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 급보입니다! 장미 아가씨께서 치욕을 당해 자결하셨으니 속히 경성으로 복귀하여 큰아가씨 대신 혼인하라는 노부인의 명이 있으셨습니다!”남제(南齊)의 변경, 준마가 금방 녹은 시냇물을 힘차게 밟으며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말을 탄 봉구안(鳳九顏)이 최전방에서 달리고 있었다. 흰색 소복에 검은 머리를 대충 비녀로 틀어 올린 그녀의 주변으로 귀티 나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그녀와 동생 봉장미는 쌍둥이였지만 이 시대에 여자 쌍둥이가 태어나면 불길한 징조였기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바깥을 떠돌며 자랐다.성품이 온화한 봉장미는 누구에게 원한을 살 여인이 아니었다.봉구안은 누가 그처럼 순수하고 착한 동생을 해하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게 누구든, 범인의 가죽을 발라내서 개 먹이로 줄 것이다!호위대는 그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장군, 벌써 강행군으로 말 두 마리가 죽었습니다. 전방에 객잔이 있으니 가서 좀 쉬고…”봉구안은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따라오지 못할 거면 군영으로 꺼지거라! 이랴!”‘멍청한 놈들, 쉴 시간이 어디 있다고!’그녀의 어깨에 짊어진 것은 봉씨 가문 백여 명의 목숨이었다.호위대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상대는 북대영(北大營)에서 가장 빠르고 신출귀몰하기로 소문난 봉 장군이었다!그렇게 7일 후, 황성.봉가에서 일국의 황후가 나왔다는 것은 지고무상한 영광이었다.백성들은 천자의 혼인식을 구경하러 분분히 거리로 나왔다.하지만 영친 대오가 도착했지만 새신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구경꾼들이 차츰 술렁이기 시작했다.“봉가의 장녀는 얼마 전에 산적들에게 끌려갔다가 봉가의 친위대가 출동하여 겨우 구해왔다고 들었는데 순결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 어찌 일국의 황후가 될 수 있단 말이오?”“봉가의 여인들은 참 팔자도 좋소.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 아니오. 이런 든든한 집안이 우리 남제를 지켜주고 있어서 우리가 이런 태평 성세에 살고 있는
방 안에서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던 봉구안은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봉가에는 이득이 될 게 없었다.황귀비는 봉가의 여식이 이미 순결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만약 봉장미의 대신인 그녀의 순결이 증명된다면 이 음모를 피해갈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필히 황귀비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만약 대체품 신분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황실을 기만한 중죄이며 봉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전방을 주시하며 창을 휘두르던 손으로 얼굴에 연지를 곱게 발랐다.사부께서는 그녀에게 병법과 관료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셨다.사부의 부인인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안주인으로서의 도리와 처세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중에는 첩이 득실대는 귀족가의 뒷방에서 살아남는 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는 가르쳐 주시니 겸허히 배웠지만 그걸 쓰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녀는 뒷방에 갇혀 살림이나 하면서 서방을 섬기는 여자보다는 이 나라의 곳곳을 누비며 영토를 넓히는 게 꿈인 사람이었다.그런데 결국 돌고 돌아 이런 날이 올 줄이야.태감과 그가 데려온 궁중 여관은 기세등등하게 봉 부인을 압박했다.“부인, 이건 황귀비 마마의 명령일세. 감히 명을 거부하겠다는 건가?”태감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웃듯이 물었다.‘너희가 아무리 권세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황실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 깃털이 다 뽑힌 봉황은 닭보다도 못한 법이야!’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음침한 얼굴로 봉 부인을 추궁했다.“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럼 날 너무 원망하진 마시게!”곧이어 그가 손짓하자 뒤를 따르던 궁중 시위대가 나섰다.봉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봉가의 저택에서 법도를 무시한 채, 이런 무례한 일을 벌이다니!궁중 시위대가 봉 부인을 제압하려던 찰나, 창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봉씨 가문은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으로 역사에 이름까지 올렸다. 그런데 그런 가문의 여식인 내가 순결을 의심받는 날이 오다니.”
자녕궁(慈寧宮), 태후의 처소.봉가의 일을 전해들은 태후는 흐뭇한 얼굴로 계 상궁을 바라보며 말했다.“작년 생일 연회에서 봉장미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성격이 너무 유약하여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그런데 오늘 일은 꽤나 영리하게 대처했군. 능연(황귀비 이름: 凌燕)의 측근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내가 그 아이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 같구나.”태후의 최측근인 계 상궁은 어린시절부터 궁중에서 생활한 사람으로 후궁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태후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말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편애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 황후께서 아무리 영리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영소전과 대항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밤에 황귀비가 또 소란을 부릴 수도 있겠군요.”계 상궁은 어린 황후에게 딱히 거는 기대가 없었다.태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자네 말도 맞아. 수완(琇琬,태후의 조카딸)이 입궁했을 때도 그랬지. 황상은 그 아이의 처소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능연 그 요물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황상을 자기 처소로 불러갔었지.”“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가 안타깝구나. 고모로서 아무 도움도 못 주고.”계 상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폐하는 애증이 분명한 분이고 아직까지 후궁에서 황귀비를 대적할 비빈은 나온 적이 없지요. 황후께서도 아마 오늘 밤에 독수공방하게 될 것 같군요.”태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태후는 황제의 생모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황제를 길러준 사람이었기에 그의 성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영비를 향한 그의 집착과 죄책감은 전부 대체품인 능연에게로 갔다.선황의 유언장이 없었더라면 아마 황후의 자리도 진작에 황귀비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길시가 되자 봉구안은 금자수를 수놓은 혼례복에 황후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에 올리고 옥석으로 장식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복도의 끝에는 마찬가지로 옥으로 된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십보 걸을 때마다 뒤를
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으니 봉구안은 마지못해 다시 치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상이 긴장한 탓인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세 번째로 두피에서 통증이 느껴졌을 때, 봉구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나가 있거라.”스승님 밑에서 변장술을 익힐 때 단장하는 법도 많이 익혔기에 그녀는 손쉽게 머리를 원래대로 복구했다.연상은 그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마마, 제가 한 것보다 더 예쁘네요.”그렇게 그들이 황제를 맞을 준비까지 다 마쳤을 때, 밖에서 전갈이 왔다.“마마, 황귀비마마께서 두통이 재발했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영소전으로 가셨사옵니다.”연상은 입만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하필 황제가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두통이 재발하다니!황귀비의 뻔한 수가 엿보였지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황귀비 얘기가 나오자 죽은 동생 봉장미가 떠올랐다.‘장미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가 복수해 줄게!’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파악해야 하는 법.황귀비는 장기간 독보적인 총애를 받아왔으니 신변에 분명 무예가 강한 호위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한편, 자녕궁.태후는 염주를 손에 쥐고 더듬으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혼인 첫날밤에 서왕을 신랑 대역으로 세웠다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황상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벌일 때까지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궁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소인은 정말 몰랐사옵니다.”황제가 유아독존에 제멋대로인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태후의 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대로 가다 가는 천하 백성들에게 태후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난 받을 판이었다.태후는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서럽고 무기력함에 빠졌다.“내 비록 황상의 생모는 아니지만 현명한 군왕으로 가르치려고 노심초사했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그 모습을 본 시종들은 태후가 안타깝고 황제가 불효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소식
봉구안이 신혼방으로 돌아오자 아까까지 잔뜩 인상을 쓰며 싫은 티를 내던 최 상궁은 싱글벙글 웃으며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시종들에게 일렀다.그러고는 감개무량해서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그동안 황귀비를 제외하고 폐하께서는 한 번도 다른 비빈들에게 밤시중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마가 그 선례를 깨신 거예요!”연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최 상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궁에서 여자의 지위는 황제의 총애와 비례한다지만 존귀한 황후마저 거기에 포함될 줄이야.봉구안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최 상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연상이만 남고 다들 나가 있거라.”내전이 조용해지자 연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마마, 폐하께서 오시기로 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긴 하나, 이렇게 되면 황귀비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되는 거 아닌가요?”“부인께서는 저희에게 궁에서 적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 하셨사온데….”“어머니께서 장미에게도 그러라고 가르쳤더냐?”봉구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이런 교육 방식을 찬성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은혜는 배로 갚고 원수도 배로 갚으라고 가르쳤고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유감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사실 봉 부인도 봉가에서 전해져 내려온 법도대로 자식들을 가르쳤다.봉가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과문이었기에 유독 딸에게는 요구가 엄격했다.악기, 바둑, 그림, 서시 모든 방면에서 봉가의 딸은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명백한 요구가 있었다.그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 좋은 명성을 유지해야 했다.장미는 서신에서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언니가 부럽다고 하면서 황후가 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매번 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봉장미처럼 유순한 사람이 입궁하여 황후가 되었다면 주변의 시달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연상은 봉부의 하인들 중에서 봉구안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주변을 경계하다가 다가가서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마마, 저희를 예의주시하는 사
소리를 들은 연상은 바로 내전으로 달려왔다.“마마, 무슨 일이시옵니까...”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가!”사내의 목소리에 연상은 크게 당황하며 사람을 부르려 하였다.이때, 안으로 달려온 태감이 급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낮은 소리로 호통쳤다.“멍청한 것, 폐하가 안에 계신데 이 무슨 소란이더냐!”연상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폐하?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던 그 폭군?’침실 안.사내는 한손으로 봉구안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비수를 잡은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봉구안을 내려다보았다.봉구안은 상대를 던져버리려다가 황제라는 것을 깨닫고 반항을 멈추었다.주변이 어두워서 그녀는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그에게서 진동하는 살기는 진짜였다.“황후, 해명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한 살기가 진동하고 있었다.평범한 여자였다면 지레 겁을 먹고 우물쭈물했겠지만 봉구안는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태연히 답했다.“그 일이 있은 후로 살기 위해 비수를 항상 가까운 곳에 두었습니다. 일부러 폐하께 무례를 범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녀는 봉장미가 아니었기에 동생의 나긋나긋하고 온화한 말투까지는 모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딱딱했다.마치 자신의 부군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설명을 들은 사내는 크게 코웃음치고는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몸을 일으켰다.봉구안은 어슴푸레한 달빛을 빌어 용포를 풀어헤친 사내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했다.그는 장난감을 손에 쥔 것처럼 비수를 요리조리 돌리며 관찰했다.침실 안에 삭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봉구안은 몸을 일으키고 사내와 일정거리를 유지한 뒤에 사내의 동향을 주시했다.이때, 사내는 갑자기 몸을 비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그녀의 목에 가져다댔다.봉구안은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어차피 한번은 경험해야 할 일이었고 예상 범주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솔직히 폭군에게 첫날밤을 바치는 것보다 차라리 이 방법이 더 나았다.적어도 치욕스럽게 사내의 밑에 깔리지 않아도 되니까.봉구안은 하얀 치마자락을 찢어 손수건 대신 침대에 받쳤다.그리고 한손으로는 치마자락을 들고 한손에는 비수를 들었다.이미 하기로 한 일이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그냥 전장에서 부상당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어차피 어릴 때부터 수많은 부상을 이겨내며 살아온 그녀였다.곧이어 그녀는 칼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그 순간 갑자기 뻗어나온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봉구안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소욱은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아까보다 더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군.”챙그랑!말을 마친 그는 비수를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어차피 네가 순결한 몸인지 아닌지 짐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이렇게까지 해가며 황후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더 이상 멍청한 짓은 하지 말거라. 예를 들면 짐이 영소전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짐을 만나겠다고 거기까지 찾아오지 말란 말이다.”봉구안은 이를 악물었다.폭군은 그녀가 관심을 끌려고 찾아간 거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하기 싫은 걸음을 한 것이었다.어차피 밤시중을 들라는 말을 강조한 것도 일부러 그녀를 농락하기 위함일 것이다.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이런 방식이 당신의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소용 있을지 몰라도 나한텐 안 통하지.’그녀는 처음부터 황제의 총애를 바라고 입궁한 게 아니니 오히려 그녀가 원하던 상황이었다.봉구안은 신속히 옷섶을 여미고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폐하, 신첩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는 폐하의 총애를 바라지 않겠습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애정하시는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신첩 앞으로 귀비를 친자매처럼 여기고 폐하를 대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귀비를 대할 것이옵니다.”그
봉구안의 얼굴 그 어디에도 초췌하거나 상심한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황후만 입을 수 있는 화려한 예복을 입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자녕궁 대문 앞에 나타났다.청초하지만 싸늘한 기운을 담고 있는 눈동자는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상위자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피부는 황성 여자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이 아니라 건강한 윤기가 나고 분홍빛을 띠는 홍조가 생기를 더했다.청초하지만 귀티가 넘치는 오관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영비와 닮은 비빈들만 봐온 궁인들은 경국지색의 미모를 보자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황성 제일 미녀라는 소문에 걸맞게 그녀에게서는 비범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반면 봉구안은 자신의 얼굴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강호를 떠돌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는 변장을 하고 생활했다.미모는 그녀에게 짐만 될 뿐이었는데 특히나 군영에서 더욱 심했다.사모는 그녀가 아까운 얼굴을 괴롭힌다고 꾸중했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봉구안의 뒤를 따르는 연상은 저절로 어깨가 올라가고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대청으로 들어간 봉구안은 태후의 앞에서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신첩, 어마마마를 뵈옵니다.”태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황후, 예의 차릴 것 없으니 편히 앉거라.”곧이어 태후는 주동적으로 황제 얘기를 꺼내며 봉구안을 위로했다.“황상은 정무가 바쁘셔서 황후에게 조금 소홀히 하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거라.”봉구안은 담담히 대답했다.“예, 어마마마.”그녀와 대화를 나눌수록 태후는 황후가 예상처럼 살갑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안면근육이 굳은 것처럼 딱딱하고 태생이 웃을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분명 연회 때 봤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사실 상 봉구안은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다.어릴 때는 그녀의 웃음 한번 본다고 사모가 짖꿎은 장난도 많이 쳤지만 그녀는 유치하다고만 느꼈을 뿐이다.나중에 장군이 되면서 여자인 것을 들
영비는 서왕에게 목을 졸렸지만, 여전히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비록 전하께서... 저에게 이렇게 하신다 해도, 저는 여전히 전하를 용서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폐하께 전하께서 저를 궁에서 데리고 나갔고, 이렇게 오랜 세월 저를 가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이지 않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전하는 저를 정말로 해칠 수 없으십니다.”결국 서왕은 손을 풀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모용란, 너는 후회하게 될 것이야.”영비는 여전히 여린 모습을 보였다.“그 말은 제가 전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입니다.”“저희는 모두 폐하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인 것이 아니었습니까?”“어떤 수단을 쓰느냐는 그저 저희의 선택일 뿐입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서왕의 앞에 다가가 그의 허리띠에서 옥패를 살짝 빼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기억하십니까? 저희 셋은 서로를 지키며,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로 했지 않습니까.”서왕은 갑자기 기분 나쁜 한기를 느끼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모용란, 너는 정말 구제불능이야.”그는 단호히 말을 마친 후, 거침없이 돌담을 빠져나갔다.영비는 어두운 바위 속에 혼자 남아, 서왕의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슬퍼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그녀는 소리 없이 속삭였다.“나는 널 용서했어, 정말로.”…자녕궁.영비가 궁에 돌아온 이후, 태후는 한 번도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영비가 궁으로 돌아온 그날, 태후에게 와서는 여러 마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그중에는 과거의 행동을 용서할 것이며, 황제가 태후에게 처벌을 내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하지만 태후는 영비의 말 속에서, 언젠가 복수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태후마마, 약을 드셔야 하옵니다. 어의께서 말씀하시길, 약을 드시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으실 거라 하였사옵니다.”태후는 깊은 갈색 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 약을 밀쳐내며 말했다.“아
검은 옷을 입은 자는 감옥에 갇혀 철저히 감시를 받고 있었다.혀를 깨물어 자결하거나 독을 먹어 목숨을 끊을까 염려해, 그의 입에는 철제 입막이가 씌워져 있었다.봉구안이 감옥에 들어서자, 검은 옷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은 마치 웃고 있는 듯 보였다.입막이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가면이 벗겨진 그의 얼굴이 봉구안의 눈에 들어왔다.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나이, 두 눈은 끝이 위로 치켜올라가 날카롭고 사납게 보였다.봉구안은 머릿속으로 무수히 그려보았던 원수의 얼굴을 마침내 마주하게 되었다.그녀는 옥졸에게 명령했다.“그 입막이를 벗겨라.”쇠사슬이 풀리자, 검은 옷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소장군, 요즘은 평안한가?”그는 마치 죄인이 아닌 듯,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하듯 가벼운 어조였다.감옥 안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봉구안은 서두르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단회욱은 대체 어떻게 죽였지?”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그 속에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검은 옷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이미 알고 있지 않소? 그는 그대에게 날아든 천수지독을 대신 막아내고, 독이 퍼져 죽었소.”봉구안의 눈빛은 점점 살기가 어려워졌다.“왜 그가 내 목숨으로 5년을 바꾸었다고 말한 거지?”검은 옷은 일부러 기억을 더듬는 척하며 눈을 위로 굴렸다.그리고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그런 일이 있었나? 대체 어디서 들은 이야기요?”봉구안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그의 얼굴을 냉혹하게 내려다보며 단호히 외쳤다.“당장 말하거라!”검은 옷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태연히 답했다.“북대영의 전신의 손에 죽는다면, 영광일 뿐이오.”그 말을 끝으로 그는 눈을 감았다.봉구안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네가 죽음을 원한다면, 내가 네 바람을 절대 들어줄 리 없다.”검은 옷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여기가 천옥이란 걸 알고 있소. 심문이든 고문이든, 하고
궁중에는 영비와 비슷한 모습의 여인들이 많았다.이 순간, 소욱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봉구안은 그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다른 비빈들에게는 늘 냉담했던 그의 눈에, 눈앞의 여인을 향한 복잡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영비…”소욱의 미간에는 깊은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그 순간, 그 여인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곧장 그의 품에 안기며 흐느꼈다.“폐하, 소첩입니다. 소첩은 죽지 않았사옵니다. 소첩이 돌아왔나이다!”옆에 있던 녕비는 이를 보며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반면, 현비는 품위 있게 말을 보탰다.“폐하께서 대승을 거두셨고, 영비마마께서도 돌아오셨으니, 이 또한 경사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소욱은 어색한 듯 품에 안긴 여인을 살짝 밀쳐내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곁에 서 있는 황후를 바라보았다.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영비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 황후를 바라보며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의식한 듯했다.“황후마마.”봉구안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대꾸했다.“예를 생략하거라.”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본디 불가능한 일이었다.이로 보아 영비의 죽음에는 분명 감춰진 진실이 있는 듯했다.하지만, 봉구안에게는 이 모든 것이 무관한 일이었다.영비보다 그녀가 더 마음에 두고 있는 이는 바로 그 검은 옷을 입은 독인이었다.그녀는 반드시 단회욱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내고자 했다.…영화궁.봉구안이 돌아오자마자, 최 상궁은 급히 그녀를 따라와 영비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마마, 오늘 영비마마를 보셨사옵니까?”“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겠사옵니까!”“며칠 전부터 영비마마의 소식으로 궁중이 온통 뒤집혔다 하옵니다.”“듣자 하니, 그녀께서 과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태황태후마마의 비밀스러운 보살핌을 받아왔고, 이제야 완쾌되어 돌아오셨다 하옵니다….”봉구안은 마음에 짙은 불쾌함이 스쳤다.“물러가라.”연상은 그녀의 심중을 눈치챘으나, 감히 더 묻
쾅!봉구안의 주먹이 날아들자, 소욱의 턱이 빠져버리고 말았다.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 그는 다음 날 밤, 또다시 장막을 버려두고 봉구안의 곁으로 몰래 들어왔다.이번에는 행동을 조심하여 그녀에게 손을 대거나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누워만 있었다.그 덕에 봉구안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묵인하였다.하지만, 이내 그의 본성이 또 드러나고 말았다.며칠 뒤, 그들이 묵은 역참에서 사건이 벌어졌다.밖에서는 두 사람이 화목한 부부처럼 보였으나, 문이 닫히자 봉구안은 바로 바닥에 자리를 깔기 시작했다.그러나 소욱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며 말했다.“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 너는 침상에서 자거라.”봉구안은 단호히 거절했다.“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황제이십니다. 당연히 침상에서 주무셔야 합니다.”그러자 소욱은 느긋하게 반박하였다.“황제와 황후라면 본디 같은 침상을 쓰는 것이 맞지 않느냐. 이후 이 나라를 위해 힘을 써야되겠구나…”이 말에 봉구안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그러자 그녀는 냉랭하게 말했다.“그러하오면, 이 바닥은 폐하께 양보하겠나이다.”소욱은 잠시 벽 쪽을 보더니 천천히 바닥에 누웠다.그는 조용히 누웠으나, 몸을 옆으로 돌려 침상 위의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목욕을 마치고 돌아와 침상에 올라가자, 곧바로 비단 장막이 내려졌다.밤이 깊었고, 봉구안은 편히 잠들었다.그러나 한밤중, 그녀는 누군가 곁에 있음을 느끼고 눈을 떴다.그곳에 누워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소욱이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밀쳤으나, 그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바닥에 쥐가 있어, 침상에서 자는 것이 안전하겠다.”봉구안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쥐라니요? 이는 분명 폐하께서 지어낸 거짓말이옵니다!”소욱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정말이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봉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쥐가 있더라도, 폐하께서 그것을 무서워하실 리가 없사옵니다.”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무섭
황성.진왕이 군량을 빼돌렸다는 죄목으로 붙잡혔다. 증거가 명백했으므로, 서왕은 황제의 밀명을 받아 진왕을 감옥에 가두었다.진왕은 억울함을 외치며, 서왕이 자신을 모함한 것이라 주장했다.이 일은 태황태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하지만 태황태후가 나서도 서왕은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한편, 황제가 이끄는 대군은 반송길에 접어들었고, 사수성을 나선 후 여정이 험해 숙소를 구하기 어려웠다. 결국 군은 야영을 선택했다.봉구안은 말했다.“소첩은 마차 안에서 지내겠사옵니다.”같은 자리에서 소욱과 함께 지내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요며칠 밤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니 매우 불편했다.소욱은 억지로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지치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였다.하지만 병사들 사이에서는 이들 부부의 냉랭한 분위기가 도마 위에 올랐다.“요 며칠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자주 다투시는 듯하네.”“그러게. 얼마 전까지는 화목하셨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그중 한 병사가 조심스레 말했다.“내가 들은 게 있네. 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잘못한 일이 있는 모양이야.”모두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서 말해 보게.”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어제 말에 물을 먹이러 갔는데, 마차 안에서 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사과하는 소리를 들었지.”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거짓말 말게나.”병사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진짜라니까! 폐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네. ‘아직도 화났느냐? 어서 이리 와서 네 작은 손을…’”“닥치게!” 다른 병사가 발로 찼다.농담이라며 대꾸할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그 병사는 엉덩이를 만지며 헤헤 웃었다.사실 그들 간의 대화는 그 병사가 지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실제로 황제가 황후에게 사과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하였다.…마차 안.봉구안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한밤중, 누군가 마차에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긴장하며 몸을
남대영.대군들은 황성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손덕방은 속으로 하늘에 감사하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폐하께서 군영에서 무사히 돌아가시니, 하늘이 도우셨사옵니다!”그는 격하게 경례하며 소리쳤다.“장수 손덕방, 폐하와 황후마마의 출발을 배웅하겠습니다!”소욱은 올 때는 말을 탔으나, 돌아갈 때는 마차를 타기로 했다.마차 안에서 그는 손수 귤 하나를 까서 반으로 나눠 봉구안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이리 좀 먹어보거라.”봉구안은 아무런 표정 없이 얼굴을 돌리며 답했다.“먹고싶지 않사옵니다.”소욱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그래, 짐도 사실 귤 따위는 좋아하지 않지. 시큼한 것은 줄곧 입맛에 맞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황후와 짐의 입맛이 참으로…”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봉구안은 갑자기 탁자 위에 놓인 귤을 집어들더니 한 입에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자신과 맞서려 한다는 걸 알고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흥미를 느낀 듯, 미소를 지었다.최소한 어젯밤처럼 냉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때, 마차 밖에서 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폐하, 급히 전해드릴 밀서가 있사옵니다!”소욱은 손을 내밀어 밀서를 받아들었다.그러면서 봉구안을 힐끗 바라보며 밀서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네가 먼저 보겠느냐?”봉구안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런 농은 그만두십시오. 어찌 중요한 정무를 두고 저와 농을 하는 것입니까?”소욱은 밀서를 열어 훑어본 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그는 곧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어젯밤 짐이 네게 약조했던 큰 선물, 이미 준비해 두었다.”봉구안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는 그런 건 필요 없사옵니다.”소욱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그녀를 제 앞으로 잡아끌더니, 허리를 가로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짐의 사람들이 독을 쓴 그 검은 옷을 붙잡았는데, 이 선물도 필요 없다 하겠느냐?”봉구안은 순간 놀라며 되물었다.“정말이십니까?”“짐이 거짓을 말하
소욱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그녀의 귀 옆에서 쓴웃음을 지었다,“너, 왜 날 밀어내지 않는 거지? 혹시 내가… 죽을까 봐 그러는 것이냐?”봉구안은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의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소욱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입술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렇다면, 영원히 날 밀어내지 말거라. 아니면, 정말로 죽어버릴 테니 말이다.”그가 그녀 허리 뒤에 둔 손으로 그녀를 조금 더 위로 끌어올렸다.몸에 닿는 무언가를 느낀 봉구안은 깜짝 놀라 크게 몸부림쳤다.잔잔하던 수면이 순식간에 요동쳤다.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소욱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내가 맞은 화살, 그건 너를 위해 받은 것이다.”그가 말을 마치자, 품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소욱은 조금 미안한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소장군, 너는 이렇게 정에 얽매이면 안 되는 사람이야.”…한편, 진한길은 항상 장막 밖을 지키고 있었다.그는 안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남자의 거친 숨소리, 여인의 억누른 신음소리…이 조용한 밤에 그 소리는 유난히 들썩였다.황제와 황후의 명이 없으니 감히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다. 혹여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였다.그래서,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들었다.장막 밖으로 새어나온, 마치 악마의 낮은 탄식 같은 그 소리를.“단회욱은 이미 죽었어. 내가 네 남편이고, 네 남자야.”“하지만, 왜 나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지? 그렇게도 싫은 것이냐?”약 한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 장막 밖으로 나왔다.그러나 진한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황제가 황후를 품에 안고 나온 모습이었다.진한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황후의 몸은 황제의 외투로 덮여 있었고, 머리카락은 흩어져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으며, 미약한 숨소리를 내뿜고 있었다.반면 황제는 중의만 걸친 차림이었다.
진한길은 차마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그는 곁에 찬 패도를 풀어 봉구안에게 넘기고는, 단호히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봉구안은 대신 장막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잠시 후, 장막 안에서 살의가 어린 굵직한 목소리로 물러나라는 외침이 들려왔다.봉구안은 즉시 안으로 들어갔고,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진한길이 물속에서 무릎 꿇은 채, 소욱의 허리띠를 풀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그녀는 단호히 외쳤다.“멈추거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진한길은 대장부임에도 마치 큰 치욕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황후마마, 마마께서 분명… 폐하를 모시라 하셨사옵니다.”봉구안은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내가 말한 것은 그저 폐하 곁을 지키라는 뜻이었지, 손대거나 다른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진한길은 이 말을 듣고서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곧장 뒤로 물러나며 다급히 말했다.“그저 지키라는 말씀이셨군요…”알고 보니 그는 방금, 그 일을 마친 후 자결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진한길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의 설명이 불분명했던 탓임을 깨달았다.그러니 진한길이 들어갈 때,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결연했던 것이다.그 순간, 소욱은 진한길에게 받은 충격으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힘이 빠진 채 물속으로 미끄러질 뻔했다.봉구안은 즉각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에 들어가 그를 부축했다.진한길은 머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황후마마, 차라리 신은 밖에서 지키겠사옵니다.”봉구안은 무언가 지시하려던 찰나, 소욱이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그녀는 소욱을 바라보았다.그의 안색은 몹시 좋지 않았다. 마치 서서히 양기를 빼앗기는 사람처럼 온몸이 잔뜩 경직된 채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하지만 아까와 같은 무력감보다는, 조금은 나아진 듯했다.봉구안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남대영.눈먼 무의가 장막 안으로 이끌려 들어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진단을 내렸다.“과연 독입니다. 이는 확실히 고독이 맞습니다!”소욱은 눈썹을 단단히 찌푸렸다.통증을 참기 힘들 때마다, 그는 본능적으로 봉구안의 손을 꽉 붙잡았다.봉구안은 오로지 무의를 주시하며 물었다.“그대가 독을 진단했으니, 해독할 방도가 있겠는가?”무의는 신중히 고개를 저었다.“비록 고독이 맞으나, 이는 제가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독이라 손을 쓸 방도가 없습니다.”이 말을 듣자 곁에 있던 진한길은 분노에 차 외쳤다.“고독이라면 남강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는 소욱에게 청을 올렸다.“신하가 즉시 군을 이끌고…”“물러가라.” 봉구안이 그의 말을 끊었다.진한길은 황제를 걱정하는 마음에 자제력을 잃은 것이었다.“신이 밖을 지키겠습니다.”무의는 귀를 쫑긋 세우며 뭔가 들으려는 듯했다.그는 자신이 지금 남제의 군영에 있음을 알지 못했다.봉구안은 이어 물었다.“그대가 고치지 못한다면, 다른 무의들은 고칠 수 있겠는가?”무의는 대답했다.“제가 해독할 수 없는 고독이라면, 남강 전체를 둘러보아도 이를 해독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봉구안의 표정은 차가웠다.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를 깊이 숙고하는 듯했다.잠시 뒤, 그녀는 오백을 불러들여 쉰 듯한 목소리로 명했다.“무의를 남강으로 돌려보내거라.”오백은 손을 모아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눈먼 무의는 나이가 많아 걸음이 더뎠다.장막 밖으로 거의 나갔을 때,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제가 감히 추측하건대 이는 음고입니다.”“부인, 남편 분께서 밤을 버티어 내고 내일 아침 해를 본다면, 희미하나마 생명의 불씨가 있을지 모릅니다.”봉구안은 이 말을 듣자마자 진한길에게 명령했다.“뜨거운 물을 데우라! 많이 데우도록 하라!”진한길은 이 시점에 이르러 황후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 따랐다.한 시진 뒤, 봉구안은 소욱을 데리고 임시로 마련한 수조로 향했다.거기엔 임시 장막이 쳐져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