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우는 이유영과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한 사람은 배준석이었다.청하시에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곳에서의 배준석은 마치 햇살처럼 밝은 청년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그는 끝없는 광기와 붕괴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때의 그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에게 가차 없이 상처를 입혔다.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그는 미친개처럼 사람만 보면 물어뜯으려 했고 특히 이유영에게는 더욱 그랬다.지금도 이유영은 그날 밤 순정동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배준석은 조형욱과 함께 이유영의 집으로 찾아와 뱃속 아이를 없애려 했다.거의 3년 만에 다시 만난 배준석은 마치 숱한 풍파를 겪고 난 후의 고요함처럼 예전보다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는 씁쓸함과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여진우는 지쳐 있었다.오랜 시간 이유영의 곁을 밤낮으로 지켰던 탓에 그녀가 건강을 회복하자 비행기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배준석은 잔에 따른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정말 그렇게 미워요?”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요즘 이유영 앞에서 강이한과 박연준의 이야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기에 덕분에 그녀는 비교적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하지만 배준석이 그 이야기를 꺼내자, 이유영은 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진정하려 애썼다. 요즘 그녀는 금식 중이었다. 예전에는 죽을 먹으며 다른 음식을 달라고 떼를 썼지만 다시 볼 수 있게 된 후 시력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는 눈을 위해서라면 한 달 금식은 물론, 1년, 2년도 감수할 수 있었다.술은 절대 마실 수 없었다.배준석의 질문에, 이유영은 조용히 되물었다.“준석 씨는 누구를 미워해요?”이유영은 생각했다.배준석이 자신을 위해 수술을 집도하고 평생을 바친 연구로 성공을 이루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가 과거에 약혼녀를 해쳤던 진짜 범인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배준석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이혼해요.”격렬한 사랑이 끝난 뒤, 유영은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달뜬 목소리로 덤덤히 말했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상기된 볼을 살짝 가렸다. 그녀의 두 눈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고 표정은 처량했다.남자가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렸다. 술을 잔뜩 마시고 돌아와서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지고 욕구를 방출시킨 남자, 그 어디에도 유영에 대한 존중은 없었다.10년을 사랑했지만 이제 더 이상의 미련은 남지 않았다.단추를 잠그던 강이한의 손이 움찔하더니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영을 노려보았다.“갑자기?”“네.”유영의 말투는 단호했다.말을 마친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기억을 더듬어 화장실로 향했다.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다가가서 그녀를 부축했다.“손 이리 줘봐.”탁!유영은 매몰차게 그 손길을 뿌리쳤다.하지만 힘 조절을 잘못해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저리 치워요. 당신 도움은 이제 필요 없어. 더러워.”이 남자와 같은 지붕 아래 숨 쉬고 있는 것 자체가 거북하고 불쾌했다.강이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허공에 손을 내민 채, 신경질적으로 유영을 노려보았다.지금 나한테 더럽다고 한 건가?유영은 바닥을 더듬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샤워기를 틀고 뜨거운 물로 몸에 남은 그의 흔적을 씻어냈다.할 수만 있다면 그의 손길이 닿았던 피부를 모두 도려내고 싶었다.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벽을 더듬으며 옷장으로 향했다. 시력을 잃게 된 시간이 길지 않아서 암흑 같은 이 세상이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다.유영은 손끝에 닿은 느낌을 따라 옷 한 벌을 꺼내 입고는 호적 등본을 챙기고 그에게 말했다.“지금 법원으로 가요.”“이유영.”강이한이 이를 갈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는 벌떡 일어나서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이런 모습으로 나랑 이혼하면 어떻게 살려고 그래?”그녀는 가진 게 없었다
또각또각.익숙한 하이힐 소리가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와 함께 가까워지고 있었다.한지음!강이한의 첫사랑이자 그녀의 망막을 가져간 여자.유영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고용인 부를 필요 없어. 내가 이미 불렀으니까.”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한 말투.“여긴 왜 왔어?”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이미 모든 걸 잃은 그녀에게 또 뭘 바라고 온 것일까?한지음은 그녀의 싸늘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벼운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전해줄 말이 있어서 왔어.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느 것부터 들을래?”유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너 임신했더라.”유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한지음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물론 이한 씨는 이 아이를 낳으라고 하지 않을 거야. 나도 임신했거든.”쿵!차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유영의 얼굴에 금이 갔다.‘강이한, 이런 거였어?’혈색을 잃은 그녀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렸고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유영은 치미는 분노를 꾹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여자는 자랑하러 온 것이다. 이미 모든 걸 잃었는데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내고 싶었다.그녀는 길게 심호흡하고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래? 어제 그 사람한테 내가 이혼하자고 했는데 싫다고 하더라?”그 말을 들은 한지음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유영도 그녀의 기분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내 망막까지 빼앗아 가고 임신까지 했는데 그래서 뭐? 그이는 네가 이 집의 안주인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나 봐.”강이한을 좋아해서 한지음을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이 여자에게 더 이상 짓밟히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었다.강이한과는 이미 끝내기로 했지만 집까지 찾아와서 자신을 도발하는 여자에게 가만히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하, 그래서 이한 씨가 널 사랑한다고 말하고
“악!”유영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피부에서 아직도 뜨거운 작열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남자의 거친 손이 다가와서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전해졌다.“꿈꿨어? 조금만 더 자자.”유영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고개를 돌려 보니 강이한의 준수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유영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앞이 보여? 이게 어떻게 된 거지?’눈을 다시 감았다 뜨니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창문이 보였다.천장, 커튼, 그리고 익숙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설마?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찾았다. 날짜와 시간을 확인해 보니 화재가 일어나기 몇 개월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회귀… 한 건가?강이한은 뒤척이는 소리에 불만스럽게 눈을 떴다.“아침부터 왜 이래?”그러거나 말거나 유영은 핸드폰에 찍힌 날짜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납치하기 전 날로 돌아와 있었다.“당신 왜 그래?”그녀의 이상한 반응에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유영은 남자를 내버려두고 욕실로 들어가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화상 자국이 있어야 할 팔뚝도 말끔했다.아직도 불길이 자신을 덮친 그날의 느낌이 생생한데 그녀는 그 사고가 있기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유영은 바닥에 앉아 양팔로 자신을 껴안고 중얼거렸다.“유영아, 하늘이 널 불쌍히 여겨 기회를 준 거야.”욕실을 나선 유영은 침대로 다가가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우리 이혼해.”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싸늘한 목소리에 강이한이 벌떡 일어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지금 뭐라고 했어?”“은지한테 부탁해서 이혼 서류 준비시킬 거야. 못 믿겠으면 당신도 변호사 불러.”“대체 아침부터 왜 이러는 거야?”강이한은 이 상황이
잠시 후, 소은지가 팩스로 이혼 서류를 보내왔다.이유영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사인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강이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용인은 그녀가 위층으로 올라간 뒤에 바로 외출했다고 답했다.이유영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팩스로 그의 회사에 이혼 서류를 보냈다. 서류를 확인한 비서가 다급히 그녀에게 연락했다.“사… 사모님, 대표님은 아직 출근 전입니다만….”“그 사람 도착하면 바로 사인하고 법원에서 만나자고 전해주세요.”“네… 알겠습니다.”강이한의 비서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유영은 전화를 끊은 뒤, 위층으로 올라가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거울 속에 비춰진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마누라가 예쁘다고 남자가 한눈을 팔지 않는 건 아니었다.아무리 예쁜 외모라도 질릴 때가 있는 법, 그때가 되면 남자들은 바깥의 여자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된다.이유영은 바로 차를 타고 법원 앞으로 가서 기다렸지만 점심시간이 다 될 때까지도 강이한은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바로 강이한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전화를 받았다. 영상 속 배경을 보니 회의 중인 듯했다.이유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나 법원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어. 대체 협의서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안 나타나는 거야?”회의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강이한에게로 쏠렸다.대표님이 이혼? 게다가 재산분할?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지자,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잠깐의 통화만으로도 대표가 곧 이혼한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30분 쉬었다가 다시 진행하지.”남자는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가는 강이한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자, 현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사모님께서 지금 이혼을 제기하신 거 맞지?”“그렇게 온화한 분도 폭발할 때가 있구나.”“그럼 한 비서는 어떻
이유영은 홧김에 손을 번쩍 들고 남자의 귀뺨을 때렸다.남자가 우악스럽게 그녀의 목을 잡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오늘 아침부터 이상했어. 대체 무슨 일인지 이유는 말해줘야 할 거 아니야.”강이한은 그제야 이유영이 단지 기분이 나쁜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줄곧 온화하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얌전한 현모양처였다. 정말 화가 나는 순간이 와도 그녀는 혼자 삭히고 오히려 먼저 그에게 다가와 줄 줄 아는 여자였다.이유영은 자신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곧 있으면 법원 직원들 점심 먹으러 갈 시간이야. 일단 서류부터 제출하고 다시 얘기하자.”“이유영!”남자의 호흡이 거칠어졌다.이유영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가슴을 밀쳤다. 하지만 남자는 태산처럼 요지부동이었다.강이한은 운전 기사에게 곧장 집으로 갈 것을 명령했다.어차피 기분이 엉망이라 돌아가서 회의를 계속 진행하기도 무리였다.돌아가는 길, 운전기사의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집에 도착한 뒤, 이유영과 강이한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이제 얘기해 봐.”“더 얘기할 것도 없어. 말하긴 뭘 말해?”반년 사이 비서와 바람이 난 사실을 온 청하시 사람들이 다 아는데 정작 그는 그녀에게 한 번도 제대로 된 해명조차 해주지 않았다.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이유영을 잡아먹을 것처럼 훑어보았다.그녀는 고집스럽게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담담한 태도에 남자의 표정이 점점 더 험하게 일그러졌다.“이유영, 세강 일가에게 이혼이란 존재할 수 없어. 사별이면 몰라도.”이유영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그녀는 착잡한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그래서 지난 생에 나를 불에 태워 죽인 거니?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이 첫 이혼이면 되겠네. 아니면 나가서 죽거나.”강이한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거만한 표정으로 이유영을 내려다보았다.왕의 기질을 타고난 이 남자는 화가 날 때면 항상 이
고용인이 점심식사를 식탁에 올렸다.강이한은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아 수저를 들지도 않았다.반면 이유영은 우아하게 꼭꼭 씹어서 맛있게 식사 중이었다. 이혼하겠다고 그 난리를 치던 여자가 이러고 있으니 강이한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전화를 끊은 그가 말했다.“오후에 남영에 출장 가야 해. 3일 정도 있을 거야.”그는 며칠 떨어져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 며칠 사이에 기분을 정리하고 다시는 이 불쾌한 얘기를 꺼내지 않기를 바랐다.조용히 먹는 데만 집중하던 이유영이 드디어 고개를 들고 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 모습은 지금도 미치게 아름다웠다.강이한의 동공이 확 수축하고 온몸에 긴장감이 돌았다. 결혼하고 3년이나 지났지만 그녀의 저런 모습은 여전히 그의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이유영은 그제야 과거에도 이날 강이한이 출장 갔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물론 한지음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부랴부랴 돌아왔지만.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그렇게 해. 마침 오후에 은지 만나서 그 한지음 씨를 찾아가 봐야겠어. 법률적으로 얘기할 것도 있고.”절대 강이한을 출장 가게 둘 수 없었다. 무조건 오늘은 그와 같이 있어야 한다.강이한의 참고 있던 분노가 그 순간에 폭발했다.“왜 이렇게 막무가내야? 당신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내 예전 모습 정말 기억해? 난 당신이 예전에 어땠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당신은 기억나?”뻔뻔하게 과거를 말하다니!강이한은 그제야 반년 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던 그녀가 쌓았던 불만을 한 번에 터뜨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이유영이 자신을 믿어줄 거라 생각했기에 별다른 해명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잘 참고 있다가 갑자기 이혼이라니!“결국 그 일 때문이구나.”그들 사이에 신뢰는 굳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착각이었다니!이유영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건, 입을 꾹 다물었다.지금 와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우린
그녀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강이한과 한지음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과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라고 재촉하던 그의 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7년의 달콤했던 연애와 3년간의 결혼 생활은 더 이상 떠올리기 싫었다.어제 오후, 그녀는 이혼 협의서를 필적 감정 센터로 보냈다. 아침에 깨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전화해서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었다.모든 준비가 끝난 뒤, 그녀는 소은지와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소은지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정한 오피스룩을 입고 옅은 화장을 한 그녀는 유영이 기억하는 모습과 똑같았다. 이유영도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지만 강이한과 결혼한 뒤에는 한 번도 저런 옷을 입지 않았다.매번 소은지를 만날 때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그녀가 부러웠다.“먼저 들어가 있지 않고 왜 기다리고 있어?”“고귀하신 우리 세강 사모님이 워낙 비싼 곳을 예약해서 말이지. 회원 아니면 못 들어가잖아.”그 말에 유영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그녀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친구에게 사과했다.“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몰랐어.”“장난이야.”소은지는 침울해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강이한과 함께한 뒤로 이유영은 점차 그의 세상에 완벽히 적응해 갔다.간단히 먹는 아침도 일반 직장인의 한달 월급을 육박했다.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두고 강이한의 돈 보고 결혼했다고 비난했다.“어쩌다가 생각을 바꾼 거야?”소은지가 커피잔을 들며 느긋하게 물었다.유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냥 아침에 눈을 떴는데 그런 생각이 떠올랐어.”반년 전, 소은지가 이혼을 처음 권유했을 때, 유영은 홧김에 3개월이나 그녀와 연락을 끊은 적 있었다.유영이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은지야, 전에는 미안했어. 사실 너한테 화낼 게 아니었는데 그때는 그냥 두려웠었어.”그녀는 외부에 전해지는 소문이 진짜일까 봐 두려웠다.10년이나 사랑한 사람을 한순간에 잃게 될 수도 있는데 두려운 게 어쩌면 당연했다.소은지는 대수
여진우는 이유영과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한 사람은 배준석이었다.청하시에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곳에서의 배준석은 마치 햇살처럼 밝은 청년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그는 끝없는 광기와 붕괴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때의 그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에게 가차 없이 상처를 입혔다.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그는 미친개처럼 사람만 보면 물어뜯으려 했고 특히 이유영에게는 더욱 그랬다.지금도 이유영은 그날 밤 순정동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배준석은 조형욱과 함께 이유영의 집으로 찾아와 뱃속 아이를 없애려 했다.거의 3년 만에 다시 만난 배준석은 마치 숱한 풍파를 겪고 난 후의 고요함처럼 예전보다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는 씁쓸함과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여진우는 지쳐 있었다.오랜 시간 이유영의 곁을 밤낮으로 지켰던 탓에 그녀가 건강을 회복하자 비행기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배준석은 잔에 따른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정말 그렇게 미워요?”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요즘 이유영 앞에서 강이한과 박연준의 이야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기에 덕분에 그녀는 비교적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하지만 배준석이 그 이야기를 꺼내자, 이유영은 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진정하려 애썼다. 요즘 그녀는 금식 중이었다. 예전에는 죽을 먹으며 다른 음식을 달라고 떼를 썼지만 다시 볼 수 있게 된 후 시력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는 눈을 위해서라면 한 달 금식은 물론, 1년, 2년도 감수할 수 있었다.술은 절대 마실 수 없었다.배준석의 질문에, 이유영은 조용히 되물었다.“준석 씨는 누구를 미워해요?”이유영은 생각했다.배준석이 자신을 위해 수술을 집도하고 평생을 바친 연구로 성공을 이루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가 과거에 약혼녀를 해쳤던 진짜 범인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배준석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이유영은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살폈다.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지만 여전히 안개 속에서 헤매는 듯 희미했다.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마침내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눈앞의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이유영은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모두가 긴장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지와 우현은 작은 손을 꼭 잡은 채,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려는 듯 서로를 꼭 붙잡고 있었다.두 아이는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지. 만약 그녀가 영원히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 될 터였다.“이유영 씨.”“보여요.”배준석은 이유영에게 복수하지 않았다.그 사실을 깨닫자, 이유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금 전, 배준석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온몸이 긴장했고 심지어 공포감에 휩싸였었다.의사는 평소 만날 일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절대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되는 존재다. 환자가 되는 순간, 결국 그의 손길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유영아.”여진우는 조용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 순간, 이유영은 여진우의 온몸이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이제는 익숙했다.그래서 여진우가 자신을 안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온기를 느끼며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하지만 이제 볼 수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감각에만 의존했던 자신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정말 보여?”여진우는 그녀를 품에서 놔주고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보여.”진짜였다. 정말 볼 수 있었다.여진우는 장난스럽게 물었다.“내가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보여? ““파란색.”“...”“됐어. 너 수염 난 것도 다 보여.”태연한 이유영의 말에, 여진우는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오늘 아침 면도를 깜빡했는데 그녀가 단번에 알아챈 것이다.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고 병실 안 공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수술은 성공했다.붕대를 풀고 눈
그 순간, 이유영과 여진우의 숨이 가빠졌다.이유영은 눈을 감은 채, 마치 무언가에 붙잡힌 듯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마지막 순간이었다.이제 눈을 뜨는 순간, 무엇을 마주하든 그것이 앞으로 남은 삶 동안 마주해야 할 현실이 될 터였다.“눈 떠보세요!”의사의 목소리가 한층 강해졌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그 목소리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목소리였다.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배준석이었다.강이한과 싸운 뒤, 완전히 사라졌던 그 사람.그가 여기에 있다고?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유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때, 여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준석아, 너 때문에 유영이가 놀랐잖아.”배준석의 묵직한 목소리보다 여진우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병실에 울리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여진우가 배준석을 그렇게 부르는 걸 듣자, 이유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려 했다.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눈을 뜰 수가 없어.”병실은 고요해졌다.그때, 차가운 손끝이 피부를 스쳤다. 배준석은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닦아냈다.보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이유영은 자신의 수술을 집도한 사람이 바로 배준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믿을 수 없었다.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고 단순한 긴장이 아니라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 휘몰아쳤다.왜냐하면 배준석이 바로 한지음의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였다.그때 청하시는 얼마나 혼란스러웠던가.왜 강이한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걸 받아들이라고 했을까?어떻게 그렇게 평온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 씨.”배준석이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제 기억 속의 이유영 씨는 나약한 주부가 아니었어요.”그 한마디에, 이유영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그렇다. 그녀는 한때 평범한 주부였다.그런
여진우는 조용히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잘 지내고 있으니까. 매일 의사가 소독하면서 검사도 하고 있는데 아무 문제 없대요.”적어도 현재로서는 의사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그래도 걱정돼.”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눈에 문제가 생기면 보통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런 큰 문제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그래서 무엇보다도 아무 일 없이 잘 회복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내일까지 아무 문제 없으면 집으로 돌아올 거지?”“네.”“그러면 됐어. 맛있는 음식 준비해 둘게.”임소미는 여진우와 이유영이 수술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녀의 말에, 여진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좋아.”임소미도 부드럽게 대답했다.그 따뜻한 목소리에 여진우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동시에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전화를 끊고 그는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엄마한테서 온 전화야?”“응, 맛있는 음식 준비해 줄 거래.”여진우가 웃으며 말했지만 이유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임소미가 해주는 음식을 떠올리자 이유영의 마음에 갑자기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함이 밀려왔다.“왜 그래?”“엄마를 외숙모로 알고 있을 때부터 나한테 정말 잘해줬어.”이유영은 감동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사람은 복을 쌓으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그때 임소미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유영을 친딸처럼 아껴주었다.여진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말했다.“좋은 사람이야.”“응.”이유영도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임소미는 좋은 사람이었다.강이한이 임소미 앞에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건, 그가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도 강이한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내일 붕대를 풀 거야. 무서워?”여진우가 이유영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물었다.이유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무서워. 당연히 무섭지.”이유영은 진심으로 두려웠다. 예전에도 한지음도 같은 수술을 받았지만 실패했었다.수술이란 절대 백 퍼센트 성공
그 남자는 박연준이었다.이유영은 알고 있었다. 그가 왜 그 시점에 우천시에서 그녀와 혼인 신고를 했는지.하지만 박연준의 그 호의를 이유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다정함 뒤에는 강이한처럼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의 호의가 단순한 호의로 보이지 않게 된 것이.“박연준과 떨어져 있는 게 좋겠어.”이유영이 박연준과 이혼하고 싶다고 말하자 여진우가 가만히 웃었다.그의 눈에는 안도감이 서려 있었지만 동시에 짙은 걱정도 비쳤다.여진우는 느낄 수 있었다. 이유영이 자신을 지나치게 보호하고 있다는걸.강이한과 박연준을 겪은 후, 그녀는 가족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고 누군가가 다가와 호의를 베풀면 그 안에 반드시 숨은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렇기에, 여진우는 강이한이 떠나면서 박연준을 그녀 곁에 남겨둔 이유를 깨달았다. 이유영와 박연준의 사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애초에 박연준 말고는 이유영이 다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을 것 같았다.미래에 아무리 진심으로 이유영을 대하는 사람을 만나도 이유영은 똑같이 진심을 내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지금... 점심시간이야?”이유영이 물었다.수술을 받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예전에 우천시나 모이산에 있을 때, 주변의 기운만으로도 밤과 낮을 가늠할 수 있었다.심지어 조명의 밝기만으로도 시간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병원에 있는 동안, 그녀가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소독약 냄새였다.그것은 불쾌하게 모든 감각을 방해했다.게다가 겨우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후로는 계속 죽만 먹었으니 음식으로 시간을 가늠하는 것도 힘들었다.여진우가 답했다.“점심이야.”“저녁에는 다른 걸 먹을 수 있을까?”죽만 먹은 지 너무 오래되었고 입안에서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이유영이 투덜거렸다.여진우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
정국진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유영이는 곧 돌아올 거예요. 현우가 수술이 성공했다고 했어요.”그제야 임소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대답했다.“네.”“여보!”“네?”임소미는 강이한을 가리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제 제대로 알게 됐겠지?”그녀의 목소리엔 묘한 냉소가 서려 있었다.“이유영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줬는지...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알겠지.”특히 월이가 강이한을 바라보던 눈빛.그 순간, 강이한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임소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아이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깊은 경계심을 읽어냈을 때,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안겨준 그 모든 고통을, 이번에 뼈저리게 맛보았을 것이다.그러나 정국진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래서 기뻐요?”기쁘냐고?과거에 이유영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 알았을 때 그녀는 강이한을 찢어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었다.그런데 막상 이 순간이 오고 나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찌르듯이 아팠다.사람이란 원래 그런 존재다.임소미는 작게 숨을 들이쉬며 애써 담담한 척했다.“기쁘든 기쁘지 않든, 그와 유영이가 여기까지 온 것도 최선의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이런 끝을 맞이하는 것이 어쩌면 그들에게 최선의 결말일지도 모른다.정국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네.”더 이상 미련을 남긴 채 있어 봤자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만 남을 뿐이었다.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결국 서로를 위해서도 나은 일일 터였다.임소미는 여전히 무언가 곱씹듯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그래도 믿기지 않아요.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해 모든 걸 포기했다는 사실을요. 모든 걸 박연준에게 내어주고, 서주 전체까지 내려놨어요.”남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망설일 것도 없이 권력과 지위다.하지만
잠시 후, 현우가 소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앞으로는 정씨 집안에 가지 말아요.”그 말은 곧 이틀 전 일을 가리키고 있었다.현우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소은지는 불안함을 견딜 수 없어 정씨 가문을 찾았다. 이유영의 부모님이었으니까. 그 순간 소은지가 의지할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마침 현우가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소은지는 작게 중얼거렸다.“결국 정씨 가문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거네요.”“그 사람들이 휘말릴 일은 없을 거예요.”현우는 담담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은 사실이었다.정국진이 파리에서 어떤 존재인가? 여우 같은 인물이었다. 만약 엔데스 가문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됐을 것이다.그런데도 아직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는 건,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뜻이었다.그러니, 소은지가 찾아갔다고 해도 정국진이 그 일에 휘말릴 일은 절대로 없었다.한참 침묵이 흐른 뒤, 소은지가 나직이 말했다.“돌아와서 다행이에요.”현우가 돌아온 후, 소은지는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물었지만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그럼에도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소은지의 마음을 가라앉혔고 더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파리, 특히 엔데스 가문이 얽힌 일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 속에서 버티려면 오직 냉정하게 판단하고 신중하게 움직이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현우 씨.”“네?”“저한테 사람 몇 명만 붙여 줘요.”그 말을 들은 순간, 현우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며 소은지를 바라보는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소은지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틀 전과 같은 일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요.”이틀 전.그때 소은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예전에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이 정도로 무력감을 느끼진 않았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정말로 두려웠다.다시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좋아요.”현우가 짧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소은지는 조
하지만 닮았다는 것은 닮았을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송연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지, 나와 현우는 이제 불가능하지만 너는 다를 수도 있어.”소은지는 차분히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지금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야. 누구와 가능하고 불가능한지가 지금 중요할까?”그녀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었다.“송연미, 네 가족조차 너와 현우가 함께하는 것을 반대해. 그러니 넌 네 감정에 더 충실하게 행동해야 해.”조금 전에는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하더니 이제는 감정에 충실하라고 하다니.소은지의 말 하나하나가 송연미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소은지를 바라보았고 소은지의 태도는 흔들림이 없었다.이 순간, 소은지의 말이 얼마나 송연미를 숨 막히게 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특히 ‘가족조차도 반대한다’는 말은 그녀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마치 이 세상에 오직 자신만 남은 것처럼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런 기분은 너무도 끔찍했지만 그저 억지로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숨이 막혔고 아픈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송연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은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는 나를 그렇게 쉽게 판단할 자격이 없어. 너도 마찬가지잖아. 넌 뭐 그렇게 고귀한 존재인 줄 알아?”소은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단호하게 대답했다.“내 고귀함은 그들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켜내는 거야.”송연미는 그녀를 조롱하려 했지만 소은지의 단호한 태도에 모든 말을 삼켜버렸다. 결국 답답한 것은 오직 그녀 자신뿐이었다.우천시에 다녀온 이후, 그리고 정씨 가문을 방문한 이후, 소은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무엇을 보든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송연미는 그렇게 초라하게 떠났다.이것이 바로 소은지였다.그녀는 언제나 절대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철칙을 세웠다. 그녀가 초라해지지 않는 한, 초
소은지는 한 글자 한 글자 깊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송연미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지만 소은지의 말에 더욱 색을 잃었다.그녀가 엔데스 명우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그들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과거에도, 그리고 엔데스 운빈의 곁에 있던 지난 몇 년 동안에도 불안을 안고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더욱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몰려왔다.소은지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모든 것을 끝내도 새로운 시작은 없어!”부정할 수 없었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끝난다 해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두 사람은 분명 잘 지내고 있었고 결혼식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왜 모든 책임을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걸까?“전기봉은 정말 엔데스 명우 손에 있는 거야? 사실 넌 이미 알고 있잖아.”그 순간, 송연미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늘 자신에게 엔데스 현우 곁을 떠나라고 말했지만 이제 와서 전기봉의 소식 때문에 그녀를 불러들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송연정과 현우가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했고 그 모습을 보며 그녀는 강한 자극을 받았다. 자신이 받은 고통보다 더한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소은지는 송연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더욱 깊게 새겼다.“엔데스 가문에서 오래 지내면서 결국 배웠네.”무엇을 배웠다는 것일까?가문 간의 계략을 배운 것이다.송연미는 두 손을 꼭 쥐었다.“계략, 연기.”소은지는 이 네 글자를 또렷하게 발음했다.현우에 대한 감정이 없었을 때는 그녀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웠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녀는 혼란스러웠고 눈앞이 흐려져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그래서 실수를 범한 것이다.지금은 중요한 시기였다.현우에 대한 감정이 어떻든, 지금부터 그를 완전히 마음에서 지워야 했다.이 시기가 지나가면 다시 사랑을 생각해도 늦지 않다.이것이 바로 소은지였다.사랑을 얻을 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