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언은 병원에서 밤새 소은영과 함께 있었다. 오전에 갑자기 이 비서한테 전화가 걸려왔고 그는 미간을 살짝 구기며 전화를 받았다.“입시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학교 측에서 오늘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입시 명단에서 사모님 이름을 보았다고 합니다. 실례지만 대표님, 사모님께서 혹시 대표님께는 미리 말씀하셨나요?”어제 김하린은 분명 최미진과 함께 쇼핑하고 있었는데 대체 언제 시험을 신청하러 갔다는 걸까? 박시언은 어리둥절해졌다.“알겠어요.”박시언은 전화를 끊은 후에도 인상이 펴지지 않았다.‘김하린 또 무슨 수작인데?’“대표님, 학교에서 전화 왔나요? 저 얼른 돌아가서 수업 들을게요.”소은영이 병상에서 어느새 잠이 깼다.“이 비서더러 학교에 얘기하라고 했어. 오늘은 병원에서 푹 쉬어. 방금 전화도 네 일이 아니야.”“그럼 무슨 일인데요?”소은영은 의아한 듯 박시언을 쳐다봤다.박시언은 학교에서 후원하는 학생이 분명 소은영 한 명뿐이었으니까.“김하린.”그는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나 먼저 가봐야겠어. 푹 쉬고 있어.”소은영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박시언이 나간 후에야 그녀는 나지막이 구시렁댔다.“김하린이 우리 학교랑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지?”그 시각, 김하린은 한창 A 대학교를 거닐었다. 그녀가 박시언의 와이프인 관계로 교장과 부교장이 옆에서 A대의 교육 시설과 일부 캠퍼스 환경을 소개해주고 있었다.김하린은 원래 예쁜 데다가 오늘 포니테일을 묶어 청순하고 풋풋한 대학생을 방불케 했다.주변을 오가던 학생들은 저도 몰래 김하린을 엿보며 그녀의 정체를 추측하고 있었다.곧이어 박시언의 차가 A대 교문 밖에 도착했다.안소이는 그 차가 왠지 조금 눈에 익었다.“가람아, 저기 좀 봐봐. 저 차 소은영 남친 차 맞지?”그녀들은 전에 이 차가 소은영을 픽업하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다.“그러네. 어젯밤에도 은영이 저 차 타는 거 봤어.”유가람이 의아한 듯 물었다.“은영의 남친이 병원까지 실어준다고 하지 않았어? 이렇
소은영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그녀는 전에 허영심에 차서 룸메이트들의 끈질긴 질문하에 박시언이 제 남자친구라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만약 이 거짓말이 들통난다면 그녀는 감히 기숙사에 남아있을 면목이 없다!틀림없이 룸메이트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소은영은 한참 망설인 후 답장을 보냈다.[알았어. 너희들은 일단 가만있어. 난 내 남친 믿어.]말을 마친 그녀는 이불을 걷고 문밖에 있는 간호사를 불렀다.“저기요, 저 퇴원할래요!”A대 밖에서 김하린은 박시언에게 끌려 차 안에 들어왔다.“설명해 봐.”박시언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이에 김하린은 직설적으로 대답했다.“나 A대에서 금융을 배우고 싶어.”“안돼.”“네가 뭔데 안된다는 거야?”“난 네 남편이야. 그러니까 절대 안 돼!”박시언의 말투가 더 싸늘해졌다.“김하린, 네가 무슨 꿍꿍이인지 내가 모를 것 같아?”“뭐라고?”“은영이가 이 학교에 있으니까 일부러 따라와서 괴롭히려는 거잖아!”“박시언,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야. 착각하지 말아 줄래?”“하린아, 전에 네가 은영의 옷 스타일 따라 하는 거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렇다고 이렇게 선 넘는 건 무례야. 말했잖아. 넌 영원히 내 와이프야. 아무도 네 자리 못 뺏어.”“진짜 아무도 못 뺏어? 시언아, 내가 만약 김씨 일가의 딸이 아니었다면 넌 나랑 결혼했을까?”김하린은 차가운 시선으로 박시언을 쳐다봤다.순간 박시언은 말문이 턱 막혔다.결국 그녀와 박시언 모두 이 문제의 답안을 잘 알고 있다.만약 이때 신분이 더 높고 박씨 일가 사모님 자리에 더 적합한 여자가 나타난다면 박시언은 여전히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와 이혼할 것이다.“A대는 네가 들어오고 싶다고 해서 바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내 와이프라고 시험 면제받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나도 절대 너 안 도와줘.”“오직 내 실력으로만 시험 볼 거야. 너한테 기댈 일 없어.”“고작 네가?”박시언이 차갑게 웃었다.“하린아, A대가 우스워? 쉽게 들어
유가람이 분노 조로 말했다.“어쩐지 그 여자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더라니. 여우처럼 생겨서 감히 임자 있는 남자를 뺏어? 퉤! 뻔뻔스러워!”“왜? 난 그 여자 꽤 예쁘던데.”안소이가 말했다.“은영아, 네 남친 절대 방심하면 안 돼. 딴 여자한테 뺏길라.”유가람이 말을 이었다.“그럴 리가. 은영의 남친이 은영이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런 여자한테 넘어가겠어?”“걱정해줘서 고마워 얘들아. 하지만 걱정 마. 나랑 내 남친은 전혀 문제없어.”소은영이 가볍게 웃었다.이때 안소이가 말했다.“근데 그 여자도 우리 학교에 온다고 들었어. 게다가 금융을 배운대. 아마도 은영이 너 때문에 오는 것 같아.”“뭐라고?”소은영은 화들짝 놀랐다.‘김하린이 A대에서 금융을 배운다고? 말도 안 돼!’안소이가 말했다.“진짜야. 내가 일부러 학교 모집실에 여쭤봤는데 그 여자 왔다고 교장 선생님이랑 부교장까지 함께 따라다녔대. 딱 봐도 돈이 많아 보인다던데 아마 인맥을 써서 들어올 생각인가 봐.”유가람도 의아했다.“우리 학교에 죄다 돈 많은 사람들인데 그 여자는 대체 정체가 뭐래? 너는 알아?”안소이가 머리를 흔들었다.“몰라. 아무튼 여태껏 아무리 돈 많은 사람이 와도 교장 선생님이랑 부교장까지 친히 마중 나간 적은 없잖아. 그 여자 어마어마한 집안 출신일 거야.”“아니 그렇게 예쁘고 돈도 많은데 왜 굳이 임자 있는 남자를 뺏어? 참 이해 안 돼.”안소이와 유가람이 한 마디씩 주고받았고 소은영은 마음이 심란하기 그지없었다.김하린이 A대에 오면 그녀가 전에 한 거짓말은 바로 들통날 게 아닌가?오늘 박시언이 아침 일찍 병원을 나선 걸 되새겨 보니 아마 이 일 때문일 듯싶었다.그 시각 소은영의 전화가 울렸다.그녀는 기숙사 밖에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병원에서 너 퇴원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거야?”박시언은 관심 조로 물었다.“공부하는 데 방해될까 봐 먼저 돌아왔어요.”“공부가 아무리 중요해도 네 건강이 우선이야. 요 이틀은 강의 안 들어도 돼
오늘은 김하린이 입시 보는 날이다. 모건 그룹 대표 사무실 안에서 박시언은 컴퓨터의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김하린 오늘 아침에 시험 보러 갔어요?”“네, 사모님께서 아침 일찍 나가셨습니다. 지금쯤 아마 수능장에 들어갔을 거예요.”박시언이 고개를 끄덕였다.“교장한테 미리 말했죠?”“네, 다만...”“다만 뭐요?”“사모님은 이번에 대학원 입시를 보는 거라 교장이 굳이 간섭하지 않아도 못 붙을 게 뻔하답니다.”“대학원이요?”박시언은 원래 그녀가 대학 입시를 봐도 합격할 가능성이 매우 적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대학원 입시를 본다고?! 김하린 완전히 미친 걸까?“걔 신경 쓸 거 없어요.”박시언이 차갑게 말했다.‘창피를 당하겠으면 마음껏 해.’한편 김하린은 수능장에 도착했는데 이 안에서 그녀가 제일 어렸다. 시험관도 저도 몰래 그녀를 두어 번 쳐다봤다.수능장에 있는 대부분 사람들은 곧 30대가 되는 금융계 인사들이고 그녀가 전에 TV에서 봤던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만큼 이 학교는 금융교육계에서 명실상부한 학부이다.그 시각 소은영은 일부러 강의동 수능장 복도를 서성거렸다.1학년 입학시험은 이 건물에서 치를 텐데 수능장을 몇 개나 돌아다녀도 김하린의 그림자조차 없었다.‘설마 김하린이 제 분수를 알고 물러선 걸까?’소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그녀의 많은 번거로움을 덜어준 셈이니까.“은영아, 여기서 뭐 해?”이제 막 강의동에 들어온 유가람이 1층 수능장을 서성이는 소은영을 발견했다.소은영이 대답했다.“나 지금 제2 강의동에 수업 들으러 가려고. 같이 가.”“2동도 오늘 수능 봐. 단톡방에서 말했잖아. 우리 오늘 3동에서 수업해.”“그래?”소은영은 휴대폰을 열어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2동에서 대학원 입시를 진행한다고 했다.하지만 매년 대학원생으로 진학하는 학생은 매우 적다. 현재 3학년 학생들 중에서도 오직 소은영만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고 있고 내년이 돼야 수능을 볼 수 있다.유가람이 말했다.“우
소은영은 흠칫 놀랐다.‘김하린이 왜 여기 있지?’잠시 후 문 앞의 인기척 소리에 안에 있던 시험 감독이 걸어 나오며 버럭 화냈다.“다들 어느 과 학생들이야? 여기 수능장인 거 안 보여? 싹 다 나가!”주위 학생들은 뿔뿔이 도망쳤지만 유가람만 한사코 소은영을 잡아당기며 시험 감독에게 말했다.“선생님, 저희는 3학년생이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이라 올해 어떤 문제가 나왔는지 미리 챙겨가서 공부하고 싶어요.”시험 감독은 소은영을 보더니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그녀는 박시언이 후원하는 학생인지라 시험 감독도 흔쾌히 시험지를 건넸다.소은영은 시험 문제를 본 순간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아쉽네. 한태형 못 봤어.”유가람은 실망한 듯 고개를 숙이고 곁눈질로 소은영을 쳐다봤는데 그녀가 줄곧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에 유가람이 의아해서 물었다.“너 왜 그래?”소은영은 고개를 내저었다.“올해 나온 문제가 너무 어려워. 내가 시험 봤어도 합격하기 힘들 거야.”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김하린도 절대 못 붙을 것이다.소은영은 박시언이 올해 시험을 치르지 말라고 한 게 내심 다행이라고 느껴졌다.‘대표님은 올해 시험 문제가 어려운 걸 진작 알았었네.’박시언이 자신을 편애한다는 생각에 소은영은 몰래 기뻤다.수능장 안에서 김하린은 한참 열심히 시험을 보고 있었다. 시험 시간이 반쯤 지난 후 수능장 밖에 꽤 큰 인기척이 들려왔다.“쾅!”누군가가 수능장 문을 힘껏 박차고 열었다. 곧이어 두 명의 경호원이 빨간 머리 남자를 짓누르고 안으로 들어왔다.그 남자는 시험장 좌석에 꽉 짓눌린 채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김하린은 이 남자가 살짝 눈에 익었다.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이 남자는 한씨 일가의 둘째 도련님 한태형일 것이다.기억 속 전생의 한태형은 무례하고 난폭한 성격이었지만 장사에 능한 두뇌를 가졌다. 그녀가 죽기 전에 한태형은 병약한 형 한태윤의 뒤를 이어 한씨 일가의 오너가 되었다.이러고 보니 한태형도 나름대로 실력이 있는 것 같았다.“나 안 해!”
한태형은 예리한 눈길로 그녀를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김하린은 순간 숨이 확 멎었다.마지막 큰 문제를 확실히 그녀가 일부러 잘못 썼으니까.이 문제를 잘못 쓰기 전, 김하린은 이미 다른 문제의 점수를 다 계산해 보았는데 충분히 대학원 합격선을 넘을 수 있었다.남들이 볼 때 그녀는 금융 지식에 대해 전혀 접촉한 적이 없는 사람인지라 갑자기 충격적인 성적을 내놓으면 비난이 난무할 것이고 박시언도 의심할 게 뻔하다.‘그런데 한태형이 어떻게 안 거지?’“너 내 시험지 몰래 봤어?”김하린이 정색하며 물었다.“시험장에서 함부로 두리번거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 시험지를 훔쳐보면 안 되는 거 몰라? 너 이거 커닝이야!”한태형은 우습다는 듯이 몸을 기울이고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나 백지 냈어.”김하린도 전혀 겁먹지 않은 채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그래? 너 혹시... 한 문제도 모르는 거야?”한태형이 미간을 확 구겼다.이에 김하린이 말을 이었다.“한 문제도 못 풀었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내가 일부러 마지막 문제를 잘못 썼다고 하는 거야?”한태형이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녀가 대뜸 가로챘다.“네가 대시하는 방식이 아주 독특한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난 공부 못하는 애들은 별로라서. 기회 되면 다음에 또 봐.”김하린은 한태형의 팔 사이를 빠져나갔다.한태형은 그런 그녀가 너무 웃겼다.‘내가 대시를 해? 게다가 공부도 못한다고 내가?’이때 문밖의 경호원이 말했다.“도련님, 사장님께서 시험 끝나는 대로 바로 집에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한태형은 휘파람을 불었다.그는 원래 A대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인제 보니 나름 흥미진진했다.“형한테 전해요. 나 A대 다닐 거예요.”경호원은 화들짝 놀랐다. 순간 본인들이 잘못 들은 줄로 착각할 뻔했다.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도련님은 한사코 A대에 안 다닌다고 거부했으니까.저녁 무렵, 김하린이 더 빌리지 대문에 들어서자 거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최미진이 정색한 얼굴로
김하린은 박시언의 휴대폰을 힐긋 쳐다봤다.박시언은 전화를 받지 않고 일단 꺼버렸다.최미진이 냉랭하게 말했다.“너희 둘 빨리 애부터 가져. 굳이 내가 손 쓸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박시언은 아무 말이 없었다.최미진이 손주를 원하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까.김하린은 할머니가 떠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학교 측에 연락했어?”“응.”박시언이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나 봐주지 말라고 한 거지?”“왜? 이젠 나한테 사정하고 싶은가 봐? 내가 인맥 써서 A대에 보내줬으면 좋겠어?”박시언이 피식 웃으며 야유에 찬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잘 들어. 설사 내가 A대에 넣어준다고 해도 네 수준으로는 졸업할 수 없어.”“난 단지 네가 함부로 간섭하지 않길 바랄 뿐이야. 만약에 내가 정말 A대에 들어갔는데 네가 교장한테 말해서 입시자 명단에서 내 이름 빼라고 하면 그땐 나도 가만있지 않아.”김하린도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박시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했다.‘이 여자가 이젠 점점 더 당돌해지네.’띠리링.이때 박시언의 휴대폰이 또 한 번 울렸다.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말해.”“대표님, 사모님 성적표가 나왔습니다.”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학교 측의 난감한 목소리에 박시언은 미간을 찌푸렸다.“알았어.”김하린은 맞은 편에 앉아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학교 측에서 미리 그녀의 시험지를 채점했다는 걸 알아챘다.“김하린, 진짜 생각지도 못할 일이야. A대 가려고 감히 커닝을 해?”“나 합격이지? 맞지?”김하린은 그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박시언의 표정을 보아 합격선을 넘은 게 분명했다!“박시언, 기왕 시험에 합격했으니 내가 어떻게 합격했는지는 따지지 마. 밖에서는 모범 부부로 보이도록 협조 잘할게. 그러니까 집안에서는 내가 뭘 하든 신경 꺼.”그녀의 태도는 유난히 강경했다.박시언이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건 나도 간섭 안 해. 다만 그 전에 할머니부터 상대해야 할 거야. 너 A대 간 거 할머니가 아시게
“뭐래?”배주원이 옆에서 물었다.“합격했대.”배주원은 문득 동작을 멈췄다.“뭐? 진짜야?”서도겸의 표정을 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안 믿겼다.“네가 미리 학교 측에 언질 준 게 아니고?”“혼자 시험 쳐서 붙었어. 나랑은 전혀 상관없다고.”“대박...”배주원은 놀라서 입이 쩍 벌어졌다.“김하린 이 여자 한 실력 하네. 전에 자료에 외국어 전공이라고 한 거로 기억하는데 그것과는 전혀 연관이 없잖아.”“김하린 언어 천재야. 17살에 석사학위를 따낸 여자라고. 걔 어리석지 않아.”애초에 김하린이 그 부지를 샀을 때부터 서도겸은 이 여자의 눈빛에서 확고한 신념을 봐왔었다.일이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다음날 점심, 김하린은 창가에 기대 금융 관련 책을 보고 있었고 유미란이 노크하며 그녀에게 물었다.“사모님, 코디랑 스타일리스트가 도착했어요. 지금 시간 편하세요?”“무슨 일 있어요?”“오늘 저녁에 사모님 친정집 연회에 참석하시잖아요?”김하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요즘 일이 너무 많아 유미란이 말하지 않으면 저녁에 친정에 돌아가는 일도 깜빡할 뻔했다.김하린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매달 한 번 있는 가족 연회가 아니라면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도 없는 그녀였다.“알았어요. 들어오라고 하세요.”김하린은 수중의 책을 내려놓았다.김씨 일가는 예로부터 대가족이라 달에 한 번씩 가족 연회를 열고 있다.이 연회는 무릇 김씨 성에 족보에 아직 이름이 남아있다면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시언이는요?”“대표님은 아침 일찍 나가셨습니다. 볼일이 있으신가 봐요.”김하린은 휴대폰을 꺼내 박시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이번에는 아주 빨리 받았다.“오늘 저녁에 우리 집안 가족 연회가 있는데 너는...”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시언이 대뜸 잘랐다.“나 저녁에 약속 있어.”“알았어.”김하린은 전화를 끊었다.이때 유미란이 옆에서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 한 번 더 얘기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번 연회는 사모님이 결혼하고 나서 처음 친정에
“김하린, 말을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박시언은 소은영을 보호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김하린은 귀찮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했다.“할머니한테 이 사진을 보여주기 싫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박시언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뭐 어쩔 건데?”“강한 그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놔.”박시언한테서 사과받기란 불가능했다. 그저 입으로 하는 사과보다 실질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다.박시언이 냉랭하게 말했다.“그럴 수 없어.”“그럴 수 없다고? 그래. 그러면 할머니한테 이 사진 보여주면 되지. 네가 은영 씨를 만나기 위해 속인 걸 알면 무슨 반응일까?”김하린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난 상관없어. 오히려 은영 씨가 등록금과 생활비가 끊긴 마당에 할머니가 이 사진을 보게 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모르겠네?”소은영은 이 말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다.“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맞아, 협박하는 거.”김하린은 별로 쓸데없는 말을 하기 싫었다. 어차피 증거도 가지고 있으니 충분히 협박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대표님...”소은영은 박시언을 불쌍하게 쳐다보면서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박시언은 소은영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어떻게 하고 싶은데?’“강한 그룹이 본 손해를 두 배로 갚아줘. 그리고 이제부터 강한 그룹을 건드려서는 안돼.”“알았어.”김하린은 그가 소은영을 위해 흔쾌히 대답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소은영이 이미 충분히 불쌍한데 더 불쌍해지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지금 바로 진행해. 오늘 내로 결과를 봐야겠어.”“김하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난 늘 이런 사람이었어.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김하린의 차가운 모습에 박시언은 한참 동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결국 회사에 전화할 수밖에 없었다.소은영은 그의 뒤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다 저의 잘못이에요. 저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면 언니한테 약점이 잡히지도 않았을 텐데... 저 때문에 잃는 게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김하
“이놈이 정말 얍삽하더라고. 처음에는 경쟁사에서 한 짓인 줄 알았잖아. 요 며칠 얼마나 많은 회사에서 투자를 철수했는지 몰라. 내가 끈질기게 한 사람을 잡고 물어봤더니 그제야 박시언이 한 짓이라고 하더라고. 강한 그룹에 투자하는 사람은 걔 박시언을 무시하는 거라고 하면서!”강한나가 흥분할수록 김하린의 얼굴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박시언이 어떤 성격인 줄 알았지만, 소은영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강한나가 강 씨이긴 해도 서호철의 손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강한 그룹을 건드렸다는 것은 서호철을 건드린 거나 다름없었다. 박시언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강한나를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잠깐만요. 제가 해결해 볼게요.”김하린은 전화를 끊었다.아까까지만 해도 박시언과 소은영을 어떻게 해볼 생각이 없었지만 인제 와서 보니 자신이 너무 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시언은 강한나를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데 말이다.‘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김하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 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얼마 가지도 않아 박시언이 소은영을 위해 커피를 사다 주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소은영이 박시언을 끌어안는 틈을 타 김하린은 핸드폰으로 이 모습을 찍어놓았다.몰카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에 박시언은 김하린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역시나 김하린은 핸드폰을 흔들거리면서 도발하고 있었다.박시언은 김하린의 핸드폰을 뺏어오고 싶었지만 김하린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놓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쇼핑몰에 사람도 많아서 대놓고 뺏을 수도 없었다.소은영은 박시언의 팔뚝을 잡으면서 김하린을 향해 애원했다.“언니, 저는 이미 집에서도 쫓겨났는데 저희 대표님 좀 내버려 두면 안 돼요?”“그래? 그러면 넌 지금 뭐 하고 있는 건데?”소은영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저...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김하린이 질문했다.“돈이 없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는 거 아니고? 아니면 불쌍한 모습을 시언이한테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내가 A대 가기 싫은 거 가지고 협박하지 마. 난 이혼하면 그만이야. 어디 서로 물어뜯어 보자고!”김하린은 박시언이 고자질하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심지어 박시언은 김씨 가문에서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챙기려면 이 사실을 비밀로 해야 했다.박시언은 결국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데?”“거래해. 내가 할머니한테 좋은 말하는 대신 너도 같이 연기를 해야 해.”“연기를 해?”박시언이 의심의 눈초리로 김하린을 쳐다보았다.“겨우 그거야?”“다른 사람이 봤을 때 넌 완벽한 남편이 되어야 해. 내 의견을 따르고, 내 체면까지 살려줘야 할 것이야. 그리고 적당히 내 편도 들어주고, 내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해. 얼마나 쉬워. 너한텐 손해 볼 일도 아니잖아.”김하린은 굳이 돌려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김씨 가문 쪽에서는 박시언의 연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며칠 전 최미진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박시언은 김하린이 더욱 싫어졌고, 좋은 남편인 척하기에는 불가능했다.박시언이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래.”김하린은 태블릿 PC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치마를 정리하면서 말했다.“할머니더러 저녁 식사하러 오시라고 해. 내가 직접 요리할 거야.”박시언이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려고?”“할머니 앞에서 서로 사랑하는 부부인척해야 할머니가 너를 풀어줄 거 아니야.”박시언이 피식 웃었다.“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박시언은 그녀의 속을 훤히 뚫어보는 듯했다.김하린은 별로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오후, 이도하가 최미진을 픽업해 왔고, 김하린은 한창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시언은 옆에서 도와주고 있었고, 애써 서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인 척했다.이 장면에 최미진이 흐뭇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식사하는 동안에도 박시언은 친절하게 김하린의 앞에 음식을 짚어주었고, 때로 서로 농담도 주고받았다.최미진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했다.“할머니, 저 내일 쇼핑하고 싶은데
최미진은 박시언을 늘 엄하게 대했고, 박시언은 회초리를 피할 수조차 없었다.최미진이 젖 먹던 힘으로 때린 나머지 박시언의 몸이 시퍼렇게 멍들기 시작했다.김하린은 그저 우두커니 지켜볼 뿐이다. 박시언은 이를 꽉 깨문 채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결국 회초리가 부러지고, 최미진이 냉랭하게 말했다.“그래도 사과 안 할 거야?”박시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김하린은 박시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맞고도 사과하지 않는 걸 보니 절대 사과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김하린이 말했다.“할머니, 화 푸세요. 저는 사실 시언이를 탓한 적 없어요. 얼른 의사 선생님이나 불러와야겠어요.’김하린의 이해 넓은 모습에 최미진은 그제야 화가 가라앉는 듯했다.박시언의 할머니로서 그가 어떤 성격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박시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아까는 그저 김하린의 화를 풀어주려고 연기한 것이다.최미진이 김하린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하린아, 이제부터 할머니가 시언이를 잘 보고 있을게. 그리고 약속할게. 그년은 이제부터 우리 박씨 집안에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해. 이 집안의 안주인은 너야.”김하린은 그저 웃을 뿐이다.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박시언은 차가운 눈빛으로 김하린을 쳐다보았다.날이 어두워지고, 최미진은 결국 이도하더러 의사 선생님을 불러오라고는 이곳을 떠났다.김하린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고, 그제야 바닥에서 일어난 박시언은 싫증난 표정으로 말했다.“김하린, 연기 다했어?”김하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시언이 또 이어서 말했다.“이혼을 핑계로 할머니더러 은영이를 쫓아내게 해? 정말 대단해. 내가 너 우습게 봤어.”“마음대로 생각해.”김하린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때 마침 의사 선생님이 도착했고, 김하린이 말했다.“이따 약 바르실 때 너무 살살하실 필요 없어요. 박 대표님은 가죽이 두꺼워서 아파하지도 않아요.”의사 선생님은 고개 숙여 박시언의 눈치만 볼
차에 올라타자마자 이도하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니까 이따 좀 부드럽게 말씀하세요.”김하린이 살며시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할머니께서는 언제 집에 오셨어요?”“오후요.”김하린이 예상했던 대답이었다.최미진이 지금까지 난리 치는 바람에 이도하가 이제야 픽업하러 온 것이다.성격이 불도저 같은 최미진은 절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이쯤이면 소은영은 이미 최미진한테 쫓겨났을 것이다.집에 도착했을 때 집 문은 열려있었고,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최미진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유미란이 서 있었다.마지막에야 박시언이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방안에는 소은영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최미진이 냉랭하게 말했다.“짐은 다 쌌어요?”“네. 사모님.”유미란이 트렁크 하나를 끌고 나오면서 말했다.“이거 다 은영 씨 짐입니다.”최미진이 물었다.“도하 씨, 이 중에 시언이가 산 물건들이 어떤 거예요?’이도하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대표님께서 계속 은영 씨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기 때문에...”최미진이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이것들 전부 시언이가 사준 거란 말이에요?”이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최미진이 유미란에게 말했다.“전부 버려요! 그리고 교장 선생님한테 오늘부터 소씨 가문과 연을 끊겠다고 말씀드리세요.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 저희 도움도 필요 없을 것 같은데.”“할머니!”박시언이 미간을 찌푸렸다.“은영이는 그저 평범한 아이예요. 집안 형편도 안 좋은데 언제 돈을 벌어서 A대 등록금을 낼 수 있다고 그러세요!”“금융 전공이잖아. 그럴 능력도 못 된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괜히 후원해 준 거나 다름없어!”최미진이 냉랭하게 말했다.“그리고 네가 후원해 줘서 지금까지 우리 박씨 가문에서 뭐 섭섭하게 해준 거 있어? 독립할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라면 더는 그런 사람한테 후원해 줄 필요도 없어.”최미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김하린을 쳐다보았다.“하린아,
해성의 환경미화원이 출동한 덕분에 김하린이 구매한 오염 구역이 슬슬 정리되기 시작했다. 몇 달만 지나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다. 김하린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직접 움직이기도 했다.허가증이 내려온 덕분에 많은 기업들이 이곳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자금이 충분했다.저녁, 배주원은 김하린이 한상 차린 테이블 위에 자료 하나를 올려놓더니 감탄하면서 말했다.“고작 보름 동안 몇십억 원의 투자를 받다니. 하린아, 정말 대단한 거 아니야?”서도겸이 말했다.“자금이 충분하니까 완공 전에 다른 사업에 투자해도 되겠어.”김하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응. 그래서 이미 일부 자금으로 소소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어.”“소소한 투자?”서도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몇백억 원이 나간 걸 봐서는 소소한 투자가 아닌 것 같은데?”김하린은 몇백억 원을 빼내 간 걸 서도겸이 알고있는 줄 몰랐다.처음부터 서도겸을 속일 생각이 없었다. 요 며칠 박시언과 티격태격하느라 많은 일들을 서도겸에게 맡겼기 때문에 서도겸을 속일 수도 없었다.“얼마? 몇백억 원?”강한나는 마시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무슨 투자를 하는 데 몇백억 원씩이나 들어?”‘이건 소소한 투자가 아닌데...’김하린이 말했다.“김씨 가문 명의로 된 프로젝트를 매수했어요.”“뭐라고? 너희 집 명의로 된 프로젝트를 매수했다고?”배주원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그럴 리가! 넌 김씨 가문의 큰딸인데 너희 집 명의로 된 프로젝트도 돈으로 사야 해?”김하린은 최근에 매수한 프로젝트 자료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전부 다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부동산 프로젝트와 투자 진행 상황이었다.배주원이 말했다.“어떤 건 수익이 나지도 않고, 어떤 건 심지어 손해를 보고 있는데 이것들 사서 뭐하려고?”“저가로 매수해서 괜찮아. 나중에 값이 오를 거야.”“지금 상황을 봐서 언제 값이 오르겠어!”김하린은 배주원이 나중에 값이 오를 거라는 말을 믿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전생에 박시언이 이
김하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을 떠났고, 소은영은 박시언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대표님, 언니가 홧김에 한 말일 거예요. 마음에 두지 말고 화 푸세요.”박시언이 손을 빼버리자 소은영은 멈칫하고 말았다.이때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회사에 처리할 거 있으니까 공부하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리고.”“대표님...”박시언을 잡으려고 했지만 가차 없이 떠나버렸다.밖에서 마당을 쓸고 있던 유미란은 소은영을 향해 콧방귀를 꼈다.‘부부싸움 하는 것 가지고, 정말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알았나 봐?’유미란의 표정에 소은영은 화가 치밀어올랐다.김하린은 학교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로 돌아갔고, 점심이 되자 강한나가 방문했다.강한나가 흥분하면서 말했다.“정말 박시언한테 이혼하자고 말했어? 대답했어?”김하린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대답 안 했어요.”“그러면 대답한 거나 다름없는 거지. 내 개인 변호사한테 이혼서류를 준비하라고 할게. 재산을 전부 뺏어서 빈털터리로 만들어 버리자고!”흥분한 강한나는 지금 바로 김하린을 끌고 변호사 사무실로 가고 싶었다.김하린이 고개를 흔들었다.“아마도 이혼 못 할 거예요.”“왜?”강한나가 멈칫하더니 말했다.“이혼할 마음이 있었으면 제가 먼저 말 꺼낼 필요도 없이 진작에 저랑 이혼했겠죠.”“그렇긴 한 데... 그런데 왜...”강한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처음부터 서로 이용하려고 맺어진 혼인이었어요. 박씨 가문과 김씨 가문은 아직 서로 이용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이혼하면 안 되는 거고요. 시언이 할머니께서도 저를 손주며느리로 엄청나게 예뻐해 주셔서 은영 씨 하나 때문에 저랑 이혼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김하린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집을 나서면서 일부러 유미란 앞에서 이혼을 언급한 것이다.유미란은 예전부터 최미진을 모셔 온 사람이라 이 소식을 꼭 알릴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면 소은영은 바로 더 빌리지에서 쫓겨날 것이었다.강한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모님! 이제야 오셨네요!”유미란이 이 정도로 반기는 걸 보니 아주 서러운 모양인 것 같았다.“아주머니, 시언이 집에 있어요?”“네! 집에 계세요!”유미란이 머뭇거리면서 말했다.“그런데 소은영 씨도 있어요...”유미란은 소은영 생각에 이를 꽉 깨물었다.김하린은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말에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저 최미진이 왔다 갔는데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에 놀랄 뿐이다.‘할머니를 등질 정도로 은영 씨를 좋아하나 봐.’도어락에 지문을 갖다 댔을 때 불일치라는 알림이 떴다.그러자 유미란이 말했다.“어젯밤 도련님께서 돌아오자마자 비밀번호를 전부 바꾸라고 하셨습니다.”유미란이 대신 새로 바꾼 비밀번호를 눌러서야 김하린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박시언은 거실에서 소은영에게 열심히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열애 중인 커플처럼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켁! 켁!”유미란이 마른 기침하면서 박시언에게 말했다.“도련님, 사모님 오셨습니다.”유미란은 일부러 ‘사모님’을 강조해서 말했다.박시언은 그제야 고개 들어 김하린을 낯선 사람처럼 차갑게 쳐다보았다.“누가 우리 집 들어오라고 했어?”박시언의 말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대표님, 왜 화를 내요. 언니가 물건 챙기러 왔을 수도 있잖아요.”소은영이 김하린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언니, 까먹고 챙기지 않은 물건이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직접 오실 필요도 없이 제가 택배로 보내드렸을 텐데.”김하린은 소은영을 냉랭하게 쳐다보고는 박시언에게 말했다.“오늘 회사 안 갔어?”박시언이 피식 웃었다.“네가 뭔데 날 감시해?”“내가 감시하는 게 아니라 도하 씨가 너 연락 안 된다고 전화 왔었거든. 출근하라고 말하러 온 것뿐이야.”김하린의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박시언이 무심하게 말했다.“나 바빠. 시간 없어.”김하린은 한창 박시언의 수업을 받고있는 소은영을 보면서 말했다.“이래서 시간이 없는 거야?”소은영이 미안해하면서 말했다.“언니, 제
서도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김하린이 말했다.“과일 고르는 솜씨가 우리 집 아주머니보다도 나아.”서도겸이 피식 웃었다.차마 하나하나 먹어보면서 고르느라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윙-안방에서 미세한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려오자 강한나가 말했다.“누구 핸드폰이 울리는데?”이들은 서로 쳐다만 볼 뿐이다.배주원이 말했다.“내 핸드폰은 진동모드가 아니야.”서도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한나는 핸드폰을 꺼내면서 말했다.“내건 여기 있어.”김하린은 그제야 어제 이도하의 전화를 끊고 귀찮은 마음에 진동모드로 바꿔놓은 사실이 떠올랐다.그래서 부랴부랴 안방으로 달려갔다.윙-발신자는 다름아닌 이도하였다.김하린이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이도하는 김하린의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모님, 이제야 전화를 받으시네요.”“무슨 일 있으세요?”“대표님께서 어제 온 저녁 찾으셨어요. 서도겸 씨와 함께 클럽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전화를 끊어버리더라고요. 오늘은 출근도 안 하셨고요. 혹시 대표님 연락되시면 출근해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저를 찾았다고요?”김하린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왜 갑자기 나를 찾는 거지? 내가 죽든 살든 관심이 없잖아.’핸드폰을 확인하자 정말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와있었다. 하지만 새벽 3시쯤 되었을 때, 박시언은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사모님, 그래도 대표님께서 많이 신경 쓰고 계세요. 대표님께 연락이라도 해보세요. 혹시나...”“알았어요. 고마워요. 도하 씨.”김하린은 박시언에게 문자를 보내려다 직접 전화하기로 했다. 전화 연결음이 울리자마자 전화기 너머에서 냉랭한 기계음이 들려왔다.“지금 거신 전화는 통화 중입니다.”김하린은 인내심을 가지고 박시언에게 문자를 보냈다.[어제 술을 마시느라 못 봤어. 날 찾았어?]문자를 보내자마자 갑자기 뜨는 차단 알림에 김하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박시언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