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아에게 약을 발라주려 병실에 들어가려던 간호사는 안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겁을 먹고 문 앞에 멈춰 섰다.여자의 저주를 퍼붓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왜! 대체 왜 다들 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건데!”한의준은 이마를 조금 찌푸릴 뿐 별다른 기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관계를 맺어왔지만 송시아는 여전히 한의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한의준은 무슨 일이 생기든 항상 자신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한의준은 완전히 미쳐버린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히고는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내가 말했잖아. 넌 편히 쉬면서 우리 아이를 낳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고.”송시아의 눈엔 시뻘건 핏줄이 가득 서려 있었다.“우리 첫 아이도 그놈 손에 죽었다는 거 잊으면 안 돼요.”그녀는 남자의 손을 자신의 아랫배에 올려놓았다.“나도 당신만큼 아이를 원한다는 거 알고 있죠?”송시아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전생에서도 한 번도 마주친 적 없고, 그 어떤 방법을 써도 남자의 과거는 알아낼 수 없었다.그는 단순히 그녀와 아이를 낳기 위해 찾아왔다. 송시아는 그의 일 처리 방식을 목격한 뒤에야 그가 그리 간단한 사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는 면북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그 어떤 지하 조직과도 마음대로 왕래한다.그토록 신비롭고 은밀한 곳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있다...“그건... 내가 하나씩 모두 갚아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더 고생하고 싶지 않으면 병원에서 치료나 잘 받고 있어.”“언제까지 듣고 있을 거야! 들어와!”간호사는 화들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고는 천천히 병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죄송합니다... 환자분이 흥분하신 것 같아서... 들어올 수가 없었어요. 환자분, 지금 임신 2개월 째예요. 의사 선생님께서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치료하셨어요. 안정을 취하기만 하면 곧 퇴원할 수 있으실 거예요.”“뭐라고요? 임신했다고요?”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송시아의 눈동자가
한의준이 떠난 뒤, 소민아는 해바라기 꽃을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오는 길에서 송시아의 병실에서 나온 듯한 남자와 마주쳤다. 왠지 낯이 익었지만, 어디에서 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소민아는 시선을 거두고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얼굴 곳곳에 멍 자국이 가득했고 목과 손목에 나 있는 선명한 상처들도 눈에 들어왔다. 소민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이 밀려왔다. 뒤죽박죽인 머릿속처럼 마음도 복잡하기 그지없었다.강지훈의 죽이지는 않는다는 말은 이 정도로 사람을 망가뜨린다는 뜻인가 보다.“큰 문제는 없어 보이네요.”소민아는 꽃을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송시아는 소민아를 보자 너무 기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가 껍질을 깎아놓은 과일을 소민아에게 건넸다.“방금 내온 과일이야. 먹어봐...”“참, 딸기랑 체리도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송시아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소민아는 바로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세웠다.“이 꼴로 어디에 가려고요?”“잠깐만 있다가 갈 거예요.”송시아는 그녀를 잡고 싶었다.“나... 아직 밥 못 먹었어. 언니랑 같이 밥 먹고 가면 안 돼? 민아야, 네가 와줘서 언니는 너무 행복해.”“이봐요.”송시아가 문밖 경호원을 불러 말했다.“이 과일 다 씻어와요.”소민아가 말했다.“난 필요 없어요.”송시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먹어야 해. 힘들게 마음먹고 온 거잖아. 여기까지 왔다는 건 너도 이 언니를 놓지 못한다는 걸 의미해. 그래서 언니는 정말 기뻐.”“네 얼굴을 본 순간 그놈에게 당해 생겼던 상처가 깨끗이 나아지는 것 같았어.”소민아는 고개를 떨구고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는 송시아의 손을 쳐다보았다. 손목에도 뚜렷한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 사람이 이렇게 만든 거예요?”송시아는 덤덤히 손을 거두고 동생을 바라보았다.“민아도 다 알게 된 거야? 강지훈이 나한테 독약을 먹이고 짐승 같은 놈들한테 짓밟히게 했어. 만약 그 사람이 나타나 날 구해주지 않았다면, 네
소민아는 송시아의 말에 반박할 방법이 없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송시아의 말은 점점 더 그녀를 다그치고 있었다.“민아야...”“장소월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언니랑 같이 회사 운영하자. 응? 언니는 대표, 넌 부대표 자리에 앉는 거야. 우리 둘이 성세 그룹을 차지하는 거지.”허무맹랑한 상상 속에 빠져있는 송시아를 보며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녀를 쏘아보았다.“날 세뇌시키지 말아요. 아무리 화려한 말로 포장해도 난 당신이 무슨 속셈을 갖고 있는지 다 알거든요. 오늘도 그냥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러 온 거예요.”경호원이 깨끗이 씻은 과일을 들고 와 소민아 앞 탁자 위에 놓아주었다.하지만 그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체 이곳에 뭘 기대하며 왔단 말인가? 송시아가 착해졌을 거라 기대했었나?송시아의 욕심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악마로 변해 소월 언니까지 해치려 하고 있다.“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완전히 답이 없네요.”“과일은 혼자 천천히 드세요. 전 독약이 들어있을까 봐 못 먹겠네요.”“민아야!”소민아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해버리고 분노하며 자리를 떴다. 송시아는 그녀를 쫓아가려 침대에서 내려갔지만, 두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를 부축했다.“대표님, 조심하십시오.”“여자 하나 잡아 세우지 못하고 뭐 하는 거야!”송시아는 힘껏 그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뱃속 아이를 떠올린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마음을 가라앉혔다.소민아가 병원을 나와 차 조수석 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던 신이랑이 물었다.“왜 그래요? 일이 잘 안 됐어요?”소민아가 말했다.“돌아가요. 말하고 싶지 않아요.”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신이랑은 더는 묻지 않고 최대한 그녀를 위로했다.“민아 씨, 결혼 결정 못 하는 거 혹시 대표님 와이프분 때문이에요?”“그분이 걱정된다면... 내가 이미 사람을 보
하지만 서철용은 그녀가 보낸 문자에 답장을 별로 하지 않았다. 특별히 급한 일이 있을 때에만 짧게 몇 마디 보내곤 했다.수술이 끝난 지도 어느덧 2주가 지났다.군병원.아래층 정원, 도우미가 남자아이를, 서철용이 여자아이를 안고 있고, 배은란은 휠체어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었다.“답장 안 해?”최근 서철용의 호주머니 속 핸드폰의 진동 빈도가 현저히 높아졌다. 그는 연구원의 소식을 놓칠까 봐 핸드폰 알림을 꺼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연속 며칠 동안 연락을 해온 건 연구원이 아니라 소민아였다.서철용은 핸드폰을 꺼내 소민아의 번호를 차단해버렸다.“이 귀찮은 여자한테 일일이 대답해줄 필요 없어.”성세 그룹.사무실 안, 소민아가 또 그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하고 있었다.[서 선생님, 저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강제로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저 좀 구해주세요!]하지만 전송 버튼을 누른 순간 차단 표식이 떴다.배은란 역시 서철용이 다른 일 때문에 바삐 돌아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자신의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다.저번 수술을 마치고 온 날 배은란은 깜짝 놀랐었다. 그가 너무 피곤해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그렇게 하루가 지나도록 잠들어 있었다. 배은란은 자신도 수술 회복기였지만, 줄곧 그의 옆을 지키며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그때, 간호사가 다급히 달려와 말했다.“서 선생님, 죄송합니다. 누군가 선생님을 만나러 왔는데 막지 못했어요.”그 불청객을 봤음에도 서철용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송시아가 어느새 나타나 도우미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이가 아빠와 엄청 닮았네요. 서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송시아의 불순한 눈빛을 본 서철용은 간호사에게 배은란과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라고 말했다.“오랜만이에요. 꽤 많이 변한 것 같네요.”송시아가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사람은 원래 다 변해요. 왜 그렇게 아내분을 급히 보내는 거예요? 제가 쓸데없는 말이라도 할까 봐요?”“걱정하지 말아요. 그 정도 선은
송시아가 분노가 가득 실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참혹했던 기억이 모두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웃으며 말했다.“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한, 아무도 내가 예전에 어땠는지 상관하지 않아요.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집중돼 있거든요.”“이 큰 서울을 뒤엎는 것도 내 한 마디면 충분해요.”서철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요염한 얼굴에 송시아에 대한 가소로움이 가득 찼다.“정말 자신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송시아 씨... 당신이든 전연우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어요. 그 어디에도 계속 한쪽으로만 기우는 저울추는 없거든요.”송시아는 그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떨어진 낙엽을 툭툭 걷어찼다.“됐어요. 그 말은 연우 씨도 듣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난 말할 것도 없죠.”“오늘 여기에 온 건 서 선생님한테 경고하기 위함이에요. 숨고 싶으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최대한 깊이 숨는 게 좋을 거예요. 장소월을 제외하면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이 바로 당신이거든요.”“아, 참! 그리고 당신 와이프... 당신도 와이프가 진실을 알게 되는 건 원하지 않죠?”“서민용은 이미 죽었잖아요. 만약 내가 사실을 알려준다면 당신 와이프는 미쳐버리지 않을까요?”서철용의 눈동자에 독기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송시아 씨,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면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아요?”그의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 화면을 본 순간 송시아의 얼굴이 경직되었다.“여기엔 송시아 씨가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했던 말들이 다 녹음되어 있어요.”“이것도 다 송시아 씨한테서 배운 거예요. 만약... 은란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누가 저지른 일이든 모두 당신부터 의심할 거예요.”“은란이나 아이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면 난 당신이 예전 업소에서 나체로 춤을 추던 영상, 그리고 소민아와의 관계까지 모두 세상에 퍼뜨리고 서울 한복판 전광판에 생중계할 거예
“내가 그렇게 흉측해 보여?”“난...”여자의 몸이든, 남자의 몸이든 서철용에겐 똑같은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배은란은 다르기 때문에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 혼자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서철용의 배은란에 대한 감정은 그녀와 서민용이 결혼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줄곧 그녀를 빼앗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었다.하여 갖은 방법을 대어 서민용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그 후... 자신을 서민용으로 여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 심지어 최면을 한 뒤에도 서민용을 놓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서철용은 완전히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이제 도저히 그녀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모두가 인정하는 실력 있는 의사인 서철용이었지만, 지금 배은란의 상황은 마주하기가 너무나도 괴로웠다.그가 계속 몸을 돌리지 않자 배은란은 슬픔에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등 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서철용은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위로했다.“미안해. 내가 너무 예민했어.”그녀는 눈물을 닦고는 서철용의 손을 툭 쳐냈다.“내 몸에 더러운 게 자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피하는 건데!”“아기는 보면서 왜 나한테는 눈길도 안 주는 거야.”“민용 씨, 우리 얼마나 오랫동안 관계를 하지 않았는지 알기나 해?”서철용이 말했다.“알았어. 오늘 밤엔 아무 데도 안 가고 너랑 같이 있을게. 응?”그가 배은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그럼 연구원은?”“몇 개월 휴가 냈어. 그동안 계속 너랑 집에만 있을 거야.”배은란의 감정은 그제야 천천히 안정되었다.서철용이 이런 결정을 한 건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했다.“아까 누가 민용 씨 앞으로 왔다면서 택배 가져왔어. 상세한 주소도 안 쓰여있고, 이름도 없었어. 내가 책상 위에 놓아뒀어.”배은란은 안에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을까 봐 열어 보지 않았다.서철용이 열어보니 지극히 일반적인 조개껍데기로 만든 목걸이가 들어있었다.배은란이 물었다.“진짜 예뻐. 이거 어디에서 보내온 거야?”서철용은 조개껍데기
“사리 분별 못 하는 그 자식한테 보내온 거지 뭐. 그놈이 빨리 깨어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그런 거짓말까지 만들어내 소월 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서울까지 보내게 하지는 않았을 거야.”배은란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그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가서 씻고 일찍 쉬어. 아기는 깨우지 마. 방금 잠들었어.”젖을 먹던 아이가 품 안에서 잠들자 배은란은 옷을 정리하고 아기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서철용은 잠들어있는 아이를 안아 옆 아기 침대에 눕혔다.“그럼 난 씻으러 갈게. 쉬어.”“괜찮아. 민용 씨 올 때까지 기다릴게.”서철용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나 밤에 자료 좀 봐야 해. 착하지.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그는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병실 안에 별도로 간병인 실이 있어 요즘 서철용은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서철용은 배은란에게 자신을 잡을 기회도 주지 않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문이 닫히는 소리에 배은란의 눈동자에 실망감이 천천히 짙어져 갔다.서철용은 옆방에 들어간 뒤 침대에 누워 신발도 벗지 않고 손을 눈 위에 올려놓고 빠르게 잠이 들었다.깊은 밤,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방 안으로 걸어들어와 벽을 더듬어 조명 스위치를 켰다. 배은란은 상처가 80% 정도 회복되었지만 아직 통증이 있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벽을 짚고 그의 옆까지 다가가 조심스레 신발과 옷을 벗겼다. 서철용은 정말 피곤했는지 꽤나 큰 움직임에도 깨지 않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서철용은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 진동 소리에 잠이 깼다. 그는 눈을 감고 더듬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고는 귀 옆에 가져갔다.“여보세요. 누구시죠?”“철용이니? 네가 보낸 사람 이제 깨어났어. 하지만 문제가 좀 있어. 시간 날 때 한 번 와보지 않을래?”서철용은 왼쪽 팔에서 저림을 느껴 손을 움직이며 옆쪽을 쳐다보았다. 언제 왔는지 이불 속에 사람 한 명이 더 누워있었다
소민아는 옆에 앉아있는 신이랑을 보고는 말했다.“저 지금 이랑 씨와 같이 있어요. 회사에 출근하는 길이에요. 무슨 일이세요?”“잘됐네요. 엘리트 개인 병원으로 와요.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요. 지금 바로요.”“참, 서 선생님, 왜 제가 전화를 걸면 연결되지 않는 거예요?”“뚜뚜뚜...”상대방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소민아는 씁쓸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이랑 씨, 우릴 왜 오라고 하는 걸까요?”신이랑이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가서 들어보죠.”“그래요.”마침 두 차가 함께 병원 문 앞에 도착했다. 서철용이 차에서 내리자 소민아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서 선생님.”“걸으며 얘기하죠.”서철용은 소민아 옆에 있는 신이랑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독 신이랑은 서철용이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느낌이 들어 그의 시선을 피했다.두 사람 중간에 서 있던 소민아는 전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누군가 몰래 송시아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송 대표님, 저희에게 감시하라고 시켰던 그 사람 나타났어요. 소민아와 신이랑과 함께요. 신이랑은 저희가 손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성세 그룹.대표 사무실 안, 송시아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 무심히 돌리고 있던 펜도 손에서 내려놓았다.“이번 일에 동원한 사람들이 꽤 많네. 넌 계속 거기에서 지켜봐, 무슨 일을 하는지.”‘서철용, 감히 내 구역에 제 발로 기어들어와? 지금은 몸을 사리며 몰래 숨어있어야 하잖아.’서울 전체를 손바닥 안에 넣고 장악하는 기분이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송시아는 창가로 걸어가 바닥에서 오가는 개미처럼 작은 크기의 사람들을 오만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전연우 씨... 전생에서 장소월까지 버리고 이 자리에 오르려 한 이유가 있었네요.’‘전생에서 이 자리에 앉은 걸 후회했다고 해도 결국엔 장소월을 잃고 말았어요.’‘역시 하느님은 공평해요.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는 잃게 만들죠.’전
두 남녀의 뜨거운 열기에 달도 부끄러운 듯 구름 뒤에 몸을 숨겼다...소민아는 숨을 헐떡이다 배에 통증이 느껴져 그를 멈춰 세웠다. “이랑 씨, 나 배가 너무 아파요. 생리 시작하려는 것 같아요.”신이랑은 그 순간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내가 약 가져다줄게요.”소민아는 이불 속에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침대 무드등이 켜져 있어 상반신을 벗고 있는 신이랑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소민아는 얼굴이 화끈거려 시선을 바로 돌렸다. “괜찮아요. 프런트에 전화해서 생리대 좀 가져다 달라고 해줘요. 화장실 한 번 가야겠어요.”“내일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봐요.”소민아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괜찮아요. 그냥 생리 날짜가 다가와서 그래요.”하지만 흘러나온 피를 보니 생리혈 같지는 않았다.화장실에서 다시 소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죠?”소민아는 변기에 앉은 채, 잠옷 차림으로 생리대를 들고 다가오는 신이랑을 바라보았다. “내가 도와줄까요?”“괜찮아요. 들어오지 말아요. 부끄러워요.”“그래요.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신이랑은 발코니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여우림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여우림은 컴퓨터로 메일을 보며 말했다. “이랑 씨가 보낸 메일 봤어요. 그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 줄은 몰랐네요. 이랑 씨, 여자가 가장 싫어하는 건 거짓말이에요. 민아 씨가 이 일을 알면 이랑 씨를 원망할 거예요...”“저 어떻게 해야 할까요?”“진실을 말해줘요. 그리고 마지막 선택은 민아 씨에게 맡겨야 해요. 지금 사실대로 말하면 어떻게든 만회할 여지가 있을지도 몰라요.”소민아는 물을 마시고 싶어 불편한 배를 움켜쥐고 방에서 나왔다. 진실, 여지 등 단어들이 그녀의 귀에 흘러들어왔다.신이랑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민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부엌에 들어가 컵에 물을 따랐다.하지만 물의 온도가 차가워 전기 포트 전원을 눌렀다.“많이 아파요? 병원에 가볼까요?”소민아는 거절했다.
소민아가 혼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 키를 들고 문을 열려고 할 때, 돌연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소민아는 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이미 떠난 줄 알았던 그 사람이었다.눈앞에 기성은이 나타난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아까 가지 않았어요? 여기엔 왜 또 나타난 거예요.”기성은이 말했다.“축하해요.”그에게서 축하 인사를 받으니 우습기도, 슬프기도 했다. “축하할 게 뭐가 있어요. 오히려 내가 축하해 줘야죠. 곧 시장님의 사위가 될 거잖아요. 앞으로 우리는 같은 계층의 사람이 아니겠네요.”“저 피곤해서 쉬러 올라온 거예요. 빨리 가요. 이랑 씨가 올라와서 당신을 보면 안 되잖아요.”“그리고 앞으로는 오지 말아요. 그 사람이 오해하는 거 싫어요.”기성은이 말했다. “나랑 주가은 씨는 민아 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그 입 다물어요!” 소민아는 갑자기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뒤돌아 그의 코앞까지 다가가 말했다. “이제야 변명하는 거예요? 기성은 씨, 내가 신이랑 씨와 결혼하기 전엔 대체 어디에 있었어요?”“내가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 하나 없었잖아요. 송시아가 당신이 죽었다고 말했을 때,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당신이 정말 죽었다면 나도 같이 죽으려고 했단 말이에요. 휴대폰 메시지로도 다 이야기했잖아요, 이랑 씨와 결혼한 건 그냥 속임수일 뿐이라고. 근데 기성은 씨는요? 나한테 신경도 안 썼어요!”“기성은 씨, 일이 이미 벌어진 뒤엔 후회하고 변명한다고 한들 되돌릴 수 없어요.”“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아요.”“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앞으로 난 이랑 씨와 잘살아 볼 생각이니까 또다시 나타나 내 삶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기성은은 더는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텅 빈 복도 안 희미한 조명이 그의 어두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알겠어요.”기성은은 뒤
“집이 작다고 생각되면, 결혼식 끝나고 신혼집 구하러 가요.”소민아는 그의 다리 위에 누워 감자칩 봉지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건 됐어요. 이 아파트 조용하고 환경도 좋잖아요.”“그래요, 민아 씨 말대로 해요...”그때, 무언가 냄새를 맡은 소민아는 신이랑의 옷에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담배 피웠어요? 안 피우는 거 아니었어요?”“이제 안 피울게요.”신이랑은 정직하게 주머니 속 담배와 지갑 속 돈 전부를 소민아에게 건넸다.“앞으로 내 재산은 민아 씨가 모두 관리해요. 은행 비밀번호는 민아 씨 생일이에요.”“저 돈 관리 못 해요... 망쳐버릴지도 몰라요...”“괜찮아요. 천천히 해나가면 돼요. 출근을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그동안 민아 씨랑 같이 집에 있을게요.”“그래요.”또 한 주가 지나 소민아의 결혼식이 다가왔다.결혼식은 교회에서 5개 테이블 정도만 차려놓고 소규모로 진행되었다.그때,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찾아왔다.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이랑의 팔짱을 낀 채 경건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소민아의 눈에 기성은과 주가은이 들어왔다.주가은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초대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일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민아 씨, 내가 준비한 신혼 선물이에요.”주가은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목소리까지도 기품 있게 부드러운 것이 한눈에 봐도 명문가 귀한 아가씨임을 알 수 있었다. 예전 기성은도 주가은과 그녀는 비교할 수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그랬다. 주가은이 나타나기만 하면, 기성은의 시선은 언제나 그녀에게 향했었다.신군회는 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가씨, 주 시장님 몸은 괜찮아지셨는지요?”주가은은 신군회가 다가오자 두려운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기성은 뒤로 숨었다.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그저 고마움을 전하고자 선물을 드리고 싶어 온 것이니 더는 방해하지 않고 가보겠습니다.”
신이랑은 많은 식재료를 사 들고 아파트에 들어왔다.소민아는 완전히 신이랑의 집으로 이사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슬리퍼를 갈아 신고 겉옷을 가지러 안방에 들어갔다. 옷장을 열어보니 안엔 그녀의 옷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이랑의 옷은 평소 자주 입는 셔츠와 긴 바지 몇 벌뿐이었다.그 아래 열려있는 서랍을 살펴보니 그녀의 속옷들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소민아는 옷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돌연 밀려오는 답답함에 들고 있던 잠옷을 침대에 던져버리고 머리를 움켜쥔 채, 불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텅 비어버렸다.그때 신이랑이 들어왔다. “민아 씨, 왜 그래요?”소민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그래요. 괜찮아요. 좀 쉬면 나아질 거예요.”“잠깐 눈 좀 붙여요. 밥 다 되면 깨워줄게요.”신이랑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민아는 돌연 몸을 돌려 신이랑의 무릎 위에 올라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한바탕 격렬한 키스가 끝난 뒤.“이랑 씨, 우리 한 번 더 할까요?”“민아 씨, 이런 식으로 그 사람 잊으려고 하지 말아요. 후회할 거예요.”소민아는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 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내 자신에게 후회할 여지조차 남기고 싶지 않아요. 이랑 씨, 난 어렸을 때부터 반항아였어요. 부모님이 늘 옆에 안 계셔서, 그분들이 날 버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든 절대 듣지 않았어요.”“이랑 씨는 부모님이 나를 위해 신중하게 골라주신 남편감이에요. 이번에는... 한 번 부모님의 말씀대로 해보고 싶어요.”“기성은 씨... 단순히 그 사람을 잊기 위해서만은 아니에요. 진심으로... 이랑 씨와 안정적인 생활을 해보고 싶어요.”“나 거절하지 말아요. 네?”신이랑은 그녀의 허리를 잡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집어넣었다. 그는 소민아와 코를 맞대고 눈을 감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가 민아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에요.”소민아
신이랑은 사진작가들에게 촬영을 잠시 멈추라고 말했다.2층 휴게실로 돌아온 뒤, 소민아는 바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나 옷 갈아입으러 갈게요.”“내가 도와줄까요?”소민아는 화들짝 놀랐다.신이랑도 별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뱉은 말이었다.“미안해요. 내가...”“괜찮아요. 그럼 와서 지퍼 좀 풀어줄래요? 손이 닿지 않아서 걱정이었는데, 잘됐네요.”이제 결심도 내렸고, 그녀와 신이랑은 엄연한 부부 사이다. 또한 지난번에 볼 것은 다 보지 않았던가?소민아는 신이랑의 손을 잡고 탈의실로 향했다. 안에 들어선 순간, 신이랑이 그녀를 문에 밀치고는 턱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민아 씨,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마음 변함없을 거예요.”소민아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요. 믿을게요. 이랑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변함없을 거라는 신이랑의 그 말에서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 묻어나왔다.신이랑, 그는 분명 좋은 남편이 될 것이다...사실 모두의 말이 맞다. 신이랑은 분명 평생을 함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탈의실에서 나왔을 때, 소민아의 얼굴은 완전히 새빨개져 있었다.소민아는 화장실 위치를 묻고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달려나갔다.그렇게 침착하고 차분하고 선비 같은 사람이 이토록 낯 뜨거운 행동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소민아는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손을 씻었다. 이후 볼일을 보고 나와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끄고 고개를 들었을 때, 등 뒤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기성은은 예전처럼 정장을 차려입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가슴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소민아는 휴지 몇 장을 뽑아 손을 닦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당당하게 그의 앞에 섰다.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요.”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주가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성은 씨... 저 반지 잃어
소민아는 회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말이다.결혼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들은 서둘러 결혼 준비를 해야 했다. 이번 결혼식은 많은 사람을 초대하지는 않지만, 매우 성대하게 치를 예정이었다.촬영 스튜디오로 가는 길, 소민아는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말했다.“이랑 씨, 우리 휴대폰 매장에 잠깐 들렀다 가요.”신이랑은 별다른 질문 없이 대답했다.“그래요.”휴대폰 매장에 들어간 뒤, 소민아는 새로운 번호를 받고 기존 번호는 해지해 버렸다.사직서를 내는 일은 이미 송시아의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절차에 따라 반나절 만에 짐을 정리하고 회사를 떠났다. 신이랑도 그녀와 함께 회사에 동행했다.휴대폰 매장에서 나오면서, 소민아는 최신 모델 휴대전화 두 개를 구입했다. 신이랑과 커플로 맞춘 것이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신이랑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내가 처음으로 이랑 씨에게 주는 신혼 선물이에요. 이랑 씨, 우리 결혼하면...나도 이랑 씨한테 잘해주도록 노력할게요...”신이랑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민아 씨는 그럴 필요 없어요. 결혼해 주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기뻐요.”“나한테 와줘서 고마워요!”소민아는 그의 품에 안겨 힘차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그녀는 예전 사용했던 유심카드를 부러뜨렸다.‘기성은 씨, 이제 우린 완전히 끝이에요!’‘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해요.’‘나는... 나대로 내 길을 갈게요.’‘이제부터,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예요.’유심카드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순간, 소민아는 완전히 마음을 비워냈다.스튜디오에 들어가 보니, 유리 진열장엔 신이랑이 준비한 웨딩드레스들이 가득 줄지어 있었다.소민아는 먼저 메이크업을 한 후, 탈의실로 가서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신이랑은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민아가 탈의실에서 나온 순간, 신이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소민아는 처음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는지라 자신 없이 쭈뼛거리
연락처를 삭제하고 한바탕 괴로움이 지나가고 나니, 이어 처음 가져보는 홀가분함이 느껴졌다.예전 기성은과 함께하고 싶어 했던 마음의 강렬함 만큼이나, 포기의 결심 또한 단호했다. 단 1초 만에 그를 놓아버린 것이다.그녀와 기성은은 이런 면에선 비슷한 사람이다. 쉽게 결정하지도, 쉽게 포기하지도 않는다.만약 정말로 포기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돌아보지 않고 깨끗이 끊어낸다.호텔.“민아 씨가 오해하고 있네요. 기성은 씨, 제가 소민아 씨한테 가서 설명할게요. 당신이 나랑 약혼하는 이유는 그저 주 씨 가문을 노리는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함일 뿐이라는 걸요. 민아 씨도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도 민아 씨 많이 좋아하잖아요, 안 그래요?”기성은은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주가은은 그의 온몸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억지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냉정하고 차갑기로 소문난 기성은이지만, 그 역시 사람이기에 감정이 없을 수는 없다.다만 그들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됐어요.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요.”“아가씨, 편히 쉬세요.”기성은은 호텔 방을 떠난 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다음 날 아침, 소민아는 신이랑의 품에 안겨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가만히 누워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신이랑은 지난밤 그녀를 밤새도록 간호했다. 해열제를 먹었음에도 자정 전까지 반복적으로 고열에 시달렸다.이제 그녀는 완전히 나았다.소민아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걸어갔다. 어지러웠던 거실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소파 위에 놓여 있던 담요도 정연하게 개어져 있었다.신이랑은 몇 시간 자지 못했음에도, 옆자리가 비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곧바로 일어나 거실로 달려갔다. 소파에 앉아 평소처럼 웃으며 TV를 보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신이랑이 비현실적인 느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소민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랑 씨, 방금 엄마한테 전화 왔어요. 점심
그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평소 여드름이 자주 나는 소민아에겐 너무나도 부러운 피부였다.소민아는 한바탕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마음속 모든 것을 모조리 털어낸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침대에 올라와서 잘래요?”신이랑이 기쁨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소민아는 이미 이불을 들어 올렸다. 신이랑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민아 씨...”“싫으면 됐어요.”신이랑이 침대에 올라간 뒤, 두 사람은 나란히 함께 누웠다. 그의 팔에 기댄 순간, 감기에 걸렸는지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아무리 자도 끝없이 잠이 쏟아졌다.“뭐라도 좀 먹을래요?”소민아가 목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먹고 싶지 않아요.”“좀 더 자고 싶어요.”“그래요, 자요. 내가 옆에 같이 있어 줄게요.”“그 사람이 주가은과 약혼을 한다고 하니, 예전 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겠어요. 이랑 씨, 미안해요. 여전히 날 받아줄 마음이 남아 있다면, 이랑 씨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이제 더 이상 불안한 삶은 살고 싶지 않아요. 한 사람과 안정적으로 조용히 지내고 싶어요.”“그래요. 우리 행복하게 잘살아 봐요.” 신이랑이 소민아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민아 씨, 어디 아파요? 이마가 왜 이렇게 뜨거워요?”신이랑은 자신의 볼을 그녀의 이마에 가져갔다. 그녀의 체온은 확실히 정상이 아닌듯했다.신이랑은 침대에서 내려가 체온계를 가져왔다. 체온을 재보니 38.5도로 펄펄 끓고 있었다.신이랑은 급히 물을 끓이고 그녀에게 해열제를 먹인 후 죽을 만들었다.그는 소민아를 부축해 자신의 품에 기대어 앉게 했다. “일단 이것 좀 먹어요. 뜨거우니까 조심하고요.”소민아는 힘없이 눈을 뜨고 천천히 한 입 삼켰다.그녀는 며칠 동안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한 데다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하여 면역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
“네.”그녀의 짤막한 대답에 백혜진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소민아가 정말로 신이랑을 받아들인 걸까?아니면 기성은에게 약혼녀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포기해버린 걸까?지금은 차가 막히는 시간이다.신이랑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소민아는 쇼핑몰 입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신이랑을 기다리고 있었다.신이랑은 우산을 들고 소민아 앞에 섰다. “민아 씨,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자신을 향한 신이랑의 시선을 느낀 백혜진은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편집장님,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이미 택시도 불렀어요. 바로 회사에 복귀할 거예요.”신이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동안 민아 씨 돌봐줘서 고마웠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연락해요.”백혜진이 말했다. “괜찮아요. 얼른 민아 씨 집에 데려다주세요. 또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요.”그때 소민아의 눈에 쇼핑몰에서 걸어 나오는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영혼 없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신이랑을 따라 떠났다.신이랑은 그녀가 조수석에 올라탄 뒤에야 허리를 감싸 안았던 팔을 내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에 도착했다.거실은 평소처럼 약간 어질러져 있었다.신이랑은 우산을 접어 현관에 두고, 그녀를 방으로 데려갔다. 소민아는 초점 없는 멍한 눈빛으로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신이랑은 현관에서 깨끗한 슬리퍼를 가져온 뒤 그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발 끈을 풀고 양말까지 벗겼다. 그리고 깨끗한 수건으로 발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소민아는 고개를 숙인 채 신이랑을 바라보며 억눌렀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잘해줘요?”“민아 씨는 내 아내니까요.”그 짧은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소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누군가를 진정으로 좋아하면 사소한 행동에서부터 나타난다고 한다.신이랑은 그녀에게 정식으로 고백한 적이 없다. 심지어 ‘좋아한다’라는 말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