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아가 빨간 입꼬리를 슥 올렸다. 눈가에 얼음장 같은 날카로움이 스쳐 지나갔다.“이왕 왔으니까 제 물건 가져가야겠어요.”송시아가 한 걸음 내딛자 주충재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그녀를 막아섰다.“죄송합니다. 소장님께서 이 집 주인 말고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군가 몰래 들어가려 한다면 북경 감옥 이 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가 총을 쏠 수도 있습니다. 만에 하나 다치기라도 하면 저희 쪽도 시끄러워집니다.”송시아가 어찌 그 말 속의 위협을 모르겠는가. 그녀는 그저 웃음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전연우, 강지훈에게 남원별장을 지키라고 시킨 거야? 그래 좋아! 강지훈이 언제까지 지킬 수 있나 보자고! 장소월을 찾으면 반드시 그 시체를 네 앞에 가져갈 거야.’자리를 뜨려 몸을 돌리려던 순간, 그녀의 눈에 3층 창가 도우미에게 안겨있는 아이가 들어왔다.그녀는 화들짝 놀랐다.‘그 아이...아니...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잘못 봤을 거야.그 아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내 착각이 분명해.’송시아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소피아는 이렇게까지 얼이 빠진 듯한 송시아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 같았다.“부대표님, 왜 그러세요?”송시아가 차에 타자 소피아도 얼른 운전석에 올라탔다.“출... 출발해요!”소피아는 송시아의 명령에 따라 액셀을 밟았다.회사에 돌아가는 길, 송시아는 여전히 조금 전 그 장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대표 사무실 안.송시아는 대표 자리에 한참을 앉아있은 뒤에야 침착함을 되찾았다.“그 아이,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대체 누구죠?”소피아가 말했다.“부대표님, 그 아이는 대표님께서 보육원 문 앞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합니다. 예전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사모님은... 아니, 장소월 씨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입니다. 그 아이는 대표님이 장소월을 붙잡으려 데려왔고요.”“사진! 사진 가져와요!”소피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사진은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아이를
소피아는 갑자기 들이닥친 송시아의 분노를 받아내며 다급히 사무실을 나섰다.얼마 후 송시아에게 대포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부대표님의 말씀대로 지하 암조직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전 장씨 집안의 조직이라는 말씀 왜 안 하셨습니까. 저흰 지금 장씨 집안을 건드렸습니다. 그건 성세 그룹 대표님을 건드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희에게 죄를 물어오면 저흰 살길이 없습니다. 왜 저희를 불구덩이에 집어넣으신 거냐고요!”송시아는 그들의 생사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내가 말했던 물건은? 왜 아직도 못 찾은 거야!”“부대표님, 지금 그 물건이 중요한가요?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부대표님이 찾으시는 물건은 없었습니다. 저희는 한동안 몸을 숨기고 있겠습니다. 더 무언가를 하시려 한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말을 마친 상대방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쓸모없는 것들.”송시아는 책상 위에 놓인 모든 물건을 쓸어내리고 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전연우 씨, 장소월을 위해 그 잡종을 주워오고, 강지훈의 사람들을 데려오면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그년한테 남긴 것들, 그리고 그 잡종까지 모두 숨통을 끊어 묻어버릴 테니까.”전연우의 성격이라면 분명 모든 재산을 장소월에게 넘기려 했을 것이다. 그녀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다.공들여 이룬 것들을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전연우 씨, 나 원망하지 말아요.’...소민아는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줄곧 좌불안석이었다. 가슴 속 불안감은 점점 더 강렬해지기만 했다. 하늘에 어둠이 내려앉았건만, 기성은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똑똑.소민아가 노크 소리를 들었다.“기성은 씨가 돌아온 건가?”그녀가 불도 켜지 않은 거실 안 소파에서 일어섰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고 한 순간, 머릿속에 그가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내가 없을 땐 불 켜지 말아요. 누가 문을 두드리면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돼요. 상대방이 나에 관한 얘기
“안 돼. 내일 다시 얘기해. 여기 보안 시스템은 내가 잘 알아. 특정 열쇠로 열지 않으면 자동으로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 경찰이 들이닥치면 너한테도 나한테도 안 좋아.”소민아는 그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천천히 멀어져가다가 복도 끝에서 사라진 발걸음 소리도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소민아는 온몸에 힘이 풀려 눈을 질근 감은 채 벽을 타고 스르륵 내려왔다. 지금부터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날 밤, 소민아는 손에 칼을 들고 잠이 들었다 깨어났다를 반복했다. 집에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아 기성은의 패딩으로 몸을 감싸고 추위를 견딜 수밖에 없었다.밤이 지나가고 유기견이 짖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아침 일곱 시였다.어젯밤 일을 떠올린 순간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핸드폰을 들고 112에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소민아는 서재에 들어가 CCTV 영상이 담긴 기성은의 컴퓨터를 보여주었다. 경찰 두 명은 핸드폰으로 어젯밤 문 앞에 찾아왔던 용의자의 얼굴을 찍었다.소민아는 누군가가 또 찾아올지도 모른다며 경찰에게 남원별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그들이 허락하자 그녀는 얼른 짐을 챙겨 경찰차에 앉았다.백미러로 살펴보니 역시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뒤쪽 차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쫓아오지 않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검은색 승용차 안, 목에 문신을 새긴 남자가 전화로 말했다.“누님, 소민아가 경찰차에 앉아서 가버렸는데 저흰 따라가지 못하겠어요. 보아하니 누님 말씀대로 남원별장에 가는 것 같아요.”“알았어. 남은 일은 나한테 맡겨.”‘남원별장에 가면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아?’송시아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면 약점이 없어야죠. 약점을 없애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환이 될 뿐이에요. 전연우 씨... 당신이 나한테 알려준 거잖아요.”송시아는
그녀는 강지훈과 맞설 수 없다.‘소민아, 자신 있으면 평생 남원별장에서 기어 나오지 마.’소민아는 경찰차를 타고 남원별장에 도착했다. 경호원들이 그녀를 막아서자 중년 아주머니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이봐요. 그 아가씨는 들여보내요. 내가 잘 아는데 좋은 사람이에요.”그 아주머니는 바로 품에 별이를 안고 있는 은경애였다.주충재가 사진과 소민아를 대조해보았다. 옆에 있던 부하가 그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여서야 소민아를 들여보냈다.소민아는 집에 들어가려던 순간, 풀숲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저 풀숲에서 누군가 몰래 사진 찍고 있어요. 빨리 잡아요.”발각된 그 남자는 재빨리 도망치려 했지만, 주충재가 그를 향해 공포탄을 쏘았다.“도망치면 머리에 총알 박아넣을 거야.”그 귀를 찌를 듯한 총성은 나무에 앉아있던 새들도 놀라 퍼덕이며 날아가게 만들었다.남자는 너무 놀라 오줌을 질질 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민아는 그 틈을 타 재빨리 그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살펴보았다. 안엔 별이의 사진들이 가득했다.소민아는 그제야 일의 심각성을 눈치챘다.“당신 누가 보낸 거예요?”“전 몰라요! 전 돈 받고 일만 하는 사람이니까 아무 상관도 없어요. 정말 모른다고요! 죽... 죽이지 말아주세요!”“핸드폰 연락처 보여줘요.”남자가 보여준 낯선 번호에 전화를 걸어보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찍으라고 한 사진은 찍었어? 부대표님께서 직접 요구한 사진이야. 일이 잘못되면 가만 놔두지 않을 줄 알아!”소민아는 소피아임을 확신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아이의 사진이다.그녀는 그가 사진을 전송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카메라 메모리 카드를 빼내고 나머지는 모두 부숴버렸다.송시아는 참으로 극악무도한 여자다. 아이에게까지 손을 쓰려 하다니. 다행히 소민아가 빠르게 발견했으니 망정이니 아니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도 어렵다.“민아 씨, 물 마시세요.”도우미가 고민에 잠겨 있던 소민아를 불렀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민아가 은경
소민아는 발아래 소파 앞 장난감을 쥐고 놀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결혼식 날엔 너무 바빠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오늘 자세히 보니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이 아이... 정말 대표님께서 보육원 문 앞에서 주워온 아이 맞나요? 바깥에서 다른 여자랑 낳은 사생아가 아니고요?”“아니면 소월 언니가 자신이 아이를 낳았다는 걸 잊어버렸을까요?”은경애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아이고,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요. 대표님의 비서도 증명해주실 수 있어요. 정말 대표님께서 주워온 아이 맞아요. 아가씨가 혼자 집에서 외로워할까 봐 키우라고 데려오셨어요.”“눈썹과 눈이 대표님과 소월 아가씨를 많이 닮았어요. 우연이겠죠.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신기한 일들이 많잖아요.”소민아가 물었다.“저 안아봐도 될까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별이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장난감을 내려놓고 소민아에게 걸어가 두 손을 벌렸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그녀는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 도련님은 정말이지 대표님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그녀는 자세히 아이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눈이 대표님과 똑같이 생겼어요. 그리고 이 입술... 눈만 가리면 완전히 소월 언니잖아요.”“두 사람이 낳은 아이가 아니라는 말 정말 믿기 힘드네요.”“민아 씨, 도련님이 민아 씨가 좋은가 보네요. 이 별장 안에서 대표님과 아가씨 외에 누구 품에 안겨도 울음을 터뜨리시거든요.”“대표님께선 이 아이와 친자 검증 해보셨나요?”“해보셨을 리가 없죠. 바깥에서 주워왔으니 당연히 혈연관계는 아닐 거잖아요.”소민아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소월 언니와 대표님 두 분 모두 친자 검증 안 하셨다는 거죠?”은경애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집 안에서 소월 언니 머리카락 찾을 수 있어요? 대표님의 것도 상관없어요. 제가 보기에 한 번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에 하나... 정말 친자식이면요?”은경애가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민아 씨,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제
소민아는 남원별장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어느덧 5일이 지났다.그녀가 기성은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송시아가 아이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 그리고... 친자 검증을 해야겠다는 계획까지 모두 말해주었다.문자 십여 개를 보내도 감감무소식이었지만 소민아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그에게 오늘 일을 모두 말하고 난 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핸드폰이 줄곧 감시를 당하고 있으며, 기성은에게 보냈던 문자는 모두 송시아에게 향하고 있음을.성세 그룹.송시아는 소민아가 보낸 문자 내용을 보며 쿡쿡거리며 웃고 있었다.“기성은한테 정말 진심인가 보네. 하지만 기성은이 대체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 목을 매는 거야?”‘기성은, 여자가 너한테 이렇게 매달리는데 네 감정은 어떤지 궁금하네. 지금까지 충분히 자유를 만끽했으니 이젠 고생을 할 때도 됐지.’송시아는 기성은의 번호로 소민아에게 다른 말 없이 주소 하나를 보냈다. 그 후 그녀는 흐뭇한 얼굴로 컴퓨터를 껐다.그녀는 이제 가만히 앉아 물고기가 미끼를 물기만을 기다리면 된다.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소민아가 곧바로 확인해보니 기성은이 보내온 문자였다.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왜 주소 하나만 보낸 거지?”그녀가 연속으로 문자 몇 개를 보냈어도 기성은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소민아는 자신이 함정에 빠진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 주소는 천하 일성 룸이지 않은가.소민아의 마음속 불안감이 그녀에게 함정일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갈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기성은이 정말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고, 그녀가 가지 않아 그가 목숨이라도 잃는다면 그녀는 평생 제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소민아는 더는 고민하지 않고 차를 불렀다.그녀가 떠나려 하자 은경애가 말했다.“송시아는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 목적을 빨리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아요.”소민아가 말했다.“오후 다섯 시 반
소민아의 눈에 손에 와인잔을 들고 롱 원피스 차림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 조용히 소파에 앉아있는 여자가 들어왔다.송시아는 꼬았던 다리를 내려놓고 우아한 자태로 허리를 굽히고는 빨갛게 칠한 손톱으로 소민아의 아래턱을 들어 올렸다. 소민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해 머릿속이 백지장같이 새하얘졌다.“쯧쯧, 가엾어라! 피가 나오잖아요! 이리 와봐요. 내가 소독해줄게요.”송시아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녀는 들고 있던 와인을 피가 흐르고 있는 소민아의 이마에 들이부었다.“아직도 발버둥 친다고? 너희들 당장 와서 이 여자 다리 붙잡아!”두 남자가 다가와 발을 소민아의 종아리에 올려놓았다. 소민아는 고통스러움에 울부짖었다.“으악! 부대표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전 부대표님한테 잘못한 거 없잖아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데요!”송시아가 통쾌함이 넘실거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소민아 씨, 정말 멍청한 거예요,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거예요? 내 앞에서 연극하지 말아요. 지금 이렇게 된 건 다 소민아 씨가 내가 열어준 길을 거절하고 나한테 대항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잖아요.”“난 민아 씨한테 세 번이나 기회를 줬어요.”“하지만 민아 씨는 계속 내 일을 방해하려 했죠. 오늘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송시아는 어린 강아지를 길들이기라도 하듯 소민아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민아 씨가 좋아하는 그 소월 언니는 민아 씨가 이렇게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네? 한번 불러봐요. 민아 씨를 구하러 오는지 보자고요.”완전히 가면을 벗어던진 송시아의 모습에 소민아는 더는 연기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래턱을 올리고 송시아를 노려보았다.“부대표님, 이 나라는 법치국가예요. 오기 전 이미 30분 뒤에도 제가 나가지 않으면 부대표님이 절 납치했다고 신고하라고 말해뒀어요.”“이제 좀 영리해졌네요!”“하지만 아직 시간은 일러요. 급할 필요 없어요. 나한텐 시간이 많거든요. 천천히 같이 놀아보죠.”“마
갖은 괴롭힘을 당한 소민아는 바닥에 쓰러진 채 눈을 감고 숨만 간신히 쉬고 있었다. “컥...”소민아는 피를 한 움큼 토해내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시간이 조금씩 흘러갔음에도 답장이 오지 않자 송시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일어나 발로 소민아의 가슴팍을 밟고는 핸드폰으로 쓰러져있는 그녀를 찍었다.옆에 있던 뚱뚱하고 기름진 남자가 말했다.“진짜 독한 년이에요. 살려달라고 한마디도 안 하더라고요. 누님... 계속 이렇게 가다간 죽을지도 몰라요. 그럼 일이 시끄러워져요.”“걱정하지 마. 아직 안 죽어.”그때, 마른 몸집의 남자가 문자를 하나 받았다.“큰일 났습니다.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었는지 누군가 위치를 경찰에 알렸습니다. 지금 경찰들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다들 수배자 신분으로 도망치고 있는 신세다 보니 경찰이 온다는 말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송시아의 멸시에 찬 눈동자가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너희들은 이년 데리고 가. 기성은이 정말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을 거야.”소민아는 음산한 지하실에 누워있었다. 희미한 정신으로도 입속 쓰디쓴 맛을 느낄 수 있었다.소민아는 3일이 지나도록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송시아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약을 먹였으나 효과는 보지 못했다.그녀 몸에 깃든 한기는 아무리 이불을 두껍게 덮어도 가실 줄을 몰랐다.감옥 밖의 남자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안에서 생사를 헤매고 있는 여자를 보며 분노에 차올라 술잔을 내던졌다.“제기랄! 송시아 사악한 년! 우리한테 던져주고 상관도 안 하고 있잖아. 죽으면 우리한테 다 뒤집어씌우려고.”“형님, 우리 그냥 병원에 보냅시다. 아직 돈을 받은 것도 아닌데 사람까지 보살피는 건 손해 보는 거잖습니까!”“송시아한테 놀아난 겁니다!”우두머리가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오늘 밤 병원에 던져놓자. 죽을지 살지는 이년 명에 달렸겠지.”그날 밤 새벽 두 시.먹구름이 낮게 가라앉은 하늘을 보니 당장이라도 폭우가 내릴 것 같았다.하얀색 승용차가 잠깐 멈춰 섰다가
두 남녀의 뜨거운 열기에 달도 부끄러운 듯 구름 뒤에 몸을 숨겼다...소민아는 숨을 헐떡이다 배에 통증이 느껴져 그를 멈춰 세웠다. “이랑 씨, 나 배가 너무 아파요. 생리 시작하려는 것 같아요.”신이랑은 그 순간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내가 약 가져다줄게요.”소민아는 이불 속에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침대 무드등이 켜져 있어 상반신을 벗고 있는 신이랑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소민아는 얼굴이 화끈거려 시선을 바로 돌렸다. “괜찮아요. 프런트에 전화해서 생리대 좀 가져다 달라고 해줘요. 화장실 한 번 가야겠어요.”“내일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봐요.”소민아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괜찮아요. 그냥 생리 날짜가 다가와서 그래요.”하지만 흘러나온 피를 보니 생리혈 같지는 않았다.화장실에서 다시 소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죠?”소민아는 변기에 앉은 채, 잠옷 차림으로 생리대를 들고 다가오는 신이랑을 바라보았다. “내가 도와줄까요?”“괜찮아요. 들어오지 말아요. 부끄러워요.”“그래요.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신이랑은 발코니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여우림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여우림은 컴퓨터로 메일을 보며 말했다. “이랑 씨가 보낸 메일 봤어요. 그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 줄은 몰랐네요. 이랑 씨, 여자가 가장 싫어하는 건 거짓말이에요. 민아 씨가 이 일을 알면 이랑 씨를 원망할 거예요...”“저 어떻게 해야 할까요?”“진실을 말해줘요. 그리고 마지막 선택은 민아 씨에게 맡겨야 해요. 지금 사실대로 말하면 어떻게든 만회할 여지가 있을지도 몰라요.”소민아는 물을 마시고 싶어 불편한 배를 움켜쥐고 방에서 나왔다. 진실, 여지 등 단어들이 그녀의 귀에 흘러들어왔다.신이랑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민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부엌에 들어가 컵에 물을 따랐다.하지만 물의 온도가 차가워 전기 포트 전원을 눌렀다.“많이 아파요? 병원에 가볼까요?”소민아는 거절했다.
소민아가 혼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 키를 들고 문을 열려고 할 때, 돌연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소민아는 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이미 떠난 줄 알았던 그 사람이었다.눈앞에 기성은이 나타난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아까 가지 않았어요? 여기엔 왜 또 나타난 거예요.”기성은이 말했다.“축하해요.”그에게서 축하 인사를 받으니 우습기도, 슬프기도 했다. “축하할 게 뭐가 있어요. 오히려 내가 축하해 줘야죠. 곧 시장님의 사위가 될 거잖아요. 앞으로 우리는 같은 계층의 사람이 아니겠네요.”“저 피곤해서 쉬러 올라온 거예요. 빨리 가요. 이랑 씨가 올라와서 당신을 보면 안 되잖아요.”“그리고 앞으로는 오지 말아요. 그 사람이 오해하는 거 싫어요.”기성은이 말했다. “나랑 주가은 씨는 민아 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그 입 다물어요!” 소민아는 갑자기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뒤돌아 그의 코앞까지 다가가 말했다. “이제야 변명하는 거예요? 기성은 씨, 내가 신이랑 씨와 결혼하기 전엔 대체 어디에 있었어요?”“내가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 하나 없었잖아요. 송시아가 당신이 죽었다고 말했을 때,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당신이 정말 죽었다면 나도 같이 죽으려고 했단 말이에요. 휴대폰 메시지로도 다 이야기했잖아요, 이랑 씨와 결혼한 건 그냥 속임수일 뿐이라고. 근데 기성은 씨는요? 나한테 신경도 안 썼어요!”“기성은 씨, 일이 이미 벌어진 뒤엔 후회하고 변명한다고 한들 되돌릴 수 없어요.”“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아요.”“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앞으로 난 이랑 씨와 잘살아 볼 생각이니까 또다시 나타나 내 삶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기성은은 더는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텅 빈 복도 안 희미한 조명이 그의 어두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알겠어요.”기성은은 뒤
“집이 작다고 생각되면, 결혼식 끝나고 신혼집 구하러 가요.”소민아는 그의 다리 위에 누워 감자칩 봉지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건 됐어요. 이 아파트 조용하고 환경도 좋잖아요.”“그래요, 민아 씨 말대로 해요...”그때, 무언가 냄새를 맡은 소민아는 신이랑의 옷에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담배 피웠어요? 안 피우는 거 아니었어요?”“이제 안 피울게요.”신이랑은 정직하게 주머니 속 담배와 지갑 속 돈 전부를 소민아에게 건넸다.“앞으로 내 재산은 민아 씨가 모두 관리해요. 은행 비밀번호는 민아 씨 생일이에요.”“저 돈 관리 못 해요... 망쳐버릴지도 몰라요...”“괜찮아요. 천천히 해나가면 돼요. 출근을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그동안 민아 씨랑 같이 집에 있을게요.”“그래요.”또 한 주가 지나 소민아의 결혼식이 다가왔다.결혼식은 교회에서 5개 테이블 정도만 차려놓고 소규모로 진행되었다.그때,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찾아왔다.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이랑의 팔짱을 낀 채 경건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소민아의 눈에 기성은과 주가은이 들어왔다.주가은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초대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일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민아 씨, 내가 준비한 신혼 선물이에요.”주가은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목소리까지도 기품 있게 부드러운 것이 한눈에 봐도 명문가 귀한 아가씨임을 알 수 있었다. 예전 기성은도 주가은과 그녀는 비교할 수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그랬다. 주가은이 나타나기만 하면, 기성은의 시선은 언제나 그녀에게 향했었다.신군회는 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가씨, 주 시장님 몸은 괜찮아지셨는지요?”주가은은 신군회가 다가오자 두려운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기성은 뒤로 숨었다.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그저 고마움을 전하고자 선물을 드리고 싶어 온 것이니 더는 방해하지 않고 가보겠습니다.”
신이랑은 많은 식재료를 사 들고 아파트에 들어왔다.소민아는 완전히 신이랑의 집으로 이사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슬리퍼를 갈아 신고 겉옷을 가지러 안방에 들어갔다. 옷장을 열어보니 안엔 그녀의 옷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이랑의 옷은 평소 자주 입는 셔츠와 긴 바지 몇 벌뿐이었다.그 아래 열려있는 서랍을 살펴보니 그녀의 속옷들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소민아는 옷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돌연 밀려오는 답답함에 들고 있던 잠옷을 침대에 던져버리고 머리를 움켜쥔 채, 불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텅 비어버렸다.그때 신이랑이 들어왔다. “민아 씨, 왜 그래요?”소민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그래요. 괜찮아요. 좀 쉬면 나아질 거예요.”“잠깐 눈 좀 붙여요. 밥 다 되면 깨워줄게요.”신이랑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민아는 돌연 몸을 돌려 신이랑의 무릎 위에 올라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한바탕 격렬한 키스가 끝난 뒤.“이랑 씨, 우리 한 번 더 할까요?”“민아 씨, 이런 식으로 그 사람 잊으려고 하지 말아요. 후회할 거예요.”소민아는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 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내 자신에게 후회할 여지조차 남기고 싶지 않아요. 이랑 씨, 난 어렸을 때부터 반항아였어요. 부모님이 늘 옆에 안 계셔서, 그분들이 날 버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든 절대 듣지 않았어요.”“이랑 씨는 부모님이 나를 위해 신중하게 골라주신 남편감이에요. 이번에는... 한 번 부모님의 말씀대로 해보고 싶어요.”“기성은 씨... 단순히 그 사람을 잊기 위해서만은 아니에요. 진심으로... 이랑 씨와 안정적인 생활을 해보고 싶어요.”“나 거절하지 말아요. 네?”신이랑은 그녀의 허리를 잡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집어넣었다. 그는 소민아와 코를 맞대고 눈을 감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가 민아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에요.”소민아
신이랑은 사진작가들에게 촬영을 잠시 멈추라고 말했다.2층 휴게실로 돌아온 뒤, 소민아는 바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나 옷 갈아입으러 갈게요.”“내가 도와줄까요?”소민아는 화들짝 놀랐다.신이랑도 별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뱉은 말이었다.“미안해요. 내가...”“괜찮아요. 그럼 와서 지퍼 좀 풀어줄래요? 손이 닿지 않아서 걱정이었는데, 잘됐네요.”이제 결심도 내렸고, 그녀와 신이랑은 엄연한 부부 사이다. 또한 지난번에 볼 것은 다 보지 않았던가?소민아는 신이랑의 손을 잡고 탈의실로 향했다. 안에 들어선 순간, 신이랑이 그녀를 문에 밀치고는 턱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민아 씨,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마음 변함없을 거예요.”소민아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요. 믿을게요. 이랑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변함없을 거라는 신이랑의 그 말에서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 묻어나왔다.신이랑, 그는 분명 좋은 남편이 될 것이다...사실 모두의 말이 맞다. 신이랑은 분명 평생을 함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탈의실에서 나왔을 때, 소민아의 얼굴은 완전히 새빨개져 있었다.소민아는 화장실 위치를 묻고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달려나갔다.그렇게 침착하고 차분하고 선비 같은 사람이 이토록 낯 뜨거운 행동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소민아는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손을 씻었다. 이후 볼일을 보고 나와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끄고 고개를 들었을 때, 등 뒤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기성은은 예전처럼 정장을 차려입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가슴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소민아는 휴지 몇 장을 뽑아 손을 닦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당당하게 그의 앞에 섰다.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요.”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주가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성은 씨... 저 반지 잃어
소민아는 회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말이다.결혼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들은 서둘러 결혼 준비를 해야 했다. 이번 결혼식은 많은 사람을 초대하지는 않지만, 매우 성대하게 치를 예정이었다.촬영 스튜디오로 가는 길, 소민아는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말했다.“이랑 씨, 우리 휴대폰 매장에 잠깐 들렀다 가요.”신이랑은 별다른 질문 없이 대답했다.“그래요.”휴대폰 매장에 들어간 뒤, 소민아는 새로운 번호를 받고 기존 번호는 해지해 버렸다.사직서를 내는 일은 이미 송시아의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절차에 따라 반나절 만에 짐을 정리하고 회사를 떠났다. 신이랑도 그녀와 함께 회사에 동행했다.휴대폰 매장에서 나오면서, 소민아는 최신 모델 휴대전화 두 개를 구입했다. 신이랑과 커플로 맞춘 것이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신이랑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내가 처음으로 이랑 씨에게 주는 신혼 선물이에요. 이랑 씨, 우리 결혼하면...나도 이랑 씨한테 잘해주도록 노력할게요...”신이랑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민아 씨는 그럴 필요 없어요. 결혼해 주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기뻐요.”“나한테 와줘서 고마워요!”소민아는 그의 품에 안겨 힘차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그녀는 예전 사용했던 유심카드를 부러뜨렸다.‘기성은 씨, 이제 우린 완전히 끝이에요!’‘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해요.’‘나는... 나대로 내 길을 갈게요.’‘이제부터,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예요.’유심카드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순간, 소민아는 완전히 마음을 비워냈다.스튜디오에 들어가 보니, 유리 진열장엔 신이랑이 준비한 웨딩드레스들이 가득 줄지어 있었다.소민아는 먼저 메이크업을 한 후, 탈의실로 가서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신이랑은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민아가 탈의실에서 나온 순간, 신이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소민아는 처음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는지라 자신 없이 쭈뼛거리
연락처를 삭제하고 한바탕 괴로움이 지나가고 나니, 이어 처음 가져보는 홀가분함이 느껴졌다.예전 기성은과 함께하고 싶어 했던 마음의 강렬함 만큼이나, 포기의 결심 또한 단호했다. 단 1초 만에 그를 놓아버린 것이다.그녀와 기성은은 이런 면에선 비슷한 사람이다. 쉽게 결정하지도, 쉽게 포기하지도 않는다.만약 정말로 포기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돌아보지 않고 깨끗이 끊어낸다.호텔.“민아 씨가 오해하고 있네요. 기성은 씨, 제가 소민아 씨한테 가서 설명할게요. 당신이 나랑 약혼하는 이유는 그저 주 씨 가문을 노리는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함일 뿐이라는 걸요. 민아 씨도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도 민아 씨 많이 좋아하잖아요, 안 그래요?”기성은은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주가은은 그의 온몸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억지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냉정하고 차갑기로 소문난 기성은이지만, 그 역시 사람이기에 감정이 없을 수는 없다.다만 그들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됐어요.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요.”“아가씨, 편히 쉬세요.”기성은은 호텔 방을 떠난 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다음 날 아침, 소민아는 신이랑의 품에 안겨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가만히 누워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신이랑은 지난밤 그녀를 밤새도록 간호했다. 해열제를 먹었음에도 자정 전까지 반복적으로 고열에 시달렸다.이제 그녀는 완전히 나았다.소민아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걸어갔다. 어지러웠던 거실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소파 위에 놓여 있던 담요도 정연하게 개어져 있었다.신이랑은 몇 시간 자지 못했음에도, 옆자리가 비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곧바로 일어나 거실로 달려갔다. 소파에 앉아 평소처럼 웃으며 TV를 보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신이랑이 비현실적인 느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소민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랑 씨, 방금 엄마한테 전화 왔어요. 점심
그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평소 여드름이 자주 나는 소민아에겐 너무나도 부러운 피부였다.소민아는 한바탕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마음속 모든 것을 모조리 털어낸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침대에 올라와서 잘래요?”신이랑이 기쁨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소민아는 이미 이불을 들어 올렸다. 신이랑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민아 씨...”“싫으면 됐어요.”신이랑이 침대에 올라간 뒤, 두 사람은 나란히 함께 누웠다. 그의 팔에 기댄 순간, 감기에 걸렸는지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아무리 자도 끝없이 잠이 쏟아졌다.“뭐라도 좀 먹을래요?”소민아가 목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먹고 싶지 않아요.”“좀 더 자고 싶어요.”“그래요, 자요. 내가 옆에 같이 있어 줄게요.”“그 사람이 주가은과 약혼을 한다고 하니, 예전 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겠어요. 이랑 씨, 미안해요. 여전히 날 받아줄 마음이 남아 있다면, 이랑 씨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이제 더 이상 불안한 삶은 살고 싶지 않아요. 한 사람과 안정적으로 조용히 지내고 싶어요.”“그래요. 우리 행복하게 잘살아 봐요.” 신이랑이 소민아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민아 씨, 어디 아파요? 이마가 왜 이렇게 뜨거워요?”신이랑은 자신의 볼을 그녀의 이마에 가져갔다. 그녀의 체온은 확실히 정상이 아닌듯했다.신이랑은 침대에서 내려가 체온계를 가져왔다. 체온을 재보니 38.5도로 펄펄 끓고 있었다.신이랑은 급히 물을 끓이고 그녀에게 해열제를 먹인 후 죽을 만들었다.그는 소민아를 부축해 자신의 품에 기대어 앉게 했다. “일단 이것 좀 먹어요. 뜨거우니까 조심하고요.”소민아는 힘없이 눈을 뜨고 천천히 한 입 삼켰다.그녀는 며칠 동안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한 데다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하여 면역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
“네.”그녀의 짤막한 대답에 백혜진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소민아가 정말로 신이랑을 받아들인 걸까?아니면 기성은에게 약혼녀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포기해버린 걸까?지금은 차가 막히는 시간이다.신이랑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소민아는 쇼핑몰 입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신이랑을 기다리고 있었다.신이랑은 우산을 들고 소민아 앞에 섰다. “민아 씨,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자신을 향한 신이랑의 시선을 느낀 백혜진은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편집장님,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이미 택시도 불렀어요. 바로 회사에 복귀할 거예요.”신이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동안 민아 씨 돌봐줘서 고마웠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연락해요.”백혜진이 말했다. “괜찮아요. 얼른 민아 씨 집에 데려다주세요. 또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요.”그때 소민아의 눈에 쇼핑몰에서 걸어 나오는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영혼 없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신이랑을 따라 떠났다.신이랑은 그녀가 조수석에 올라탄 뒤에야 허리를 감싸 안았던 팔을 내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에 도착했다.거실은 평소처럼 약간 어질러져 있었다.신이랑은 우산을 접어 현관에 두고, 그녀를 방으로 데려갔다. 소민아는 초점 없는 멍한 눈빛으로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신이랑은 현관에서 깨끗한 슬리퍼를 가져온 뒤 그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발 끈을 풀고 양말까지 벗겼다. 그리고 깨끗한 수건으로 발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소민아는 고개를 숙인 채 신이랑을 바라보며 억눌렀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잘해줘요?”“민아 씨는 내 아내니까요.”그 짧은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소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누군가를 진정으로 좋아하면 사소한 행동에서부터 나타난다고 한다.신이랑은 그녀에게 정식으로 고백한 적이 없다. 심지어 ‘좋아한다’라는 말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