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강지훈과 맞설 수 없다.‘소민아, 자신 있으면 평생 남원별장에서 기어 나오지 마.’소민아는 경찰차를 타고 남원별장에 도착했다. 경호원들이 그녀를 막아서자 중년 아주머니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이봐요. 그 아가씨는 들여보내요. 내가 잘 아는데 좋은 사람이에요.”그 아주머니는 바로 품에 별이를 안고 있는 은경애였다.주충재가 사진과 소민아를 대조해보았다. 옆에 있던 부하가 그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여서야 소민아를 들여보냈다.소민아는 집에 들어가려던 순간, 풀숲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저 풀숲에서 누군가 몰래 사진 찍고 있어요. 빨리 잡아요.”발각된 그 남자는 재빨리 도망치려 했지만, 주충재가 그를 향해 공포탄을 쏘았다.“도망치면 머리에 총알 박아넣을 거야.”그 귀를 찌를 듯한 총성은 나무에 앉아있던 새들도 놀라 퍼덕이며 날아가게 만들었다.남자는 너무 놀라 오줌을 질질 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민아는 그 틈을 타 재빨리 그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살펴보았다. 안엔 별이의 사진들이 가득했다.소민아는 그제야 일의 심각성을 눈치챘다.“당신 누가 보낸 거예요?”“전 몰라요! 전 돈 받고 일만 하는 사람이니까 아무 상관도 없어요. 정말 모른다고요! 죽... 죽이지 말아주세요!”“핸드폰 연락처 보여줘요.”남자가 보여준 낯선 번호에 전화를 걸어보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찍으라고 한 사진은 찍었어? 부대표님께서 직접 요구한 사진이야. 일이 잘못되면 가만 놔두지 않을 줄 알아!”소민아는 소피아임을 확신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아이의 사진이다.그녀는 그가 사진을 전송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카메라 메모리 카드를 빼내고 나머지는 모두 부숴버렸다.송시아는 참으로 극악무도한 여자다. 아이에게까지 손을 쓰려 하다니. 다행히 소민아가 빠르게 발견했으니 망정이니 아니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도 어렵다.“민아 씨, 물 마시세요.”도우미가 고민에 잠겨 있던 소민아를 불렀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민아가 은경
소민아는 발아래 소파 앞 장난감을 쥐고 놀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결혼식 날엔 너무 바빠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오늘 자세히 보니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이 아이... 정말 대표님께서 보육원 문 앞에서 주워온 아이 맞나요? 바깥에서 다른 여자랑 낳은 사생아가 아니고요?”“아니면 소월 언니가 자신이 아이를 낳았다는 걸 잊어버렸을까요?”은경애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아이고,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요. 대표님의 비서도 증명해주실 수 있어요. 정말 대표님께서 주워온 아이 맞아요. 아가씨가 혼자 집에서 외로워할까 봐 키우라고 데려오셨어요.”“눈썹과 눈이 대표님과 소월 아가씨를 많이 닮았어요. 우연이겠죠.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신기한 일들이 많잖아요.”소민아가 물었다.“저 안아봐도 될까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별이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장난감을 내려놓고 소민아에게 걸어가 두 손을 벌렸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그녀는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 도련님은 정말이지 대표님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그녀는 자세히 아이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눈이 대표님과 똑같이 생겼어요. 그리고 이 입술... 눈만 가리면 완전히 소월 언니잖아요.”“두 사람이 낳은 아이가 아니라는 말 정말 믿기 힘드네요.”“민아 씨, 도련님이 민아 씨가 좋은가 보네요. 이 별장 안에서 대표님과 아가씨 외에 누구 품에 안겨도 울음을 터뜨리시거든요.”“대표님께선 이 아이와 친자 검증 해보셨나요?”“해보셨을 리가 없죠. 바깥에서 주워왔으니 당연히 혈연관계는 아닐 거잖아요.”소민아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소월 언니와 대표님 두 분 모두 친자 검증 안 하셨다는 거죠?”은경애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집 안에서 소월 언니 머리카락 찾을 수 있어요? 대표님의 것도 상관없어요. 제가 보기에 한 번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에 하나... 정말 친자식이면요?”은경애가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민아 씨,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제
소민아는 남원별장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어느덧 5일이 지났다.그녀가 기성은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송시아가 아이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 그리고... 친자 검증을 해야겠다는 계획까지 모두 말해주었다.문자 십여 개를 보내도 감감무소식이었지만 소민아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그에게 오늘 일을 모두 말하고 난 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핸드폰이 줄곧 감시를 당하고 있으며, 기성은에게 보냈던 문자는 모두 송시아에게 향하고 있음을.성세 그룹.송시아는 소민아가 보낸 문자 내용을 보며 쿡쿡거리며 웃고 있었다.“기성은한테 정말 진심인가 보네. 하지만 기성은이 대체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 목을 매는 거야?”‘기성은, 여자가 너한테 이렇게 매달리는데 네 감정은 어떤지 궁금하네. 지금까지 충분히 자유를 만끽했으니 이젠 고생을 할 때도 됐지.’송시아는 기성은의 번호로 소민아에게 다른 말 없이 주소 하나를 보냈다. 그 후 그녀는 흐뭇한 얼굴로 컴퓨터를 껐다.그녀는 이제 가만히 앉아 물고기가 미끼를 물기만을 기다리면 된다.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소민아가 곧바로 확인해보니 기성은이 보내온 문자였다.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왜 주소 하나만 보낸 거지?”그녀가 연속으로 문자 몇 개를 보냈어도 기성은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소민아는 자신이 함정에 빠진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 주소는 천하 일성 룸이지 않은가.소민아의 마음속 불안감이 그녀에게 함정일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갈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기성은이 정말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고, 그녀가 가지 않아 그가 목숨이라도 잃는다면 그녀는 평생 제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소민아는 더는 고민하지 않고 차를 불렀다.그녀가 떠나려 하자 은경애가 말했다.“송시아는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 목적을 빨리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아요.”소민아가 말했다.“오후 다섯 시 반
소민아의 눈에 손에 와인잔을 들고 롱 원피스 차림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 조용히 소파에 앉아있는 여자가 들어왔다.송시아는 꼬았던 다리를 내려놓고 우아한 자태로 허리를 굽히고는 빨갛게 칠한 손톱으로 소민아의 아래턱을 들어 올렸다. 소민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해 머릿속이 백지장같이 새하얘졌다.“쯧쯧, 가엾어라! 피가 나오잖아요! 이리 와봐요. 내가 소독해줄게요.”송시아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녀는 들고 있던 와인을 피가 흐르고 있는 소민아의 이마에 들이부었다.“아직도 발버둥 친다고? 너희들 당장 와서 이 여자 다리 붙잡아!”두 남자가 다가와 발을 소민아의 종아리에 올려놓았다. 소민아는 고통스러움에 울부짖었다.“으악! 부대표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전 부대표님한테 잘못한 거 없잖아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데요!”송시아가 통쾌함이 넘실거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소민아 씨, 정말 멍청한 거예요,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거예요? 내 앞에서 연극하지 말아요. 지금 이렇게 된 건 다 소민아 씨가 내가 열어준 길을 거절하고 나한테 대항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잖아요.”“난 민아 씨한테 세 번이나 기회를 줬어요.”“하지만 민아 씨는 계속 내 일을 방해하려 했죠. 오늘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송시아는 어린 강아지를 길들이기라도 하듯 소민아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민아 씨가 좋아하는 그 소월 언니는 민아 씨가 이렇게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네? 한번 불러봐요. 민아 씨를 구하러 오는지 보자고요.”완전히 가면을 벗어던진 송시아의 모습에 소민아는 더는 연기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래턱을 올리고 송시아를 노려보았다.“부대표님, 이 나라는 법치국가예요. 오기 전 이미 30분 뒤에도 제가 나가지 않으면 부대표님이 절 납치했다고 신고하라고 말해뒀어요.”“이제 좀 영리해졌네요!”“하지만 아직 시간은 일러요. 급할 필요 없어요. 나한텐 시간이 많거든요. 천천히 같이 놀아보죠.”“마
갖은 괴롭힘을 당한 소민아는 바닥에 쓰러진 채 눈을 감고 숨만 간신히 쉬고 있었다. “컥...”소민아는 피를 한 움큼 토해내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시간이 조금씩 흘러갔음에도 답장이 오지 않자 송시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일어나 발로 소민아의 가슴팍을 밟고는 핸드폰으로 쓰러져있는 그녀를 찍었다.옆에 있던 뚱뚱하고 기름진 남자가 말했다.“진짜 독한 년이에요. 살려달라고 한마디도 안 하더라고요. 누님... 계속 이렇게 가다간 죽을지도 몰라요. 그럼 일이 시끄러워져요.”“걱정하지 마. 아직 안 죽어.”그때, 마른 몸집의 남자가 문자를 하나 받았다.“큰일 났습니다.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었는지 누군가 위치를 경찰에 알렸습니다. 지금 경찰들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다들 수배자 신분으로 도망치고 있는 신세다 보니 경찰이 온다는 말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송시아의 멸시에 찬 눈동자가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너희들은 이년 데리고 가. 기성은이 정말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을 거야.”소민아는 음산한 지하실에 누워있었다. 희미한 정신으로도 입속 쓰디쓴 맛을 느낄 수 있었다.소민아는 3일이 지나도록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송시아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약을 먹였으나 효과는 보지 못했다.그녀 몸에 깃든 한기는 아무리 이불을 두껍게 덮어도 가실 줄을 몰랐다.감옥 밖의 남자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안에서 생사를 헤매고 있는 여자를 보며 분노에 차올라 술잔을 내던졌다.“제기랄! 송시아 사악한 년! 우리한테 던져주고 상관도 안 하고 있잖아. 죽으면 우리한테 다 뒤집어씌우려고.”“형님, 우리 그냥 병원에 보냅시다. 아직 돈을 받은 것도 아닌데 사람까지 보살피는 건 손해 보는 거잖습니까!”“송시아한테 놀아난 겁니다!”우두머리가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오늘 밤 병원에 던져놓자. 죽을지 살지는 이년 명에 달렸겠지.”그날 밤 새벽 두 시.먹구름이 낮게 가라앉은 하늘을 보니 당장이라도 폭우가 내릴 것 같았다.하얀색 승용차가 잠깐 멈춰 섰다가
소민아는 따뜻한 손이 자신을 잡고 있음을 느꼈다. 간신히 눈을 떴지만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소민아가 응급실에 들어간 뒤 여우림은 창백해진 신이랑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별일 없을 거예요. 이랑 씨 몸은 어때요? 괜찮아요?”신이랑은 괴롭게 자신의 위 부분을 만지며 벽에 기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아무런 징조도 없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이랑 씨!”...면북.인기척 하나 없는 아무의 관심도 받지 않는 변경 지대, 바로 그가 자랐던 익숙한 곳이다.“형님, 서울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소민아 씨는 이제 병원에 보내졌고 괜찮다고 합니다. 이 사진 보시겠습니까?”기성은은 부하가 건네주는 사진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들고 있는 단도의 칼날을 문질렀다.“앞으로 이런 거 내 눈에 보이게 하지 말고 다 없애버려.”“네.”발갛게 물든 석양이 맑은 호수에 드리웠다. 물 위에 세워진 마을은 먼 곳에서 바라보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요새와도 같았다.주위엔 고요함이 내려앉아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아름다운 풍경과는 달리, 이곳에선 시시각각 예측하지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조금만 경계심을 풀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그는 그녀에게 평안한 삶을 줄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신이랑에게 가는 것이야말로 그녀에게 최고의 선택이다.소민아가 깨어났을 땐 이미 3일이나 지나있었다. 눈을 뜨고 처음 본 건 걱정 가득한 얼굴의 신이랑이었다.“민아 씨? 깼어요?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의사가 들어와 그녀의 몸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한다.소민아는 돌연 울컥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멈출래야 멈출 수가 없었다.신이랑은 옆에서 끊임없이 그녀를 위로했다.“괜찮아요. 괜찮아요.”“이제 민아 씨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앞으로는 내가 아무도 민아 씨 괴롭히지 못하게 할게요.”소민아는 한동안 울다가 몽롱한 정신으로 다시 잠이 들었다.신이랑은 아직 신고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소민아가 의식을 회복했을 땐 어느덧 금요일 아침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몸엔 위험천만한 내장 출혈이 있었다. 조금만 더 심각했다면 세 시간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신이랑은 그동안 매일 병원에서 소민아를 보살폈다. 몸 상태가 어떤지는 그녀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날까 봐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오늘은 부드럽게 햇살이 내리쬐는 따뜻한 날이다. 하여 신이랑은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햇볕 쪼임을 하러 나갔다.며칠이 지나도록 소민아는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그 누구보다 활달하고 웃기 좋아하던 그녀가 지금처럼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신이랑은 너무나도 괴로웠다.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창백하고 초췌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민아 씨, 걱정되는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요. 한마디라도 좋으니까 말 좀 해봐요. 이렇게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걱정되는지 알기나 해요?”신이랑은 그녀에게 영양죽을 만들어 주었지만, 소민아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억지로 먹일 수는 없으니 링거액으로 그녀의 신체 기능을 간신히 유지시킬 수밖에 없었다.눈에 띄게 야위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신이랑은 가슴이 저릿해졌다.그때, 돌연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신이랑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송시아가 손에 꽃 한 다발을 들고 선글라스를 낀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에선 경호원들이 소민아에게 줄 선물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소민아가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송시아를 빤히 쳐다봤다. 그렇게 선글라스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소민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부대표님, 정말 죄송하게 됐네요. 저 안 죽었어요. 실망이 크시겠어요.”송시아는 목에 칼날이라도 박힌 듯 좀처럼 말을 뱉어내지 못했다.“어떤 보상을 원하든 내가 다 해줄게요.”“이건 도라지꽃이에요. 서울시 전체를 뒤져 겨우 사 온 거예요...”송시아가 팔을 뻗자 소민아는 손을 휘둘러 그녀를 뿌리쳤다.“또 절 괴롭히려고 이러시는 거죠? 기성은
동생을 잃어버린 후, 송시아는 미래에 돈을 많이 벌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만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해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18년이 지나도록 그녀는 숨 쉴 틈 없이 달려왔지만, 단 한순간도 동생을 찾는 걸 포기한 적이 없었다.정말이지 생사만이라도 알고 싶었다.병실 안.소민아가 침대에 누워 힘없이 입을 열었다.“문 닫아줘요. 저 사람들 안 보고 싶어요.”“그래요. 내가 나가서 돌려보낼게요. 민아 씨는 푹 쉬다가 이따가 나랑 같이 맛있는 거 먹어요.”소민아가 머무는 곳은 거실과 주방까지 구비된 VIP 병실이었다. 경호원이 가져온 물건들을 식탁 위에 가지런하게 올려놓았다.신이랑이 문밖에 서 있는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민아 씨를 다치게 한 사람이 당신인 줄은 몰랐네요!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예요? 민아 씨는 종래로 다른 사람 앞에서 당신에 대해 나쁘게 얘기한 적 없다고요!”송시아가 손을 휘젓자 경호원들은 이내 그녀의 뜻을 알아채고 자리를 비켜주었다.“민아 많이 좋아해요?”신이랑이 말했다.“부대표님, 저한테도 손을 쓰시려고요?”그 순간, 신이랑의 눈동자가 차갑게 얼어붙었다.“보아하니 당신들 눈에 난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는 악마네요.”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 순간 마주한 새빨간 실핏줄에 신이랑은 화들짝 놀랐다.“솔직하게 말할게요. 최근 알아낸 게 하나 있는데요. 민아는 제가 어렸을 적 잃어버렸던 여동생이었어요.”신이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그래서 자신이 했던 행동을 후회하고 있는 건가요? 부대표님, 만약 민아 씨가 부대표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처럼 민아 씨를 걱정하지 않았겠죠?”송시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당신 뒷조사도 해봤어요. 시장 비서실장의 외아들이더군요. 어린 시절 큰 병에 걸렸을 때 수술비랑 병원비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요? 아버지가 데릴사위로 처가집에 들어가는 것으로 돈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었을까요? 당신에겐 퇴로가
민아 씨...신이랑은 거부할 겨를도 없이 소민아에게 덮쳐졌다. 입술 위에 부드럽게 포개지는 키스에 신이랑 또한 남자였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되었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소민아는 온몸이 화로에서 뒹구는 듯한 고통에 괴로워하며 울먹였다.깊은 밤, 신이랑이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에서 들어가 샤워를 시킬 때도 소민아는 여전히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소민아는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밥 냄새를 맡은 소민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데다 여기저기 키스 자국이 남아 있는 자신의 몸을 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복부에서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어... 어떻게 된 거지?”두 다리 사이가 시큰하고 뻐근한 이 느낌... 그녀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분명 어젯밤 백혜진과 함께 있었고, 그 이후의 일은 술에 취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민아 씨, 일어났어요?”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소민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문밖을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민아 씨, 욕실에 있어요?”소민아는 곧바로 욕실 문을 잠가버렸다. “들어오지 말아요!”문을 두드리던 손은 허공에 멈췄다가 다시 내려왔다. 신이랑이 실망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젯밤 일은, 민아 씨... 미안해요.”“가요. 이랑 씨 말은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민아 씨, 우리는 이미 결혼한 사이잖아요!”소민아는 눈을 질근 감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한참 뒤에야 겨우 냉정을 되찾은 그녀가 말했다. “이랑 씨, 미... 미안해요! 이랑 씨
“내가 돌아왔다는 거 민아 씨한테 말하지 말아요.”백혜진은 검은색 세단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왠지 예전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 비서님, 그럼 회사에는 다시 안 돌아오실 건가요?”“알아서 할 테니, 혜진 씨 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떠난 후, 백혜진은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차에 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기 비서님이 돌아왔지만, 소민아는 신 편집장님과 결혼해야 한다... 게다가 기 비서님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듯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소민아는 분명 너무나도 힘들어할 것이었다.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안겨 병원으로 향했다. 갑자기 품에 안긴 여자가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요... 배가 너무 아파요...”신이랑은 다행히 지체하지 않고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끔찍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선명한 붉은색 액체가 옷을 흠뻑 적셨다. 소민아는 수술대에 실려 가고 한 시간 후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소민아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의사가 앞에 있는 남자에게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아내에게 이렇게 소홀할 수가 있어요? 임신한 지가 몇 달이나 지났는데, 그걸 모른다고요?”“게다가 술까지 마시게 하다니요!”신이랑은 입술을 꽉 다문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그 사람 상태는 어떻습니까?”“아이는 일단 무사합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빨리 오셨기 때문에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아이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신이랑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의사가 모두 떠난 후, 소민아도 새 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기... 기성은 씨... 너무 힘들어요.”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려던 기성은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다 침대에 누워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그녀를 보고는 경직되었던 표정을 천천히 감추었다.“민아 씨, 곧 괜찮아질 거예요.”“미안해요. 내가 잘 보살폈어야 했
소민아는 남자의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싫어요. 당신한테서 그 사람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기성은 씨, 난 다시는 당신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 손 놓으면 또 사라져 버릴 거잖아요.”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기성은은 손을 들어 올렸다가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민아 씨, 이러면 안 돼요. 곧 결혼하잖아요.”소민아는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나는 신이랑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사람과는 그냥 좋은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언니가 계속 날 괴롭혀요. 처음에는 소월 언니 안전을 빌미로 협박했어요. 소월 언니를 찾았으니까 만약 신이랑과 결혼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두 번째는 별이 그 아이를 노리려 했어요. 그리고 대표님의 회사도 팔아넘기려고 했고요. 내가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그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요.”“세 번째는 기성은 씨의 안전이에요. 다들 당신이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아요. 기성은 같이 대단한 사람이 죽을 리가 없죠.”“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플까요. 왜 좋아하는 사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걸까요.”“사람이 살아봤자 얼마나 산다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민아 씨, 미안해요!”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그였다.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기성은은 손을 들어 소민아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소민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신이랑은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며 폐기물 더미가 쌓인 복도에서 위로 올라왔다. “민아 씨?”발코니 밖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신이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소파에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급히 다가갔다.백혜진도 마침 이곳을 찾아왔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본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민아 씨 괜찮은 거죠.”“네, 그냥 잠들었을 뿐이에요. 오늘 밤 민아 씨랑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런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헤비메탈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던 소민아는 마지막 잔을 마신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조명은 그녀에게 몽롱한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백혜진은 급히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만 마셔요, 민아 씨. 벌써 얼마나 마신 거예요. 계속 마시면 몸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백혜진의 손을 뿌리치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다. “나... 나는 집에 안 갈 거예요. 집에 가면, 신이랑이랑 결혼해야 한다고요. 난 결혼 안 할 거예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잠자리까지 했으니까 날 책임져야 한다고요!”엄청난 비밀을 들은 듯 백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아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기 비서님랑 잤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두 사람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고 일찌감치 느꼈었거든요. 기 비서님이 왜 자꾸 우리 쪽을 쳐다보나 했더니 역시 그런 일이 있었네요.”백혜진은 또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기 비서님을 좋아하면서 왜 신 편집장님이랑 결혼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소민아는 술에 취해 정신없이 비틀거리며 술잔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려 했다. “왜 이랑 씨랑 결혼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그건 내 언니가 강요한 거니까.”백혜진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언니요? 언니가 누군데요?”“누구겠어요, 송시아지.”“뭐라고요?” 백혜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가 누군가와 부딪히자, 백혜진은 급히 소민아를 부축했다. “민아 씨... 천천히 가요.”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들어간 뒤, 소민아는 중심을 잡지 못해 벽에 기대섰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잡고 불빛이 없는 컴컴한 복도로 끌고 갔다.“민아 씨, 어디 있어요?”“나...”백혜진이 다급하게 소민아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