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이 열리고 개선군대가 성 안으로 들어오자 수많은 백성들이 마중을 나왔다.“맹 소장군은 어느 분일까?”“말을 타고 맨 앞에 계신 분이겠지!”“그런데 왜 가면을 쓰고 있지? 이러면 얼굴을 볼 수가 없잖아!”“자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소문에 맹 소장군은 너무 준수하게 생겨서 강압적인 분위기를 망친다고 가면을 쓰셨대.”“아니야. 얼굴에 못난 흉터가 있어서 가면을 쓴다는 소문도 있어!”사람들의 대화의 주제는 모두 개선하고 돌아온 맹 소장군이었다.현재 맹 소장군으로 위장한 교먹은 말 위에서 자신을 환대하는 백성들을 굽어보고 있었다.북부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목마다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표하기 위해 백성들이 마중나와 큰절을 올리고는 했다.“북부에서 맹 소장군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입니다!”“맹 소장군은 진정한 전신강림입니다!”백성들의 열정은 황성에 도착했을 때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그들은 병사들을 위해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들고 나왔고 돈 좀 있는 상인들은 아예 옥패나 보석을 들고 나와 장령들의 목에 걸어주었다.교먹은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마치 가면과 혼연일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지금은 그녀가 바로 맹성주인 것이다.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백성들의 경배를 당연하게 받았다.처자들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면서 비명을 질렀다.“맹 소장군께서 날 봐주셨어!”“아니야! 장군은 날 본 거야!”사내들이 맹성주를 향한 경외심도 여인들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소장군, 저도 북영군에 가입하고 싶습니다!”교먹은 그들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라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자라면 북영군의 대문은 언제나 열려 있을 것이다!”역관에 입주하기 전에 장령들은 일단 먼저 궁으로 가서 보고를 해야 했다.성문에서 황궁까지 가는 길목에서는 장군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황궁 안.소욱은 대전에서 대신들과 함께 장령들을 맞았다.두터운 갑옷으로 무장한 장령들이 근엄한 분위기를 풍기며 안으로 들어섰다.하지만 문무백
다음 날, 문무백관들은 장령들의 환영연회를 위해 입궁했다.황제와 황후가 상석에 앉고 비빈들이 그 옆에 차례로 앉았다.곧이어 공을 세운 몇몇 장군들이 도착했다.맨 앞에 선 교먹이 뭇 장령들과 함께 황제에게 예를 취했다.“황제 폐하 만세!”소욱은 손을 들며 근엄하게 말했다.“경들도 어서 자리에 앉으시게.”사람들은 황제가 맹성주를 진심으로 아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개를 든 교먹은 상위에 앉은 봉구안과 시선이 마주쳤다.봉구안도 자연히 그녀를 알아보았다.두 사람은 불필요한 시선교류를 멈추고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녕비가 주관한 오늘의 연회는 어디 모난데는 없으나, 그렇다고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흥을 돋우는 무희들의 춤, 향긋한 술과 감미로운 곡 연주가 있었다.그래도 맛깔나는 술은 장령들의 묵은 피로를 씻어내기에 충분했다.그들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호탕하게 먹고 마셨다.녕비는 각 장군들의 식습관을 미리 알아보고 그들을 위해 각자 입맛에 맞는 다과를 준비했다.장령들이 만족한다면 소욱도 자연히 녕비를 만족스럽게 생각할 것이다.연회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한 문관이 술잔을 들고 교먹을 찾았다.“일만 병력으로 십이만 적군을 물리치고 삼십 명이서 취산골 전투에서 승리한 맹 소장군의 사적은 이미 우리 남제의 전설을 다시 썼소! 소장군의 용맹함에 감탄할 따름이오!”교먹은 잔을 들고 그 문관과 시선을 맞추었다.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손덕방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나리, 소위 말하는 삼십인이 취산골을 공략했다는 전투가 사실은 배후에 오만 병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셨나 봅니다.”그 말을 들은 문무백관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뭐? 그럼 그게 가짜라고?”“오만이면 이길만하지…”“그 말은 맹성주 장군이 공훈을 가로채기 위해 거짓을 고했단 말이오?”교먹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황제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이때, 용상에 앉은 소욱이 입을 열었다.“이 일은 짐도 알고 있는 일이다. 전쟁을 치르는 중에 사실만 고할 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던 강빈은 황후의 목소리를 듣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녕비는 싸늘한 얼굴로 봉구안을 바라봤다.이런 상황에서 황후가 강빈을 감싼다고 장령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아마 뭇 장령들의 마음을 달래기 힘들 것이다.그녀는 도발 섞인 말투로 황후에게 물었다.“황후마마, 설마 우리 장군들이 강빈의 춤을 감상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지요?”봉구안은 그 말을 무시하고 황제에게 공손히 물었다.“폐하, 이왕 춤을 출 거면 통천고가 어떻습니까?”통천고는 제사 때 쓰이는 북이었다.그것의 의미는 북소리는 천지신명과 교류하며 기도를 올린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통천고는 일반 북과 생김새가 크게 다르진 않지만 특별 제작된 북으로서 소리가 더 우렁차고 힘이 있었다.통천고가 뭔지 모르는 변방의 장령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봉구안을 바라봤다.소욱이 인상을 찡그리며 봉구안에게 물었다.“왜 굳이 그래야만 하지?”봉구안은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갔다.“신첩은 장령들을 위해 매일 기도를 올렸고 이제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으니 신령께 감사인사를 올려야 하지만, 그동안 기도를 올리느라 체력을 너무 소진하여 아직 감사기도를 하지 못하였습니다.”“마침 오늘 뭇 장령들이 다 모인 이 기회를 빌어 강빈이 신첩을 대신하여 통천고를 울린다면 그것이 천지신명에 대한 감사인사가 아니겠나이까.”단지 북 위의 춤이 보고 싶은 장령들은 무슨 북을 쓰는지 관심이 없었다.하지만 강빈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달랐다.강빈은 그제야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만약 통천고 위에서 춤을 춘다면 그녀는 신을 섬기는 성녀인 것이고 아무도 그녀를 무희라고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이는 장령들의 소원도 만족하면서 강빈의 자존심도 지켜주었으니 완벽한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소욱은 황후의 뜻을 알아듣고 사람을 시켜 통천고를 가져오게 했다.그는 약간 불쾌한 눈빛으로 녕비를 바라보았다.이 많은 후궁들 중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여인이 하나도 없다니!정확히 말하자면 머리가 잘 돌
봉구안은 평온한 얼굴로 답했다.“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간 생기겠지.”인연이 없다면 언제가 돼도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하지만 대신들은 약속을 받아낸 거라고 생각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소욱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가에 비스듬히 미소를 지었다.손수건을 잔뜩 구겨쥔 녕비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장군들의 환영연을 준비한 사람은 분명 그녀인데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은 황후와 강빈에게로 모두 쏠려버렸다.모용선은 아무렇지 않은 척, 모든 걸 관망하고 있었다.겉보기에 분위기는 아주 괜찮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센 기싸움이 일고 있었다.술이 어느 정도 되자 한 무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교먹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맹 소장군은 무예가 출중하다고 하는데 저와 한번 겨루어 보시겠습니까!”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맹 소장군의 풍채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이 이상의 행운이 어디 있겠습니까!”“폐하, 맹 소장군에게 도전하고 싶은 사람들이 번갈아 겨루기를 할 수 있게 무대를 준비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야지 우리 남제 전신의 실력을 한눈에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소욱은 맹성주가 부상을 입은 걸 알고 있었기에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맹성주, 도전을 받아들일 테냐.”황제가 누군가에게 의견을 묻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교먹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공손히 말했다.“소신, 도전을 받아들이겠습니다.”소욱은 잔뜩 기대에 부푼 장령들을 둘러보며 담담히 말했다.“적당히 하거라.”그는 장령들의 마음을 뻔히 알고 있었다. 사실 상 도전이라고는 하지만 맹성주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이었다.연회장 중앙에 무대가 만들어지고 녕비는 무희들을 물렸다.봉구안의 시선이 교먹에게 닿았다.그녀는 교먹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랑 겨루기를 해서 질 실력은 아니지만 혼자서 여럿을 상대하긴 버거울 것이다.저들이 연달아 도전장을 내민다면 교먹은 감당하기 힘들었다.그녀의 눈빛에 걱정이 스쳤고 옆에 있는 소욱은 그 표정을 놓치
탁!가면은 그렇게 바닥으로 떨어졌다.그와 동시에 용맹함으로 이름을 남긴 맨 소장군의 얼굴이 사람들의 앞에 드러났다.사람들이 경악한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저기 봐! 저건 여자잖아!”아무리 남장을 하고 있다고 한들 얼굴을 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분간할 수 있었다.그 유명한 남제의 전신이 여자였다니!사내들은 갑자기 커다란 배신감과 수치심을 느꼈다.그들이 줄곧 존경하고 숭배하던 대상이 한낱 여자였다니!방관하던 대신들은 물론이고 손덕방마저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 대단한 맹성주가 여자였다니!서왕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교먹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소년 장군이 어쩌다가 여자로 변한 거지?봉구안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교먹을 빤히 응시했다.가면이 이렇게 쉽게 벗겨지다니.교먹의 얼굴에 당황함이 잠깐 스치더니 재빨리 가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하지만 옆에 있던 손덕방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발로 가면을 멀리 걷어차 버렸다.곧이어 그는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를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폐하, 이 인간은…”털썩!교먹은 바로 황제의 앞에 양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폐하, 소신이 해명하겠습니다. 소신은 일부러 폐하를 기만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문무백관들은 경악함과 동시에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그에 반해 내막을 아는 봉 대인의 표정에는 그리 동요가 없었다.그는 단지 맹건이 너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대체할 사람을 고를 거면 사내로 골랐어야 했다.그는 이 일로 봉씨 가문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속으로 기도했다.봉 대인은 한심한 눈으로 상석에 앉은 봉구안을 힐끗 보았다.모든 일의 근원은 그녀에게서 시작된 것이다.그녀가 북부로 가서 전장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소욱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럴수록 그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은 초조하기만 했다.곧이어 그가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맹성주는 맹건 장군의 외동아들인 거로 알고 있다. 네가 여인이라면 맹성주가 아니
잠시 후, 확인을 책임진 상궁이 대전으로 들어와서 아뢰었다.“폐하, 그 여인의 복부에서 최근에 입은 듯한 자상과 잔여독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몸에서 병부를 찾아냈습니다.”병부, 특히나 비영령은 교먹의 신분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만약 진짜 맹성주가 살아 있거나 맹건이 다른 사람에게 아들의 대역을 맡겼다면 절대 병부처럼 중요한 것을 교먹에게 주지 않았을 것이다.사람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사건의 내막을 아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연상은 혼란스러웠다.교먹이 상처마저 위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렇게 되면 황제는 더 이상의 추적을 하지 않을 것이고 황후는 안전할 것이다.그런데 어쩐 일인지 유달리 황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봉구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방관자의 신분으로 교먹의 가면이 벗겨지고 신분을 증명하는 과정을 지켜봤다.애써 숨기고 있던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그녀만 알고 있었다.대전으로 돌아온 교먹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탄과 불만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폐하, 죄 많은 소녀를 벌하여 주십시오! 소녀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소녀는 어릴 때부터 사내처럼 키워져서 군영에 입대했고 나라를 위해 요행심리를 안고 전장에 나갔습니다.”“군영에 있는 3년 동안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지요. 이제 북부가 안정되었고 양나라가 항복했으니 소녀는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이제 죽어도 조상님께 미안하지 않고 저 자신에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소욱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진솔하고 공손한 태도에 보고 있던 사람들마저 감동했고 곧이어 그녀를 두둔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폐하, 충직하고 용맹한 여인입니다. 일반 사내들보다 나아요. 죽이기엔 아깝습니다!”“폐하, 군주를 기만하긴 하였으나 좋은 취지로 출발하였으니 이렇게 의를 지키는 여인은 우리 남제 여인들의 본보기입니다!”봉 대인도 나서서 말했다.“폐하, 공을 세운 장군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그는 교먹을
교먹은 황제에게 감사의 절을 올리고도 걱정스럽게 물었다.“폐하, 그럼 사부와 부인은 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소욱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교먹이 맹성주를 사칭하고 다니는 걸 맹건 부부가 전혀 몰랐을 리 없었다.맹성주는 그들의 친아들이었다.하지만 제왕이라면 가끔은 눈을 감아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너에게 맹씨 성을 내리겠다. 맹교먹은 맹건의 수양딸이 되었으니 맹가도 후대가 생긴 거지.”순간, 교먹의 눈동자에 눈물이 핑 돌았다.그녀는 마치 크게 감동한 사람처럼 결연하게 말했다.“폐하, 소녀의 목숨, 나라를 위해 바치겠습니다!”문무백관들읜 소욱의 처사가 사실은 ‘맹 소장군’의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는 맹건 부부에게 내리는 포상임과 동시에 교먹과 혼인을 하는 자는 데릴사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비빈들은 여장군의 탄생에 감개무량했다.누군가는 대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또 누군가는 교먹이 더없이 부러웠다.여인으로 태어나 자유롭게 말을 타고 달리고 사내와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는 것은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다.그리고 그들 중 아무도 황제에게서 저런 찬탄의 눈빛을 받아보지 못했다.자리에서 일어선 봉구안이 말했다.“폐하, 신첩은 몸이 안 좋아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소욱은 여장군을 봉하고 다른 장령들을 위로하는데 신경이 팔려 굳이 따지지 않았다.봉 대인은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황후를 한심하게 생각했다.‘뭐가 기분이 나빠서 저러는 거지?’위장신분을 누군가가 뒤집어썼으니 봉 대인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앞으로 그녀는 다시 북부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안심하고 황후의 직책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교먹은 떠나는 봉구안의 뒷모습을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영화궁.연상은 걱정 어린 얼굴로 봉구안을 뒤따르고 있었다.침전으로 들어간 봉구안이 걸음을 멈추고 싸늘하게 말했다.“물러가거라.”연상은 얌전히 대전밖으로 물러났다.곧이어 봉구안은 문을 닫고 홀로 침전으로 들어갔다.상전이 안에
교먹은 잔뜩 억울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언니, 난 그런 적 없어…”봉구안이 점점 손에 힘을 주자 교먹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맹가 조모께서 이 일을 알면 어떻게 될지 생각은 해봤니? 교먹, 스승님과 사모께서 널 십년이나 키워주셨는데 넌 이렇게 보답하는 거야?”“언니… 난 진짜로… 일부러 가면을 벗은 게 아니야…”그녀가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았기에 봉구안은 손을 풀어주었다.교먹은 벽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녀를 바라봤다.“언니, 내가 언니의 공훈을 가로챈 걸 알아. 하지만 날 믿어줘. 난 진짜로…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였어.”봉구안은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교먹에게 등을 돌리고 말했다.“북부로 돌아가서 사부와 사모께 직접 사과드리거라!”그녀는 소장군의 자리를 바란 적이 없었다.맨 처음에 맹 사형을 위장한 것은 맹가의 조모를 위한 것이었다.교먹은 맹 사형의 죽음을 이렇게 폭로하면 안됐었다.진심으로 화난 봉구안의 화난 모습을 보고 교먹은 그녀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언니… 날 가장 아끼는 우리 언니… 내 말은 모두 진심이었어…”봉구안은 실망감을 금할 수 없었다.교먹을 아꼈기에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거짓을 까발리지 않고 사부와 사모에게 편지를 보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한 것이었다.“너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장군의 자리가 가지는 의미를 너는 잘 고민해야 할 것이다.”그 말을 끝으로 봉구안은 자리를 떴다.교먹은 결연한 표정으로 어두운 냉궁에 남아 멀어지는 봉구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히 알지.”장군은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 올라갈 수 있는 자리였다. 맹가 조모의 생사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언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항상 모두를 배려하고 살리고 싶어하지.’‘후궁의 비빈들에게마저 진심을 베풀다니. 언젠간 독이 되어 돌아올 거야.’장군 연회가 끝난 뒤, 소욱은 곧장 영화궁으로 향했다.그의 몸에서 술냄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