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한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무조건 이기는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실패한 것이다. 결과가 나온 순간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바닥에 던졌다.두 달이나 열심히 준비했고 모든 디자인 인력을 동원했다. 심지어 해외에서 엘리트 디자이너를 고용하기까지 했는데 결과는 참패였다.박연준에게 패한 게 아니라 전혀 승패에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아내 유영에게 패배했다.박연준이 제출한 설계 도면은 유영의 작업실에서 제출한 원본이었다.“대표님!”조형욱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유영은 기분 좋게 박연준과 악수하고 있었다.강이한이 씩씩거리며 회장을 떠나던 순간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남은 작업은 문 비서와 상의해서 진행하면 됩니다.”박연준이 부드럽게 말했다.“감사합니다!”이건 그녀가 따낸 첫 번째 큰 거래였고 보란 듯이 성공하면서 자신감도 붙었다.“같이 식사할래요?”“좋죠.”유영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대 고객이 되실 분인데 밥 정도는 당연히 같이 먹을 수 있었다.강이한의 강요로 전업주부로 전락했던 여자가 그를 딛고 일어선 첫걸음이기도 했다.강이한은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어떻게 하면 이 괘씸한 여자를 응징할까 생각했다.그런데 박연준과 함께 나와 그의 차에 타는 모습을 본 순간,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져 버렸다.뒤를 따르던 조형욱은 멀어지는 박연준의 차를 보며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쫓아가.”강이한이 차갑게 명령했다.준수하던 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한편, 박연준의 차에 탄 유영은 공손한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좋아하는 레스토랑 있어요? 저는 외식을 많이 하지 않아서 어디로 가야 할지 종잡을 수 없네요.”전에 강이한과 사이가 좋았을 때도 외식할 때면 전부 그의 취향에 맞췄다.지금 생각해 보면 참 씁쓸한 기억이었다.전에는 시댁의 갑질에 그와 밖에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좋았고 어디를 가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그래서 외식해서 뭘 먹었는지 맛은 어땠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이
유영은 죄책감에 얼른 사과했다.“죄송해요.”“유영 씨 잘못은 아니죠.”박연준의 말투도 싸늘했다.강이한은 이미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유영은 지금 안 내리면 그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어쩔 수 없이 말했다.“밥은 제가 나중에 사드릴게요.”그 말을 끝으로 유영도 차에서 내렸다.폭발 직전인 강이한에 비해 박연준은 시종일관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유영이 내리자마자 문 비서는 재빨리 근처에서 다른 차를 불러왔다.차에 오르기 전, 박연준이 물었다.“그냥 이 차 타고 갈래요?”유영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이런 관심은 별로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어느새 그녀의 뒤로 다가온 강이한이 팔짱을 끼고 주도권을 주장하고 있었다.반면 박연준은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참 많이 변했구나.”강이한이 버럭 화를 내기 전에 박연준은 차를 타고 멀리 떠나버렸다.고개를 돌린 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쏘아보았다.하지만 그와 싸우기는 싫었기에 가볍게 그를 지나치려는데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거기 서!”그는 유영이 최소한의 해명은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한편 뒤늦게 나온 조민정이 현장을 보고 다급히 유영에게로 다가왔다.“집에 갈까요?”“네.”모른 척 뒤돌아서려고 하는데 손목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유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좀 놔줄래?”그녀의 덤덤함에 강이한은 더 큰 분노가 치솟았다.그는 그녀를 이끌고 자신의 차에 억지로 태웠다.“출발해!”“당신은 정말 미쳤어!”그 말을 끝으로 남자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유영이 분노와 수치심에 몸서리치며 손을 번쩍 든 찰나,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둘이 차에서 뭐 했어?”“그게 무슨 상관이야! 읏….”갑작스러운 키스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익숙한 느낌이었다.예전에는 참 좋아했었는데 이 입술로 다른 여자를 애무했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올라왔다.하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
그들은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이렇게 부드럽게 달래주는 것도 결국은 한지음에게 시망막을 기증하게 하기 위한 연기일 뿐이었다.저울은 이미 한지음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그렇게 비난했던 여자를 부드러운 말로 달랠 만큼 중요했던 거겠지.물론 그런 거라면 유영은 사양이었다.식탁은 유영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풍성하게 차려졌다.“왜 안 먹어?”강이한이 물었다.그의 눈에서 선명한 짜증이 보였다.“독을 풀었을지 어떻게 알고 먹어?”유영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들이받았다.지난 생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다신 눈을 떴을 때 수술실에 누워 있었다.그러니 어찌 편한 마음으로 그와 밥을 먹을 수 있을까?강이한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그는 자신이 인내심이 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영의 매몰찬 행위가 점점 더 그를 극한으로 몰아갔다.유영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왜 이런다고 생각해?”저쪽에서 온갖 술수를 부려가며 공격해 오는데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란 말인가!남자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며 뭐라고 하려던 순간, 문밖에서 진영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난 네가 다음 달에나 돌아올 줄 알았어.”“할머니 생신이신데 당연히 와야죠.”“아이고 착해라.”평소의 진영숙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예전에도 한번 경험해 본 적 있었는데 다른 여자의 목소리는 그녀가 못 들어본 목소리였다.하지만 강이한은 상대를 아는 눈치였다.그는 조심스럽게 유영의 눈치를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밖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제가 여기 오는 건 좀 경우에 어긋나지 않아요?”유영은 진영숙이 어떤 인물을 데려왔는지 그 인물의 인성을 알 것 같기도 했다.다 왔으면서 경우에 어긋난다니! 정말 전형적인 여우들이 쓰는 멘트 아닌가?그녀는 비꼬는 듯한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진영숙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걔 요즘 나가서 살아. 걱정 마.
진영숙은 아들에게 막말을 퍼붓는 유영을 보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유영은 싸늘한 표정을 하고 진영숙에게 말했다.“당신들 같은 사람들을 가족으로 맞은 건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어!”진영숙이 뒷목을 잡았다.최근 들어 유영 때문에 혈압 터져서 병원으로 실려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유영을 손가락질하며 강이한에게 말했다.“쟤 좀 봐. 너 마누라 관리를 어떻게 하면 애가 나한테까지 이러니? 쟤 때문에 엄마 죽는 꼴 보고 싶어?”강이한은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전에도 엄마와 유영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유영은 한 번도 그의 앞에서 적대감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그래서 요즘 돌아가는 집안 꼴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아줌마, 진정하세요.”유정원이 우아한 자태로 앞으로 나서며 분노에 치를 떠는 진영숙을 다독였다.그녀는 큰 키에 단아한 외모를 가진 미인이었는데 목소리마저 나긋나긋한 것이 전형적인 재벌가 규수의 모습이었다.유영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여자와 강이한을 번갈아보고는 말없이 문밖으로 걸어갔다.강이한이 따라와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당신 먼저 올라가 있어!”“대체 저런 애를 왜 계속 집에다 두겠다는 거야? 당장 꺼지라고 해!”“그만하세요!”강이한은 유영의 손을 꽉 잡은 채, 진영숙을 돌아보며 소리쳤다.그는 그대로 유영의 손을 잡고 다가가서 전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네, 대표님.”“와서 큰 사모님을 본가로 모셔다드려.”.“이한이 너… 지금 이 어미를 내쫓는 거야? 대체 쟤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거니!”아들이 과도하게 유영을 싸고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신과 싸움이 난 상황에서조차 유영의 편을 들 줄은 몰랐다.잠시 후, 조형욱이 저택에 도착했다.그는 유경원을 본 순간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략 알 것 같았다.결국 진영숙은 씩씩거리며 차에 탔다. 어떻게든 유경원을 아들과 엮으려던 계획은 시도도 못해보고 막을 내렸다.유영이 떡하니
담배를 피우는 그녀의 모습은 지독히 유혹적이었다.키가 작아서 카리스마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만의 치명적인 매력이 강조되었다.그가 아는 유영은 단아하고 품위 있고 사려심 깊은… 술과 담배와는 거리가 먼 여자였다.그런데 집게손가락으로 담배를 들고 눈을 가늘게 뜬 그 모습은 마치 오랜 고독을 삼키며 살아온 쓸쓸한 여인처럼 비춰졌다.“당신은 좋아서 피우잖아.”“이유영!”“그 여자 누구야?”유영이 웃으며 물었다. 딱히 그 여자가 신경 쓰여서 물어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그런 태도에 강이한은 가슴이 아팠다.“딱 보니까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던데 당신이랑 어울리네. 진 여사님 안목은 항상 탁월하지.”“그만해!”남자가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준수했던 얼굴이 분노로 험하게 일그러졌다.반면 유영은 덤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그 여자한테 망막을 내놓는 대가로 세강의 안주인 자리를 준다고 하면 그 여자는 어떻게 나올까?”남자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당신은 줄곧 그런 식으로 나를 대했잖아. 난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마음대로 짓밟아도 좋다고 생각한 거 아니야?”비난이 아닌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말투였다.강이한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지난 번에 싸운 뒤로 그는 다시는 그녀의 앞에서 망막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그녀가 먼저 그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강이한이 변명하듯 말했다.“일시적으로 빌려주는 거고 내가 다시 돌려놓겠다고 했잖아.”하!광명을 한지음에게 빌려주라고?일시적인 거라고?이 남자는 참 쉽게도 잔인한 말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유영은 채 타지도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뒤돌아서 밖으로 향했다.“어딜 가겠다는 거야?”뒤돌아선 유영이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일시적인 거라고. 참 웃기는 말이야. 안 그래?”“그럼 그 여자한테 가서도 그렇게
“여보세요.”“네가 이런 말 듣기 싫어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우리 가문은 더 이상 유영 그 아이를 품어줄 수가 없어!”진영숙은 대놓고 말했다.줄곧 마음에 들지 않았던 며느리였는데 드디어 그녀를 내쫓을 기회가 생겼으니 놓칠 수 없었다.강이한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머니는 그럼 누가 마음에 드세요? 유경원? 걔는 마음에 들어요?”“그래! 경원이 정도면 우리 가문에 어울리지.”진영숙이 기고만장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그때 내 말 듣고 경원이랑 결혼했으면 얼마나 좋아? 적어도 이런 수치스러운 추문에 발목 잡힐 일은 없었을 거잖아?”강이한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경원이 너 결혼한 뒤로도 너만 기다리며 살았어. 여자가 그 정도 했으면 남자로서 책임을 보여줄 때야.”강이한은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유영이 전처럼 말 잘 듣고 고분고분했으면 이런 태클 정도는 얼마든지 막아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외부의 조그마한 압박에도 그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옛말이 그른 것 하나 없었다.“그렇게 걔가 좋으면 어머니가 데리고 살면 되겠네요.”“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진영숙의 앙칼진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내가 몇번이나 말했잖아요. 난 이유영이랑 이혼할 마음 없어요. 유경원한테 특별히 책임질 일도 한 적 없고요. 엄마가 그렇게 마음에 들면 본가에서 엄마가 걔를 데리고 살면 되잖아요. 어차피 우리 집에 돈은 넘쳐나니까 집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다고 집이 망하지는 않아요.”“이 무례한 녀석이! 넌 미쳤어, 미쳤다고!”수회기 너머로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이 들려오자 강이한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어머니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알고 있었다.그걸 알면서 그는 유영과 본가 식구들 사이에서 한 번도 중재를 한 적 없었다.그는 성격 좋은 유영이 이 복잡한 관계를 잘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본가의 가족들도 그녀를 인정
강이한은 끊어진 전화기를 노려보다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바닥에 던졌다.이렇게까지 양보했는데도 아직도 부족한 걸까?어떻게든 살살 달래서 홍문동으로 돌아오게 할 계획이었다.세강의 안주인인 그녀에게 집은 이곳뿐이어야 했다.망막 기증을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그것 역시… 양보할 생각이었다. 이래도 뭐가 부족한 걸까?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쨍그랑!옆에 있던 화분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 던졌지만 화가 사그라들지 않았다.그는 더 이상 과거의 우아하고 자상한 남편, 강이한이 아니었다.반면, 유영은 순정동으로 바로 가는 대신, 소은지에게 전화를 걸어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다.조금 짜증 나는 일이 많았지만 전생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일을 해냈으니 축하받아 마땅했다.“팀원들에게는 일찍 돌아가서 쉬라고 하고 내일 회식해요.”유영이 조민정에게 말했다.조민정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그래야죠. 수정한다고 다들 수고 많았으니까요.”성공한 오너의 배후에는 함께 노력하고 성장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유영에게는 비록 첫번째 창업이었지만 세강의 오너인 강이한과 오랜 세월 함께한 경험이 있기에 옆에서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예전에 강이한도 큰 건을 하나 해결하면 직원들에게 포상휴가를 주고 회식비를 지원했었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소은지는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유영이 포르쉐에서 내리는 것을 본 순간,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뭐야? 이 씀씀이는? 그래, 어차피 아껴줘도 다른 여자가 쓸 거, 네가 쓰는 게 낫지!”물론 예전에도 유영은 근검절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지금처럼 명품 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구매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소은지로서는 친구의 이런 결과가 신기하고 대견할 따름이었다.유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외삼촌이 선물한 거야. 그 사람이랑은 상관없다고.”“외삼촌이?”“그렇다니까?”“조카를 이 정도로 예뻐하는 외삼촌이 세상에 있다고?”소은지가 부
강이한에게는 뼈 아픈 실패이자, 유영을 지지하는 소은지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소은지는 생각할수록 흥이 올랐다.유영이 말했다.“얼굴 뒤집어진 건 당연한 거고 핸드폰 바닥에 막 던지는데 내가 다 소름이 돋더라고.”입찰 결과가 나왔을 때 보았던 강이한의 똥 씹은 얼굴을 생각하면 유영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지금쯤 얼마나 화가 나고 억울할까?전에 그녀에게 넌 절대 강성건설이 요구하는 도면을 그려내지 못할 거라고 장담했던 그였다.그는 라이벌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능력치를 얕잡아본 사람이라면 아내인 유영이 유일했다. 그는 전업주부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던 여자에게 뼈 저리게 패배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우리 유영이, 오구오구 잘했어.”소은지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다독이며 칭찬해 주었다.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술을 마시다 보니 술맛마저 달게 느껴졌다.그렇게 클럽에서 신나게 마시고 노는 모습은 그대로 세강 오너 일가에게 전해졌다.또 한차례 집안이 뒤집힌 순간이었다.한편, 유영은 늦은 아침에 눈을 떴다. 어제 마구 달리다가 언제 순정동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정장 차림의 집사와 메이드복 차림의 고용인들이 공손히 계단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그녀의 외삼촌 정국진은 대놓고 화려함을 추구하는 성격이었다.그는 평소 고용인들의 예의범절과 품위에도 매우 엄격했다.“아가씨 일어나셨어요?”유영을 발견한 집사가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강이한과 함께 살면서 세강 일가도 꽤 화려하게 사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다.처음에는 그런 화려하고 대접하는 삶에 적응하기 무척 힘들어했다.그런 그녀에게 쏟아진 것은 진영숙 일가의 매정한 비웃음이었고 시간이 길어지자 고용인들마저 그녀를 우습게 아는 상황이 발생했다.그때는 그들의 삶이야 말로 최상의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굳이 비교를 하자면 정국진은 평소에도 품위나 예의범절을 따지는
얼마나 오래됐을까?소은지는 생각했다.‘엔데스 명우와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한 게 대체 언제였지? 현우 씨 곁에 머물게 된 이후로는 없었던 것 같네.’현우와 함께하며 그녀는 자연스레 엔데스 명우와 멀어졌다.하지만 이렇게 마주한 순간이 극히 드물었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의 증오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두 사람의 마음속엔 격렬한 파도가 일렁였고 서로의 눈빛에는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금유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엔데스 명우가 침묵을 깼다.그 말에 소은지는 차갑고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여섯째 도련님, 그게 무슨 말이세요?”그 말이 떨어지자 엔데스 명우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소은지는 ‘여섯째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일부러 또렷이 힘을 실어 말했다.소은지를 바라보는 엔데스 명우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고 마치 소은지의 속마음을 모두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사실 명우를 만나기 전 소은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그동안 줄곧 반산월에 머물며 가장 자주 마주친 인물이 송연미였다. 송연미를 통해 엔데스 가문의 인물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현우가 어디 있는지 아직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기에 그녀의 마음엔 불안으로 가득 찼다.혹여 자신이 실수라도 해서 현우에게 피해를 줄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막상 이 순간이 오자 오히려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았다.“여섯째 도련님?”엔데스 명우가 아무 말 없이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자 소은지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남자의 깊은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졌고 그 안엔 불투명한 그림자가 깔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이미 꿰뚫어 본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하지만 소은지는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평온한 듯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잠시 후, 엔데스 명우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걸 봐서 소은지는 고집이 셀 뿐만 아니라 정신력 또한 만만치 않
이유영은 아이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고 월이를 떠올리자 눈빛에 따스한 온기가 어려 들었다.정국진은 이유영이 어젯밤 반산월에서 소은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눈살을 찌푸렸다.그러나 이유영과 소은지의 관계를 떠올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진우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어.”“응.”이유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어때? 괜찮은 것 같아?”“누구?”이유영은 되물었다.여진우가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 건지 이유영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여진우은 굳은 표정으로 이내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여진우의 이상한 모습을 바라보며 이유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내가 뭘 잘못했나? 왜 저러지?’‘설마 은지를 말하는 건가? 은지를 걱정하고 있다고?’‘에이, 설마. 두 사람은 전혀...’하지만 엔데스 명우와 소은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겉으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혹시 모르는 것이다.그래서 여진우가 소은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가능성을 떠올리며 이유영은 숨을 길게 들이켰다....한편, 이유영이 남기에게 했던 말대로라면, 현우의 일이 정말 소은지와 연관되어 있다면 오늘 아침 엔데스 가문은 분명 반산월을 시험해 올 것이다.그리고 그 예감처럼,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엔데스 란서였다.그녀는 과거 엔데스 가문에서 소은지에게 처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그저 평범한 이야기만 나누고는 돌아갔다.“아저씨.”“네.”“아홉째 아가씨가 왜 왔을까요?”그들은 오직 엔데스 가문에서만 마주쳐 왔기에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소은지는 지금 반산월에 나타나는 인물이라면 누구든 철저히 경계하고 분석해야 했다.남기는 조심스레 말했다.“아홉째 아가씨는 순수합니다. 만약 다른 목적이 있었다면 분명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을 겁니다.”소은지
소은지는 지금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은 현실이 되어 소은지를 괴롭혔다.이유영은 떠났고 소은지는 홀로 남겨진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아저씨.”“네, 사모님.”집사 남기가 조용히 소은지 앞으로 다가왔다.그는 현우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었다. 현우는 소은지에게 남기 집사라면 믿어도 된다고 말했었다.어제 일이 벌어졌을 때도 남기는 누구보다 먼저 소식을 막으라고 조언했다.그 빠르고 정확한 대처를 보면 아마도 오랜 시간 현우 곁을 지켜온 인물이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남기는 소은지의 곁에 남아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중요한 시기인 만큼 소은지 곁에 머무는 이상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다는 사실을 남기도 모를 리 없었다.그런 남기를 통해 소은지는 각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있었다.어제 분명히 무슨 일이 발생했을 것이다.엔데스 명우에게 잡혀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엔데스 가문의 일원으로서 처음 겪은 일이었다.그것은 이전에 경험했던 어떤 일과도 완전히 결이 달랐다.복잡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자 처음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낯설었다.어찌할 바 모를 상황 속에서 다행히도 남기의 존재 덕분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아직도 소식이 없어요?”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어젯밤부터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그래도 계속 물어봐야만 했다.남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그 말을 들은 소은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유영 앞에서 보였던 연약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대신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만이 남아 있었다.지금 이 일은 절대 엔데스 가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원래 가문 간의 다툼이라는 것이 이리도 잔인했던가?’과거에 엔데스 가문의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그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었다.어찌 됐든 그들은 가족이었다
그 생각을 하며 이유영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이유영은 말없이 소은지를 꼭 껴안았다.소은지가 느끼는 감정의 무게를 알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소은지는 현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엔데스 가문 도련님인데도 불구하고 소은지 곁에서 함께 일하는 현우를 보며 이유영은 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소은지의 마음을 마주하고 나서 이유영은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이유영은 밤을 꼬박 새워 소은지 곁을 지켰다.두 사람 아무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하지만 반산월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아침 식탁 위에는 정적만 감돌았다.“오빠한테 전화해서 조용히 찾아보라고 했어.”소은지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유영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필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현우가 사라졌다.‘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수없이 많은 생각이 소은지의 머릿속을 맴돌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휘몰아쳤다.“일단 밥은 먹어.”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는 소은지를 보며 이유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소은지는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유영아, 나...”“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만약 이 일이 정말 엔데스 가문과 얽혀 있다면 네가 해야 할 일이 많아. 그리고 나는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이유영이 겁이 나서 떠나려는 게 아니었다.그 말은 소은지에게 이유영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를 일깨워주는 말이었다.소은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이유영이 곁에 오래 머물수록 주변의 의심은 커질 거라는 것을.그래서 이유영은 아침 식사 후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소은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유영이 곁에 있어 주길 바랐지만 동시에 오직 이 상황을 먼저 어떻게든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예전 청하시에서의 이유영 삶은 비록 힘들었지만 강씨 집안은 적어도 순수했다.그래서 힘들 땐 소은지를 찾아갈 수 있었고 가끔은 훌쩍 여행도 갈
“은지야...”이유영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어떤 위로의 말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그 자식은 자격이 없어, 유영아!”엔데스 명우를 말하는 것이었다.파리에서 너무 많은 것을 봐온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는 절대 자격이 없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이유영은 조용히 대답했다.“알아.”“하지만 현우 씨는...”소은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현우는 무고하다고,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과거 그녀와 엔데스 명우 사이의 원한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명우와 현우는 겉보기엔 사이가 좋았다.그러나 그녀로 인해 현우가 일에 휘말리게 되었고 두 사람 사이엔 서늘한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너무 걱정하지 마. 이제 막 시작된 일이야.”이유영이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현우는 오늘 하루 사라졌을 뿐이니 벌써 이렇게 초조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유영아, 넌 몰라.”이유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은지가 급히 받아쳤다.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영은 잘 모르기에 긴장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만 소은지는 그럴 수가 없었다.소은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현우의 차가 금유산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소은지는 미친 듯이 전화를 걸었고 심지어 직접 금유산까지 달려갔다.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현우가 정말 무사하다면 그 전화를 받지 않을 리 없었다.‘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소은지는 금유산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이유영에게 털어놓았다.이야기를 들을수록 이유영의 눈빛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실종일 거라 생각했지만 점점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현우의 실종은 단순한 사건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로 그 점이 가장 불안하게 했다.“현우 씨,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야. 어쩌면 무소식이 희소식일 수도 있어.”어쨌든 그는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도련님이었고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절대 감춰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소은지는
하지만 연서의 존재가 드러난 순간, 7년간의 아름다운 추억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그렇다면 문기원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 정말 괜찮아질까?이유영은 정말 괜찮아질 수 있을까?박연준의 마음 한구석에 의문이 피어올랐다.“그가 떠난 데는 이유가 있어.”한참 후, 박연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고 그 짧은 말 안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강이한은 그때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그는 이유영의 반응에 절망했을 뿐 아니라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기에 더 괴로웠던 것이다.이유영은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마주칠 때마다 깊은 상처를 안게 될 거란 사실을.그래서 그녀를 박연준에게 맡기고 결국 떠나기로 했다.“어쩌면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 진짜 속죄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박연준의 목소리엔 씁쓸함이 어려 있었다.문기원은 말없이 눈살을 찌푸렸다.강이한은 지금 어둠 속에서 홀로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유영 곁에 남아 있는 박연준 역시 과거의 모든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듯했다....별장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눈가가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이유영은 온몸이 긴장으로 굳었다.예전 청하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든 결국 마지막에 우는 사람은 늘 이유영이었다. 그러면 소은지는 강이한을 욕하며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주곤 했다.그 시절 소은지는 남자보다도 더 단단한 사람이었다.그녀의 세계에는 승리와 패배만 존재했으며 절대 포기하거나 눈물 흘리는 법이 없었다.그런데 지금의 소은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은지야.”이유영은 깊게 숨을 들이쉰 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현우 씨가 사라졌어.”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윙’하고 울리며 금방이라도 터지는 것 같았다.‘현우 씨가 사라졌다고?’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엔데스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 회복됐다는 공식 발표가 난 직후, 현우가 사라졌다.두 사건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게 분명했다.
소은지가 이유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녀의 인생을 진심으로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심지어 강이한도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과 수차례 격렬하게 부딪쳤다. 심지어 그는 소은지처럼 강한 여성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이한은 알고 있었다. 소은지가 이유영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지금 파리가 아무리 어지럽고 위태로운 상황이라 해도 소은지가 이유영을 만나고 싶어 한다면 이유영은 그녀를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이유영은 예전에 엔데스 명우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서까지 소은지를 그의 손아귀에서 빼내려 했다.그러던 그녀가 지금 소은지의 부탁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결국 박연준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반산월로 데려다주었다.이유영이 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그는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는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뭐 하는 거야?”박연준의 태도에 이유영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허락하고는 이제 와서 이러자 이유영도 짜증이 밀려왔다.“소은지가 뭐라 하든 아무것도 절대 약속하지 마.”그리고 이어서 한마디를 보탰다.“소은지보다 내가 더 조심해야 할 사람은 너야.”그녀는 마지막 두 단어를 힘주어 강조하듯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박연준은 숨이 턱 막힌 듯 가슴이 조여왔다.이유영의 차가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박연준의 눈에도 가늘고 깊은 상처가 스치듯 지나갔다.이유영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고 절뚝이는 걸음으로 곧장 별장 쪽으로 걸어갔다.박연준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외로움과 오래된 상처로 가득 찼다.문기원은 박연준의 작은 변화마저 놓치지 않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조심스럽고 불안한 목소리로 박연준을 불렀다.“선생님...”이유영의 지금 태도가 얼마나 무정한지를 문기원 역시 느끼고 있었다. 박연준은 이유영을 바꾸고 싶어 했지만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박연준은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바로 직전까지도 박연준은 그 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는데 이유영이 뜻밖에도 동의한 것이다.“좋아.”박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는 이유영을 믿기로 했다.“내일 서주로 돌아갈 거야. 네가 원한다면...”“아니!”박연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은 단호하게 끊었다.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서주에 함께 가자는 말일 게 뻔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서주로 갈 수 없었다.지금의 이유영에게 가족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겉으론 엔데스 가문이 중심인 것처럼 보여도 이유영이 보기엔 이 일은 정씨 가문에게도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이런 상황에서 파리를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알았어.”박연준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그녀가 함께 가지 않겠다는 것에 분명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엔데스 가문 사람들과 더 이상 얽히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 하나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두 사람이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던 찰나, 갑자기 이유영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보니 소은지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이유영이 전화를 받으려 하자 박연준이 말했다.“받지 마.”이유영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봤다.이런 것까지 간섭하는 박연준에 대해 몹시 불만이었다.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연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소은지는 지금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야. 일곱째 며느리라고.”그는 소은지의 현재 신분을 상기시키며 엔데스 가문 사람들과 완전히 선을 긋도록 했다.‘은지마저도 그 선에 포함되는 걸까?’그렇게 생각하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얼어붙었다.“진짜 어이가 없네.”더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유영아.”“그만 좀 해. 소은지잖아.”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이유영은 고개를 돌렸다.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소은지만큼은 달랐다. 소은지는 절대 그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엔데스 가문 사람이 아니라 그 어떤 신분이라고 해도 이유영은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결국 이유영은 박연준의 긴장된 눈빛을 무
무슨 정신으로 이유영을 백산 별장까지 데려다주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박연준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차를 바깥에 세워둔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차가 움직이지 않았기에 차가운 바람의 영향도 없었다.“문기원 씨, 차 문 열어요.”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싸늘하고 위태로웠다. 문기원은 룸미러로 뒷좌석의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그 순간, 이유영은 박연준을 노려보며 물었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야?”남자는 대답 대신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그의 온몸에서는 담배 연기처럼 무거운 기운이 흘러나왔다.좁은 공간 안에 얼어붙은 공기가 감돌았고 그 속의 사람들은 점점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에 짓눌렸다.한참을 그렇게 침묵하던 박연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네 말대로 할게.”“...”뱍연준이 무슨 말을 들어준다는 건지 이유영은 알 수 없었다.곧이어 남자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그를 바라보던 이유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박연준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엔데스 가문 일이 끝날 때까지야.”그제야 이유영은 박연준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는 이혼을 말하고 있었다.동의는 하되 엔데스 가문의 문제가 수습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였다.우천시에 있을 때, 이유영은 박연준이 왜 굳이 결혼식을 치른 후에 돌아와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어 분노했었다.그리고 실제로 돌아오고 엔데스의 셋째 도련님을 마주친 후, 이유영은 깨달았다. 엔데스 가문은 집요하게 정씨 가문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마치 엔데스 가문을 지탱할 수 있는 열쇠가 정씨 가문에 있는 듯 끊임없이 엮이려 했다.정씨 가문과 엔데스 가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지금까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파리에는 내로라하는 가문들이 즐비했지만 이상하게도 엔데스 가문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이름은 언제나 정씨 가문이었다.물론 정씨 가문이 막강한 상업 가문이긴 해도 엔데스 가문은 파리의 왕족과 같은 존재였기에 두 가문이 이렇게까지 자꾸 엮일 이유는 없었다.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