... 좋아.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소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배천명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소은지는 옷의 주름을 정리하며 배천명에게 위태로운 미소를 던졌다.그리고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은 마치 불태우려는 듯 강렬했다.차 안.배천명은 잠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여섯째 도련님.”“설유나는 어때?”엔데스 명우는 설유나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소은지의 말처럼 엔데스 명우는 어쩔 수 없이 설유나를 파리 밖으로 내보내 숨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사람이 바
이번 일로 인해 엔터스 회장님이 엔데스 명우를 혐오하게 되더라도 소은지 또한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간신히 얻어낸 기회마저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이 남자의 차가운 위협에도 소은지는 여전히 태연하고 당당했다. 소은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전혀 상관없어!”“...”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뻔뻔한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내가 왜 이렇게까지 살아가는지 알아? 잘살아 보겠다고? 우스운 소리 하지 마.”그랬다.‘잘살아 본다’는 말은 소은지의 세계에서는 그저 우스운 농담일 뿐이었다.소은지는 느릿하게 손톱을 살피며 남자의 날카로운 얼굴선을 손끝으로 천천히 훑었다.“예전에 말하지 않은 건 내 실수였어.”“...”“엔데스 명우, 넌 내 인생에서 너무 많은 걸 망가뜨렸어! 네 곁에 있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네가 있는 한, 난 한순간도 평온할 수 없어. 내가 죽는다 해도 네 가죽 한 겹은 벗기고 갈 거야!”소은지의 말이 이어질수록 명우의 눈빛은 점점 얼음처럼 차가워졌다.남자의 손아귀는 점점 강해졌고 소은지는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소은지는 목이 조여오는 고통 속에서도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당장 날 죽여봐. 장담하건대, 내일이면 넌 파리에서 쫓겨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지금은 엔터스 가문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파리를 떠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남자의 손에 더 강한 힘이 실렸고 눈빛은 더욱 잔혹해졌다.소은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도발적인 웃음이 가득했고 그 도발은 처음 조은지를 곁에 둔 순간부터 계속되어 왔다.무엇이 소은지를 이렇게 끈질기고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를 길들이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어떤 방법을 써도 무용지물이었다. 소은지가 질식으로 정신을 잃어가던 순간, 명우는 소은지를 세게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