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빠 왔어요.”장명주가 돌연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신나게 소리쳤다. 장소월도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하얀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입은 스무 살 남짓한 대학생 같아 보이는 젊은 남자가 걸어왔다. 그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엄마, 전 오빠한테 갈게요.”강만옥이 말했다.“그래.”그녀가 손에 힘을 풀자, 장명주는 곧바로 흥분하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그 순간 장소월은 화들짝 놀랐다. 그의 모습, 특히 그의 눈과 눈썹이 지금 그녀 옆에 서 있는 남자와 무척이나 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그렇다. 그는 전연우와 매우 닮아있었다.단지 다른 점이라면, 그에게는 전연우가 갖고 있지 않은 순진함과 청초함이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강만옥은 전연우를 한 번 힐끗 보고는 자리를 떴다.그 후, 장소월도 떠났다.차에 오르니,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어젯밤 제대로 자지 못했던 탓인지, 장소월은 차 안에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나와 강만옥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어.”묘지를 떠난 지 10분이 지난 뒤, 전연우가 그녀에게 한 마디 말했다.아무 일도 없었다고?장소월은 줄곧 전연우와 강만옥 사이에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애증의 감정이 존재할 거라 생각했다.그녀는 전연우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그의 순결함을 증명해 주기라도 하는가?그런 말을 내뱉는다면, 그 자신조차 믿을 수 없을 것이다.장소월은 그의 한 마디, 한 단어조차도 함부로 믿을 수 없었다.별장에 돌아간 뒤.전연우는 아이를 안은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걸어갔다. 그의 한쪽 어깨는 이미 비에 젖어 흥건해진 채 말이다.그때 호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전연우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자리를 피해 전화를 받았다.극소수의 전화를 제외하고는, 전연우는 늘 그녀 앞에서 받곤 했다.그가 걸어 나가자 장소월은 틀림없이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전화는
“누군지는 밝히지 않았어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나이는 별로 많지 않은 아가씨 같았어요.”장소월은 워낙 혼자 다니기를 좋아하고 인간관계에 신경 쓰는 데에 능하지 않으니, 은경애는 그녀가 참석할 거라는 말 대신 그저 알려주겠다고 대답했었다.장소월은 초대장을 열어보았다. 아래 적혀있는 이름을 보지 않아도, 위에 글씨만으로도 소현아라는 걸 알 수 있었다.몇 년이 지났어도, 그녀의 글씨는 여전했다.생일 파티?전연우가 밖에서 들어오며 물었다.“가고 싶어? 내가 같이 갈게.”“그때 가서 생각해.”장소월은 손에 들고 있던 금빛 초대장을 내려놓았다. 날짜를 보니 일주일 뒤였다.아마 허이준이 돌아와 알려줬을 것이다. 허이준을 제외하면 그녀의 귀국 소식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니.장소월은 방에 돌아와 입고 있던 검은색 원피스를 갈아입었다.아이를 은경애에게 맡겨놓으니, 마음이 놓였는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침대에 잠시 누워 휴식을 취했다.전연우가 언제 침대에 올라왔는지 전혀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하늘에 천천히 어둠이 내려앉았다.먼저 깨어난 전연우는 아직 꿈나라에 빠져있는 여자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 복도에 있던 도우미가 말했다.“대표님,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전연우가 잠옷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잠시만요.”장소월은 아주 긴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의자에 묶인 채 큰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사납게 번지는 불길은 조금씩 그녀의 피부를 삼켜버렸다. 한편 전연우는 문 어구에 서서 아이를 안고 있는 송시아와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외면하고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녀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절망과 무력감에 휩싸인 채 자신을 집어삼키는 불꽃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꿈속에서의 그녀는 건강한 몸 상태였다...돌연 심장에서 전해져오는 강렬한 통증에 눈을 번쩍 떴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희미한 조명 아래, 전연우가 앉아있었다.
“사람을 죽였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어떤 일을... 오빠가 너한테 알려주지 않는 건, 네 세계가 더러운 흙탕물에 오염되지 않길 원해서야.”“장해진도 깨끗하지 않고, 나 역시...”장소월은 얼룩 한 점 없이 깨끗이 살아가야 한다.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장해진은 줄곧 나쁜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수많은 친구들이 그녀를 괴롭히고, 때리고, 욕설을 퍼부었었다...장소월은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괴롭힘을 견뎌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장해진의 딸이었으니까...그녀가 이런 일로 장해진에게 도움을 청할 때면 장해진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견디라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때문에... 장소월은 이를 악물고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장소월이 천천히 힘을 풀었다. 입술이 빨간 핏빛으로 물들었고, 어두운색 줄무늬 잠옷에도 선명한 핏자국이 묻어났다.“그래. 아버지는 벌을 받고 돌아가셨어. 그럼 넌? 넌 왜 안 죽는 거야?”“너도 수많은 사람을 해쳤잖아. 넌 왜 안 죽는 거냐고!”“아버지가 죽어야 마땅하다면, 너도 죽어야지!”감정이 머리끝까지 북받쳐 올랐다. 또르륵... 긴 속눈썹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전연우는 피로 물들어 더욱 유혹적으로 변한 그녀의 입술을 지긋이 쳐다보았다.그는 손가락으로 피를 닦아주고는 다른 한 손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집어넣고 품 안에 끌어당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난 죽지 않아. 소월이는... 오빠와 함께 잘 살아가야 해.”“난 너랑 함께 있고 싶지 않아. 죽을 때까지.”“언젠간 너도 알게 될 거야.”“난 알고 싶지 않아. 대체 왜 나야? 왜... 내가 모든 피해를 안아야 하는데? 분명 난 잘못한 거 없잖아. 왜! 나한테 이런 고통을 감내하라고 하는 건데!”전연우는 장해진에 대한 모든 원한을 그녀에게 풀었다. 서철용도... 그녀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던 오 아주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다들 그녀를 지옥 불구덩이에 몰아넣는 것에 혈안이 되어 그녀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들었
품에서 달콤하게 잠든 아이가 깰세라, 번개가 치자 장소월은 곧바로 아이의 귀를 막았다.전연우가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은 컵을 집어 들자 장소월이 그를 멈춰 세웠다.“별이가 먹는 약을 탄 물이야.”전연우는 멈칫하다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컵을 내려놓았다.“아이한테 약 많이 먹이지 마. 부작용이 있어서 몸에 안 좋아.”“목소리 낮춰. 금방 잠들었어.”오늘 밤엔 전연우가 그녀를 건드리지 않아 장소월은 모처럼 편히 잠들었다. 새벽, 장소월은 돌연 들려온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전연우는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무슨 얘기를 하는지 장소월은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통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고, 장소월은 이내 다시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날씨는 여전히 흐리고 꿀꿀했다.그녀는 점심 12시까지 자고서야 깨어났다. 옆자리를 만져보니 차갑게 식어있었다. 깨어난 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장소월이 깨자 별이도 연달아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간단히 씻은 뒤 아이를 안고 내려가 밥을 먹었다. 집안 어디에도 전연우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그녀는 소파에 앉아 아이를 눕혀놓은 뒤 기저귀를 갈았고, 은경애는 분유를 따뜻하게 데워 가져왔다.장소월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나갔어요?”“누구요?”은경애는 곧바로 장소월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차렸다.“아, 대표님이요? 아침 일찍 나가신 뒤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비서도 온 걸 보니 회사에 일이 있어 나가신 것 같아요.”장소월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은경애가 한 마디 덧붙였다.“곽씨 아주머니가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며칠 휴가를 내고 싶다고 제게 말했어요.”“네.”장소월은 간단히 대답하고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그렇게 떠난 전연우는 3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가끔씩 안부 전화만 걸어왔다.그가 없으니, 장소월은 한동안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점심시간, 별이는 찬 바람을 맞아 감기에 걸렸는지 연속 며칠 동안 약을 먹여도 호전될 기
기성은은 검은색 우산을 들고 전연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전연우는 검은색 정장에, 검은색 외투를 걸친 채,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장소월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의사가 현관으로 들어왔다.기성은이 우산을 접고, 도우미가 전연우가 벗어 놓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기성은으로부터 무언가 지시를 들은 도우미는 계단에 서 있는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장소월은 그가 오늘 돌아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차갑게 굳어버린 얼굴로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핸드폰을 은경애에게 돌려주고는 아이를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별이는 열이 올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서철용은 청진기로 아이의 상태를 점검했다. 어젯밤 별이를 데리고 정원 산책을 했던 탓일까.그저 일반적인 기침이라 생각했으나, 이틀이 지나도 전혀 나을 것 같지 않았다. 장소월은 그제야 걱정이 되어 병원에 데려가기로 결심한 것이다.서철용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전연우를 쳐다보다가 장소월에게 말했다.“아이는 괜찮아요. 보통 감기예요. 열이 내리는 주사를 하나 맞으면 돼요.”서철용은 가는 주삿바늘을 아이의 손등에 꽂아 넣었다.장소월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보통 감기라면 약만 먹이면 되지, 왜 주사까지 맞아요?”서철용은 정신을 고도로 집중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전연우가 장소월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철용인 틀리지 않아.”그때 서철용이 말했다.“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병원에 가도 돼요.”“마침 소월 씨 건강 검진 결과도 3일 뒤면 나오니, 그때 별이도 데려오면 되겠네요.”전연우가 말했다.“짐 챙겨. 병원 가자.”장소월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두 사람이 무언가 그녀에게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서철용과 전연우 두 사람이 입을 맞춘다면 그 간악함은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장소월은 기진맥진한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나한테 집에서 나가지 말라고 한 건 너야. 그런데 이제 와 또 짐을
“움직이지 마.”돌연 전연우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프로젝트 책임자는 그대로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그를 제외하고도... 회의실 안 모든 사람들은 겁을 먹고 고개를 숙인 채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전연우는 직원들에게 엄격하고 냉정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다.단 한마디 말로 회사에서 쫓아낼 수도 있는 사람이다별이는 얌전히 앉아있지를 못하고 작은 손으로 전연우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다. 평소엔 웃음기조차 보이지 않던 냉혈한이 조그만 아이에게 잡혀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라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개도 들지 못했고, 어쩌다 한 번 그 광경을 본 사람도 감히 웃지 못했다.단번에 쥐죽은 듯 조용해진 회의실에서 전연우가 이마를 찌푸리고 말했다.“계속해!”별이는 젼연우의 목소리에 버튼이 눌렸는지, 엉엉 울어대기 시작했다. 전연우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바로 기성은에게 건넸다.기성은 역시 종래로 아이를 달래본 적이 없으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성은에게 안겨 문을 나선 순간, 아이는 급기야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렸다.비서 휴게실.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기성은의 귀에 들어왔다.“대표님이 데리고 온 아이는 누구 아이일까요? 설마... 그 꽃뱀 여자가 낳은 건 아니겠죠? 인씨 집안 아가씨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벌써 아이를 낳았을 리는 없잖아요.”“누가 알겠어요. 재벌 집에야 어지러운 일투성이죠. 돈 많은 사람 중에 바람을 피우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하지만 회사에서 일한 지 꽤 되었는데도 대표님께서 아이를 데리고 나오신 건 정말 처음 보네요.”“아이를 안고 있는 대표님 모습 참 보기 좋던데요? 대표님처럼 차가운 사람에게 그런 부드러운 면도 있는지 몰랐어요.”“맞아요.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그중 긴 파마머리의 여자가 바쁘게 커피를 타고 있는 사람을 보고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소민아 씨, 대체 뭐 하는 거예요? 커피 몇 잔 타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소민아가 급히 말했다.“다 됐어요. 지금 나가
그렇게 한두 명씩 모두 도망쳐버렸다.소민아는 마주 오는 사람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기 비서님, 저들이 했던 말은 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전 새로 들어온 인턴이라 아무것도 모릅니다.”기성은은 오랜 시간 동안 전연우와 함께 있었던지라 전연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와 흡사한 서늘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기에 회사 사람들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아이 볼 줄 알아요?”“네?”순간 당황한 소민아가 되물었다.기성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아이 볼 줄 아냐고요. 못 알아들어요?”소민아가 곧바로 대답했다.“압니다. 압니다. 갓 태어난 아이부터 80세 노인까지, 보살피는 건 잘합니다.”그때 기성은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별이는 너무 울어 목소리까지 변해버린 뒤에야 간신히 울음을 그쳤다.소민아가 아이를 받아 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성은은 급히 자리를 떴다.낯선 냄새를 맡고, 낯선 이의 얼굴을 본 별이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젠장, 그녀가 알긴 뭘 안단 말인가. 그저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한 말일 뿐인 것을.한 시간 뒤, 전연우는 회의를 끝마쳤다.12시 정각이었다.회의 시간은 본래 두 시간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아이 때문에 최대한 시간을 단축했다.하지만 전연우가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유일하게 저장되어 있는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장소월이 낮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웠을 때, 도우미가 문을 두드리고 핸드폰을 들고 들어왔다.“아가씨, 대표님이 아가씨와 통화가 되지 않아 집 전화로 연락해 왔어요.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아요.”“무슨 일 있으면 잠시 뒤에 전화하라고 해요. 전 지금 쉬어야 해요.”“하지만...”도우미가 난처한 얼굴로 아직 연결되어 있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장소월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주세요.”“또 무슨 일이야?”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전연우가 대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오늘 일찍 출발하는 바람에 분유를 못 가져
검은 구름이 걷히고 차도 양옆 나무 사이사이로 햇빛이 내리쬐었다.장소월은 전연우가 아이로 협박해 목적을 이루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안 오면 굶길 거야.”도우미가 곧이곧대로 그녀에게 전한 전연우의 말이었다.전연우는 그녀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제 이 아이도 전연우가 장소월을 다루는 무기가 되어버렸다.그녀는 옷방에서 가방 하나를 꺼내 아이 물건을 챙겨 넣고는 들고 나왔다.분유를 잊어버린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기저귀까지 가져가지 않으면 어찌한단 말인가...이쯤 되니 그가 일부러 놓고 간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흐렸던 날씨는 점차 맑게 개어가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난 뒤, 장소월은 성세 그룹에 도착했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문 앞에 서서 성세 그룹을 올려다보니, 전생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녀는 도저히 회사에 오고 싶지 않아 가까운 거리에 있는 로즈 가든에 가져다 놓겠다고 했지만, 전연우는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로비에 들어서자마자 프런트에 서 있는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예전 남천 그룹에서 일했던 직원이었다.그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아가씨? 귀국하신 거예요?”장소월은 예의 있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아가씨, 대표님 만나러 오신 거죠? 대표님께서 아가씨가 도착하시면 모시고 올라오라고 분부하셨어요.”“괜찮아요. 저 혼자 올라가면 돼요. 몇 층이에요?”“99층입니다.”“고마워요.”“별말씀을요.”프런트 직원은 장소월에게 99층 대표실로 향하는 전용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었다.“아가씨, 잠시만 기다리세요. 엘리베이터가 곧 내려올 겁니다.”“네.”프런트 직원이 자리에 돌아가자 다른 직원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갔다.“아가씨요? 난 왜 한 번도 본 적 없죠?”프런트 직원이 장소월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사람이 바로 제가 저번에 말했던 장씨 집안의 따님이에요. 대표님의 여동생이 되기도 하죠. 그러니까 앞으로 저 사람을 보면 조심해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배은란은 감히 장 선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그 누구의 헌신도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장 선생은 말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었다.“스스로 잘 생각해 보세요. 정말로 그분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다면, 두 분은 단순한 의사와 보호자 관계여야 합니다. 서민용 환자분의 주치의는 저이니,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와 소통하시면 됩니다. 더 이상 그분을 힘들게 하지 마세요.”장 선생의 그 말 때문에 배은란은 한동안 서철용을 찾아가지 않았다.그저 서민용의 수술이 끝날 때마다, 수술을 마치고 나오는 서철용과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서철용 또한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처럼 서로를 대했다.몇 번의 수술 끝에 서민용은 드디어 깨어났고,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온 지 벌써 다섯 달이나 지나 있었다.배은란은 두 아이를 데려와 서민용을 만나게 해주었다.그동안 그녀는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녀를 만날 때마다 서민용의 건강 상태가 걱정된다며 캐물었다.너무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인지 아이들은 조금 어색해하는 듯했다.너무나 핼쑥해진 서민용의 모습에 소망이는 덜컥 겁을 먹고 말았다.“소망아, 소원아, 아빠라고 불러야지.”배은란은 아이들의 어깨를 감싸 안고 서민용과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소원이는 한참 동안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간신히 아빠라는 말을 내뱉었다.하지만 소망이는 온몸으로 거부감을 드러냈다.“아니에요. 저 사람은 우리 아빠 아니에요...”배은란은 안절부절못하며 서민용의 반응을 살폈다.서민용은 눈을 감고 있었다. 하여 그의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없었다.“소망아!” 배은란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라듯 말했다.소망이는 엄마의 말투에 겁을 먹고 계속 절레절레 고개만 저었다.그 모습에 마음이 아파진 배은란은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설명했다.“소망아, 아빠는 지금 아프셔서 그래. 네가 그러면 아빠가 슬퍼하실 거야.
서민용은 여러 차례 대수술을 거쳐 신체 기관들을 하나하나 교체했다.하지만 적합한 심장을 구하는 일만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오늘도 서민용은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배은란은 방금 수술을 집도하고 나온 서철용을 찾아갔다.“철용 씨, 나...”그녀는 서민용의 병실에 들어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서철용에게 부탁하고 싶었다.하지만 그의 창백해진 입술과 눈 밑에 뚜렷하게 드리운 피로감을 보니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수술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웠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서철용이 얼마나 큰 부담감과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지 또한 알고 있었다.“무슨 일인데?” 망설이는 그녀의 모습에 서철용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배은란은 말을 바꾸었다.“아이들 보러 집에 다녀오고 싶어. 아이들한테 밥도 좀 해주고...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만들어서 가져다줄게.”서철용이 그녀의 건강과 서민용의 목숨을 묶어 놓은 덕분에 배은란은 몸에 다시 살이 붙었고 전체적으로 훨씬 건강해 보였다.서철용은 한동안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시선이 단번에 그녀의 속마음을 간파했다.“서민용 병실에 들어가는 건 아직 불가능해. 그러니까 나한테 굳이 잘 보이려 할 필요 없어.”배은란의 눈에 실망감이 스쳤다. 하지만 그래도 서철용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민용 씨가 괜찮다는 거 알았으면 됐어.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서...”“모르겠으면 안 해도 돼.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나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거야. 그래야 나중에 서민용이 깨어나서 속상해하지 않지.”서철용은 조롱 섞인 그 말을 내뱉고 난 뒤 배은란의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배은란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의 말을 곱씹었다. 한참이 지났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그때 뒤에서 장 선생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서 선생님!”배은란은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았다. 서철용이 걷다가 갑자기 휘청거리며
배은란은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일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고마워. 근데 나 배 안 고파.”그녀는 정말로 조금의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더는 서철용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서철용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미 장 선생에게 장기 기증자를 알아봐 달라고 했어. 서민용 안 죽어. 오히려 지금은 네가 문제야. 이러다가는 그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게 될 수도 있어.”“그놈이 죽으면 넌 죽도록 슬퍼하겠지. 하지만 네가 먼저 죽으면, 그놈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아?”배은란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눈빛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밥그릇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하지만 손가락 끝이 그릇에 닿은 순간, 너무 뜨거워 화들짝 놀랐다.다행히 서철용이 재빨리 그릇을 잡아채 죽이 침대 시트에 쏟아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입 벌려.” 서철용이 명령했다.배은란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술을 움직였다.천천히 죽을 한 숟가락씩 삼키자 억눌렸던 허기가 밀려왔다.그제야 배은란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깨달았다.“네가 이렇게 네 몸을 엉망으로 망치면, 서민용이 네가 안쓰러워서라도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서철용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비꼬며 말했다.배은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그런 거 아니야. 그저 며칠 동안 너무 바빠서 깜빡했을 뿐이야...”서철용은 밥그릇을 내려놓았다.“밥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정신으로 대체 무슨 수로 서민용을 돌보겠다는 거야?”배은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전에도 잘해왔어. 다만 요즘은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그래...”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자신도 모르게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쳐다보았다. 배가 너무 고파 조금 더 먹고 싶었다.서철용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조금 있다가 다시 먹어
그를 몇 초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던 배은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용 씨? 당신이 어떻게...” 서민용이 일어서 걷고 있었다! 이런 서민용의 모습을 본 게 언제였던가! 가득 피어오른 흥분감에 배은란은 또다시 눈물이 왈칵 차올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서민용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점점 더 울보가 되어가네. 울지 마. 네가 우는 거 보고 싶지 않아.” 배은란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가 혹시라도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서민용은 오히려 웃으며 그녀 곁에 앉았다. “미안해. 늘 당신 힘들게 해서.” 배은란은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니야. 당신만 옆에 있다면, 난 늘 행복해.” 서민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너 거짓말할 때 티 난다는 거 거 알아?”배은란은 부인하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서민용의 눈빛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 서민용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배은란도 순순히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서민용은 일부러 걸음을 늦춰 그녀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너 산책하는 거 좋아했잖아. 예전 회사 다닐 때 몰래 빠져나가서 바람 쐬던 거 기억나.” 과거 이야기를 꺼내니 배은란의 머릿속에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서민용은 그녀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걸으며 예전 추억들을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서민용이 발걸음을 멈췄다. “기분 좀 나아졌어?”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어렴풋한 불안감이 느껴져 그의 손을 힘껏 붙잡았다.서민용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웃으며 말했다. “나 어디도 안 가. 배가 좀 고프네. 넌 여기 앉아서 쉬고 있어. 내가 뭐 좀 사 올게.”너무나도 진실된 그의 미소에 배은란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을 놓고 말았다. 길가 벤치
“민용 씨... 민용 씨,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순간 강한 햇빛이 눈에 쏟아져 들어와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쿵 하는 소리에 서철용이 몸을 돌렸다.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배은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배은란?”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곧바로 달려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심각한 영양실조입니다. 적어도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 같아요.”검사를 마친 후, 주치의가 말했다.서철용 또한 흰 가운을 입고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준수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그는 배은란의 모든 검사 과정에 참여했다.그녀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나니 서철용은 더 이상 화를 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반송장 같은 사람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것이다.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그녀가 서민용보다 먼저 갔을지도 모른다!“서 선생님...”주치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서철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그는 복도에 나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닫고 나서야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마음을 바꾸셨습니까?” 주치의가 물었다.그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묻고 있는지 서철용은 알고 있었다.서철용은 병실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다른 방법 없잖아? 모두 살거나, 모두 죽거나 둘 중 하나잖아. 배은란은 지금 목숨을 담보로 날 압박하고 있어.”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 의사다.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이 사람에게 주치의는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저와 서 선생님은 모두 의사입니다. 서 선생님은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이 치료는 정말 무의미한 것이라는 걸요.”서철용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장기 이식 알아봐. 무슨 수를 써서라도.”서민용이 살고 싶어 한다면, 전신 모든 장기 이식을 진행해야 한다.수술이 성공한다 해도, 그저 신체
복도를 따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끝에 다다랐다.서철용은 창가에 멈춰 섰고, 뒤따르던 발걸음 소리 역시 멎었다.어느샌가 주치의는 자리를 비켜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줄곧 내 곁에 있었던 거지? 내가 당신 찾고 있다는 거 뻔히 알면서 왜 나타나지 않았던 거야? 전화는 왜 계속 받지 않은 건데?”배은란의 감정은 차츰 가라앉았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서철용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그늘에 잠겨 어딘가 음울해 보였다.“그 답이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배은란은 미간을 찌푸렸다.서철용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서민용 말고 너에게 소중한 건 없어?” 그날 그는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받고 빌라로 달려가 창백한 얼굴을 한 소망이를 본 순간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배은란은 온통 서민용에게만 신경을 쏟을 뿐, 두 아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모두 그가 보살피며 키운 아이들이었기에, 아무리 배은란을 사랑한다고 해도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책망 어린 그의 말에 배은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난... 민용 씨 상태가 어떤지 당신도 알고 있잖아. 정말 다른 데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어...”서철용은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서민용이 정말 그렇게나 소중한 존재인지 따져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가 겪었던 절망을 떠올린 순간 마음속으로 답을 내렸다. 그는 씁쓸함에 입술을 비틀었다.서철용의 질책에 배은란의 가슴에 끓어올랐던 분노가 죄다 죄책감으로 변해버렸다.하지만 여전히 서민용의 처지는 잊지 않았다. “제발 부탁이야. 민용 씨를 다시 한 번만 살려줘. 그 사람이 깨어나면 네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서철용은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뭐든지? 예전처럼 나랑 살기라도 할 거야?”배은란의 얼굴에 거부감이 스쳤다. 하지만 잠시 침묵한 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모르게만 한다면.” 그녀에게는 자신보다 서민용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그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그녀가 기대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배은란 씨, 저예요. 죄송해요. 혹시 주무시는 걸 깨운 건 아닌가요?” 장소월의 말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배은란은 발신자 번호를 다시 확인하고서야 장소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에요. 마침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혹시 철용 씨 소식 있나요?” 장소월은 왜 그녀가 이토록 애타게 서철용을 찾으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서 선생님은 최근 해외로 나가신 것 같아요. 저도 연락이 안 돼요. 혹시 급한 일이 있으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서철용이 해외로 나갔다는 말을 들은 순간, 배은란은 마음속에 거대한 절망감이 내려앉았다.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에요.” 그 말에 장소월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최대한 연락해 볼게요.” 배은란은 감사 인사를 전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한테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장소월이 물었다. “저희 혹시 예전에 아는 사이였나요? 저를 아시는 것 같은데, 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요.”배은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장소월의 반응은 그녀가 최면에 걸렸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단지 서철용을 서민용으로 착각했을 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그녀는 지금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멀리서 두 번 정도 뵌 적이 있어요. 기억 못 하시는 것도 당연해요.” 장소월은 아, 하고 짧게 대답했다. 어딘가 조금 실망한 듯했다. 배은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때 전 대표님과 사이가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화해하신 건가요? 소월 씨한테 잘 해주시나요?” 장소월은 웃으며 대답했다.“네. 지금은 저한테 너무 잘 해줘요.”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두 분 행복하시길 바라요. 그리고 혹시 서철용 씨를 찾으시면 꼭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장소월도 웃으며 말했다.“배
중환자실 안.서민용은 생기를 잃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서철용은 무균복으로 완전 무장한 채 옆문으로 들어왔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서민용을 보며, 그는 비웃듯 입술을 말아 올렸다.“서민용, 너 정말 잔인하구나.”“눈 좀 뜨고 봐봐. 배은란이 너 때문에 자신을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너 그 여자 사랑한다고 했잖아. 네 사랑하는 방식은 고작 이런 거야?”“내가 널 살리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배은란이 널 낫게 하려고 얼마나 헌신했는지 알기나 해? 대체 무슨 낯으로 이 꼴로 누워있는 거야? 이 세상에 너보다 이기적인 사람은 없을 거야!”침대에 누워있는 남자의 호흡은 여전히 평온했고, 동공에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서철용의 시선이 천천히 모니터링 기기들을 지나 침대 머리맡의 심전도 기기에 닿았다.“너 다 듣고 있다는 거 알아.”“넌 지금 그 여자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잖아. 하지만... 네가 죽으면 그 여자는 너 따라 죽을 수도 있어. 그건 왜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내가 왜 그 여자 네 곁으로 보냈다고 생각해? 지난번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여자는 널 따라가겠다고 했어!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아마 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 있었을 거야!”서철용은 한 마디 한 마디 이를 악물고 뱉어냈다.시선은 심전도 기기에서 서민용의 얼굴로 다시 돌아갔다.잠시 서민용을 도와 그의 숨통을 끊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차라리 배은란에게 다시 최면을 걸어 평생 서민용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지금 이토록 자신을 괴롭히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민용, 너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이렇게 죽어서 배은란에게 평생 기억되고 싶은 거야?”“똑똑히 말해 줄게. 너 죽으면, 나는 즉시 배은란에게 최면을 걸어 영원히 너라는 사람을 지워버릴 거야. 네 바람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아!”서민용은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서철용은 포기하지 않고 심전도 기기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래프의 선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릴
“선생님, 민용 씨 어떻게 됐나요?” 의사는 눈에 띄지 않게 멀리 서 있는 사람을 힐끗 쳐다봤다. 남자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제야 주치의는 배은란에게 말했다. “살려냈습니다. 다만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환자 본인에게 삶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습니다. 수술은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만 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환자 스스로에게 달렸습니다.”살았다는 말에 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의사에게 물었다. “그럼... 민용 씨는 얼마나 더 기다릴 수 있을까요? 만약 서철용 선생님을 찾을 수 있다면요.” 주치의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질문 대한 제 답은 조금 전과 같습니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환자분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배은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주치의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가족분도 아셔야 합니다. 환자분은 지금 돌아가신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요.” “아니에요.” 배은란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 주치의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설득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늘 밤은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볼 겁니다. 일찍 쉬세요.”서민용이 중환자실에 있는데, 배은란이 어떻게 잠들 수 있겠는가? 그녀는 중환자실 복도에 앉아, 창문을 통해 침대에 누워있는 서민용을 바라보았다.분명 그녀가 줄곧 옆에서 보살펴주었음에도, 서민용은 너무나 야위어 마치 종잇장 같았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배은란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이 피어올랐다. 휴대폰을 꺼내 집에서 걸려온 전화라는 걸 확인한 순간, 그녀의 눈에 깃들었던 희망이 죄책감으로 변해버렸다. “엄마, 어디에요? 아빠도 없고, 둘이 놀러 간 거예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배은란은 마음이 저릿해졌다. 아이들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