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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원래 타임 라인이라면 3년 후 서호철이 사망한 후에야 서도겸의 신분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설마 그녀의 환생으로 무심코 모든 것이 바뀐 걸까?

그 시각 소은영은 서호철의 말을 듣고 얼굴이 백지장이 되었다.

‘서도겸 소문에 고아였잖아? 서호철의 손자라니? 이게 말이 돼?’

방금 그녀가 한 말을 서호철이 고스란히 들었을 게 뻔하다!

서호철의 심기를 건드리면 이번 생은 금융계에서 어떤 활로도 찾을 수 없다.

소은영은 멘탈이 탈탈 털린 채 박시언에게 구원의 신호를 보냈다.

“어르신, 은영이가 생각이 짧아서 말실수했어요. 아직 어리다 보니 부디 노여움 푸세요.”

서호철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옆에 업계 천재가 나왔다고 들었는데 인제 보니 별 거 아니구먼.”

소은영은 사색이 되었다.

그녀는 이미 서호철에게 제대로 낙인이 찍혔다.

김하린은 이 광경을 쭉 지켜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박시언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남의 집 귀한 손자를 그딴 식으로 헐뜯었으니 연회장에서 내쫓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체면을 준 셈이다.

박시언은 입술을 앙다물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한편 서호철은 한결 부드러운 눈빛으로 김하린을 바라봤다.

“김씨 일가의 여식이라고 했나?”

김하린은 정신을 가다듬고 먼저 말을 걸어오는 어르신께 머리를 끄덕였다.

“네, 김하린입니다.”

“김종현 그 자식 젊었을 때 잘생긴 줄 몰랐는데 손녀가 이렇게 예쁘네. 40년 전에 나랑 자네 할아버지가 의형제를 맺었거든. 눈 깜짝할 사이에 자네가 벌써 이렇게 컸어.”

‘의형제?’

김하린의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는 항상 한량 같았고 집안일은 전혀 묻지 않으셨다. 또한 너무 일찍 돌아가서 서호철 어르신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는 아예 들은 적이 없다.

김하린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일 때 서호철이 대뜸 그녀에게 물었다.

“결혼은 했고?”

김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뉘 집 자식이야?”

김하린은 옆에 있는 박시언을 힐긋 살폈다.

서호철은 박시언을 보더니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박동준의 손자였네. 고약한 놈!”

서호철의 말을 들은 박시언도 가볍게 웃었다.

“할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 어르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두 분 사이가 좋으셨나 봅니다.”

“누가 걔랑 사이가 좋다고 그래!”

그들은 도란도란하게 얘기를 나눴고 소은영만 옆에서 뻘쭘하게 서 있었다. 꼭 마치 공기 취급을 당하듯 아무런 존재감이 없었다.

서호철 어르신이 떠난 후 소은영은 박시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대표님, 저 이만 갈래요.”

박시언은 바깥을 바라보며 답했다.

“데려다줄게.”

소은영이 물었다.

“그럼 하린 언니는요?”

박시언은 한창 서호철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김하린을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혼자 돌아갈 거야.”

소은영은 살짝 질투 어린 눈길로 김하린을 쳐다봤다.

‘왜 하린 언니만 어르신께 이쁨받는 건데? 이건 불공평하다고.’

한편 김하린은 박시언과 소은영이 나란히 연회장을 떠나는 걸 지켜봤다.

이 비서가 앞으로 다가가며 나지막이 말했다.

“대표님은 은영 씨를 먼저 기숙사까지 바래다 드릴 겁니다.”

“알겠어요.”

이 비서는 김하린이 이 소식을 듣고 울며 소란을 피울 거라고 여겼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너무 차분한 반응이었다.

옆에 있던 서도겸이 물었다.

“박시언이 딴 여자를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김하린도 전혀 창피해하지 않았다.

“뭐, 흔한 일이잖아.”

그녀뿐만 아니라 장내에 있는 모든 이가 지켜봤으니!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박시언은 항상 와이프인 그녀를 안중에 두지 않았고 심지어 전혀 거리낌 없이 딴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있다. 되레 제 와이프는 연회장에 내팽개치고 나 몰라라 하는 격이다.

내일 재벌가 사모님들 사이에서 또 어떤 스캔들이 터져 나올까?

“화 안 나?”

“응, 전혀.”

전생에 이미 충분히 박시언에게 목을 맸으니 이번 생엔 절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서도겸은 그녀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그녀의 눈가에는 여전히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하린 씨, 집까지 바래다주고 싶은데 기회 한 번 주시지?”

밤이 어두워지고 김하린도 슬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옆에 있던 이 비서가 말했다.

“서도겸 씨, 사모님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서도겸은 이 비서를 거들떠보지 않은 채 오직 김하린의 피드백만 기다렸다.

김하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 서도겸 씨.”

서도겸은 신사답게 김하린의 옆에 다가갔고 이 비서만 홀로 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

‘이러면 나보고 어떻게 대표님께 회보하란 말이야?’

김하린은 서도겸과 함께 차에 올라탔고 운전은 배주원이 했다.

무려 배씨 일가 도련님인 배주원을 기사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서도겸밖에 없을 것이다.

“야 서도겸, 내가 밖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정작 넌 안에서 여자나 꼬시고 있어?”

김하린이 백미러로 배주원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켜봤다.

서도겸은 무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일단 하린 씨 집까지 바래다 드리자.”

“야, 우리 이따가...”

배주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도겸이 운전석 등받이를 발로 툭 찼다.

배주원은 백미러에 비친 경고에 찬 그의 눈빛을 보더니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 이따가 볼 일 있는 거지?”

“그다지 중요한 일 아니야.”

“나 데려다줄 필요 없어. 혼자 가면 돼.”

“해성이 겉보기에 평온해 보여도 꽤 위험해. 특히 넌 박시언 와이프잖아.”

김하린이 눈썹을 치켰다.

“서도겸 씨, 박시언은 너랑 달라. 그 사람은 정직한 상인이라고.”

서도겸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혼잡한 이 바닥에서 박시언이라고 뒤가 깨끗할 것 같아?”

그의 말에 김하린도 반박하지 않았다.

전생에 박시언과 결혼해서 몇 년 동안 함께 지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박씨 일가에 관해 묻지 않았다. 박시언이 못 물어보게 했으니까.

그는 겉보기엔 정직한 상인 같아도 해성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이 남자가 또 어떻게 뒤가 깨끗할 수 있을까?

박시언은 단지 더 깊숙하게 숨겼을 뿐이다.

한편 서도겸은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 소문만으로 듣던 서도겸은 약점이 없으니까.

“도착했어요, 하린 씨.”

배주원이 박시언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집안에 불이 꺼진 걸 보니 박시언이 아직 안 돌아온 듯싶었다.

“두 분 고마워요.”

김하린이 차에서 내렸다.

서도겸은 그녀가 대문을 열고 들어간 후에야 창문을 올리고 배주원에게 말했다.

“가자.”

“약속 있는 걸 알긴 아네. 12시에 손정원이랑 거래하기로 했는데 어떡하냐고 인제?”

배주원이 시계를 들여다봤다.

“이미 늦었어!”

“그럼 기다리라고 해.”

서도겸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 새끼 물건 내놓지 못하면 손 하나 잘라버린다 내가!”

한편 김하린은 방 문을 열자마자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

유미란은 그녀가 어두운 걸 싫어해서 항상 거실 불을 켜두는데 지금 이 순간 거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박시언? 돌아왔어?”

한참이 지나도 방안에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김하린은 불길한 예감에 이제 막 문밖을 나서려 했는데 뒤에서 갑자기 커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X발, 네년 때문에 내 돈을 다 날렸어! 다 너 때문이라고 이 쌍년아!”

김하린은 벗어나고 싶었지만 상대의 힘이 너무 셌다.

그녀는 몸부림치다가 가방에서 라이터를 꺼내 남자의 손목을 태웠다.

남자는 고통스러워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고 이때 김하린은 재빨리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박시언! 박시언!’

김하린은 속으로 이 이름만 쉴 새 없이 외쳤다.

그녀는 미친 듯이 달리면서 휴대폰을 꺼내 박시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박시언! 너 지금 어디야? 당장 돌아와! 집에 누가 들어왔어...”

김하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봉고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서고 헤드라이트가 너무 눈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박시언이 미간을 확 구겼다.

“하린아!”

“네 와이프 구하고 싶으면 2조 원 내놔!”

박시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고 상대는 이미 전화를 꺼버렸다.

“대표님, 왜 그러세요?”

옆에 있던 소은영이 그의 표정이 이상해진 걸 발견했다.

박시언은 거의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집에 돌아가!”

기사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대표님, 기숙사에 거의 도착했는데요.”

“집으로 돌아가라고!”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소은영은 이토록 긴장해 하는 박시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하린이한테 일이 생겼어.”

“하린 언니요? 무슨 일인데요?”

박시언은 소은영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방금 그 목소리가 너무 익숙한데 미처 누구인지, 어디서 들은 목소리인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고 배주원은 폐차장 밖에 차를 세웠다.

서도겸은 차에서 내렸지만 손정원 일행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배주원이 구시렁대며 말했다.

“X발, 이 새끼 감히 우리보다 더 늦네? 다 컸어 아주?!”

서도겸이 담배에 불을 지필 때 봉고차 한 대가 질주해왔다.

손정원은 허겁지겁 차에서 뛰어나왔다.

“도겸 씨, 주원 씨! 제가, 제가 잠깐 일이 생겨서 늦었네요.”

손정원이 아부하듯 웃으며 말했다.

“돈은?”

배주원이 물었다.

“두 분 일단 제 얘기부터 들으세요. 어떤 쌍년이 글쎄 다 된 일을 망쳤지 뭐예요! 그래서 방금 사람 불러서 납치하느라고 시간을 지체했어요. 도겸 씨...”

배주원이 귀찮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아 됐고! 누가 그딴 게 궁금하대? 묻는 말에만 대답해. 우리 물건 가져왔어?”

“저기, 그 물건을 아까 그 쌍년이 사 갔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그년 남편이 돈 많아요. 제가 방금 그년 남편한테 전화해서 와이프 구하고 싶으면 2조 원 갖고 오라고 했어요! 그 돈이면 지금 그 땅보다 훨씬 값져요!”

서도겸이 차갑게 말했다.

“그럼 빨리 해결해. 나 시간 얼마 없어.”

“걱정 마십시오! 저 방금 박시언한테 말했어요. 한 시간 이내로 2조 원 못 내놓으면 끝장 볼 거라고요!”

순간 서도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 손정원의 멱살을 잡고 한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방금 누구라고 했어?”

“박, 박시언이요...”

손정원은 그의 반응에 화들짝 놀라서 몸을 벌벌 떨었다.

서도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

“그래서 지금 누굴 납치한 건데?”

“김씨 일가의 따님 김하린이요! 그 여자가 바로 박시언 와이프에요! 그년이 몇백억이면 살 수 있는 부지를 뺏어가는 바람에 제가...”

손정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도겸이 그의 가슴팍을 발로 힘껏 차버렸다. 손정원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서도겸이 아찔한 말투로 물었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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