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남편이 문득 내게 물었다. 와이어 없는 브라가 더 편하냐고 뜬금없이 물었다. 이 남자가 드디어 센스가 생겼나 보다. 하지만 다음날, 비서가 허둥지둥 달려오더니 내가 금방 받은 택배를 낚아채며 주소를 잘못 적었다고 핑계를 둘러댔다. 그리고 그날 밤, 유시아가 인스타그램에 피드를 하나 올렸다. [남자친구가 사준 선물, 예쁘나요?] 아련한 분위기의 호텔 거울 속 셀카였는데 리본으로 장식된 정교한 속옷 선물 상자가 그녀의 손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이 남자는 뒤늦게 센스가 생긴 게 아니라 단지 날 위해 성숙해지려는 의지가 없었을 뿐이었다. 나는 피드에 하트를 누르고 캡처해서 남편에게 보냈다. [세트로 사면 20% 할인받을 수 있어. 살림살이 진짜 엉망이네.] ...
더 보기인명피해까지 입게 되자 둘러싸인 기자들도 재빨리 촬영해서 SNS에 기사를 올렸다.그날 실검 순위는 난리도 아니었다. 유시아의 여신 이미지는 하루 사이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나락했고 이를 지켜보는 네티즌들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흥미진진할 따름이었다.백선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대스타가 투표 조작에 댓글 알바, 찌라시 배포까지 한 방에 터졌으니 청순했던 여신 이미지는 일락 천장이 되어버렸다.일부 네티즌들은 이 기세에 힘입어 유시아가 전에 신인들을 괴롭힌 증거들까지 찾아내게 되었는데 무너진 담에 뭇 사람들이 달려든다고 한때 유시아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연예인들도 하나둘씩 나와서 그녀의 악행을 까발렸다.나와 이주리는 강 건너 불구경만 할 뿐이었다.문득 이주리가 내게 은가영 면회를 하러 가겠냐고 물었다. 고의상해죄로 며칠간 감방에 갇혔으니 제대로 먹고 자기 힘들 거라면서 말이다.나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쳐다봤다.“은가영이 나랑 뭔 상관이지? 난 이젠 한유진 아니야. 엄연한 유진이라고.”이 사건은 일주일 동안 SNS를 뜨겁게 달구었고 좀처럼 종식될 기미가 안 보였다.이때 뜻밖에도 은지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유진아, 제발 시아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내가 왜?”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그래도 우리 한때 부부였잖아. 내 면을 봐서라도...”이에 내가 차갑게 되물었다.“너도 체면이란 게 있었니? 얼어 죽을! 너만 아니었으면 난 진작 더 잘 됐을 거야. 그해 유시아가 SNS에 나에 관한 루머를 퍼뜨리고 가영이가 댓글 알바 시켜서 나 악플 테러 당한 거 다 잊었어? 왜 유시아한테는 나 한 번만 봐주라는 말 안 했어?”“넌 또 내게 호르몬 약을 타고 투표 조작으로 여우주연상 기회까지 앗아갔어. 이 모든 게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단 한 번도 날 놓아줄 생각은 안 했던 거니?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12년 동안 우리 가족을 위해서 묵묵히 헌신만 해왔어. 그래야만 네가 안심하고 회사 돌볼 테니까. 근데 정작 내게
그는 내가 사무치게 그립고 그동안 내가 없는 나날이 너무 괴롭다고 했다. 매일 밤 집에 돌아오면 텅 빈 방 안 곳곳에 우리의 추억들로 가득 차서 온통 내 생각뿐이라며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했다.한편 나는 담담하게 듣고 있다가 그에게 물었다.“네가 약 탄 거지?”실은 지난번에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 의사는 내가 호르몬 약을 먹어서 살이 안 빠지는 거라고 했었다. 나중에 그 집에서 나오니 나도 금세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이 이토록 비겁한 짓을 벌이다니. 이주리의 말대로 은지호는 ‘여우주연상을 받은 여배우’라는 나의 타이틀을 앗아갔고 이젠 또 내 몸매까지 망치려고 든다. 이게 대체 사랑이긴 한 걸까?그 시각 은지호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나지막이 말했다.“사랑하지 당연히. 근데 또 그만큼 네가 미워. 화려한 네 모습이 좋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빛나는 게 싫어. 그러다가 정작 아무런 쓸모가 없는 널 보고 있자니 또 화가 나네...”이에 나는 차갑게 쏘아붙였다.“그래서 네 사랑은 이기적이면서도 비겁하다는 거야.”그 뒤로 은지호는 아주 긴 시간 동안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다만 그의 딸 가영이가 또 있었지. 내가 이걸 깜빡 잊고 살았다.그날 나와 이주리는 여느 이브닝 파티에 참석했다.그런데 회사 로비를 나서자마자 가영이가 글쎄 내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밖에 서서 큰소리로 외쳐댔다.“이 사람 우리 엄마예요. 우리 엄마라고요!”나는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은가영에게 들켰다. 아이는 대뜸 내게 달려와 옷소매를 잡고 엄마라고 외치기 시작했다.주위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나는 은가영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누구시죠? 왜 이러세요?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엄마 맞잖아! 나 엄마 사진 있어!”아이는 나의 젊을 때 사진을 꺼내 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계속 거짓말하려고? 칫, 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한 번 용서할게. 엄마 팬클럽 있지? 내가 거기 운영자 하면 안 돼? 내가 직접 엄마네 회사랑 스케줄
곧이어 다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헐 대박! 완전 예뻐.”“로맨스 여주인공 각이잖아.”“대체 누구지? 우리나라에 이렇게 예쁜 배우가 있었어?”“됐다, 나 갈아탈래. 오늘부터 여우 캐릭터 이분 입덕할 거야!”의논이 점점 커지자 유시아를 촬영하러 온 팬카페 운영자들도 대충 찍고는 전부 내게 카메라를 돌렸다.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결국 경호원들이 질서 유지에 나섰다.문득 나는 인파들 속에서 은가영을 발견했다. 아이는 뚱뚱한 몸으로 [유시아 작품 대박]이라는 팻말을 든 채 사람들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곧이어 나를 발견한 은가영은 두 눈을 반짝이더니 뚱뚱한 몸을 뒤뚱거리며 가까이 다가오려 했다.“혹시 이름이 뭐예요? 신인인가요? 팬클럽은 있어요?”나는 이런 가영이가 너무 한심하고 우스웠다. 눈앞에 서 있는 여자가 본인 엄마란 걸 알게 되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하긴, 종일 나를 비방하는 사진만 봐왔으니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했다.은가영은 내게 사인받으려고 사람들을 힘껏 밀치다가 몇몇 여자애들에게 욕을 먹고 말았다.결국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고 은가영은 한바탕 두들겨 맞은 후 바닥을 나뒹굴었다. 경호원들이 달려와서야 겨우 그녀를 구했다.이때 인기척을 느낀 유시아가 재빨리 달려왔다.본인 팬들이 전부 내게 둘러싸여 사인을 받으려고 하는 광경에 그녀는 얼굴과 목까지 다 벌겋게 달아올랐다.“신인 따위가 왜 이렇게 시건방져? 다들 촬영하는 거 안 보여? 어디서 잘난 척인데? 촬영에 방해 주면 네가 책임질 거야?”그녀는 다짜고짜 내게 연예인 병이 걸렸다는 죄명을 뒤집어씌웠다.만약 진짜 유시아의 꼼수대로 흘러간다면 금방 데뷔한 신인인 나는 이 자리에서 매장당할 게 뻔하다.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죄송해요. 선배 말대로 저는 겨우 밥벌이나 하는 신인이에요. 제가 거슬린다면 지금 바로 갈게요. 화내지 마세요, 선배.”나는 매우 비천하면서도 간절한 말투로 말했다.이에 옆에 있던 소녀들이 버럭 화냈다.“고사 지내는
두 달 뒤.나는 드디어 전성기 몸매로 돌아왔고 심지어 그때보다 더 완벽해졌다. 얼굴은 아무런 변화가 없고 전보다 훨씬 성숙하고 요염해진 모습으로 거듭났다.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전에 봐둔 그 대본이 드디어 나에게 차려졌다.마침 유시아도 같은 날 고사를 지냈다.나는 이번에 마스크를 벗고 당당하게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헐, 이게 누구야?”“너무 예뻐. 설마 이번 작품의 출연자라고?! 이렇게 예쁜 배우가 여주가 아니란 게 말이 돼?”“네가 뭘 알아? 요즘은 돈만 밀어주면 못생긴 것들도 죄다 주인공 한다고 난리잖아. 진짜 예쁘고 연기 잘하는 배우들은 좋은 작품 만나기 어렵다니까.”“야, 잠깐만. 왜 꼭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지? 왜 이렇게 낯익은 거야?”“낯익긴 개뿔. 예쁘면 다 친한 척이네 이거.”이때 내가 당당한 걸음으로 감독에게 다가갔다.“감독님, 안녕하세요. 유진이에요.”안에는 감독뿐만 아니라 유시아와 은지호 두 사람도 있었다.다들 고사 준비에 한창이었는데 나를 본 순간 어쩔 바를 몰랐다.유시아는 아예 멍하니 넋을 놓고 말았다. 이미 나를 알아본 게 뻔했다. 내 자리를 꿰차려는 의도였기에 당연히 조강지처인 나에 관해 철저한 연구를 마쳤겠지.한편 은지호는 흠칫 놀라다가 눈가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내게 다가왔고 이를 본 유시아가 재빨리 가로챘다.“오빠, 이제 뭐가 더 필요한지 봐봐.”은지호는 나를 집어삼킬 듯이 뚫어지라 쳐다봤다.다만 나는 눈길조차 안 주고 계속 감독에게 말했다.“지금 가서 옷 갈아입을까요?”“그래, 가봐. 마지막 씬만 남았어.”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돌아서서 자리를 떠날 때 뒤에서 갑자기 성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은지호는 대뜸 나의 팔을 붙잡고 울부짖었다.“한유진, 너일 줄 알았어. 전성기 때로 돌아왔네. 아니, 그때보다 훨씬 예뻐졌어! 요즘 어디서 지내? 왜 집에 안 오는 거야? 전화는 또 왜 안 받는 건데?”“오빠!”이때 유시아가 쫓아오며 나를 째려봤다.“
촬영 현장에 온 후에야 나는 그녀가 말한 서프라이즈가 뭔지 알게 됐다.이 브랜드 모델이 유시아였던 것이다.내가 왔을 때 유시아는 한창 흔들의자에 앉아있었고 은지호는 그녀 옆에서 머리를 푹 숙이고 휴대폰만 만져댔다.잠시 후 내 휴대폰이 울렸는데 은지호한테서 온 메시지였다.[오늘 내 생일이야.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케이크 주문했어. 우리 얘기 좀 해.]나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머리를 들었다.이때 유시아가 은지호를 잡아당기며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둘은 주변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따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꼭 달라붙어 있었다.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실소를 터트리고는 메시지를 지우고 휴대폰 전원까지 꺼버렸다.사진작가가 우리더러 옷을 갈아입고 나오라고 했다. 다 갈아입고 나오자 현장에서 누군가가 휘파람을 불어댔다.그 소리에 우리 두 사람 모두 머리를 들었다.은지호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아예 내 몸에 시선이 꽂혀버렸다.한편 나는 얼굴을 반쯤 가린 가면을 쓰고 있어서 그가 알아볼 걱정은 전혀 없었다.거울에 비친 내 몸매는 완벽 그 자체였다. 늘씬한 기럭지에 탄탄한 근육, 잘록한 허리와 날씬한 다리가 여러 모델들 사이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존재였다.은지호는 여전히 내게 시선이 고정됐다. 나는 그런 그를 흘겨보며 미간을 살짝 구겼다.이때 유시아가 갑자기 우리 사이를 가로막으며 애교 조로 속삭였다.“오빠, 얘 신경 쓰지 마.”누가 할 소리?! 내가 그냥 스쳐 지나가려 할 때 이 남자가 덥석 손목을 잡았다.“한유진, 너 맞지? 우리가 12년을 함께 잤는데 내가 널 못 알아볼까 봐?”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젠 그와의 접촉이 이토록 역겨워졌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나는 대뜸 큰 소리로 외쳤다.“으악, 이거 놔! 뭐야 이 사람!!”다들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나는 손을 뿌리치며 눈물을 터뜨렸다.“스폰서가 웬 말이야?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 그쪽은 유시아랑 잘 어울려. 둘이 딱이겠네!”나는 노골적인 말투로 둘을 비꼬았다.
기사 하단에 사진 한 장 덧붙였는데 유시아가 은가영의 손을 잡고 은씨 저택으로 들어가는 장면이었다.사진을 본 이주리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진짜 뻔뻔스럽네. 기자들 매수했잖아. 다 내가 아는 기자들이야. 대놓고 널 집에서 내쫓는 격이네 뭘. 유진이 넌 대체 이혼을 한 거니 안 한 거니?”이 일만 언급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나도 당연히 이혼하고 싶고 빈 몸으로 나가겠다고까지 말했지만 은지호가 기어코 사인을 안 해준다. 게다가 하루가 멀다 하게 전화해서 애원했다가 협박했다가 쳇바퀴 돌 듯이 반복하는데 난 또 이혼 때문에 그 자식 번호를 차단할 수조차 없었다.정말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자리를 내주겠으니 두 년놈더러 당당하게 함께하라고 하는데 대체 왜 사인을 안 하는 걸까?역시 양반은 못 된다고 은지호한테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나는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전화를 받았다.엄청 시끄러운 걸 보니 회사인 듯싶었다.“기사 봤어? 그거 다 오해야. 가영이가 아파서 시아가 집까지 바래다준 거야.”이 말을 들은 나는 어이가 없었다.“해명할 필요 없어. 관심 없으니까. 대체 언제 이혼합의서에 사인할 거야?”은지호는 한참 침묵하다가 속상한 어투로 말했다.“그것 말곤 나한테 더 할 얘기 없어?”“네가 없는 동안 가영이가 다이어트 한다면서 밥도 잘 안 먹고 매일 밤늦게까지 휴대폰에 컴퓨터만 놀고 있어. 애가 입만 열면 험한 말을 내뱉고 있어. 가영이 네 딸이잖아. 진짜 아예 걱정 안 되는 거야?”“내 딸 아니고 네 딸이지. 이혼합의서에 양육권 포기하겠다고 똑똑히 적어뒀어.”“한유진! 대체 언제까지 고집 피울래? 몇 번을 말해? 시아는 단지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일 뿐이야. 나 걔랑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왜 사람 말을 안 믿어?!”이에 내가 덥석 말을 잘랐다.“은지호 대표님, 당신 딸은 유시아 말을 더 잘 들으니 앞으론 더 이상 나한테 전화하지 마.”수화기 너머로 물건을 깨부수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나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그랬더니
아주 잠깐 내 삶이 매우 한적해졌다.매일 아침 일어나서 집 청소를 하고 옷을 빨고 음식을 준비하던 데로부터 조깅에 헬스, 영화 보기, 대사 연습으로 바뀌었다.실은 내가 스스로에게 매우 가혹한 타입이다. 이전에 영화 촬영이 있으면 단기간에 20킬로를 찌웠다가 또다시 30킬로를 빼는 수준이었다. 엄청 몸 상하는 일이더라도 연기를 위해서라면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다.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나는 일주일 내에 무려 4킬로를 뺐고 이를 본 이주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주리는 나를 위해 연기 선생님을 모셔왔는데 나의 피나는 노력과 수고에 선생님도 감탄을 연발했다. 수많은 훌륭한 배우를 양성했지만 나처럼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내가 왜 이렇게까지 할까? 이제 더는 물러설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야 잊혀진 그 세월을 다시 걷잡을 수가 있다.둘째 주, 나는 또 5킬로를 더 감량했다.동그스름했던 얼굴이 서서히 옛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나는 하루에 영화 5편을 보면서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를 배웠다. 곧이어 나는 영화의 세계에 흠뻑 빠져버리고 몸과 마음이 여느 때보다 충실해지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결국 나는 사람 자체가 180도로 변했고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이주리도 이런 나를 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살 엄청 빠졌네.”그녀는 어느덧 근육이 생긴 내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아주 좋아. 마침 오늘 좋은 소식 하나 가져왔어.”그녀는 품에서 대본을 한 권 꺼내더니 내 앞으로 쓱 내밀었다.“유시아가 새로 받은 대본인데 스케일이 엄청 화려해. 감독도 매우 대단하신 분이야.”나는 경이로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아직 주인공 역할까진 힘들고 일단 서브 여주 쟁취했어.”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눈길로 내게 손을 까딱거렸다.“어때? 자신 있어? 유시아 한번 압도해볼래? 서브의 반란을 일으켜야지?!”순간 나는 온몸에 뜨거운 피가 들끓었다.“그럼 우선 가명 쓸게.”나는 옅
나를 본 이주리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변해버린 내 몸매에 한 번 놀라고 상처투성이가 된 몰골에 또 한 번 놀랐다.그녀는 한참 후에야 말을 이었다.“너 지금 이대론 절대 안 돼. 당장 다이어트 시작해. 반년 시간 줄게. 그사이에 성공 못하면 그땐 그냥 다른 데 알아봐.”저녁에 집에 돌아온 후.나를 맞이한 건 따뜻한 문안과 위로가 아니라 딸아이의 앙칼진 욕설이었다.“감히 시아 아줌마를 때려? 엄만 결국 자업자득이야! 시아 아줌마 옆에 서 있으니 더 돼지 같잖아. 으악, 짜증 나! 대체 왜 우리 엄마인 건데?!”아이는 내게 휴대폰을 내던졌다. 그 위에는 자극적인 기사 타이틀이 잔뜩 박혀 있었다.[한유진 몸매 망가져, 돼지가 된 그녀.][은지호, 꿋꿋이 사랑을 지킨 남자. 한유진, 질투에 눈멀어 무고한 사람에게 주먹질.][배려 깊은 유시아, 한물간 한유진.]SNS에 온통 나에 관한 저격 글로 가득 찼다.다만 이런 기사들은 은지호의 말 한마디에 금세 다 내릴 수 있다.대체 왜 방관하는 걸까? 유시아를 위해 분풀이를 해주려는 거겠지.나는 은가영에게 휴대폰을 내던지며 차갑게 말했다.“그렇게 내연녀 딸이 되고 싶으면 이 집에서 나가. 대문 활짝 열려 있으니까 아무도 너 안 말려.”순간 은가영은 멍하니 넋을 놓고 말았다.그 시각 나는 문을 박차고 침실에 들어가서 캐리어에 계속 옷을 집어넣었다. 다만 은지호가 선물한 물건은 단 한 개도 안 챙겼다.정리를 마친 후 나는 12년 동안 지냈던 이 집을 마지막으로 쭉 둘러보았다. 나의 모든 추억이 깃든 이 집, 내 인생의 3분의 1을 함께한 이 집, 12년이란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난 집이었다.이때 옆방에서 딸아이가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나는 덤덤하게 서 있을 뿐 꿈쩍하지 않았다.아이는 한참 울다가 나의 방 문 앞으로 다가와 노크하며 외쳤다.“나 속 쓰려. 얼른 약 줘. 너무 아프단 말이야.”나는 여전히 듣는 척도 안 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은가영은 점점 더 세게 울었고 울먹이는 와중에 유시아
나는 고개를 숙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려 시야를 다 가렸다.“그래, 내가 사악해. 유부남이랑 얽혀있는 네 그 첫사랑이야말로 가장 순결하지. 쓰레기 같은 두 사람 평생 잘 먹고 잘살아.”밖에 있던 은지호가 버럭 화냈다. 내가 그의 여신을 능멸했으니까.그러든 말든 나는 이어폰을 끼고 이주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전에 내 매니저였고 또한 나의 은퇴를 가장 반대하는 일인이었다. 나중에 홀로 회사를 차렸고 현재는 인기 있는 젊은 아티스트가 몇 명 소속되어 있다.“유진아, 넌 이젠 옛날 같지가 않아. 이것 하나만은 알아둬야 해.”“알지 나도. 첫 3년은 출연료 일절 안 받을게. 연기만 할 수 있게 도와줘.”이주리는 당연히 이런 유혹을 물리칠 수가 없어 흔쾌히 동의했다. 나는 다음날 오후에 그녀 회사로 찾아가서 상세하게 의논하기로 약속을 잡았다.다음날 이른 아침.은가영이 또다시 내 문을 쾅쾅 두드렸다.“진짜 안 빨았네?! 당신이 그러고도 엄마야?”나는 한창 짐 정리를 하다가 차갑게 쏘아붙였다.“포장해서 시아 회사에 택배로 보내. 걔가 손빨래로 아주 깨끗이 씻어줄 거야.”순간 은가영은 말문이 막혔다.“시아 아줌마가 우리 엄마였다면 당신보다 훨씬 책임감 있고 나랑도 잘 맞았을 거야.”말을 마친 아이는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한편 나는 이상하게도 오늘은 이런 말을 듣고 있어도 전혀 속상하지가 않았다.잠시 후 은지호가 깨나서 늘 그랬듯 아침 먹으러 주방에 나왔는데 식탁이 텅 비고 매일 아침 준비했던 따뜻한 우유마저도 없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내 방 문을 두드렸다.“한유진,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적당히 해라!”나는 그를 거들떠보기도 귀찮았다. 한참 문을 두드리던 은지호는 자리를 떠나더니 또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왔다.“내 정장도 안 다리고 넥타이도 맞춰놓지 않았어. 넥타이핀은 또 어디 있는 거야?”“구두도 안 닦았잖아!”나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이 인간도 끝내 인내심이 고갈됐다.“한유진, 편하게
“사모님, 제가 그만 실수로 주소를 잘못 적었어요.”은지호의 비서 정현서가 난감한 표정으로 해명하며 내 손에 쥔 택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아직 안 열어보셨죠?”나는 수중의 박스를 힐긋 살펴보았다. 제품명이 적혀있지 않았지만 촉감이 아주 부드러웠다. 이 브랜드 제품을 사 본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그런 촉감이었다.결국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네, 안 열어봤으니까 가져가세요.”정현서는 재빨리 택배를 챙기고 내게 사과한 후 자리를 떠났다.어젯밤에 은지호는 갑자기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자기야, 여자들은 보통 와이어 없는 브라가 더 편해?”그때까지만 해도 이 인간에 내게 선물하려는 줄 알고 그를 위해 덥힌 우유를 내려놓으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었다.“사이즈는 알아?”나는 보통 여자들과 사이즈가 달라서 평상시에 무조건 매장에 가서 직접 골라야 한다.그건 그렇고 결혼한 지 몇 년이 됐지만 은지호는 단 한 번도 내게 선물을 사준 적이 없다. 기념일 때마다 돈을 주면서 마음에 드는 걸 사라고 했을 뿐이다.인간이 어쩌다 철든 모습에 나는 속옷의 브랜드와 디자인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늘려놨고 사이즈를 어떻게 고르는지도 알려줬다. 심지어 그의 베개 옆에 일부러 속옷을 한 벌 남겨두기까지 했다.마침 다음날이 내 생일인지라 그의 선물만 학수고대했다.드디어 이튿날에 택배를 하나 받았는데 택배원과 은지호의 비서가 나란히 들어온 것이다....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끝내 허무한 이 마음을 다독였다. 혹시 사이즈를 잘못 골랐을 수도 있으니, 처음 속옷 선물을 하는 남편이기에 서투를 수가 있다고 마음을 달랬다.다만 오후가 다 돼도 은지호한테서 아무런 메시지가 없었다.되레 생뚱맞은 소식만 얻게 되었는데...유시아가 유방 수술로 백선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한다.백선의 여우주연상 유력 후보인 그녀가 참석하지 못한다니, 순간 이 기사가 SNS를 발칵 뒤집어놓았다.내가 기사를 볼 때 우리 딸 가영이는 한창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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