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든 없든,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인가?이유영은 소은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눈에 맺힌 슬픔을 보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소은지의 말이 맞았다. 모든 일에는 시작할 권리가 있지만 끝맺을 권리는 자신이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이유영은 강이한과의 관계를 통해 이미 깨달았다.처음에는 아름다운 시작이었다. 하지만 끝맺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슬픔을 감내해야 했는가!특히 엔데스 명우와 소은지의 관계는 더욱 복잡했다.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설선비와 설유나가 겪은 일처럼, 엔데스 명우는 거의 모든 것을 소은지에게 뒤집어씌웠다.“그럼 지금, 필요한 것은 없니?”이유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소은지는 단호하게 말했다.“필요한 것은 없어.”사실, 그날 밤 정씨 가문에 갔던 이후, 소은지는 정국진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가족과 권력.정국진에게는 가족이 권력보다 중요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능력으로 이미 파리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것이다.이유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상황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소은지의 상황이 언제쯤 해결될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됐어, 다른 이야기하자. 이런 무거운 이야기들은 그만하고.”소은지는 화제를 돌렸다.이런 이야기는 너무 무거웠다. 어차피 마주해야 할 일이라면 괜히 입에 달고 살 필요는 없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일일 뿐이니까.“다른 이야기?”“응, 나 따라와.”소은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유영의 손을 잡고 뒷마당으로 향했다.이곳의 구조는 이유영의 모이산과 매우 비슷했다. 심지어 인테리어 스타일도 유사했다.뒷마당에 들어서자 진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는데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했다.이유영은 놀란 듯 말했다.“꽃이 이렇게 많아?”“응.”꽃?이렇게 많은 꽃을 한꺼번에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희귀한 품종들까지. 이유영은 신기한
소은지는 한때 집안일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하며 전업주부가 되는 여자를 무시했다.맡길 수 있는 건 맡기고, 굳이 직접 할 필요 없는 일까지 애써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여자는 어떤 위치에 있어도, 그것이 작은 일이라도 지혜를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그런데 이유영은 강이한과 결혼한 뒤, 마치 학교에서 배운 모든 걸 다 잊어버린 사람처럼 전업주부라는 역할에 온전히 빠져들었다.그 모습을 본 소은지는 단호하게 말했었다.“전업주부는 위험한 직업이야.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잖아. 그렇게 되면 미래가 더욱 막막해질 거야.”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처음엔 좋은 사장이었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 있는 법이다.오래 착취하다 보면 착취는 곧 당연해지고, 그렇게 모든 것은 결국 변질되기 마련이었다.남편도 다르지 않았다.소은지는 깊이 한숨을 쉬고 씁쓸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너, 내가 이런 걸 어떻게 배웠는지 알아?”이유영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떻게 배웠는데?”현우 옆에서 배운 게 아니겠나?소은지는 지금 엔데스 가문의 칠 남매 중 막내며느리다. 바깥일은 꿈도 못 꾸는 처지라 늘 시간이 남아돌았을 터였다.이유영도 심심해서 한 일이었다. 어쩌면 소은지도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소은지는 가위를 쥔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마치 마음속 응어리가 고스란히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했다.소은지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사람 옆에서 배웠어.”이유영은 할 말을 잃었다.소은지가 말한 그 사람은 엔데스 명우였다.“그 사람은 내가 온순한 새가 되기를 바랐어.”그 말에 이유영의 가슴이 턱 막혔다.그제야 이유영은 알 것 같았다. 소은지가 엔데스 명우 옆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엔데스 명우는 참 악랄했다. 차라리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하게 소은지를 짓밟았다.그는 소은지의 강인한 정신을 알아본 것이다. 청하시에서 소은지는 유명한 이혼 전문 변호사였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였기에 그만큼 높
소은지의 담담한 말투 속에서 이유영은 그녀가 엔데스 명우에게 맞서 싸우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엔데스 명우는 애초부터 소은지를 증오했다.그러니 소은지의 저항은 마치 야수를 자극하는 것과 같았고 그는 더욱 잔혹해졌다.그 잔혹함 속에서 소은지는 처음에는 꺾이지 않는 의지로 버텼지만 끝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진정한 타협은 아니었다.그녀 역시 엔데스 명우와 같은 야수가 되어 그의 곁에서 숨죽이고 기회를 노렸다.소은지가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막내며느리가 되었을 때, 엔데스 명우는 분명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 크게 분노했을 것이다.하지만 소은지는 결코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잠시 주저앉았다가 그 분함을 삼키지 않고 결국 방법을 찾아서 되갚아줄 터였다.소은지가 말했듯이, 그녀의 모든 것을 엔데스 명우 때문에 망가졌다.그런데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이유영도 예전에는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소은지 역시 엔데스 명우를 그냥 놔두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그가 소은지의 모든 것을 망쳤다면, 그녀도 엔데스 명우의 소중한 것들을 산산이 부술 것이다.“그만하자.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는데. 네가 예전에 꽂았던 것보다 더 예쁜지 봐줘.”소은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이유영은 가슴이 답답했고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그만해.”이유영은 소은지의 손에서 꽃과 가위를 빼앗았지만 소은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가져갔다.“나 줘.”“은지야!”이유영의 목소리가 더 강해졌다.소은지는 고요한 얼굴로 말했다.“기억해야 해.”그렇다.소은지는 기억해야 했다.엔데스 명우 곁에서 했던 모든 일들을.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그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할 때마다 마음이 답답했지만 멈추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이 항상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엔데스 명우가 어떻게 그녀의 강인한 정신을 조금씩 갉아먹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그녀를 변하게 했는지 기억하기 위해서였다.그녀는
강씨 가문은 일도 많았고 골치 아픈 문제도 끊이지 않았다.그래서 소은지를 만날 때마다 이유영은 술잔을 기울이며 속상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그때 소은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서주 쪽 상황은 알고 있어?”오전 내내 소은지의 무거운 이야기만 듣다가 이제야 그녀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서주.“요즘은 신경 쓰지 않았어.”그러자 소은지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이한이 사라졌어.”이유영은 순간 얼어붙었다.‘강이한이 사라졌다고?’‘어떻게?’전에 잠깐 들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소은지가 다시 언급하자, 이유영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나랑 상관없어.”그 말은 단호했다.지금 이유영은 강이한과 관련된 모든 일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청하시에 있을 때, 소은지는 그녀가 강이한에게서 완전히 벗어나길 바랐지만 막상 그렇게 되자, 소은지의 얼굴은 굳어졌고 젓가락을 쥔 손도 멈춰버렸다.“저번에 월이를 보러 왔을 때, 내가 봤어.”“봤다고?”이유영이 놀라 되묻자,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층 깊어진 눈빛으로 이내 조용히 물었다.“유영아, 강이한과 한지음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일, 기억나?”“바람피웠잖아.”이유영은 별다른 생각 없이 툭 내뱉었다.그게 아니면 대체 뭐가 더 있단 말인가?한지음 일이야말로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정확한 상황은 몰라도 강이한이 한지음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소은지는 조용히 말했다.“아직도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해?”“있든 없든 이제는 중요하지 않아.”이유영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그 말은 무겁고 냉담했다.소은지는 이유영이 이제 강이한에게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는 걸 깨닫고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이유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은지야, 월이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부터 강이한은 내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됐어.”아니, 사실은 더 일찍
이유영은 조용히 소은지를 바라보며 물었다.“그건 왜 물어?”“그냥 궁금해서. 누가 우리 이쁜 유영이한테 눈을 선물했는지.”소은지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고 이유영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 후로 두 사람은 강이한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점심을 먹은 뒤, 이유영은 더 이상 소은지 곁에 머물지 않았다. 월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렇게 오랫동안 소은지와 함께한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소은지는 말리지 않았고 그녀가 문을 나서려던 순간, 복도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우와 엔데스 가문의 넷째 사모님이었지만 이제는 이혼한 송연미였다.송연미는 눈물을 글썽이며 현우에게 매달리고 있었다.“현우야, 그 여자는 보내줘! 아니면 우리 아버지가...”“현우 씨.”송연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유영이 앞으로 나섰다.순간,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끊기더니 송연미와 현우의 시선이 일제히 이유영을 향했다.송연미의 눈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정을 이유영은 분명히 감지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하게 현우에게 다가가 말했다.“점심 먹었어요?”“아직이에요.”“빨리 오지 그랬어요. 저와 은지는 벌써 먹었는데.”이유영을 향한 현우의 눈빛이 순간 미묘하게 부드러워졌다.그 변화는 옆에 있던 송연미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송연미는 현우를 쳐다보다가 다시 이유영을 쳐다보았다.‘이제 지금 무슨 상황이지?’송연미의 가슴은 마치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그러나 이유영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먼저 들어가세요. 전 가봐야 해서요.”“벌써 가요?”“네, 가볼게요.”“사람 불러서 바래다 드릴게요.”현우의 목소리에는 깊은 부드러움이 배어 있었다. 요즘에는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부드러움이었다.이유영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지금은 잘 보이니까, 필요 없어요.”“색깔도 구분할 수 있어요?”“물론이죠.”이유영은 자연스레 웃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잘됐네요.”“그럼 이제 가볼게요. 소은지가
“현우!”그 이름을 부르며 송연미의 입술이 떨렸다. 가슴은 답답하고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소은지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불안했는데 이제는 이유영까지.현우가 이유영을 바라보던 그 눈빛을 떠올리며 송연미는 더욱 위기감에 휩싸였다.모든 것이 변해버렸다.‘왜 현우에게 이런 변화가 생긴 거지?’‘그럼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린 난 대체 뭐가 되는 거야?’“여기는 네가 넷째 사모님이 올 곳이 아닌 것 같은데.”송연미의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을 마주하며 현우의 목소리는 한층 더 차가워졌다.‘넷째 사모님’이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미 창백했던 송연미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온몸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가 느낀 것은 단순한 공기의 차가움이 아니라 손끝에서부터 가슴속 깊이, 나아가 영혼에까지 스며드는 냉기였다.눈빛만 차가운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도 차가웠다. 오직 자신에게만 따뜻했던 눈빛이었는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온도로 변해 있었다.왜 하필리면 정씨 가문 아가씨지?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현우는 이미 돌아서 버렸고 그녀는 차가운 바람 속에 서서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모든 생각이 바람에 휩쓸려 버린 듯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고 그녀는 지금 상황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소은지와 이유영...예전엔 소은지가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유영이 자신의 걸림돌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유영은 강이한과 박연준이 있잖아. 왜 현우와도 관계가 생겼지? 어떻게...’방 안에서 소은지는 소파에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현우가 돌아오자, 그녀는 고양이를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다가갔다.“돌아왔어요? 점심 먹었어요?”대답 대신 현우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았고 소은지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우천시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돌아온 후로 현우는 그 일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둘 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저랑 같이 좀 먹을래요?”“전 유영이랑 이미 먹었어요.”“조금만 더 먹어요.”현우는 혼자 밥을 먹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었다.소은지는 마지못해 현우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의 창문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바깥에서도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송연미는 현우가 소은지와 팔짱을 낀 채 식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머릿속이 마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혼란스러웠다.그는 완전히 변해버렸다.누구에게나 다정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유독 송연미에게만큼은 냉담했다. 이번에 돌아온 현우는 마치 과거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그 생각에 가슴이 더 답답해졌고 숨이 막힐 것 같은 감정이 온몸을 짓눌렀다.송연미는 항상 현우를 기다려왔다. 엔데스 운빈과 결혼한 지난 세월 동안에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지금에 와서 그 기다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때,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송연미는 여전히 비바람 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점점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결국 그녀는 비바람 속으로 쓰러졌다.귀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왜, 왜 이렇게 된 거야?’한편, 현우와 소은지는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송연미가 밖에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야 소은지는 그녀가 이곳에 왔다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반응할 틈도 없이, 옆에 있던 현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소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살을 찌푸렸다....다른 한편.이유영이 반산월을 나와 백산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신지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수화기 너머로 신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이한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서주가 완전히 뒤집혔어요. 정말로 모든 걸 박연준에게 넘겨주고 떠났어요. 유영 씨가 말한 것처럼 별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 같진 않아요.”이유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조금 전, 반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마치 예전에 한지음을 위해서라면 이유영의 각막을 빼앗으려 했던 것처럼.하지만 나중에 강이한은 말했다.그건 정말로 그렇게 하려던 게 아니었다고.사실, 이유영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그는 진심이었다.나중에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의 말이 진실이었다는 걸, 이유영은 확신하고 있었다.강이한이 나중에 무슨 변명을 했든 그런 것들은 이유영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때, 전화 너머로 신지수가 말했다.“지금 그 아이뿐만이 아니에요. 강이한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서주에서 사라졌어요.”이유영은 순간 멈칫하며 물었다.“모두요?”“네. 제가 말했잖아요. 강이한이 모든 걸 박연준에게 넘기고 떠났다고.”그렇다면 강이한은 서주에서 완전히 손을 뗀 걸까?왜?박연준이 우천시에 왔을 때, 강이한은 떠났다.그때, 이유영은 강이한과 박연준이 무슨 거래를 했을 것이고 강이한은 그 대가로 무언가를 얻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박연준이 전기봉에 대한 정보를 강이한에게 넘겨줬고 그래서 강이한이 우천시를 떠난 것이라고 추측했었다.그렇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우천시를 떠나고 그는 서주로 돌아왔지만, 그 이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알 수 없었다.지금 보니, 강이한이 우천시를 떠난 이유는 처음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박연준이 정보를 제공해서 떠난 것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떠났던 걸까?그 순간, 이유영의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이론적으로 강이한은 우천시를 떠난 후 서주의 모든 것을 손에 넣었어야 했다.그런데 왜, 그는 박연준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떠난 걸까?이유영은 돌아오는 길에 여진우에게 박연준이 왜 떠났는지,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박연준은 서주에 있어요?”“강이한이 모든 걸 맡겼는데, 당연히 서주에 있죠.”신지
“배준석을 데려와.”배준석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안과 전문의였다. 어린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오른 인물이자 강이한과는 말할 것도 없이 깊은 친분이 있었다.“알겠습니다.”“그리고 수술할 때, 강이한이 용성시에 있었는지도 확인해.”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진영숙의 마음은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알겠습니다.”남기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진영숙은 소파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강이한이 사라지기 전, 이유영과 함께 우천시에 가서 진료를 보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곳의 염 선생이 이유영의 눈을 치료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그리고 그 누구도 지금 진영숙의 마음속 상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특히 지금 이유영의 눈이 치료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의심을 더욱 깊게 했다.어머니로서 그런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이유영이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하든 진영숙은 강이한이 이유영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강이한이라면 이유영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오늘, 이유영이 청하시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진영숙의 마음은 피가 더욱 아파졌다.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억울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그 아이는 정말로 강이한을 똑 닮았다....한편 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의 방문객들을 침착하게 맞이하고 있었다.하지만 예기치 않게 여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로 분위기가 얼어붙은 듯 긴장감이 맴돌았다.특히 여진우에게서 풍기는 것은 단순한 차가움 이상의 것이었다.소은지는 말없이 찌푸린 눈으로 여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조용히 소은지를 응시했다.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무슨 일이에요?”“정씨 가문이 엔데스 가문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는 건 소은지 씨도 알고 있죠?”“알아요.”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세상 모든 이가 아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두 사람의 10년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걸까? 사랑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은 대체 어디 갔을까?’이유영은 풍산 그룹에서 나오기 전, 진영숙에게 아이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진영숙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시윤이 방으로 들어섰다.“사모님.”“왜... 도대체 왜...”진영숙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감정은 이미 한계를 넘어 통제 불능 상태였다.시윤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에 대해 그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진영숙 곁에 있었던 이들은 예전에 진영숙과 이유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이 결국 인과응보라고 여겼다.“이유영에게 다 말했어. 하지만...”진영숙은 여기까지 말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강이한이 끝내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진영숙은 모두 이유영에게 털어놓았다.하지만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이유영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강이한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사람 같았다.“사모님, 작은 사모님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어쨌든...”시윤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가 결국 말을 멈추고 진영숙을 바라보았다.과거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진영숙도 이유영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이미 모든 대가를 치렀다.하지만 여전히 과거를 놓아주지 않는 이유영이 마냥 이해되지 않았다.‘아무리 미워도 지금 강이한이 사라진 마당에 그 분노를 조금은 억누를 수도 있지 않을까?’과거에 무슨 원한이 있었든 이렇게까지 무심할 일이란 말인가? 강이한은 서주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졌다.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도 여전히 냉정한 이유영의 태도에 진영숙은 마음이 아팠다.“대체 어떻게 해야 그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왜 박연준의 사람들조차
“강이한은 2년 동안 자신을 가둔 채 보냈어.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지금의 이유영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이토록 담담한 걸까?심장이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걸까?“네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이겨내기 시작했어.”그때를 떠올리자 진영숙은 한층 더 괴로워졌다. 그녀는 마치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다.강이한은 아직도 그 안에 있었고 이건 그가 내린 선택이었다.“강이한은 지금 혼자 그 벌을 받는 거야. 네가 겪었던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겪고 있어. 알기나 해?”이유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저 자기만 강이한 곁에서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렇게 뛰어난 강이한이 결국 이유영 때문에 그런 비극적인 끝을 맞았다. 그녀를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거나 다름없었다.이제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이유영은 그저 묵묵히 아무 미동도 없이 모든 것을 보고만 있었다.이 모든 사실을 이유영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진영숙은 생각했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진영숙이 이런 사실을 이유영에게 말한 이유는 그녀가 너무 차갑게만 강이한을 생각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강이한의 실종에 조금의 반응이라도 보여줬으면 했다.강이한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랐다.진영숙의 삶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그녀는 이유영만 편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친듯이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것이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모든 걸 다 말했음에도 이유영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건 그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대가였어요.”“...”순간 머릿속이 무언가에 부딪친 듯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정하고 차가운 말을 뱉는 사람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하지만 만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한지음의 존재는 그녀에게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했고 연서라는 사람을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정말이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경고할게요. 제 딸에게 다시는 접근하지 마요. 그 아이는 강이한과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이유영!”진영숙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녀의 눈빛 속엔 끓어오르는 분노가 맺혀 있었다.하지만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뒤섞여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냉정할 수가 있어?”이유영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진영숙은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저토록 무심할 수 있을까?’냉정하다는 말을 들은 이유영의 입가엔 오히려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냉정하다고?’“지금 강이한이 살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또렷하게 힘주어 말했다.강이한이 서주에서 모두 철수한 것에 대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사실상 생사불명이었다.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유영은 이렇게 냉담하게 말할 수 있다니 진영숙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의 마음은 돌보다도 더 차갑고 무정했다.아무리 돌이라도 오랜 시간 함께 있었다면 어느 정도는 온기가 스몄을 텐데 이유영은 아니었다.강이한이 생사불명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한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냉정하다고요?”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진영숙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녀의 두 눈엔 오로지 분노만 가득했다.“그럼 아니야?”‘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어떻게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생사불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조차 이유영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
한 시간 뒤, 이유영은 풍산 그룹에 모습을 드러냈다.진영숙과 마주한 순간, 그녀의 눈빛엔 깊고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뜻밖에도 박연준은 진영숙을 파리에 남겨두었는데 아마도 그녀 스스로 떠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진영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강이한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손에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진영숙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네가 강이한의 딸을 낳았다니 믿기지 않는구나.”“...”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차디찼고 이어지는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왜요? 뱃속에서 죽이지 못해서 화가 났어요?”그 말에 진영숙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그녀의 눈에 스치는 감정은 슬픔이었다.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듯 쓸쓸함이 스며들었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눈빛엔 더 이상 분노가 없었다.남은 건 흩어진 슬픔뿐이었다.이유영의 싸늘한 태도 앞에서 진영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결국 고개를 돌리며 낮게 말했다.“우리 애 어디 있는지만 말해줘.”긴 시간이 흘렀지만 진영숙은 여전히 강이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이유영뿐이라 믿고 있었다.박연준이 사람들을 풀어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진영숙도 기약 없는 기다림만 계속됐다.박연준은 그녀와 함께 서주로 가자고 했지만 진영숙은 끝내 따라나서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모른다고 했잖아요.”“정말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진영숙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뭐라고요?”‘무엇을 의심하란 말이지?’“내가 들은 바로는 강이한이 너를 우천시로 데려갔던 건 염 선생을 찾기 위해서였대. 그땐 너도 몰랐겠지.”“...”“그런데 네 수술 시기에 맞춰 각막이 정확히 준비돼 있었어.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이 상황을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단 말인가?’그 말에 이유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그
여진우의 목소리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묻지 말라고?’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소은지에 관한 것만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여진우는 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늘 그렇듯 그들은 단순한 적이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은지는 이제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야.”그 말에 이유영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소은지가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라고?’이미 어지러웠던 머릿속은 그 말 한마디에 더욱 복잡하게 뒤엉켰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오늘 송씨 가문 소식은 들었어?”“들었어.”이유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그 소식을 접한 뒤, 파리 전체가 마치 안개 속에 잠긴 듯 모든 게 흐릿하고 불길했다.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여진우의 품에 안긴 순간, 이유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에 짓눌렸다. 그의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느낀 이유영은 무언가 정말로 큰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긴 침묵이 흐른 후, 이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찾았어?”지금 그 도장과 문서는 엔데스 가문 사람들에게 극도로 민감한 존재였다.그 하나가 모든 걸 좌우할 수도 있었다.도장 이야기가 나오자 여진우는 그녀를 더 꼭 안아주며 낮게 말했다.“아무 일 없으면 곧 나올 거야.”그 말은 다짐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위로 같았다. 그 도장이 어떤 의미인지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잠시 뒤, 여진우는 자리를 떴고 정국진도 오늘 집에 없었다.백산 별장에는 임소미와 이유영, 그리고 조기 교육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월이만 남아 있었다.월이는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방 안을 돌아다녔고 그 모습은 한없이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예전엔 조기 교육 센터에 가기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즐거운 듯 아침마다 스
남기가 방 안으로 들어서서 조용히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저씨, 오늘은 몇 명이나 더 찾아올 것 같아요?”단순한 질문 같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탐색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남기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지금으로서는 일곱째 도련님 쪽에서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말뜻은 분명했다. 소은지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하라는 경고였다.소은지의 눈빛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가능하다면 이렇게 얽히고설킨 일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이 늪으로 끌어들인 건 도대체 누구였을까?엔데스 명우. 그 이름이 떠오르자 소은지의 머릿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다시 어른거렸다.송연미가 전해준 말을 떠올리며 소은지는 조용히 물었다.“남기 아저씨, 지금 제가 떠난다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송씨 가문의 결정을 떠올리자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현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뚜렷해졌다.남기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신 이후로 일곱째 도련님은 송연정 아가씨와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래요?”‘그렇다면 송연미가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소은지가 생각에 잠기자 남기가 말을 이었다.“일곱째 도련님은 언제나 눈치가 빠르십니다. 송씨 가문과 선을 그은 걸 보면 뭔가 그 속셈을 알아보신 듯합니다.”“...”“그리고 지금 사모님을 떠나게 하지 않는 이유는 사모님이 이 자리를 지켜주셔야 다른 사람들이 넘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물론입니다.”남기의 말에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우천시에 있었을 때,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며느리 자리를 노리는 가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송씨 가문이었다.예전엔 현우를 지지하는 송씨 가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오늘 송연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자 송씨 가문 회장님의 인품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그 사실을 인식하자 오히려 마
사실 모든 기회는 그녀가 온갖 노력을 다해 엔데스 운빈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낸 그 순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씨 가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왜 송연정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은 끝내 선택하지 않았던 걸까?’처음엔 그 이유가 운빈과의 관계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느닷없이 엔데스 신우와의 혼사를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송연미는 문득 깨달았다.그 모든 결정의 이면엔 현우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결국 현우의 태도가 아버지의 선택을 바꿔 놓은 것이다.“현우를 만나야겠어.”송연미는 온몸을 떨며 소은지를 바라봤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현우를 직접 만나서 물어야 했다.차가운 엔데스 가문의 셋째 사모님으로 불리던 그녀는 지금 반산월에서 감정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있었다.몇 년 전, 현우가 파리를 떠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어떤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 오랜 기다림 끝에 현우가 돌아왔고 그녀는 현우와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그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단호히 끊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현우였다.“네 전화도 받지 않는데, 널 만나고 싶어 할까?”소은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 한마디가 송연미는 더 깊이 무너졌다. 이미 흔들리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그 순간 완전히 부서지는 듯했다.그녀의 눈빛엔 절망이 가득했다.“그래도 현우를 꼭 만나야 해.”송연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엔데스 신우와의 결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결정 앞에서 그녀는 늘 무기력할 뿐이었다.그동안 엔데스 운빈 곁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텼는지 모른다.그리고 현우가 돌아오자 그녀는 주저 없이 모든 것을 정리했다.하지만 지금 현우는 그녀를 차갑게
소은지는 조용히 송연정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았다.그녀의 눈빛엔 이미 무거운 결심이 내려앉아 있었다.송연정 역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 속에는 오래 참아온 비통함이 스며 있었고 그 아래엔 날 선 증오가 번득였다.“왜 엔데스 신우랑 결혼시키려는지 알아?”“왜?”‘엔데스 운빈과의 관계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또다시 다른 사람과의 혼사를 이야기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닌가?’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한때 송연정을 ‘넷째 사모님’으로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지금은 어떤 상황이 되어 버린 걸까?’“왜냐하면 네가 아직 여기에 있기 때문이야.”소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원래 아버지는 송연정과 현우의 혼사를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돌아오면서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거야.”“...”“넌 우리 아버지가 그냥 호의로 누굴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소은지, 대체 얼마나 더 망쳐야 속이 시원하겠어?”“...”“지금 엔데스 가문 상황이 현우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모르는 거야?”송연정은 마치 이 모든 일이 소은지 탓이라도 되는 듯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실제로 소은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송연정과 현우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란히 서곤 했다.소은지는 배경도 권력도 없는 외국 여자일 뿐이었다.파리 사람들은 모두 송씨 가문과 현우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고 가문 안팎의 관심은 오롯이 현우에게 쏠려 있었다.그렇다면 그녀가 이혼을 택한 건 단지 운빈과의 관계가 아니라 엔데스 가문 자체와 더 깊은 얽힘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그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야 현우와 다시 함께 할 수 있으니까.소은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잊었어? 내가 우천시에서 돌아온 이유, 바로 너 때문이야.”그 말에 송연미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입술이 달싹였으나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나만 없으면 가문이 너를 선택했을 것 같아? 결국 가문이 택한 건 송연정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