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궁.북부가 안정되었으니 봉구안은 계속해서 그 배후의 인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단서는 그 두 통의 서신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마치 막다른 골목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마마, 약 드실 시간입니다.”연상이 약을 들고 들어와서 조용히 아뢰었다.봉구안은 한손으로 약그릇을 들고 단숨에 마셔버렸다.연상은 빈그릇을 보며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이렇게나 쓴 약을 한숨에 마셔버리다니!봉구안은 담담히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영화궁 내부에 그림자 시위가 또 추가된 것이 확인되었다.소욱은 왜 또 의심병이 도진 것일까?다음 날.봉 부인이 입궁했다.그녀는 딸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마마, 건강이 우선입니다.”남제에는 수많은 장령들이 있고 굳이 여인인 봉구안이 선봉에 설 이유가 없었다.어머니로서 봉 부인은 자식들이 평온하기만을 바랐다.봉구안은 모친의 걱정 어린 표정을 보고 부드럽게 말했다.“며칠 쉬면 괜찮아질 것입니다.”봉 부인은 연상을 바라보며 말했다.“마마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넌 나가서 망 좀 보고 있거라.”“예, 부인.”연상이 나간 후, 봉 부인은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고 약병 하나를 꺼냈다.봉구안은 상처 치료제인 줄 알고 받으려 했지만 봉 부인이 말했다.“나으리께서 거금을 들여 구해온 약입니다. 이걸 드시면… 평범한 여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봉구안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이게 뭔가요?”봉 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력을 모두 잃게 하는 약입니다.”봉구안은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돋고 항시 평온하던 얼굴도 균열이 생겼다.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봉 부인을 바라봤다. 채 아물지 못한 상처가 다시 벌어졌지만 아픈 느낌은 들지 않았다.육신의 아픔보다 아버지가 친히 그녀의 내력을 폐하려고 약을 구해왔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싸늘하게 했다.따라서 자리에서 일어선 봉 부인은 그녀의 손을 잡고 애원
소욱은 음침한 눈을 하고 말 등에서 정신을 잃은 여인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밑으로 드리운 손은 뻘건 피가 흥건했다.급급히 어마장으로 달려온 연상은 황제가 황후를 안고 오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예를 취했다.“폐하! 마마!”소욱은 그녀를 영화궁으로 안고 간 후에 태의를 불렀다.연상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침대가에 앉은 소욱의 주변으로 강압적인 기운이 풍기고 있어 감히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태의는 봉구안의 상처를 붕대로 감은 후에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폐하, 큰 상처는 아닙니다. 다만 기력이 회복되기 전에는 말을 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태의를 물린 후, 소욱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상을 바라봤다.“황후는 어쩌다 다친 거지?”연상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답했다.“저… 저는 그냥 봉 부인을 궁 밖으로 배웅하라는 명을 받고 나갔다 오느라 자세한 과정은 보지 못했나이다.”“봉 부인이 황후에게 뭐라고 했느냐?”소욱의 차갑고 준수한 얼굴에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연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부인께서 나가 있으라고 하셔서 소인도 상세한 건 듣지 못했나이다.”소욱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찡그렸다.“이만 나가보거라!”연상이 밖으로 나간 후, 침전에는 소욱과 혼수상태의 봉구안만 남았다.소욱은 침울한 눈빛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단순히 기혈 부족과 몸살기운이라면 여러 번 혼수상태에 빠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몸에 다른 부상이 있지 않는 한은...’소욱은 침전에 고이 숨겨져 있던 채찍이 생각 나서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띠를 잡았다.허리띠가 풀리면서 옷섶이 느슨해지고 그녀의 하얀 피부와 가녀린 쇄골이 드러났다.소욱은 천천히 상의 옷섶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살짝만 잡아당기면 몸 어디에 상처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그때, 그는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마차에서 그녀가
성격 온화한 맹 장군마저도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그는 서신을 구겼다가 그래도 분이 안 풀려 불에 태워버렸다.“부인, 신경 쓰지 마시오. 구안이는 우리 딸이고 그 아이가 우릴 버리지 않는 한, 우린 평생 그 아이의 부모요!”맹 부인은 그런 그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약간 기분이 풀린 그녀가 물었다.“교먹이 구안이를 대신하여 황성에 복귀하기로 하였으니 곧 돌아오겠네요?”맹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며칠 안에 당도할 것이오.”맹 부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사실 난 동의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는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기도해야겠네요.”맹 장군은 부드러운 어조로 부인을 달랬다.“폐하께서 매번 구안이를 황성에 부를 때마다 변방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는데 그것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우릴 공훈을 믿고 교만하다고 탄핵 상서를 올렸지 않소.”“이번에 양나라와의 전장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변방은 이미 안정되었다고 폐하께서 환영연회를 베푸셨으니 다른 장령들이 다 가는데 우리만 안 가면 더 많은 비하 발언들이 쏟아질 거요.”“하물며, 안 그래도 북대영에 불만을 품은 장령들이 많은데 이번에도 거절하면 구안이의 명성에 좋지 않소. 특히나 조카를 잃은 손덕방 장군은 호시탐탐 구안이의 공훈을 빼앗을 기회만 노리고 있으니!”“북대영의 전사들이 피 흘려 세운 공훈을 그런 간신배한테 빼앗길 수는 없지 않겠소.”맹 부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하긴, 꾀병을 부리는 것도 방법은 아니지요.”“다른 건 다 괜찮아도 수십 년만에 드디어 장령들 사이에서 후작이 탄생하는데 일을 그르칠까 걱정되오.”맹 장군의 진지한 말에 맹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부군께서는 언제면 후작 자리 하나 꿰차서 저에게 귀부인 자리를 누리게 해주실 건가요?”그렇게 농담하듯 말하고 있었지만 맹 부인은 여전히 불안했다.맹 장군도 그녀의 초조함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위로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교먹이 나이는 어려도 똑똑한 아이이니 실수하지 않을 것이
소욱은 벌떡 몸을 일으키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자진궁으로 돌아간다.”그는 더 이상의 설명도 없이 그대로 영화궁을 떠났다.봉구안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이유를 모르는 연상이 물었다.“마마, 폐하께선 식사 잘하시다가 어찌 갑자기 가신 건가요?”봉구안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해시 초, 장신궁에 불이 켜졌다.소욱은 대전 안에 앉아 한 시진을 기다렸다.늦은 시간이 되자 진길이 말했다.“폐하, 안 올 것 같습니다…”이때, 문밖에서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진길의 눈빛이 순간 빛났다.여자객이 과연 황후인 걸까?소욱이 눈짓하자 진길은 재빨리 가서 문을 열었다.하지만 문밖에 나타난 사람은 여자객이 아닌 어린 태감이었다.어린 태감은 황제를 보자 울먹이며 무릎을 꿇었다.“소… 소인… 폐하를 뵈옵니다.”소욱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진길이 태감에게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들어왔느냐!”태감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소인은 장신궁을 지나가다가 불이 켜져 있는데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길래 혹시 궁녀가 청소를 하나 하여…”진길은 매섭게 상대의 말을 자르고 턱을 치켜올렸다.“폐하의 안전에서 거짓말을 하다니! 참수형에 처할 것이다!”태감이 당황하며 납작 엎드렸다.“폐하,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소인은… 사실 궁녀와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장신궁에 불이 켜져 있기에 궁녀가 약속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한 줄 알고…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폐하!”자리에서 일어선 소욱은 태감 앞으로 다가가서 싸늘한 눈빛으로 상대를 주시하며 말했다.“형자사로 보내거라.”“예!”태감은 곧장 큰절을 올리며 애원했다.“목숨만 살려주십시오, 폐하!”소욱은 애원의 소리를 무시한 채, 밖으로 향하며 목에 있는 은사의 흔적을 닦았다.‘역시 너무 허술해서 안 속았나.’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까이에서 눈으로 직접 봐야 눈치챌 수 있는 것이었다.소욱은 마치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눈
소욱은 냄새에 민감한 편이 아니었기에 그 여자객의 향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그녀의 목을 조르고 손목을 잡은 적은 있지만 자로 잰 것도 아니고 여인의 손목과 목덜미의 굵기는 거의 비슷해서 정확한 추측은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이는 단지 그가 황후를 자극하기 위한 수단이었다.이런 방식은 다른 사람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수많은 전장을 겪으며 수많은 포로들을 상대한 봉구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소욱이 진짜로 그녀가 여자객이라고 확신했다면 이렇게 빙빙 에둘러서 떠볼 리가 없었다.그가 유일하게 장악하고 있는 단서는 그 채찍뿐이었다.그녀는 호수처럼 고요한 표정으로 담담히 그에게 말했다.“그것에 대해서는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신첩의 신변에는 연상을 제외하고도 여자 그림자 호위가 한 명 있습니다. 신첩이 황궁에 입궁할 때 신첩을 보호하려고 같이 들어왔지요. 그 물건들은 그 호위의 것입니다.”소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그림자 호위라?”봉구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그 아이는 신첩이 우연한 기회에 목숨을 구해준 아이이고 신분이 불분명한 아이입니다. 너무 불쌍해서 신첩이 옆에 두기로 했지요. 아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입궁한 뒤, 능연이를 몰래 조사하라고 지시를 내렸었습니다. 능연이의 죄명을 밝히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아이입니다.”소욱의 인상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처음 그 자객을 만났을 때, 그녀가 도망간 방향도 영화궁이었다.들어보니 앞뒤가 맞는 말이긴 하나, 소욱은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그 아이는 어디 있느냐.”소욱이 물었다.봉구안은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신첩은 그 아이와 노예 계약을 하지 않았기에 출입이 자유롭습니다. 신첩이 기도를 올리러 출궁하기 며칠 전에 저에게 작별을 고하더군요. 북부로 가보고 싶다 하였습니다.”소욱이 싸늘하게 말했다.“그대로 보내주기는 아쉬운 재능 아니더냐?”봉구안은 짐짓 한숨을 쉬며 답했다.“본디 우연한 만남이었고 그 아이는 신첩을 도와 능연이의 죄증을 밝혀냈
성문이 열리고 개선군대가 성 안으로 들어오자 수많은 백성들이 마중을 나왔다.“맹 소장군은 어느 분일까?”“말을 타고 맨 앞에 계신 분이겠지!”“그런데 왜 가면을 쓰고 있지? 이러면 얼굴을 볼 수가 없잖아!”“자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소문에 맹 소장군은 너무 준수하게 생겨서 강압적인 분위기를 망친다고 가면을 쓰셨대.”“아니야. 얼굴에 못난 흉터가 있어서 가면을 쓴다는 소문도 있어!”사람들의 대화의 주제는 모두 개선하고 돌아온 맹 소장군이었다.현재 맹 소장군으로 위장한 교먹은 말 위에서 자신을 환대하는 백성들을 굽어보고 있었다.북부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목마다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표하기 위해 백성들이 마중나와 큰절을 올리고는 했다.“북부에서 맹 소장군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입니다!”“맹 소장군은 진정한 전신강림입니다!”백성들의 열정은 황성에 도착했을 때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그들은 병사들을 위해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들고 나왔고 돈 좀 있는 상인들은 아예 옥패나 보석을 들고 나와 장령들의 목에 걸어주었다.교먹은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마치 가면과 혼연일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지금은 그녀가 바로 맹성주인 것이다.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백성들의 경배를 당연하게 받았다.처자들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면서 비명을 질렀다.“맹 소장군께서 날 봐주셨어!”“아니야! 장군은 날 본 거야!”사내들이 맹성주를 향한 경외심도 여인들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소장군, 저도 북영군에 가입하고 싶습니다!”교먹은 그들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라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자라면 북영군의 대문은 언제나 열려 있을 것이다!”역관에 입주하기 전에 장령들은 일단 먼저 궁으로 가서 보고를 해야 했다.성문에서 황궁까지 가는 길목에서는 장군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황궁 안.소욱은 대전에서 대신들과 함께 장령들을 맞았다.두터운 갑옷으로 무장한 장령들이 근엄한 분위기를 풍기며 안으로 들어섰다.하지만 문무백
다음 날, 문무백관들은 장령들의 환영연회를 위해 입궁했다.황제와 황후가 상석에 앉고 비빈들이 그 옆에 차례로 앉았다.곧이어 공을 세운 몇몇 장군들이 도착했다.맨 앞에 선 교먹이 뭇 장령들과 함께 황제에게 예를 취했다.“황제 폐하 만세!”소욱은 손을 들며 근엄하게 말했다.“경들도 어서 자리에 앉으시게.”사람들은 황제가 맹성주를 진심으로 아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개를 든 교먹은 상위에 앉은 봉구안과 시선이 마주쳤다.봉구안도 자연히 그녀를 알아보았다.두 사람은 불필요한 시선교류를 멈추고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녕비가 주관한 오늘의 연회는 어디 모난데는 없으나, 그렇다고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흥을 돋우는 무희들의 춤, 향긋한 술과 감미로운 곡 연주가 있었다.그래도 맛깔나는 술은 장령들의 묵은 피로를 씻어내기에 충분했다.그들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호탕하게 먹고 마셨다.녕비는 각 장군들의 식습관을 미리 알아보고 그들을 위해 각자 입맛에 맞는 다과를 준비했다.장령들이 만족한다면 소욱도 자연히 녕비를 만족스럽게 생각할 것이다.연회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한 문관이 술잔을 들고 교먹을 찾았다.“일만 병력으로 십이만 적군을 물리치고 삼십 명이서 취산골 전투에서 승리한 맹 소장군의 사적은 이미 우리 남제의 전설을 다시 썼소! 소장군의 용맹함에 감탄할 따름이오!”교먹은 잔을 들고 그 문관과 시선을 맞추었다.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손덕방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나리, 소위 말하는 삼십인이 취산골을 공략했다는 전투가 사실은 배후에 오만 병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셨나 봅니다.”그 말을 들은 문무백관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뭐? 그럼 그게 가짜라고?”“오만이면 이길만하지…”“그 말은 맹성주 장군이 공훈을 가로채기 위해 거짓을 고했단 말이오?”교먹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황제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이때, 용상에 앉은 소욱이 입을 열었다.“이 일은 짐도 알고 있는 일이다. 전쟁을 치르는 중에 사실만 고할 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던 강빈은 황후의 목소리를 듣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녕비는 싸늘한 얼굴로 봉구안을 바라봤다.이런 상황에서 황후가 강빈을 감싼다고 장령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아마 뭇 장령들의 마음을 달래기 힘들 것이다.그녀는 도발 섞인 말투로 황후에게 물었다.“황후마마, 설마 우리 장군들이 강빈의 춤을 감상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지요?”봉구안은 그 말을 무시하고 황제에게 공손히 물었다.“폐하, 이왕 춤을 출 거면 통천고가 어떻습니까?”통천고는 제사 때 쓰이는 북이었다.그것의 의미는 북소리는 천지신명과 교류하며 기도를 올린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통천고는 일반 북과 생김새가 크게 다르진 않지만 특별 제작된 북으로서 소리가 더 우렁차고 힘이 있었다.통천고가 뭔지 모르는 변방의 장령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봉구안을 바라봤다.소욱이 인상을 찡그리며 봉구안에게 물었다.“왜 굳이 그래야만 하지?”봉구안은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갔다.“신첩은 장령들을 위해 매일 기도를 올렸고 이제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으니 신령께 감사인사를 올려야 하지만, 그동안 기도를 올리느라 체력을 너무 소진하여 아직 감사기도를 하지 못하였습니다.”“마침 오늘 뭇 장령들이 다 모인 이 기회를 빌어 강빈이 신첩을 대신하여 통천고를 울린다면 그것이 천지신명에 대한 감사인사가 아니겠나이까.”단지 북 위의 춤이 보고 싶은 장령들은 무슨 북을 쓰는지 관심이 없었다.하지만 강빈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달랐다.강빈은 그제야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만약 통천고 위에서 춤을 춘다면 그녀는 신을 섬기는 성녀인 것이고 아무도 그녀를 무희라고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이는 장령들의 소원도 만족하면서 강빈의 자존심도 지켜주었으니 완벽한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소욱은 황후의 뜻을 알아듣고 사람을 시켜 통천고를 가져오게 했다.그는 약간 불쾌한 눈빛으로 녕비를 바라보았다.이 많은 후궁들 중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여인이 하나도 없다니!정확히 말하자면 머리가 잘 돌
고인이 된 친부 이야기가 나오자, 서여국 황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어릴 적에, 아바마마께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궁 안에는 아바마마의 용모파기조차 남아 있지 않다.”“나도 그분의 얼굴이 어떤지 기억나지 않는다. 꼭 용모파기가 필요하다면, 그 시절을 기억하는 노인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봉구안은 난처해졌다.용모파기가 없다는 건 외모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실낱같은 단서를 찾는 건 마치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았다.서여국 황제가 말을 이었다.“그때 나는 숙연과 겨우 두세 살이었다. 남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궁으로 들이닥쳤고, 어마마마께서는 혈통을 지키기 위해 나와 숙연을 궁 밖으로 내보내 숨기셨다.”“훗날 자매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옥비녀를 반으로 나누셨지.”“이것이 내가 가진 옥비녀의 반쪽이다.”황제는 흰 옥비녀의 반쪽을 꺼내 보였다. 비녀 머리와 일부 자루만 남은 상태였다.봉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렇다면 진짜 여동생 분께서 나머지 비녀 조각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서여국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반쪽 옥비녀와 비단 상자를 봉구안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것을 너에게 맡기마.”이는 서여국 황제가 봉구안을 깊이 신뢰한다는 표시였다.봉구안은 두 손으로 옥비녀를 받으며 차분한 눈빛을 띠었다. 그 눈빛에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믿음직스러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서여국 황제가 손목을 붙잡았다.봉구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서여국 황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소장군, 정말로 서여국에 남을 마음이 없느냐?”그녀는 끝내 포기하지 못한 듯 물었다.봉구안이 서여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섭정왕의 자리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높은 자리도 내어줄 의사가 있었다.멀리서 은칠이 붓을 들고 무언가를 쓰려 했지만, 은이가 이를 눈치채고는 단숨에 붓을 빼앗아 부러뜨렸다.은이는 부러진 붓을 내던지며 말없이 은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
비록 봉구안이 은위들에게 물러나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서여국 황제가 자신의 암위들을 향해 말했다. “물러나라.” 그녀의 단호한 한마디에 암위들은 즉시 자취를 감췄다. 이제 곁에는 모신만 남았지만, 황제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녀는 봉구안을 바라보며 은근히 이간질을 하기 시작하였다.“보아하니, 그들은 네 명령을 따르는 척하지만 실상은 여전히 제국 황제의 명령을 따르며 너를 감시하는구나. 네가 서여국에 머물고 싶어도 결국 넌 남제로 끌려가겠지.” 은칠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마마, 저희는…”하지만 봉구안은 은칠의 말을 무시한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차분하고 당당하게 서여국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굳이 저와 남제 폐하를 이간질할 필요는 없습니다. 외적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할 때지, 이런 무의미한 일을 할 때가 아닙니다.” 서여국 황제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결국 우리는 길이 다르구나. 나는 네가 남제 남성들의 권력 아래 있는 걸 싫어해, 여인들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 “서여국의 여인이나 남제의 남성이나 다르지 않습니다.”“길은 같을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천하 대동, 남녀가 평등한 길입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억누른다면 그 길은 기울고 불공평하며, 멀리 갈 수 없습니다.” “서여국의 내란도 조여란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나라가 혼란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가 군사들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남녀 간 불공평 때문이었습니다. 외지인으로서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제 말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부디 절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서여국 황제는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여국이 남성에게 불공평한 나라이고, 남제가 여성에게 불공평한 나라라면, 어느 쪽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느냐?” 봉구안은 고요한 목소리로 답했다. “길이 멀고 험해 천 년이 지나도 답을 내릴 수
봉구안은 눈앞에 나란히 서 있는 서여국의 미남들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저들을 처리하기 전에, 약은 남겨 두십시오.” 그들은 속으로 탄식했다. 앞에 있는 귀인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무정했다. 자신들의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녀는 약만 걱정하는 듯했다. 모신은 곁에서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이 맹 소장군은 남색에 전혀 관심이 없군.’….한편, 서여국 황제가 보낸 미남들을 몰아낸 것을 지켜본 봉구안의 호위들은 눈빛에 살기를 띄우며 말했다.“저따위로 우리 황후마마를 유혹하려 들다니, 당장 찾아가 처리해야겠습니다.”다른 곳에 숨어 있던 은이 역시 이 상황을 보고 머리를 저었다. “형님, 서여국 황제가 대체 무슨 속셈으로 미남들을 보낸 걸까요?”은이는 입에 물고 있던 강아지풀을 살짝 씹으며 비웃었다. “뻔하지. 서여국 황제는 황후마마를 남겨두고 싶어 하는 거다.” “뭐라고요?!” 호위들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만약 서여국 황제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우리 황제 폐하는 어찌 된단 말인가!”그러나 다행히도, 황후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미남들을 거절하고,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았다.한 시진 후. 서여국 황제는 봉구안이 머물고 있는 편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봉구안은 태연한 얼굴로 황제를 마주했다. “내 듣자 하니, 맹 소장군은 내가 준비한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다 하더구나.”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쉽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황제가 보낸 미남들은 단순히 약을 발라주는 임무를 맡은 것처럼 보였다. 만약 봉구안이 이들에게 미남계를 쓴 것이라 비난한다면, 황제는 오히려 그녀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한다고 역이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봉구안은 차분하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폐하의 깊은 뜻과 서여국 남자들의 준수한 외모를 보아 외신이 불만을 가질 리 없지요.” “다만… 제가 서여국으로 출사하기 전, 불전에 서약을 한 바 있습니다.”“
서여국 황궁, 천택궁 별채.은위 몇 명이 전각 밖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안에서는 어의가 봉구안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봉구안은 내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치명적이지 않았다.어의가 물러나려 하자 봉구안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 순간, 서여국 황제가 그녀의 어깨를 눌러 앉히며 말했다.“가만히 앉아 있거라. 내가 명을 내려 어혈을 풀고 멍을 가라앉히는 약을 바르게 하겠다.”봉구안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정중히 대답했다.“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서여국 황제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할 사람은 내가 아니겠느냐.”“그대의 계책이 아니었다면 내 계획대로 갔을 것이고, 그랬다면 많은 무고한 병사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이번 작전으로 피해를 줄였고, 조여란과 가짜 숙연까지 명분 있게 제거했으니 일석삼조가 아니겠느냐.”봉구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조여란이 동산국과 손잡고 남제를 멸하려 한 만큼, 동산국으로부터 적잖은 지원을 받았을 것입니다.”“그 자를 처단하기 전에 이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서여국 황제의 눈빛에는 차갑고 날카로운 기운이 번뜩였다.“그 말이 맞다. 이 일은 반드시 철저히 파헤칠 것이다.”서여국에서 반역과 군주 시해는 이미 죽음에 값하는 죄였다.게다가 외국과 결탁한 죄는 나라를 배신한 중죄였다.그녀는 이 중죄를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서여국 천옥.조여란은 형틀에 묶인 채 기운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다.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녀는 감옥을 직접 찾은 서여국 황제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폐하, 이렇게 무정하실 수 있습니까?”“제가 잘못한 건 많지만, 전장에서 함께 싸우며 폐하의 목숨을 구해드린 적도 있지 않습니까?”“또한, 쌍둥이 여동생을 찾아드린 것도 저입니다! 이런 공로를 생각하신다면 제 죄를 덜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서여국 황제는 냉소하며 말했다.“여동생이라니? 네가 조종하여 내 여동생 행세를 하게 만든 창부를 말하는 것이냐? 그런 자가 내 혈육이라 할
서여국 황제는 평온한 얼굴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후 궁으로 돌아가거라. 어의에게 너의 상태를 잘 살피게 하겠다."봉구안은 서여국으로 비밀 사절로 파견된 상태였고, 황제와 그녀의 심복 모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황제의 호위병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황제의 배려에 봉구안은 사양하려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모신이 먼저 물었다."폐하, 저 관료들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황제는 조여란이 화살로 모두를 살해하려 했던 순간, 관료들 중 일부가 외쳤던 말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조여란의 동조자는 모두 체포하고, 나머지는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라.""예, 폐하!"그 순간, 반역죄가 자신들에게 닥쳤음을 깨달은 관료들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폐하, 살려주십시오!""폐하! 순간의 실수였습니다!""폐하, 조여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마음은 없었습니다!""폐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그러나 서여국 황제는 이들의 간청을 전혀 듣지 않고 단호하게 명령했다."끌고 가거라!"그렇게 조여란의 동조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아아…" 숙연은 조여란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점점 불안에 휩싸였다. 그녀는 급히 몸을 떨며 말했다."저는 조여란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억울하게 끌려온 것뿐입니다."서여국 황제는 차갑고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억울하다고? 내가 본 건 너와 조여란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서여국 황제는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숙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를 저었다."아닙니다! 언니,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처음에는 조여란이 반역자인 줄도 몰랐습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여국 황제는 검을 뽑아 숙연의 목에 겨누며 비웃듯 말했다."아직도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구나?"숙연의 동공이 흔들리며 그녀는 급히 외쳤다."언니, 저… 저는 언니의 친동생입니다…!"그 순간, 황제는 매섭게 칼로 그
봉구안은 허공으로 치솟으며 다리로 신속하게 상대를 공격했다.경공을 잘하는 그녀였기에 발차기 실력도 남달랐다.조여란은 그녀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그 과정에 발길질에 맞은 그녀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다.착지한 봉구안은 한손을 등 뒤에 감추고 한손을 뻗으며 조여란을 도발했다.조여란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옷섶으로 흐르는 피를 닦고는 음침한 눈으로 봉구안을 노려보았다.“너 대체 정체가 뭐냐!”황제 신변의 호위가 이 정도로 강했던가?봉구안은 대답 대신, 이차 공격을 시전했다.철갑옷 같은 기공을 상대하려면 기교가 중요했다.그녀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응집했다.그리고 손바닥을 아래로 둔 채로 신속히 전방을 향해 찌르기를 시전했다.그녀의 손이 조여란의 가슴에 닿았다.평범한 주먹질처럼 보여도 뾰족하게 튀어나온 중지에 모든 힘이 실렸다.봉구안은 내력을 집중하여 중지에 실었기에 그 위력은 상당했다.“푸흡!”조여란의 등이 굽어지더니 입으로 피가 섞인 열물을 토해냈다.그녀는 뒤로 엉거주춤 물러나 가까스로 다시 중심을 잡았다.“철갑옷!”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의 주먹이 그녀의 늑골을 향해 날아왔다.뼈를 관통할 것 같은 위력이 담긴 일격에 조여란은 신음을 내뱉으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네 이년! 숙천설이 대체 너한테 뭘 약속했길래… 악!”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주먹이 눈을 향해 날아왔다.조여란은 눈을 붙잡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숙천설! 자신 있으면 나랑 붙어! 남의 등 뒤에 숨어 있는 게 무슨 황제야! 나와! 숙천설!”서여국 황제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헀다.“조여란, 네 철갑옷이 천하무적은 아니었군.”조여란은 이를 갈았다.“그럴 리 없어!”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헀다.“철갑옷은 날카로운 검이 아니면 상처를 낼 수 없지. 섭정왕,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네가 이긴다면 길을 비키도록 하지.”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뻗었다.“검을 가져오너라!”잽싸게 모습을 드러낸 은육
봉구안은 싸늘한 눈으로 조여란을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웠다.그 유명한 철갑옷 공법을 한번 눈앞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순식간에 봉구안은 발로 땅을 구르며 앞을 향해 튕겨나갔다.조여란은 그 자리에서 자세를 취하고 기를 운용하여 공법을 시전했다. 온몸의 근육이 단단하게 굳기 시작하더니 마치 단단한 방패를 연상케 했다.봉구안은 상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창을 받아라!”그녀가 창술에 능하다는 것을 아는 서여국 황제가 그녀를 향해 무기를 던졌다.봉구안은 창을 받고는 고개도 안 돌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조여란은 음침한 얼굴로 다시 공법을 시전했다.장창이 그녀의 어깨를 찔렀지만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했다.봉구안은 다시 정신을 다잡고 상대의 가슴을 향해 창을 찔렀다.하지만 극한으로 끌어올린 조여란의 철갑옷 공법 때문에 창끝은 그녀의 옷을 찢고도 가슴에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봉구안의 모든 초식은 상대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장창이 부러질 때까지 찔렀는데도 조여란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진기를 응집한 조여란은 산발이 된 머리를 휘날리며 음산한 눈빛으로 소리쳤다.“숙천설,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그녀는 봉구안을 밀치고 서여국 황제에게 달려들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황제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봉구안은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분노한 조여란이 호통쳤다.“주제도 모르는 것, 감히 내 앞을 가로막다니! 그래! 네년부터 죽여주마!”곧이어 조여란의 공세가 이어졌다.두 사람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육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그림자 호위 은삼이 은이에게 말했다.“형님, 도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은이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마마께선 지시를 받고 움직이라 했다.”은삼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조여란 저 여자 꽤 하는데요? 마마께서 다칠까 걱정돼요.”은칠이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마마와 조여란이 결전을 벌이는데 은삼이 재수없는 말만 하며 마마를 저주했습니다.]탁!은
조여란 신변의 병사들이 활시위를 잡았다.이때 누군가가 외쳤다.“당장 그만둬!”조여란은 의아한 얼굴로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수많은 사람들이 광화사 대문을 열고 반란군의 앞으로 다가갔다.서여국의 관원들이었다.문무백관이 거의 다 이곳에 잡혀왔다.황제가 한 짓일 것이다.조여란이 차갑게 말했다.“저들을 인질로 나를 협박하려고? 난 누구든 죽일 수 있어!”대신들은 미친 사람처럼 발악하는 조여란의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섭정왕! 자네가 이런 사람이었을 줄이야!”“조여란, 감히 반역을 꾀하다니!”“우릴 다 죽이면 천하 백성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하려고? 조정에 관원이 한 명도 없으면 넌 황제가 되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조여란은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멍청한 것들은 버려도 좋아!”갑자기 검은 인영이 공중에서 나타났다. 그는 조여란도 익숙한 인물, 숙연을 데리고 있었다.“이 여자도 내칠 것이냐?”봉구안은 숙연을 앞으로 밀치며 싸늘하게 물었다.고공 비행에 숙연은 이미 겁에 질려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상태였다.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조여란을 향해 소리쳤다.“왕야, 나 좀 구해줘!”봉구안은 뒤에서 그녀의 턱을 잡고 비아냥거렸다.“숙연 대인, 이럴 때는 폐하께 살려달라 애원해야 하는 거 아닌가?”조여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사실 그녀 역시 숙연에게 정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장기말이었다.하지만 그것보다는 대의가 더 중요했다.“활시위를 당겨라!”곧 화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 것을 감지한 뭇 대신들이 소리를 질렀다.“조여란, 미쳤어? 우리 같은 편이잖아!”“황시위를 당기라니까!”조여란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숙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조여란을 바라보고 있었다.심지어 조여란이 데려온 병사들마저 모두 죽이라는 말에 동요하고 있었다.황제를 살해하는 것은 황위를 빼앗기 위함이지만 관원들을 죽이면 어떻게 될까?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이었다.병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얼굴을 가린 그림자
광화사.조여란의 대군과 호원아의 대군이 대치 중에 있었다.“호원아, 넌 무단으로 직무지를 떠나 폐하를 해하려고 하였다. 내가 섭정대권으로 너를 처단할 것이다!”호원아는 화가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난 폐하의 명을 받들어 광화사를 지키고 있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조여란, 반역은 네가 했지! 그리고 너희들, 감히 조여란과 결탁하더니! 폐하께 미안하지도 않느냐!”조여란의 옆에 선 한 장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방구 뀐 놈이 성낸다고! 호원아, 당장 비켜! 우린 폐하가 무사한지 확인해야겠다!”친히 광화사 대문을 지키고 선 호원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희를 들여보내? 꿈 깨!”조여란은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전방을 노려보며 손짓했다.“활시위를 당겨라!”그녀가 데려온 대군은 호원아가 이끄는 부대보다 인원수가 훨씬 많았다.아무리 호원아라도 쪽수 앞에서는 별 수가 없을 것이다.갑옷을 입은 호원아가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포진하고 화살을 방어해라!”뭇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광화사 안쪽까지 후퇴했다.화살비가 한바탕 쏟아진 후, 조여란은 마치 충신처럼 안쪽을 향해 외쳤다.“폐하, 소신이 너무 늦게 와서 송구합니다!”쾅!이때 대문이 열렸다.고개를 든 조여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용포를 입고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였다.“섭정왕, 늦었군.”서여국 황제의 신변에는 수십 명의 고수가 지키고 있었다.조여란은 싸늘한 눈빛으로 황제를 가리키며 말했다.“넌 폐하가 아니야!”모신 상궁이 분노한 말투로 반문했다.“섭정왕, 미친 것이냐! 폐하께서 여기 계신데 감히 손가락질을 해?”조여란은 등 뒤에 서 있는 뭇 병사들을 보며 말했다.“최근 폐하와 똑같이 생긴 여인이 광화사에 진입하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폐하를 사칭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호원아 너의 간계였구나.”“호원아, 네가 가짜 황제를 내세우고 진짜 폐하를 해한 게 틀림없어!”호원하가 분통해서 말했다.“조여란, 함부로 사람 모함하지 말거라!”서여국 황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