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아의 눈에 손에 와인잔을 들고 롱 원피스 차림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 조용히 소파에 앉아있는 여자가 들어왔다.송시아는 꼬았던 다리를 내려놓고 우아한 자태로 허리를 굽히고는 빨갛게 칠한 손톱으로 소민아의 아래턱을 들어 올렸다. 소민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해 머릿속이 백지장같이 새하얘졌다.“쯧쯧, 가엾어라! 피가 나오잖아요! 이리 와봐요. 내가 소독해줄게요.”송시아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녀는 들고 있던 와인을 피가 흐르고 있는 소민아의 이마에 들이부었다.“아직도 발버둥 친다고? 너희들 당장 와서 이 여자 다리 붙잡아!”두 남자가 다가와 발을 소민아의 종아리에 올려놓았다. 소민아는 고통스러움에 울부짖었다.“으악! 부대표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전 부대표님한테 잘못한 거 없잖아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데요!”송시아가 통쾌함이 넘실거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소민아 씨, 정말 멍청한 거예요,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거예요? 내 앞에서 연극하지 말아요. 지금 이렇게 된 건 다 소민아 씨가 내가 열어준 길을 거절하고 나한테 대항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잖아요.”“난 민아 씨한테 세 번이나 기회를 줬어요.”“하지만 민아 씨는 계속 내 일을 방해하려 했죠. 오늘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송시아는 어린 강아지를 길들이기라도 하듯 소민아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민아 씨가 좋아하는 그 소월 언니는 민아 씨가 이렇게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네? 한번 불러봐요. 민아 씨를 구하러 오는지 보자고요.”완전히 가면을 벗어던진 송시아의 모습에 소민아는 더는 연기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래턱을 올리고 송시아를 노려보았다.“부대표님, 이 나라는 법치국가예요. 오기 전 이미 30분 뒤에도 제가 나가지 않으면 부대표님이 절 납치했다고 신고하라고 말해뒀어요.”“이제 좀 영리해졌네요!”“하지만 아직 시간은 일러요. 급할 필요 없어요. 나한텐 시간이 많거든요. 천천히 같이 놀아보죠.”“마
갖은 괴롭힘을 당한 소민아는 바닥에 쓰러진 채 눈을 감고 숨만 간신히 쉬고 있었다. “컥...”소민아는 피를 한 움큼 토해내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시간이 조금씩 흘러갔음에도 답장이 오지 않자 송시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일어나 발로 소민아의 가슴팍을 밟고는 핸드폰으로 쓰러져있는 그녀를 찍었다.옆에 있던 뚱뚱하고 기름진 남자가 말했다.“진짜 독한 년이에요. 살려달라고 한마디도 안 하더라고요. 누님... 계속 이렇게 가다간 죽을지도 몰라요. 그럼 일이 시끄러워져요.”“걱정하지 마. 아직 안 죽어.”그때, 마른 몸집의 남자가 문자를 하나 받았다.“큰일 났습니다.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었는지 누군가 위치를 경찰에 알렸습니다. 지금 경찰들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다들 수배자 신분으로 도망치고 있는 신세다 보니 경찰이 온다는 말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송시아의 멸시에 찬 눈동자가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너희들은 이년 데리고 가. 기성은이 정말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을 거야.”소민아는 음산한 지하실에 누워있었다. 희미한 정신으로도 입속 쓰디쓴 맛을 느낄 수 있었다.소민아는 3일이 지나도록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송시아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약을 먹였으나 효과는 보지 못했다.그녀 몸에 깃든 한기는 아무리 이불을 두껍게 덮어도 가실 줄을 몰랐다.감옥 밖의 남자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안에서 생사를 헤매고 있는 여자를 보며 분노에 차올라 술잔을 내던졌다.“제기랄! 송시아 사악한 년! 우리한테 던져주고 상관도 안 하고 있잖아. 죽으면 우리한테 다 뒤집어씌우려고.”“형님, 우리 그냥 병원에 보냅시다. 아직 돈을 받은 것도 아닌데 사람까지 보살피는 건 손해 보는 거잖습니까!”“송시아한테 놀아난 겁니다!”우두머리가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오늘 밤 병원에 던져놓자. 죽을지 살지는 이년 명에 달렸겠지.”그날 밤 새벽 두 시.먹구름이 낮게 가라앉은 하늘을 보니 당장이라도 폭우가 내릴 것 같았다.하얀색 승용차가 잠깐 멈춰 섰다가
소민아는 따뜻한 손이 자신을 잡고 있음을 느꼈다. 간신히 눈을 떴지만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소민아가 응급실에 들어간 뒤 여우림은 창백해진 신이랑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별일 없을 거예요. 이랑 씨 몸은 어때요? 괜찮아요?”신이랑은 괴롭게 자신의 위 부분을 만지며 벽에 기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아무런 징조도 없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이랑 씨!”...면북.인기척 하나 없는 아무의 관심도 받지 않는 변경 지대, 바로 그가 자랐던 익숙한 곳이다.“형님, 서울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소민아 씨는 이제 병원에 보내졌고 괜찮다고 합니다. 이 사진 보시겠습니까?”기성은은 부하가 건네주는 사진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들고 있는 단도의 칼날을 문질렀다.“앞으로 이런 거 내 눈에 보이게 하지 말고 다 없애버려.”“네.”발갛게 물든 석양이 맑은 호수에 드리웠다. 물 위에 세워진 마을은 먼 곳에서 바라보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요새와도 같았다.주위엔 고요함이 내려앉아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아름다운 풍경과는 달리, 이곳에선 시시각각 예측하지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조금만 경계심을 풀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그는 그녀에게 평안한 삶을 줄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신이랑에게 가는 것이야말로 그녀에게 최고의 선택이다.소민아가 깨어났을 땐 이미 3일이나 지나있었다. 눈을 뜨고 처음 본 건 걱정 가득한 얼굴의 신이랑이었다.“민아 씨? 깼어요?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의사가 들어와 그녀의 몸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한다.소민아는 돌연 울컥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멈출래야 멈출 수가 없었다.신이랑은 옆에서 끊임없이 그녀를 위로했다.“괜찮아요. 괜찮아요.”“이제 민아 씨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앞으로는 내가 아무도 민아 씨 괴롭히지 못하게 할게요.”소민아는 한동안 울다가 몽롱한 정신으로 다시 잠이 들었다.신이랑은 아직 신고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소민아가 의식을 회복했을 땐 어느덧 금요일 아침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몸엔 위험천만한 내장 출혈이 있었다. 조금만 더 심각했다면 세 시간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신이랑은 그동안 매일 병원에서 소민아를 보살폈다. 몸 상태가 어떤지는 그녀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날까 봐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오늘은 부드럽게 햇살이 내리쬐는 따뜻한 날이다. 하여 신이랑은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햇볕 쪼임을 하러 나갔다.며칠이 지나도록 소민아는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그 누구보다 활달하고 웃기 좋아하던 그녀가 지금처럼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신이랑은 너무나도 괴로웠다.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창백하고 초췌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민아 씨, 걱정되는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요. 한마디라도 좋으니까 말 좀 해봐요. 이렇게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걱정되는지 알기나 해요?”신이랑은 그녀에게 영양죽을 만들어 주었지만, 소민아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억지로 먹일 수는 없으니 링거액으로 그녀의 신체 기능을 간신히 유지시킬 수밖에 없었다.눈에 띄게 야위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신이랑은 가슴이 저릿해졌다.그때, 돌연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신이랑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송시아가 손에 꽃 한 다발을 들고 선글라스를 낀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에선 경호원들이 소민아에게 줄 선물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소민아가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송시아를 빤히 쳐다봤다. 그렇게 선글라스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소민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부대표님, 정말 죄송하게 됐네요. 저 안 죽었어요. 실망이 크시겠어요.”송시아는 목에 칼날이라도 박힌 듯 좀처럼 말을 뱉어내지 못했다.“어떤 보상을 원하든 내가 다 해줄게요.”“이건 도라지꽃이에요. 서울시 전체를 뒤져 겨우 사 온 거예요...”송시아가 팔을 뻗자 소민아는 손을 휘둘러 그녀를 뿌리쳤다.“또 절 괴롭히려고 이러시는 거죠? 기성은
동생을 잃어버린 후, 송시아는 미래에 돈을 많이 벌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만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해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18년이 지나도록 그녀는 숨 쉴 틈 없이 달려왔지만, 단 한순간도 동생을 찾는 걸 포기한 적이 없었다.정말이지 생사만이라도 알고 싶었다.병실 안.소민아가 침대에 누워 힘없이 입을 열었다.“문 닫아줘요. 저 사람들 안 보고 싶어요.”“그래요. 내가 나가서 돌려보낼게요. 민아 씨는 푹 쉬다가 이따가 나랑 같이 맛있는 거 먹어요.”소민아가 머무는 곳은 거실과 주방까지 구비된 VIP 병실이었다. 경호원이 가져온 물건들을 식탁 위에 가지런하게 올려놓았다.신이랑이 문밖에 서 있는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민아 씨를 다치게 한 사람이 당신인 줄은 몰랐네요!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예요? 민아 씨는 종래로 다른 사람 앞에서 당신에 대해 나쁘게 얘기한 적 없다고요!”송시아가 손을 휘젓자 경호원들은 이내 그녀의 뜻을 알아채고 자리를 비켜주었다.“민아 많이 좋아해요?”신이랑이 말했다.“부대표님, 저한테도 손을 쓰시려고요?”그 순간, 신이랑의 눈동자가 차갑게 얼어붙었다.“보아하니 당신들 눈에 난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는 악마네요.”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 순간 마주한 새빨간 실핏줄에 신이랑은 화들짝 놀랐다.“솔직하게 말할게요. 최근 알아낸 게 하나 있는데요. 민아는 제가 어렸을 적 잃어버렸던 여동생이었어요.”신이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그래서 자신이 했던 행동을 후회하고 있는 건가요? 부대표님, 만약 민아 씨가 부대표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처럼 민아 씨를 걱정하지 않았겠죠?”송시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당신 뒷조사도 해봤어요. 시장 비서실장의 외아들이더군요. 어린 시절 큰 병에 걸렸을 때 수술비랑 병원비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요? 아버지가 데릴사위로 처가집에 들어가는 것으로 돈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었을까요? 당신에겐 퇴로가
“후환을 없애겠다고요? 송 부대표님에게 사람 목숨이란 대체 뭔가요? 지금은 엄연히 법치국가예요. 그 한마디가 부대표님에게 어떤 후과를 가져올지 모르는 거예요?”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신이랑 씨 아버지는 깨끗한 것 같아요? 사회에서 권력과 재물의 맛을 보면 어떻게 되는지 아버지한테 가서 물어봐요. 어쩌면 나보다 더 잘 알 수도 있을 거예요. 신이랑 씨... 우리 머리 꼭대기에는 셀 수도 없이 많고 많은 보이지 않는 손들이 오가고 있다고요.”송시아 역시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기성은과 전연우는 같은 부류의 인간이에요. 지은 죄가 셀 수도 없이 많죠. 물론...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당신 아버지 자리에 직접 앉아봐야만 알 수 있을 거예요.”송시아는 마지막으로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쳐다보고는 말했다.“얘기는 여기까지 하죠. 민아 잘 부탁해요. 내일 다시 올게요.”그때, 소민아가 벌컥 문을 열고는 힘없이 걸어 나왔다.“민아 씨...”신이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가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녀는 바로 몸을 피했다.소민아의 의심스러운 눈빛이 송시아에게로 향했다.“처음부터 대표님과 기성은을 끌어내리고 회사를 삼킬 작정이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기성은을 죽이려고까지 하다니요!”“똑똑히 말해줄게요. 나한텐 어릴 적 기억이 전혀 없고 내 기억의 시작은 소씨 집안이에요. 난 당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당신이 잃어버렸다는 그 동생은 더더욱 아니고요.”소민아는 병실에서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신이랑의 정체는 짐작한 대로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그 순간 소민아의 머릿속엔 도망이라는 두 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심지어 이곳에서 단 1초도 더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 어디에 가려고요?”신이랑이 쫓아갔다.“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소민아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이랑 씨, 미안해요. 나... 집에 가서 혼자 조용히 지내고 싶어요.”신이랑은 그녀의 몸 상태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녀가 또다시 위험에 처할까
그때 송시아는 맹세했었다. 쉬지 않고 큰돈을 벌어 동생에게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줄 거라고.지금 송시아는 풍족한 재물을 손에 넣었다. 때문에 소민아도 소씨 집안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그녀는 동생이 뭘 원하든 모두 해줄 수 있었다.그녀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동생의 것이다.송시아는 정신을 잃은 소민아를 데리고 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소민아에게 담요를 덮어준 뒤 손을 꼭 잡아주었다. 손등에 나 있는 상처를 보니 뼈에 사무치는 후회의 감정이 솟구쳐올랐다.“천천히 가요.”“네, 부대표님.”송시아의 집은 서울시 가장 호화로운 별장이었다. 매매가는 1600억에 달하고 최고의 집사와 열 명의 도우미를 쓰고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별로 없었다.마당 안 정원에는 아직 채 피지 않은 도라지 꽃이 심어져 있었다. 그 외에도 그네, 정자, 분수... 없는 것이 없었다.송시아는 이미 소민아의 취향대로 2층 방을 꾸며 놓았다. 만화 인물 형상의 장난감, 공주풍의 3미터 대형 사이즈 침대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송시아는 소민아를 침대에 눕힌 뒤 도우미를 시켜 개인 주치의를 불렀다.30분 뒤, 의사가 도착해 소민아의 건강 상태를 살폈다.“이 아가씨는 내장 출혈이 심각합니다. 몸 곳곳에 멍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에게 구타를 당한 듯합니다.”“내가 듣고 싶은 건 그런 말이 아니에요. 제일 좋은 약을 처방해 하루빨리 회복하게 해요.”송시아가 차갑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개인 주치의는 한약 몇 첩과 3일이면 효과를 보는 멍 자국에 바르는 연고를 처방했다.소민아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몸이 허약해졌기 때문에 쓰러진 것이다.도우미가 영양죽을 끓이러 주방으로 향했다. 송시아는 어린 시절 동생을 돌봤을 때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호박죽을 그녀 입에 넣어주었다. 다행히 소민아는 조금씩 음식을 삼키고 있었다.송시아는 죽이 흘러나오면 휴지로 그녀 입가를 닦아주었다.“민아야, 며칠이면 괜찮아질 거야
할 말을 마친 뒤 신이랑은 전화를 끊었다.창밖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민아 씨, 난 민아 씨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에요....다음 날 아침, 소민아가 깨어났다. 그녀는 이제 몸이 많이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며 낯선 환경을 둘러보았다. 방안은 소녀 감성을 자극하는 공주풍의 물건들, 선녀의 옷깃처럼 나부끼는 커튼,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장난감들로 채워져 있었다.소민아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절대 고모 집은 아니다.소민아는 침대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그렇게 진실된 감촉을 느끼고 나서야 꿈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여긴 어디지?몇 분 뒤, 방문이 열리고 송시아가 죽을 들고 문 앞에 나타났다.“깼어? 너 며칠 동안 밥 못 먹었으니까 일단 이 호박죽부터 먹어. 아까 이랑 씨가 너 보러 온다고 했어. 아마 곧 도착할 거야.”송시아가 소민아의 침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하지만 소민아는 팔을 휘둘러 죽을 바닥에 내던져버렸다. 이탈리아 산 값비싼 카펫이 죽으로 더럽혀졌다.송시아는 전혀 화내지 않고 웃으며 손을 뻗어 헝클어진 소민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 도우미가 다른 것도 많이 만들었어.”“누가 날 여기로 데려오라고 했어요?”소민아가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하지만 송시아는 개의치 않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이제 여기가 네 집이야. 언니랑 같이 여기에서 살자.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언니가 다 사줄게.”“그리고 이 카드 안에 언니가 지금까지 번 돈이 모두 들어있어. 너한테 줄게. 네가 사고 싶은 거 마음대로 사. 부족하면 또 언니한테 달라고 하고.”“이제부터 넌 언니랑 함께 사는 거야.”구구절절 내뱉는 송시아의 말을 소민아는 단칼에 거절해버렸다.“난 당신과 함께 살지 않을 거예요. 난 소민아예요. 내 성은 소씨이지 송씨가 아니에요, 당신 동생은 더더욱 아니고요. 난 절대 당신 같은
막무가내인 그녀의 모습을 신이랑은 더는 참아낼 수가 없어 단호히 말했다.“현실을 제대로 자각하세요. 난 절대 신수지 씨와 결혼하지 않아요. 당신 집안의 도움은 더더욱 필요 없고요. 성세 그룹에 들어간 건 민아 씨를 위해서예요. 민아 씨가 없어도 난 당신들과 얽히지 않을 거예요.”“계속 여기에 있고 싶으면 있어요.”신이랑은 바로 서재에 걸어 들어가 중요한 서류들을 챙기고는 노트북 가방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신수지는 얼른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어디에 가려고요? 오빠, 가지 말아요. 내가 그렇게 싫어요?”“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것 때문에?”신이랑은 바로 그녀의 손을 뿌리쳐버렸다.“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 하지 말아요.”신이랑은 물건을 들고 바로 떠나버렸다.신수지는 그의 뒤를 쫓아가며 소리쳤다.“오빠!”신이랑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리를 떴다.신수지는 분노에 차올라 발을 동동 굴렀다.“이게 다 소민아 때문이야. 너만 없었다면 오빠도 날 멀리하지 않았을 거라고!”신이랑은 차를 몰고 집에서 나가 한 호텔 방에 체크인했다.신수지는 엉엉 울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유연홍은 자신의 귀한 딸이 울며 들어오자 얼른 뛰어가 달랬다.“왜 그래, 수지야? 누가 너 괴롭혔어? 엄마한테 말해.”유연홍은 신수지의 옆에 앉아 휴지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엄마! 저 신이랑한테 갔었는데 쫓겨났어요. 밥 한 끼 같이 먹겠다고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쳤는데...”“절 완전히 무시하더라고요.”“욕까지 했어요! 대체 제가 그 여자보다 못한 게 뭐예요? 그 여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예쁘지도 않잖아요.”유연홍이 그녀를 달랬다.“수지야, 네가 이랑이를 찾아간 일 절대 아빠가 알게 하시면 안 돼. 아빠는 이미 이랑이를 집에 돌아오게 할 방법을 찾으셨어. 이랑이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엄마가 어떻게든 널 받아들이게 할게.”“그러니까 지금은 너무 밀어붙이면 안 돼. 알겠니?”그 말에 신수지는 다운되었던 기분이 많이 괜찮아졌다.“하지만 오빠 마음
소민아가 다시 깊게 잠이 들자 명세진은 도우미와 함께 방에서 나가 계단 입구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송시아 씨?”“사모님.”명세진이 이마를 찌푸렸다. “송시아 씨, 난 전에도 말했어요. 민아가 송시아 씨를 인정하고 싶다고 하면 저희는 막지 않겠다고요. 하지만 다른 수단으로 우리 집안에 무언가를 할 생각이라면, 지금 명확히 알려줄게요. 우린 그리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앞으로는 전화하지 말아요. 아니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단호히 전화를 끊어버렸다.송시아는 사무실에 앉아 꺼져버린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 싸늘함이 번뜩였다.소씨 가문이 계속 서울에서 버티고 있으면 그녀가 소민아의 마음속에 들어갈 자리는 생기지 않는다. 절대 이대로 소씨 가문이 서울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게 하면 안 된다.소씨 가문이 줄 수 있는 건 그녀도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줄 수 없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송시아가 온 힘을 쏟아 이 자리에 오른 건 동생에게 가장 행복한 삶을 선물해주기 위함이었다.소민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는 반드시 동생을 신씨 가문 안주인 자리에 앉힐 것이다.‘장소월... 네 목숨을 끊지 않는 건 다 민아를 위해서야. 영원히 꼭꼭 숨어있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절대 너한테 자비 따위 베풀지 않아.’송시아는 또 신이랑에게 문자를 보냈다...그때... 신이랑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핸드폰이 진동해 문자를 확인해 본 순간, 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집에 도착하니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신이랑은 바로 핸드폰을 집어넣고 지문으로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깨끗하게 정돈된 오피스텔 안에 불청객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신수지가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한 채 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오빠, 왔어요?”신이랑이 이마를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밥상 위 차려진 음식으로 옮겼다.“열쇠 누구한테 받은 거예요?”신수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
도우미가 말했다.“민아 아가씨가 돌아오셨어요. 그런데 제가 방금 방에 가보았는데 두통이 다시 재발한 것 같았어요.”명세진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민아는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민아한테 무슨 얘기 했어요?”“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만 가져다드렸어요. 얼굴색이 정말 안 좋았어요.”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내가 올라가 볼게요. 오늘 저녁엔 민아가 좋아하는 음식들 많이 만들어요.”“네, 사모님.”명세진은 소민아를 줄곧 자신의 친딸로 생각하며 키워왔다. 소현아와 소민아 모두 소씨 가문의 소중한 딸이다. 실제 언니는 소현아였지만, 평소엔 동생인 소민아가 언니처럼 소현아를 챙겼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평소 그녀에게 더 관심을 쏟기도 했다.명세진은 방으로 올라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소민아를 본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갔다.소민아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지 베개가 흥건해지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안 돼요... 나 데려가지 말아요...”“오... 오지 마...”“언... 언니...”“언니... 어디에 있는 거예요!”명세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수건으로 이마 위 식은땀을 닦아주었다.“괜찮아. 괜찮아. 고모가 여기에 있어.”명세진은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예전 소민아를 집에 갓 데려왔을 때처럼 침대 옆에 앉아 밤새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슬프게 흐느끼던 소민아는 한참을 다독인 뒤에야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는 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아이를 갓 집에 데려왔을 때를 그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영양실조로 살집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의식을 되찾지 못해 병원에서도 다시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이후, 다행히 그녀는 목숨을 지켜냈고 천천히 몸을 회복했다.비록 예전의 기억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영리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학교에서의 수업도 교과서 한 번만 읽으면 바로 익히는
세면대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진동해 살펴보니 신이랑이 보내온 문자였다.[며칠 집에서 쉬어요.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소민아의 머릿속에 신이랑과 결혼하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던 송시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소월 언니 집안에 관한 일은 고모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장씨 집안의 지위는 어마어마하게 높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가문들조차도 장씨 집안에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암암리에 수많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한 사람의 목숨은 단 한마디 말로 가볍게 좌지우지되는 것이었다. 소씨 집안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고, 서울에서 난다긴다하는 명문가 집안도 장해진 앞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송시아가 저지른 범죄도 그들과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다.소민아는 갑자기 밀려온 어지러움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세면대를 지탱하지 않았다면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낯설고도 생생한 기억이 펼쳐졌다.울음소리 가득한 어두운 지하실...남자 한 명이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에게 만두 하나를 쥐여주었다. 6, 7세 남짓한 어린 여자아이는 허겁지겁 만두를 입에 구겨 넣었다...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이마를 감싸 쥐었다. 곧이어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고통을 견디며 30초 정도 지내 보내니 그제야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그곳은 대체 어디일까. 왜 그녀 기억 속엔 없었던 걸까...그 남자는 누구지?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지?도우미가 깨끗이 세척한 옷을 들고 들어왔다가 이상한 모습의 소민아를 보고는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아가씨, 왜 그러세요? 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 제가 약 가져다드릴게요.”소민아는 어렸을 때 자주 두통을 앓았었다. 하지만 이미 오랫동안 발병하지 않았다.도우미가 얼른 약을 꺼내 소민아에게 가져다주었다.약을 입에 넣고 물로 삼키니 두통이 많아 가라앉았다.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계속 불편하시면 병원에 가보세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녀가 신이랑과 결혼만 하면 송시아는 더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네?”소민아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 신이랑과 거리를 넓혔다.“난 괜찮으니까 먼저 돌아가요. 잠깐 어지러워서 그랬어요.”“그래요.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요.”“아니에요. 회사와 내가 가려는 곳은 반대 방향이에요. 지금은 근무 시간이잖아요. 이랑 씨 일에 영향 줄 수는 없어요.”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속에서부터 그를 천천히 멀리하기 시작했다.그 변화를 느낀 신이랑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이 어렸다.“민아 씨,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송시아가 또 기성은 씨로 협박한 거예요? 뭐든 상관없으니까 나한테 말해요. 내가 도와줄게요.”소민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신이랑 씨,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이건 친구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잖아요! 그보단... 다른 관계...’소민아는 그에게 똑똑히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랑 씨, 여긴 불편하니까 차에 가서 얘기할까요?”“그래요. 내가 캐리어 들어줄게요.”신이랑은 소민아의 짐을 들고 그녀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뒤 그가 물었다.“나한테 할 얘기 있어요?”“이랑 씨, 우린 친한 친구 맞죠? 이랑 씨도 송시아처럼 나쁜 사람으로 변하진 않을 거죠?”신이랑은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민아 씨, 나쁘게 변하든 아니든 절대 민아 씨를 해치진 않을 거예요!”신이랑이 그녀에게 하는 약속이었다.“민아 씨 생각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변할 것 같아요?”소민아는 그를 믿는 게 맞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송시아의 말로는 신이랑은 앞으로 정계에 입성할 것이고 기성은의 위협이 될 거라고 한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기성은이 그녀에게 신신당부한 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서울에 돌아가면 그 누구의 말도 믿으면 안 돼요.”“이랑 씨는요? 회사에서 유일하게
소민아의 눈동자에서 빛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너무 괴로워 목구멍에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당신 생각이에요, 아니면 이랑 씨 생각이에요?”송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민아야, 그 말을 이랑 씨가 들었다면 얼마나 섭섭해할까. 줄곧 신이랑은 나랑 다르다고 말해왔으면서, 지금 신이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내가 했던 말 잊었어?”“신이랑은 널 위해 본가에까지 들어갔어!”송시아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신이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만을 위해 살았어!”“핸드폰 확인해봐. 신이랑이 너한테 문자를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비행기에서 내린 뒤 그녀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놓았다. 기성은의 문자 외에 다른 건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송시아가 걸어 나가며 말했다.“일단 씻고 내려와서 밥 먹어. 저녁에 서울로 돌아갈 거야.”소민아가 핸드폰을 꺼내 보니 베터리가 없어 꺼진 상태였다. 충전선을 꼽고 전원을 켜니 송시아의 말처럼 신이랑으로부터 적잖은 문자가 와 있었다.40개가 넘는 문자 중 대부분이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말투에서 그녀에 대한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이럴수록 소민아는 그에게 죄책감이 느껴지고 부담감이 더해갔다.오후 3시 식사를 마치고 짐 정리를 한 다음, 비행기에 올라탔다.소민아는 창밖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송시아가 그녀 옆에 앉아 눈을 감고는 말했다.“보지 마. 아무리 봐도 기성은은 너랑 같이 여길 떠나지 않아.”“기성은은 애초부터 이 더러운 곳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어. 네가 아무리 애써도 뼛속 깊이 새겨진 비천함은 변하지 않아.”소민아가 말했다.“당신은 얼마나 고귀한 사람이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도 예전엔 이처럼 악랄한 환경에서 살았었다는 거 잊지 말아요.”송시아가 들뜬 말투로 말했다.“이 세상 사람들에겐 모두 등급이 있어. 전연우가 아니었다면 기성은은 아직도 여기에서 굴러다녔을 거야. 참, 내가 알려줬었나? 기성은의 아버지는 지독
“그때가 되면 소씨 가문도, 그리고 언니도... 기성은 하나 때문에 무너져버릴 수 있어.”송시아가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사람의 가장 여린 약점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 몇 마디 말에 소민아는 패닉에 빠져버렸다.“그... 그럴 리가 없어요! 기성은 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신이랑 씨도 당신 말처럼 기성은 씨를 해치지 않을 거고요. 당신 입에서 나온 말은 한 글자도 믿지 않을 거예요.”송시아가 더더욱 그녀를 몰아붙였다.“민아야, 내가 예전에도 말했었잖아. 장씨 가문은 서울 지하조직 수장이었다고. 그 인간들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 알기나 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해진이 죽길 바랐을까. 전연우가 없었다면 장소월은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을 거야.”“그동안 장씨 집안, 남원 별장을 지켰던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장씨 집안은 전연우와 기성은이 지탱하고 있었던 거야. 장소월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야만 살 수 있는 기생충에 불과해.”“장씨 집안이 끝나버린 지금, 기성은은 장씨 집안의 뒤처리를 해주려고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야.”“장씨 집안이 저지른 죄를 모아 신고하면 목숨이 몇백 개라도 모자라거든.”소민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됐어요. 그만 해요. 소월 언니를 벌레 보듯 하고 있는데... 소월 언니는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근거로 모든 잘못을 소월 언니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소월 언니는 당신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에요.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진 않았으니까요!”“만약 내가 당신 동생이 아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날 해치우려고 했어요? 난 저번 하마터면 당신 손에 철저히 망가질 뻔했어요.”송시아는 화가 나 이마를 찌푸렸다.“장소월이 착하다고? 그래! 장소월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하나 없이 온실 속에서 자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귀한 집 아가씨였어. 착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민아야... 우리한테 제일 필요 없는 게 바로 착함이야. 장소월처럼 살았다면 난 이미 일찌감치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네
기성은은 그녀를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내려주고는 차를 몰고 떠났다.소민아가 돌아가 보니 송시아는 밤새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송시아가 어디에 갔든 전혀 상관없었다. 그녀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시 방으로 돌아가 베개를 등에 받히고 침대에 누웠다.어리석은 방법일 수도 있지만, 소민아에겐 더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송시아가 돌아왔을 때, 소민아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바닥에선 베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 옷깃에 묻은 자국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송시아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이렇게까지 깊게 빠져버렸다고?신이랑이 기성은보다 못한 게 뭐란 말인가. 왜 하필이면 배경도, 돈도 없는 기성은을 좋아하게 된 걸까.송시아도 밤새 바쁘게 보냈던 지라 바로 욕실에 들어가 씻은 뒤 소민아의 옆에 누웠다.소민아는 오후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옆에 누워있는 여자를 본 순간,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동자 속에 감출 수 없는 증오가 피어올랐다.그 움직임에 송시아도 깨어났다.소민아가 말했다.“방이 두 개나 있는데 왜 하필 내 침대에 누운 거예요.”송시아가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너 예전엔 언니랑 딱 붙어 자는 거 좋아했잖아.”소민아는 그녀에게 더는 관심을 주지 않고 옆에 있던 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아랫배를 어루만졌다...‘아이가 있든 없든 난 끝까지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소민아는 샤워를 마친 뒤 욕실에서 나가 송시아에게 물었다.“우리 언제 돌아가요?”“어젯밤 기성은 만났어? 기성은도 너한테 꽤 마음이 있나 보네.”“묻고 싶었던 건 물어봤어?”“안 물어봤어요.”송시아는 화장대에 앉아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귀걸이를 걸며 말했다.“아무 조건 없이 마음을 줄 정도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기성은을 선택하면서 신이랑의 마음이 어떨지는 생각해봤어? 신이랑은 널 위해 제일 돌아가고 싫어하던 본가로 들어갔어.
차가운 밤바람에 체온이 떨어지자 기성은은 그녀를 데리고 은밀한 위치에 멈춰선 차에 올라타고는 히터를 틀었다.소민아는 바로 그의 몸에 올라타고 키스를 퍼부었다. 마음껏 키스한 다음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말했다.“기성은 씨, 3년 줄게요. 기다릴 테니까 3년 안에 서울로 돌아와요. 그동안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게요. 그냥 3년 후... 나한테 전화 한 통이나 문자 하나만 해줘요.”“기성은 씨만 원한다면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기성은 씨를 대신해 총괄 비서 자리 잘 지키고 있을게요. 전 대표님이 깨어날 때까지, 그리고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말하지 않으면 동의한 걸로 생각할게요.”기성은에게 있어 모든 것이 미지수다. 3년이라...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3년이 있을 수 있을까.“이곳을 떠나면 동의할게요.”소민아는 그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힘들게 왔는데 허탕을 치면 안 되죠. 날이 밝기 전엔 갈 생각하지 말아요.”소민아가 그의 옷 단추를 풀었다.덜컹덜컹 흔들리는 차 안, 소민아는 거칠게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얼마가 지났을까, 그녀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기성은의 가슴팍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소민아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기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기성은도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송시아도 왔어요. 저 곧 가야 할 것 같아요. 정말... 기성은 씨와 잠시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요.”기성은이 바깥을 쳐다보니 날은 이미 밝아있었다.“내가 송시아의 동생이라면, 나 미워할 거예요?”기성은이 말했다.“그건 알고 있었어요.”“그럴 줄 알았어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소민아는 다시 몸을 기울여 그의 가슴에 기댔다. 그의 평온한 심장박동이 그녀에게 안정감을 심어 주었다.“그럼 기성은 씨 생각은 어때요? 제가 그 여자를 언니로 인정해야 할까요? 제 머릿속엔 조각조각 찢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