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과장은 반지수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급하게 자신의 검지를 입에 갖다 대며 얼른 문을 닫았다.“아유 이 아가씨야! 말조심 좀 해. 지금 우리는 류다희한테 완전히 미움을 샀다구!”“그게 무슨 뜻이에요? 이제 갓 졸업한 신입인데 내가 뭐가 두려워서 말조심을 해요? 방금도 류다희가 버럭 하는 바람에 제대로 한 마디도 못했는데요.”반지수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여 과장은 손을 뻗어 반지수의 어깨에 올렸다.하지만 반지수는 여 과장의 손길이 못마땅하다는 듯 그의 손을 뿌리쳤다.여 과장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손을 뻗어 반지수를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반지수도 피하지 않았다.“말 똑바로 하세요. 류다희가 도대체 뭘 어쨌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그 여자를 무서워하는 건데요?”“아이고 이 아가씨야, 지금 보고도 몰라? 방금 사장님이 계속 류다희 씨를 보면서 류다희 씨 말을 뒤에서 도와주고 있었잖아. 안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처참히 깨질 수 있겠어?”여 과장의 말을 듣고 반지수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떴다.“그 말인즉슨 사장님과 류다희가 뭔가 내통하고 있다는 거예요?”“딱 보면 몰라!”여 과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자기야. 이 회사에 있고 싶으면 내일 나랑 같이 가서 순순히 잘못을 인정해야 해. 안 그러면 우리 모두 회사에서 나가야 돼. 만약 해고된다면 앞으로 무슨 돈으로 자기한테 가방이며 목걸이며 사줄 수 있겠어?”반지수는 예선과 류다희에게 정말이지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돈이 걸린 문제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류다희가 사장이랑 내통하는 사이라니 더더욱 미움을 사서는 안 될 일이었다.하지만 반지수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몸매와 류다희의 몸매를 놓고 보자니 젊고 유능한 사장이 어떻게 애송이 같은 류다희한테 반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튿날 여 과장은 사장실 앞에서 사장이 출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이윽고 사장이 도착
예선은 듣자마자 이 목소리가 바로 사무실 동료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맞아요. 이제야 이해가 되네.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면 누가 그렇게 사장님 앞에서 건방지게 굴 수가 있었겠어요?”“그러니까 말이에요. 그날 류다희가 그렇게 의기양양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더라고. 뒷배를 믿고 그렇게 날뛴 거예요!”류다희가 은비 언니, 소향 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던 사람들이 지금 엘리베이터에서 거침없이 수군거렸고 정확하게 류다희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었다.이 엘리베이터에는 다른 부서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서로 가서 또 말을 옮길 것이다.결국 머지않아 온 회사에 소문이 쫙 퍼지게 될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예선은 엘리베이터에서 들은 얘기가 너무나 귀에 거슬렸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예선은 그 두 여자 동료들을 뒤쫓았다.“소향 씨, 은비 씨.”그녀는 앞서가는 두 여자를 불러 세웠다.은비와 소향은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고 그제야 엘리베이터 안에 예선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엘리베이터에서 자신들이 한 말을 떠올리자 두 사람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졌다.예선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갔다.“소향 씨, 은비 씨.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당신들이 류다희 씨와 사장님이 무슨 관계라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도대체 무슨 관계라는 거예요?”“류다희 씨가 그저께 회식 자리에서 날 도와준 것은 다희 씨가 워낙 솔직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반지수 씨가 내 디자인을 베낀 건 확실한 사실이었구요. 당신들도 그 자리에서 그때 증거를 다 봤잖아요.”예선은 인터넷에 퍼지고 있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말했고 은비와 소향은 예선을 향해 정색을 하며 말했다.“예선 씨, 사장님이 계신 자리에서 솔직하게 말하기가 그렇게 간단한 줄 알아요? 절대 아니죠.”“지금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얘기로는 류다희 씨와 사장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던데요!”“그렇고 그런 사이?”
예선은 무슨 상황인지 대충 짐작했고 서둘러 소만리에게 마저 남은 말을 하고 전화를 끊은 뒤 류다희를 진정시켰다.“다희 씨,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요.”“아니, 예선 언니. 방금 내가 들은 게 무슨 말이에요? 나와 사장님이 인터넷 실시간 검색에 떴다구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류다희는 다급히 캐물었다.뒤에 있던 두 사람은 예선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 지체 없이 앞으로 나와 류다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류다희 씨, 아직 몰랐어요? 류다희 씨랑 사장님이랑 특별한 관계라고 인터넷에 대문짝만하게 게시물이 올라왔던데.”“뭐라구요? 나랑 사장님이랑 특별한 관계요?”“그래요. 인터넷 못 봤어요? 지금 거기 난리 났어요. 류다희 씨랑 사장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아주 소문이 자자해요. 그럴듯한 근거들도 올라오고 있구요!”“어떤 사람들은 사장님이 다희 씨를 그렇게 감싸고돌며 반지수 씨를 해고한 걸 두고 당신이 사장님한테 고자질했기 때문이라고도 해요!”“내가 고자질했다구요?”류다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내가 고자질을 할 필요가 뭐 있어요? 분명히 반지수 씨가 부정한 방법으로 예선 언니의 디자인을 베낀 건데. 그리고 표절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예요. 회사에서 해고한 걸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구요!”“류다희 씨, 그럼 당신과 사장님 사이의 소문은 사실인 거예요?”은비가 조심스레 탐색하듯 물었다.“사실이라면 사실이겠죠. 그게 무슨 법을 어기기라도 한 거예요?”류다희는 잔뜩 성이 나서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탕비실 밖으로 뛰쳐나갔다.은비와 소향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방금 들었어? 류다희가 인정했어!”“나도 들었어. 사장님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는데도 저렇게 시원시원하게 인정하다니! 어서 가서 류다희가 뭘 하려는 건지 봐야겠어요!”소향과 은비는 가십거리에 혈안이 된 불나방처럼 바로 류다희를 뒤쫓았다.놀라기는 예선도 마찬가지였지만 류다희와 사장의 관계가 인터넷에서 말한 것과
나익현 사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여 과장은 소스라치게 놀랐고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손에 땀이 날 정도였다.“사, 사장님, 오셨어요.”여 과장은 전전긍긍하며 인사했다.나익현은 여 과장에게 가까이 걸어갔고 뭔가 화가 잔뜩 나 있는 류다희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이에요? 왜 이렇게 화가 났어요?”류다희는 불만스럽게 눈을 부릅뜬 채 화가 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과장님한테 물어보세요!”여 과장은 이 말을 듣고 더욱더 어쩔 줄을 몰랐다.사무실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나익현이 류다희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온화하고 관대했다.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역시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평범한 직장 신입이 감히 사장님에게 저런 말을 내뱉다니!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은비 또한 두 사람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더욱 확신하며 말했다.“지금 봤죠?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은 모두 사실이에요! 예선 씨, 저 정도면 이제 믿고도 남지 않아요?”“그런데 예선 씨, 어떤 대단한 친구를 알길래 실시간 검색어를 삭제할 정도예요?”이쪽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고 갔지만 저쪽에서는 여 과장이 더듬거리며 겨우 사장의 질문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사장님, 제 생각에는 류다희 씨가 아마 인터넷에 올라온 그 일을...”“인터넷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나익현은 냉혹한 목소리로 물었다.여 과장은 태블릿PC를 들고 인터넷 포털에서 기사를 찾아 공손하게 사장에게 건넸다.도저히 직접 말로 설명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사장님, 이것 좀 보세요.”나익현은 깊고 검은 눈썹을 한 번 가다듬고는 손을 뻗어 태블릿PC를 받았다.류다희도 어느새 나익현 옆으로 다가와 함께 태블릿을 보았다.인터넷에 나와 있는 기사 내용을 보자마자 류다희는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반지수. 틀림없이 그 여자가 한 짓이에요!”류다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제하지 못했다.“내가 그 여자
”류다희 씨, 어디 갔었어요?”“반지수를 찾으러 갔지만 못 찾았어요.”류다희는 솔직하게 말하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여 과장 자리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과장님은 분명 알고 있을 거예요.”예선은 류다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채고 그녀를 진정시켰다.“그래요, 알았어요. 화내지 말아요. 난 다희 씨 믿으니까. 인터넷에서 떠들어대는 말, 그거 다 거짓말일 뿐이고 다희 씨랑 사장님은 결백하다는 거 알아요.”예선의 말을 듣고 류다희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하지만 예선이 그렇게 믿는다고 해도 다른 동료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점심시간이 되었고 예선은 류다희와 같이 점심을 하려고 했는데 류다희는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뜨고 가 버렸다.예선은 류다희가 화장실에서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류다희에게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을 꺼내는데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듀오가 다시 나타났다.“예선 씨, 아직도 류다희 씨 기다려요? 방금 사장님실에 가는 거 같던데.”은비는 한껏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어 예선에게 말했다.“아직도 류다희 씨랑 사장님이 결백하다고 믿어요? 예선 씨 지금 보니까 류다희 씨한테 완전히 깜빡 속은 거 같은데요!”“아닐 거예요.”예선은 여전히 자신의 판단을 고수했다.“난 다희 씨 믿어요. 자꾸 문제 커지게 그렇게 함부로 추측하지 말아요. 다희 씨와 사장님과의 관계를 잘 모르긴 하지만 결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아닐 거예요.”예선은 말을 마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일어섰다.식사를 하고 있던 예선은 소만리로부터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서 관련 이름을 모두 삭제했다는 전화를 받았다.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만리가 삭제한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에 의해 삭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예선은 이미 나익현 사장이 손을 쓴 것이라고 추측했고 그가 그렇게 한 것도 크게 비난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사실 예선은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류다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
류다희의 말에 사무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고 말았다.뭐!그녀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지난 22년 동안 나익현 사장이 그녀를 지지해 주고 뒷받침해 줬다고?22년?류다희가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되지 않았고 나이도 스물둘, 셋 정도라는 걸 모든 사람들이 기억한다.그럼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나익현과 알게 된 거 아닌가?이게 무슨 뜻일까?모두들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반지수는 맞은 뺨을 손으로 감싸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 그게 무슨 뜻이에요?”반지수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류다희는 반지수의 멱살을 잡은 손을 더욱 움켜쥐었다.“그것도 몰라요, 멍청이!”“...”반지수는 뺨을 두 대나 맞은 데다 욕까지 먹자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그녀는 류다희의 손을 뿌리치려고 애써 보았지만 류다희는 힘이 너무 세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왜요? 이제 좀 힘들다는 걸 알겠어요? 당신이 인터넷에 그런 글을 올릴 때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생각했었어야죠!”“...”예선은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았고 류다희를 말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류다희가 계속 이렇게 멱살을 조르다가 반지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류다희 씨, 우선 손부터 놔요.”예선이 나서서 류다희의 손을 잡았다.류다희는 원래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지만 예선이 권하자 못 이기는 척하며 멱살을 내팽개치며 손바닥을 털털 털었다.“콜록콜록.”반지수는 숨을 몰아쉬듯 기침을 두어 번 한 뒤 표정이 돌변하더니 득달같이 류다희에게 달겨들었다.“류다희 씨, 헛소리하지 마세요. 당신과 나익현 사장이 무슨 관계인지 난 관심 없어요. 인터넷에 올라온 그런 글들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 날 모욕하고 헐뜯는 짓 그만해요! 또 한 번 나한테 누명 씌우다가는...”“씌우다가는 뭐요? 지금 당신이 한 게 아니라고 발뺌할 낯짝이 있어요! 네?”류다희가 반지수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반지수도 지
나익현은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아까 들어왔을 때 당신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는 증거가 있으면 보여달라고 다희한테 소리치던데. 다희는 증명할 수 없어요. 대신 내가 증명할 수가 있어요.”“...”“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람의 ip 주소와 정보는 이미 기술자를 통해서 확인했어요. 당신이 한 짓이 맞다는 걸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이미 경찰에 신고도 했으니 궁금한 점이 있으면 잠시 후에 경찰한테 물어보세요.”“...”이 말을 들은 반지수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옆에 서 있던 여 과장은 자신한테 불똥이 튈까 봐 전전긍긍하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반지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익현이 자신을 일부러 놀래키려고 이런 말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경찰 신고요? 신고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세요. 어차피 내가 한 것도 아니니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인터넷에서 떠도는 얘기가 사실이라면 허위 비방도 아니잖아요!”반지수는 내심 긴장했으나 겉으로는 대범한 척하며 차갑게 웃었다.“여러분들도 인터넷에 떠도는 글 보셨죠? 지금 보시다시피 여러분의 사장님이 이렇게 류다희 씨를 감싸고도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두 사람이 아무 사이도 아니란 걸 믿겠어요!”그녀는 말하면서 눈을 희번덕거렸다.“22년 동안 알고 지냈다는 것도 모두 사기일 거예요. 두 사람처럼 이런 부적절한 관계는 뭐 비즈니스 업계에서 드문 일도 아닌 걸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류다희 씨 같이 대학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이 큰 회사에 들어올 수 있었겠어요?”반지수가 여러 사람들을 선동하는 모습을 보고 류다희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예선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말리며 그녀를 대신해 반지수에게 화를 내었다.“류다희 씨는 입사할 때 내가 직접 면접을 봤어요. 그녀의 모든 능력이 회사의 채용 조건에 부합했기 때문에 채용된 것이지 당신이 말한 그런 추잡한 것은 추호도 없었어요.”예선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반지수를 바라보며
패기 넘치는 목소리가 사람들의 귓가를 강하게 파고들었고 순간 명품 옷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부인이 카리스마 넘치는 자태로 반지수에게 다가갔다.귀부인의 늠름한 눈매와 미간에는 류다희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당당함이 뿜어져 나왔다.그녀는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뺨은 벌겋게 달아오른 반지수를 보며 손을 번쩍 들더니 냅다 반지수의 뺨을 내리쳤다.“아!”반지수는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도무지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혼란스러운 가운데 맞은 뺨은 왜 그렇게 아픈지 참을 수가 없었다.반지수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빳빳이 들어 여자를 노려보았다.“당, 당신 날 때렸어요?”“그래, 때렸다. 넌 맞아야 돼. 누가 너한테 그런 헛소문을 인터넷에 퍼뜨리라고 했어? 내가 뺨 한 대 때리고 만 걸 다행으로 알아.”여자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눈빛만은 매우 날카로웠다.반지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경찰관이 와 있다는 걸 떠올렸다.“경찰관 님. 이 여자가 경찰관 님들 보는 앞에서 날 때렸어요! 어서 이 여자 안 잡고 뭐해요!”경찰도 이 여자를 추궁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두 분의 일에 기꺼이 협조하겠습니다. 보셨다시피 내가 이 여자를 때렸어요. 내 행동에 책임을 져야죠. 그러나 우선 당신들은 인터넷에 내 딸과 아들의 평판을 더럽히는 글을 올린 이 어리석은 여자를 먼저 처리해야 할 겁니다.”여자는 말을 마치고는 반지수를 노려보다가 류다희에게 눈길을 돌렸다.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온화하고 다정한 눈빛이었다.“다희야, 이제 엄마가 왔으니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여자는 진지한 말투로 류다희에게 말했고 갑자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익현을 노려보았다.“익현아, 너 친동생을 어떻게 돌본 거야? 사람들이 이렇게 함부로 이상한 소문이나 퍼뜨리게 놔두다니! 그리고 회사에 사람을 고용할 때 제대로 따져보고 한 거야? 이런 사람들이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