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소은영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어느덧 하얀색 드레스로 갈아입었다.이에 박시언이 물었다.“왜 그래?”“방금 화장실에서 옷 갈아입고 나올 때 하린 언니 본 것 같아요.”“김하린?”소은영이 머리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지난번 그 남자분과 함께 있더라고요. 두 분 꽤 친해 보이던데...”그녀는 박시언의 표정을 살피며 재빨리 말했다.“제가 잘못 봤을 수도 있어요. 언니가 왜 서도겸 같은 사람이랑 친하겠어요... 서도겸 그 사람 망명자라면서요?”“김하린 진짜...”박시언이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그는 저번에 이미 서도겸이 김하린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이 여자가 정말! 위험이 있으면 피해 다녀야지 왜 서도겸 같은 망명자와도 가깝게 지내는 거야?!’박시언은 저도 몰래 가슴이 답답했다.그 시각 김하린은 화장실에서 나와 불만 가득한 박시언의 얼굴을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방금 뭐 하러 갔어?”박시언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나? 화장실 다녀왔는데.”김하린은 영문도 모른 채 그에게 답했다.이때 소은영이 앞으로 나서서 일부러 친한 척하며 김하린의 손을 잡았다.“언니, 저 아까 봤어요. 서도겸 씨 착한 사람 아니에요. 언니 절대 속으면 안 돼요.”김하린은 뒤늦게 손을 빼냈다.소은영은 허공에 손이 붕 뜬 채 속상한 얼굴로 말했다.“언니, 저 일부러 대표님께 고자질한 거 아니에요... 그냥 서도겸 진짜 좋은 사람 같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서도겸이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알아서 판단해요. 딴 사람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아 줄래요?”김하린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저는...”소은영은 입술을 꼭 깨물고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에 박시언이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은영이는 널 위해 그런 거잖아. 분수도 모르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 건드리지나 마.”소은영이 박시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너무 심하게 몰아붙인다고 원망하는 듯싶었다.이 광경을 본 김하린은 순간 소은영이야말로 박시언 아내인 것
원래 타임 라인이라면 3년 후 서호철이 사망한 후에야 서도겸의 신분이 밝혀진다.그렇다면 설마 그녀의 환생으로 무심코 모든 것이 바뀐 걸까?그 시각 소은영은 서호철의 말을 듣고 얼굴이 백지장이 되었다.‘서도겸 소문에 고아였잖아? 서호철의 손자라니? 이게 말이 돼?’방금 그녀가 한 말을 서호철이 고스란히 들었을 게 뻔하다!서호철의 심기를 건드리면 이번 생은 금융계에서 어떤 활로도 찾을 수 없다.소은영은 멘탈이 탈탈 털린 채 박시언에게 구원의 신호를 보냈다.“어르신, 은영이가 생각이 짧아서 말실수했어요. 아직 어리다 보니 부디 노여움 푸세요.”서호철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자네 옆에 업계 천재가 나왔다고 들었는데 인제 보니 별 거 아니구먼.”소은영은 사색이 되었다.그녀는 이미 서호철에게 제대로 낙인이 찍혔다.김하린은 이 광경을 쭉 지켜보았다.이렇게 된 이상 박시언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남의 집 귀한 손자를 그딴 식으로 헐뜯었으니 연회장에서 내쫓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체면을 준 셈이다.박시언은 입술을 앙다물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한편 서호철은 한결 부드러운 눈빛으로 김하린을 바라봤다.“김씨 일가의 여식이라고 했나?”김하린은 정신을 가다듬고 먼저 말을 걸어오는 어르신께 머리를 끄덕였다.“네, 김하린입니다.”“김종현 그 자식 젊었을 때 잘생긴 줄 몰랐는데 손녀가 이렇게 예쁘네. 40년 전에 나랑 자네 할아버지가 의형제를 맺었거든. 눈 깜짝할 사이에 자네가 벌써 이렇게 컸어.”‘의형제?’김하린의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는 항상 한량 같았고 집안일은 전혀 묻지 않으셨다. 또한 너무 일찍 돌아가서 서호철 어르신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는 아예 들은 적이 없다.김하린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일 때 서호철이 대뜸 그녀에게 물었다.“결혼은 했고?”김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뉘 집 자식이야?”김하린은 옆에 있는 박시언을 힐긋 살폈다.서호철은 박시언을 보더니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박동준의 손자였네.
배주원의 차가 가까운 곳에 있는 미완성 건물 앞에 도착했다.“X발 손정원 이 새끼가 어떻게 사람을 이딴 곳에 가둬 두냐고?!”배주원은 주위를 쭉 둘러보았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들리는 거라곤 본인의 메아리뿐이었다.서도겸은 차에서 손정원을 끌어냈다. 그는 허둥지둥거리다가 겨우 제대로 섰다.배주원이 앞으로 다가와 발로 툭 차며 물었다.“말해! 하린 씨 어디에 가뒀어?”“그건, 쟤네들이 숨긴 거라. 원래 그 쌍... 김하린 씨를 따끔하게 혼낼 생각이었어요. 돈 받으면 이 건물 폭발시켜서 박시언 목숨도 따내고 거액의 돈도 챙겨서 도겸 씨한테 공을 세워줄 생각이었는데 김하린 씨랑 도겸 씨가 아는 사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폭발시켜? 여길 폭발시킨다는 거야?”배주원이 두 눈을 부릅떴다.“설마 시한폭탄?”손정원은 겁에 질린 채 머리를 끄덕이며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었다.서도겸의 눈가에 싸늘한 빛이 감돌았고 손정원은 두려움에 휩싸여 침을 꼴깍 삼켰다.“주원아, 얘 꽁꽁 묶어둬. 폭탄 터지거든 얘부터 죽일 테니까.”손정원은 황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지만 결국 배주원에 의해 사지가 묶였다.미완성 건물은 구조가 매우 복잡했고 지금 서도겸은 김하린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했다. 급선무는 주변에 있는 폭탄을 제거하는 일이다.바로 이때 검은색 벤틀리가 건물에 도착했다.서도겸은 이 차 주인이 박시언이란 걸 한눈에 알아봤다.“대표님, 여기 어디예요... 저 무서워요...”소은영이 두려운 표정으로 박시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박시언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넌 차에 있어. 내려오지 말고.”소은영이 머리를 끄덕였다.배주원은 차에서 내리는 박시언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와이프가 납치당했는데 애인이랑 알콩달콩할 새가 있어요?”“대체 누가 김하린 납치했어?”박시언이 싸늘한 눈길로 서도겸을 쳐다봤다.“내 기억이 맞다면 손정원은 서도겸 씨 부하일 텐데요?”서도겸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얘가 제멋대로 일을 벌인
박시언의 말을 들은 소은영은 머리를 숙이고 얌전하게 그의 옆에 앉았다. 그녀의 모습은 화들짝 놀란 토끼를 방불케 했다.박시언의 싸늘한 시선은 전생과 똑같았다. 김하린은 순간 마음이 깊게 가라앉았다.고맙다고 말하려 했는데 지금 보니 박시언은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었다.“나 너무 피곤하네. 두 사람 편하게 있어.”김하린이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는 이젠 박시언과 소은영에게 아예 관심이 없다.오늘 밤에 손정원이 쉽게 그녀에게 손을 쓸 수 있다는 건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설명한다.김하린은 언제까지 박시언에게 기댈 순 없다.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슬슬 갖추어야 한다.다음날, 김하린은 일찍 외출 준비를 했다. 이제 막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최미진이 거실에 늠름하게 앉아 계시고 소은영이 옆에 서 있었다. 보아하니 그녀는 금방 운 모양이다.“할머니?”김하린이 미간을 구겼다.최미진은 평소에 더 빌리지에 거의 오지 않는데 오늘은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걸까?“시언이가 그러는데 너 2조 원 주고 땅을 샀다며?”최미진은 살짝 죄를 묻는 식으로 그녀에게 캐물었다.김하린은 아래층으로 내려와 어르신의 옆에 앉아서 차를 따라드렸다.“네, 맞아요.”“어젯밤엔 원수를 져서 납치까지 당했고?”“네...”김하린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우리 집안은 평범한 집안이 아니잖니. 결혼한 여자는 얼굴을 자주 드러내면 못 써. 사업은 남자들이 알아서 하는 거고 너는 지금 임신에 가장 신경 써야 해. 딴마음 품은 것들이 그 틈을 노릴라.”최미진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옆에 있는 소은영을 쳐다봤다.김하린도 그녀를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은영의 눈시울이 또다시 빨개졌다.“할머니, 저는 단지...”“그 입 닥쳐. 너 따위가 어딜 함부로 끼어들어 끼어들긴!”소은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시언의 안목이 점점 후지단 말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개나 소나 다 들이는 거야!”최미진이 소은영을 대하는 태도를 지켜보면서 김하린은 저도 몰래 전생이 떠올랐다.전생에도
오직 박시언만이 소은영에게 감쪽같이 속고 있다.그는 소은영을 좋아하니까 그 속셈을 보아내기 힘든 법이다.“됐어요, 뭐 딱히 큰일도 아니고. 은영이 오늘 수업 있으니 일단 학교까지 바래다줄게요.”박시언이 소은영에게 곁눈질했다.소은영은 대뜸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이에 최미진이 싸늘하게 말했다.“나 오늘 하린이랑 쇼핑할 거다. 너도 안 바쁜 것 같으니 우리랑 같이 가.”“그렇지만 은영이...”“이 비서 시키면 돼. 명색이 모건 그룹 대표라는 자가 신분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야 되겠니?”최미진이 거침없이 쏘아붙였다.소은영은 하는 수 없이 입술을 꼭 깨물고 말했다.“대표님, 이 비서님이 저 학교까지 바래다주면 돼요. 할머니 노엽게 하지 마세요.”그녀는 최미진을 향해 예의 바르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다만 최미진에게 이런 수단은 전혀 안 통했다.박시언이 입술을 앙다물었다.“문 앞까지 바래다줄게.”소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최미진은 박시언이 소은영을 데리고 밖에 나간 후에야 김하린에게 시선을 돌렸다.“시언이가 아직 어려서 저런 여우 년에게 쉽게 홀릴 수 있어. 네가 많이 신경 써야 해.”김하린은 겉으론 머리를 끄덕였지만 속으론 두 사람이 진도가 더 빨리 나가길 바랐다.“너 요즘 시언이한테 점점 더 무심하더라.”최미진이 김하린의 손을 잡고 말했다.“얼른 시언의 마음 사로잡아야 한다. 적어도 통통한 아들 녀석을 낳아야지. 아이만 낳으면 남자 마음 확 사로잡을 수 있어.”“네. 알겠어요, 할머니.”김하린이 웃으며 답했다.하지만 정작 그녀는 박시언의 마음을 사로잡기는커녕 아이를 낳을 생각조차 없었다.박시언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결혼했지만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으니 임신은 더 불가능한 일이다!전생에 모진 애를 써서 박시언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그는 소은영 말고는 아무도 자기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다고 여겨왔다.김하린은 고작 27살에 난산으로 수술대에서 생을 마감했다.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마저 박시언은 그녀가 빨리 죽
하지만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박시언이 자신을 믿어주길 바라지 않으니까.이어서 김하린과 박시언은 나란히 차에 올라탔고 심지어 박시언은 일부러 친한 척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 모든 것은 단지 최미진 앞에서 쇼하는 것뿐이다. 김하린은 누구보다 잘 안다.박시언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커왔다. 그는 최미진을 매우 존중하고 지극히 효도하고 있다.김하린도 더는 까발리지 않고 적당하게 박시언에게 맞춰주며 연기했다.“그 땅은 어떻게 처리할 셈이냐?”최미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다만 이 말은 김하린에게 물은 게 아니라 박시언에게 묻고 있었다.박시언이 앞에 앉아서 백미러로 김하린을 힐긋 쳐다봤다.“하린이가 산 땅이니 알아서 처리하겠죠.”최미진은 김하린에게 시선을 돌렸다.“부지에 관한 일은 시언이한테 맡겨. 여자는 남편 뒷바라지 잘하고 아이만 잘 키우면 돼.”“할머니, 박씨 일가의 일은 당연히 시언이가 관리해요. 다만 이 땅은 제가 우리 집안 어르신들을 대신해서 산 거라 그분들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제 손도 안 거치거든요.”김하린의 말을 들은 최미진은 말투가 조금 바뀌었다.“나중에도 이런 일은 되도록 간섭하지 마. 넌 이미 시언이랑 결혼했으니 모든 행동이 박씨 일가를 대표하고 있어.”“네, 할머니.”김하린이 순순히 대답했다.최미진이 어떤 성격인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안다.이 타이밍에 대뜸 독립하고 싶다고 말했다가 엄청난 번거로움만 살 게 뻔하다.“시언아, 난 저녁에 고스톱 약속이 있어서 네가 하린이 집까지 바래다주거라. 업무는 잠시 내려놔. 아내를 챙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니?”최미진의 말속에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박시언은 미간만 찌푸릴 뿐 더 많은 불만을 표출할 순 없었다.“알았어요, 할머니.”김하린은 백미러로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바로 알아챘다. 그는 분명 또 그녀의 탓으로 돌릴 것이다!이거 참 괴로워도 말 못 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기분이었다.김하린은 숨을 깊게 몰아쉬며 억울한
박시언은 안색이 어두워지고 몸도 살짝 굳었다. 김하린은 그런 그를 억지로 비집고 안에 들어갔다.방안에 불빛이 흐릿하고 거실에 어느새 근사한 저녁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이 광경을 본 김하린도 표정이 확 변했다.이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최미진의 아이디어였다. 어쩐지 백화점에서 나온 후 한사코 박시언더러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라고 하더라니, 이 타이밍만 노린 거였다.“김하린, 너 참 대단해.”“나 아니야.”김하린이 해명하려고 했지만 박시언은 이미 쇼핑백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고개도 안 돌린 채 문을 박차고 나갔다.하지만 밖에 나와보니 기사가 차를 몰고 떠나갔다.이 광경을 본 김하린은 최미진의 의도를 철저하게 알아챘다. 오늘 밤에 두 사람이 함께 보내지 않으면 최미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용쓰지 마.”김하린이 말했다.“네가 거실에서 자. 난 안방에서 잘게.”박시언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째려봤다.“경고하는데 수작 부리지 마.”말을 마친 후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박시언은 증오에 찬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이에 김하린도 저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봐, 김하린. 이게 바로 네가 박시언 좋아한 대가야. 아무리 좋아해도 저 사람 눈엔 그저 하찮은 수법이나 쓰는 여자밖에 못 돼.’실은 김하린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박시언에게 그녀는 이렇게까지 볼품없는 여자였다니!김하린은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정성껏 차려놓은 만찬을 내려다봤다.박시언은 입맛이 없다고 하지만 그녀는 최미진과 함께 종일 쇼핑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진짜 안 먹어?”“입맛 없어.”박시언은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었다.김하린도 인사치레로 물어볼 뿐 진작 머리를 숙이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그녀가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저녁을 먹자 박시언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김하린은 이전보다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또 정작 어디가 달라진 건지 콕 집어서 말할 수도 없었다.박시언의 이런 눈빛을 느꼈는지 김하린도 고개 들어 그에게 물었다.“너도 먹게?”“안 먹
박시언은 미간을 구겼다. 김하린이 이렇게 쉽게 단둘이 있을 기회를 포기한다고?!인상 속 그녀는 박시언이 소은영을 만나러 갈 때마다 화내고 난리를 피웠었다.“소은영 병원 데려간다며? 얼른 가보라니까.”김하린은 그가 일 초라도 빨리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더 늦으면 서도겸이 휴식한다고 할까 봐 걱정됐고 내일이면 최미진이 또 무슨 계획을 세울지 모른다.“천천히 먹고 있어.”박시언은 상 위의 음식을 텅 비운 그녀를 보더니 별안간 가슴이 답답했다.어렵게 그를 집에 남겨뒀는데 밥만 먹는다고?박시언이 답답한 마음을 안고 집을 떠난 후 김하린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서도겸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나 오늘 갑자기 일이 생겨서 시간이 늦어졌네. 지금 바로 갈게.”“급할 거 없어.”“이따 만나!”그 시각 배진 그룹 안에서 서도겸은 사무실 통유리창 앞에 서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배주원은 사무실 소파에서 뒤척이며 잠에서 깼다.“김하린은? 몇 신데 왜 아직도 안 와?”“일이 좀 생겼대.”“온종일?”배주원은 기지개를 쭉 켜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그에게 물었다.“너 설마 줄곧 여기서 기다린 거야? 까딱 움직이지 않고?”이 통유리창 앞에 서면 배진 그룹 대문 밖의 모든 상황을 똑똑히 볼 수 있다.서도겸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이에 배주원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와, 살다 살다 별구경을 다 해보네! 왜? 일에 싫증 나서 이젠 사랑의 순애보가 되기로 한 거야?”“못 할 것도 없지.”배주원은 이런 표정을 짓는 서도겸을 전혀 본 적이 없다.그는 전에 항상 첫눈에 반하는 건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똑같은 시나리오가 절친에게 벌어질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곧이어 김하린이 차를 타고 배진 그룹 문 앞에 도착했다.경호원이 그녀를 보더니 재차 확인한 후에야 앞으로 나섰다.“김하린 씨 맞으세요?”“네, 접니다.”김하린이 머리를 끄덕였다.“이쪽으로 모실게요.”경호원이 선뜻 그녀의 가방을 들어주며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김하린, 말을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박시언은 소은영을 보호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김하린은 귀찮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했다.“할머니한테 이 사진을 보여주기 싫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박시언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뭐 어쩔 건데?”“강한 그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놔.”박시언한테서 사과받기란 불가능했다. 그저 입으로 하는 사과보다 실질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다.박시언이 냉랭하게 말했다.“그럴 수 없어.”“그럴 수 없다고? 그래. 그러면 할머니한테 이 사진 보여주면 되지. 네가 은영 씨를 만나기 위해 속인 걸 알면 무슨 반응일까?”김하린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난 상관없어. 오히려 은영 씨가 등록금과 생활비가 끊긴 마당에 할머니가 이 사진을 보게 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모르겠네?”소은영은 이 말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다.“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맞아, 협박하는 거.”김하린은 별로 쓸데없는 말을 하기 싫었다. 어차피 증거도 가지고 있으니 충분히 협박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대표님...”소은영은 박시언을 불쌍하게 쳐다보면서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박시언은 소은영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어떻게 하고 싶은데?’“강한 그룹이 본 손해를 두 배로 갚아줘. 그리고 이제부터 강한 그룹을 건드려서는 안돼.”“알았어.”김하린은 그가 소은영을 위해 흔쾌히 대답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소은영이 이미 충분히 불쌍한데 더 불쌍해지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지금 바로 진행해. 오늘 내로 결과를 봐야겠어.”“김하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난 늘 이런 사람이었어.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김하린의 차가운 모습에 박시언은 한참 동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결국 회사에 전화할 수밖에 없었다.소은영은 그의 뒤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다 저의 잘못이에요. 저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면 언니한테 약점이 잡히지도 않았을 텐데... 저 때문에 잃는 게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김하
“이놈이 정말 얍삽하더라고. 처음에는 경쟁사에서 한 짓인 줄 알았잖아. 요 며칠 얼마나 많은 회사에서 투자를 철수했는지 몰라. 내가 끈질기게 한 사람을 잡고 물어봤더니 그제야 박시언이 한 짓이라고 하더라고. 강한 그룹에 투자하는 사람은 걔 박시언을 무시하는 거라고 하면서!”강한나가 흥분할수록 김하린의 얼굴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박시언이 어떤 성격인 줄 알았지만, 소은영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강한나가 강 씨이긴 해도 서호철의 손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강한 그룹을 건드렸다는 것은 서호철을 건드린 거나 다름없었다. 박시언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강한나를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잠깐만요. 제가 해결해 볼게요.”김하린은 전화를 끊었다.아까까지만 해도 박시언과 소은영을 어떻게 해볼 생각이 없었지만 인제 와서 보니 자신이 너무 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시언은 강한나를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데 말이다.‘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김하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 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얼마 가지도 않아 박시언이 소은영을 위해 커피를 사다 주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소은영이 박시언을 끌어안는 틈을 타 김하린은 핸드폰으로 이 모습을 찍어놓았다.몰카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에 박시언은 김하린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역시나 김하린은 핸드폰을 흔들거리면서 도발하고 있었다.박시언은 김하린의 핸드폰을 뺏어오고 싶었지만 김하린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놓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쇼핑몰에 사람도 많아서 대놓고 뺏을 수도 없었다.소은영은 박시언의 팔뚝을 잡으면서 김하린을 향해 애원했다.“언니, 저는 이미 집에서도 쫓겨났는데 저희 대표님 좀 내버려 두면 안 돼요?”“그래? 그러면 넌 지금 뭐 하고 있는 건데?”소은영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저...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김하린이 질문했다.“돈이 없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는 거 아니고? 아니면 불쌍한 모습을 시언이한테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내가 A대 가기 싫은 거 가지고 협박하지 마. 난 이혼하면 그만이야. 어디 서로 물어뜯어 보자고!”김하린은 박시언이 고자질하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심지어 박시언은 김씨 가문에서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챙기려면 이 사실을 비밀로 해야 했다.박시언은 결국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데?”“거래해. 내가 할머니한테 좋은 말하는 대신 너도 같이 연기를 해야 해.”“연기를 해?”박시언이 의심의 눈초리로 김하린을 쳐다보았다.“겨우 그거야?”“다른 사람이 봤을 때 넌 완벽한 남편이 되어야 해. 내 의견을 따르고, 내 체면까지 살려줘야 할 것이야. 그리고 적당히 내 편도 들어주고, 내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해. 얼마나 쉬워. 너한텐 손해 볼 일도 아니잖아.”김하린은 굳이 돌려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김씨 가문 쪽에서는 박시언의 연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며칠 전 최미진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박시언은 김하린이 더욱 싫어졌고, 좋은 남편인 척하기에는 불가능했다.박시언이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래.”김하린은 태블릿 PC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치마를 정리하면서 말했다.“할머니더러 저녁 식사하러 오시라고 해. 내가 직접 요리할 거야.”박시언이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려고?”“할머니 앞에서 서로 사랑하는 부부인척해야 할머니가 너를 풀어줄 거 아니야.”박시언이 피식 웃었다.“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박시언은 그녀의 속을 훤히 뚫어보는 듯했다.김하린은 별로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오후, 이도하가 최미진을 픽업해 왔고, 김하린은 한창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시언은 옆에서 도와주고 있었고, 애써 서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인 척했다.이 장면에 최미진이 흐뭇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식사하는 동안에도 박시언은 친절하게 김하린의 앞에 음식을 짚어주었고, 때로 서로 농담도 주고받았다.최미진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했다.“할머니, 저 내일 쇼핑하고 싶은데
최미진은 박시언을 늘 엄하게 대했고, 박시언은 회초리를 피할 수조차 없었다.최미진이 젖 먹던 힘으로 때린 나머지 박시언의 몸이 시퍼렇게 멍들기 시작했다.김하린은 그저 우두커니 지켜볼 뿐이다. 박시언은 이를 꽉 깨문 채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결국 회초리가 부러지고, 최미진이 냉랭하게 말했다.“그래도 사과 안 할 거야?”박시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김하린은 박시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맞고도 사과하지 않는 걸 보니 절대 사과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김하린이 말했다.“할머니, 화 푸세요. 저는 사실 시언이를 탓한 적 없어요. 얼른 의사 선생님이나 불러와야겠어요.’김하린의 이해 넓은 모습에 최미진은 그제야 화가 가라앉는 듯했다.박시언의 할머니로서 그가 어떤 성격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박시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아까는 그저 김하린의 화를 풀어주려고 연기한 것이다.최미진이 김하린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하린아, 이제부터 할머니가 시언이를 잘 보고 있을게. 그리고 약속할게. 그년은 이제부터 우리 박씨 집안에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해. 이 집안의 안주인은 너야.”김하린은 그저 웃을 뿐이다.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박시언은 차가운 눈빛으로 김하린을 쳐다보았다.날이 어두워지고, 최미진은 결국 이도하더러 의사 선생님을 불러오라고는 이곳을 떠났다.김하린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고, 그제야 바닥에서 일어난 박시언은 싫증난 표정으로 말했다.“김하린, 연기 다했어?”김하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시언이 또 이어서 말했다.“이혼을 핑계로 할머니더러 은영이를 쫓아내게 해? 정말 대단해. 내가 너 우습게 봤어.”“마음대로 생각해.”김하린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때 마침 의사 선생님이 도착했고, 김하린이 말했다.“이따 약 바르실 때 너무 살살하실 필요 없어요. 박 대표님은 가죽이 두꺼워서 아파하지도 않아요.”의사 선생님은 고개 숙여 박시언의 눈치만 볼
차에 올라타자마자 이도하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니까 이따 좀 부드럽게 말씀하세요.”김하린이 살며시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할머니께서는 언제 집에 오셨어요?”“오후요.”김하린이 예상했던 대답이었다.최미진이 지금까지 난리 치는 바람에 이도하가 이제야 픽업하러 온 것이다.성격이 불도저 같은 최미진은 절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이쯤이면 소은영은 이미 최미진한테 쫓겨났을 것이다.집에 도착했을 때 집 문은 열려있었고,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최미진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유미란이 서 있었다.마지막에야 박시언이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방안에는 소은영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최미진이 냉랭하게 말했다.“짐은 다 쌌어요?”“네. 사모님.”유미란이 트렁크 하나를 끌고 나오면서 말했다.“이거 다 은영 씨 짐입니다.”최미진이 물었다.“도하 씨, 이 중에 시언이가 산 물건들이 어떤 거예요?’이도하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대표님께서 계속 은영 씨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기 때문에...”최미진이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이것들 전부 시언이가 사준 거란 말이에요?”이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최미진이 유미란에게 말했다.“전부 버려요! 그리고 교장 선생님한테 오늘부터 소씨 가문과 연을 끊겠다고 말씀드리세요.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 저희 도움도 필요 없을 것 같은데.”“할머니!”박시언이 미간을 찌푸렸다.“은영이는 그저 평범한 아이예요. 집안 형편도 안 좋은데 언제 돈을 벌어서 A대 등록금을 낼 수 있다고 그러세요!”“금융 전공이잖아. 그럴 능력도 못 된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괜히 후원해 준 거나 다름없어!”최미진이 냉랭하게 말했다.“그리고 네가 후원해 줘서 지금까지 우리 박씨 가문에서 뭐 섭섭하게 해준 거 있어? 독립할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라면 더는 그런 사람한테 후원해 줄 필요도 없어.”최미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김하린을 쳐다보았다.“하린아,
해성의 환경미화원이 출동한 덕분에 김하린이 구매한 오염 구역이 슬슬 정리되기 시작했다. 몇 달만 지나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다. 김하린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직접 움직이기도 했다.허가증이 내려온 덕분에 많은 기업들이 이곳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자금이 충분했다.저녁, 배주원은 김하린이 한상 차린 테이블 위에 자료 하나를 올려놓더니 감탄하면서 말했다.“고작 보름 동안 몇십억 원의 투자를 받다니. 하린아, 정말 대단한 거 아니야?”서도겸이 말했다.“자금이 충분하니까 완공 전에 다른 사업에 투자해도 되겠어.”김하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응. 그래서 이미 일부 자금으로 소소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어.”“소소한 투자?”서도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몇백억 원이 나간 걸 봐서는 소소한 투자가 아닌 것 같은데?”김하린은 몇백억 원을 빼내 간 걸 서도겸이 알고있는 줄 몰랐다.처음부터 서도겸을 속일 생각이 없었다. 요 며칠 박시언과 티격태격하느라 많은 일들을 서도겸에게 맡겼기 때문에 서도겸을 속일 수도 없었다.“얼마? 몇백억 원?”강한나는 마시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무슨 투자를 하는 데 몇백억 원씩이나 들어?”‘이건 소소한 투자가 아닌데...’김하린이 말했다.“김씨 가문 명의로 된 프로젝트를 매수했어요.”“뭐라고? 너희 집 명의로 된 프로젝트를 매수했다고?”배주원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그럴 리가! 넌 김씨 가문의 큰딸인데 너희 집 명의로 된 프로젝트도 돈으로 사야 해?”김하린은 최근에 매수한 프로젝트 자료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전부 다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부동산 프로젝트와 투자 진행 상황이었다.배주원이 말했다.“어떤 건 수익이 나지도 않고, 어떤 건 심지어 손해를 보고 있는데 이것들 사서 뭐하려고?”“저가로 매수해서 괜찮아. 나중에 값이 오를 거야.”“지금 상황을 봐서 언제 값이 오르겠어!”김하린은 배주원이 나중에 값이 오를 거라는 말을 믿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전생에 박시언이 이
김하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을 떠났고, 소은영은 박시언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대표님, 언니가 홧김에 한 말일 거예요. 마음에 두지 말고 화 푸세요.”박시언이 손을 빼버리자 소은영은 멈칫하고 말았다.이때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회사에 처리할 거 있으니까 공부하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리고.”“대표님...”박시언을 잡으려고 했지만 가차 없이 떠나버렸다.밖에서 마당을 쓸고 있던 유미란은 소은영을 향해 콧방귀를 꼈다.‘부부싸움 하는 것 가지고, 정말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알았나 봐?’유미란의 표정에 소은영은 화가 치밀어올랐다.김하린은 학교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로 돌아갔고, 점심이 되자 강한나가 방문했다.강한나가 흥분하면서 말했다.“정말 박시언한테 이혼하자고 말했어? 대답했어?”김하린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대답 안 했어요.”“그러면 대답한 거나 다름없는 거지. 내 개인 변호사한테 이혼서류를 준비하라고 할게. 재산을 전부 뺏어서 빈털터리로 만들어 버리자고!”흥분한 강한나는 지금 바로 김하린을 끌고 변호사 사무실로 가고 싶었다.김하린이 고개를 흔들었다.“아마도 이혼 못 할 거예요.”“왜?”강한나가 멈칫하더니 말했다.“이혼할 마음이 있었으면 제가 먼저 말 꺼낼 필요도 없이 진작에 저랑 이혼했겠죠.”“그렇긴 한 데... 그런데 왜...”강한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처음부터 서로 이용하려고 맺어진 혼인이었어요. 박씨 가문과 김씨 가문은 아직 서로 이용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이혼하면 안 되는 거고요. 시언이 할머니께서도 저를 손주며느리로 엄청나게 예뻐해 주셔서 은영 씨 하나 때문에 저랑 이혼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김하린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집을 나서면서 일부러 유미란 앞에서 이혼을 언급한 것이다.유미란은 예전부터 최미진을 모셔 온 사람이라 이 소식을 꼭 알릴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면 소은영은 바로 더 빌리지에서 쫓겨날 것이었다.강한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모님! 이제야 오셨네요!”유미란이 이 정도로 반기는 걸 보니 아주 서러운 모양인 것 같았다.“아주머니, 시언이 집에 있어요?”“네! 집에 계세요!”유미란이 머뭇거리면서 말했다.“그런데 소은영 씨도 있어요...”유미란은 소은영 생각에 이를 꽉 깨물었다.김하린은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말에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저 최미진이 왔다 갔는데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에 놀랄 뿐이다.‘할머니를 등질 정도로 은영 씨를 좋아하나 봐.’도어락에 지문을 갖다 댔을 때 불일치라는 알림이 떴다.그러자 유미란이 말했다.“어젯밤 도련님께서 돌아오자마자 비밀번호를 전부 바꾸라고 하셨습니다.”유미란이 대신 새로 바꾼 비밀번호를 눌러서야 김하린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박시언은 거실에서 소은영에게 열심히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열애 중인 커플처럼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켁! 켁!”유미란이 마른 기침하면서 박시언에게 말했다.“도련님, 사모님 오셨습니다.”유미란은 일부러 ‘사모님’을 강조해서 말했다.박시언은 그제야 고개 들어 김하린을 낯선 사람처럼 차갑게 쳐다보았다.“누가 우리 집 들어오라고 했어?”박시언의 말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대표님, 왜 화를 내요. 언니가 물건 챙기러 왔을 수도 있잖아요.”소은영이 김하린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언니, 까먹고 챙기지 않은 물건이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직접 오실 필요도 없이 제가 택배로 보내드렸을 텐데.”김하린은 소은영을 냉랭하게 쳐다보고는 박시언에게 말했다.“오늘 회사 안 갔어?”박시언이 피식 웃었다.“네가 뭔데 날 감시해?”“내가 감시하는 게 아니라 도하 씨가 너 연락 안 된다고 전화 왔었거든. 출근하라고 말하러 온 것뿐이야.”김하린의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박시언이 무심하게 말했다.“나 바빠. 시간 없어.”김하린은 한창 박시언의 수업을 받고있는 소은영을 보면서 말했다.“이래서 시간이 없는 거야?”소은영이 미안해하면서 말했다.“언니, 제
서도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김하린이 말했다.“과일 고르는 솜씨가 우리 집 아주머니보다도 나아.”서도겸이 피식 웃었다.차마 하나하나 먹어보면서 고르느라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윙-안방에서 미세한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려오자 강한나가 말했다.“누구 핸드폰이 울리는데?”이들은 서로 쳐다만 볼 뿐이다.배주원이 말했다.“내 핸드폰은 진동모드가 아니야.”서도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한나는 핸드폰을 꺼내면서 말했다.“내건 여기 있어.”김하린은 그제야 어제 이도하의 전화를 끊고 귀찮은 마음에 진동모드로 바꿔놓은 사실이 떠올랐다.그래서 부랴부랴 안방으로 달려갔다.윙-발신자는 다름아닌 이도하였다.김하린이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이도하는 김하린의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모님, 이제야 전화를 받으시네요.”“무슨 일 있으세요?”“대표님께서 어제 온 저녁 찾으셨어요. 서도겸 씨와 함께 클럽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전화를 끊어버리더라고요. 오늘은 출근도 안 하셨고요. 혹시 대표님 연락되시면 출근해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저를 찾았다고요?”김하린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왜 갑자기 나를 찾는 거지? 내가 죽든 살든 관심이 없잖아.’핸드폰을 확인하자 정말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와있었다. 하지만 새벽 3시쯤 되었을 때, 박시언은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사모님, 그래도 대표님께서 많이 신경 쓰고 계세요. 대표님께 연락이라도 해보세요. 혹시나...”“알았어요. 고마워요. 도하 씨.”김하린은 박시언에게 문자를 보내려다 직접 전화하기로 했다. 전화 연결음이 울리자마자 전화기 너머에서 냉랭한 기계음이 들려왔다.“지금 거신 전화는 통화 중입니다.”김하린은 인내심을 가지고 박시언에게 문자를 보냈다.[어제 술을 마시느라 못 봤어. 날 찾았어?]문자를 보내자마자 갑자기 뜨는 차단 알림에 김하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박시언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