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박연준이었다.이유영은 알고 있었다. 그가 왜 그 시점에 우천시에서 그녀와 혼인 신고를 했는지.하지만 박연준의 그 호의를 이유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다정함 뒤에는 강이한처럼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의 호의가 단순한 호의로 보이지 않게 된 것이.“박연준과 떨어져 있는 게 좋겠어.”이유영이 박연준과 이혼하고 싶다고 말하자 여진우가 가만히 웃었다.그의 눈에는 안도감이 서려 있었지만 동시에 짙은 걱정도 비쳤다.여진우는 느낄 수 있었다. 이유영이 자신을 지나치게 보호하고 있다는걸.강이한과 박연준을 겪은 후, 그녀는 가족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고 누군가가 다가와 호의를 베풀면 그 안에 반드시 숨은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렇기에, 여진우는 강이한이 떠나면서 박연준을 그녀 곁에 남겨둔 이유를 깨달았다. 이유영와 박연준의 사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애초에 박연준 말고는 이유영이 다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을 것 같았다.미래에 아무리 진심으로 이유영을 대하는 사람을 만나도 이유영은 똑같이 진심을 내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지금... 점심시간이야?”이유영이 물었다.수술을 받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예전에 우천시나 모이산에 있을 때, 주변의 기운만으로도 밤과 낮을 가늠할 수 있었다.심지어 조명의 밝기만으로도 시간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병원에 있는 동안, 그녀가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소독약 냄새였다.그것은 불쾌하게 모든 감각을 방해했다.게다가 겨우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후로는 계속 죽만 먹었으니 음식으로 시간을 가늠하는 것도 힘들었다.여진우가 답했다.“점심이야.”“저녁에는 다른 걸 먹을 수 있을까?”죽만 먹은 지 너무 오래되었고 입안에서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이유영이 투덜거렸다.여진우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
여진우는 조용히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잘 지내고 있으니까. 매일 의사가 소독하면서 검사도 하고 있는데 아무 문제 없대요.”적어도 현재로서는 의사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그래도 걱정돼.”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눈에 문제가 생기면 보통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런 큰 문제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그래서 무엇보다도 아무 일 없이 잘 회복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내일까지 아무 문제 없으면 집으로 돌아올 거지?”“네.”“그러면 됐어. 맛있는 음식 준비해 둘게.”임소미는 여진우와 이유영이 수술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녀의 말에, 여진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좋아.”임소미도 부드럽게 대답했다.그 따뜻한 목소리에 여진우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동시에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전화를 끊고 그는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엄마한테서 온 전화야?”“응, 맛있는 음식 준비해 줄 거래.”여진우가 웃으며 말했지만 이유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임소미가 해주는 음식을 떠올리자 이유영의 마음에 갑자기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함이 밀려왔다.“왜 그래?”“엄마를 외숙모로 알고 있을 때부터 나한테 정말 잘해줬어.”이유영은 감동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사람은 복을 쌓으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그때 임소미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유영을 친딸처럼 아껴주었다.여진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말했다.“좋은 사람이야.”“응.”이유영도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임소미는 좋은 사람이었다.강이한이 임소미 앞에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건, 그가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도 강이한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내일 붕대를 풀 거야. 무서워?”여진우가 이유영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물었다.이유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무서워. 당연히 무섭지.”이유영은 진심으로 두려웠다. 예전에도 한지음도 같은 수술을 받았지만 실패했었다.수술이란 절대 백 퍼센트 성공
그 순간, 이유영과 여진우의 숨이 가빠졌다.이유영은 눈을 감은 채, 마치 무언가에 붙잡힌 듯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마지막 순간이었다.이제 눈을 뜨는 순간, 무엇을 마주하든 그것이 앞으로 남은 삶 동안 마주해야 할 현실이 될 터였다.“눈 떠보세요!”의사의 목소리가 한층 강해졌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그 목소리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목소리였다.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배준석이었다.강이한과 싸운 뒤, 완전히 사라졌던 그 사람.그가 여기에 있다고?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유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때, 여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준석아, 너 때문에 유영이가 놀랐잖아.”배준석의 묵직한 목소리보다 여진우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병실에 울리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여진우가 배준석을 그렇게 부르는 걸 듣자, 이유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려 했다.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눈을 뜰 수가 없어.”병실은 고요해졌다.그때, 차가운 손끝이 피부를 스쳤다. 배준석은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닦아냈다.보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이유영은 자신의 수술을 집도한 사람이 바로 배준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믿을 수 없었다.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고 단순한 긴장이 아니라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 휘몰아쳤다.왜냐하면 배준석이 바로 한지음의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였다.그때 청하시는 얼마나 혼란스러웠던가.왜 강이한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걸 받아들이라고 했을까?어떻게 그렇게 평온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 씨.”배준석이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제 기억 속의 이유영 씨는 나약한 주부가 아니었어요.”그 한마디에, 이유영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그렇다. 그녀는 한때 평범한 주부였다.그런
흐릿한 시야 속에서 이유영은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살폈다.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지만 여전히 안개 속에서 헤매는 듯 희미했다.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마침내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눈앞의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이유영은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모두가 긴장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지와 우현은 작은 손을 꼭 잡은 채,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려는 듯 서로를 꼭 붙잡고 있었다.두 아이는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지. 만약 그녀가 영원히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 될 터였다.“이유영 씨.”“보여요.”배준석은 이유영에게 복수하지 않았다.그 사실을 깨닫자, 이유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금 전, 배준석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온몸이 긴장했고 심지어 공포감에 휩싸였었다.의사는 평소 만날 일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절대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되는 존재다. 환자가 되는 순간, 결국 그의 손길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유영아.”여진우는 조용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 순간, 이유영은 여진우의 온몸이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이제는 익숙했다.그래서 여진우가 자신을 안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온기를 느끼며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하지만 이제 볼 수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감각에만 의존했던 자신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정말 보여?”여진우는 그녀를 품에서 놔주고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보여.”진짜였다. 정말 볼 수 있었다.여진우는 장난스럽게 물었다.“내가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보여? ““파란색.”“...”“됐어. 너 수염 난 것도 다 보여.”태연한 이유영의 말에, 여진우는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오늘 아침 면도를 깜빡했는데 그녀가 단번에 알아챈 것이다.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고 병실 안 공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수술은 성공했다.붕대를 풀고 눈
여진우는 이유영과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한 사람은 배준석이었다.청하시에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곳에서의 배준석은 마치 햇살처럼 밝은 청년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그는 끝없는 광기와 붕괴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때의 그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에게 가차 없이 상처를 입혔다.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그는 미친개처럼 사람만 보면 물어뜯으려 했고 특히 이유영에게는 더욱 그랬다.지금도 이유영은 그날 밤 순정동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배준석은 조형욱과 함께 이유영의 집으로 찾아와 뱃속 아이를 없애려 했다.거의 3년 만에 다시 만난 배준석은 마치 숱한 풍파를 겪고 난 후의 고요함처럼 예전보다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는 씁쓸함과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여진우는 지쳐 있었다.오랜 시간 이유영의 곁을 밤낮으로 지켰던 탓에 그녀가 건강을 회복하자 비행기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배준석은 잔에 따른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정말 그렇게 미워요?”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요즘 이유영 앞에서 강이한과 박연준의 이야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기에 덕분에 그녀는 비교적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하지만 배준석이 그 이야기를 꺼내자, 이유영은 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진정하려 애썼다. 요즘 그녀는 금식 중이었다. 예전에는 죽을 먹으며 다른 음식을 달라고 떼를 썼지만 다시 볼 수 있게 된 후 시력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는 눈을 위해서라면 한 달 금식은 물론, 1년, 2년도 감수할 수 있었다.술은 절대 마실 수 없었다.배준석의 질문에, 이유영은 조용히 되물었다.“준석 씨는 누구를 미워해요?”이유영은 생각했다.배준석이 자신을 위해 수술을 집도하고 평생을 바친 연구로 성공을 이루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가 과거에 약혼녀를 해쳤던 진짜 범인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배준석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을 만나기 전, 비록 아무것도 없었지만 적어도 순수했다.강이한은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을 앗아갔다. 계산해 보면 그는 이유영을 2년 동안 지켜왔고 5년을 연애했으며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다.이유영은 그 감정이 진짜라고 믿었고 온 마음을 다해 화답했다. 하지만 사랑은 결국 거짓이었다.강이한도, 박연준도 모두 거짓이었다.강이한은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끝없는 사랑을 선물했지만 박연준은 그녀가 가장 힘들 때 가장 큰 보호를 제공했다.한 명은 사랑을 주었지만 보호는 없었고 다른 한 명은 보호를 제공했지만 사랑은 없었다.둘 중 누구든, 이유영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래서 그녀는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없었다.“알겠어요.”배준석이 씁쓸하게 말했다.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거예요.”“...”“하지만 그들은 저에게...”이유영은 말을 멈췄다.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냥 보내주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끝내 이유영을 놓아주지 않았다.“배준석 씨.”“네?”“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생사의 이별이 아니라 사랑하지만 얻을 수 없는 사랑이에요.”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유영은 어땠을까?그녀가 손에 쥔 모든 것은 원래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그것은 사랑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었다.“그는 이유영 씨에게 진심이었어요.”배준석이 이유영이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러나 이유영은 비웃음만 나왔다.진심이라고?그 말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진심이란 것이 존재할까? 누가 누구에게 끝까지 진심일 수 있을까? 마음을 다한 사람이 결국 가장 큰 패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과거의 자신이 너무 진심이었기에 지금 이렇게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 순간, 배준석은 확신했다.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영원히 용서하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임소미는 이유영을 꼭 끌어안으며 마치 텅 비었던 가슴이 채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이유영이 돌아오기 전, 임소미는 이미 그녀의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여진우가 전화를 걸어 기쁜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수술 전까지 모두가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던 만큼, 그 소식은 임소미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었다.“엄마, 숨 막혀요.”이유영이 투덜거렸다.“얘가...”임소미는 그녀를 품 안에서 놔줬지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 작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부드럽게 눈가를 쓰다듬었다.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임소미의 가슴은 다시 먹먹해졌다.지난 2년 동안, 이유영의 눈에 드리워진 어둠을 바라보며 마지막에 결국 텅 빈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임소미가 얼마나 가슴 아프고 두려웠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정말 볼 수 있는 거 맞지?”이렇게 맑은 눈동자를 보고도 여전히 불안했던 임소미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정말 볼 수 있어요. 엄마, 오늘 검은색 원피스 입으셨네요.”“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이유영이 옷 색깔을 정확히 맞추자 임소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국진도 그 말을 듣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됐어, 보이면 됐어.”“아빠.”“밥 먹자.”이것이 바로 가족이었다.언제든 집에 돌아오면 따뜻한 밥과 뜨끈한 국이 기다리고 있는 곳.여진우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따뜻함을.정국진과 임소미 앞에서 그도 편안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참 좋았다.재벌 가문에서 이렇게 화목한 가족 분위기를 가진 곳은 드물었다. 그들은 보기 드문 조화를 이루며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식탁에는 여진우가 좋아하는 음식과 함께 이유영을 위해 준비된 담백한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고 이유영은 기꺼이 그 음식을 받아들였다.“엄마, 저거 먹고 싶어요.”월이는 이유영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다 멈칫했다.“아빠?”“아니야, 가서 쉬어.”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불러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다니.정국진의 눈에 스친 망설임을 이유영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파리와 서주에서 벌어진 일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으니까.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이 말했다.“그럼 전 방으로 돌아갈게요.”“응.”이유영이 서재를 나서자 정국진만 남은 공간에는 복잡한 기운이 감돌았다.서주에서 박연준이 돌아왔다.그리고 강이한은...정국진은 사람을 보내 그의 행방을 찾으려 했지만 강이한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는 떠날 때 자신의 흔적을 완벽하게 감췄다. 마치 세상에서 존재조차 지워버린 듯했다.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수술 후에는 이유영을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이유영을 완전히 떠나기 전, 그는 얼마나 깊은 고통을 견뎌야 했을까?...방으로 돌아오자, 유 아주머니와 월이가 있었다.유 아주머니는 이유영을 보자 바비 인형을 월이에게 건네며 공손히 말했다.“아가씨.”“네.”“잠시만요.”이유영이 잠시 머뭇거리다 유 아주머니를 향해 물었다.“그 사람, 몇 번이나 왔어요?”강이한을 물어보고 있었다.이제는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정씨 가문 사람들은 이유영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유 아주머니는 조용히 대답했다.“두 번 왔어요.”두 번.즉, 우천시에서 돌아온 후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이유영은 강이한이 아이를 보러 왔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느꼈다.그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느껴졌다. 만약 그가 아이가 자신의 혈육이라는 걸 알고도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이 세상에 그가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일단 나가보세요.”“네, 아가씨.”유 아주머니는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갔다.이유영은 조용히 월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
“강이한은 2년 동안 자신을 가둔 채 보냈어.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지금의 이유영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이토록 담담한 걸까?심장이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걸까?“네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이겨내기 시작했어.”그때를 떠올리자 진영숙은 한층 더 괴로워졌다. 그녀는 마치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다.강이한은 아직도 그 안에 있었고 이건 그가 내린 선택이었다.“강이한은 지금 혼자 그 벌을 받는 거야. 네가 겪었던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겪고 있어. 알기나 해?”이유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저 자기만 강이한 곁에서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렇게 뛰어난 강이한이 결국 이유영 때문에 그런 비극적인 끝을 맞았다. 그녀를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거나 다름없었다.이제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이유영은 그저 묵묵히 아무 미동도 없이 모든 것을 보고만 있었다.이 모든 사실을 이유영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진영숙은 생각했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진영숙이 이런 사실을 이유영에게 말한 이유는 그녀가 너무 차갑게만 강이한을 생각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강이한의 실종에 조금의 반응이라도 보여줬으면 했다.강이한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랐다.진영숙의 삶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그녀는 이유영만 편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친듯이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것이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모든 걸 다 말했음에도 이유영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건 그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대가였어요.”“...”순간 머릿속이 무언가에 부딪친 듯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정하고 차가운 말을 뱉는 사람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하지만 만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한지음의 존재는 그녀에게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했고 연서라는 사람을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정말이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경고할게요. 제 딸에게 다시는 접근하지 마요. 그 아이는 강이한과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이유영!”진영숙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녀의 눈빛 속엔 끓어오르는 분노가 맺혀 있었다.하지만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뒤섞여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냉정할 수가 있어?”이유영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진영숙은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저토록 무심할 수 있을까?’냉정하다는 말을 들은 이유영의 입가엔 오히려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냉정하다고?’“지금 강이한이 살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또렷하게 힘주어 말했다.강이한이 서주에서 모두 철수한 것에 대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사실상 생사불명이었다.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유영은 이렇게 냉담하게 말할 수 있다니 진영숙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의 마음은 돌보다도 더 차갑고 무정했다.아무리 돌이라도 오랜 시간 함께 있었다면 어느 정도는 온기가 스몄을 텐데 이유영은 아니었다.강이한이 생사불명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한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냉정하다고요?”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진영숙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녀의 두 눈엔 오로지 분노만 가득했다.“그럼 아니야?”‘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어떻게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생사불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조차 이유영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
한 시간 뒤, 이유영은 풍산 그룹에 모습을 드러냈다.진영숙과 마주한 순간, 그녀의 눈빛엔 깊고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뜻밖에도 박연준은 진영숙을 파리에 남겨두었는데 아마도 그녀 스스로 떠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진영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강이한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손에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진영숙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네가 강이한의 딸을 낳았다니 믿기지 않는구나.”“...”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차디찼고 이어지는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왜요? 뱃속에서 죽이지 못해서 화가 났어요?”그 말에 진영숙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그녀의 눈에 스치는 감정은 슬픔이었다.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듯 쓸쓸함이 스며들었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눈빛엔 더 이상 분노가 없었다.남은 건 흩어진 슬픔뿐이었다.이유영의 싸늘한 태도 앞에서 진영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결국 고개를 돌리며 낮게 말했다.“우리 애 어디 있는지만 말해줘.”긴 시간이 흘렀지만 진영숙은 여전히 강이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이유영뿐이라 믿고 있었다.박연준이 사람들을 풀어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진영숙도 기약 없는 기다림만 계속됐다.박연준은 그녀와 함께 서주로 가자고 했지만 진영숙은 끝내 따라나서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모른다고 했잖아요.”“정말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진영숙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뭐라고요?”‘무엇을 의심하란 말이지?’“내가 들은 바로는 강이한이 너를 우천시로 데려갔던 건 염 선생을 찾기 위해서였대. 그땐 너도 몰랐겠지.”“...”“그런데 네 수술 시기에 맞춰 각막이 정확히 준비돼 있었어.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이 상황을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단 말인가?’그 말에 이유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그
여진우의 목소리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묻지 말라고?’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소은지에 관한 것만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여진우는 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늘 그렇듯 그들은 단순한 적이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은지는 이제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야.”그 말에 이유영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소은지가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라고?’이미 어지러웠던 머릿속은 그 말 한마디에 더욱 복잡하게 뒤엉켰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오늘 송씨 가문 소식은 들었어?”“들었어.”이유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그 소식을 접한 뒤, 파리 전체가 마치 안개 속에 잠긴 듯 모든 게 흐릿하고 불길했다.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여진우의 품에 안긴 순간, 이유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에 짓눌렸다. 그의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느낀 이유영은 무언가 정말로 큰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긴 침묵이 흐른 후, 이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찾았어?”지금 그 도장과 문서는 엔데스 가문 사람들에게 극도로 민감한 존재였다.그 하나가 모든 걸 좌우할 수도 있었다.도장 이야기가 나오자 여진우는 그녀를 더 꼭 안아주며 낮게 말했다.“아무 일 없으면 곧 나올 거야.”그 말은 다짐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위로 같았다. 그 도장이 어떤 의미인지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잠시 뒤, 여진우는 자리를 떴고 정국진도 오늘 집에 없었다.백산 별장에는 임소미와 이유영, 그리고 조기 교육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월이만 남아 있었다.월이는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방 안을 돌아다녔고 그 모습은 한없이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예전엔 조기 교육 센터에 가기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즐거운 듯 아침마다 스
남기가 방 안으로 들어서서 조용히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저씨, 오늘은 몇 명이나 더 찾아올 것 같아요?”단순한 질문 같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탐색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남기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지금으로서는 일곱째 도련님 쪽에서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말뜻은 분명했다. 소은지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하라는 경고였다.소은지의 눈빛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가능하다면 이렇게 얽히고설킨 일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이 늪으로 끌어들인 건 도대체 누구였을까?엔데스 명우. 그 이름이 떠오르자 소은지의 머릿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다시 어른거렸다.송연미가 전해준 말을 떠올리며 소은지는 조용히 물었다.“남기 아저씨, 지금 제가 떠난다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송씨 가문의 결정을 떠올리자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현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뚜렷해졌다.남기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신 이후로 일곱째 도련님은 송연정 아가씨와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래요?”‘그렇다면 송연미가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소은지가 생각에 잠기자 남기가 말을 이었다.“일곱째 도련님은 언제나 눈치가 빠르십니다. 송씨 가문과 선을 그은 걸 보면 뭔가 그 속셈을 알아보신 듯합니다.”“...”“그리고 지금 사모님을 떠나게 하지 않는 이유는 사모님이 이 자리를 지켜주셔야 다른 사람들이 넘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물론입니다.”남기의 말에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우천시에 있었을 때,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며느리 자리를 노리는 가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송씨 가문이었다.예전엔 현우를 지지하는 송씨 가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오늘 송연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자 송씨 가문 회장님의 인품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그 사실을 인식하자 오히려 마
사실 모든 기회는 그녀가 온갖 노력을 다해 엔데스 운빈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낸 그 순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씨 가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왜 송연정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은 끝내 선택하지 않았던 걸까?’처음엔 그 이유가 운빈과의 관계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느닷없이 엔데스 신우와의 혼사를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송연미는 문득 깨달았다.그 모든 결정의 이면엔 현우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결국 현우의 태도가 아버지의 선택을 바꿔 놓은 것이다.“현우를 만나야겠어.”송연미는 온몸을 떨며 소은지를 바라봤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현우를 직접 만나서 물어야 했다.차가운 엔데스 가문의 셋째 사모님으로 불리던 그녀는 지금 반산월에서 감정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있었다.몇 년 전, 현우가 파리를 떠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어떤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 오랜 기다림 끝에 현우가 돌아왔고 그녀는 현우와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그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단호히 끊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현우였다.“네 전화도 받지 않는데, 널 만나고 싶어 할까?”소은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 한마디가 송연미는 더 깊이 무너졌다. 이미 흔들리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그 순간 완전히 부서지는 듯했다.그녀의 눈빛엔 절망이 가득했다.“그래도 현우를 꼭 만나야 해.”송연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엔데스 신우와의 결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결정 앞에서 그녀는 늘 무기력할 뿐이었다.그동안 엔데스 운빈 곁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텼는지 모른다.그리고 현우가 돌아오자 그녀는 주저 없이 모든 것을 정리했다.하지만 지금 현우는 그녀를 차갑게
소은지는 조용히 송연정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았다.그녀의 눈빛엔 이미 무거운 결심이 내려앉아 있었다.송연정 역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 속에는 오래 참아온 비통함이 스며 있었고 그 아래엔 날 선 증오가 번득였다.“왜 엔데스 신우랑 결혼시키려는지 알아?”“왜?”‘엔데스 운빈과의 관계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또다시 다른 사람과의 혼사를 이야기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닌가?’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한때 송연정을 ‘넷째 사모님’으로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지금은 어떤 상황이 되어 버린 걸까?’“왜냐하면 네가 아직 여기에 있기 때문이야.”소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원래 아버지는 송연정과 현우의 혼사를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돌아오면서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거야.”“...”“넌 우리 아버지가 그냥 호의로 누굴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소은지, 대체 얼마나 더 망쳐야 속이 시원하겠어?”“...”“지금 엔데스 가문 상황이 현우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모르는 거야?”송연정은 마치 이 모든 일이 소은지 탓이라도 되는 듯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실제로 소은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송연정과 현우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란히 서곤 했다.소은지는 배경도 권력도 없는 외국 여자일 뿐이었다.파리 사람들은 모두 송씨 가문과 현우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고 가문 안팎의 관심은 오롯이 현우에게 쏠려 있었다.그렇다면 그녀가 이혼을 택한 건 단지 운빈과의 관계가 아니라 엔데스 가문 자체와 더 깊은 얽힘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그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야 현우와 다시 함께 할 수 있으니까.소은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잊었어? 내가 우천시에서 돌아온 이유, 바로 너 때문이야.”그 말에 송연미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입술이 달싹였으나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나만 없으면 가문이 너를 선택했을 것 같아? 결국 가문이 택한 건 송연정이었어
소문에 의하면 그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소은지의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은 멍 자국과 턱을 스친 붉은 흔적을 본 남기는 조금 전 상황이 심상치 않았음을 곧장 눈치챘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남기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 괜찮으니까.”“네.”남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짙은 걱정이 남아 있었다.이건 시작에 불과했다.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피하려 하고 아무리 그와의 악연을 끊으려 해도 엔데스 가문은 그녀를 쉽게 놓아줄 리 없다는 것을.일단 엔데스 명우를 몰아냈지만 이건 단지 서막에 불과했다.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서둘러야 해요.”소은지는 조용히 남기에게 말했다.지금 그녀는 현우의 행방을 최대한 빨리 알아내야 했다.물론 이유영의 말처럼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이 오히려 가장 좋은 소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이곳은 파리다. 이 도시에서 현우는 어떤 존재였던가?이곳은 그가 살아온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잔인하리만큼 차가운 현실을 안겨주고 있었다.누가 보아도 가슴 아픈 상황이었다.“네.”남기는 조용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연미가 반산월로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그녀의 방문은 소은지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요즘 송연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느낀 이후로 소은지는 그녀를 더욱 경계하고 있었다.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로 긴장감이 흘렀고 소은지는 앞에 놓인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차분히 말을 꺼냈다.“현우 씨가 너한테 말했겠지?”그 말을 하며 소은지는 차가운 시선으로 송연미를 바라봤다.송연미도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고 눈빛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현우 씨는 네가 반산월로 날 찾아오는 걸 좋아하지 않아.”“현우는 더 이상 날 만나지 않으려고 해.”송연미는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알도 하지 않았다.“내 전화도 받지 않아.
분위기는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소은지와 엔데스 명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현우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그날부터 모든 건 이미 끝나 있었는지도 모른다.이제는 서로의 뺨까지 내리치는 지경에 이르렀다.꽤 오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명우의 웃음이었다.냉담하고 음울한 웃음이었고 소은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잔혹함과 함께 묘한 흥미가 서려 있었다.“소은지, 잘하고 있어.”그가 비웃듯 말했다.“74호는 감히 하지 못했던 걸 엔데스 가문의 일곱 번째 며느리는 해내는구나.”엔데스 명우는 그녀의 상반된 두 신분에 대해 조롱하고 있었다.명우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좋아. 아주 좋아.”그가 성큼 소은지 앞으로 다가갔고 흥미로 가득 찼던 눈빛은 이내 사나워졌다.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소은지의 턱을 움켜쥐었고 거칠게 턱선을 문지르며 위협의 기운을 내뿜었다.“지금 이 모습,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어.”소은지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분질러버릴 듯한 목소리였다.하지만 소은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당신은 그럴 능력이 없어.”“흥! 그래?”“그럼.”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몇 년 동안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뼈마디가 부러지는 고통을 주며 괴롭혀왔다.그런 그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인 적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굴복한 적은 없었다.그녀는 강했고 절대 쉽게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명우가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 여자가 어떤 인간인지.”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무언가에 의해 산산이 갈라졌다.소은지는 오늘 엔데스 명우가 끝까지 덮어두려 했던 금기를 건드리고 있었다.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그래, 넌 아직도...”명우의 입에서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소은지가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