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큼성큼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오는 남자의 모습에 인시윤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조차 할 수 없다. 인시윤은 그가 이 시간에 병원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한다. 더구나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전연우는 그녀의 손에서 검사 결과서를 빼앗고는 살기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인시윤은 반응할 틈도 없이 어느새 전연우의 경호원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전연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몸에서 풍기는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그녀를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다. 그녀는 어떤 결과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전연우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시윤은 지금 전연우의 한계를 넘어버린 것이다.인시윤은 오늘 그의 비밀을 알아냈다. 전연우는 장소월과의 불순한 비밀을 숨기기 위해 그녀를 죽이는 것까지 불사할지도 모른다.지난번 남원 별장에서 밤새 빗속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에도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 남자는 그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그녀가 죽는다 해도,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것이다."연우 씨... 날 놔줘요!"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인시윤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인시윤이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연우 씨,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대체 뭘 하려는 거냐고요!""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몰래 알아보는 게 아니었어요. 절대 발설하지 않을게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맹세할게요. 진짜 맹세할게요"전연우와 장소월은 정말 혈연관계였다.그들은 정말 남매였단 말이다...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전연우는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친남매임을 알면서도, 전연우는 여전히 장소월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늘이 무섭지도 않는 걸까?! 이런 감정은 절대 존재해선 안 된다! 전연우는 대체 왜...끌려가는 인시윤을 쳐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서철용은 번쩍 눈을 떴다. 눈동자에 깃든 어둠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평소 그에게선 절대 볼 수 없는 진중함이 내비쳤다.서철용은 머릿속의 추측을 확인하기 위해 즉시 자리에서 일어서 책상 위 차 키를 들고 다급히 병원을 나섰다.그는 죽을 때까지도 가기 싫었던 그곳으로 미친듯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머릿속은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만약 장소월이 정말 장해진의 딸이 아니라면...그럼 그는...서철용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제기랄!남원 별장.한창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있던 장소월의 얼굴이 돌연 경련했다. 별이가 먹었던 분유를 토해내자 그녀는 재빨리 휴지를 꺼내 아이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불안감이 온몸에 엄습하는 것 같았다.은경애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아가씨, 별이는 제가 볼 테니까 들어가서 쉬세요.""그래요."요즘 장소월은 매일 점심마다 낮잠을 자는 습관을 들였다.장소월이 지끈거리는 어깨를 주무르며 일어섰을 때, 도우미 한 명이 걸어왔다."아가씨, 서 선생님이 아가씨를 뵈러 오셨습니다."서철용이?장소월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철용이 왜 온 거지?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알겠어요. 지금 내려갈게요."마침 장소월 역시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장소월은 침대 밑에서 사진을 꺼내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서철용은 장소월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입을 열었다."괜찮으면 둘이서만 얘기할까요?"전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지한 모습이었다. 평소 서철용은 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음침하게 그녀를 바라보았었는데 말이다.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에 있는 도우미들을 모두 내보냈다.두 사람이 소파에 앉았다."생일이 언제예요?"장소월은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해졌다. "5월 20일이에요. 그건 왜 묻는 거죠?"5월 20일? 아니다, 그 날짜는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럼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서철용은 손을 뻗어 다짜고짜 그녀의 머리카락을
장소월은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엄마의 어린 시절 친구? 하지만... 오 아주머니는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엄마는 고아였다고, 아버지가 밖에서 주워온 사람이라고 했었다. 분명 따뜻한 거실이었지만 장소월은 전신을 타고 흐르는 한기에 부르르 떨려왔다. 그녀는 다시 서재로 들어가 분홍색 양피로 만든 노트를 폈다. 두꺼운 종잇장을 넘기니 정연하게 쓰여있는 글씨가 보였다. "1975년 1월 20일, 맑음. 오늘은 내 16번째 생일이다. 오늘 의준이가 나한테 예쁜 목걸이와 당나귀를 선물해 주었다. 앞으로 시장에 나갈 때마다 타고 다녀야지." "오늘 엄마 아빠는 무슨 생일 선물을 준비했는지 말씀해주시지 않았다. 너무 기대된다!" "...1975년 1월 21일, 흐림. 어제 생일 파티가 끝난 뒤, 난 의준이가 준 당나귀를 타고 시내에 나갔다. 그러던 중 커다란 말을 타고 나타난 군화를 신은 남자 때문에 깜짝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짜증 나. 그 남자는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놈이 제멋대로 싸돌아다닌다며 나를 비난했다. 엄마가 선물해 준 옷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버렸다.""1975년 3월 28일, 저번 그 남자가 또다시 나타났다. 그는 아빠한테 돈을 요구하러 온 것이었다.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문 앞에서 그 남자를 쳐다보았고 그 남자도 나를 보았다. 너무 흉악했다. 나는 무서워 방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그 남자가 오성을 지키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키가 정말로 컸다! 금주 언니는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 그 사람의 아내가 되겠다고도 했었다.""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를 꾸짖었고, 나를 해코지했으니까!""그 사람은 나쁜 놈이다." 오성? 그게 어디지? 장소월은 그곳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장소월은 엄마가 십 대 때 기록한 일상들을 한 장씩 훑어보았다..."1976년 7월 12일, 오늘 밤에도 그는 돌
왜지?왜 아버지의 이름이 없는 거지?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행복과 즐거움이 넘쳤던 일기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는 걸, 장소월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보면 볼수록 숨이 막혀왔다.대체적인 이야기는 오성에서 일어난 일이었다.엄마는 어릴 때부터 부잣집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호의호식하며 살아왔다. 엄마의 할아버지는 그룹 회장이었고, 그녀의 아버지, 즉 장소월의 할아버지는 부회장이었다.그 당시 유명한 명문가 집안이었다.한의준은 고조할아버지가 전장에서 주워온 고아였고, 6살 때 성씨 가문에 입양되어 엄마와 함께 자랐다. 엄마는 자신보다 세 살 많은 그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별한 관계로 발전했다.고조할아버지도 한의준을 성씨 가문의 데릴사위로 삼을 생각으로 집에 들였다고 한다.그 이후의 사건은 글자가 흐릿해져 잘 보이지 않았다.엄마는 16살이 되던 해, 당시 직업군인이던 연선우를 만났다.그는 26세 젊은 나이에 유능한 장군이 되어있었다.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어 연선우의 눈에 띄었고, 고조할아버지도 내심 이 결혼을 원했는지 혼사를 추진했다.하지만 그때 어머니는 이미 한의준과 결혼을 약속했었다. 둘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 두터운 감정을 쌓은 상태였다...어머니는 17살 때 연선우에 의해 강제로 연씨 가문에 끌려갔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시달리다 어머니는 임신을 했다고 한다. 만약 그때 어머니가 임신한 아이가 그녀라면 중간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렇다면 그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을까?연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왜 갑자기 모두 도륙당했을까?연선우는 3년 동안 대체 어디에서 뭘 한 걸까?그녀의 아버지, 장해진은 이 이야기에서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을까?단서는 여기에서 끊겨버렸다. 그 뒤로 몇 장의 종이가 찢겼기 때문이다.많은 것들은 안개 속에 감춰져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그 한의준은...설마 저번 병원에서 보았던 그 남자일까?하지만 그의 얼
멍하니 생각에 잠긴 그녀의 모습에 전연우는 가시를 바른 생선을 그녀의 그릇에 놓아주며 말했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장소월은 젓가락을 깨물고 있다가 빠르게 반응했다. "아무것도 아니야."전연우는 잠시 뚫어지라 그녀를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저녁 식사를 마치고 전연우는 늘 그래왔듯 장소월과 함께 욕실에서 한참 동안 애정을 나누었다. 일이 끝나자 장소월은 기진맥진해진 채 전연우의 품에 안겨 침실로 들어왔다.전연우는 어두운색의 긴 두루마기에 허리띠를 묶고 있었다. 헐렁하게 열린 옷깃 사이로 단단하고 관능적인 가슴팍이 드러났다. 그는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고 지쳐 잠든 여자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그렇게 한동안 그녀를 지켜보다가 서재로 향했다.희미한 조명 하나가 간신히 어둠을 밝히고 있는 서재 안, 창문 유리에 건장한 몸집의 남자가 비추었다. 날카로운 눈빛에 싸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전연우는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대표님, 분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내일 인시윤 씨는 그 사람과 함께 그 비행기에 탈 것입니다."핸드폰 너머의 목소리가 끝나기 바쁘게 서재 밖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문밖을 쳐다보며 간단히 대답한 뒤 바로 전화를 끊었다.전연우는 서재에서 나와 평온하게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본래 잘 덮었던 이불이 허리까지 밀려 내려가 수려하게 뻗은 하얀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전연우는 아이 울음소리엔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장소월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에어컨 온도를 조금 높였다.인기척을 느낀 장소월이 흐릿하게 눈을 뜨고 말했다. "별이가 울고 있는 거야?""응. 내가 가서 볼 테니까 계속 자."장소월은 고개를 돌려 눈을 감으며 말했다. "배가 고파서 우는 걸 거야. 분유는 주방에 있어."전연우가 옆방에 들어가자 아이는 팔다리를 활짝 벌리고 더욱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렸다. 전연우는 느릿느릿 걸어
지금 이 아이의 존재는 그들에게 부담만 될 뿐이다.전연우는 이 아이를 상관하지 않을 수 있지만, 장소월은 그럴 수 없다.장소월은 별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가 아이가 편히 잠들 수 있게 등을 두드려주었다.별이가 눈을 감고 잠들려 하자 장소월은 아이를 소파에 눕혔다. 별이는 그녀의 품에 안겨 조용히 눈을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 바로 잠든 척 눈을 감았다.장소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텅 빈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어머니의 일기장 속 뜯겨 나간 페이지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던 걸까.그리고 얼룩으로 가려진 그 중요한 부분도...만약 그녀가 장해진의 딸이 아니라면, 어머니와 장해진은 대체 무엇으로 얽혀있는 걸까?어머니는 열여섯의 나이에 연선우와 결혼했다...일기 속 내용대로 그녀가 어머니와 연선우의 아이라면... 서철용도 이 일기장을 봤을 텐데 왜 그녀를 그토록 혐오하고 괴롭혔단 말인가.서철용이 또 다른... 무언가를 그녀에게 감추고 있는 건가?도원촌.좁고 거북한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서철용은 흔들리는 등불 아래에 서서 끊어져 가는 목숨줄을 간신히 잡고 숨 쉬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 도대체 누구 아이예요? 성예진의 일기장 당신이 찢었어요?"서철용은 그 검사 보고서를 확인한 뒤로부터 자신이 여태껏 했던 일이 과연 옳았는지 아닌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그는 처음부터 인시윤이 전연우와 장소월의 관계를 의심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조금도 혈연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상상해본 적도, 의심해본 적도 없다.동하 병원이틀 전.서철용이 통화로 의사에게 말했다. "유전자 검사 결과에 혈연관계가 없다고 나오면 이걸로 바꿔서 보여주세요.""서 선생님은 그 여자가 친남매라고 알 길 원하시는 거죠?""난 모두가 알게 하고 싶어요. 내가 지시한 대로 하세요.""음... 네. 알겠습니다."서철용은 확실히 한 가지 점을 간과했다. 단 한 번도 장해진
그건 두 사람 사이에 세워져 있는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단단한 벽이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전연우 또한 언젠가 천벌을 받고 말 것이다.장소월도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오귀화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는 오랫동안 알아 온 은경애뿐이었다. 때문에 오귀화의 마지막을 처리하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경찰은 화재 사고사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사건을 종료했다.장례식은 조촐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은경애는 유골함을 인적이 드문 한 외딴곳에 묻었는데, 이는 오귀화가 예전 찾아놓았던 묘지였다.장례식이 끝난 뒤 은경애는 오귀화의 유품을 정리했다. 모두 어린 소녀가 쓰는 머리띠와 머리핀들, 그리고 분홍색 공주 원피스 한 벌도 있었다.모두 어린 시절 장소월의 물건이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은경애는 모두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엘리트 개인 병원.사무실에서 서철용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마를 꾹꾹 누르며 밤새 그 보고서를 쳐다보고 있었다.그가 틀렸던 것이다.장소월은 성예진의 딸이었고, 장해진과는 어떠한 혈연관계도 없었다.제기랄, 이렇게 간단한 일을 왜 생각하지 못한 거지.몇 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체 뭘 했단 말인가!"서 선생님."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서철용는 고개를 들고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들어와.""서 선생님, 배은란 씨가 오셨습니다. 예약을 하진 않으셨고, 선생님을 만나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서철용은 냉정하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만날 시간 없어요. 나 없다고 말해요."또각또각.복도에서 땅을 밟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와 피하기엔 늦어버렸다.“네가 날 만나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내가 왔어.”배은란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서철용이 차가운 눈으로 힐끗 보고는 말했다.“나가 있어요.”“네. 선생님.”배은란은 일찍이 3개월 전에 귀국했지만, 두 사람이 만난 횟수는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결국 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서
"제발 그 사람 구해줘.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할게."배은란은 서민용의 치료를 위해 그와 함께 해외로 떠났었다. 하지만 모든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전부 허탕만 치고 말았다.이제 그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서철용이 유일하다.배은란은 평소 한량처럼 먹고 마시며 실없는 장난만 치던 시동생이 국제 의료계에서 이렇게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그녀가 찾아갔던 대부분 병원의 의사들이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서철용을 추천했다.그러다 겨우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았지만, 치료 결과 안타깝게도 서민용의 병세는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되기만 했다.배은란도 도저히 방법이 없어 돌아온 것이다.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그가 차에 타자마자 배은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차 문을 열어 조수석에 앉았다.서철용이 소리쳤다. "내려!""약속해주기 전엔 안 가."배은란 자신은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 말이었지만 서철용의 귀엔 유혹하는 것처럼 들렸다."안 간다고? 형수, 그렇게까지 나랑 자고 싶어?"배은란은 수치심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이가 아니었다면 난 너랑 손톱만큼도 엮이고 싶지 않아!"그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서철용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눈 밑에 묻어있던 짜증스러움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서철용은 차를 몰고 지하 주차장을 떠났다.배은란은 차 안에 앉아 불안한 마음으로 시내에서 점점 멀어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절벽 옆 산꼭대기에 도착해서야 차가 멈춰 섰다. 이곳에선 서울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끊임없이 이어지는 산들, 줄기줄기 흐르는 강, 배은란은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서철용은 차 키를 뽑고 좌석 의자를 뒤로 젖히고는 눈을 감고 옆으로 누워 잠을 청했다."서철용, 민용 씨에겐 시간이 얼마 없어. 어찌 됐든 네 형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어가는 걸 보고만 있을 거야?"서철용은 핏발이 가득 서 있는 눈을 번쩍 떴다. 언제 안전벨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