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의미심장한 척하는 한태형에게 그녀가 쌀쌀맞게 대답했다.“아니, 전혀.”한태형에겐 실로 의외인 대답이었다.“안 궁금해?”“관심 없어.”어차피 누가 가르치던 그녀는 얌전히 공부하고 순조롭게 졸업만 하면 되니까.“너 그럼 내가 누군지는 알아?”“한태형, 방금 교수님이 말했잖아.”“그런데 감히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김하린은 머리를 돌리고 한태형을 빤히 쳐다봤다.“미안한데 지금 수업 중이야.”한태형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 막 김하린에게 가까이 다가가 계속 더 얘기하려 했는데 강단 위에서 배주원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맨 뒷줄에 앉은 그를 가리켰다.“맨 뒷줄에 학생, 수업 시간에 여학생에게 작업 거는 거 아니야!”‘자식이, 어딜 감히! 내 친구 여자는 반드시 내가 지켜!’한태형은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배주원을 본 순간 의외로 화를 내지 않았다.뭇사람들은 눈치채고 있었다. A대도 단연코 만만한 학교가 아니다. 다들 재벌가의 자제들이라 일반 교수들은 감당하기 힘들 터이니 배주원처럼 더 막강한 조건의 인물을 일부러 내세우고 있었다.배주원의 뒤에는 서도겸이 있다.그는 해성에서 세력이 없는 것 같았지만 서호철이 공식 석상에서 손자라고 알린 이후로 나름 입지를 굳힌 셈이다.또한 그는 망명자 신분이다.기업마다 더러운 뒷거래가 있을 때 대부분 서도겸의 도움을 빌려서 증거를 없앤다.그런 서도겸과 원한을 맺을 자가 누가 있을까?“자, 일단 자기소개하면서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볼까? 앞으로 쭉 함께 지내야 하잖아.”배주원은 한없이 온화하고 자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뭇사람들은 자기소개를 시작했는데 다들 강단에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예를 들어 집안에 어떤 기업들이 있고 재산이 얼마나 되고 본인은 어느 나라에서 유학을 마쳤고 어떤 성과를 이룩했는지 등등...김하린 차례가 됐고 그녀는 달랑 한마디만 했다.“난 김하린이야.”말을 마친 그녀는 강단에서 내려왔다.아래에 있던 학생들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어느 정도 공감대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해. 신경 써줘서 고마워.”김하린은 가방을 챙기고 교실을 나섰다.배주원의 말도 틀린 건 없다. 그녀는 확실히 일부러 한태형에게 접근하고 있다.뭇사람들은 단지 한태윤이 수단이 악랄한 사람이란 것만 알고 있을 뿐 미래에 그의 동생 한태형이 더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가 된다는 건 전혀 모른다. 만약 한태형과 미리 친구 사이로 지낸다면 앞날이 훨씬 더 평탄해질 것이다.하지만 한태형은 보통 사람들과 성격이 좀 달라서 본인에게 아부하며 일부러 잘 보이려 하는 사람들에겐 혐오감을 느낀다.본질에서 볼 때 한태형과 박시언은 매우 비슷하다. 전생에 그녀가 그토록 박시언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더 큰 혐오감만 남겼고 죽을 때까지 눈길 한번 안 줬다.오히려 상대를 거들떠보지 않았더니 끊임없이 그녀에게 매달리고 있다.이런 경험을 쌓은 김하린은 일부러 한태형과 안 마주치려고 제2강의동 정문을 에둘러서 나왔다.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잠에서 깬 김하린은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일어나 보니 밖에 어느덧 큰비가 내리고 있었다.그녀는 어려서부터 몸이 안 좋았는데 비 오는 날만 되면 발열 징후가 나타난다.김하린은 약을 사러 갈 준비를 하다가 곁눈질로 침대 머리맡의 협탁을 발견했다. 협탁 위에 흰색 메모지가 있었고 거기에는 협탁 안에 일상적으로 필요한 약들이 들어 있다고 적혀 있었다.서랍을 열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감기약과 해열제, 진통제가 한가득 들어있었다.이것도 서도겸이 준비한 걸까?그때 김하린의 휴대폰이 울렸다.박시언에게 걸려온 전화였다.전화를 받자 박시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어디야?”“오늘 개강일이야. 이미 집에서 짐 빼고 나왔어.”“누구 마음대로 나가?”박시언의 싸늘한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김하린은 이미 극도로 몸이 불편했던지라 박시언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서 곧장 전화를 꺼버렸다.그녀는 약을 먹은 후 다시 깊게 잠들었다.다음날 이른 아침, 김하린은 여전히 두통이 심했다. 밖에서 계속 부슬비가
한태형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고 우산을 쓴 박시언을 마주 봤다.해성에서 그의 형 한태윤 말고 이런 포스를 내뿜는 자가 몇 안 된다.“박시언?”그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내가 왜 놓아야 하지?”“나 하린이 남편이거든.”박시언의 짙은 두 눈동자에 극도의 아찔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남편이란 두 글자에 한태형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박시언은 우산을 내던지고 한태형의 품에서 김하린을 안아갔다. 옆에 있던 이 비서가 우산을 줍고 재빨리 그를 따라갔다.결국 한태형만 덩그러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김하린이... 박시언 아내였다니?’병원에서 김하린은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 밖에 여전히 날이 흐리고 비가 내렸다.그녀는 제2강의동 문 앞에서 한태형이 갑자기 대문에 밀어붙인 것까지 생각나지만 그 뒤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김하린은 힘겹게 몸을 겨누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박시언이 턱을 괴고 잠들어 있었다.“깼어요 사모님?”이 비서가 서류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박시언은 그제야 눈을 뜨고 의식을 회복한 김하린을 바라봤다.살짝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김하린이 물었다.“네가 날 병원까지 데려다준 거야?”박시언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이 비서는 서류 가방 속의 컴퓨터를 꺼내 박시언의 앞으로 내밀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침에 학교까지 찾아가셨다가 사모님이 쓰러지신 걸 보고 회의도 포기한 채 줄곧 병원에서 함께해주셨습니다.”“이 비서는 이만 나가봐요.”박시언이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김하린은 그가 무척 화났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그녀가 되물었다.“네가 왜 학교에 갔어?”“아내라는 자가 연락이 안 닿는데 남편으로서 학교에 안 가면 어딜 가서 찾을 수 있을까?”김하린은 그제야 자신이 어제 박시언의 전화를 끊은 일이 생각났다.“어젯밤엔 몸이 좀 불편해서...”“그래서 내 전화를 끊었다고?”김하린은 반박하지 않았다.전화를 끊은 것은 확실히 그녀가 잘못했으니까.“집 주소 불러. 사람 시켜서 물건 다 빼
박시언의 눈빛을 본 김하린은 더 버텨도 무의미하다는 걸 느꼈다.그녀가 계속 맞선다면 박시언은 아마 오늘부터 강제로 집에 데려올 것이다.김하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대장부는 굽힐 줄도 알고 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지금 당장 복수하기보다 일단 자세를 낮춰야 할 듯싶었다. 앞으로 복수할 날이 많고 많으니까.“알았어.”김하린이 답했다.“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집에 있을게. 이러면 됐지?”“세 번.”“너!”그녀는 화내려 했지만 박시언의 눈빛을 보더니 끝내 참았다.A대의 대학원 공부가 그리 빠듯하지 않아서 일주일에 세 번 집에 가는 것은 전혀 문제없다. 박시언은 분명 교장과 다 여쭤본 후에 이런 요구를 제안했을 것이다.김하린은 마음을 다잡고 그에게 잔뜩 일그러진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세 번이면 세 번이라지 뭐. 박 대표님 또 무슨 제안 있어?”“내가 전화만 하면 무조건 집에 돌아와. 이 비서 보낼 거야.”김하린은 심호흡을 하고 계속 웃어 보였다.“오케이. 또 더 있어?”“아직은 없어.”아직은 없다라, 나중에 또 있을 거란 뜻이다.김하린은 왠지 A대에 들어온 일이 박시언에게 꼬투리를 잡을 핑곗거리를 제공해준 꼴이 된 것 같았다.그녀가 지금 A대에 다니는 일을 최미진에게 들켜서는 절대 안 된다. 이 할머니는 다른 집 할머니들보다 훨씬 맞춰드리기 힘드니까.“회사에 볼일 있어서 이따가 이 비서더러 학교까지 데려다주라고 할게.”박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김하린에게 말했다.“한태형 멀리해.”한태형?‘여기서 뜬금없이 한태형이 왜 나오지?’김하린은 쓰러지기 전의 일을 애써 되새겨보았다. 설마... 한태형과 박시언이 마주친 걸까?오후에 그녀는 이런 생각을 품은 채 이 비서의 차에 앉아 학교로 돌아갔다.교실에 들어가면 한태형을 볼 줄 알았는데 정작 그만 빼고 모두가 다 있었다.“하린아, 들어와.”배주원이 교실 문 앞에서 넋 놓고 있는 김하린을 발견했다.그녀는 묵묵히 맨 뒷줄에 앉았다. 원래 한태형의 주
이 교실은 그녀가 오매불망 그리던 교실이다.하지만 김하린이 너무 손쉽게 모든 걸 가졌다.여기까지 생각한 소은영은 저도 모르게 교실 대문을 벌컥 열었다.교실 안에 있던 모든 이가 그녀를 쳐다봤다. 배주원도 고개를 돌리고 문 앞에 있는 소은영을 바라봤는데 왠지 조금 눈에 익었다. 한편 소은영은 그날 경매에서 김하린을 편들어주던 배주원을 바로 알아봤다.“학생은 어느 반이야?”배주원이 의아해서 물었다.김하린도 문 앞의 소은영을 발견했다.소은영은 자신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며 횡설수설하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들어왔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서둘러 교실 문을 닫았다.문이 닫히는 순간 소은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좀 전에 강단 위의 지도 교수가 그녀를 못 알아본 듯싶었다.하지만 그녀는 너무 잘 안다. 그가 바로 배진 그룹 대표라는 것을!전에 분명 만났었는데 배주원은 아예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부자들 눈에 그녀와 같은 사람은 정말 이렇게 보잘것없는 존재인 걸까?교실 안에서 배주원의 농담으로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정작 소은영에겐 자신을 야유하는 웃음소리로밖에 안 들렸다.그녀는 창피하고 화나서 허둥지둥 도망쳤다.한편 김하린은 방금 소은영이 실수로 교실을 잘못 들어온 것 같지 않았다.다만 그녀는 이 일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무슨 영문인지 환생한 후 이번 생의 운명의 궤도가 빗나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김하린!”잠시 후 강단 위에서 배주원이 갑자기 외쳤다.김하린은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되물었다.“네?”“수업 끝났어. 거기서 뭐 해?”김하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그럼 또 봬요, 교수님.”김하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배주원이 그녀를 가로막고 옷 주머니에서 약을 한 통 꺼내 그녀 앞에 내밀었다.“이 특효약은 서랍장 안의 것보다 효과가 더 좋을 거야.”“네가 준비했어?”“박시언 씨가 너 대신 병가 냈어. 나도 마침 이 약을 갖고 있었거든. 몸이 아프다며? 얼른 먹
허윤아는 김하린을 차에 태우고 근처의 클럽으로 향했다.차에서 내리자 이미 누군가가 룸을 예약했다.떠들썩한 밖의 상황과 달리 룸 안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룸 문이 열리자마자 김하린은 소파에 앉은 한태형을 발견했다.그는 펑키한 옷차림에 눈빛도 살짝 차가워 보였다. 원래 날카롭게 생겼는데 지금은 야성미가 더 물씬 풍겼다.방금 허윤아의 뒤에 있던 그 차를 발견했을 때부터 김하린은 한태형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걸 알아챘었다.아니나 다를까 허윤아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룸 안에는 김하린과 한태형 두 사람만 남게 됐다.“한태형, 굳이 이런 곳에서 날 만날 필요는 없잖아?”그녀는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누군가가 이미 룸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그녀는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박시언의 아내인 그녀에게 한태형이 감히 막 나오지 못한다는 걸 아니까. 이 또한 김하린이 감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이기도 하다.“여긴 안전해. 아무도 신경 안 써.”“한씨 일가의 둘째 도련님, 밤늦게 박시언의 새신부와 데이트?! 기사가 터지는 순간 두 가문에 전부 영향을 미칠 텐데.”김하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어차피 난 이젠 악명이 자자해서 명성이 더 나빠져봤자 별 타격은 없어. 오히려 네가 걱정인데. 너희 형이 이 사실을 알면 가만 내버려 둘까?”한태형의 약점이 무엇인지 김하린은 너무 잘 안다.한태형은 아찔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김하린의 앞으로 다가가 커다란 그림자로 그녀를 뒤덮어버렸다. 한태형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아무도 감히 날 놀리지 못해. 네가 처음이야.”한태형의 중저음의 목소리가 유난히 애틋하고 감미롭게 들렸다.김하린은 눈썹을 치켰다.“한태형,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내가 언제 널 놀렸어?”“첫 만남부터 넌 의도적이었잖아. 안 그래?”“하늘에 맹세코 절대 아니야.”김하린은 무고한 표정을 지었다.“너 혹시 피해망상증이야?”“시치미 떼지 마. 거짓말하는 인간들 내 눈 절대 못 속여.”한태형이 가볍게
김하린의 얼굴에 띈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자 한태형은 극도의 쾌감을 느꼈다.하지만 곧이어 그녀가 다시 웃기 시작했다.“한태형 생각보다 너무 유치한데?”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뭐라고?”“네가 정말 그럴 배짱이 있으면 굳이 사람 시켜서 비밀리에 나랑 만났을까?”김하린은 그를 가볍게 밀치고 룸 안을 거닐었다.“여긴 카메라도 없고 밖에 엄청 시끄러워서 아무도 이 작은 방을 신경 쓰지 않아. 나랑 만난 일을 박시언이나 한태윤에게 들킬까 봐 두려운 거잖아. 그런 애가 감히 여기서 날 함부로 할 엄두는 나고?”김하린은 소파에 앉아서 사과를 한 입 먹었다.그녀도 전에 이런 장소에 드나들어서 잘 알고 있다. 이런 식의 룸은 프라이빗 등급이 모두 S급이라 거물급 인사들이 거래하기 좋은 장소로 꼽힌다. 소식이 새어나가기는커녕 파리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다.김하린은 한태형을 쳐다봤다.“태형아, 유치하게 사람 좀 그만 협박해. 나한테 전혀 안 먹혀.”지난번에 손정원에게 납치당했던 때와 비하면 이건 그냥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아니나 다를까 한태형은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김하린이 무심코 도발하자 그는 음침한 눈빛으로 살짝 돌변했다.“내가 진짜 너 못 건드릴 것 같아?”“바로 네 앞에 있잖아. 마음껏 해보라니까.”김하린은 달갑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박시언의 아내인 한, 한태형은 간이 배 밖에 튀어나올지언정 절대 그녀를 건드릴 엄두가 안 날 것이다.한참이 지나도 한태형은 역시 아무런 액션이 없었다.김하린도 더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인정해. 처음 널 봤을 때부터 한태윤 동생이란 걸 알았어. 그땐 네 주의를 끌고 싶다기보다 네가 이대로 재능을 묻히는 게 아까워서 그랬어. 그래서 괜히 널 자극하면서 A대에서 공부하라고 했을 뿐이야.”김하린의 말은 진실 반, 거짓 반이다.한태형은 그녀가 지금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곧이어 되물었다.“내 재능? 그게 뭔데?”해성 사람들은 한씨 일가 둘째 도련님이 명실상
두 형제 사이가 매우 돈독할 듯싶다.단지 외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김하린에게 속내를 들킨 영문인지 한태형은 머리를 홱 돌렸다.“나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하지 마.”“난 잘 몰라. 그냥 한번 말해본 거야.”김하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도 충분히 머물렀으니까 이만 돌아가 봐도 되겠지?”“거기 서.”한태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빨리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김하린이 물었다.“협박도 했겠다, 복수도 했겠다, 또 뭘 어쩔 건데?”협박? 복수?한태형이 그렇게 계획한 건 맞지만 정작 김하린은 이 룸에 오랜 시간 머물면서 어떠한 손해도 보지 않았다.오히려 한태형만 가슴이 답답하고 숨 막힐 따름이다!그는 기분이 잡쳤다. 여자한테 이렇게 몇 번씩이나 당하긴 처음이니까.“박시언 해성에 여자 있는 거 너도 알아?”“알지.”‘기껏해야 소은영이겠지.’그녀의 무관심한 태도에 한태형은 의아할 따름이었다.“신경 안 쓰여?”“정략결혼인데 뭘 그렇게 신경 써?”김하린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한태형, 너 지금 우리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이런 질문 하는 거야?”한태형은 코웃음 치며 쏘아붙였다.“그 남자 기댈만한 사람 아니야. 두 사람 안 어울려. 단지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알아.”그녀는 조만간 박시언과 이혼할 것이다.“조언 고마워. 먼저 갈게.”김하린은 그에게 손짓하고 문밖을 나서려 했는데 한태형이 몸에 걸친 외투를 벗어서 대뜸 그녀의 머리에 내던졌다.“여기 보는 눈 많아. 조심히 나가. 함부로 딴 사람 차에 타지 말고.”김하린은 그가 말하는 사람이 허윤아라는 걸 잘 알고 있다.허씨 일가와 한씨 일가의 관계를 진작 알고 있었기에 그녀도 허윤아의 차를 타고 왔다.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쉽게 타줄 리가 없다.김하린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신경 써주는 거라고 여길게.”한태형은 그녀를 힐긋 바라봤다.이 여자는 정말 자신감이 너무 차 넘친다.김하린은 한태형의 옷을 걸치고 클럽을 빠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