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라가 갑자기 자원봉사를 간다고 아프리카행을 선포한 뒤, 외삼촌은 모든 애정을 유영에게 쏟아부었다. 그녀를 데리고 각종 중요한 자리에 참석했고 온갖 보석과 액세서리를 사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유영은 세강 일가에게 아직은 자신과 정국진의 관계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이런 명품 차를 끌고 다니는 걸 강이한이 안다면 미심쩍게 생각하고 조사에 착수할 게 분명했다.물론, 강이한은 이미 정국진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유영은 모르고 있었다.그는 오해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10년을 동고동락한 여자가 갑자기 변심하고 다른 남자에게 간다는데 이유도 모르고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결국 유영은 조민정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조민정은 회장님 지시라고 딱 잘라 말했다. 유영은 그제야 조민정은 정국진의 말을 가장 우선으로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입찰 현장.유영은 박연준과 함께 자리했다. 박연준의 반대쪽에는 강이한과 조형욱이 자리했다.분위기는 좀 삭막했다.강이한은 조형욱에게 눈길을 보냈지만 조형욱은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유영이 박연준과 함께 입찰 현장에 나타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강이한을 포함해서 조형욱마저도 그녀가 박연준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강이한은 분노에 치를 떠는 반면, 유영은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베이지 톤의 깔끔한 정장은 그녀의 유려한 이목구비와 차분한 분위기를 더욱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했다.몇몇 회사들에서 설계 도면을 제출했지만 모두가 심사 탈락이었다.그만큼 정부에서 동교 신도실 개발을 중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잠시 후, 박연준과 강이한이 설계 도면을 가지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유영은 긴장한 얼굴로 박연준을 바라보았다.반면 박연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핸드폰에서 문자 알림이 뜨면서 유영의 집중력을 분산싴켰다.확인해 보니 강이한에게서 온 문자였다.“나가서 얘기 좀 해!”유영은 박연준 옆으로 고개를 살짝 틀고 싸늘한 시선으로
강이한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무조건 이기는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실패한 것이다. 결과가 나온 순간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바닥에 던졌다.두 달이나 열심히 준비했고 모든 디자인 인력을 동원했다. 심지어 해외에서 엘리트 디자이너를 고용하기까지 했는데 결과는 참패였다.박연준에게 패한 게 아니라 전혀 승패에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아내 유영에게 패배했다.박연준이 제출한 설계 도면은 유영의 작업실에서 제출한 원본이었다.“대표님!”조형욱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유영은 기분 좋게 박연준과 악수하고 있었다.강이한이 씩씩거리며 회장을 떠나던 순간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남은 작업은 문 비서와 상의해서 진행하면 됩니다.”박연준이 부드럽게 말했다.“감사합니다!”이건 그녀가 따낸 첫 번째 큰 거래였고 보란 듯이 성공하면서 자신감도 붙었다.“같이 식사할래요?”“좋죠.”유영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대 고객이 되실 분인데 밥 정도는 당연히 같이 먹을 수 있었다.강이한의 강요로 전업주부로 전락했던 여자가 그를 딛고 일어선 첫걸음이기도 했다.강이한은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어떻게 하면 이 괘씸한 여자를 응징할까 생각했다.그런데 박연준과 함께 나와 그의 차에 타는 모습을 본 순간,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져 버렸다.뒤를 따르던 조형욱은 멀어지는 박연준의 차를 보며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쫓아가.”강이한이 차갑게 명령했다.준수하던 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한편, 박연준의 차에 탄 유영은 공손한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좋아하는 레스토랑 있어요? 저는 외식을 많이 하지 않아서 어디로 가야 할지 종잡을 수 없네요.”전에 강이한과 사이가 좋았을 때도 외식할 때면 전부 그의 취향에 맞췄다.지금 생각해 보면 참 씁쓸한 기억이었다.전에는 시댁의 갑질에 그와 밖에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좋았고 어디를 가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그래서 외식해서 뭘 먹었는지 맛은 어땠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이
유영은 죄책감에 얼른 사과했다.“죄송해요.”“유영 씨 잘못은 아니죠.”박연준의 말투도 싸늘했다.강이한은 이미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유영은 지금 안 내리면 그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어쩔 수 없이 말했다.“밥은 제가 나중에 사드릴게요.”그 말을 끝으로 유영도 차에서 내렸다.폭발 직전인 강이한에 비해 박연준은 시종일관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유영이 내리자마자 문 비서는 재빨리 근처에서 다른 차를 불러왔다.차에 오르기 전, 박연준이 물었다.“그냥 이 차 타고 갈래요?”유영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이런 관심은 별로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어느새 그녀의 뒤로 다가온 강이한이 팔짱을 끼고 주도권을 주장하고 있었다.반면 박연준은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참 많이 변했구나.”강이한이 버럭 화를 내기 전에 박연준은 차를 타고 멀리 떠나버렸다.고개를 돌린 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쏘아보았다.하지만 그와 싸우기는 싫었기에 가볍게 그를 지나치려는데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거기 서!”그는 유영이 최소한의 해명은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한편 뒤늦게 나온 조민정이 현장을 보고 다급히 유영에게로 다가왔다.“집에 갈까요?”“네.”모른 척 뒤돌아서려고 하는데 손목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유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좀 놔줄래?”그녀의 덤덤함에 강이한은 더 큰 분노가 치솟았다.그는 그녀를 이끌고 자신의 차에 억지로 태웠다.“출발해!”“당신은 정말 미쳤어!”그 말을 끝으로 남자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유영이 분노와 수치심에 몸서리치며 손을 번쩍 든 찰나,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둘이 차에서 뭐 했어?”“그게 무슨 상관이야! 읏….”갑작스러운 키스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익숙한 느낌이었다.예전에는 참 좋아했었는데 이 입술로 다른 여자를 애무했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올라왔다.하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
그들은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이렇게 부드럽게 달래주는 것도 결국은 한지음에게 시망막을 기증하게 하기 위한 연기일 뿐이었다.저울은 이미 한지음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그렇게 비난했던 여자를 부드러운 말로 달랠 만큼 중요했던 거겠지.물론 그런 거라면 유영은 사양이었다.식탁은 유영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풍성하게 차려졌다.“왜 안 먹어?”강이한이 물었다.그의 눈에서 선명한 짜증이 보였다.“독을 풀었을지 어떻게 알고 먹어?”유영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들이받았다.지난 생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다신 눈을 떴을 때 수술실에 누워 있었다.그러니 어찌 편한 마음으로 그와 밥을 먹을 수 있을까?강이한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그는 자신이 인내심이 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영의 매몰찬 행위가 점점 더 그를 극한으로 몰아갔다.유영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왜 이런다고 생각해?”저쪽에서 온갖 술수를 부려가며 공격해 오는데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란 말인가!남자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며 뭐라고 하려던 순간, 문밖에서 진영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난 네가 다음 달에나 돌아올 줄 알았어.”“할머니 생신이신데 당연히 와야죠.”“아이고 착해라.”평소의 진영숙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예전에도 한번 경험해 본 적 있었는데 다른 여자의 목소리는 그녀가 못 들어본 목소리였다.하지만 강이한은 상대를 아는 눈치였다.그는 조심스럽게 유영의 눈치를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밖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제가 여기 오는 건 좀 경우에 어긋나지 않아요?”유영은 진영숙이 어떤 인물을 데려왔는지 그 인물의 인성을 알 것 같기도 했다.다 왔으면서 경우에 어긋난다니! 정말 전형적인 여우들이 쓰는 멘트 아닌가?그녀는 비꼬는 듯한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진영숙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걔 요즘 나가서 살아. 걱정 마.
진영숙은 아들에게 막말을 퍼붓는 유영을 보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유영은 싸늘한 표정을 하고 진영숙에게 말했다.“당신들 같은 사람들을 가족으로 맞은 건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어!”진영숙이 뒷목을 잡았다.최근 들어 유영 때문에 혈압 터져서 병원으로 실려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유영을 손가락질하며 강이한에게 말했다.“쟤 좀 봐. 너 마누라 관리를 어떻게 하면 애가 나한테까지 이러니? 쟤 때문에 엄마 죽는 꼴 보고 싶어?”강이한은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전에도 엄마와 유영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유영은 한 번도 그의 앞에서 적대감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그래서 요즘 돌아가는 집안 꼴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아줌마, 진정하세요.”유정원이 우아한 자태로 앞으로 나서며 분노에 치를 떠는 진영숙을 다독였다.그녀는 큰 키에 단아한 외모를 가진 미인이었는데 목소리마저 나긋나긋한 것이 전형적인 재벌가 규수의 모습이었다.유영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여자와 강이한을 번갈아보고는 말없이 문밖으로 걸어갔다.강이한이 따라와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당신 먼저 올라가 있어!”“대체 저런 애를 왜 계속 집에다 두겠다는 거야? 당장 꺼지라고 해!”“그만하세요!”강이한은 유영의 손을 꽉 잡은 채, 진영숙을 돌아보며 소리쳤다.그는 그대로 유영의 손을 잡고 다가가서 전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네, 대표님.”“와서 큰 사모님을 본가로 모셔다드려.”.“이한이 너… 지금 이 어미를 내쫓는 거야? 대체 쟤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거니!”아들이 과도하게 유영을 싸고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신과 싸움이 난 상황에서조차 유영의 편을 들 줄은 몰랐다.잠시 후, 조형욱이 저택에 도착했다.그는 유경원을 본 순간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략 알 것 같았다.결국 진영숙은 씩씩거리며 차에 탔다. 어떻게든 유경원을 아들과 엮으려던 계획은 시도도 못해보고 막을 내렸다.유영이 떡하니
담배를 피우는 그녀의 모습은 지독히 유혹적이었다.키가 작아서 카리스마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만의 치명적인 매력이 강조되었다.그가 아는 유영은 단아하고 품위 있고 사려심 깊은… 술과 담배와는 거리가 먼 여자였다.그런데 집게손가락으로 담배를 들고 눈을 가늘게 뜬 그 모습은 마치 오랜 고독을 삼키며 살아온 쓸쓸한 여인처럼 비춰졌다.“당신은 좋아서 피우잖아.”“이유영!”“그 여자 누구야?”유영이 웃으며 물었다. 딱히 그 여자가 신경 쓰여서 물어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그런 태도에 강이한은 가슴이 아팠다.“딱 보니까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던데 당신이랑 어울리네. 진 여사님 안목은 항상 탁월하지.”“그만해!”남자가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준수했던 얼굴이 분노로 험하게 일그러졌다.반면 유영은 덤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그 여자한테 망막을 내놓는 대가로 세강의 안주인 자리를 준다고 하면 그 여자는 어떻게 나올까?”남자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당신은 줄곧 그런 식으로 나를 대했잖아. 난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마음대로 짓밟아도 좋다고 생각한 거 아니야?”비난이 아닌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말투였다.강이한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지난 번에 싸운 뒤로 그는 다시는 그녀의 앞에서 망막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그녀가 먼저 그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강이한이 변명하듯 말했다.“일시적으로 빌려주는 거고 내가 다시 돌려놓겠다고 했잖아.”하!광명을 한지음에게 빌려주라고?일시적인 거라고?이 남자는 참 쉽게도 잔인한 말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유영은 채 타지도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뒤돌아서 밖으로 향했다.“어딜 가겠다는 거야?”뒤돌아선 유영이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일시적인 거라고. 참 웃기는 말이야. 안 그래?”“그럼 그 여자한테 가서도 그렇게
“여보세요.”“네가 이런 말 듣기 싫어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우리 가문은 더 이상 유영 그 아이를 품어줄 수가 없어!”진영숙은 대놓고 말했다.줄곧 마음에 들지 않았던 며느리였는데 드디어 그녀를 내쫓을 기회가 생겼으니 놓칠 수 없었다.강이한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머니는 그럼 누가 마음에 드세요? 유경원? 걔는 마음에 들어요?”“그래! 경원이 정도면 우리 가문에 어울리지.”진영숙이 기고만장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그때 내 말 듣고 경원이랑 결혼했으면 얼마나 좋아? 적어도 이런 수치스러운 추문에 발목 잡힐 일은 없었을 거잖아?”강이한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경원이 너 결혼한 뒤로도 너만 기다리며 살았어. 여자가 그 정도 했으면 남자로서 책임을 보여줄 때야.”강이한은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유영이 전처럼 말 잘 듣고 고분고분했으면 이런 태클 정도는 얼마든지 막아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외부의 조그마한 압박에도 그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옛말이 그른 것 하나 없었다.“그렇게 걔가 좋으면 어머니가 데리고 살면 되겠네요.”“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진영숙의 앙칼진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내가 몇번이나 말했잖아요. 난 이유영이랑 이혼할 마음 없어요. 유경원한테 특별히 책임질 일도 한 적 없고요. 엄마가 그렇게 마음에 들면 본가에서 엄마가 걔를 데리고 살면 되잖아요. 어차피 우리 집에 돈은 넘쳐나니까 집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다고 집이 망하지는 않아요.”“이 무례한 녀석이! 넌 미쳤어, 미쳤다고!”수회기 너머로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이 들려오자 강이한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어머니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알고 있었다.그걸 알면서 그는 유영과 본가 식구들 사이에서 한 번도 중재를 한 적 없었다.그는 성격 좋은 유영이 이 복잡한 관계를 잘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본가의 가족들도 그녀를 인정
강이한은 끊어진 전화기를 노려보다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바닥에 던졌다.이렇게까지 양보했는데도 아직도 부족한 걸까?어떻게든 살살 달래서 홍문동으로 돌아오게 할 계획이었다.세강의 안주인인 그녀에게 집은 이곳뿐이어야 했다.망막 기증을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그것 역시… 양보할 생각이었다. 이래도 뭐가 부족한 걸까?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쨍그랑!옆에 있던 화분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 던졌지만 화가 사그라들지 않았다.그는 더 이상 과거의 우아하고 자상한 남편, 강이한이 아니었다.반면, 유영은 순정동으로 바로 가는 대신, 소은지에게 전화를 걸어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다.조금 짜증 나는 일이 많았지만 전생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일을 해냈으니 축하받아 마땅했다.“팀원들에게는 일찍 돌아가서 쉬라고 하고 내일 회식해요.”유영이 조민정에게 말했다.조민정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그래야죠. 수정한다고 다들 수고 많았으니까요.”성공한 오너의 배후에는 함께 노력하고 성장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유영에게는 비록 첫번째 창업이었지만 세강의 오너인 강이한과 오랜 세월 함께한 경험이 있기에 옆에서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예전에 강이한도 큰 건을 하나 해결하면 직원들에게 포상휴가를 주고 회식비를 지원했었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소은지는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유영이 포르쉐에서 내리는 것을 본 순간,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뭐야? 이 씀씀이는? 그래, 어차피 아껴줘도 다른 여자가 쓸 거, 네가 쓰는 게 낫지!”물론 예전에도 유영은 근검절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지금처럼 명품 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구매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소은지로서는 친구의 이런 결과가 신기하고 대견할 따름이었다.유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외삼촌이 선물한 거야. 그 사람이랑은 상관없다고.”“외삼촌이?”“그렇다니까?”“조카를 이 정도로 예뻐하는 외삼촌이 세상에 있다고?”소은지가 부
박연준은 전기봉의 행방에 대한 소식을 강이한에게 전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곁을 떠났다. 누구라도 알 수 있듯 박연준이 전달한 내용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그러나 강이한에게 주어진 것은 명백히 선택지였다.결국 강이한은 서주와 이유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고 그의 선택은 서주였다.이유영의 가슴 한구석이 답답함에 서서히 조여 왔다.그 느낌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이유영, 넌 참 똑똑해.”박연준이 이유영을 바라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내가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너희들이 하라는 대로 따르라는 거야?”이유영의 말투에는 날카로운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정말 그래야만 하는 걸까?강이한에게는 분명히 선택지였다. 하지만 이유영에게도 선택지는 있었다. 그리고 이유영은 그 선택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박연준, 아직도 모르겠어?”이유영은 냉소적으로 말했다.“평생 네 얼굴을 보지 않게 되길 기도해. 그렇지 않으면... 난 널 갈기갈기 찢어버릴지도 몰라.”이유영의 한마디 한마디는 날이 서 있었다.“...”그렇다면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증오하는 걸까?확실히 이번 일로 인해 이유영의 마음속 미움은 더욱 깊어졌다.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진심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두 사람을 산산이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박연준은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유영아!”“날 위해 서주의 모든 걸 내려놓았다고 말하려고?”이유영의 말투에는 조롱이 가득했다.모든 걸 내려놓았다.박연준이 전기봉의 소식을 강이한에게 전한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이게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난 네게 부탁한 적 없어.”이유영의 목소리는 냉랭했다.“세상엔 네가 준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법은 없어.”결국 박연준이 전기봉의 소식을 강이한에게 전한 것은 일방적인 희망일 뿐이었다.박연준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 이유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흔들리는
“우지 씨.”“네, 아가씨.”“오늘 제가 입은 옷, 무슨 색이에요?”이유영이 갑자기 물었다.이유영은 평소 이런 일상적인 질문을 잘 하지 않았다. 가끔 정원에 어떤 꽃이나 나무가 있는지 정도만 묻곤 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도 비참했지만, 자신이 입은 옷의 색조차 알 수 없는 현실은 그녀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베이지색입니다.”우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대답했다.우지는 이유영의 눈이 하루빨리 나아지기를 간절히 바랐다.이전에 이유영의 시력은 좋지 않았어도 적어도 자신이 입은 옷의 색 정도는 알 수 있었다.빛을 완전히 잃기 직전, 이유영은 몹시 두려워했다. 무엇보다도 월이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월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할까 봐, 그게 가장 두려웠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강이한은 떠났지만 박연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다음 날 아침, 이유영은 박연준에게서 희미하게 풍겨오는 비릿한 물냄새를 감지했다. 이유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결코 기분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강이한은 서주로 돌아갔어?”“너도 이제 돌아가.”서주라.생각하지 않아도 서주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혼란 속에는 이유영의 손길도 있었다.이유영은 일부러 그 혼란을 조성해 강이한에게 넘겼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유영은 전혀 만족을 느낄 수 없었다.박연준은 조용히 이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유영아,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거야?”“흥!”화가 안 풀렸냐고? 그 말은 너무 가볍게만 느껴졌다.두 사람 사이에는 단순한 화가 아니라 깊은 원한이 자리하고 있었다.“전기봉의 정보는 강이한에게 넘겨줬어.”“...”전기봉?이유영은 이전에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만약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있었다면 엔데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이곳에 더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그
과거에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겼으면서 이제 와서 단 하나의 일로 모든 걸 정리하겠다고 생각하다니?갑자기, 허리에 강한 힘이 느껴졌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순간, 이유영이 강이한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따뜻한 숨결이 얼굴에 닿았고 그와 동시에 키스가 마치 폭풍처럼 이유영을 휘감았다.이유영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강이한의 손길은 더욱 강하고 거칠게 그녀를 붙들었다. 그의 숨결에는 알 수 없는 절망과 말을 잃은 듯한 깊은 고통이 서려 있었다.마치 자신을 뼛속 깊이 각인시키려는 듯한 격렬한 집착이 느껴졌다.강이한의 따뜻한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뺨을 부드럽게 스쳤다. 그리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면, 그렇게 해줄게.”서주의 혼란이 자신을 옭아매기 위한 덫이라면, 강이한은 이유영이 원하는 대로 해줄 각오를 다졌다.만약 이것이 이유영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강잏나은 모든 걸 감내하겠다고 다짐했다.“이건 네가 해주는 게 아니야. 그건 네 죄에 대한 당연한 대가일 뿐이야.”이유영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눈동자의 이유영은, 내뱉는 말마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차갑게 꽂혔다.이유영을 품에 안고 그녀의 숨결을 느끼면서도 그 숨결에서 단 한 점의 온기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강이한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이유영은 마치 온기를 잃은 사람 같았다.어쩌면 이유영이 가진 마지막 온기는 강이한이 스스로 다 소진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것은 차가움뿐이었다.“네 말이 맞아. 이건 내가 받아야 할 대가야.”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반복하며 인정했다.하지만 강이한이 그게 무엇이든 이유영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다짐했다.강이한의 키스가 다시 한번 이유영을 집요하게 덮쳤다. 그 속에는 강이한의 절박함과 미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이유영의 손은 강이한의 손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강이한은 이유영을
“한지음이 당신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게, 내가 마지막으로 알아낸 사실이었어.”이유영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우지와 우현은 이유영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유영이 강이한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여자가 이런 고통을 감내했다면 어떤 보상으로도 그 상처를 메울 수는 없을 것이다.그들은 그것이 전생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유영이 강이한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강이한이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이유영의 분노를 촉발하기에 충분했다.그것은 한 여자가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다.“그 아이는 존재하지 않아!”강이한은 지금껏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설명하지 않았다.왜냐하면 과거에 한지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유영의 반응은 너무 격렬했기 때문에 이유영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이유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어떤 일이 있었던지 지금은 분명히 해명해야 했다.“갈 거야?”“...”그 말을 듣는 순간, 강이한의 온몸이 굳어졌다.이유영의 말은 너무도 날카로웠다. 때로는 이유영의 날카로운 직감이 강이한의 가슴을 찌르고 아프게 했다.강이한은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그 고통은 너무도 쓰라리고 견디기 힘들었다.“떠나는 게 나을 거야. 서주에 너무 오래 머물렀잖아. 네가 돌아갔을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기대되네.”이유영의 말은 마치 비웃음과도 같았다.엔테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금, 가문의 모든 구성원이 그 문서를 손에 넣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그리고 그 문서의 절반은 강이한의 손에 있었다.하지만 절반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온전한 문서가 있어야만 가치가 있었다.문제는 전기봉이 행방불명 상태라는 것이다. 문서의 절반을 가진 강이한에게 이 문서는 귀중한 자산이 아니라 끝없는 골칫거리일 뿐이었다.게다가 그의
한지음은 강이한에게 너무도 중요한 존재였다. 만약 강이한에게 또다시 기회가 주어졌다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건 오직 이유영과 아이뿐이었을 것이다.“유영아...”강이한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가 흐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는 정말 아무런 자격도 없었다. 심지어 고통받을 자격조차 없었다.아이와 함께 성장하며 곁을 지킬 권리도 자격도 없었고 이유영의 말처럼, 강이한은 정말 아무런 자격도 없었다.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강이한이 이유영의 곁에서 겪었던 내적 변화를.이유영을 바라볼 때마다 강이한의 가슴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으로 아팠다. 그 고통은 뼛속까지 쓰라리고 깊게 파고들었다....점심이 되자 또다시 쓰디쓴 약이 준비되었다.그때 박연준이 찾아왔다.박연준은 강이한과 서재에서 두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이 서재에서 나왔을 때의 무거운 분위기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서주 쪽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우현 씨.”“네, 아가씨.”우현이 이유영의 부름에 공손히 다가왔다.“국물 맛있네요. 한 그릇 더 줘요.”두 사람의 무거운 분위기가 이유영의 마음속에 묘한 위안을 주는 듯 이유영의 말투는 가벼웠다.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유영과 강이한, 그리고 박연준 사이의 관계였다.두 사람이 고통 속에 있을 때만 이유영의 마음은 잠시나마 가벼워지는 듯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눈에서 무겁고 복잡한 감정을 읽어냈다.이유영은 두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다.이번 생에서 두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그들을 미워하며 마주할 때마다 이유영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이건 인과응보와도 같았다.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이용하지 말라는 말이 떠올랐다. 결국, 모든 것은 자신들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과거의 강이한과 박연준은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아가씨.”우현은 조심
모두가 아이가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했다.왜냐하면 아이가 건강해져야 이유영도 비로소 괜찮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유영의 차분한 말이 이어질수록 강이한의 가슴은 점점 더 답답하게 조여 왔다.“그 아이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님까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아이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 아이를 데려가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는 거야?”이유영은 이런 이야기를 지금껏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었다.그러나 지금, 강이한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이유영이 월이를 이용해 이온유를 구하지 못하게 막았는지를.그 아이는 이유영에게 보물 같은 존재였다. 언제라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며 간절히 붙잡고 있었던 아이였으니, 이유영이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강이한, 너 알아? 난 한 번도 너를 이렇게까지 미워해 본 적이 없었어.”“알아, 나도 알아.”강이한은 이유영을 끌어안으며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왜 이유영이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게 되었는지를.이유영은 단지 아이와 함께 평온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이유영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는 단순한 바람이 전부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원한을 다 내려놓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 단순한 바람마저 결국 강이한의 손으로 모두 부숴버렸다. 그래서 이유영은 더 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그렇게 두려움 속에 갇혀버렸다.그렇게 이유영은 강이한과의 싸움을 이어가며 아이와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미안해. 내가 잘못했어...”강이한은 더 이상 이유영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그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하고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었다.어디에도 즐거운 기억은 없었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 심장은 항상 불타고 있었다.그 누구도, 월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알지 못했다.“그만해.”“이게 네가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 아니었어?”“...”“이게 바로 그 아이를 키우며 우리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
“그때 소군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이를 낳지 말라고 했어.”그때 이유영의 주변 사람들은 이유영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며 설득하려 했다.하지만 아무리 주변에서 말려도 이유영은 끝까지 버텨냈다.“화상이 심했던 부위는 살을 도려내야 했어. 지금 내 몸에 남아 있는 움푹 패인 흉터들은 그때 생긴 상처를 치료하면서 생긴 거야.”“...”“마취를 할 수도 없었어.”마취를 할 수 없었다는 이 말 한마디는 강이한처럼 강인한 사람마저 몸을 떨게 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몸에 남아 있는 흉터들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상처의 넓은 면적을 직접 본 그는 이유영이 겪었을 고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취 없이 그 모든 과정을 견뎌야 했다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사람들이 그러더라. 아이는 여자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는 존재라고. 전엔 그 말이 와닿지 않았는데 월이를 통해 그 뜻을 알게 됐어.”그때 이유영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배 속의 아이를 지키겠다는 결심만큼은 굳건했다.이유영이 마음 깊은 곳에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가늠조차 어려웠다.“아무리 조심해서 약을 써도 내 몸 상태 탓에 결국 월이는 조산하게 됐어.”이유영은 마치 별일 아닌 듯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유영이 겪은 모든 과정이 너무도 무겁고 가혹하게 느껴졌다.“유영아...”강이한은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려 하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목구멍은 점점 더 조여 오는 듯했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알고 있어? 월이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거.”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던 건 착각이었다. 그 순간부터 새로운 고통과 불안이 시작되었다.건강한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하물며 조산아를 키우는 데는 그보다 훨씬
그러나 그 세 글자는 아무것도 메울 수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약을 단숨에 삼켰다.쓰디쓴 약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온몸을 떨리게 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약이 이유영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표정과 떨리는 몸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약을 삼킬 때마다 점점 더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처마 아래 놓인 흔들의자는 이유영이 특히 애착을 가지는 자리였다.강이한이 말했다.“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들어가자.”“대나무 향이 나.”은은하고 차분한 대나무 향기가 이유영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넌 지금 감기에 걸리면 안 돼.”강이한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하고 인내심이 담겨 있었다.“비는 언제쯤 그칠까?”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우천시에 대한 기억은 끝없이 내리는 비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 온 후로 비가 그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날씨 예보에 따르면 다음 주 내내 비가 온대.”“...”참으로 기묘한 날씨였다. 어떻게 이토록 비가 쉴 새 없이 내릴 수 있을까?우천시 사람들은 모두 이 기후에 익숙해졌을지 이유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우지 씨에게 수건 잘 말리라고 전해줘. 아침에 보니 수건에서 냄새가 나더라고.”사실 매일 수건을 잘 말리려 했지만 이곳의 습한 기후는 번번이 우지를 난처하게 했다.우지는 매일 정성을 다해 수건을 세탁하고 말렸지만 밤새 뽀송했던 수건도 아침이면 눅눅해지고 냄새가 배어 있었다.결국 매번 건조기에 넣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온전히 뽀송하지는 않았다.“알겠어.”강이한은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며시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결벽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홍문동에 있었을 때도 이유영은 항상 완벽한 청결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유영아.”“응?”“그 아이가 자라면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 좀 이야기해 줘.”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강이한의 가슴은 미어졌다.“네가 그걸 알 자격이
“기다려야 해!”강이한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강경했다.“...”이유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맴돌며 무겁게 울려 퍼졌다.강이한은 이어 말했다.“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났어. 지금은 우천시에 머무는 게 더 안전해.”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분명했다. 이유영은 이전에 엔데스 명우와 얽혔던 적이 있었고 강이한은 이유영이 다시 위험에 휘말릴까 걱정하고 있었다.지금 정씨 가문은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 어떤 현실이 숨겨져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이런 시점에서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험 속으로 돌려보낼 리 없었다.이유영은 낮게 읊조리듯 물었다.“돌아가셨어?”이유영도 대충 파리 쪽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대체로 그 문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엔데스 가문은 오래전부터 그 문제에 깊이 휘말려 있었고 지금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유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그렇다면 우리 집은...”“네 아버지는 신중한 분이니까 누군가에게 쉽게 휘둘리진 않을 거야.”강이한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지금 이유영이 얼마나 가족을 걱정하고 있는지는 강이한도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잠시 이유영의 얼굴을 살폈다.“그럼, 소은지는?”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이 소은지였다.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와 얽힌 원한뿐만 아니라 엔데스 현우와의 관계에서도 깊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의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지만, 상황은 오히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워질 줄은 몰랐다. 엔데스 가문은 이제 완전히 갈라진 듯했고 그 속에서 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바로 소은지였다.강이한은 미소를 가장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는 정말 모든 사람을 걱정하는구나.”이유영은 언제나 타인에겐 따뜻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무척 냉정했다.“...”이유영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