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심지안을 한 번 흘끗 보고는 냉정히 시선을 거두었다.심지안은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진유진에게 말했다.“너 먼저 돌아가. 난 가서 저 사람의 연락처를 알아낼 거야.”진유진이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저 사람에게 강우석의 일을 얘기라도 하려고?”“내가 직접 처단하는 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혼내는 것보다 훨씬 더 통쾌하지 않겠어?”심지안이 취기가 올라 몽롱해진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진유진은 영문을 몰라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자리에 돌아가 앉은 뒤에야 그녀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깨달았다.진유진이 보기엔 강우석의 삼촌도 멋있긴 하지만 분명 그와 마주 앉아있는 이름 모를 남자가 더 매력적이었다. 하여 그녀는 심지안이 강우석 그 쓰레기 자식에게 대한 복수 때문에 눈이 멀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심지안은 술기운을 빌려 질끈 묶었던 머리를 휘리릭 풀어헤치고는 술 한 잔을 들고 남자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그때, 돌연 탁자 위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곧바로 핸드폰을 쥐고 심지안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 밖으로 나가버렸다.심지안은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이렇게 간다고? 그녀가 아직 입을 떼지도 않았는데?그녀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망설이고 있을 때, 순간 머리에 강우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어 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한 발 한 발 남자의 뒤를 따라나섰다.남자는 술집에서 나간 뒤 롤스로이스 차에 올라탔다. 심지안은 차 옆으로 다가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차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이어 창문이 스르륵 내려왔고 뒷좌석에서 무표정하고도 오만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바깥의 조명은 술집보다 밝아 그의 얼굴을 더 또렷이 볼 수 있었다. 흠잡을 곳 없는 준수한 이목구비에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 그야말로 현실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완벽 그 자체의 외모였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심지안이 입을 열었다.“핸드폰 잠깐 빌릴 수 있을까요? 제 핸드폰은
심지안은 환각이라도 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남자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결심이 선 듯 눈을 반짝이며 결연히 말했다.“서로 숨기지 않는 게 좋겠네요. 전 성 불감증이에요.”오늘 목격했던 그 광경을 생각하니 그쪽으론 트라우마까지 생겨버린 심지안이었다.남자가 조금 놀란 듯 눈빛이 흔들렸다. 이어 그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심지안은 허리를 곧추 세우고는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히 그의 시선을 받아들였다.이어 남자가 말했다.“타요.”차에 앉은 심지안은 흥분감을 애써 누르며 진유진에게 문자를 보냈다.「유진아, 날 기다릴 필요 없어. 나 강우석의 삼촌이랑 부모님을 뵈러 가는 중이야!」「??? 역시 넌 대단해. 속도가 빠르다 못해 로켓도 따라잡겠는걸?」병원 VIP 병실.성수광이 침대에 누워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흥분이 가득 섞인 얼굴로 심지안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다.“이 아가씨는...”남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심지안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할아버님, 전 손자분의 여자친구예요. 오늘 너무 급하게 오느라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어요.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성수광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저놈의 여자친구라고요? 난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사실 저희 두 사람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요. 또한 제가 일 때문에 출장도 몇 번 다녀와야 했던 탓에 뵙고 인사드릴 기회가 없었어요.”심지안의 예의 있고 애교 섞인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호감을 느끼게 만들었다.“조금 전 함께 밖에서 밥을 먹다가 할아버님께서 몸이 편찮으시다는 걸 알았어요. 너무 늦게 찾아와 죄송해요.”깔끔하게 뻗은 눈썹, 별이라도 박아놓은 듯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백옥같이 하얗고 투명한 피부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단번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 그리고 고급스러운 트렌치코트 아래로 드러난 가늘고 매끈한 발목까지, 한눈에 봐
은옥매가 심지안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등을 톡톡 두드리고는 위로하는 척 말했다.“지안아, 화내지 마. 내가 이미 네 언니를 혼내줬어. 언니로서 응당 동생에게 양보해야지.”“지안아, 미안해. 나 내일 바로 우석이한테 가서 약혼을 취소하자고 말할게.”심연아는 연민을 잔뜩 불러일으키는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상처받은 얼굴로 말했다.“감정이라는 거 마음대로 할 순 없지만 넌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잖아. 네 언니인 내가 그 사람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안 되는 거였어...”심지안은 그녀의 역겨운 말에 분노가 치밀어올랐다.“가까이 지냈다는 건 침대에서 함께 뒹굴 정도로 가까이란 뜻이야?”“너 그게 무슨 막말이야!”심전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약혼은 예정대로 진행할 거야. 청첩장도 다 보냈는데 취소하라고? 난 그런 창피는 당할 수 없어.”“제 말은 모두 사실이에요!”심지안이 눈물이 가득 차올라 붉어진 눈으로 은옥매를 가리키며 한글자 한글자 내뱉었다.“심연아도 저 사람처럼 다른 여자의 남편을 빼앗는 취미가 있어요. 대체 왜 저런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데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심전웅이 심지안의 뺨을 후려갈겼다.감당할 수 없는 힘의 충격에 심지안은 머리에서 윙윙 소리까지 들려왔다.그 모습을 본 은옥매의 눈동자에 잠시 흐뭇함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감추고는 당황스러운 척 심전웅을 막았다.“이러지 말고 말로 하세요!”“저런 애를 감싸긴 왜 감싸.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 집에서 얌전히 있으려면 있고 아니면 당장 꺼져. 죽은 네 엄마처럼 보기만 해도 짜증 나니까.”심전웅은 분노에 씩씩거리며 일그러진 표정으로 심지안을 노려보고 있었다.그의 눈빛은 딸을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아닌 한 맺힌 원수를 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지안이는 아직 어리니까 당신이 이해해요. 당신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요. 어서 나랑 같이 들어가서 자요.”은옥매는 심연아에게 눈짓하며 말했다.“지안이를 잘 위로해줘.”
다음날 오후.심전웅 등 집안사람들이 모두 외출하자 심지안은 신분증을 챙긴 뒤 짐을 싸 들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캐리어를 본 성연신이 의아한 듯 물었다.“이사하려고요?”심지안이 말했다.“결혼해요, 우리.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전 지금 잠시 머무를 곳이 필요해요.”“그리고요?”“없어요.”성연신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나한테 돈 외 다른 것은 바라지도 말아요.”일반적으로 여자에겐 낭만적인 결혼 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다. 그녀가 이렇게 쉽게 승낙한 건 분명 만족스러울 정도의 이익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그녀의 말을 성연신은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심지안은 그의 속내를 파악하기라도 한 듯 빙그레 웃음 지으며 말했다.“성연신 씨, 자고로 백 퍼센트란 없는 법이에요. 또 알아요? 연신 씨가 날 사랑하게 될지?”그녀는 운이 나빠 쓰레기 같은 남자를 만난 것일 뿐, 그건 그녀를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어디서든 퀸카 대접을 받는 인기 만점이던 그녀였다!성연신은 눈을 가늘게 치켜뜨고는 눈앞의 여자를 쳐다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요. 뭐 자신감이 있는 건 좋은 일이죠.”20분 뒤.혼인신고를 마친 심지안의 눈동자엔 복잡함이 잔뜩 어려있었다. 어제의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정말이지 자신이 저질러 놓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성연신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무슨 일 있으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해요.”“알겠어요.”심지안이 머뭇거리며 말했다.“저기, 제가 머무를 곳은 어디에 있나요?”“운전기사가 데려다줄 거예요.”말을 마친 성연신은 손목시계를 슥 보고는 다른 차를 타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심지안 씨, 제가 짐을 차에 실어드릴게요.”심지안의 눈앞에 건장한 몸집의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한눈에 어
심지안의 당황스러움을 눈치챈 운전기사가 설명했다.“도련님께선 귀국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십니다. 때문에 본가를 제외하고 소유한 집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만약 아가씨가 불편하시다면 제가 도련님에게 말씀드릴게요.”“전 괜찮아요!”그녀는 잠시 강우석의 삼촌이 오랫동안 해외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다른 부잣집 도련님들과는 달리 집이 하나밖에 없다는 건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일 것이다.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다 보면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오후 다섯 시 반, 모든 짐 정리를 마쳤다.그녀는 거실을 쭉 둘러보았다. 별장의 전체적인 인테리어 스타일은 심플 그 자체였는데 반드시 필요한 가구들과 전자제품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어 썰렁한 느낌까지 들었다. 운전기사의 말대로 확실히 최근에 이사를 한 것 같았다.심지안의 시선이 이어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여니 안에 꽉 채워져 있는 신선한 식자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기 시작했다.아내로서 일하고 들어온 남편에게 따뜻한 음식을 준비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30분 뒤, 성연신이 집에 돌아왔다.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심지안은 바쁜 와중에도 고개를 돌려 성연신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었는데 넓은 어깨와 긴 다리, 곧게 뻗은 몸선이 어우러져 만든 정장핏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비현실적인 남자의 모습에 눈길을 사로잡힌 심지안은 저도 모르게 몇 번이나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올라가서 쉬어요. 음식이 다 준비되면 부를게요.”성연신은 앞치마를 입고 반달웃음을 지어 보이는 여자를 보며 덤덤히 “네.” 한마디 대답하고는 서재로 올라갔다. 그 모습은 마치 여자가 요리하는 일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오늘은 심지안이 처음으로 직접 요리를 하는 날이라는 걸 말이다.물론 요리는 대실패였다.심지안은 자신이 만든 제육볶음을 한참 쳐다보고는
심지안은 황급히 배달 앱을 끄고 채소를 써는 척 칼을 들었다.“거의 다 됐어요. 훌륭한 셰프의 고급 요리를 맛보려면 기다림은 필수죠!”성연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서재로 돌아갔다.그는 만약 상 위에 놓여있는 검게 타버린 브로콜리를 보지 않았다면 아마 그 말을 믿었을지도 모른다.배달 앱은 21세기 가장 위대한 앱이다. 심지안은 배달되어 온 음식을 모두 접시에 깔끔하게 담아 그럴듯하게 상 위에 차려놓고는 배달 주머니와 그릇들을 모두 깊숙한 곳에 숨겼다.모든 준비를 마치고 난 뒤 그녀가 소리쳤다.“다 됐어요. 어서 나와서 드세요!”밥상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심지안은 긴장한 얼굴로 성연신의 낯빛을 살폈다. 별다른 변화 없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배달 앱이 아주 많이 유용하긴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속인다면 언젠가는 들키고 말 것이다.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이니 말이다.시간을 내어 제대로 요리를 배워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심지안이었다.그녀는 한편으로 밥을 먹으면서도 한편으론 온갖 잡다한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그때 돌연 복부에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그녀는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그녀의 변화를 인지한 성연신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녀를 보며 말했다.“왜 그래요?”심지안이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괜찮아요. 그저 배가 좀 아파서 그래요. 전 진통제 하나 먹고 올 테니까 연신 씨는 식사 계속해요.”말을 마친 그녀는 손으로 상을 집고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한 걸음 한 걸음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성연신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진짜 배만 아픈 거 맞아요?”“네. 고질병이에요.”해외 출장 기간 동안 그녀는 스트레스 때문에 가끔씩 복통이 있었고 그때마다 진통제 한 알을 먹으면 괜찮아졌었다.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통증은 나아지지 않고 도리어 더 가중되기만 했다.심지안의 방 문 앞을 지나가던 성연신의 눈에 고통스럽게 배
몸이 탈진하도록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을 위해 변명을 해주느라 애쓰는 여자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성연신의 눈동자가 더욱 깊어졌다.그 말을 들은 의사는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일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건강이에요. 몸이야말로 나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니까요.”“선생님의 말씀이 맞아요. 앞으론 절대 거르지 않고 제때 식사하도록 할게요.”그녀가 가엾은 얼굴로 물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일단 링거를 맞아요. 남편한테 가서 병원비를 계산하라고 하세요. 잠시 후 간호사가 데리러 올 거예요.”의사가 진단서와 약처방을 성연신에게 건넸다.성연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것들을 받아들고는 1층으로 향했다.남자의 건장한 뒷모습을 보며 심지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음식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것도 모자라 자신을 병원에까지 실려 오게 만들었다. 너무나도 창피했다.병원 응급실엔 사람이 너무 많았고 이제 더이상 응급실에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그녀는 일반병실로 옮겼다.병원비를 모두 지급하고 난 뒤 병실에 올라온 성연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에게 아직 처리할 일이 남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심지안은 얼른 혼자 링거를 맞아도 괜찮으니 회사에 가도 된다는 의미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남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임시 간호원 한 명을 찾아주고는 병원을 나섰다.링거를 다 맞고 나니 어느새 밤은 깊어져 있었다. 너무 피곤했던 심지안은 병원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렸다.다음 날 아침 깨어났을 때, 그녀는 심전웅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오늘 오후 우 대표를 만나 계약을 체결하는 일을 잊지 말라는 내용이었다.심지안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딸이 외박을 했는데도 아버지란 사람은 회사 일에만 관심을 둘 뿐, 걱정의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는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비일비재한 일이었던지라 이미 익숙해져 딱히 슬프지도 않았다.심지안은 침대에 잠시 앉아있다가 병원에서 나가 택시를 타고 성연신의 별장으로 돌아갔다.
손남영이 아래턱을 만지작거리며 자리에 멈추어 서 있는 성연신을 보며 물었다.“아는 사람이에요?”성연신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왜 빨리 달려나가서 영웅처럼 구해주지 않고요?”그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연약한 여자가 변태한테 당하는 걸 보고만 있으려고요?”“알긴 하는데 친하진 않아.”그 말인즉슨 도와줄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연약한 여자’ 라니... 혼인신고를 하던 날 그 무거운 캐리어를 혼자 끌고 다니던 여자가 아닌가...그 반응은 손남영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성연신은 오지랖을 부리며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 아니다.하지만 손남영은 여전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눈앞의 그 여자가 너무나도 매혹적인 미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길고 곧게 뻗은 다리, 잘록한 허리, 백옥같이 하얗고 광채가 도는 피부, 몸에 걸친 심플한 정장을 뚫고 드러난 완벽한 S라인 몸매, 그야말로 국내 최고 인기 여배우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절세미인이었다.손남영은 그런 여자가 고초를 겪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성연신에게 말했다.“형과는 안 친하다고 했잖아요. 그럼 내가 가서 도와줄까요?”순간 성연신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날카롭게 내뱉었다.“뭐라고?”그의 과격한 반응에 화들짝 놀란 손남영은 손을 내저으며 다 장난이라는 듯 말했다.“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저기에 껴서 뭘 하겠어요!”성연신은 그제야 심지안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중년 남자는 어딘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 필터 없이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말들을 내뱉었다.“너 내 앞에서 연기하지 마!”중년 남자는 어디에서 우스운 얘기라도 들은 듯 비릿한 웃음을 짓고는 사방에 침을 튀기며 말했다.“지금 곧바로 나한테 사과하고 얌전히 올라가. 내가 6층에 방을 잡아놓았으니까. 일이 끝나면 내가 사인해 줄게. 쓰레기 년이 감히 나한테 귀한 집 아가씨 행세를 할 생각은 하지도 마!”“나한테 같이 자달라고 하기 전에 거울로 당신 얼굴부터 좀 보세요. 나한테 당신이 가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