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동시에 손 장군의 참모는 다른 장군들을 설득하여 봉구안에게 가서 화해하려고 하였다.“맹 소장군,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처분했으니 이제 손 장군을 더 이상 탓하지 마시지요.”“남부군은 전쟁에서 아주 용맹하오. 그들을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좀 아깝지 않소?”봉구안은 차분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눈빛은 차갑고 소원했다.곤장 백 대를 다 친 것을 본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양나라 도성을 공격할 때 남부군을 선봉군으로 공을 세워 속죄하거라.”이 말을 들은 다른 장군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40여 명 중 진성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맹성주가 남부군을 쫓아내지 않고 선봉군으로 세운다는 말을 들은 손 장군은 무거운 짐을 벗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그는 봉구안이 있는 장막을 향해 공수의 인사를 했다.“소장, 명을 받들겠습니다.”그리고 부하에게 조카를 데려가라고 지시했다.봉구안은 장막을 나와 실려간 진성을 쳐다보았다.오백은 그녀의 곁에 서서 말했다.“소장군, 손 장군이 분명히 조카를 감쌌을 겁니다. 분명 곤장 백 대를 제대로 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살아남을 리 없습니다.”봉구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군영 입구에서 대군에게 채소를 배달하고 있는 양나라 백성들을 보았다.오백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소장군, 저자들 어젯밤에 살해된 소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 아닌 가요?”봉구안은 그를 흘겨보았다.“난 못 봤다.”오백은 봉구안이 잊어버린 줄 알고 기억을 되살려 주려고 하려다가 문득 깨달았다.소장군은 일부러 이러는 거다.그는 황급히 웃으며 말했다.“소인도 못 봤습니다.”이때 장막 안의 장군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들은 봉구안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한 뚱뚱한 장군이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그렇게 다툼다가 결국에는 남부군에게 좋은 일만 했소
막사 안, 봉구안은 모래판 앞에 서서 양나라의 지형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이때, 오백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장군, 진성이 죽었습니다.”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봉구안은 고개도 들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물었다.“그 여인의 가족들은?”“조용히 군영을 내보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이제 아무도 모를 겁니다.”봉구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되었다.”오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장군, 조카가 죽었는데 손 장군이 전장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봉구안은 싸늘한 어조로 답했다.“남부군 중에 장군의 자리를 대체할 사람은 많아. 전장에 나갈 마음이 없다면 교체하면 된다. 군대가 싸울 의지가 있다면 문제가 될 건 하나도 없어.”“예, 장군!”밖으로 나가던 오백은 마침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손 장군과 마주쳤다.오백은 재빨리 상대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소장군을 보러 오신 겁니까?”손 장군은 그런 오백을 가볍게 밀치고는 막사를 향해 소리쳤다.“맹성주! 진성이 죽었어! 살해를 당했다고! 주장으로서 무조건 진범부터 찾아! 안 그럼 이대로 안 넘어갈 테다!”오백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진성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다닐 때는 이런 날이 올 줄을 예상하지 못했단 말인가.빚은 언젠가는 갚아야 하기 마련이고 그게 목숨빚이라면 더더욱 피해갈 수가 없다.그래서 노발대발하며 날뛰는 손 장군의 처사를 오백은 이해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그러거나 말거나 부하를 불러 말을 전하게 했다.“대군이 곧 양나라의 도성을 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범을 찾을 시간이 없다고 손 장군께 전하거라.”“그래도 내 말을 못 알아듣고 소란을 피운다면 남부군 중에 그 자리를 대체할 사람은 많고도 많아!”병사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손 장군에게 전했고 그 말을 들은 손 장군은 크게 대노하며 소리를 질렀다.“맹성주!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어! 네가 관할하는 군영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주장으로서 책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해?”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장령
남제의 대군은 이르는 곳마다 용맹하게 양나라 군사를 무찔렀고 곧장 기세등등하게 양나라 황성 앞까지 당도했다.양나라 대군은 완강히 반항했지만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전우들이 하나둘씩 쓰러지는 것을 보고 깊은 절망만 느꼈다.쾅!견고하던 성문은 끝끝내 남제 대군의 맹렬한 공세에 열리고 말았다.남제의 선봉부대가 맨 먼저 안으로 쳐들어가며 높게 소리쳤다.“양 나라를 멸하고 양황의 목을 칠 것이다!”성루.양나라 승상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남제와 대적했다.파도처럼 밀려오는 적군과, 가면을 쓴 채로 말을 타고 전장을 호령하는 맹성주 장군을 보고 그는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드디어 그가 온 것이다!전장의 악귀, 맹성주!어느 순간,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곧이어 승상은 온몸에 전율이 일며 눈앞이 캄캄해졌다.“승상 나리!”한 사병이 달려와서 그를 대신해 치명의 일격을 막아냈다.바닥에 쓰러진 승상은 양나라의 군기가 쓰러지고 그 자리에 남제의 깃발이 꽂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남제의 병사가 몰려와서 그를 포박해 봉구안의 앞으로 끌고 갔다.“맹성주,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전공을 원하는 것도 결국에는 출세하려는 것 아니냐! 우리 양나라에서 너에게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봉구안은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로 전방을 주시하며 차게 말했다.“용호군 324명, 그리고 만 명이 넘는 북대영 사병들. 나는 단지 넓고 풍수 좋은 곳을 찾아 그들의 시신을 묻어주고 싶었을 뿐이다.”양나라 승상은 순간 할 말을 잊었다.그러니까 묘지가 필요해서 남의 나라를 침공한다는 말이 아닌가!이보다 더 황당무계한 이유가 있을까!대군은 승승장구하며 결국 양나라 황궁까지 침공했다.늙은 황제는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옥새를 봉구안에게 공손히 건넸다.“소장군, 짐을 죽이지는 말아주시오…”그는 아부 섞인 미소를 지으며 애원했고 그 미소는 웃는 것보다 더 처량했다.오백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한 나라의 황제가 이리도 무능하다니!궁 안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쾅!절간 문이 열리고 유사양의 눈앞에 누군가가 나타나더니 그의 시선을 가리고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뒤돌아선 사람은 드름이 아닌 대소사의 주지스님인 료공(了空)스님이었다.그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유사양에게 말했다.“기도란 무릇 시작을 했으면 마무리도 잘해야 하는 법입니다. 황후께서 폐관기도를 시작하시기 전에 저에게 아무도 안으로 들게 하지 말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유사양은 료공스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선제시기, 료공은 만천하에 이름을 떨친 대장군이었다가 살생을 너무 많이 했다며 스스로 출가하여 불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대소사의 근처에는 자제사라는 절간이 있었는데 료공이 지어서 고아와 방랑자들을 보살피는 곳이었다.그는 그 외에도 수많은 선행을 했고 백성들 사이에서 성망도 매우 높았다.그런 사람이 문을 지키고 있으니 유사양도 강제로 침입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황후가 안에 있는지가 유사양은 확실하지 않았다.그는 떠나기 전, 연상을 다시 뒤돌아보았다.‘저 아이를 보니 분명 뭔가가 있는데…’유사양이 떠난 후, 연상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스님.”료공은 평온한 어조로 답했다.“남제가 대승을 거둔데에는 황후마마의 기도가 빠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최선을 다해 지켜드려야지요.”연상은 그의 말에서 어쩐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료공스님은 뭔가를 아는 눈치인데….’궁으로 돌아온 후, 유사양은 절에서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소욱에게 전했다.소욱은 싸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리고 진길을 호출했다.“대소사와 료공에 대해 알아오너라. 그자가 최근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낱낱이 조사하거라.”주지스님이 친히 나서서 문을 지킨다는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황후가 꼭 대소사에 가서 기도를 올리겠다고 한 것이 과연 우연일까?그 시각.료공은 유사양이 이번에 그냥 돌아갔지만 의심하기 시작한 건 분명하니 황제의 추적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미리 예상했다.그리하여 봉가 저택과 북부에 서신을 보냈다.봉가 저택.
두 시진 후, 대소사.소욱은 말을 타고 어두운 밤길을 헤치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그의 뒤로 진길이 묵묵히 뒤따랐다.달밤의 대소사는 무척이나 고요했다.황제가 친림한다는 소식을 들은 료공은 문 앞으로 마중을 나갔다.황제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아주 침착하고 평온했다.“폐하, 황후마마께서는 밤낮을 기도를 올리고 계십니다.”소욱은 유사양처럼 쉽게 물러날 상대가 아니었다.그는 료공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짐이 기도를 방해했단 말인가?”“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료공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소욱은 곧장 그를 지나쳐 사당 안으로 걸어들어갔다.료공은 제자리에서 굳은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절간 앞에 당도하자 밖을 지키고 있던 시위들이 바짝 긴장해서 예를 취했다.소욱은 손짓으로 그들을 물렸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연상이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그에게 문안을 올렸다.“소인, 폐하를 뵈옵니다. 폐하, 마마께오서는….”소욱은 그런 연상을 지나쳐서 바로 문을 열었다.황후는 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엄숙하고도 간절한 표정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그제야 소욱은 꽉 잡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싸늘했다.“전장은 이미 마무리가 되었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궁으로 돌아오지 않는 거지?”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봉구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기도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사옵니다.”대찬 거절에 짜증이 난 소욱은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녀의 팔목을 낚아채고는 힘껏 잡아당겨 일으켰다.“료공과 둘은 대체….”하지만 그녀의 안색을 본 그는 하던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의 눈앞에 펼쳐진 그녀의 안색은 놀랄 정도로 창백했고 핏기를 잃은 입술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폐관 기도가 힘들고 굳센 의지가 필요한 일이라는 건 알고는 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어쩐지 죄책감이 몰려왔다.‘내가 괜한 오해를 한 것인가?’그녀가 기도를 위해 이렇게까지
황제와 황후가 마차에 오르고 연상은 마차머리에 올랐다.대소사 대문 앞.멀어지는 마차를 눈빛으로 배웅하는 료공에게 어린 스님이 걱정스레 물었다.“사부님, 황후마마께서는 기도가 끝나기 전에 떠나셨는데 별 문제없겠지요?”료공은 두 손을 합장하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아니, 기도는 원만히 끝났다.”황성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마차에 올라 얼마 가지 않아 봉구안은 의식을 회복했다.하지만 의식이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그녀는 뭔가 고통스러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의원은 그녀가 몸살 기운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상 급하게 사당으로 돌아오느라 제대로 처치하지 못한 상처에 염증이 생긴 것이었다.마차 안은 너무 덥고 갑갑해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창문 가까이로 다가갔다.그런데 이때 커다란 손이 다가와서 그녀를 안쪽으로 잡아당겼다.귓가에 남자의 경고 섞인 목소리가 전해졌다.“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 움직여?”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봉구안은 힘없이 소욱의 어깨에 축 늘어졌다.소욱은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녀를 밀쳐내지는 않았다.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가 그의 코끝을 간지럽히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마치 부드럽고 말캉한 무언가가 그를 감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런데 그녀의 몸에서 이상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자, 소욱은 곧장 그녀를 밀치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불덩이처럼 뜨거웠다.“돌아가야 해…”봉구안은 고열에 횡설수설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몽롱한 의식 속에 그녀는 아직도 말을 타고 황성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소욱은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대소사에 돌아간다고?’그곳은 황후처럼 귀족가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가 오래 있을 곳이 아니었다.고작 두 달 있었을 뿐인데 다 죽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 거기에 더 두었다가는 황후를 다시 간택해야 할 판이었다.“기도를…”그녀가 의식불명의 상태로 중얼거렸다.그 말을 들은 소욱은 마음이 착잡했다.이 상황에서도 기도를 놓지 못하고
연상은 급한 마음에 적당한 핑계를 둘러댔다.“폐하, 마마께서 땀을 많이 흘리신 것 같으니 소인이 몸을 좀 닦아드리겠나이다.”곧이어 소욱은 침전을 떠났다.연상은 살며시 봉구안의 허리띠를 풀고 겉옷을 벗겼다.역시나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당장 처리하지 않으면 피가 스며나왔을 것이다.연상은 늦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바삐 움직였고 소욱은 밖에 앉아 싸늘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자진궁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러다가 구석진 곳에 있는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황후의 혼수품이 든 상자였는데 용과 봉황이 같이 하늘을 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궁에서조차 흔히 볼 수 없는 정교한 공예였다.그는 저도 모르게 그것에 이끌려 다가갔다가 발 밑에서 이상한 느낌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바닥에 깔린 벽돌 하나가 느슨해져 있었다.그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봉구안의 상처는 그리 심각한 게 아니었지만 독을 해독하는 것은 아주 힘든 작업이었다.며칠 동안 매일 피를 쏟아내야 완전히 독을 제거할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의 안색은 유난히 창백했다.게다가 밤낮을 쉬지 않고 말을 타고 달렸으니 몸에 무리가 온 것은 당연했다.그래도 회복력은 빨랐다.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침상 옆에서 지키고 있던 연상은 그녀가 눈을 뜬 것을 보고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마마!”눈을 뜬 봉구안이 갈린 목소리로 물었다.“여긴… 영화궁이냐?”연상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영화궁이에요! 마마께서 어제 의식을 잃고 고열에 시달리셨는데 민간 의원들이 이렇다 할 방도를 찾지 못해서 폐하께서 마마를 모시고 궁에 돌아왔어요. 그래도 태의의 약이 잘 듣네요. 적어도 열은 내렸으니까요.”봉구안은 애써 어젯밤 기억을 떠올렸지만 기억은 그녀가 쓰러지기 전에 머물러 있었다.“마마, 이따가 약이 다 달여지면 가져올 거예요. 며칠 더 드셔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상처는… 간단히 붕대로 감
아침 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영화궁으로 왔다.연상은 급급히 약을 달여 침전으로 가져가다가 황제의 대오를 보고 놀라서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폐… 폐하를 뵈옵니다!”소욱은 조용히 그녀를 지나쳐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황제가 영화궁을 방문해서 가장 기쁜 사람은 최 상궁이었다.연상은 다시 약을 가지러 가고 최 상궁은 남아서 황제의 시중을 들었다.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다과를 들고 나왔다.그런데 내전에 들어서자마자 문밖을 지키고 있던 유사양이 그녀를 저지했다.최 상궁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유사양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폐하께서는 마마와 할 이야기가 있다고 아무도 들지 말라 하였습니다.”최 상궁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연상도 자신을 말리며 황후의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 이제는 유 태감마저 자신을 막아서자 영화궁의 최고 상궁으로서 너무 서럽고 억울했다.한편, 침전 안.소욱은 봉구안이 앉아 있는 침대에 다가가서 앉았다.“몸은 좀 어떠하냐.”그의 질문에 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많이 좋아졌습니다.”곧이어 소욱은 사무적으로 말했다.“맹성주가 황성으로 돌아올 것이다. 전공이 혁혁한 개선장군이니 환영연회는 황후가 맡아서 하는 게 마땅하나…”그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계속했다.“몸이 많이 안 좋아보여서 녕비한테 주관하라고 하였다.”누가 장군 환영연회를 주관하는지 봉구안은 관심이 없었다.단지 곤혹스러운 게 있었다.“맹 소장군은 많이 다치셨다 하지 않았습니까?”그녀는 돌아오기 전에 스승에게 부탁해서 이번 일을 핑계로 오래도록 쉴 생각이었다.“아침에 완쾌되었다는 서신을 받았다. 보름 안에 황성에 당도한다는군.”말을 마친 소욱은 무심한 듯, 봉구안의 안색을 살폈다.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생각을 정리하느라 그의 미묘한 눈빛을 인지하지 못했다.분명 그녀 본인은 여기 있는데 보름 후에 황성에 당도할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황후.”사내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봉구안은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