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황태후가 갑작스레 궁으로 돌아오자, 궁중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자녕궁. 태후는 더욱 긴장했다. “왜 갑자기 회궁하신 거지?” 태황태후가 회궁을 하면 적어도 2주 전에는 알려 하고, 회궁 당일에는 환영식이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 이렇게 급히 돌아온 것이라면 아마도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일 것이다. 태후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닌지 의심했다. 무엇이 그 “늙은 마귀할멈”을 불러들인 걸까? 계 상궁이 위로하며 말했다.“태후 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태황태후 마마께서 이번에 돌아오시면 바로 황후 마마를 보러 가겠다고 하셨어요. 마마랑은 무관하실 겁니다.”태후는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전 그분의 행동으로 봤을 때, 궁으로 돌아온 직후 하루 동안은 쉬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문안 인사를 허락하셨어. 당일에 사람을 불러들인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어. 설마 진짜로 황후 때문에 온 것일까? 그런데 황후가 어떻게 옥양산에서 예불을 드리고 있던 태황태후를 노하게 한 거지?” 계 상궁은 잠시 고민하더니 추측에 나섰다. “태후 마마, 혹시 귀비 마마와 관련 있는 건 아닐까요?” 태후는 순간 의아해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깨달았다. 능연은 마구 경기에서 부상을 입었고, 비록 범인은 찾지 못했어도 황후를 어느 정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황후를 상대하기 위해 태황태후를 부른 것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태황태후처럼 현명한 사람을 쉽게 끌어들이기란 어려운 일이다. 능연이 황후의 큰 약점을 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태후는 벽 쪽의 불상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가 이번의 위기를 넘기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그러나 그녀도 더 이상 도울 수 없었다. 영소전. 춘하가 귀비를 모시고 약을 드리던 중, 기쁜 소식을 전했다. “마마, 태황태후 마마께서 벌써 궁으로 돌아오셨어요. 황후 마마께서도 함께 불려갔습니다.” 귀비
“뭐라? 폐하께 그 천한 여자랑 합방을 하라고 하셨다고?!" 귀비의 좋았던 기분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소식을 전하러 온 궁인은 고개를 숙였다. 귀비의 분노를 감히 마주하지 못했다.“소인은…소인은 그저 전해 들은 겁니다. 태황태후 마마께서…”“됐다!”귀비는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놀람을 넘어 의심이 생겼다.태황태후가 궁에 돌아온 건 황후의 정조를 조사하기 위함이 아니었는가!왜 이렇게 서둘러 황후와 합방하게 하려는 걸까?귀비의 시선은 싸늘하게 변했고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다.“본궁이 다시 묻겠다. 태황태후께서 황후에게 납치 사건에 대해 추궁했느냐?”궁인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소인도 잘 모르겠사옵니다.”“내전에는 몇 명만 모셨고, 소인은 전각 밖에 있었어서 상전분들의 대화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사옵니다.”그 말을 듣자 귀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녀는 태황태후가 도대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도 알고 싶었다!황후가 순결하지 않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황후를 폐위시키는 것이 아닌가?태황태후의 칼 같은 성격상, 어떻게 그런 일을 용납하겠나...귀비는 혼란스러웠다.마치 무언가가 서서히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했다.그녀는 다급히 궁인에게 물었다.“그렇다면 지금은? 황제 폐하는 어디 계시느냐!”궁인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황제 폐하께서는 태황태후의 명을 받들어, 지금 영화궁에 가 계십니다.”귀비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이 대낮에 태황태후께서 당장 합방을 하라고 하셨단 말인가!설마 황제 폐하께서도 동의하신 일일까?“춘하, 당장 옷을 가져와라! 본궁이 황제 폐하를 만나러 가겠다!”귀비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비록 황제 폐하께서 황후를 건드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만약 태황태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굴복하게 된다면 어떻겠나?그녀는 어떠한 돌발 상황도 용납할 수 없었다!“빨리!”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재촉했다.춘하는 허둥지둥 움직였
봉구안은 합방 준비물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갈수록 기가 찼다!소욱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떻게 이런 일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주 상궁은 궁녀들에게 명령했다.“물건들을 내려놓고, 황후 마마의 목욕을 준비해라.”“예.”봉구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연상 한 명이면 충분하네.”주 상궁은 태황태후의 명을 받들고 있다는 것을 내세워 꽤나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봉구안에게 상전의 태도를 취했다.“황후 마마, 처음으로 폐하의 총애를 받으시니, 궁중의 규칙을 잘 모르실 겁니다.”“합방 전 목욕은 평소 목욕과는 다릅니다. 절차가 세세하게 정해져 있어요!”“한 사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마마, 폐하를 오래 기다리시게 하지 마시지요."주 상궁은 공손하게 한쪽 팔을 내밀며 “이쪽으로 오라”는 행동를 취했다.봉구안의 눈빛은 싸늘했고, 목소리는 낮고 무게감 있었다.“태황태후께서 널 보낸 것은 본궁과 황제 폐하가 원만히 합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과연 본궁의 기분이 상해 합방을 거부하게 돼도 일이 잘 풀릴지 한번 지켜보거라.”주 상궁은 순간 깜짝 놀랐다.황후 마마의 말이 너무나 당돌하지 않은가!그러나 곧 생각을 바꿨다. 황후가 이토록 강경한데, 만약 그 뜻을 거스르면 태황태후의 명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고, 자신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잠시 고민한 후, 주 상궁은 궁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모두 나가 전각 밖에서 대기하라.”그리고 봉구안에게 몸을 굽혀 예를 표하며 말했다.“소인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모든 사람들이 떠난 후, 연상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봉구안 곁으로 빠르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마마, 저 주 상궁도 꽤나 까다로운 사람인데 어떻게 이리 순순히 물러난 거예요?”봉구안은 별다른 말없이 내실로 들어가 모든 옷을 벗어 던진 후 욕조에 몸을 담갔다.그녀 주변의 분위기는 점점 차가워졌고,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듯한 냉기가 감돌았다.연상은 욕조에 꽃잎을 뿌리며 걱정스럽게 물었
봉구안은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고, 눈빛은 동요 없이 평온했다.소욱은 책을 내려놓았다. 표정은 어둡고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다.“왜, 주 상궁이 합방 예정을 가르쳐 주지 않았소?”봉구안은 그의 작은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중했다.보아하니, 그 역시 이 합방을 원치 않는 것이 분명했다. 순간, 소욱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그의 손가락이 옷을 사이에 두고도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눌렀다.그녀에게 꽂힌 그의 시선은 서늘하면서도 강한 폭력성을 품고 있었다.“아플까 두려운 것이오?”봉구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아프다는 거지?그가 말하는 고통이 설마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일까?그는 정말 태황태후의 말을 따르며 착한 손자 역할을 할 작정인가? 봉구안은 순간 거부감이 들었다. 이빨을 꽉 물고 불꽃이 튈 듯한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자의 잘생긴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다른 손에는 단검을 들고 있었다.봉구안은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속으로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그는 왜 칼을 들고 있는 걸까?짧은 순간, 그녀는 혼례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그때 그는 그녀의 순결을 의심하며 스스로 단검으로 증명하라 요구했다... 그래서 오늘도 그녀에게 스스로 순결을 증명하게 하려는 건가?봉구안의 미간이 조금씩 풀어졌다.만약 정말 그렇다면, 오히려 일이 간단해질 것이다. 그녀는 차라리 직접 하는 편이 낫다 생각했다.이렇게 생각한 봉구안은 순순히 단검을 받아들려고 했다.그러나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를 베어도 상관없소. 그저 침구에 피를 묻혀 명을 따랐다는 걸 보여주기만 하면 그만이니.”그는 그녀에게 자해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 거짓으로 일을 꾸며내라고 요구한 것이다.이 말을 들은 봉구안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욱은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미간에는 짜증이
귀비는 하마터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말도 안 돼!폐하께서 봉장미를 총애하실 리가 없다!그리고 저 침구의 피도 봉장미의 처녀혈일 리가 없다!봉장미는 분명 오래전에 순결을 잃은 게 분명하다!귀비의 눈빛은 시시각각 변했지만 모두 불신을 품고 있었다.태황태후는 매우 만족한 듯 보였고, 곧 귀비에게 물러날 것을 허했다.귀비는 만수궁을 나선 뒤 줄곧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춘하 또한 마찬가지였다.폐하와 황후 마마가 정말로 합방을 하셨단 말인가?하지만 황후 마마는 분명... 춘하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모시는 마마를 바라보았다. 귀비의 눈빛은 마치 독기를 품은 듯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 합방은 틀림없이 거짓이다! 귀비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빨리 황제를 만나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한편. 자녕궁 안.태후는 황제가 합방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그 사실이 확실한가?”계 상궁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태후 마마, 틀림없습니다. 태황태후 마마께서 주 상궁을 보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게 하셨고, 침구도 만수궁으로 보내졌습니다.”태후는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폐하가 정말 그렇게 순순히 따랐단 말인가? 예전에 내가 앞서 조정의 관료들과 함께 자손을 위해 더 이상 귀비만 총애해서는 안 된다고 권했잖는가.”“그때 폐하는 말을 듣지 않으셨고 몇몇 대신들을 처벌하기까지 하셨지.”“이번 일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는 게 분명하네.”계 상궁이 추측했다. “귀비 마마께서 낙마로 부상을 입으셔서 얼굴을 크게 다치시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는 아직 젊고 혈기가 왕성하신데, 기거 일지에도 오랫동안 기록된 것이 없었으니, 마침 시기 좋게 태황태후 마마께서 밀어 부치셔서 폐하께서도 어쩌면…”뒤의 말은 그녀도 차마 입 밖에 내기 어려웠다.태후도 그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폐하께서 정말로 부인들을 고르게 사랑해 준다면, 내 마음의 짐도 덜 것 같구나
영화궁 안, 이미 새 침구가 깔려 있었다. 봉구안은 욕실에서 나와 옷을 갈아 입었다. 연상은 따뜻한 차를 들고 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마마, 정말로... 폐하를 모신겁니까?” 봉구안의 표정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 일에 대해선 더 묻지 마.” 마마의 말을 들은 연상은 더욱 혼란스러웠지만, 마마가 묻지 말라 하니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그때 갑자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마마, 귀비 마마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연상은 가슴이 철렁했다.“귀비 마마께서 이 시간에 온 거라면 틀림없이 마마의 합방에 관해 물으시려는 걸 겁니다. 마마, 만나시겠습니까?”봉구안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이 한결 나아진 것을 느꼈다.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들어오시라 해라.”……전각 안에는 봉구안과 귀비, 단둘뿐이었다.귀비는 봉구안을 보자마자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했다.“황후 마마, 참으로 기세등등하시군요.”봉구안은 자리에 앉아, 맑고 차가운 눈빛으로 귀비를 바라보았다. 마치 세상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그녀는 귀비의 말을 받아 치지 않고 침묵으로 상황을 주도했다.귀비는 스스로 자리에 앉으며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신첩이 보기에 마마께서 폐하의 승은을 입으신 게 처음이 아닌 것 같습니다?”봉구안은 담담하게 차 잔을 들어 뚜껑을 열고 차를 마셨다.귀비의 표정은 순간 싸늘하게 굳어졌다. “마마, 언제까지 연기하실 수 있는지 지켜보겠습니다!”“순결은 이미 잃으신 뒤 일 겁니다. 폐하를 속이실 수는 없으셨을 테니, 침구의 피도 당연히 가짜겠죠!”“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모두를 속이신 겁니까?"봉구안은 순간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스쳤다.“나는 항상 궁금했네. 귀비께서 왜 그렇게 확신을 갖고 내가 순결을 잃었다고 생각하는지.”귀비의 눈빛이 싸늘 해졌다.“제가 왜 확신을 갖냐고요? 왜
귀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봉장미가 어떻게 그 철저한 신체검사를 피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눈앞의 이 여자가 진짜 봉장미가 아니다”라는 결론만이 유일하게 납득되었다. 하지만 그 역시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봉장미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귀비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봉구안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귀비를 똑바로 응시한 채 싸늘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맞네. 나는 봉장미가 아니야.” “산적에게 납치된 이후, 나는 더 이상 봉장미가 아니게 되었지.” 귀비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그녀는 뒷걸음 질 치려 했으나, 이내 옷깃을 붙잡혔다. 그녀는 강제로 허리가 굽혀졌고, 상처가 벌어지며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손… 손을 놓으세요!” 봉구안은 그녀를 붙잡은 채 천천히 일어섰다. 귀비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를 감쌌고, 마치 지하 세계에서 기어 나온 악귀처럼 보였다. 봉구안의 표정에는 희미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이국에 기이한 약이 있네. 그것을 바르면 약 49일 후에 허물을 벗듯 새롭게 태어날 수 있지. 모든 상처가 사라지고, 피부는 아기처럼 부드러워져.” “또 복원술이라는 것도 있는데, 그걸 쓰면 여인의 몸을 원래대로 회복시킬 수 있지.” “정말이지, 고통스럽더군.” “하지만 효과는 정말 뛰어나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어떻게 감히 궁으로 시집올 수 있었겠나?” 귀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눈 밑이 두어 차례 떨려왔다. 어쩐지… 이 천한 여자가 비밀의 약을 썼던 것이다! …… 영소전.귀비는 화병 여러 개를 연달아 바닥에 내던졌다. “비밀의 약이라니. 그 천한 여자가 정말 모든 걸 걸었구나!” “그 약, 나도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걸 먹은 열의 아홉이 목숨을 잃었어.” “그런데 그 여자가 그 약을 찾았고, 살아남았다는
봉구안은 몽화지독에 중독되었다. 궁 밖의 오백으로부터 소식을 기다리며 그녀는 스스로 독을 빼내보려 했다.그러다 한순간의 실수로 갑자기 기절해버렸다. 그 뒤로는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꿈에 나타나지 않았던 그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봉구안이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궁 안은 고요했고, 숨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연상은 침상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얼굴은 종이처럼 창백했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마마... 깨… 깨어나셨군요...”봉구안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몸을 일으켜 다시 둘러보니, 소욱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멀지 않은 침상에 앉아 있었다. 표정은 싸늘하고 어두웠으며, 마치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 같았다. 지금은 그는 그녀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봉구안은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설마 그가 그녀가 몽화독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일까? 휙— 남자가 순간 일어섰고 긴 옷자락이 물결치듯 휘날렸다. “황후, 정말 잘 하는 짓이오.”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소매를 휘날리며 떠나갔다. 봉구안은 눈살을 찌푸리고 곧장 연상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느냐?” 연상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마, 마마께서 기절하시고 제가 곧바로 태의를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폐하께서도 함께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폐하께서 침상에 가까이 다가가시자, 마마께서 폐하의 손을 잡으시고는, 많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봉구안은 자신이 알고 싶은 핵심이 있었다. 그녀는 목적에 맞게 물었다. “태의가 내가 왜 기절했는지 알아냈느냐?” 연상은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태의께서는 마마께서 기혈이 부족하시고, 최근 잠을 잘 이루지
열무신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안에서는 곧 비명이 터져 나왔다.“폐하! 저를 살려주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그러나 소욱은 문 밖에서 이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구학이 결코 무고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차라리 열무신이 직접 심문하는 편이 나았다.그 늙은이가 어떻게든 입을 열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같은 시각, 운산파.운산파 제자들은 산문을 지키며 장문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비무대회가 중단되자, 다른 문파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벽력당에서 비꼬듯 말했다.“운산파는 어쩜 이렇게 말썽이 많은가? 저 구 장문이 정말로 엄 장문을 살해했다면, 운산파는 비무대회에 나설 자격이 없는 것 아니오?”“맞소! 스승을 배신하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악한 문파의 행태와 다를 바 없소!”운산파 제자들은 즉시 반발했다.“우리 장문께선 그런 일을 하신 적 없소! 입 조심하시오!”운산파 부장문은 높은 자리에 앉아 단호하게 외쳤다.“진실은 곧 밝혀질 것이니, 함부로 추측하지 마시오!”그러나 다른 문파들은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이 사건이 언제 해결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우리더러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오? 차 부장문, 어떻게 생각하시오?”그들은 전진파의 차선아를 바라보았다.운산파를 제외하면, 비무대회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것은 전진파였으므로, 그녀 역시 속이 탈 것이라 여겼다.그러나 차선아는 태연한 얼굴로 비무대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그들이 전진파를 자극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다시 운산파를 향해 몰아세웠다.“결국 문제를 일으킨 건 운산파 아니오. 차라리 대회에서 물러나시오! 우리를 마냥 기다리게 할 이유가 없지 않소?”운산파 제자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기다리기 싫으면 떠나시오! 우리 운산파는 붙잡지 않소!”“너희들…!”운산파 제자들이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다른 문파들은 더욱 분노했다.그러나 운산파 내부에서도 불안감이 퍼지고 있었다.문하 대제자가 부장문에
약쟁이 거래의 배후를 묻자, 구학은 당황한 듯 보였다.그는 소욱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모릅니다… 소인은 정말 모릅니다.”“그자들은 항상 밀서로만 연락했습니다. 밀서에 물건을 받으러 갈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고, 저희는 그 지시에 따라 물건을 받은 뒤 구매자에게 가져다주기만 했습니다.”“그들은 매번 신중히 움직였고, 접선 장소도 항상 달랐으며, 저희와는 단 한 번도 직접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폐하, 소인이 드리는 말씀은 모두 진실이며, 감히 속일 생각은 없습니다!”구학은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절을 올렸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는 듯, 그는 말을 이어갔다.“소인은 올해 나이가 예순셋입니다. 무릎 아래 자식 하나 없는데, 제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설령 재물과 명예를 얻는다 한들, 제가 얼마나 더 누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운산파의 천 명 넘는 제자들을 굶기지 않는 것뿐입니다!”소욱은 냉담하게 반응했다.“약쟁이에 관한 얘기를 계속하거라.”구학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털어놓았다.“소인은 약쟁이 거래가 그렇게 돈벌이가 좋다는 걸 보고, 생각했습니다. 약쟁이 한 명을 운송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면, 우리 운산파가 직접 약쟁이를 만들어 팔면 얼마나 큰돈을 벌겠는가 하고요.”그는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아까 짐작한 게 맞습니다. 동쪽 별채에 있던 그 '단약'들은 사실 약쟁이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수년간 실패했고, 약쟁이를 만드는 데 참고할 생각으로 약쟁이 하나를 빼돌렸다가 그자들에게 발각돼 제자 몇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구학은 제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아쉬운 기색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약쟁이 제조가 성공하지 못한 것이었다.봉구안이 차갑게 물었다.“무고한 이들을 납치한 것도 약쟁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느냐?”구학은 싸늘한 질문에 더듬지 않고 대답했다.“맞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골라 약쟁이를 만들기 위해 잡아
구학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 앞에서 가면을 쓴 이들을 찬찬히 살폈다.이내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철통같이 방비했다고 자부했건만, 결국은 이 지경이 되다니.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고도 자신을 구하러 오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결말이 다가올지 뻔히 보이는 듯했다.황제의 손에 떨어지고 만 이상, 자신에게 더 이상 희망이란 없었다.열무신이 손에 든 단도를 툭툭 튕기며 말했다.“모두 나가시오.”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앞둔 늑대처럼 구학을 응시했고, 바라보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사람들이 막 방을 나서려는 찰나, 구학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황제 폐하 좀 만나게 해주시오!”그는 이를 꽉 깨물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폐하가 아니고서는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오!”열무신이 돌아서서 봉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어찌할까요?”봉구안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 이자가 스스로 자백하겠다면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소욱을 방 안으로 들였다.소욱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이들은 나가도, 그녀만큼은 반드시 남아야 했다.열무신은 나가기 전 봉구안에게 당부했다.“우린 밖에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세요.”“네.” 봉구안은 그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문이 닫히자 구학은 소욱을 빤히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정말……폐하이십니까?”소욱은 가면을 벗고 본래 모습을 드러냈다.그의 얼굴을 확인한 구학은 목구멍이 턱 막힌 듯 침을 삼켰다.“소인… 폐하를 뵙습니다!”구학은 아까의 당당함을 온데간데없이 잃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을 올렸다.봉구안은 언제든 돌발 상황이 생길 것을 대비하여 은침 하나를 쥐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운산파의 목적이 줄곧 황제를 암살하고 약쟁이 사건을 덮으려 했던 만큼, 방심할 수 없었다.소욱은 차갑게 구학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무엇을 말하려는 것이냐?”구학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구학은 관아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운산파 장문인 자신이 마치 죄인처럼 끌려가게 될 줄이야.그는 부장문에게 당부했다.“내가 돌아올 때까지 문파의 모든 일을 자네가 맡아 처리하게. 부디 신중히 행동하도록 하게.”부장문은 진중히 고개를 숙였다.“염려 마십시오, 장문!”관아 사람들은 구학뿐 아니라 엄 장로와 봉구안까지 함께 끌고 갔다. 그리고 그 유골 또한 가져갔다.소욱이 운산파에 온 것은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실마리가 보이자 그는 관아 사람들을 따라 함께 이동했다.봉구안은 떠나기 전 바닥에 누운 정원아의 시신을 깊게 바라보았다.정원아는 자신 때문에 죽었다.그녀는 차선아에게 간곡히 부탁했다.“차 부장문, 정 사저를 부디 잘 안장해 주십시오.”차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운산파 밖 공터에는 여러 대의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구학은 의아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죄인을 호송하는데 언제부터 이런 호사가 있었던가?관아 사람들이 각자의 손에 쇠고랑을 채우며 말했다.“당신들은 모두 강호에서 이름난 인사들이니 특별히 비밀리에 심문을 받을 것이오. 백성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마차에 타시오! 가는 길에 소리치거나 소란을 피우면 망신당하는 건 당신들이오!”구학은 떳떳한 척하며 제일 먼저 마차에 올랐다. 마치 이러면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할 수 있는 듯이 말이다.봉구안과 소욱은 한 마차에 타고 침묵 속에서 어두운 눈빛을 주고받았다.관아 사람들은 이들을 산 아래로 호송해 관아 쪽으로 향했다.한참 길을 가던 중 구학은 갑자기 몸이 몹시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이상함을 감지한 그는 자신을 호송하는 두 명의 관아 사람을 바라보았다.“너희들…”관아 사람 중 하나가 그를 보며 냉소를 지었다.“노인네, 눈치는 빠르구나.”말을 마친 관아 사람이 순식간에 구학의 목덜미를 강타했다.구학은 쇠고랑을 찬 상태라 저항이 어려웠고, 그 약간의 미향까지 더해지니 그대로 의식
엄 장로는 싸늘한 눈빛으로 높은 자리에 앉은 구학을 바라보았다.“장문, 제 허락 없이 동쪽 별채에 들어간 건 저의 잘못입니다.”“운산파의 규율대로 이 일에 대한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제 부친의 유골이 왜 동쪽 별채에 있는지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오백도 품에 안긴 유골을 들며 당당히 턱을 들었다.“옳습니다! 남의 아버지 유골을 이런 꼴로 만든 이유부터 제대로 설명하란 말입니다!”구학은 답답한 얼굴로 엄 장로를 쳐다보았다.“이들이 의도적으로 나를 모함하는 게 보이지 않소?”“내가 뭘 설명하길 바라오? 난 이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소!”“조금 전 곳곳에서 불이 난 것도 필시 저들이 벌인 짓이오. 그 틈을 타 유골을 동쪽 별채로 옮긴 것이 분명하오! 저들에게 이용당한 것이오!”“우리는 수십 년을 함께한 사형제이지 않소? 내 사람됨을 아직 모르시오? 내가 어떻게 사부님을 해칠 수 있단 말이오!”엄 장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저는 오늘 그저 진실을 원할 뿐입니다.”봉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이미 모든 물증이 구 장문의 범행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구 장문께서 엄 장문의 자리를 탐내 스승을 살해했고, 혹은 스승에 대한 원한 때문에 시신을 훔쳐 별채에 숨겨두고 모욕한 것이겠죠.”“헛소리다! 감히 나를 욕먹이려고 하다니!” 구학은 봉구안의 말을 강하게 부정하며, 늙고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그는 다시 엄 장로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저 여인의 말을 믿고 나를 의심한단 말이오? 사부님은 나를 친아들처럼 여겨 모든 무공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셨고, 직접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장문직을 물려주셨소. 내가 어찌 그 은혜를 저버리는 죄를 범하겠소? 게다가 내가 무슨 이유로 사부님을 해친단 말이오?”주변 사람들도 동조했다.“맞소. 구 장문은 부족함이 없고, 사형 간의 정이 깊었는데 설마 그런 짓을 했겠소? 이건 분명 무슨 오해가 있는 거요.”“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전 장문님께서는 생전에 구학 장문을 가장 아끼셨고
모두가 봉구안이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저 멀리서 누군가 해골 하나를 품에 안은 채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왔습니다, 왔어요!” 오백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달려왔다.구학은 해골을 보자마자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설마 저건…’순간 그의 마음이 요동쳤지만, 금세 감정을 억누르고 표정을 되찾았다.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했다.도대체 저게 무엇인가?모두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봉구안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 유골이 바로 운산파의 전임 장문이셨던 엄청송의 것입니다.”“뭐라고!” 장내가 삽시간에 술렁였다.엄청송이라면 무림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던 원로였다. 그는 생전에 수많은 선행을 베풀었기에 지금까지도 많은 백성이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그런 인물이 무덤에 묻혀 평온히 잠들어 있어야 정상 아닌가?운산파 제자들이 즉각 분노하며 소리쳤다.“너희들이 감히 사공의 무덤을 파헤친 것이냐!”“불쌍하신 사공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편히 쉬지 못하다니!”“당장 사공의 유골을 내려놓아라!”오백은 유골을 끌어안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항변했다.“억지 부리지 마라! 우리는 무덤을 파헤친 적이 없다! 이 유골은 처음부터 동쪽 별채에 있던 것이다. 조금 전 동쪽 별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급히 불을 끄러 갔다가 거기서 발견한 것이다!”운산파 제자 하나가 즉시 반박했다.“거짓말하지 마라! 사공께서는 분명히 무덤에 안장되셨는데, 어떻게 동쪽 별채에 계실 수 있느냐!”동쪽 별채는 운산파 제자들에게는 금지 구역이었고 평소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곳에는 각종 희귀한 단약들이 보관돼 있었다. 그런 곳에 사람의 해골이 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운산파 부장문이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그 유골을 대체 어디서 가져온 것이냐!”만약 이 유골이 정말로 엄청송의 것이라면, 이들은 분명히 묘를 도굴한 죄를 범한 것이었다. 반대로 아니라고 해도, 아무 해골이나 가져와 장문을 모함한 죄를 면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저들은
봉구안의 칼날 같은 시선이 운산파 장문 구학을 향했다.“구 장문께서는 스승을 배반하고 조상을 욕되게 하였으며, 자신의 사부까지 살해했으니, 문하의 제자들이 비열하고 악독한 것도 당연하겠지요.”구학은 이 말을 듣자마자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주변 다른 문파 사람들도 크게 놀라며 술렁였다.“뭐라고? 구 장문이 자기 사부를 살해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운산파 제자들은 격분하며 소리를 높였다.“감히 우리 장문을 모욕하다니!”“우리 사형을 죽이고 장문까지 욕보이다니, 죽어 마땅하다!”“장문님, 제가 나가 저 계집을 죽이겠습니다!”봉구안은 두려움 없이 싸늘한 눈으로 구학을 응시했다.“구 장문, 제가 정말 장문을 억울하게 모함한 겁니까?”구학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향해 근엄하게 말했다.“저 여인의 말은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입니다. 저는 하늘에 맹세코 성현군자는 아니나, 결코 스승을 배반하거나 살해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하늘의 벌을 받을 것입니다!”그의 단호한 맹세는 매우 당당하고 결백해 보였다.평소 운산파를 지지하던 다른 문파들도 이에 동조했다.“구 장문께서 그런 사람일 리 없습니다!”“우리는 구 장문의 성품을 잘 압니다. 과거 남제에서 전란이 일어났을 때도, 구 장문은 제자들을 데리고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적들을 처단하여 안정을 되찾게 하셨습니다.”“맞습니다! 저 역시 증언할 수 있습니다. 구 장문은 그런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 아닙니다!”구학은 살짝 예를 표하며 말했다.“여러분의 의로운 말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하늘이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믿습니다.”“오늘 이런 추악한 중상모략에 대해 더 해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지금 중요한 것은 전진파 제자가 비무대회의 규칙을 어기고 악독한 수법으로 내 제자를 살해한 사실입니다.”차선아가 그의 말을 냉정히 끊었다.“구 장문, 잘못 짚으셨습니다. 우리 전진파 제자는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며, 이 모든 사건은 귀 문파의 제자가 일으킨 일입니다. 또한
운산파 장문은 아끼는 제자 은사성의 팔이 부러진 것을 보고 급히 경기를 중지시키려 했다.그러나 무대 위의 봉구안은 번개 같은 속도로 은사성의 다른 팔을 잡아, 그대로 똑같은 방식으로 꺾어버렸다.콰직!“으아악! 이 천한 계집! 죽여버리겠다!” 두 팔이 모두 부러진 은사성은 아무리 뛰어난 독술을 지녔더라도 더는 발휘할 수 없었다.다른 문파 사람들은 봉구안의 냉혹하고 단호한 수법에 모두 충격을 받았다.“은사성과 싸울 땐 모두가 신중하지. 독술이 워낙 뛰어나니 가까이 가지 않고 거리를 두는데, 이 여자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달려들어 팔을 꺾었으니, 정말 무섭구나!”“남자가 독해야 큰일을 이룬다고 하지만, 역시 여자의 독한 마음이 훨씬 더 무서운 법이야!”“자기 몸까지 아끼지 않으니 얼마나 독한가! 나라면 은사성 가까이 갈 엄두도 못 냈을 거야.”쿵!봉구안은 은사성을 발로 차서 비무장 아래로 내동댕이쳤다.팔이 부러져 몸을 제대로 지탱하지 못한 은사성은 처참하게 쓰러져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운산파 제자 두 명이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사형!”은사성은 축 늘어진 두 팔을 매단 채 봉구안을 원한에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이때 봉구안은 높은 곳에서 차가운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녀의 몸에 쏟아지는 햇빛이 너무도 눈부셔 감히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그녀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악행을 저지르면 결국 스스로 화를 불러오는 법이다.”말을 마친 봉구안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섰다.“다음 상대는 누구냐!”그녀가 바라본 것은 운산파 장문 구학이었다.구학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곁에서 제자가 급하게 속삭였다.“장문님, 전진파가 이제 한 판만 더 이기면…!”“닥쳐라.” 구학이 낮게 꾸짖었다.그 또한 전진파의 승리가 코앞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운산파에 고수는 많았다.은사성 하나가 졌다고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었다!다만 다음에 누구를
소욱이 위급한 것을 본 차선아는 아직 무대 위에서 승부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잊은 채 즉시 소매에서 암기를 꺼내 은사성의 손목을 향해 던졌다.하지만 은사성은 재빨리 소욱을 놓고 몸을 틀어 가볍게 피했다.차선아의 개입에 다른 문파들이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그들은 먹잇감을 발견한 들개처럼 한꺼번에 고함을 질렀다.“전진파가 규칙을 어겼다!”“두 사람의 비무에 제삼자가 개입하다니 말이 되느냐! 전진파는 패배를 인정하라!”“옳소! 나도 똑똑히 봤소! 전진파는 엄청난 금기를 범했소!”운산파 장문 구학은 싸늘한 얼굴로 차선아를 바라보았다.차선아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피하지 않았다.그녀는 단호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번 승부는 전진파가 졌습니다.”그녀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소욱을 바라보았다.그가 방금 전 비무하던 모습을 보니 명백히 독에 당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자신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경기가 계속됐다면 그는 교활한 은사성을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다.그의 무공은 뛰어났지만, 강호의 험악한 술수를 몰랐다.물론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은사성이 독을 쓰는 속도가 너무나 빨라 그조차도 언제, 어떻게 독을 썼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말이다.소욱이 무대에서 내려오자, 진한길이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소욱은 자리로 돌아가 앉아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용히 운기를 시작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는 깊은 분노가 숨겨져 있었다.정원아가 물주머니를 내밀며 말했다.“사매, 물 좀 마시세요. 덕분에 우리 전진파가 이렇게 많은 승리를 얻었습니다. 정말 대단했어요!”소욱은 싸늘한 눈으로 그녀도, 그녀가 건넨 물도 쳐다보지 않았다.지금 막 독에 당한 직후였기에 주변의 모든 것에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정원아는 그가 마음을 몰라줘도 화내지 않았다.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조용히 물을 그의 옆에 두고 물러났다.소욱이 물러난 뒤 전진파 제자들이 연이어 무대에 올랐다.최종 승리를 얻기까지 단 두 판의 승리만이 남아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