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봉장미가 어떻게 그 철저한 신체검사를 피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눈앞의 이 여자가 진짜 봉장미가 아니다”라는 결론만이 유일하게 납득되었다. 하지만 그 역시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봉장미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귀비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봉구안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귀비를 똑바로 응시한 채 싸늘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맞네. 나는 봉장미가 아니야.” “산적에게 납치된 이후, 나는 더 이상 봉장미가 아니게 되었지.” 귀비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그녀는 뒷걸음 질 치려 했으나, 이내 옷깃을 붙잡혔다. 그녀는 강제로 허리가 굽혀졌고, 상처가 벌어지며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손… 손을 놓으세요!” 봉구안은 그녀를 붙잡은 채 천천히 일어섰다. 귀비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를 감쌌고, 마치 지하 세계에서 기어 나온 악귀처럼 보였다. 봉구안의 표정에는 희미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이국에 기이한 약이 있네. 그것을 바르면 약 49일 후에 허물을 벗듯 새롭게 태어날 수 있지. 모든 상처가 사라지고, 피부는 아기처럼 부드러워져.” “또 복원술이라는 것도 있는데, 그걸 쓰면 여인의 몸을 원래대로 회복시킬 수 있지.” “정말이지, 고통스럽더군.” “하지만 효과는 정말 뛰어나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어떻게 감히 궁으로 시집올 수 있었겠나?” 귀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눈 밑이 두어 차례 떨려왔다. 어쩐지… 이 천한 여자가 비밀의 약을 썼던 것이다! …… 영소전.귀비는 화병 여러 개를 연달아 바닥에 내던졌다. “비밀의 약이라니. 그 천한 여자가 정말 모든 걸 걸었구나!” “그 약, 나도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걸 먹은 열의 아홉이 목숨을 잃었어.” “그런데 그 여자가 그 약을 찾았고, 살아남았다는
봉구안은 몽화지독에 중독되었다. 궁 밖의 오백으로부터 소식을 기다리며 그녀는 스스로 독을 빼내보려 했다.그러다 한순간의 실수로 갑자기 기절해버렸다. 그 뒤로는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꿈에 나타나지 않았던 그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봉구안이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궁 안은 고요했고, 숨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연상은 침상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얼굴은 종이처럼 창백했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마마... 깨… 깨어나셨군요...”봉구안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몸을 일으켜 다시 둘러보니, 소욱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멀지 않은 침상에 앉아 있었다. 표정은 싸늘하고 어두웠으며, 마치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 같았다. 지금은 그는 그녀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봉구안은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설마 그가 그녀가 몽화독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일까? 휙— 남자가 순간 일어섰고 긴 옷자락이 물결치듯 휘날렸다. “황후, 정말 잘 하는 짓이오.”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소매를 휘날리며 떠나갔다. 봉구안은 눈살을 찌푸리고 곧장 연상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느냐?” 연상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마, 마마께서 기절하시고 제가 곧바로 태의를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폐하께서도 함께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폐하께서 침상에 가까이 다가가시자, 마마께서 폐하의 손을 잡으시고는, 많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봉구안은 자신이 알고 싶은 핵심이 있었다. 그녀는 목적에 맞게 물었다. “태의가 내가 왜 기절했는지 알아냈느냐?” 연상은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태의께서는 마마께서 기혈이 부족하시고, 최근 잠을 잘 이루지
서왕이 먼저 예를 취했다.“폐하를 뵙습니다.”소욱의 시선은 서왕을 지나쳐 곧장 봉구안에게로 향했다.한참 후, 그는 싸늘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그녀를 보고 말했다.“태황태후께서는 외부인이 휴식을 방해하는 걸 싫어하시니 이만 돌아가거라.”옆에서 듣고 있던 연상은 화가 치밀었지만 감히 황제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이 나라 황제의 정실인 황후이고 태황태후의 손주며느리가 되는 분을 외부인이라고 칭하다니!반면 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예를 갖추었다.“예, 폐하.”어차피 그녀가 원해서 온 자리도 아니었다.그가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했으니 그녀가 바라던 바였다.잠시 후, 만수궁.태황태후가 상석에 앉고 양옆에 황제와 서왕이 자리했다.태황태후가 불쾌한 안색으로 물었다.“황후는 왜 아직도 문안인사를 올리러 안 오는 거지?”소욱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덤덤히 답했다.“황후는 말주변이 없어서 할마마마의 짜증만 불러올 것 같아 짐이 돌아가라 하였습니다.”태황태후는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으나, 황제와 서왕이 돌아간 후 주 상궁을 시켜 황후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잠시 후, 외출했다가 돌아온 주 상궁이 아뢰었다.“소인이 알아봤는데 황후께서는 어제 몸이 편찮으시더니 밤에는 기절까지 하였다 하옵니다.”“폐하께서도 황후마마를 안타까이 여기시어….”“아니, 황상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태황태후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그녀가 아는 황제는 어느 여인을 안타깝게 여길 사람이 아니었다.그날 저녁.봉구안은 오백에게서 날아온 서신을 받았다.조검의 동생을 찾았다는 내용이었다.조검을 옥에 가둘 때, 귀비가 조검의 가족들에게 마수를 뻗칠 것을 그녀는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이미 이용가치를 잃은 하인이니 우환을 미리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아니나다를까, 오백이 조검의 고향집을 찾아갔을 때 그곳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주변인들에게 알아보니 일가족이 밤중에 자다가 화재가 일어 전부 불에 타죽었다고 했다.오백은 현장에서 시신을 대조했지만 일가족 여섯 명 중에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귀비는 눈을 떴다.대전 안에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귀비의 얼굴에 잠깐 실망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춘화는 싱글벙글 웃으며 안으로 들어와서 그녀에게 말했다.“역시 폐하는 마마를 제일 총애하시는 것 같아요.”“아침에 나가실 때도 마마 원기회복하라고 꼭 삼계탕을 끓여서 대령하라고 신신당부하셨거든요. 마마, 외람된 말씀이지만… 어제도 승은을 입으셨나이까?”귀비의 심복으로서 황제가 귀비를 총애하는 건 더없이 바람직하지만 아직 부상이 낫지도 않았는데 승은을 입는 것은 회복에 좋지 않았다.춘화는 저도 모르게 걱정이 앞섰다.귀비는 질문에 대답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물 좀 다오.”아침 시중을 드는 중에 춘화가 말했다.“태황태후께서 곧 옥양산으로 떠나신다고 합니다. 배웅을 나가실 거죠?”귀비는 냉소를 짓더니 증오에 찬 눈빛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배웅? 다 죽을 노친네 배웅을 왜 나가?”“봉장이 그년을 엄하게 다스릴 줄 알았더니 오자마자 폐하께 합방을 강요하지 않나! 노인네가 늙어서 노망이 난 게 분명해!”춘화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문밖을 살폈다.“마마, 그런 말을 하시면 아니되옵니다.”지금의 영소전은 예전과 비할 수가 없었다.황후는 권력을 잡은 후로 궁녀와 태감을 한바탕 물갈이를 했다.비록 가까이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은 바뀌지 않았지만 자칫 잘못해서 말이 새어나갈 수도 있었다.귀비가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일은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지?”춘화가 답했다.“걱정 마세요, 마마. 이미 황성수비사에 언질을 전했습니다. 황후의 오라버니는 고작 구품 좌장에 불과하니 시비에 휘말리게 하는 건 일도 아니지요.”봉구안의 본가.황제와 황후가 드디어 합방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봉 대인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그는 술기운에 취해 부인의 손을 잡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내 이럴 줄 알았어. 구안이는 해낼 줄 알았다니까!”“조금만 더 힘을 내서 황자를 회임하면 앞으로 황후의 입지는 더 단단해질 거야. 부
삼엄한 궁중 법도 덕분에 봉 부인은 꼬박 하루를 기다려서야 봉구안을 만날 수 있었다.오라버니의 상황을 전해들은 봉구안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꼬투리를 잡힐 일만 하지 않으면 돼요.”최근 봉안진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상황을 그녀도 조사하고 있는 중이었다.하지만 과거가 어쨌든 봉가의 장남으로서 이대로 계속 기가 죽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봉 부인은 딸의 냉담함이 서운했다.“안진이는 마마의 오라버니예요! 이대로 진로가 막히면 앞으로 가문은 어찌하고요? 아무리 어렸을 때 같이 자라지 않았어도 그렇지….”봉구안은 싸늘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라버니 스스로 깨우치고 일어나야 하는 문제입니다.”“지금 이 상황이 온 게 다 오라버니께서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고 한낱 좌장의 자리에 만족하며 살았기 때문이지요. 오라버니의 진로를 막은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라버니 자신입니다.”“장미가 사고를 당했을 때, 오라버니께서는 집안의 장남으로서 동생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하였는데 어찌 가문의 중임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봉 부인은 서글픈 얼굴로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탄하듯 말했다.“마마께서는 안진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몰라요.”“아니요. 저도 알만한 건 다 압니다. 식량을 운반하던 수십 명의 장령들 중에 오라버니만 살아남았지요. 그 뒤로 죄책감에 빠져 투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 아닙니까.”사실 상, 봉구안이 그동안 겪은 일에 비하면 봉안진의 겪은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녀 역시 억울함을 당한 적이 많았다.모시는 장군이 그녀가 자신보다 먼저 공을 세우는 것이 두려워서 그녀를 편벽한 산골짜기에 남겨두고 성문을 닫은 적이 있었다.그 전장에서 그녀는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상관에게 거만했다는 이유로 포상은커녕 심도 높은 조사와 심문을 받았다.함께 싸우던 전우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비일비재했다.3년 전, 그녀가 인솔하던 100인 소대 중에 다섯 명만 살아서 돌아왔다.분명 어제도 같이 술을 마셨던 동료가 한순간에 적의
영화궁.소욱은 음침한 얼굴로 봉구안을 노려보며 추궁하듯 말했다.“오늘 마침 짐이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황후가 몰래 그런 약을 먹고 있는 줄도 몰랐겠군.”봉구안은 평온한 얼굴로 침착하게 대답했다.“약은 어머니께서 입궁할 때 가져다주셨습니다. 가족들은 저와 폐하의 합방이 진짜라고만 알고 있으니 기대를 할 수밖에 없겠지요. 대놓고 아니라고 할 수 없어서 연상에게 조용히 처리하라고 했던 것입니다.”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대답에 거짓말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소욱은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싸늘하게 말했다.“황후, 갖지 말아야 할 욕심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말을 마친 그는 딱딱한 어조로 방문한 목적을 꺼내놓았다.“양나라 사신이 곧 도착하니 초대연회를 베풀 것이다. 예전에는 다 귀비가 맡아서 했지만 귀비가 부상 중이니 황후에게 맡기지.”“양국의 평화가 달린 중대한 일이니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다!”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양나라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다르고 언제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를 인간들이었다.그들의 이번 남제 방문의 목적은 불투명하지만 필히 한차례 피바람이 불 것이다.무장들은 전장터에서 제 몫을 했으니 남은 건 대신들의 몫이었다.“예, 명심하겠습니다.”한편, 귀비도 바쁘게 돌아치고 있었다.“봉 부인이 입궁했다고?”춘화가 답했다.“예, 마마. 장남 일로 급하게 황후궁을 방문한 것이겠지요. 황후도 아마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할 것입니다. 이제 마마를 건드린 대가가 어떤 건지 똑똑히 알았겠지요. 아마 곧 마마께 고개 숙이고 사죄하러 올 것 같네요.”비록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있지만 험난한 황궁에서 살아남으려면 친정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친 오라버니가 변을 당했으니 황후도 애가 탈 것이다.그래서 춘화는 황후가 오늘 안으로 무조건 사과하러 영소전을 방문할 것이라 확신했다.만약 사죄를 거부한다면 봉안진은 계속해서 따돌림을 당할 것이다.귀비도 황후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봉 부인이 출궁한지
봉가 저택.봉 부인은 옷차림이 흐트러진 상태로 돌아온 아들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안진아, 대체 어떻게 된 거니?”봉안진은 묵뭄부답으로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이미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귓가에는 과거의 처참했던 칼부림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눈앞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동료들의 시체가 보이는 것 같았다.그는 이 모든 게 자신이 무능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형님!”그의 앞을 가로막은 봉명헌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고 시비조로 물었다.“형님, 관직에 계신 분이 옷차림이 이게 뭔가요?”봉안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봉명헌은 임명장을 흔들며 자랑하듯 말했다.“이거 봤죠? 저 통사가 되었어요! 그것도 팔품이요! 품계로 따지면 좌장보다 더 높답니다!”“축하한다.”그 말을 끝으로 봉안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나쳤다.봉명헌은 멀어지는 그의 등 뒤에 대고 침을 뱉었다.“멍청한 놈!”한때는 무장 장원 출신이었지만 지금은 한낱 관직을 잃은 평민에 불과했다.‘역시 이 집안의 기둥은 나야!’봉명헌은 의기양양하게 생각했다.이청원.임씨는 아들이 통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십여 년을 참고 기다린 끝에 드디어 어깨를 펼 날이 온 것이다.그녀는 임명장을 애지중지 들고 손에서 놓기 아쉬워했다.“우리 아들, 정말 잘했어! 어서, 가서 나으리를 불러와. 나중에 이 소식을 네 아버지께 알리면 얼마나 기뻐하실까!”이때, 시종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이랑, 큰집 쪽에서 난리가 났어요. 큰 도련님께서 관직에서 파면당해 나으리께서 화를 내고 계세요.”임씨 모자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좋은 일이! 명헌아, 이제 우리 모자 어깨 펴고 살 수 있겠어!”봉 대인은 줄곧 장남이 높은 관직에 올라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그런데 그 사건 이후로 관직은 올라가기는커녕 점점 내려가기만 하더니 이제 구품 관직도 잃어버렸으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분노가 치민 봉 대
열흘 만에 결국 발작하고 말았는데 송려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봉구안은 조용히 내력을 운영하여 독성의 발작을 억제했다. 하지만 임시방편일 뿐, 해독약이 없다면 무용지물이었다.그녀는 소욱을 찾아가 해독약을 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그날 밤.그녀는 변장을 하고 장신궁으로 향했다.이번에 그녀는 더욱 더 신중히 움직였다.장신궁 주변에 매복은 없었고 대전 안에는 진한길 혼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폐하께서는 독으로 너를 통제할 수 있으니 체포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니 너무 그렇게 경계할 것 없어.”봉구안은 당연히 그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폭군은 언제 생각이 바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약을 받은 그녀는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갔다.진한길도 그녀를 뒤쫓지 않고 자진궁으로 돌아갔다.소욱은 책상 앞에 마주앉아 자객이 남기고 간 채찍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진한길은 황제가 왜 이걸 여태 가지고 계신지 이해할 수 없었다.“폐하, 그 자객을 이대로 풀어둬도 정말 괜찮은 겁니까?”소욱이 싸늘하게 대꾸했다.“잡으라고 하면 잡을 수는 있고?”몇 번의 매복이 있었지만 그녀를 잡는데는 실패한 그들이었다.만반의 준비가 없이 섣불리 움직인다면 상대가 수 틀려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지금 상황으로서는 독으로 통제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소욱은 그녀가 궁 안에 잠복해 있는 목적이 궁금해졌다.깊은 밤, 영화궁.봉구안은 해독약을 가루로 만든 후에 소량을 취해 종이에 감싸고 비둘기 다리에 묶어서 날려보냈다.그리고 남은 것은 전부 입안에 털어넣었다.송려가 한시라도 빨리 해독약을 만들어내게 하기 위해서였다.봉가 저택.장남은 관직에서 파면당하고 동생인 봉명헌은 통사가 된 후로 봉 대인의 태도도 눈에 띄게 바뀌었다.이미 장남에게 실망할대로 실망한 그는 며칠 연속 임씨의 이청원에 머물렀다.임씨 모자는 그럴수록 의기양양해졌고 봉 부인의 처소는 쓸쓸함이 감돌았다.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황성 수비사에 자신의 물건을 가지러 간 봉안진은
소욱은 알고 있었다.지금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번져버린 것은 모두 황후가 낮에 태황태후를 찾은 탓이었다.그는 그녀가 할마마마께 도움을 청하려는 줄로만 알았다.이제야 깨달았다. 그녀의 목적은 바로, 온 세상이 그를 규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하지만 도대체 언제부터였단 말인가?후궁들조차 그녀를 이렇게까지 감싸게 된 것이!정말이지, 그녀의 능력은 대단했다.소욱은 내전으로 들어섰다.그곳에 태연히 앉아 있는 봉구안을 거칠게 끌어올리며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로 물었다.“이게 바로 네가 원하던 광경이느냐?”봉구안은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폐하께서 이대로 고집을 꺾지 않으신다면, 장차 폐하께 제 목숨을 청원할 이들은 백성과 장병들이 될 것이옵니다.”소욱은 자신을 비웃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대체 무슨 청원이란 말인가? 내가 너에게 해를 끼쳤다고 말하려는 것이냐?”“그렇다면 나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자일 것이다!”“분명히 떠나겠다고 한 건 너였고, 나를 저버린 것도 너였다!”“나는 너에게 천 번 만 번 잘해 주었는데, 너는 마음이 돌처럼 차가워, 죽은 사람 하나만도 못하지 않았느냐!”봉구안은 여전히 고요한 얼굴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그 고요함이 그를 더욱 비참하고 화나게 만들었다.마치 자신이 혼자만 난리를 치는 ‘미치광이’처럼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그녀의 침묵은 소욱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그는 이를 악물며 차갑게 말했다.“네가 나와 끝까지 싸우겠다면, 내가 너에게 이 남제의 태양이 누구를 위해 떠오르는지 보여주도록 하마!”…그날 밤.후궁들은 영화궁 밖에서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있었다.다음 날이 되자 전조의 대신들 몇몇이 차례로 상소를 올렸다.“폐하, 후궁의 일은 원래 신들이 간섭할 바가 아니지만, 황후께서는 모범적인 군후이십니다.”“전쟁 중에는 기도를 올리셨고, 그 뒤로는 군량미를 직접 보내셨사옵니다.”“이토록 어진 황후를 어찌 그렇게
영화궁 밖.수많은 후궁들이 줄지어 꿇어앉아 있었다.그들 모두 황후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황제께서 자신들에게 무심하신 것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으나, 황후마마처럼 훌륭하신 분께까지 그러하시다니!황후마마는 군량미를 보내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으셨건만, 결과는 어찌 되었단 말인가?영비가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황후께 냉담해지셨고, 심지어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면벽 자숙을 명하셨다.이런 일을 겪고도 황후마마께서 심신이 지쳐 스스로 하당을 청하시고 궁을 떠나시길 구하신 것이 어찌 이상하단 말인가?폐하께서 억지로 황후마마를 붙들어 두시며 그 마음을 짓밟으시는 것은 참으로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었다.후궁들은 마음을 합해 한목소리로 탄원하였고, 이렇게까지 하나로 뭉친 적은 없었다.그들 대부분은 명문가 출신으로, 이미 은밀히 집안에 소식을 전하여 전조에도 힘을 보태도록 요청하였다.소욱은 이 말을 듣고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황후는 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그가 황후를 붙잡아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처음에는 후궁들의 행태를 무시하려 했으나, 그녀들이 외치는 소리는 지나치게 크고 비통한 기색이 역력했다.멀리서 들으면 황제가 붕어한 줄 알 정도였다!결국 소욱은 무겁게 명을 내렸다.“모두 물러가라!”그러나, 어명을 받은 호위들은 후궁들에게 손댈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그녀들은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손을 대면 곧바로 ‘무례하다’고 소리쳤다.심지어 몇몇은 머리 장식인 발채를 목에 들이대며 죽음으로 저항하였다.이 전대미문의 상황에, 신하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결국 천기를 울리며 돌아와 아뢰었다.“폐하, 신하들이 무능하여 대처할 수 없사옵니다.”자녕궁.장공주 역시 이 소식을 들었다.황후가 궁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빨리 옷을 갈아입혀라! 황제를 만나러 가야겠다!”장공주는 오래전부터 황후는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며
태황태후는 눈앞의 사람을 보며 깜짝 놀라 물었다.“황후, 네가 방금 뭐라 했느냐!?”봉구안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신첩, 스스로 폐위하길 청하옵니다.”전각 안에 있던 궁인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황후마마께서 무슨 망령된 짓을 하시는 것인지?“건방진 소리 마라! 이런 말은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구나! 황상은, 황상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봉구안은 숨김 없이 말했다.“황제 폐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기에, 신첩이 마마의 의지를 구하러 온 것이옵니다.”태황태후는 사실 이 손자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하지만 이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진심으로 궁을 떠나고 싶다는 말이냐?” 태황태후가 물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사옵니다.”“좋다. 내가…”태황태후의 말이 채 끝나기 전, 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일로 할마마마께서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태황태후가 고개를 들어보니, 황제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전각 안으로 걸어들어왔다.그 눈빛은 심지어 그녀를 향해서도 약간의 적의를 내비치고 있었다.“황상, 네가…”소욱은 봉구안의 허리를 감싸며 차갑고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황후가 짐과 다투다가 그런 헛소리를 한 것뿐입니다. 할마마마께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태황태후는 속으로 모든 것을 간파했으나,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소욱이 봉구안을 데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만수궁을 나선 후.소욱은 봉구안을 나무라지 않았다.다만 그녀의 손을 꽉 쥔 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었다.영화궁에 이르러 소욱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할마마마께서는 이미 폐후할 마음을 품으셨었지. 오늘, 그 바램을 이룰 뻔 했구나?”봉구안의 얼굴에는 미동조차 없었다.소욱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그러니 다시는 이런 의미 없는 일을 하지 마라.”봉구안은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띠었다.“제 마음은 변함이 없사옵니다.”소욱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는 그녀가 웃는 것을 좋아했으나, 이 순간
소욱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는 바닥에 흩어진 깨진 도자기 조각을 한 번 보고 나서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봉구안 위로 드리워졌다.“짐은 황제다.”“황제의 권위 아래 자유란 존재하지 않아.”“네가 분노하든, 불복하든, 이것은 네가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내가 만약 너였다면, 이런 어리석은 방식으로 황제의 인내심을 시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안에는 반박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남방에서의 온화한 양보는 단지 황제의 신분을 잠시 내려놓은 결과로 그녀가 품게 된 착각일 뿐이었다.그의 본성은 여전히 강압적이고 폭군다운 군주였다.봉구안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선택할 권리를 주실 거라고 착각했나 봅니다.”그가 분노했던 것은 그녀가 스스로 계약 기간을 바꿨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녀의 떠남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소욱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한 가지는 안심하거라.”“이 일은 너와 나 사이의 일이니…”“짐은 봉가에게든, 그 외 누구의 목숨이든 너를 협박하는 데 쓰지 않을 것이다.”“왜냐하면, 짐은 네가 다른 이들을 위해 짐에게 가식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지.”봉구안은 주먹을 굳게 쥐었다.…연상은 황제가 내전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 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요 며칠 황제는 금방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살기를 풍겼다. 두려움 그 자체였다.그와 동시에, 전조 또한 평온하지 않았다.황제의 ‘옛 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진왕의 양식 탈취 사건이 황제의 친심으로 다뤄졌다.이 사건에 연루된 관리들은 모두 오마분시의 극형을 받았다.심지어 진왕조차 사형을 선고받았다.태황태후는 이를 알고 진왕을 위해 황제에게 탄원했다.하지만 소욱은 냉담하게 대답했다.“모반을 꾀한 자에게 짐은 살아갈 길을 주지 않을 것이다.”“그리하면 마치 호랑이를 풀어 산으로 돌려보내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천옥 안.
봉구안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연상이 그녀 곁을 지키고 있었고,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마마, 몸은 어떠세요?”봉구안은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호흡을 고르고 내력을 운행해 보았다.내력은 회복되었으나, 몸은 여전히 심히 쇠약했다.그녀의 입술은 창백했고,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아련했다.연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마마, 부인께서 궁에 오셨습니다.”봉 부인은 봉구안을 설득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며, 한순간에 나이가 부쩍 들어 보였다.“너의 신분을 폐하께서 이미 다 아셨다.”“그분께서 너의 아버지를 궁으로 부르셨고, 네 사정을 모두 말씀하셨어.”“얘야, 어찌 이리 어리석게 굴었느냐?”“이미 폐하께 시집갔거늘, 어찌 다시 떠날 생각을 한단 말이더냐?”“폐하께서 너와 봉가와 맹가의 기군지죄를 묻지 않고도 1 년 약조를 받아들여 주셨거늘, 네 생각엔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누가 폐하를 탓하겠느냐?”봉구안은 뜻밖이었다.소욱이 모든 사실을 아버지에게 전했으리라곤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으며, 표정에는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봉 부인의 말이 그녀의 마음에 닿지 않았음이 분명했다.봉 부인은 그녀를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다.만약 이 자리에 봉장미가 있었다면, 분명 어미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봉 부인은 그녀의 목에 새겨진 흔적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폐하께서 너를 아끼는 마음은 세상에서 많은 이들이 바라고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란다.”“넌 대체 무엇을 그리 고집하는 것이냐?”“여인이란 결국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게 본분이란다.”“네가 그토록 오래 전장을 누볐다지만, 설마 평생 전장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냐?”“나와 네 아버지는 그저 네가 평안하고 무탈하기만을 바란다.”“제발 폐하께 그만 역정을 내거라. 폐하의 옆에 계속 있어주면 안 되겠느냐?”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다.“그분께서 어머니를 보내 이 말씀을 하라
구슬발이 쿵하고 열리며, 봉구안은 이윽고 침상 안으로 들여지려는 순간, 장막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러나 힘이 부족해 끝내 장막은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소욱의 걸음이 계속되자, 장막이 완전히 닫혔다.그녀는 닫힌 장막을 보며 눈에 서린 기세가 한층 강렬해졌다.소욱은 그녀를 안은 채 침상 곁에 앉아 있었다.그는 세심하게 그녀의 머리를 묶은 나무 비녀와 비단 끈을 풀어냈다.검은 머리카락이 우수수 흩어지자, 그는 손가락으로 머리칼 사이를 부드럽게 지나며 그녀의 뒷머리를 받쳤다.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오늘은 원래 너와 잘 이야기하려 했다.”“비록 네가 약속을 지켜 1년을 채우고 떠난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너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너무나도 독단적이구나.”“그래서 나는 내 방식으로 너를 억지로라도 약속을 지키게 할 수밖에 없었다.”봉구안은 자신의 입술을 힘껏 깨물며 정신을 붙들어 매려 했다.소욱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채고는 다시 한번 경고했다.“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계속 내공을 억지로 쓰려 한다면, 네가 더욱 쇠약해질 뿐이다.”그는 말하는 도중 손가락으로 그녀의 옷깃을 풀었다.옷깃이 풀어지며, 그녀의 피부 위로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봉구안은 눈을 꼭 감으며 두 눈썹을 단단히 찌푸렸다.그녀의 귓가에는 차갑고 낮은 그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네가 한 번은 내게 실용적인 것을 배우라고 했지 않았느냐.”“배우긴 배웠다만, 과연 내가 잘 배웠는지는 모르겠구나.”그가 손에 힘을 더하자, 그녀의 미간은 더욱 깊게 주름이 졌다.소욱은 갑작스레 몸을 뒤집어 그녀를 침상 위로 내리누르며 그녀를 응시했다.그의 붉어진 눈동자 속에는 무시당한 억울함과 강렬한 소유욕이 담겨 있었다.그의 얇은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으며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넌 결국 나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봉구안의 마음은 단호했다.그녀는 믿고 있었다. 이 장벽을 돌파하지 못할 리
연상이 내전을 들어섰을 때, 넘어져 있는 병풍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마마, 정말로 떠나실 건가요?”봉구안은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그래. 진 씨 가문의 사건은 내 마음에 새길 것이다.”그 검은 옷은 진 대인마저 해쳤다.연상은 얼굴에 걱정을 띠며 물었다.“마마, 저는 폐하께서…”“폐하께서도 결국 납득할 것이다.” 봉구안의 눈빛은 깊은 어둠에 잠긴 듯했다.만약 필요하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그날 밤, 소욱은 밤새 잠들지 못했다.그의 마음속은 불타오르는 듯했다.그는 1년의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몰래 그것을 반년으로 바꿔놓았다!온 마음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천천히 다가가려 했건만, 그녀는 이미 떠날 계획을 세워놓은 것이다!세상에 어찌 그녀만큼 무정한 여인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다음 날.소욱은 조정 일을 마친 후, 영화궁으로 향했다.호위들은 철통같은 경계를 하고 있었다. 마치 이곳이 황후의 처소가 아닌 감옥과도 같았다.내전 안.그는 장자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얼굴에는 억제된 감정이 서려 있었다.봉구안을 보자, 그녀는 소박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어떤 비녀나 장식도 없이 나무 비녀 하나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었다.그녀는 공손히 절을 올렸다. 신하의 예법이었다.소욱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어젯밤보다 훨씬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아침상은 들었느냐?”봉구안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예.”“짐은 이미 사람을 보내 그 검은 옷을 추적하게 했다. 머지않아 소식이 올 것이다.”말을 하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그녀는 살짝 물러나 피했다.소욱의 목이 탁 막히는 듯했다. 그는 억지로 감정을 억눌렀다.“궁에서 이 오랜 시간동안 그대는 짐에게 아무런…”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단호히 대답했다.“없었사옵니다.”감정이란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는 법.비록 그녀의 마음속에 망설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녀는 철석같은 마음을 가진
소욱의 호흡이 잠시 멈췄다. 그는 곧장 봉구안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궁에서 나가 그 검은 옷을 쫓겠다는 거지? 좋아, 허락하마.”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 조사하고 싶든 네 마음대로 해라.”봉구안은 흔들림 없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히 말했다.“검은 옷을 쫓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폐하, 이번에 떠나면 저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소욱의 가늘고 긴 눈이 살짝 감기더니, 약간의 분노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차분한 척하며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계약서에 분명 1년이라고 적지 않았느냐...”“폐하가 기억을 잘못하셨사옵니다. 6개월입니다.”봉구안은 손에 든 계약서를 그에게 건넸다.소욱은 즉시 계약서를 펼쳐 보았고, 냉정한 얼굴에는 놀람과 충격, 그리고 후회가 서렸다.계약서에는 정말 6개월이라고 적혀 있었다!하지만 그는 분명히 기억했다. 처음 약속했던 것은 1년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설명은 하나뿐이었다.그녀가 ‘1년’을 ‘6개월’로 고쳐 쓴 것이다…소욱은 눈을 떨구고 감정을 억누르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차가운 물에 담긴 옥처럼 묵직하고 서늘했다.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빛은 어두워졌고 미세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억지 웃음이 떠올랐다.“황후, 이런 농담은 하지 마라.”“1년이면 1년이다. 네가 멋대로 고친 것은 인정할 수 없다.”봉구안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고, 그녀의 태도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계약서를 믿사옵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옵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소욱이 계약서를 바로 찢어버린 것이다.봉구안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소욱은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고 제왕의 위엄을 드러내며 불가항력적인 어조로 말했다.“내가 말했듯이 1년이다.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줄일 수 없다!”봉구안은 바닥의 찢어진 종이를 냉담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잊으셨
장락궁 안.영비는 진왕과 그의 동조자들 간의 내밀한 서신과 증거를 소상히 황제 앞에 올렸다.“이 모든 증거는 아버지께서 찾아내신 것이옵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진왕의 속셈을 의심하시어, 겉으로는 그와 친분을 쌓는 척하며 이 명단을 입수하셨사옵니다.”영비가 제출한 증거들은 소욱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그는 서류를 검토한 뒤, 정색하며 말했다.“그대의 부친에게 큰 공이 있다.”영비의 눈에는 결연한 충성과 확신이 담겨 있었다.“충신은 제 부친의 본분이옵니다.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옵니다.”“폐하께서는 요 며칠 진왕 일로 매일 늦은 밤까지 고생하셨는데, 이제 조금이나마 쉴 수 있으실 것이옵니다.”사실 소욱이 오늘 장락궁에 온 이유는 영비가 손에 넣은 이 증거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그는 예전부터 전조를 관리하고, 영비는 온 가문을 동원하여 그를 도왔다.영비는 평범한 여인들과 달랐다. 겉보기엔 연약해 보였지만, 실은 단호하고 남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그는 그녀를 첩이 아닌 참모로 여겼고, ‘후궁은 정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예외로 여겼다.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은 달라져 있었다.이제는 황후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다.떠나기 전, 소욱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이런 증거는 앞으로 그대 부친이 직접 올리도록 하라. 전조와 후궁이 서로 얽히지 않는 것이 낫다.”영비는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으나, 곧 평온을 되찾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알겠사옵니다. 폐하 뜻대로 하겠사옵니다.”그녀는 황제 앞에서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때, 밖에서 진한길이 문을 두드렸다.“폐하, 소신이 아뢸 일이 있습니다!”…“감옥에서 실종되었다고? 아니면 탈옥한 것이냐?”소욱의 이마는 잔뜩 찌푸려졌고, 그의 눈빛은 어둡고 날카로웠다.진한길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아마도… 탈옥한 것 같사옵니다.”어쨌든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소욱의 눈은 더욱 차가워졌다.“이 일은 당분간 황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