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영은 사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꼭 이래야만 하는 걸까?“나는 나를 벌주는 게 아니야. 그냥... 정말로 익숙해진 거야.”고통도 결국 어떤 이에게는 습관이 될 수 있었다.“...”이유영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서주 쪽 상황은 지금 어때?”“강이한은 돌아갔어.”박연준의 대답이었다.강이한이 돌아간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박연준이 서주 이야기를 꺼내는 동안 이유영의 눈빛은 더 어두워져만 갔다.이유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먼저 말했다.“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미워?”그 사람, 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강이한이 정말 미웠다. 그러나 미움에도 강약이 있는 법, 이유영은 극단적인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겪어야 했다.“미워.”“그가 죽기를 바랄 정도로?”박연준은 멈추지 않고 물었다.“...”이유영은 다시 침묵했다.강이한이 죽기를 바랄 정도인가?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망설임 없이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듯,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할 때도 그 감정은 이렇게까지 깊어질 수 있었다.그것이 이유영의 강이한에 대한 미움이었다.“뭐가 문제야?”이유영의 말투는 차가워졌다. 이 주제를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강이한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유영에게 너무 무거웠다.“너도 나를 그렇게 미워해?”박연준이 시험 삼아 물었고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그럼 너에게 어떤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강이한과 박연준에게 그녀가 품을 수 있는 감정은 미움뿐이었다.많은 고통과 고난을 겪은 후에도 그들의 모든 것을 용서할 만큼 이유영은 그렇게 착하지 않았다.박연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따뜻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바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 태도는 냉정했고 그녀의 감정은 고스란히 드러났다.박연준은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눈에 상처가 어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 답답함을 억누르듯 말했다.“네가
박연준의 해명은 이유영에게 공허하고 무력하게 들렸다.오늘의 박연준은 이유영을 더욱 놀라게 했다. 박연준이... 강이한을 두둔하다니.결국 한 여자를 사랑했던 두 사람이었으니, 원수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인가?이유영은 이 상황이 비참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유영아, 넌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이유영의 모습을 바라보며 박연준은 내심 괴로워하고 있었다.“그만하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연서는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금기와도 같은 이름이었다. 연서의 존재는 강이한과 박연준이 이유영에게 수년 동안 안긴 모욕과 같았다.연서의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이유영은 자신이 강이한과 박연준의 세계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절감했다.이유영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처럼 특별한 사람도 아니었고 스스로 믿고 싶었던 그런 존재도 아니었다.이유영의 존재는 결국 그들의 세계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착각에 불과했다.그것이 바로 이유영이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 차지했던 자리였다. 가소롭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자리.“유영아, 나는 변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야.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진심을 알아줬으면 좋겠어.”“또 무슨 꿍꿍이인지 어떻게 알아?”이유영의 목소리는 억누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박연준의 몸은 이유영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순간 굳어버렸다.그 말은 이유영이 박연준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 명확히 보여줬다.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조종하고 계산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분위기가 더욱 얼어붙었고 우지와 우현은 한 발짝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현재 식당의 분위기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다....시간은 계속 흘러갔다.이유영은 매일 약을 먹고 하루 세 끼를 빠짐없이 챙겼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강이한이 곁에 있었을 때, 이유영은 강이한이 내민 사탕을 자연스럽게 입에 넣었었다.하지만 지금은?박연준이 사탕을 내밀어도 이유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강이한에게 차가웠던 만큼 박연준에게도
“우리 이혼해요.”격렬한 사랑이 끝난 뒤, 유영은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달뜬 목소리로 덤덤히 말했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상기된 볼을 살짝 가렸다. 그녀의 두 눈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고 표정은 처량했다.남자가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렸다. 술을 잔뜩 마시고 돌아와서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지고 욕구를 방출시킨 남자, 그 어디에도 유영에 대한 존중은 없었다.10년을 사랑했지만 이제 더 이상의 미련은 남지 않았다.단추를 잠그던 강이한의 손이 움찔하더니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영을 노려보았다.“갑자기?”“네.”유영의 말투는 단호했다.말을 마친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기억을 더듬어 화장실로 향했다.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다가가서 그녀를 부축했다.“손 이리 줘봐.”탁!유영은 매몰차게 그 손길을 뿌리쳤다.하지만 힘 조절을 잘못해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저리 치워요. 당신 도움은 이제 필요 없어. 더러워.”이 남자와 같은 지붕 아래 숨 쉬고 있는 것 자체가 거북하고 불쾌했다.강이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허공에 손을 내민 채, 신경질적으로 유영을 노려보았다.지금 나한테 더럽다고 한 건가?유영은 바닥을 더듬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샤워기를 틀고 뜨거운 물로 몸에 남은 그의 흔적을 씻어냈다.할 수만 있다면 그의 손길이 닿았던 피부를 모두 도려내고 싶었다.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벽을 더듬으며 옷장으로 향했다. 시력을 잃게 된 시간이 길지 않아서 암흑 같은 이 세상이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다.유영은 손끝에 닿은 느낌을 따라 옷 한 벌을 꺼내 입고는 호적 등본을 챙기고 그에게 말했다.“지금 법원으로 가요.”“이유영.”강이한이 이를 갈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는 벌떡 일어나서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이런 모습으로 나랑 이혼하면 어떻게 살려고 그래?”그녀는 가진 게 없었다
또각또각.익숙한 하이힐 소리가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와 함께 가까워지고 있었다.한지음!강이한의 첫사랑이자 그녀의 망막을 가져간 여자.유영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고용인 부를 필요 없어. 내가 이미 불렀으니까.”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한 말투.“여긴 왜 왔어?”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이미 모든 걸 잃은 그녀에게 또 뭘 바라고 온 것일까?한지음은 그녀의 싸늘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벼운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전해줄 말이 있어서 왔어.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느 것부터 들을래?”유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너 임신했더라.”유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한지음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물론 이한 씨는 이 아이를 낳으라고 하지 않을 거야. 나도 임신했거든.”쿵!차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유영의 얼굴에 금이 갔다.‘강이한, 이런 거였어?’혈색을 잃은 그녀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렸고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유영은 치미는 분노를 꾹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여자는 자랑하러 온 것이다. 이미 모든 걸 잃었는데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내고 싶었다.그녀는 길게 심호흡하고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래? 어제 그 사람한테 내가 이혼하자고 했는데 싫다고 하더라?”그 말을 들은 한지음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유영도 그녀의 기분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내 망막까지 빼앗아 가고 임신까지 했는데 그래서 뭐? 그이는 네가 이 집의 안주인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나 봐.”강이한을 좋아해서 한지음을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이 여자에게 더 이상 짓밟히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었다.강이한과는 이미 끝내기로 했지만 집까지 찾아와서 자신을 도발하는 여자에게 가만히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하, 그래서 이한 씨가 널 사랑한다고 말하고
“악!”유영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피부에서 아직도 뜨거운 작열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남자의 거친 손이 다가와서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전해졌다.“꿈꿨어? 조금만 더 자자.”유영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고개를 돌려 보니 강이한의 준수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유영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앞이 보여? 이게 어떻게 된 거지?’눈을 다시 감았다 뜨니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창문이 보였다.천장, 커튼, 그리고 익숙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설마?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찾았다. 날짜와 시간을 확인해 보니 화재가 일어나기 몇 개월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회귀… 한 건가?강이한은 뒤척이는 소리에 불만스럽게 눈을 떴다.“아침부터 왜 이래?”그러거나 말거나 유영은 핸드폰에 찍힌 날짜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납치하기 전 날로 돌아와 있었다.“당신 왜 그래?”그녀의 이상한 반응에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유영은 남자를 내버려두고 욕실로 들어가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화상 자국이 있어야 할 팔뚝도 말끔했다.아직도 불길이 자신을 덮친 그날의 느낌이 생생한데 그녀는 그 사고가 있기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유영은 바닥에 앉아 양팔로 자신을 껴안고 중얼거렸다.“유영아, 하늘이 널 불쌍히 여겨 기회를 준 거야.”욕실을 나선 유영은 침대로 다가가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우리 이혼해.”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싸늘한 목소리에 강이한이 벌떡 일어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지금 뭐라고 했어?”“은지한테 부탁해서 이혼 서류 준비시킬 거야. 못 믿겠으면 당신도 변호사 불러.”“대체 아침부터 왜 이러는 거야?”강이한은 이 상황이
잠시 후, 소은지가 팩스로 이혼 서류를 보내왔다.이유영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사인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강이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용인은 그녀가 위층으로 올라간 뒤에 바로 외출했다고 답했다.이유영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팩스로 그의 회사에 이혼 서류를 보냈다. 서류를 확인한 비서가 다급히 그녀에게 연락했다.“사… 사모님, 대표님은 아직 출근 전입니다만….”“그 사람 도착하면 바로 사인하고 법원에서 만나자고 전해주세요.”“네… 알겠습니다.”강이한의 비서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유영은 전화를 끊은 뒤, 위층으로 올라가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거울 속에 비춰진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마누라가 예쁘다고 남자가 한눈을 팔지 않는 건 아니었다.아무리 예쁜 외모라도 질릴 때가 있는 법, 그때가 되면 남자들은 바깥의 여자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된다.이유영은 바로 차를 타고 법원 앞으로 가서 기다렸지만 점심시간이 다 될 때까지도 강이한은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바로 강이한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전화를 받았다. 영상 속 배경을 보니 회의 중인 듯했다.이유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나 법원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어. 대체 협의서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안 나타나는 거야?”회의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강이한에게로 쏠렸다.대표님이 이혼? 게다가 재산분할?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지자,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잠깐의 통화만으로도 대표가 곧 이혼한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30분 쉬었다가 다시 진행하지.”남자는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가는 강이한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자, 현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사모님께서 지금 이혼을 제기하신 거 맞지?”“그렇게 온화한 분도 폭발할 때가 있구나.”“그럼 한 비서는 어떻
이유영은 홧김에 손을 번쩍 들고 남자의 귀뺨을 때렸다.남자가 우악스럽게 그녀의 목을 잡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오늘 아침부터 이상했어. 대체 무슨 일인지 이유는 말해줘야 할 거 아니야.”강이한은 그제야 이유영이 단지 기분이 나쁜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줄곧 온화하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얌전한 현모양처였다. 정말 화가 나는 순간이 와도 그녀는 혼자 삭히고 오히려 먼저 그에게 다가와 줄 줄 아는 여자였다.이유영은 자신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곧 있으면 법원 직원들 점심 먹으러 갈 시간이야. 일단 서류부터 제출하고 다시 얘기하자.”“이유영!”남자의 호흡이 거칠어졌다.이유영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가슴을 밀쳤다. 하지만 남자는 태산처럼 요지부동이었다.강이한은 운전 기사에게 곧장 집으로 갈 것을 명령했다.어차피 기분이 엉망이라 돌아가서 회의를 계속 진행하기도 무리였다.돌아가는 길, 운전기사의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집에 도착한 뒤, 이유영과 강이한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이제 얘기해 봐.”“더 얘기할 것도 없어. 말하긴 뭘 말해?”반년 사이 비서와 바람이 난 사실을 온 청하시 사람들이 다 아는데 정작 그는 그녀에게 한 번도 제대로 된 해명조차 해주지 않았다.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이유영을 잡아먹을 것처럼 훑어보았다.그녀는 고집스럽게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담담한 태도에 남자의 표정이 점점 더 험하게 일그러졌다.“이유영, 세강 일가에게 이혼이란 존재할 수 없어. 사별이면 몰라도.”이유영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그녀는 착잡한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그래서 지난 생에 나를 불에 태워 죽인 거니?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이 첫 이혼이면 되겠네. 아니면 나가서 죽거나.”강이한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거만한 표정으로 이유영을 내려다보았다.왕의 기질을 타고난 이 남자는 화가 날 때면 항상 이
고용인이 점심식사를 식탁에 올렸다.강이한은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아 수저를 들지도 않았다.반면 이유영은 우아하게 꼭꼭 씹어서 맛있게 식사 중이었다. 이혼하겠다고 그 난리를 치던 여자가 이러고 있으니 강이한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전화를 끊은 그가 말했다.“오후에 남영에 출장 가야 해. 3일 정도 있을 거야.”그는 며칠 떨어져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 며칠 사이에 기분을 정리하고 다시는 이 불쾌한 얘기를 꺼내지 않기를 바랐다.조용히 먹는 데만 집중하던 이유영이 드디어 고개를 들고 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 모습은 지금도 미치게 아름다웠다.강이한의 동공이 확 수축하고 온몸에 긴장감이 돌았다. 결혼하고 3년이나 지났지만 그녀의 저런 모습은 여전히 그의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이유영은 그제야 과거에도 이날 강이한이 출장 갔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물론 한지음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부랴부랴 돌아왔지만.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그렇게 해. 마침 오후에 은지 만나서 그 한지음 씨를 찾아가 봐야겠어. 법률적으로 얘기할 것도 있고.”절대 강이한을 출장 가게 둘 수 없었다. 무조건 오늘은 그와 같이 있어야 한다.강이한의 참고 있던 분노가 그 순간에 폭발했다.“왜 이렇게 막무가내야? 당신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내 예전 모습 정말 기억해? 난 당신이 예전에 어땠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당신은 기억나?”뻔뻔하게 과거를 말하다니!강이한은 그제야 반년 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던 그녀가 쌓았던 불만을 한 번에 터뜨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이유영이 자신을 믿어줄 거라 생각했기에 별다른 해명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잘 참고 있다가 갑자기 이혼이라니!“결국 그 일 때문이구나.”그들 사이에 신뢰는 굳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착각이었다니!이유영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건, 입을 꾹 다물었다.지금 와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우린
박연준의 해명은 이유영에게 공허하고 무력하게 들렸다.오늘의 박연준은 이유영을 더욱 놀라게 했다. 박연준이... 강이한을 두둔하다니.결국 한 여자를 사랑했던 두 사람이었으니, 원수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인가?이유영은 이 상황이 비참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유영아, 넌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이유영의 모습을 바라보며 박연준은 내심 괴로워하고 있었다.“그만하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연서는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금기와도 같은 이름이었다. 연서의 존재는 강이한과 박연준이 이유영에게 수년 동안 안긴 모욕과 같았다.연서의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이유영은 자신이 강이한과 박연준의 세계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절감했다.이유영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처럼 특별한 사람도 아니었고 스스로 믿고 싶었던 그런 존재도 아니었다.이유영의 존재는 결국 그들의 세계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착각에 불과했다.그것이 바로 이유영이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 차지했던 자리였다. 가소롭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자리.“유영아, 나는 변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야.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진심을 알아줬으면 좋겠어.”“또 무슨 꿍꿍이인지 어떻게 알아?”이유영의 목소리는 억누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박연준의 몸은 이유영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순간 굳어버렸다.그 말은 이유영이 박연준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 명확히 보여줬다.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조종하고 계산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분위기가 더욱 얼어붙었고 우지와 우현은 한 발짝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현재 식당의 분위기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다....시간은 계속 흘러갔다.이유영은 매일 약을 먹고 하루 세 끼를 빠짐없이 챙겼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강이한이 곁에 있었을 때, 이유영은 강이한이 내민 사탕을 자연스럽게 입에 넣었었다.하지만 지금은?박연준이 사탕을 내밀어도 이유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강이한에게 차가웠던 만큼 박연준에게도
이유영은 사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꼭 이래야만 하는 걸까?“나는 나를 벌주는 게 아니야. 그냥... 정말로 익숙해진 거야.”고통도 결국 어떤 이에게는 습관이 될 수 있었다.“...”이유영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서주 쪽 상황은 지금 어때?”“강이한은 돌아갔어.”박연준의 대답이었다.강이한이 돌아간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박연준이 서주 이야기를 꺼내는 동안 이유영의 눈빛은 더 어두워져만 갔다.이유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먼저 말했다.“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미워?”그 사람, 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강이한이 정말 미웠다. 그러나 미움에도 강약이 있는 법, 이유영은 극단적인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겪어야 했다.“미워.”“그가 죽기를 바랄 정도로?”박연준은 멈추지 않고 물었다.“...”이유영은 다시 침묵했다.강이한이 죽기를 바랄 정도인가?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망설임 없이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듯,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할 때도 그 감정은 이렇게까지 깊어질 수 있었다.그것이 이유영의 강이한에 대한 미움이었다.“뭐가 문제야?”이유영의 말투는 차가워졌다. 이 주제를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강이한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유영에게 너무 무거웠다.“너도 나를 그렇게 미워해?”박연준이 시험 삼아 물었고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그럼 너에게 어떤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강이한과 박연준에게 그녀가 품을 수 있는 감정은 미움뿐이었다.많은 고통과 고난을 겪은 후에도 그들의 모든 것을 용서할 만큼 이유영은 그렇게 착하지 않았다.박연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따뜻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바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 태도는 냉정했고 그녀의 감정은 고스란히 드러났다.박연준은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눈에 상처가 어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 답답함을 억누르듯 말했다.“네가
강이한이 정국진에게 말했다.염 선생의 조언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고 이유영을 평생 어둠 속에 두지 않겠다고 말했다.최대한 빨리 모든 것을 처리해 이유영의 시력을 회복시키겠다고도 덧붙였다.“자신을 벌하고 있는 거예요.”한참을 침묵하던 정국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임소미는 그 말을 듣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정말 자신을 벌하고 있는 걸까?그렇다.정국진의 말이 맞았다. 강이한은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벌하고 있었다.그것은 아마도 과거의 잘못에 대해 속죄하려는 그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죄는 너무도 무거웠다. 과연 이런 방식으로 속죄가 가능할까?...강이한은 떠났다.잠시 후 월이가 임소미의 목을 끌어안고 재잘거리며 들어왔다.“할머니, 아까 모르는 사람이 준 거 안 먹었어요.”“정말 잘했구나.”월이의 말을 들은 임소미의 마음은 더없이 씁쓸했다. 이 모든 것이 강이한이 자초한 일이었고 그의 업보였다. 누구도 그에게 가혹하다고 비난할 수 없었다. 그는...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하지만 정말 그럴까?임소미는 이유영이 평생 월이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다.그리고 강이한이 오늘 월이를 마지막으로 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임소미의 가슴은 더욱 무거워졌다.“할머니, 엄마는 언제 돌아와요?”월이는 정말 이유영이 보고 싶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의존은 본능적이었다.“곧 돌아올 거야.”“할머니, 제 아빠는 누구예요?”“...”임소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미 불편했던 호흡은 월이의 질문을 듣고 더욱 답답해졌다.월이의 아빠는...“월이, 아빠가 보고 싶니?”임소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아빠가 보고 싶냐는 질문에 월이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왜?”“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사랑하지 않는다고?월이가 기억하는 한, 월이의 세상에는 아빠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항상 엄마인 이유영 혼자뿐이었다.아이는 단순했고 이유영의 외로움을
강이한은 아마도 세상에서 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을 것이다.세상에 아이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아픈 일이 있을까?그는 지금 그 고통을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아이는 그렇게 경계하며 강이한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강이한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이렇게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는 결국 떠나기로 결심했다. 월이는 강이한의 고독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혀 다가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모퉁이를 돌 때, 강이한은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그 순간, 아이는 그 자리에 서서 놀라서 움찔했다.남자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월이에게 말했다.“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기억해.”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월이는 여전히 그를 경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월이가 침묵하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강이한은 절망을 느꼈다. 이 모든 고통은 한때 이유영이 홀로 겪었던 것이었다.이제 그 고통이 자신에게로 돌아왔고 이유영이 겪었던 아픔이 하나하나 그의 뼛속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강이한은 떠났다.한편, 임소미는 조용히 정국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정국진은 강이한과 서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도저히...”임소미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말했다.이것이 이유영이 항상 수술을 거부했던 이유였다. 이유영은 죽은 사람의 장기를 사용하고 싶지 않아 했고 그렇다고 살아있는 사람은 더욱 불가능한 얘기였다.그렇게 눈앞이 흐릿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수술을 거부했던 것이다.살아있는 사람의 것은 정말 구하기 힘들었고 기꺼이 수술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그렇다면 기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이유영은 어떤 수단도 쓰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두 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강이한의 말대로 만약 석 달 후에 이유영이 염 선생의 약을 먹고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강이한이 책임지겠다고 했다.이것이 서재에서 정국진에게 말한 내용이었다.
딸이 이렇게 다치고 나서 임소미는 강이한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강이한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그가 사라져야만 모든 것이 편안해질 것 같았다.이유영이 돌아온 이후 몇 년 동안, 강이한이 이유영에게서 벗어나려 얼마나 애썼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은?한편으로는 한지음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유영에게 집착하며 그녀의 행복을 방해해 왔다.그런 상황에서 엄마라면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임소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하지만 강이한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뒷마당에서.강이한은 멀리서 나비를 쫓는 아이를 따뜻하고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동시에 강이한의 마음이 아파졌다.그 아이는 나비를 쫓으며 정말 즐거워 보였다. 이곳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곳인 듯했다.정씨 가문은 그 아이를 진심으로 귀여워하고 아끼고 있었다. 그 아이는 꽤 작은 몸집을 가졌는데 아마 조산 때문일 것이다.“유씨 할머니, 저 잡았어요!”아이가 나비 한 마리를 잡고 기쁜 얼굴로 도우미에게 달려갔다.유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작은 아가씨는 점점 더 빨라졌네요. 나비도 잡을 수 있군요.”“저 정말 대단하죠?”“네, 정말 대단해요.”찬을 받은 아이는 더욱 밝게 웃었다.“유씨 할머니.”“네?”“수박 먹고 싶어요.”“알겠어요. 가져다줄게요.”그 아이는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었다.여기서 그녀는 원하는 것은 거의 모두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임소미는 종종 한탄했다. 그 아이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서 차가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안 되었다.그런데도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너무 좋아했다.아이는 나비를 놓아주었다.아이는 나비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 절대로 해치려 하지 않았다. 수박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유 아주머니가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강이한을 발견한 아이의 눈에는 잠깐의 두려움이 스쳤다.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강이한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는 경계심
그런 결과라면...직면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좋겠지만, 만약 그 상황에 이르게 된다면 그것은 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영원한 끝을 의미할 것이다.그녀가 원했던 대로 끝이 나는 것이다.그리고 이유영은 그로 인해 기뻐할까?강이한의 곁을 떠나고 싶어 했던 이유영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는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을 느꼈다.하지만 이유영이 떠난다고 해도 강이한은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강이한이 만든 결과였다....강이한과 정국진은 서재에서 한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서재에서 나올 때, 정국진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임소미만 홀에 있었다.두 사람이 서재에서 나온 모습을 보고 임소미의 표정도 어두워졌다.“진우를 보내서 이유영을 데려오게 했어요.”여진우를 보내 이유영을 우천시에서 데려오기로 했다?이유영이 거기서 어떻게 지내든지 상관없이, 임소미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설령 요 선생이 거기에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치료는 장소에 상관없이 받을 수 있었고 약을 먹는 것 역시 어디서든 상관없었다.“돌아오라고 해!”정국진의 목소리는 다소 무겁게 떨어졌다.“...”임소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정국진을 바라보았다.도대체 서재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나온 후 정국진의 태도가 이렇게 변한 걸까?임소미는 정국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당신,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집사!”“예, 선생님.”“진우에게 연락해서 우천시로 가지 말고 다시 돌아오라고 해.”“네!”“아니...”임소미는 정국진의 진지한 모습에 화가 나 발을 굴렀다.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왜 갑자기 강이한 편을 드는 것인가?서재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지 임소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임소미는 본래 차분한 사람이었지만 정국진의 태도에 화가 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그의 뜻을 따르기엔 이유영이 너무 불쌍했다.저번에도 정국진은 강이한에게 기회를 줬지만 그 결과는 참
강이한은 지금 딸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로 여겨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사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그래서 우천시에서 돌아오는 내내 그의 마음은 무겁고 괴로웠다.강이한은 수많은 생각에 잠겼다.지난 세월 동안 강이한은 이유영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이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심지어 아이의 마음속에서 그는 이미 나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었다....서재에서.정국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강이한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눈빛은 차가운 빛으로 번뜩였다.“나를 탓하지 마라.”이유영에 관한 이야기였다. 방금 정국진은 강이한에게 이유영과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강이한은 지금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에게서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더군다나 정씨 가문의 사람들 모두 이유영을 강이한에게 다시 맡길 생각이 없었고 둘의 관계를 완전히 끊으려 했다.“지금 유영이의 곁에 박연준이 있습니다.”강이한은 약간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이미 불편했던 감정은 강이한의 말에 더 강하게 흔들렸다.“그게 무슨 뜻이야?”정국진은 영리한 사람이라 강이한의 말을 듣자마자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거래가 있었음을 눈치챘다.강이한은 복잡한 표정으로 정국진을 바라봤다.“염 선생의 의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완벽한 희망을 보장할 순 없습니다.”아무리 의술이 뛰어나고 성공 사례가 많아도, 언제나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염 선생이 이유영의 눈을 처음 살펴보며 이렇게 말했다.그는 연기로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손상된 눈은 처음이며 지금까지 시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모두 가족들이 많은 정성을 들인 덕분이라고 했다.이런 심각한 손상은 신중히 관리해야 했고 조금이라도 방심할 수 없는 상태였다.이것이 백산 별장이든 반산월이든, 심지어 황가 국제 그룹의 조명까지도 여러 번 교체한 이유였다. 이유영의 눈에 가장 적합한 빛을 찾기 위해 몇 번이고 바꿔야 했던 것이다.하지만 이유영의 두 눈은 결국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그날 염 선생이 자신도 백
강이한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유영은 그의 곁에 없었다.이 사실은 임소미와 정국진의 마음에 깊은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에게 있어 강이한이란 사람은 원래부터 신뢰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은 우천시에 있어요.”우천시?거긴 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임소미와 정국진은 우천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살기 좋고 환경이 쾌적한 곳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정작 그곳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강이한이 이유영을 생판 낯선 그곳에 버려두었다는 말인가?“대체 무슨 속셈이야?”정국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이한에게 다가가며 전례 없이 날카롭고 위협적인 어조로 물었다.강이한은 담담히 대답했다.“염 선생을 찾아냈어요.”염 선생?정국진과 임소미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 이름을 두 사람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과거 이유영의 두 눈이 큰 상처를 입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 바로 염 선생이었다.하지만 그때 마침 염 선생은 은퇴한 상황이었고 그 뒤로 두 사람을 포함한 누구도 염 선생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그런데 강이한이 지금 염 선생을 찾아냈다는 말인가?그런데도 임소미는 여전히 강이한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이유영이 우천시에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 강이한은 왜 이곳에 왔을까?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걸까?“치료 중이예요. 곧 결과를 알게 될 거예요.”강이한은 무심하게 말했다.강이한의 태도는 어딘가 묘하게 이상했다. 정국진은 이를 간파하고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나 강이한은 두 사람을 지나쳐 식탁에 앉아 있는 월이를 바라보았다.아이의 기억은 정말로 짧았다. 강이한을 보자마자 무서워하며 나쁜 사람이라고 외쳤던 월이는 지금 강이한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간 임소미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아이의 심리 회복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이제 월이의 마음속에는 어떤 두려움도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그만 쳐다봐!”임소미는 본능적으로 강이한의 시선을 막
박연준은 전기봉의 행방에 대한 소식을 강이한에게 전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곁을 떠났다. 누구라도 알 수 있듯 박연준이 전달한 내용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그러나 강이한에게 주어진 것은 명백히 선택지였다.결국 강이한은 서주와 이유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고 그의 선택은 서주였다.이유영의 가슴 한구석이 답답함에 서서히 조여 왔다.그 느낌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이유영, 넌 참 똑똑해.”박연준이 이유영을 바라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내가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너희들이 하라는 대로 따르라는 거야?”이유영의 말투에는 날카로운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정말 그래야만 하는 걸까?강이한에게는 분명히 선택지였다. 하지만 이유영에게도 선택지는 있었다. 그리고 이유영은 그 선택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박연준, 아직도 모르겠어?”이유영은 냉소적으로 말했다.“평생 네 얼굴을 보지 않게 되길 기도해. 그렇지 않으면... 난 널 갈기갈기 찢어버릴지도 몰라.”이유영의 한마디 한마디는 날이 서 있었다.“...”그렇다면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증오하는 걸까?확실히 이번 일로 인해 이유영의 마음속 미움은 더욱 깊어졌다.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진심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두 사람을 산산이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박연준은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유영아!”“날 위해 서주의 모든 걸 내려놓았다고 말하려고?”이유영의 말투에는 조롱이 가득했다.모든 걸 내려놓았다.박연준이 전기봉의 소식을 강이한에게 전한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이게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난 네게 부탁한 적 없어.”이유영의 목소리는 냉랭했다.“세상엔 네가 준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법은 없어.”결국 박연준이 전기봉의 소식을 강이한에게 전한 것은 일방적인 희망일 뿐이었다.박연준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 이유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흔들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