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서 엿듣고 있던 안나는 고승겸의 폭언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만약 남연풍이 진실을 말한다면 그때 그녀는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안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빠져나갈 궁리를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서재에서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안나는 호기심과 불안함을 느끼며 문짝에 귀를 갖다 대려고 더 가까이 다가갔다.바로 그때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고승겸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자 안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멍하니 정신을 잃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겸, 난 당신이 걱정이 되어서 엿들은 거지 일부러 엿들어 보려고 한 거 아니야. 심지어 난 엿듣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었어.”안나는 애써 웃으며 설명했지만 고승겸의 얼굴은 어두웠고 이상하리만큼 담담했다.안나는 서재 안을 좀 들여다보며 남연풍의 상황을 알고 싶었지만 겨울바람보다 더 매서운 고승겸의 눈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승, 승겸?”“보아하니 당신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한 것 같군.”“...”고승겸의 말을 듣고 안나는 얼굴이 굳어져 버렸고 심장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승겸, 나,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난 그저...”“넌 내 이름 부를 자격도 없어. 너에 대한 나의 감정이 변했기 때문에 너랑 결혼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 가문이 조금도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더라면 넌 이 집에 발도 들여놓지 못했을 거야.”“...”안나도 자신의 뒷배에 자신의 가문이 없었다면 고승겸의 아내가 되지 못했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말을 직접 고승겸의 입을 통해 들으니 안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너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감히 내 사람을 뒤에서 건드리다니.”“...”고승겸의 차가운 말이 안나의 심장을 그대로 강타했다.그녀는 남연풍이 고승겸에게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그가 이런 태도와 언행을 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안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려갈 거야?”안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고 있었지만 애써 상처받은 척 연기하며 돌아섰다.휠체어를 탄 남연풍은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왔다.“남연풍, 당신이 이겼어. 난 더 이상 여기 남아서 모욕을 자초하고 싶지 않아.”“내가 이겼다고?”남연풍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방금 고승겸과 안나의 대화 소리는 크지 않았고 특히나 몇 마디는 고승겸이 일부러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해서 남연풍이 알아듣지 못하게 했다.그래서 남연풍은 자신이 고승겸의 마음속에 특별한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지금 남연풍은 안나의 말이 너무나 우스울 뿐이었다.“당신이 보기에 내가 이긴 것 같아? 내 두 다리가 이렇게 망가졌고 얼굴도 이렇게 엉망이 되었어. 게다가 남은 인생도 별 볼일 없이 이렇게 폐인처럼 살게 될 거야. 이런 나의 어디가 당신을 이겼다는 거야? 당신이 직접 손을 써서 날 이렇게 만든 것이 진정으로 이긴 거 아니야?”“...”역시나 남연풍이 말을 하고 말았다!안나는 바로 눈을 희번덕거리며 부인했다.“남연풍,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신이 지금 이렇게 된 게 나 때문이라는 거야? 내가 어떻게 당신한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어? 승겸, 남연풍이 지금 헛소리하는 거야. 듣지 마. 난 절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어. 남연풍이 일부러 나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거야.”안나가 계속 부인하는 말을 늘어놓자 어디선가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남연풍이 당신에게 일부러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게 아니에요. 그날 밤 저도 봤어요.”안나는 말소리를 듣고 고개를 홱 돌렸다.초요가 여지경과 함께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것이었다. 안나는 더 이상 어찌할 바를 몰랐다.초요는 성큼성큼 다가와 안나의 손등에 난 상처를 가리켰다.“그 상처는 당신이 남연풍에게 칼을 들이대었을 때 생긴 거잖아요. 당신은 남연풍의 얼굴을 다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다리도 망가뜨렸어요. 남연풍이 당신에게서 도망치다가 실수로 차에
’퍽'하는 소리가 공간을 쟁쟁하게 울렸다.게다가 안나의 엄마는 남연풍의 다친 오른쪽 뺨을 일부러 세게 내리쳤다.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여지경도 초요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그러나 안나의 엄마는 자신의 행동에 쾌재를 부르듯 득의양양하게 어깨를 폈고 그런 자신의 엄마를 보며 안나도 은근히 기뻐했다.하지만 안나가 기뻐한 것도 잠시였다.이번에는 누군가가 똑같이 자신의 오른쪽 뺨을 세게 내리친 것이었다.“아!”안나는 아파서 소리를 질렀다. 고승겸의 손아귀 힘은 너무 강해서 뺨을 맞은 안나는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었다.동시에 입가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며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눈이 휘둥그레진 안나의 엄마와 안나는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고승겸이 이런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가 남연풍 때문에 안나에게 뺨을 때리다니!남연풍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남연풍은 볼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단숨에 말끔히 치유되는 것 같았다.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고승겸이 이런 행동을 보인 걸까?“고승겸, 왜 내 딸을 때리는 거야!”안나의 엄마는 분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고승겸의 무덤덤한 얼굴에 차가운 기운이 흘러내렸고 눈빛은 매섭기 그지없었다.“당신이 내 여자를 때렸으니 나도 당신 딸을 때린 거죠. 그래야 공평하잖아요.”“...뭐, 뭐가 어째? 너 지금 이런 걸 두고 네 여자라고 부르는 거야?”안나의 엄마는 자신이 들은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남연풍 역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이 남자의 말을 듣는 순간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러나 고승겸은 지금 그녀의 꿈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눈앞에 실제하는 존재로 서 있었다.고승겸의 말에 놀라기는 여지경도 마찬가지였다.여지경은 고승겸이 자신의 속마음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밥을 구걸했다구요? 다시 한번 더 말해 보세요? 당장이라도 당신네 가족들을 산바아로 다 쫓
”충고 하나 할게요. 더 이상 승겸이를 화나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승겸이 상속권을 얻는 데에 당신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그저 당신들은 기껏해야 디딤돌 정도에 불과해요. 자신의 입장과 가치를 착각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 집안은 좋은 꼴을 못 볼 테니까.”여지경은 차갑고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초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초요, 승겸이와 남연풍은 아직 할 얘기가 남았을 테니 우리는 아래층으로 가서 앉아서 기다려요.”초요도 더 이상 그 자리에서 안나 모녀와 함께 있기 싫어서 여지경을 따라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안나는 고승겸에게 얻어맞은 얼굴을 감싸며 극도의 불만을 품고 이를 갈았다.방으로 돌아온 안나는 부어오른 뺨과 핏자국이 묻은 입가를 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저 더러운 년 때문에 감히 날 때리다니!”안나는 이를 악물었다.“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엄마,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승겸이한테 대들면 정말 고승겸이 내 얼굴 망가뜨리고 다리도 부러뜨리는 거 아니야?”“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어!”안나의 엄마는 거만하게 눈을 부릅떴다.“안나야, 겁먹을 필요 없어. 지금 네 신분이 뭔지 기억해. 그 남연풍, 그 여자는 집안 배경도 하나 내세울 거 없는데 어떻게 너랑 비교가 되겠니?”“하지만 그 여자는 고승겸의 아이를 가졌고 고승겸도 그 아이를 인정했어. 남연풍은 자기 여자라고...”안나는 이 사실이 너무나 불쾌하고 답답했다.결혼 후 지금까지 고승겸은 그녀와 한 방을 쓴 적이 한번도 없었다.그녀가 아이를 갖고 싶어도 고승겸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안나는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감히 자신의 엄마에게 꺼낼 수가 없었다.여자로서 너무나 체면이 서지 않는 얘기였기 때문이다.“안나야. 걱정하지 마. 엄마는 밥 빌어먹던 그 여자가 아이를 낳게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안나의 엄마는 이를 갈며 다짐을 했다.안나는 순간 그녀의 엄마가 하는 말이 무
고승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분명히 남연풍이 눈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당신 아이가 아니라고? 남연풍, 그게 무슨 말이야?”고승겸은 화를 참으며 물었다. 남연풍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띤 채 말했다.“고승겸, 당신 건망증이야? 방금 서재에서 분명히 말했잖아. 이 아이는 해독제 제조법을 얻는 데 이용하는 카드일 뿐이라고. 단지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이용하는 카드.”“당신...”고승겸은 태어나서 그렇게 화가 나기는 처음이었다. 순식간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그가 화가 나 아무 말도 못 하는 틈을 타 남연풍은 그의 손아귀에 있던 상자를 홱 잡아챘다.고승겸은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남연풍이 상자를 잡아채려 하자 손에 힘을 주어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예상치도 못한 그녀의 행동에 그는 헛웃음이 나왔다.그가 그녀에게 이 상자를 주고 싶지 않다면 그녀는 이 상자에 절대 손댈 수 없다.“남연풍, 당신이 제 발로 오늘 이 집에 오긴 했지만 나갈 때는 당신 마음대로 못 가. 해독제를 만들고 싶으면 여기서 만들어. 여기가 제일 좋은 작업실이야. 다른 곳은 허락하지 않아. 오직 여기서만 만들어야 해.”고승겸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남연풍은 눈살을 찌푸렸다.“날 여기 가둬놓겠다는 거야?”고승겸은 몸을 살짝 숙여 남연풍의 눈앞으로 시선을 가까이 가져갔다.그는 눈썹을 한껏 치켜올리며 입꼬리를 잡아당겼다.“당신은 지금 내 아이의 엄마야. 아무리 당신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 뱃속의 아이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 고 씨 집안 장손이 될 아이야.”고승겸의 말이 남연풍의 귓가를 돌아 마음에 걸렸다. 매서운 통증이 그녀의 가슴을 치는 것 같았다.아이도 없을 것이고 고로 엄마라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장손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남사택은 분명히 이 아이는 낳을 수 없다고 했다. 설사 낳는다고 해도 온전하다는 보장이 없다고 했다.남사택의 말을 완전히 맹신하고 귀담아들었던 건
초요는 남연풍이 고승겸에게 아직 미련이 남아서 이곳에 남기로 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남연풍에게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그렇지만 초요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하지만 언니가 돌아오지 않으면 사택 선배가 걱정할 거예요.”남연풍이 이 말을 듣고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봄기운이 눈길 닿는 곳마다 고운 자태를 자랑하며 매력을 뽐내고 있었고 꽃내음을 실은 상쾌한 바람이 그녀의 입꼬리를 살며시 잡아당기는 듯했다.그녀는 모처럼 부드럽고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나도 알아. 사택이 사실은 날 많이 걱정한다는 걸. 그 아이는 입이 무겁고 마음이 약하거든. 항상 내 뒤에서 날 신경 쓰고 걱정했었어. 하지만 이건 내가 한 짓이니 내가 마무리해야지. 더 이상 사택이 곤란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남연풍의 말투가 몰라보게 부드러워졌다.남사택과 마주했을 때 날이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순간 초요는 남연풍이 사실은 그렇게 냉혹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문득 느꼈다.남연풍에게도 감정을 느끼는 마음이라는 게 있는 것이었다.“남사택한테는 아무 말도 할 필요 없어. 내가 몰래 빠져나온 걸로 해.”“왜 사실대로 말하면 안 돼요?”초요는 당혹스러웠다.오른쪽 뺨에 칼자국이 선명했지만 환하게 웃는 남연풍의 미소는 여전히 깨끗하고 순수해 보였다.“그럴 필요 없어. 내가 그런 사람인 줄로 아는게 정황상 더 나아. 난 할 말 다 했어. 그럼 조심해서 가.”“언니가 이미 생각을 다 하고 결정한 일이니 나도 사택 선배한테 아무 말 하지 않을게요.”초요는 남연풍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몸조심하셔야 해요. 꼭이요.”초요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돌아섰다.그러나 두어 걸음도 채 못 가 뒤에서 남연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초요.”남연풍이 초요를 불렀다.초요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남연풍이 싱긋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고마워.”남연풍은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그러나
갑작스러운 여자의 목소리에 여지경의 표정이 일순간 어두워졌다.여지경이 언짢은 표정으로 올려다보니 안나의 엄마가 거만한 자세로 남연풍에게 다가왔다.“남연풍, 이 일이 커지길 원하지 않으면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뱃속에 있는 그 사생아를 들이밀고 이 집에 어떻게든 들어앉아 보겠다는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마.”안나의 엄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독한 눈빛으로 남연풍을 노려보았다.“만약 내 딸에게서 내 사위를 빼앗는다면 지금 그 두 다리뿐만 아니라 그땐 완전히 널 망가뜨려 버릴 테니까!”노골적인 안나 모친의 협박에도 남연풍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녀가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그러나 남연풍이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여지경이 바로 그녀를 보호하고 나섰다.여지경은 정색을 하고 안나의 모친을 바라보며 유유히 입을 열었다.“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방금 승겸이 태도 보셨잖아요. 만약 남연풍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안나에게도 좋지 않을 거예요.”안나의 모친도 당연히 가만있지 않고 대거리를 했다.“사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내 딸은 이 집안의 명실상부한 며느리예요. 지금 이 뻔뻔스러운 여자가 승겸의 아이를 가졌다고 버젓이 쳐들어왔는데 내 딸이 무슨 근거로 이런 억울함을 당하고 있어야 해요?”“억울하다고?”여지경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당신도 알다시피 승겸이가 안나와 결혼하게 된 이유는 서로의 지위를 이용해서 각자 원하는 것을 취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형식적인 결혼에 불과하다는 거 당신도 잘 알 텐데요.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죠? 네?”“당신...”여지경의 말에 안나의 모친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안나의 모친은 지지 않고 뭐라도 대꾸하고 싶었지만 여지경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이 결혼, 내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당신 딸이 이 집에 들어올 수 있었겠어요? 상황을 좀 잘 파악하는 게 신상에 좋을 겁니다. 승겸이 선택할 수 있
닥터 육은 고 씨 집안 주치의였고 모든 진료 과목을 다 담당하고 있었다.그는 여지경의 지시대로 남연풍에게 전면적인 검사를 했다.남연풍은 여지경이 임신했다는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해서 일부러 의사를 불러 확인하려고 한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여지경은 의사에게 남연풍의 다리와 얼굴의 상처를 검사하도록 했다.닥터 육은 훌륭한 전문의였지만 남연풍의 다리와 얼굴 상처를 진단하고 난 뒤 난색을 표했다.하지만 남연풍은 이미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더군다나 두 다리의 상황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얼굴에 난 상처만큼은 남사택이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닥터 육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여지경은 남연풍의 감정이 상할까 염려되어 일부러 의사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말을 건넸다.마침 고승겸이 여지경과 닥터 육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방으로 들어왔다.닥터 육은 고승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남연풍의 상황에 대해 사실대로 알렸다.“얼굴에 난 상처가 워낙 깊어서 회복될 확률이 아주 적어 보이고 다리 부상은 완치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해 보입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 진찰을 받아보면 혹시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만요.”닥터 육의 말을 듣고 고승겸은 생각에 잠긴 듯 눈썹을 찡그렸다.“그럼 뱃속의 아기는 어때요?”여지경이 물었다.고승겸도 여지경이 묻는 말을 듣고 정신을 가다듬고 닥터 육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현재까지의 검사로는 뱃속의 아이 상태가 양호한 편이지만 자세한 검사는 더 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의사의 말을 듣자 고승겸의 미간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감이 흘렀다.아까 남연풍이 그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몸속에 있는 독소를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독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은 뱃속의 아이일 거라고 했다.고승겸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는 여지경에게 먼저 나가 보겠다고 말을 건넨 뒤 남연풍의 방으로 곧장 들어갔다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