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를 지켜라!" 진한길이 황제 앞에 나서며 외쳤다.소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내려다보며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전 안의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고, 곧 혼비백산하여 숨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소욱은 명령을 내렸다. "우선 태황태후를 모시고 나가라!"그 말을 들은 태후는 마음이 서늘해졌다. 봉 부인은 제일 먼저 딸을 떠올렸으나, 봉 대인이 억지로 끌어내며 질타했다. "여기 수많은 호위들이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는 겁니까, 부인!"봉구안은 자주 암살을 겪었기에 주위를 살피며 이 암살이 치밀하게 계획된 것임을 예감했다. 어지럽게 쏘는 화살들은 아마도 눈속임이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수법일 터였다. 진정한 살수는 예상치 못한 곳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문득, 그녀의 눈에 그것이 보였다! 어수선한 틈을 타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내시 차림의 자가 황제를 겨냥해 소매 안에서 은밀히 화살을 드러낸 것이다.봉구안의 얼굴에서 더 이상 평정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뇌리에는 오직 '호위' 한 단어만 떠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곧장 소욱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소욱 또한 무공이 높은 자였다. 암살자의 화살이 날아오는 순간, 그는 그것을 보았다.그러나 순식간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 앞으로 날아들었다. 다른 후궁들이 모두 제 목숨을 구하는 데에만 급급할 때, 황후는 굳건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마치 끊어진 연처럼 중상을 입고 그 앞에 쓰러졌다.찰나의 순간, 그 화살이 마치 그의 가슴을 찌르는 듯해 소욱의 눈동자가 급격히 수축했다.몸은 이미 그 어떤 의지보다 먼저 움직였고, 그는 황후를 받쳐 들었다."마마!" 군중 속에서 연상은 경악하여 외쳤다. 그녀는 봉구안이 언제 그리로 달려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봉 부인은 그 광경을 보고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소리쳤다.이때 봉구안의 의식은 매우 또렷했다. 자신이 목숨을 잃을 위기는 없을 것이다.
비록 황후가 직접 나서서 화살을 빼야 한다고 말했으나, 그녀의 몸은 황제의 것이었으므로 어의는 황제의 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소욱의 얼굴은 얼음같이 차갑게 굳어 있었고,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빼거라.”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어의는 정확한 각도와 힘으로 그 화살을 뽑아냈다. 봉구안은 몸 밑의 이불을 단단히 움켜쥐고, 단 한 번 억눌린 신음만 내었을 뿐, 더 이상의 고통스러운 소리는 내지 않았다. 굵은 땀방울이 그녀의 관자놀이와 머리카락을 적셨다. 어의는 곧 그 철촉을 검사하더니, 갑자기 손을 떨며 소욱에게 말했다. “폐하, 역시 소인의 예상대로 이 화살에는 독이 묻어 있습니다!” “목숨에 지장은 없겠느냐?” 소욱이 물었다. 어의가 대답했다. “다행히 빨리 뽑아내어, 마마께서는 큰 위험에 처하지 않으실 것입니다.”어의는 곧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소욱은 침상 곁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어의가 봉구안의 등을 드러내기 위해 옷을 자르고, 특제 약수를 몇 차례 뿌려 상처에 남은 독을 씻어낸 후 약가루를 뿌려 붕대로 감쌀 참이었다.“중궁마마, 상당히 아프실 수 있습니다. 참아주십시오.” 봉구안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베개에 반쯤 얼굴을 기대고, 창백하고 쇠약해진 모습이었으나 눈빛은 굳건했다. 약수가 상처에 닿자 수천 마리의 개미가 피부를 물어뜯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쥔 채 한마디의 비명도 내지 않았다. 어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내도 참기 힘든 고통을 여인이 이렇게 잘 참다니…그는 동작을 재빨리 마무리하고 독혈을 짜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정상적인 붉은 피가 나오자 멈췄다. 봉구안은 결국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어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의사로서 남녀 구분 없이 환자를 돌보아야 한다지만, 필경 상대는 황후였다... 상처를 붕대로 감싸려면 가슴 둘레를 한 바퀴 감아야 했기에, 황후의 옷을 벗겨야 했다. 어
녕비는 바로 땅에 엎드려, 얼굴엔 여전히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다. 태후는 예전의 자애로움은 온데간데없이, 앉은 자리에서 얼굴에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오늘 밤의 일, 네가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 제대로 말해라!”녕비는 부정하려 했다.“마마, 저는 절대로...”태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소문이 돌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뭔가 수상하다고 느꼈다.”“황후와 폐태자가 자녕궁에서 서로 만나 옛정을 되새겼다고들 떠들어댔지만, 그날 폐태자는 사실 나를 찾아왔었지.”“그날 밤, 나는 폐태자를 만나주지 않겠다고 전하고 돌려보냈다. 하지만 폐태자는 기어코 늦은 새벽까지 궁 문 밖에서 날 기다렸지.”“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자녕궁 안에 손을 뻗을 수 있는 건 너 하나뿐이었느니라. 네가 내 뜻을 가장해 전한 것이 아니더냐?”녕비는 황급히 변명했다.“마마, 저는…”“말 끊지 마라! 아직 할 말이 남았다!“나는 네가 그저 황후를 못마땅히 여겨 조금 장난을 치는 정도라 여겼느니라.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지. 오늘 밤… 솔직히 말해보거라. 폐태자에게 보내는 예물에 네가 손을 대지 않았느냐?”녕비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부정했다.“아닙니다! 마마, 이번 일은 정말로 저에 대한 오해십니다!”태후는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아까만큼은 분노하지 않고 다소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정말 네 짓이 아니더냐?”녕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마마, 이는 모두 정 귀인의 생각이었습니다. 정 귀인이 저를 이용해 황후를 함께 해치려 한 것입니다.”태후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모용선이?’그 애가 쉽지 않은 인물임을 직감했다!그녀는 이내 녕비에게 명하였다.“이제 일어서거라.”녕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후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주무르며 한층 얌전한 목소리로 말했다.“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찌 정 귀인을 쉽게 믿겠습니까?” “정 귀인은 저를 이용하려 했지만, 정작 뒤에서 웃는 이는 바로 저였답니다.” “정
연상도 망설였다. 봉구안이 깨어난 것을 황제에게 알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장막 안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폐하… 신첩 방금 막 깨어났사옵니다."그 목소리를 들은 소욱은 손을 들어 얇은 장막을 걷었다. 뼈마디가 드러나는 그의 손이 장막을 잡아 주름을 남겼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소욱은 그가 병약한 여인을 보며 손가락에 힘을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편히 쉬시오.”무심하게 던진 차가운 배려 외에는 그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봉구안이 어색한 침묵을 깨고, 몸을 일으켜 앉으려 했지만 소욱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와 그녀의 허리와 배를 받쳐주었다. 그런데 소욱은 미처 알지 못한 채 그녀의 예전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고, 그녀는 아픈 기색을 감추려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소욱은 그녀의 달라진 표정을 눈치채고 물었다."무슨 일이오?"그가 이처럼 인내심을 갖고 묻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괜찮사옵니다.” 봉구안은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내심 속으로는 황제를 향해 눈을 흘기며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몸을 옆으로 돌려 앉았다.소욱은 그녀가 배에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전에 그녀의 상처를 싸매줄 때에도 옷을 가슴 아래까지만 내려서 시선을 조심스럽게 둔 터였다. 하지만... 불가피하게도 일부는 보게 되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고 여겼으나, 지금 그녀를 보니 여성의 옷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가릴 수 있는 것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봉구안은 황제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폐하, 신첩 이제 영화궁으로 돌아가야 할 듯하옵니다."봉구안이 고개를 들어 말하자, 소욱은 다소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깊고 차가웠다.“알겠소. 짐이 사람을 시켜 가마를 준비하게 하겠소.”…방비전.모용선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 추홍에게서 그녀가 대전에서 물러난 후 자객이 출현하여 황후가 황제를 위해 치명적인 화살을 대신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태후는 평소 자애롭고 온화한 사람이다. 녕비가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녕비의 얼굴에 절대 손을 대지 않았을 터였다. 태후는 놀란 녕비를 바라보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마음 또한 편치 않았다."너...내가 늘 신중히 말하고 행동하라 했거늘, 너 지금 어쩌다가... 어쩌다가 이리도 나를 실망하게 만드느냐!”“그 정 귀인의 몇 마디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휘둘리다니, 도무지 생각이 있는 게냐? 정 귀인이 그리 순수하게 너를 위한다 여겼더냐?”“정 귀인은 너가 영비처럼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다루기 쉬운 상대라는 것을 알기에 네가 상위로 올라가기를 도우려는 척하는 것이다.”“정 귀인이 아들을 낳으면, 너는 그저 빈껍데기를 지키다가 결국 한순간에 내쳐질 운명인 것을 너는 알기나 하느냐?"태후의 일침에 녕비는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그녀는 맞은 뺨을 부여잡으며 감정을 겨우 다스렸다.“고모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자녕궁에서 나선 뒤, 녕비의 마음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황제가 황자였던 시절, 선제께서 이미 자신을 황자에게 허락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변란의 시기였기에 혼사의 일이 미뤄졌고, 결국 봉장미가 뒤늦게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때의 굴욕을 참고 또 참아왔던 것이다.모용선은 확실히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녕비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는 쉽게 화를 돋우어 놓았다. 그러나 태후의 말씀처럼, 황후의 자리라면 꼭 다툴 필요는 없다. 다투고자 한다면, 황자를 먼저 낳아야만 한다!…궁 밖, 모용 저택.명절을 맞이하여 모용가 사람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온 가족이 모여 입을 모아 모용걸을 극찬했다."형님, 폐하께서 제 조카를 만호후로 봉할 거라는 말이 벌써부터 돌고 있지 않습니까? 어찌 아직 하명이 없습니까?"한쪽에 있던 부인이 말했다. "좋은 일에는 장애물들이 많은 법이오. 그대는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 거요."모용객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 소문일 뿐이라서, 성상의 뜻을
태황태후가 영화궁에 행차하니, 그 위엄이 자못 웅장하였다.최 상궁은 서둘러 태황태후를 모시고 내전으로 들어갔다.내전 안으로 들어가니, 황제가 책상에 앉아 침상 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는 황후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 황제는 황후에게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태황태후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였다.이때 유사양이 예를 갖추며 고하였다."소신, 태황태후를 배알하옵니다!" 비로소 황제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태황태후를 맞이하였다."태황태후마마, 어서오시옵소서." 황제의 목소리가 다소 쉰 듯했다. 그 또한 열이 나서 목소리가 상한 듯하였다. 태황태후는 손자를 아끼는 마음으로 말했다."황상, 어젯밤 자객의 일을 처리하느라 고생이 많아 별로 쉬지 못했을 터인데, 어찌 황후의 약까지 직접 챙기나이까. 지금 황후에게는 이리도 많은 사람이 시중을 들고 있으니 이만 물러가 쉬는 게 어떠합니까." 황제는 얼굴에 무심한 표정을 띠며,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소자가 순전히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을 뿐이옵니다. 곧 떠날 참이었사옵니다."태황태후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침상에 누운 황후를 보며 물었다."어의가 뭐라 하던가요?"황제가 대답하였다."경황이 놀란 나머지 병이 든 것 같사옵니다."태황태후는 의아한 기색으로 반문하였다. "놀란 것뿐이라덥니까?"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듯하옵니다."이때 호위가 급한 일이 있어 큰 소리로 고하였다. 황제는 태황태후께 예를 갖춰 인사드린 후 황망히 자리를 떴다.이윽고, 태황태후는 홀로 남은 채로 중얼거렸다. '소가의 남자는 본래 무정하다 하였거늘, 이놈 또한 그 박정하기로 유명했던 부황과 조부의 성정을 닮았구나.'태황태후는 손자가 이토록 황후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잠시 내심 달갑지 않았으나, 다시 황후를 바라보니 동정심이 일렁였다.'결국 후궁에 들어선 여인은 모두 정 없는 사내를 남편으로 맞이한 셈이 아니겠느냐.'“황후를
“예.” 누구든 위험에 처한 이가 있다면, 그녀는 꼭 나서서 도울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봉구안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 능력에 맞는 범위 내에서 구하겠습니다.” 봉 부인은 늘 그녀에게 이르길, 이 목숨은 우선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소욱은 그녀의 그 한마디, “예”라는 말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지만, 그저 어쩐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황 귀비 또한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고, 심지어 심혈을 기울여 자신의 수명을 줄이기까지 했다. 그에 비해 황후가 자신을 위해 천수의 독을 해독해 주고, 화살을 막아 준 것은 네 해 동안의 그녀의 희생에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은 오히려 황후에게서 움직였다. 어쩌면, 황 귀비는 그에게 주면서도 그에게 무언가를 바라기도 했지만, 황후는 그러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욱의 눈 속에 담긴 온화함은 다시 차가운 냉혹함으로 바뀌었다. 누가 알겠는가, 황후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게 아니라 뒤로 물러서며 전진하는 게 아니었을지. 요 며칠 그는 많은 생각을 했다. 연회장에서 황후가 자신을 위해 화살을 막아 준 것을 떠올릴 때마다, 알 수 없는 불편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는 속이 깊은 여인을 싫어했으며, 그런 여인에게 끌려다니는 어리석은 사람을 더욱 혐오했다. “짐은 그대의 마음을 알고 있소. 하지만, 짐은 그대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소.”“어미 집안의 영예나 그대의 오라비를 만호후로 봉하는 일, 혹은 후사를 들이는 일은 짐이 모두 들어줄 수 있소.” ‘그대의 마음?’ 그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나, 겨우 화살 한 번 막아 준 일로 집안을 후하게 봉해 주겠다니, 제왕으로서 너무 성급한 처사가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생사를 건 싸움을 치르는 장수들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폐하, 신첩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태도는 단호했다. 소욱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
소욱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 표정은 한겨울의 살을 에는 냉기를 띠었다. 그는 속으로 모든 것을 황후의 탓이라 여겼다.갑자기 깊은 내공을 지닌 봉구안이 그의 존재를 감지하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그의 눈 속에 자리한 혐오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연상 또한 봉구안의 시선을 따라 황제를 바라보았고, 침상 위의 옷을 급히 집어 들고는 봉구안에게 걸쳐 주었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의 여인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다행히도 상처는 방금 전에 감싸 두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전하를 뵙습니다.” 연상이 먼저 밖으로 나와 절을 올렸다.봉구안은 스스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등에 난 상처가 다시 당겨졌으나, 그녀는 참아낼 수 있었다.소욱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후는 오늘도 고열이 가시지 않았느냐?”연상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예, 맞사옵니다.” 그녀는 어딘가 긴장한 듯 보였다. 언제 이 폭군이 들이닥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방금 전 주상과 함께 있을 때 아무런 은밀한 말을 나누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봉구안이 옷을 다 입은 후, 소욱은 연상을 지나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 봉구안은 침상 옆에 서서 절을 올리며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팔을 안정된 힘으로 지탱해 주며 말했다.“상처가 낫지 않았으니 예를 갖출 필요는 없소.”봉구안은 속눈썹을 반쯤 내리며, 기운 없는 모습으로 말했다. “예.”“상처는 좀 나아졌소?”그가 물었다.봉구안이 그의 눈 속 혐오를 감지하지 못했다면, 정말로 그의 물음에 진정성이 담겨 있다고 착각할 뻔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아마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옵니다.”그때 연상이 발을 올리고 고리에 걸어두었다. 갑갑했던 공간이 조금은 숨을 틔우며,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짐이 너에게 고려해 보라 하였던 일에 대해 생각해 본 바가 있소?”봉구안은 눈을 들어 그를
고인이 된 친부 이야기가 나오자, 서여국 황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어릴 적에, 아바마마께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궁 안에는 아바마마의 용모파기조차 남아 있지 않다.”“나도 그분의 얼굴이 어떤지 기억나지 않는다. 꼭 용모파기가 필요하다면, 그 시절을 기억하는 노인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봉구안은 난처해졌다.용모파기가 없다는 건 외모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실낱같은 단서를 찾는 건 마치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았다.서여국 황제가 말을 이었다.“그때 나는 숙연과 겨우 두세 살이었다. 남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궁으로 들이닥쳤고, 어마마마께서는 혈통을 지키기 위해 나와 숙연을 궁 밖으로 내보내 숨기셨다.”“훗날 자매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옥비녀를 반으로 나누셨지.”“이것이 내가 가진 옥비녀의 반쪽이다.”황제는 흰 옥비녀의 반쪽을 꺼내 보였다. 비녀 머리와 일부 자루만 남은 상태였다.봉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렇다면 진짜 여동생 분께서 나머지 비녀 조각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서여국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반쪽 옥비녀와 비단 상자를 봉구안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것을 너에게 맡기마.”이는 서여국 황제가 봉구안을 깊이 신뢰한다는 표시였다.봉구안은 두 손으로 옥비녀를 받으며 차분한 눈빛을 띠었다. 그 눈빛에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믿음직스러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서여국 황제가 손목을 붙잡았다.봉구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서여국 황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소장군, 정말로 서여국에 남을 마음이 없느냐?”그녀는 끝내 포기하지 못한 듯 물었다.봉구안이 서여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섭정왕의 자리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높은 자리도 내어줄 의사가 있었다.멀리서 은칠이 붓을 들고 무언가를 쓰려 했지만, 은이가 이를 눈치채고는 단숨에 붓을 빼앗아 부러뜨렸다.은이는 부러진 붓을 내던지며 말없이 은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
비록 봉구안이 은위들에게 물러나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서여국 황제가 자신의 암위들을 향해 말했다. “물러나라.” 그녀의 단호한 한마디에 암위들은 즉시 자취를 감췄다. 이제 곁에는 모신만 남았지만, 황제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녀는 봉구안을 바라보며 은근히 이간질을 하기 시작하였다.“보아하니, 그들은 네 명령을 따르는 척하지만 실상은 여전히 제국 황제의 명령을 따르며 너를 감시하는구나. 네가 서여국에 머물고 싶어도 결국 넌 남제로 끌려가겠지.” 은칠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마마, 저희는…”하지만 봉구안은 은칠의 말을 무시한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차분하고 당당하게 서여국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굳이 저와 남제 폐하를 이간질할 필요는 없습니다. 외적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할 때지, 이런 무의미한 일을 할 때가 아닙니다.” 서여국 황제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결국 우리는 길이 다르구나. 나는 네가 남제 남성들의 권력 아래 있는 걸 싫어해, 여인들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 “서여국의 여인이나 남제의 남성이나 다르지 않습니다.”“길은 같을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천하 대동, 남녀가 평등한 길입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억누른다면 그 길은 기울고 불공평하며, 멀리 갈 수 없습니다.” “서여국의 내란도 조여란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나라가 혼란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가 군사들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남녀 간 불공평 때문이었습니다. 외지인으로서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제 말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부디 절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서여국 황제는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여국이 남성에게 불공평한 나라이고, 남제가 여성에게 불공평한 나라라면, 어느 쪽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느냐?” 봉구안은 고요한 목소리로 답했다. “길이 멀고 험해 천 년이 지나도 답을 내릴 수
봉구안은 눈앞에 나란히 서 있는 서여국의 미남들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저들을 처리하기 전에, 약은 남겨 두십시오.” 그들은 속으로 탄식했다. 앞에 있는 귀인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무정했다. 자신들의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녀는 약만 걱정하는 듯했다. 모신은 곁에서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이 맹 소장군은 남색에 전혀 관심이 없군.’….한편, 서여국 황제가 보낸 미남들을 몰아낸 것을 지켜본 봉구안의 호위들은 눈빛에 살기를 띄우며 말했다.“저따위로 우리 황후마마를 유혹하려 들다니, 당장 찾아가 처리해야겠습니다.”다른 곳에 숨어 있던 은이 역시 이 상황을 보고 머리를 저었다. “형님, 서여국 황제가 대체 무슨 속셈으로 미남들을 보낸 걸까요?”은이는 입에 물고 있던 강아지풀을 살짝 씹으며 비웃었다. “뻔하지. 서여국 황제는 황후마마를 남겨두고 싶어 하는 거다.” “뭐라고요?!” 호위들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만약 서여국 황제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우리 황제 폐하는 어찌 된단 말인가!”그러나 다행히도, 황후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미남들을 거절하고,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았다.한 시진 후. 서여국 황제는 봉구안이 머물고 있는 편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봉구안은 태연한 얼굴로 황제를 마주했다. “내 듣자 하니, 맹 소장군은 내가 준비한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다 하더구나.”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쉽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황제가 보낸 미남들은 단순히 약을 발라주는 임무를 맡은 것처럼 보였다. 만약 봉구안이 이들에게 미남계를 쓴 것이라 비난한다면, 황제는 오히려 그녀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한다고 역이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봉구안은 차분하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폐하의 깊은 뜻과 서여국 남자들의 준수한 외모를 보아 외신이 불만을 가질 리 없지요.” “다만… 제가 서여국으로 출사하기 전, 불전에 서약을 한 바 있습니다.”“
서여국 황궁, 천택궁 별채.은위 몇 명이 전각 밖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안에서는 어의가 봉구안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봉구안은 내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치명적이지 않았다.어의가 물러나려 하자 봉구안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 순간, 서여국 황제가 그녀의 어깨를 눌러 앉히며 말했다.“가만히 앉아 있거라. 내가 명을 내려 어혈을 풀고 멍을 가라앉히는 약을 바르게 하겠다.”봉구안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정중히 대답했다.“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서여국 황제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할 사람은 내가 아니겠느냐.”“그대의 계책이 아니었다면 내 계획대로 갔을 것이고, 그랬다면 많은 무고한 병사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이번 작전으로 피해를 줄였고, 조여란과 가짜 숙연까지 명분 있게 제거했으니 일석삼조가 아니겠느냐.”봉구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조여란이 동산국과 손잡고 남제를 멸하려 한 만큼, 동산국으로부터 적잖은 지원을 받았을 것입니다.”“그 자를 처단하기 전에 이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서여국 황제의 눈빛에는 차갑고 날카로운 기운이 번뜩였다.“그 말이 맞다. 이 일은 반드시 철저히 파헤칠 것이다.”서여국에서 반역과 군주 시해는 이미 죽음에 값하는 죄였다.게다가 외국과 결탁한 죄는 나라를 배신한 중죄였다.그녀는 이 중죄를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서여국 천옥.조여란은 형틀에 묶인 채 기운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다.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녀는 감옥을 직접 찾은 서여국 황제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폐하, 이렇게 무정하실 수 있습니까?”“제가 잘못한 건 많지만, 전장에서 함께 싸우며 폐하의 목숨을 구해드린 적도 있지 않습니까?”“또한, 쌍둥이 여동생을 찾아드린 것도 저입니다! 이런 공로를 생각하신다면 제 죄를 덜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서여국 황제는 냉소하며 말했다.“여동생이라니? 네가 조종하여 내 여동생 행세를 하게 만든 창부를 말하는 것이냐? 그런 자가 내 혈육이라 할
서여국 황제는 평온한 얼굴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후 궁으로 돌아가거라. 어의에게 너의 상태를 잘 살피게 하겠다."봉구안은 서여국으로 비밀 사절로 파견된 상태였고, 황제와 그녀의 심복 모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황제의 호위병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황제의 배려에 봉구안은 사양하려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모신이 먼저 물었다."폐하, 저 관료들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황제는 조여란이 화살로 모두를 살해하려 했던 순간, 관료들 중 일부가 외쳤던 말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조여란의 동조자는 모두 체포하고, 나머지는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라.""예, 폐하!"그 순간, 반역죄가 자신들에게 닥쳤음을 깨달은 관료들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폐하, 살려주십시오!""폐하! 순간의 실수였습니다!""폐하, 조여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마음은 없었습니다!""폐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그러나 서여국 황제는 이들의 간청을 전혀 듣지 않고 단호하게 명령했다."끌고 가거라!"그렇게 조여란의 동조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아아…" 숙연은 조여란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점점 불안에 휩싸였다. 그녀는 급히 몸을 떨며 말했다."저는 조여란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억울하게 끌려온 것뿐입니다."서여국 황제는 차갑고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억울하다고? 내가 본 건 너와 조여란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서여국 황제는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숙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를 저었다."아닙니다! 언니,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처음에는 조여란이 반역자인 줄도 몰랐습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여국 황제는 검을 뽑아 숙연의 목에 겨누며 비웃듯 말했다."아직도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구나?"숙연의 동공이 흔들리며 그녀는 급히 외쳤다."언니, 저… 저는 언니의 친동생입니다…!"그 순간, 황제는 매섭게 칼로 그
봉구안은 허공으로 치솟으며 다리로 신속하게 상대를 공격했다.경공을 잘하는 그녀였기에 발차기 실력도 남달랐다.조여란은 그녀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그 과정에 발길질에 맞은 그녀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다.착지한 봉구안은 한손을 등 뒤에 감추고 한손을 뻗으며 조여란을 도발했다.조여란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옷섶으로 흐르는 피를 닦고는 음침한 눈으로 봉구안을 노려보았다.“너 대체 정체가 뭐냐!”황제 신변의 호위가 이 정도로 강했던가?봉구안은 대답 대신, 이차 공격을 시전했다.철갑옷 같은 기공을 상대하려면 기교가 중요했다.그녀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응집했다.그리고 손바닥을 아래로 둔 채로 신속히 전방을 향해 찌르기를 시전했다.그녀의 손이 조여란의 가슴에 닿았다.평범한 주먹질처럼 보여도 뾰족하게 튀어나온 중지에 모든 힘이 실렸다.봉구안은 내력을 집중하여 중지에 실었기에 그 위력은 상당했다.“푸흡!”조여란의 등이 굽어지더니 입으로 피가 섞인 열물을 토해냈다.그녀는 뒤로 엉거주춤 물러나 가까스로 다시 중심을 잡았다.“철갑옷!”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의 주먹이 그녀의 늑골을 향해 날아왔다.뼈를 관통할 것 같은 위력이 담긴 일격에 조여란은 신음을 내뱉으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네 이년! 숙천설이 대체 너한테 뭘 약속했길래… 악!”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주먹이 눈을 향해 날아왔다.조여란은 눈을 붙잡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숙천설! 자신 있으면 나랑 붙어! 남의 등 뒤에 숨어 있는 게 무슨 황제야! 나와! 숙천설!”서여국 황제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헀다.“조여란, 네 철갑옷이 천하무적은 아니었군.”조여란은 이를 갈았다.“그럴 리 없어!”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헀다.“철갑옷은 날카로운 검이 아니면 상처를 낼 수 없지. 섭정왕,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네가 이긴다면 길을 비키도록 하지.”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뻗었다.“검을 가져오너라!”잽싸게 모습을 드러낸 은육
봉구안은 싸늘한 눈으로 조여란을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웠다.그 유명한 철갑옷 공법을 한번 눈앞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순식간에 봉구안은 발로 땅을 구르며 앞을 향해 튕겨나갔다.조여란은 그 자리에서 자세를 취하고 기를 운용하여 공법을 시전했다. 온몸의 근육이 단단하게 굳기 시작하더니 마치 단단한 방패를 연상케 했다.봉구안은 상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창을 받아라!”그녀가 창술에 능하다는 것을 아는 서여국 황제가 그녀를 향해 무기를 던졌다.봉구안은 창을 받고는 고개도 안 돌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조여란은 음침한 얼굴로 다시 공법을 시전했다.장창이 그녀의 어깨를 찔렀지만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했다.봉구안은 다시 정신을 다잡고 상대의 가슴을 향해 창을 찔렀다.하지만 극한으로 끌어올린 조여란의 철갑옷 공법 때문에 창끝은 그녀의 옷을 찢고도 가슴에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봉구안의 모든 초식은 상대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장창이 부러질 때까지 찔렀는데도 조여란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진기를 응집한 조여란은 산발이 된 머리를 휘날리며 음산한 눈빛으로 소리쳤다.“숙천설,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그녀는 봉구안을 밀치고 서여국 황제에게 달려들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황제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봉구안은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분노한 조여란이 호통쳤다.“주제도 모르는 것, 감히 내 앞을 가로막다니! 그래! 네년부터 죽여주마!”곧이어 조여란의 공세가 이어졌다.두 사람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육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그림자 호위 은삼이 은이에게 말했다.“형님, 도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은이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마마께선 지시를 받고 움직이라 했다.”은삼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조여란 저 여자 꽤 하는데요? 마마께서 다칠까 걱정돼요.”은칠이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마마와 조여란이 결전을 벌이는데 은삼이 재수없는 말만 하며 마마를 저주했습니다.]탁!은
조여란 신변의 병사들이 활시위를 잡았다.이때 누군가가 외쳤다.“당장 그만둬!”조여란은 의아한 얼굴로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수많은 사람들이 광화사 대문을 열고 반란군의 앞으로 다가갔다.서여국의 관원들이었다.문무백관이 거의 다 이곳에 잡혀왔다.황제가 한 짓일 것이다.조여란이 차갑게 말했다.“저들을 인질로 나를 협박하려고? 난 누구든 죽일 수 있어!”대신들은 미친 사람처럼 발악하는 조여란의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섭정왕! 자네가 이런 사람이었을 줄이야!”“조여란, 감히 반역을 꾀하다니!”“우릴 다 죽이면 천하 백성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하려고? 조정에 관원이 한 명도 없으면 넌 황제가 되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조여란은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멍청한 것들은 버려도 좋아!”갑자기 검은 인영이 공중에서 나타났다. 그는 조여란도 익숙한 인물, 숙연을 데리고 있었다.“이 여자도 내칠 것이냐?”봉구안은 숙연을 앞으로 밀치며 싸늘하게 물었다.고공 비행에 숙연은 이미 겁에 질려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상태였다.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조여란을 향해 소리쳤다.“왕야, 나 좀 구해줘!”봉구안은 뒤에서 그녀의 턱을 잡고 비아냥거렸다.“숙연 대인, 이럴 때는 폐하께 살려달라 애원해야 하는 거 아닌가?”조여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사실 그녀 역시 숙연에게 정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장기말이었다.하지만 그것보다는 대의가 더 중요했다.“활시위를 당겨라!”곧 화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 것을 감지한 뭇 대신들이 소리를 질렀다.“조여란, 미쳤어? 우리 같은 편이잖아!”“황시위를 당기라니까!”조여란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숙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조여란을 바라보고 있었다.심지어 조여란이 데려온 병사들마저 모두 죽이라는 말에 동요하고 있었다.황제를 살해하는 것은 황위를 빼앗기 위함이지만 관원들을 죽이면 어떻게 될까?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이었다.병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얼굴을 가린 그림자
광화사.조여란의 대군과 호원아의 대군이 대치 중에 있었다.“호원아, 넌 무단으로 직무지를 떠나 폐하를 해하려고 하였다. 내가 섭정대권으로 너를 처단할 것이다!”호원아는 화가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난 폐하의 명을 받들어 광화사를 지키고 있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조여란, 반역은 네가 했지! 그리고 너희들, 감히 조여란과 결탁하더니! 폐하께 미안하지도 않느냐!”조여란의 옆에 선 한 장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방구 뀐 놈이 성낸다고! 호원아, 당장 비켜! 우린 폐하가 무사한지 확인해야겠다!”친히 광화사 대문을 지키고 선 호원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희를 들여보내? 꿈 깨!”조여란은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전방을 노려보며 손짓했다.“활시위를 당겨라!”그녀가 데려온 대군은 호원아가 이끄는 부대보다 인원수가 훨씬 많았다.아무리 호원아라도 쪽수 앞에서는 별 수가 없을 것이다.갑옷을 입은 호원아가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포진하고 화살을 방어해라!”뭇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광화사 안쪽까지 후퇴했다.화살비가 한바탕 쏟아진 후, 조여란은 마치 충신처럼 안쪽을 향해 외쳤다.“폐하, 소신이 너무 늦게 와서 송구합니다!”쾅!이때 대문이 열렸다.고개를 든 조여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용포를 입고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였다.“섭정왕, 늦었군.”서여국 황제의 신변에는 수십 명의 고수가 지키고 있었다.조여란은 싸늘한 눈빛으로 황제를 가리키며 말했다.“넌 폐하가 아니야!”모신 상궁이 분노한 말투로 반문했다.“섭정왕, 미친 것이냐! 폐하께서 여기 계신데 감히 손가락질을 해?”조여란은 등 뒤에 서 있는 뭇 병사들을 보며 말했다.“최근 폐하와 똑같이 생긴 여인이 광화사에 진입하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폐하를 사칭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호원아 너의 간계였구나.”“호원아, 네가 가짜 황제를 내세우고 진짜 폐하를 해한 게 틀림없어!”호원하가 분통해서 말했다.“조여란, 함부로 사람 모함하지 말거라!”서여국 황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