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기묵비는 경도에서 쭉 자신의 회사와 사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3년 전에 돌연 회사를 내놓았고 F국으로 갔습니다.”“이 3년 동안, 기묵비는 F국에 주로 머물렀고 거의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와 천미랍은 비행기 안에서 서로 첫눈에 반했다고 들었는데 말이죠.”F국.기모진은 천미랍 또한 F국 국적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외형상으로는 절대로 순수한 F국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전화를 끊고 기모진은 다시 한번 자세히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았다.천미랍에 관한 자료는 여전히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기묵비의 자료를 보자 그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을 발견했다.3년 전 그날, 소만리의 차가운 몸은 그의 품에 안겨 숨이 끊겼고, 영원히 그의 세상에서 떠나 버렸다.그러나 똑같은 날에, 기묵비가 경도를 떠나 F국으로 향한 행적이 그의 출입국 자료에 나타나 있었다.그날 소만리는 죽었고, 기묵비는 아무런 조짐도 없이 경도를 떠났다.우연의 일치인 것일까?그는 궁금증을 안고 기란군을 깨워 씻긴 후 유치원으로 향했다.기모진은 차를 몰면서 백미러를 통해 도통 말을 하지 않는 기란군을 쳐다보며 어젯밤에 소만리가 기란군을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한 말을 떠올렸다.“기란군, 어디 불편한 데 있니?”기모진이 물었다.그러자 고개를 숙이며 책가방을 안고 있던 기란군이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기모진이 눈살을 찌푸렸다.그가 알던 기란군은 이렇게 답답한 성격이 아니었다. 기란군은 그 당시에 매일 아빠를 부르며 활발하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는데 말이다.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아이는 아빠를 부르는 일이 없었고, 아이와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기모진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실은 그는 이에 대한 답변을 이미 알고 있었다.그는 자신이 사실 얼마나 소만리를 좋아하는지 알아차린 그날부터, 많은 사람과 일들이 그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기모진은 기란군을 유치원에 내
기여온이 소만리와 판박이인 눈썹을 들썩이며 그에게 인사했다.그러자 기모진이 허리를 구부리고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염염아 안녕, 나는 기란군의 아빠야.”“염염이는 기억하고 있어요.”아이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깜빡이며 물었다.“저랑 놀아주려고 오신 거예요?”기모진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주머니에서 작은 인형을 꺼냈다.“난 란군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려고 왔다가 염염이도 보려고 왔어. 자, 이거 가지렴.””와, 귀여운 토끼다.”염염은 완전히 이 작고 귀여운 인형에 정신이 팔렸다.기모진은 이때를 틈타 염염의 머리에서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냈다.눈앞에 있는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의 마음속은 너무나 큰 기대와 열망으로 가득 찼다.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심정으로 기모진은 어느 검정기관을 찾았고, 그의 관계를 이용해 절차를 빨리 밟을 수 있었다.직원은 그에게 빠르면 8시간 안에 DNA 검사 결과가 나온다고 말해 주었다.DNA 감정 기관을 나선 후, 기모진은 차를 몰고 기묵비의 회사 로비로 향했다.그는 잠시 주저한 뒤, 결국엔 차를 타고 떠났다.만약 기묵비가 정말 소만리를 숨기는 것을 돕고 있다면 그는 기묵비에게 무엇을 물어도 원하는 답변을 받지 못할 것이다.그는 이 8시간이 몹시 견디기 힘들었다.소만리는 회사 이메일을 받자 회사의 2주년 파티 계획을 세우느라 바쁘게 종일을 보낸 뒤, 염염을 데리러 가려고 나오자 기모진의 차가 입구에서 멈춰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어제 기모진과의 대화를 생각하자, 소만리는 몇 초 동안 재빨리 자신의 감정을 추슬렀다.“모진 씨? 또 시간이 남아서 절 찾아오신 건가요?”소만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고, 기모진이 조금 다른 시선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침착하게 그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모진 씨, 왜 그렇게 절 보고 있어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그러자 기모진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종잡을 수 없는 기운을 내뿜으며 대답했다.
휴대폰 너머로 그 말이 들리자, 휴대폰을 쥐고 있던 기모진의 손이 떨려왔다.전화를 끊은 뒤, 그는 재빨리 휴대폰으로 메일에 접속했고, 제일 최근에 온 이메일을 바라보았다.그는 눈동자를 굴리며 손을 휴대폰 액정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누르지 않았다.“빵빵——”뒤차가 재촉하는 경적소리를 내었고, 신호등은 녹색불로 바뀐 지 오래였다.“모진 씨, 괜찮으세요?”소만리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기모진은 잠금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놔둔 뒤 대답했다.“괜찮아요.”그가 엑셀을 다시 밟기 시작했고, 그윽한 눈으로 소만리를 한 번 쳐다 보고는 다시 전방을 주시하며 달렸다.소만리는 원래 기란군에 대해 더 알려고 차를 탔지만 그가 전화를 받고 난 뒤부터 차 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차가 유치원 대문 앞에 도착하자, 소만리는 염염을 데리고 왔지만 기란군은 보지 못했고, 선생님은 이미 기란군을 누군가 데려갔다고 말했다.기란군을 보지 못하자 소만리는 왠지 모를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소만영이 기란군을 데려가서 아이에게 허튼짓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기모진은 한편에 서서 해질녘의 두 모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 스쳐 지나갔고, 그가 메일을 보지 못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은 결과를 보게 될까 두려워서였다.3년 전에 어떤 생각지 못한 일이 있었대도 그는 납득할 수 있었다. 그는 단지 이 순간, 눈앞에 있는 그녀가 한 때 그가 알던 그녀이기를 바랄 뿐이다......기모진이 소만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중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기묵비는 차에서 내려 소만리의 앞으로 가 자연스럽게 그녀 곁에 있는 염염을 안아 들며 서로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기모진의 앞으로 와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모진아, 미랍이를 데려다줘서 고마워.”그러자 기모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고마워할 거 없어, 그냥 미랍 씨랑 가까워지려고 한 것뿐이니까.”그의 대답은 매우 솔직하면서도 다소 제멋대로였다.기묵비는 다시
고통밖에 없는 사랑을 하고 나니, 만약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녀는 사랑받는 것을 선택하고 싶었다.......기모진은 별장으로 돌아와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고, 거기에는 그가 궁금해하는 답이 있었다.그러나 그가 방에 들어서자 소만영이 주방에서 직원의 도움을 받으며 밥을 하고 있었다.이 장면은 기모진으로 하여금 소만리를 떠올리게 했다.그녀는 매일 밤 그를 위해 항상 저녁밥을 차려 주었지만 그는 전혀 무관심했고, 차라리 외박을 하면서라도 나쁜 여자라고 생각했던 그녀를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인기척을 느낀 소만영이 고개를 돌려 기모진을 발견하자, 잽싸게 그의 곁으로 뛰어와 말을 건넸다.“모진아, 돌아왔구나. 군이는 내가 데리고 왔어. 오늘 내가 특별히 와서 저녁밥을 만들고 있었어. 나 처음으로 밥 해보는 거야, 네가 좋아했으면 좋겠다.”그녀가 열정 가득한 눈빛을 하며 기모진을 쳐다보았다.“모진아, 오늘 우리 엄마가 Miss l.ady 1주년 파티 초대장을 받았는데 나랑 같이 가주면 안 돼?”그러자 기모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시간 없어.”“모진아.”소만영의 웃음기가 점차 사라지마 말을 이어갔다.“아직도 날 용서해 줄 마음이 없는 거야? 그 일이 일어난 지가 언젠데, 그리고 나도 만리한테 당한 건데 왜 이런 사소한 일로 나한테 그러는 거야?”“사소한 일?”이 말을 듣자 기모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목소리가 냉담해졌다.“하루빨리 시간을 내서 너랑 내가 파혼한 걸 발표해야겠어.”“......”소만영은 기모진의 뒤돌아선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황급히 그를 잡아당겼다.“모진아, 제발 그러지 마. 나한테 날 평생 돌봐 주겠다고 약속했잖아!”기모진은 그 해 해변가에서 했던 약속을 떠올리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만약 그때의 정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짜증이 났을 것이다.몇 초가 흐른 뒤 그는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너를 돌봐주겠지만 다시는 결혼 같은 건 안 해.”“......”소만영의 얼굴이 창백
기모진은 곧 매우 전문적인 분석 데이터를 볼 수 있었고, 대충 훑어보고는 곧바로 맨 마지막 페이지로 넘겼다.결과를 본 그는 1초간 온몸이 굳어졌다.마음속에 있었던 의심과 기대, 그리고 한 줄기 어이없는 희망까지도 모두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감정서에 염염과 그는 친자 관계가 아닌 것으로 명기돼 있었다.하지만 이 둘의 염색체는 같은 점이 있었고, 같은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염염은 정말로 기묵비의 아이였고, 그래서 그의 DNA와 염염의 DNA가 친척 관계로 나온 것이다.기모진의 손가락 사이로 휴대폰이 떨어졌지만,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해 질 녘의 노을빛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얼굴을 고즈넉하게 비추었고, 한참 후에야 기모진은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이 웃었다.역시, 그저 얼굴만 닮은 거였구나. 그녀는 이미 떠나고 없구나.그는 3년 전 일을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했고, 영원히 지울 수도, 빈자리를 채울 수도 없다는 사실에 그는 평생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었다........기모진이 자신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 소만리는 이틀 뒤에 있을 파티에 전념을 다했다.가장 호화로운 외관을 가진 호텔은 기 씨 그룹 계열의 6성급 호텔이었고, 소만리가 미리 장소 예약을 하고 계약을 위해 출발하려 문을 나서자, 소만영이 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정신이 피폐해 보였고, 항상 가냘프고 우울한 얼굴을 하며 공격적인 성격으로 위선적인 면모를 보인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소만리를 발견한 그녀는 재빨리 그녀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건넸다.“천미랍 씨, 시간 좀 내줄 수 있나요,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요.”소만리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눈앞에 있는 가식적인 여자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저와 만영 씨 사이에 이야기할 거리가 있나요.”이 말을 하며 떠나려고 하자 소만영이 다시 그녀를 부르며 말했다.“천미랍, 내가 이렇게 빌잖아.”소만영이 그녀를 향해 애원하듯 말했다.“시간 많이 뺏지 않을게요.”소만리가 걸음을 멈추고
소만영은 그녀의 대답을 듣자 얼굴이 굳어지며 여전히 안쓰러운 얼굴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말투를 하며 말했다.“미랍 씨 말은, 굳이 제 약혼자를 꼬시고 정부가 되겠다는 말이죠?”소만리는 여유롭게 말을 받아쳤다.“왜 그쪽 생일날 제가 거울을 선물한 줄 아세요?”“......”소만영의 낯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소만영 씨는 아직도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분간을 못한 것 같네요. 기모진 씨가 몇 년 동안 당신과 결혼을 안 한 사실도 이해가 가고요.”소만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치고 일어나 가려고 했다.그러자 소만영이 벌떡 일어나 애써 숨겨왔던 친절함을 잃으며 말했다.“천미랍! 내가 네 낯짝을 생각해 줬는데도 넌 주제도 모르는구나.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딱 기다려. 날 건드린 대가가 어떤 건지 톡톡히 알게 해 줄테니까.하지만 소만리는 차분하게 발길을 돌렸고, 소만영의 분개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그럼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려야겠네요. 너무 기대되는 걸요.”그녀는말하며 손에 있던 휴대폰을 더욱 꽉 쥐었다.그렇다. 그녀는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소만영, 어서 와, 난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소만리가 나가는 것을 보고 소만영은 옆에 있는 별실로 들어갔다.“어때? 다 찍었어?”그녀는 화난 말투로 추궁했다.그 사람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대답했다.“다 촬영했습니다.”소만영은 그제야 편안해진 듯 독한 눈을 가늘게 떴다.“흥, 천미랍, 내가 널 제대로 망쳐줄게! 그 당시의 소만리와 같은 비극을 맛보게 될 거야!”소만리는 커피숍에서 나온 뒤 곧바로 호텔로 들어섰고, 뜻밖에도 그녀를 접대하는 사람은 기모진이었다.소만리는 기모진이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이 이전과 다르게 한결 정상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은 곧 기묵비의 전략이 대충 통했다는 것이었다.소만리는 당연히 소만영이 자신을 찾아온 일을 언급하지 않았고, 그저 일처리만 열심히 해냈다.다 끝나고 기모진이 그녀에게 물었다.“천미랍 씨
기모진의 술에 취한 얼굴에 근심이 보이며 말했다.“그 사람 때문에.”오랜 침묵 끝에 소만리는 그의 대답을 들었다.그녀.그가 줄곧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 소만영이었다.소만리는 술잔을 쥔 손가락을 움츠렸다.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증오의 불길이 사그라들었지만, 씁쓸함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리야, 난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내 신부로 맞이해서 널 영원히 지켜줄게......”그해 소년의 약속이 귓가를 스쳤고, 창밖의 스치는 가을바람처럼 멀리 날아가 버렸다.소만리는 잔을 들고 술을 쭉 들이켰다.그녀의 마음은 바늘에 찔린 듯 쑤셔왔다.그녀는 그 당시의 자신을 안타까워했고, 그렇게 순진하게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며 바보같이 그를 기다린 결과는 냉혹하고 무자비한 괴롭힘이었다.소만리의 눈빛이 싸늘해지며 원한으로 가득 찬 눈으로 앞에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기모진, 나는 네가 단지 우유부단하고 매정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넌 그냥 나에게 마음을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거구나.그해 네가 불렀던 리는 모두 허구일 뿐이었구나.소만영,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좋아, 내가 마음껏 사랑하도록 해줄게!.......기모진은 자신이 언제 소파에서 잠들었는지도 모른 채 눈이 떠졌고, 소만리도 언제 떠났는지 특실에는 기모진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그는 이마를 짚으며 술에 취하기 전 소만리와 한 대화를 생각했다.그는 곧장 주머니에서 조개껍질을 꺼내 손바닥에 조개껍질을 올려 바라보자 그의 생각이 점점 깊어지며 마치 그 해로 돌아간 것 같았다.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해변으로 휴가를 떠났지만, 그는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그는 또래와 다르게 엄청난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즐거움이라고는 없었다.이때, 그의 앞에 한 여자아이가 나타났고, 그녀가 자신을 ‘리’라고 불렀다.얼마나 간단한지 절대로 까먹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그는 웃을 때 눈썹이 휘어지는 것과 보조개가 깊숙이 들어가며 눈이 유리처럼 맑고 투명한 그 여자아이의 얼굴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이틀 뒤, 파티가 다가왔다.Miss l.ady의 브랜드가 커지자 오늘 밤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유명인사들이었고, 특히나 알아주는 귀부인들이 많이 참석했다.소만리는 이미 준비를 마쳤지만 오늘 밤 사화정도 참석한다는 걸 알고는 마음이 매우 심란했다.그녀를 낳았지만, 매정하게 버린 어머니였다......본부 사장님의 전화를 받은 소만리는 종종걸음으로 파티장에 들어섰다.들어서자마자 수많은 귀부인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각종 귀중품들과 한정판 액세서리들을 서로 치켜세워주고 있었다.소만리가 들어가자 곧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골드빛 롱치마는 그녀의 아름답고 가냘픈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흑발의 긴 머리카락은 그녀의 백옥 같은 피부를 더욱 희게 해 보였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그윽하고 옅은 향기를 내뿜었다.“저 여자가 천미랍이라고?”“듣기론 저 여자가 수정로에 1호점을 내서 Miss l.ady 점장까지 됐다고 하던데.”“저 여자가 수정로에 있는 그 Miss l.ady 점장이라고? 예쁘고 능력까지 있네.”“무슨 능력? 듣기론 돈 있는 남자를 꼬셔서 그 자리까지 오른 거래.”“어쩐지, 저렇게 젊은 여자가 어떻게 뒤에서 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저렇게 잘 될 수가 있겠어. 이번 Miss l.ady 1주년 기념 파티도 경도에서 하는데 저 여자 체면 살려주는 기회겠지.”소만리는 주변에서 의도가 좋지 않은 쓴소리들이 들려오자 담담하게 웃어 보이며 계속해서 걸어갔다.그녀는 곧 Miss l.ady의 총지배인과 디자인 감독을 보았고, 그녀들은 몇 명의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녀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손님 중에 두 사람은 소만영와 사화정이었다.말하던 중에, 지배인과 감독이 소만리를 발견하곤 말을 했다.“여러분, 제가 여러분들께 한 여성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디자인 감독이 소만리에게로 눈을 돌리자, 사화정과 소만영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고, 두 사람은 순식간에 놀라는 기색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