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실은 그녀가 오매불망 그리던 교실이다.하지만 김하린이 너무 손쉽게 모든 걸 가졌다.여기까지 생각한 소은영은 저도 모르게 교실 대문을 벌컥 열었다.교실 안에 있던 모든 이가 그녀를 쳐다봤다. 배주원도 고개를 돌리고 문 앞에 있는 소은영을 바라봤는데 왠지 조금 눈에 익었다. 한편 소은영은 그날 경매에서 김하린을 편들어주던 배주원을 바로 알아봤다.“학생은 어느 반이야?”배주원이 의아해서 물었다.김하린도 문 앞의 소은영을 발견했다.소은영은 자신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며 횡설수설하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들어왔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서둘러 교실 문을 닫았다.문이 닫히는 순간 소은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좀 전에 강단 위의 지도 교수가 그녀를 못 알아본 듯싶었다.하지만 그녀는 너무 잘 안다. 그가 바로 배진 그룹 대표라는 것을!전에 분명 만났었는데 배주원은 아예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부자들 눈에 그녀와 같은 사람은 정말 이렇게 보잘것없는 존재인 걸까?교실 안에서 배주원의 농담으로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정작 소은영에겐 자신을 야유하는 웃음소리로밖에 안 들렸다.그녀는 창피하고 화나서 허둥지둥 도망쳤다.한편 김하린은 방금 소은영이 실수로 교실을 잘못 들어온 것 같지 않았다.다만 그녀는 이 일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무슨 영문인지 환생한 후 이번 생의 운명의 궤도가 빗나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김하린!”잠시 후 강단 위에서 배주원이 갑자기 외쳤다.김하린은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되물었다.“네?”“수업 끝났어. 거기서 뭐 해?”김하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그럼 또 봬요, 교수님.”김하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배주원이 그녀를 가로막고 옷 주머니에서 약을 한 통 꺼내 그녀 앞에 내밀었다.“이 특효약은 서랍장 안의 것보다 효과가 더 좋을 거야.”“네가 준비했어?”“박시언 씨가 너 대신 병가 냈어. 나도 마침 이 약을 갖고 있었거든. 몸이 아프다며? 얼른 먹
허윤아는 김하린을 차에 태우고 근처의 클럽으로 향했다.차에서 내리자 이미 누군가가 룸을 예약했다.떠들썩한 밖의 상황과 달리 룸 안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룸 문이 열리자마자 김하린은 소파에 앉은 한태형을 발견했다.그는 펑키한 옷차림에 눈빛도 살짝 차가워 보였다. 원래 날카롭게 생겼는데 지금은 야성미가 더 물씬 풍겼다.방금 허윤아의 뒤에 있던 그 차를 발견했을 때부터 김하린은 한태형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걸 알아챘었다.아니나 다를까 허윤아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룸 안에는 김하린과 한태형 두 사람만 남게 됐다.“한태형, 굳이 이런 곳에서 날 만날 필요는 없잖아?”그녀는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누군가가 이미 룸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그녀는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박시언의 아내인 그녀에게 한태형이 감히 막 나오지 못한다는 걸 아니까. 이 또한 김하린이 감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이기도 하다.“여긴 안전해. 아무도 신경 안 써.”“한씨 일가의 둘째 도련님, 밤늦게 박시언의 새신부와 데이트?! 기사가 터지는 순간 두 가문에 전부 영향을 미칠 텐데.”김하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어차피 난 이젠 악명이 자자해서 명성이 더 나빠져봤자 별 타격은 없어. 오히려 네가 걱정인데. 너희 형이 이 사실을 알면 가만 내버려 둘까?”한태형의 약점이 무엇인지 김하린은 너무 잘 안다.한태형은 아찔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김하린의 앞으로 다가가 커다란 그림자로 그녀를 뒤덮어버렸다. 한태형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아무도 감히 날 놀리지 못해. 네가 처음이야.”한태형의 중저음의 목소리가 유난히 애틋하고 감미롭게 들렸다.김하린은 눈썹을 치켰다.“한태형,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내가 언제 널 놀렸어?”“첫 만남부터 넌 의도적이었잖아. 안 그래?”“하늘에 맹세코 절대 아니야.”김하린은 무고한 표정을 지었다.“너 혹시 피해망상증이야?”“시치미 떼지 마. 거짓말하는 인간들 내 눈 절대 못 속여.”한태형이 가볍게
김하린의 얼굴에 띈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자 한태형은 극도의 쾌감을 느꼈다.하지만 곧이어 그녀가 다시 웃기 시작했다.“한태형 생각보다 너무 유치한데?”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뭐라고?”“네가 정말 그럴 배짱이 있으면 굳이 사람 시켜서 비밀리에 나랑 만났을까?”김하린은 그를 가볍게 밀치고 룸 안을 거닐었다.“여긴 카메라도 없고 밖에 엄청 시끄러워서 아무도 이 작은 방을 신경 쓰지 않아. 나랑 만난 일을 박시언이나 한태윤에게 들킬까 봐 두려운 거잖아. 그런 애가 감히 여기서 날 함부로 할 엄두는 나고?”김하린은 소파에 앉아서 사과를 한 입 먹었다.그녀도 전에 이런 장소에 드나들어서 잘 알고 있다. 이런 식의 룸은 프라이빗 등급이 모두 S급이라 거물급 인사들이 거래하기 좋은 장소로 꼽힌다. 소식이 새어나가기는커녕 파리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다.김하린은 한태형을 쳐다봤다.“태형아, 유치하게 사람 좀 그만 협박해. 나한테 전혀 안 먹혀.”지난번에 손정원에게 납치당했던 때와 비하면 이건 그냥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아니나 다를까 한태형은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김하린이 무심코 도발하자 그는 음침한 눈빛으로 살짝 돌변했다.“내가 진짜 너 못 건드릴 것 같아?”“바로 네 앞에 있잖아. 마음껏 해보라니까.”김하린은 달갑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박시언의 아내인 한, 한태형은 간이 배 밖에 튀어나올지언정 절대 그녀를 건드릴 엄두가 안 날 것이다.한참이 지나도 한태형은 역시 아무런 액션이 없었다.김하린도 더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인정해. 처음 널 봤을 때부터 한태윤 동생이란 걸 알았어. 그땐 네 주의를 끌고 싶다기보다 네가 이대로 재능을 묻히는 게 아까워서 그랬어. 그래서 괜히 널 자극하면서 A대에서 공부하라고 했을 뿐이야.”김하린의 말은 진실 반, 거짓 반이다.한태형은 그녀가 지금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곧이어 되물었다.“내 재능? 그게 뭔데?”해성 사람들은 한씨 일가 둘째 도련님이 명실상
두 형제 사이가 매우 돈독할 듯싶다.단지 외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김하린에게 속내를 들킨 영문인지 한태형은 머리를 홱 돌렸다.“나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하지 마.”“난 잘 몰라. 그냥 한번 말해본 거야.”김하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도 충분히 머물렀으니까 이만 돌아가 봐도 되겠지?”“거기 서.”한태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빨리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김하린이 물었다.“협박도 했겠다, 복수도 했겠다, 또 뭘 어쩔 건데?”협박? 복수?한태형이 그렇게 계획한 건 맞지만 정작 김하린은 이 룸에 오랜 시간 머물면서 어떠한 손해도 보지 않았다.오히려 한태형만 가슴이 답답하고 숨 막힐 따름이다!그는 기분이 잡쳤다. 여자한테 이렇게 몇 번씩이나 당하긴 처음이니까.“박시언 해성에 여자 있는 거 너도 알아?”“알지.”‘기껏해야 소은영이겠지.’그녀의 무관심한 태도에 한태형은 의아할 따름이었다.“신경 안 쓰여?”“정략결혼인데 뭘 그렇게 신경 써?”김하린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한태형, 너 지금 우리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이런 질문 하는 거야?”한태형은 코웃음 치며 쏘아붙였다.“그 남자 기댈만한 사람 아니야. 두 사람 안 어울려. 단지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알아.”그녀는 조만간 박시언과 이혼할 것이다.“조언 고마워. 먼저 갈게.”김하린은 그에게 손짓하고 문밖을 나서려 했는데 한태형이 몸에 걸친 외투를 벗어서 대뜸 그녀의 머리에 내던졌다.“여기 보는 눈 많아. 조심히 나가. 함부로 딴 사람 차에 타지 말고.”김하린은 그가 말하는 사람이 허윤아라는 걸 잘 알고 있다.허씨 일가와 한씨 일가의 관계를 진작 알고 있었기에 그녀도 허윤아의 차를 타고 왔다.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쉽게 타줄 리가 없다.김하린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신경 써주는 거라고 여길게.”한태형은 그녀를 힐긋 바라봤다.이 여자는 정말 자신감이 너무 차 넘친다.김하린은 한태형의 옷을 걸치고 클럽을 빠져
“이미 주원이더러 ID 조사하라고 했어. 결과 곧 나올 거야.”서도겸은 매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 일말의 안정감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누군지 추측 가는 사람 있어?”김하린은 미간을 구기고 머릿속에 수많은 사람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었다.“나도 몰라. 아무튼 한태형은 아닐 거야.”서도겸이 가볍게 웃었다.“네가 밀회한 사람이 한태형이었구나.”“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농담 좀 그만해.”서도겸이 말했다.“한태형이면 해결하기 쉬울 거야.”김하린은 침묵했다.실검 기사는 단지 그녀가 클럽에서 어떤 남성과 밀회했다고만 했지 상대가 누구인지 공개하지는 않았다.이는 기사를 터트린 사람도 상대 남자의 정보를 공개하고 싶지 않거나 아예 이 남자가 누군지 모른 채 그녀가 걸친 외투만으로 남자와 밀회한 거라고 추측했을 뿐일 것이다.하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크다.상대가 한태형인 걸 알면서도 감히 이런 짓을 벌이는 사람은 없으니까.김하린이 물었다.“한씨 일가에서 손 쓸까?”“내가 아는 한태윤이라면 분명 대책을 세울 거야.”제 동생이 유부녀와 스캔들에 휘말렸으니 한태윤은 무조건 조처를 해서 기사를 전부 내릴 것이다.김하린이 되물었다.“그러니까 내가 신경 안 써도 된다는 거네?”“사람은 내가 조사할 거고 박시언은 이미 대처 방안을 세웠을 거야. 기사도 한씨 일가에서 해결할 테니 이 스캔들은 너한테 딱히 영향을 미치지 않아. 안심해도 돼.”서도겸의 말을 들은 김하린은 정말 마음을 내려놓았다.오후에 모든 기사가 사라졌고 이도하가 직접 그녀를 모시러 왔다. 김하린은 얌전히 더 빌리지로 돌아갔다.좋은 소식은 이 사건이 아직 최미진의 귀에 안 들어갔다는 것이다.나쁜 소식은 김하린이 A대에 다니는 일이 곧 까발려진다는 것이다.이 바닥에서 빅이슈가 터지기만 하면 전파 속도가 엄청나니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박시언은 한창 소파에 앉아서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김하린은 그의 양미간 사이에 담긴 들끓는 분노를 바로
박시언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남자가 어떻게 이 사건의 데미지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걸 모를 리 있을까?만약 심각했다면 아침에 그녀에게 했던 전화 한 통으로 절대 끝날 리가 없겠지.김하린이 말했다.“그래. 어차피 내가 먼저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당연히 네 뜻대로 해야지.”“나랑 함께 기자회견에 나가주면 돼.”“그게 다야?”김하린은 어리둥절했다.박시언이 지금 그녀를 이용할 기회를 흔쾌히 포기하고 있다는 말인가?그는 수중의 신문을 내려놓았다.“다정한 부부 사이로 지내야 해. 네 생각처럼 쉬운 일 아니야.”박시언의 표정을 본 그녀는 곧바로 상대의 마음을 캐치했다.하긴,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정한 행동을 하는 건 실로 역겨운 일이니까.이러니까 전생에 박시언도 그녀와 함께 각종 행사에 참석하는 걸 줄곧 거부했겠지.그녀와 다정한 부부 사이로 보이는 것은 박시언에게 있어 너무 힘든 일이다.“조건 없이 다 너한테 맞춰줄게.”말을 마친 김하린은 후회가 밀려왔다.박시언은 유미란에게 단아하고 우아한 드레스를 준비하라고 시켰다. 순백의 화이트 색상은 저도 몰래 소은영을 떠올리게 했다.전생에 이 드레스는 아마 소은영이 입고 나갔을 것이다.박시언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소은영을 위해 특별히 맞춤 제작을 해주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김하린이 떡하니 이 드레스를 입고 있다.“난 이거 별로야.”“참아.”박시언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네가 클럽이나 드나든다는 이미지를 지우려면 반드시 우아하고 순수한 드레스를 입고 나가야 해.”김하린은 입을 꾹 다물고 마지못해 드레스를 입었다.이번 기자회견은 모건 그룹에서 새로 오픈한 부동산 매물 판매를 홍보하기 위해 개최한 행사였다. 유명 언론사들은 전부 자리에 참석했다.김하린은 박시언을 따라 차에서 내린 후 그의 팔짱을 끼고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완벽한 미소를 지었다. 뭇사람들 앞에서 둘은 한없이 애틋한 부부 사이란 걸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한편 가까운 곳에서 소은영은 평범하디 평범한 샤넬 원피스를 입고
그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무심코 걱정해주듯 그녀에게 말했다.“나 긴장 안 해.”김하린은 여러 카메라를 마주하고 있어도 아주 자연스럽게 대응했다.박시언은 그녀가 전에 이런 자리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전생의 김하린이 그와 거리를 좁히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아직 모를 것이다.아쉽게도 전생에 그녀가 죽은 후에도 박시언은 이 여자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아래에 있는 언론매체들이 저마다 카메라를 들었다. 요즘 온라인 상으로 두 사람의 기사가 떠돌고 있으니 적잖은 매체들이 이 기회를 빌려 타이틀 기사를 낚아채고 싶었다.“이번에 저희 모건 그룹에서 개발한 새 아파트는 A, B 구역으로 나뉘는데 큰 평수는 A 구역, 작은 평수는 B 구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주변에 대형 쇼핑몰과 초등학교, 중학교가 있으며 지하철역과 버스역도 도보로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단지의 녹화는 최상급의 정원 설계를 거쳤으며 방 구조는 집의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아늑한 가족형 아파트에 주력하고 있습니다.”여기까지 말한 박시언은 김하린의 손을 꼭 잡았다.김하린도 적절한 타이밍에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이 장면은 맨 뒷줄에 앉은 소은영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충격과 고통으로 다가왔다.곧이어 기자들의 질문 순서가 다가왔다.모 기자가 대뜸 입을 열었다.“대표님, 최근 온라인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 이 기회를 빌려서 제대로 대답해주실 수 있을까요?”이 질문을 들은 순간 김하린은 바로 알아챘다. 오늘 기자회견은 박시언이 직접 마련한 자리였다.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무모하게 첫 질문부터 이런 민감한 문제를 내던질까?“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저는 제 아내의 사생활에 전혀 간섭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아내를 충분히 믿으니까요.”말을 마친 박시언이 김하린을 쳐다봤다.김하린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박시언은 지금 완벽한 남편 이미지를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김하린은 카메라를 훑어보다가 곁눈질로 그만 구석에 앉은 소은영을 발견해버렸다.박시
“대표님, 언니, 방금 말씀 너무 잘하셨어요. 정말 많이 배웠어요.”김하린은 소은영의 말을 듣고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박시언과 애정을 과시했는데 소은영이 그렇게 말하자 결국 한차례 연기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박시언과 그녀는 서로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여기 보는 눈이 많으니까 이만 학교로 돌아가.”김하린은 박시언이 차갑게 말하자 조금 놀랐다.예전의 박시언은 소은영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다.오늘 왜 저러지, 약이라도 잘못 먹었나?곧 김하린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방금 전 단상 아래에 있던 기자의 질문 때문에 조심스러운 거겠지.박시언의 말을 들은 소은영은 눈가에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지난번 생일날 밤부터 박시언은 그녀를 차갑게 대했고 먼저 전화를 걸어도 별 반응이 없었다.소은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이제 돌아갈게요.”소은영의 실망한 표정을 보며 박시언은 다소 후회가 밀려왔다.너무 퉁명스럽게 얘기했나?돌아서는 소은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김하린이 말했다.“여자들 마음이 얼마나 약한데, 달래고 싶으면 얼른 가봐.”“가서 달래라고?”박시언은 얼굴을 의아한 어투로 말했다.“그래도 당신이 후원해 준 학생인데 평소에는 그렇게 잘 대해주다가 갑자기 이렇게 차갑게 대하니 당연히 서운할 수밖에 없지.”박시언은 입술을 다물었다.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김하린이 말했다.“지금 안 가면 늦어. 이 비서님 운전을 빠르게 하시거든.”“그렇게 자극할 필요 없어.”박시언은 김하린의 손을 잡고 덤덤하게 말했다.“사모님은 너니까.”김하린은 당황했고 박시언은 이미 그녀의 손을 이끌고 행사장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박시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몇 년 전 박시언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손을 이렇게 잡고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다.박시언은 김씨 가문의 개구쟁이 열두 살 소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당시 그는 학교에 다니는 열일곱 살 소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