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먹은 황제에게 감사의 절을 올리고도 걱정스럽게 물었다.“폐하, 그럼 사부와 부인은 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소욱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교먹이 맹성주를 사칭하고 다니는 걸 맹건 부부가 전혀 몰랐을 리 없었다.맹성주는 그들의 친아들이었다.하지만 제왕이라면 가끔은 눈을 감아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너에게 맹씨 성을 내리겠다. 맹교먹은 맹건의 수양딸이 되었으니 맹가도 후대가 생긴 거지.”순간, 교먹의 눈동자에 눈물이 핑 돌았다.그녀는 마치 크게 감동한 사람처럼 결연하게 말했다.“폐하, 소녀의 목숨, 나라를 위해 바치겠습니다!”문무백관들읜 소욱의 처사가 사실은 ‘맹 소장군’의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는 맹건 부부에게 내리는 포상임과 동시에 교먹과 혼인을 하는 자는 데릴사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비빈들은 여장군의 탄생에 감개무량했다.누군가는 대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또 누군가는 교먹이 더없이 부러웠다.여인으로 태어나 자유롭게 말을 타고 달리고 사내와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는 것은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다.그리고 그들 중 아무도 황제에게서 저런 찬탄의 눈빛을 받아보지 못했다.자리에서 일어선 봉구안이 말했다.“폐하, 신첩은 몸이 안 좋아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소욱은 여장군을 봉하고 다른 장령들을 위로하는데 신경이 팔려 굳이 따지지 않았다.봉 대인은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황후를 한심하게 생각했다.‘뭐가 기분이 나빠서 저러는 거지?’위장신분을 누군가가 뒤집어썼으니 봉 대인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앞으로 그녀는 다시 북부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안심하고 황후의 직책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교먹은 떠나는 봉구안의 뒷모습을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영화궁.연상은 걱정 어린 얼굴로 봉구안을 뒤따르고 있었다.침전으로 들어간 봉구안이 걸음을 멈추고 싸늘하게 말했다.“물러가거라.”연상은 얌전히 대전밖으로 물러났다.곧이어 봉구안은 문을 닫고 홀로 침전으로 들어갔다.상전이 안에
교먹은 잔뜩 억울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언니, 난 그런 적 없어…”봉구안이 점점 손에 힘을 주자 교먹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맹가 조모께서 이 일을 알면 어떻게 될지 생각은 해봤니? 교먹, 스승님과 사모께서 널 십년이나 키워주셨는데 넌 이렇게 보답하는 거야?”“언니… 난 진짜로… 일부러 가면을 벗은 게 아니야…”그녀가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았기에 봉구안은 손을 풀어주었다.교먹은 벽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녀를 바라봤다.“언니, 내가 언니의 공훈을 가로챈 걸 알아. 하지만 날 믿어줘. 난 진짜로…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였어.”봉구안은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교먹에게 등을 돌리고 말했다.“북부로 돌아가서 사부와 사모께 직접 사과드리거라!”그녀는 소장군의 자리를 바란 적이 없었다.맨 처음에 맹 사형을 위장한 것은 맹가의 조모를 위한 것이었다.교먹은 맹 사형의 죽음을 이렇게 폭로하면 안됐었다.진심으로 화난 봉구안의 화난 모습을 보고 교먹은 그녀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언니… 날 가장 아끼는 우리 언니… 내 말은 모두 진심이었어…”봉구안은 실망감을 금할 수 없었다.교먹을 아꼈기에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거짓을 까발리지 않고 사부와 사모에게 편지를 보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한 것이었다.“너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장군의 자리가 가지는 의미를 너는 잘 고민해야 할 것이다.”그 말을 끝으로 봉구안은 자리를 떴다.교먹은 결연한 표정으로 어두운 냉궁에 남아 멀어지는 봉구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히 알지.”장군은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 올라갈 수 있는 자리였다. 맹가 조모의 생사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언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항상 모두를 배려하고 살리고 싶어하지.’‘후궁의 비빈들에게마저 진심을 베풀다니. 언젠간 독이 되어 돌아올 거야.’장군 연회가 끝난 뒤, 소욱은 곧장 영화궁으로 향했다.그의 몸에서 술냄
봉구안은 한점 동요 없는 눈빛을 하고 생각에 잠겼다.줄곧 온순하고 자신을 따르던 동생이 이렇게 원대한 계획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직은 믿기 힘들었다.“황후.”소욱의 부름이 그녀를 사색에서 깨어나게 했다.고개를 돌린 그녀는 미처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정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어인 일이십니까?”소욱은 바짝 경직된 그녀의 태도를 보고 인상을 썼다.갑자기 방문해서 긴장한 것인가? 오늘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무척이나 이상했다.소욱은 장부를 내려놓고 정색해서 말했다.“후대 일은…”봉구안은 공손히 고개를 떨어뜨리며 표정을 감추었다.“말씀하시지요.”“종친 중에 괜찮은 인재가 있으면…”종친 중에서 아이를 간택해서 후계로 봉하겠다는 뜻일까?봉구안은 묘한 표정으로 그를 아래위로 훑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후궁을 거의 없는 존재 취급하고 있었다. 능연이를 방패막이로 세운 일부터가 이상했다.하지만 서 귀인의 약에 당한 날 보였던 행동을 보면 그 방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물론, 약물 작용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소욱은 탐구에 가까운 그녀의 시선을 보고 불쾌하게 물었다.“왜 그런 눈으로 짐을 보는 거지?”봉구안은 정색해서 그에게 물었다.“폐하, 아주 외람된 말씀이지만… 혹시 건강에 문제가 있으신 겁니까?”소욱의 표정이 음침하게 굳었다.감히 그의 능력을 의심하다니!순식간에 체내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봉구안은 그의 음침한 표정을 보고도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황실에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소욱은 여태 자식을 보지 못했고 만약 어느 날 갑자기 그가 급사한다면 뒤를 이을 후대가 없게 된다.조정은 혼돈의 도가니가 될 것이고 외적은 이 틈을 타서 남제를 침공할 것이다.그녀는 충직한 신하처럼 그에게 대놓고 말했다.“폐하, 건강 문제는 치료를 거부하면 안 되옵니다. 말 못할 질병을 앓고 계신다면 숨기는 것만이 방법은 아닐 겁니다. 일찌감치 치료하는 것이…”소욱은 그녀의 말을 더 이상 듣
봉씨 저택.봉 대인은 오늘 기분이 무척 좋았다.옷시중을 들던 봉 부인이 물었다.봉 대인은 밖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작은 소리로 부인에게 말했다.“구안이는 앞으로 북부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소.”봉 부인이 놀라며 물었다.“왜죠?”봉 대인은 오늘 장군 환영연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부인에게 들려주었다.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제 우리도 안심할 수 있게 되었소!”하지만 봉 부인은 마냥 웃을 수 없었다.그녀는 먼저 걱정이 앞섰다.지금쯤 가장 속상할 사람은 아마 봉구안일 것이다.다음 날.아침 일찍 강빈은 영화궁을 찾았다.“황후마마, 어제 신첩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마마가 아니었더라면 신첩은 후궁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신첩은 가진 게 별로 없어서 폐하께 받은 포상으로 마마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능연이가 유배를 간 후로 강빈의 입지는 나날이 힘들어지고 있었다. 후궁들은 그녀를 고립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능연이에게 당한 수모를 그녀에게 앙갚음을 하려는 후궁들도 많았다.그리하여 오늘 감사의 마음을 안고 황후를 찾아온데는 황후의 비호를 청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하지만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라 망설여졌다.어쨌든 강빈은 능연이와 가장 가까웠던 후궁이었고 능연이는 황후의 손에 제거당한 인물이었다.강빈은 안절부절 못하며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그녀에게는 아무런 원한이 없는 봉구안이었기에 당연히 무고한 자를 괴롭힐 이유가 없었다.“감사 선물은 되었다. 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강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황후마마, 소첩도 가빈처럼 자주 찾아뵈어도 될까요?”봉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마음대로 하거라.”냉담한 반응이었지만 강빈은 마치 살 길을 찾을 것처럼 숨통이 트였다.“감사합니다, 황후마마!”‘마마는 그냥 겉보기만 싸늘한 분이었어!’한편, 녕비는 아침 일찍 자녕궁으로 갔다.태후가 유유히 말했다.“장군 연회를 준비하며 네가 그렇게 많은 고생을 했는데 강빈조차 포상을 받
서신을 읽은 맹 장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변방을 지키느라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게 한스러울 뿐이었다.“어머니께서 이 일을 아시면…”맹 부인은 부드럽게 부군의 손을 잡아주었다.“저한테 맡기세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싸늘하게 표정을 바꾸었다.“다만 교먹 그 아이가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맹 장군이 물었다.“부인은 그 아이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이오?”곧이어 그는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아니, 그건 아닐 것이오. 그럴 이유가 없지 않소?”교먹을 제자로 들일 때부터 자식처럼 아끼며 키웠던 아이였다.진심은 통한다고, 그는 교먹이 그렇게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고 믿을 수 없었다.맹 부인은 부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부군, 저도 그 아이를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지요.”“생각을 해보세요. 용호군이 습격을 당하고 교먹이 무림맹을 이끌고 지원을 나갔죠. 그리고 구안이를 사칭하여 병사를 이끌었고요. 겉보기에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지만 어딘가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그 말을 들은 맹 장군의 안색이 진지해졌다.맹 부인이 계속해서 말했다.“전쟁이 끝난 후에 저는 용호군 사건을 몰래 조사하였습니다. 지금 당장은 부군께 확실한 증거를 보여드릴 순 없지만 했다면 흔적을 남겼을 거라고 믿습니다.”맹 장군은 부인의 신중함을 믿기에 그녀가 근거 없는 의심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부인, 일찍부터 교먹 그 아이를 의심하고 있었던 거요?”맹 부인은 부인하지 않았다.“예, 일찍부터 이상함을 느꼈지요. 이제 그 아이가 맹성주의 신분을 대체하고 나섰으니 의심에 확신이 선 것입니다.”맹 장군의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해졌다.그는 주먹으로 목탁을 치며 정색해서 말했다.“이 모든 것이 그 아이의 계략이라면 내 친히 문호를 청소할 것이오!”맹 부인은 부군의 가슴을 다독이며 위로의 말을 했다.“어머님께는 제가 사람을 보내 모든 소식
소욱은 몰래 자객을 쫓아 영화궁까지 쫓아왔다. 그리고 그 여자객이 침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바닥에 흐른 피가 욕실까지 이어졌다.사내의 눈빛이 서슬퍼렇게 빛이 났다.욕실 문이 열리고 황후가 나왔다.“폐하께서 납시셨는데 왜 아무도 알리지 않은 것이냐?”여인은 얇은 잠옷에 금방 목욕을 마치고 나온 것처럼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고 머리에도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맨발로 걸어 소욱의 앞으로 다가왔다. 서늘한 바람이 불자 그녀의 치맛자락이 하늘하늘 휘날리며 그녀의 가녀린 종아리가 시야에 언뜰거렸다.소욱의 평온한 얼굴에 살짝 금이 가기 시작했다.그가 황후를 지나쳐 욕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황후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폐하, 안에 정리가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휘릭!소욱은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밀쳐서 벽에 밀착시켰다.그리고 매처럼 예리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줄곧 목욕을 하고 있었나?”봉구안은 평온한 표정을 유지한 채 답했다.“예.”“조금 전 자객이 안으로 들어왔는데 보았느냐?”봉구안은 시선을 떨구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소욱은 그녀의 턱을 치켜올리고 대답을 재촉했다.“짐의 수색을 거부하는 것이냐? 황후, 짐이 그 여인을 찾아내길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 만약 찾아내지 못한다면…”그는 잠깐 숨을 고르고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계속해서 말했다.“찾아내지 못한다면 네가 바로 그 자객인 것이다.”봉구안은 침착하게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폐하의 목숨을 살린 아이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소욱은 그녀의 저지를 무시하고 욕실로 들어갔다.그와 동시에 밖에서 진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잡아!”소욱의 싸늘한 시선이 봉구안에게 닿았다.봉구안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그의 입에서 천수독의 단서를 듣고 싶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리해서 일을 추진하진 않을 것이다.채찍을 발견한 후로 그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기에 당연히 오늘 밤도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단서의 중요성과 이번 외
장군연이 끝난 후, 소욱은 각 지방 장령들과 양나라 항복에 관한 문제를 상의했다.교먹은 황성에 있는 동안 수시로 입궁했다.그녀가 자주 서재를 출입하는 바람에 후궁의 비빈들은 질투에 휩싸였다.아침 문안을 할 때, 그들은 봉구안에게 불만을 표했다.“아무리 장군이라지만 여인에 불과한데 어째 그리 분수를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맹 소장군은 폐하가 가장 아끼는 장령이니 저희와 비할 바가 못 되지요.”“후궁에 거의 출입하지 않는 폐하께서 맹 소장군이랑은 수시로 붙어다닙니다. 오늘도 어마장에서 사냥을 하시더라니깐요. 황후마마, 후궁에 또 여인이 추가될지도 모르겠습니다.”봉구안은 평온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소욱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교먹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여장군이 되었으니 후궁의 일원이 되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궁중법도나 좀 베끼거라.”그 말을 들은 비빈들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그들이 모두 떠난 후, 강빈은 남아 봉구안에게 조심스레 건의했다.“마마, 외람된 말씀이지만 자고로 여장군이 황후가 된 선례가 적지 않습니다. 맹 소장군은 확실히 보통 여자들과는 다르지요. 민심도 그녀를 향하고 있고 폐하의 찬사도 받는 몸이니 경계를 늦추시면 안 됩니다.”봉구안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소욱이 누굴 후궁에 들이든, 누굴 황후의 자리에 앉히든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봉구안이 말이 없자, 강빈은 자신이 너무 직설적으로 말한 것 같아 우회해서 말했다.“다만 맹 소장군의 용모가 남자처럼 거칠게 생겼으니 아마 폐하께서 남녀의 감정을 느끼긴 힘들 것 같네요.”“마마의 입지가 더 단단해지고 황자를 잉태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 누구도 마마의 지위를 흔들지는 못할 겁니다.”봉구안은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강빈, 난 널 영원히 보호해 줄 순 없어. 그러니 내 책사가 될 필요도 없고 내 앞에서 아양을 떨 필요도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거라. 폐하의 총애를 위해 움직이든가. 이런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황제가 옆에 있는지라 교먹은 많은 것을 말할 수 없었다.그녀는 봉구안에게 공손히 예를 행하였다.“전장에 나간 병사들을 위해 마마께서 기도를 올려주셨다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꼭 찾아뵙고 직접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그리하여 조금 전 폐하와 어마장에 있을 때 무리한 요구를 한 것입니다. 마마, 차로 술을 대신하여 마마께 한잔 올리겠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니 그리 감사할 것은 없네.”소욱이 말했다.“기도는 쉽지만 피 흘려 전장에서 싸운 전사들의 공로는 쉬운 것이 아니지. 그러니 황후가 공로를 세웠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연상은 당장 반박하고 싶었다.전장에 나가 피 흘려 싸운 사람은 봉구안이었다.그런데 모든 공로가 교먹에게 돌아갔으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교먹이 진지하게 말했다.“폐하, 마마의 백일기도가 없었더라면 저희도 이리 쉽게 대승을 거둘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황제의 말을 바로 반박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가 한낱 여인이라면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소욱은 책망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맹 장군이 황후에게 공로가 있다면 그런 것이지.”황제가 맹 소장군을 얼마나 신뢰하고 아끼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봉구안이 물었다.“교… 아니, 맹 소장군, 언제 북부로 돌아갈 생각인가?”“여기에서의 일을 마쳤으니 이틀 후에 출발할 생각입니다.”봉구안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북부의 안녕은 이제 장군께 맡기겠네.”교먹은 자리에서 일어서 공손히 예를 행했다.“걱정 마십시오. 마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변방을 수호하겠습니다. 소신도 마마의 건강과 안녕, 그리고 남제를 위해 하루빨리 귀한 황태자를 잉태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봉구안은 순간 가슴이 철렁해서 고개를 들고 교먹을 바라봤다.두 사람 사이에 타인은 알아볼 수 없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곧이어 봉구안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중생을 뒤흔들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교먹은 오싹한 소름이 돋았
고인이 된 친부 이야기가 나오자, 서여국 황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어릴 적에, 아바마마께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궁 안에는 아바마마의 용모파기조차 남아 있지 않다.”“나도 그분의 얼굴이 어떤지 기억나지 않는다. 꼭 용모파기가 필요하다면, 그 시절을 기억하는 노인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봉구안은 난처해졌다.용모파기가 없다는 건 외모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실낱같은 단서를 찾는 건 마치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았다.서여국 황제가 말을 이었다.“그때 나는 숙연과 겨우 두세 살이었다. 남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궁으로 들이닥쳤고, 어마마마께서는 혈통을 지키기 위해 나와 숙연을 궁 밖으로 내보내 숨기셨다.”“훗날 자매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옥비녀를 반으로 나누셨지.”“이것이 내가 가진 옥비녀의 반쪽이다.”황제는 흰 옥비녀의 반쪽을 꺼내 보였다. 비녀 머리와 일부 자루만 남은 상태였다.봉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렇다면 진짜 여동생 분께서 나머지 비녀 조각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서여국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반쪽 옥비녀와 비단 상자를 봉구안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것을 너에게 맡기마.”이는 서여국 황제가 봉구안을 깊이 신뢰한다는 표시였다.봉구안은 두 손으로 옥비녀를 받으며 차분한 눈빛을 띠었다. 그 눈빛에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믿음직스러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서여국 황제가 손목을 붙잡았다.봉구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서여국 황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소장군, 정말로 서여국에 남을 마음이 없느냐?”그녀는 끝내 포기하지 못한 듯 물었다.봉구안이 서여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섭정왕의 자리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높은 자리도 내어줄 의사가 있었다.멀리서 은칠이 붓을 들고 무언가를 쓰려 했지만, 은이가 이를 눈치채고는 단숨에 붓을 빼앗아 부러뜨렸다.은이는 부러진 붓을 내던지며 말없이 은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
비록 봉구안이 은위들에게 물러나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서여국 황제가 자신의 암위들을 향해 말했다. “물러나라.” 그녀의 단호한 한마디에 암위들은 즉시 자취를 감췄다. 이제 곁에는 모신만 남았지만, 황제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녀는 봉구안을 바라보며 은근히 이간질을 하기 시작하였다.“보아하니, 그들은 네 명령을 따르는 척하지만 실상은 여전히 제국 황제의 명령을 따르며 너를 감시하는구나. 네가 서여국에 머물고 싶어도 결국 넌 남제로 끌려가겠지.” 은칠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마마, 저희는…”하지만 봉구안은 은칠의 말을 무시한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차분하고 당당하게 서여국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굳이 저와 남제 폐하를 이간질할 필요는 없습니다. 외적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할 때지, 이런 무의미한 일을 할 때가 아닙니다.” 서여국 황제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결국 우리는 길이 다르구나. 나는 네가 남제 남성들의 권력 아래 있는 걸 싫어해, 여인들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 “서여국의 여인이나 남제의 남성이나 다르지 않습니다.”“길은 같을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천하 대동, 남녀가 평등한 길입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억누른다면 그 길은 기울고 불공평하며, 멀리 갈 수 없습니다.” “서여국의 내란도 조여란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나라가 혼란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가 군사들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남녀 간 불공평 때문이었습니다. 외지인으로서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제 말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부디 절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서여국 황제는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여국이 남성에게 불공평한 나라이고, 남제가 여성에게 불공평한 나라라면, 어느 쪽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느냐?” 봉구안은 고요한 목소리로 답했다. “길이 멀고 험해 천 년이 지나도 답을 내릴 수
봉구안은 눈앞에 나란히 서 있는 서여국의 미남들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저들을 처리하기 전에, 약은 남겨 두십시오.” 그들은 속으로 탄식했다. 앞에 있는 귀인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무정했다. 자신들의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녀는 약만 걱정하는 듯했다. 모신은 곁에서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이 맹 소장군은 남색에 전혀 관심이 없군.’….한편, 서여국 황제가 보낸 미남들을 몰아낸 것을 지켜본 봉구안의 호위들은 눈빛에 살기를 띄우며 말했다.“저따위로 우리 황후마마를 유혹하려 들다니, 당장 찾아가 처리해야겠습니다.”다른 곳에 숨어 있던 은이 역시 이 상황을 보고 머리를 저었다. “형님, 서여국 황제가 대체 무슨 속셈으로 미남들을 보낸 걸까요?”은이는 입에 물고 있던 강아지풀을 살짝 씹으며 비웃었다. “뻔하지. 서여국 황제는 황후마마를 남겨두고 싶어 하는 거다.” “뭐라고요?!” 호위들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만약 서여국 황제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우리 황제 폐하는 어찌 된단 말인가!”그러나 다행히도, 황후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미남들을 거절하고,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았다.한 시진 후. 서여국 황제는 봉구안이 머물고 있는 편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봉구안은 태연한 얼굴로 황제를 마주했다. “내 듣자 하니, 맹 소장군은 내가 준비한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다 하더구나.”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쉽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황제가 보낸 미남들은 단순히 약을 발라주는 임무를 맡은 것처럼 보였다. 만약 봉구안이 이들에게 미남계를 쓴 것이라 비난한다면, 황제는 오히려 그녀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한다고 역이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봉구안은 차분하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폐하의 깊은 뜻과 서여국 남자들의 준수한 외모를 보아 외신이 불만을 가질 리 없지요.” “다만… 제가 서여국으로 출사하기 전, 불전에 서약을 한 바 있습니다.”“
서여국 황궁, 천택궁 별채.은위 몇 명이 전각 밖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안에서는 어의가 봉구안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봉구안은 내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치명적이지 않았다.어의가 물러나려 하자 봉구안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 순간, 서여국 황제가 그녀의 어깨를 눌러 앉히며 말했다.“가만히 앉아 있거라. 내가 명을 내려 어혈을 풀고 멍을 가라앉히는 약을 바르게 하겠다.”봉구안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정중히 대답했다.“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서여국 황제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할 사람은 내가 아니겠느냐.”“그대의 계책이 아니었다면 내 계획대로 갔을 것이고, 그랬다면 많은 무고한 병사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이번 작전으로 피해를 줄였고, 조여란과 가짜 숙연까지 명분 있게 제거했으니 일석삼조가 아니겠느냐.”봉구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조여란이 동산국과 손잡고 남제를 멸하려 한 만큼, 동산국으로부터 적잖은 지원을 받았을 것입니다.”“그 자를 처단하기 전에 이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서여국 황제의 눈빛에는 차갑고 날카로운 기운이 번뜩였다.“그 말이 맞다. 이 일은 반드시 철저히 파헤칠 것이다.”서여국에서 반역과 군주 시해는 이미 죽음에 값하는 죄였다.게다가 외국과 결탁한 죄는 나라를 배신한 중죄였다.그녀는 이 중죄를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서여국 천옥.조여란은 형틀에 묶인 채 기운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다.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녀는 감옥을 직접 찾은 서여국 황제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폐하, 이렇게 무정하실 수 있습니까?”“제가 잘못한 건 많지만, 전장에서 함께 싸우며 폐하의 목숨을 구해드린 적도 있지 않습니까?”“또한, 쌍둥이 여동생을 찾아드린 것도 저입니다! 이런 공로를 생각하신다면 제 죄를 덜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서여국 황제는 냉소하며 말했다.“여동생이라니? 네가 조종하여 내 여동생 행세를 하게 만든 창부를 말하는 것이냐? 그런 자가 내 혈육이라 할
서여국 황제는 평온한 얼굴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후 궁으로 돌아가거라. 어의에게 너의 상태를 잘 살피게 하겠다."봉구안은 서여국으로 비밀 사절로 파견된 상태였고, 황제와 그녀의 심복 모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황제의 호위병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황제의 배려에 봉구안은 사양하려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모신이 먼저 물었다."폐하, 저 관료들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황제는 조여란이 화살로 모두를 살해하려 했던 순간, 관료들 중 일부가 외쳤던 말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조여란의 동조자는 모두 체포하고, 나머지는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라.""예, 폐하!"그 순간, 반역죄가 자신들에게 닥쳤음을 깨달은 관료들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폐하, 살려주십시오!""폐하! 순간의 실수였습니다!""폐하, 조여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마음은 없었습니다!""폐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그러나 서여국 황제는 이들의 간청을 전혀 듣지 않고 단호하게 명령했다."끌고 가거라!"그렇게 조여란의 동조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아아…" 숙연은 조여란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점점 불안에 휩싸였다. 그녀는 급히 몸을 떨며 말했다."저는 조여란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억울하게 끌려온 것뿐입니다."서여국 황제는 차갑고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억울하다고? 내가 본 건 너와 조여란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서여국 황제는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숙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를 저었다."아닙니다! 언니,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처음에는 조여란이 반역자인 줄도 몰랐습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여국 황제는 검을 뽑아 숙연의 목에 겨누며 비웃듯 말했다."아직도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구나?"숙연의 동공이 흔들리며 그녀는 급히 외쳤다."언니, 저… 저는 언니의 친동생입니다…!"그 순간, 황제는 매섭게 칼로 그
봉구안은 허공으로 치솟으며 다리로 신속하게 상대를 공격했다.경공을 잘하는 그녀였기에 발차기 실력도 남달랐다.조여란은 그녀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그 과정에 발길질에 맞은 그녀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다.착지한 봉구안은 한손을 등 뒤에 감추고 한손을 뻗으며 조여란을 도발했다.조여란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옷섶으로 흐르는 피를 닦고는 음침한 눈으로 봉구안을 노려보았다.“너 대체 정체가 뭐냐!”황제 신변의 호위가 이 정도로 강했던가?봉구안은 대답 대신, 이차 공격을 시전했다.철갑옷 같은 기공을 상대하려면 기교가 중요했다.그녀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응집했다.그리고 손바닥을 아래로 둔 채로 신속히 전방을 향해 찌르기를 시전했다.그녀의 손이 조여란의 가슴에 닿았다.평범한 주먹질처럼 보여도 뾰족하게 튀어나온 중지에 모든 힘이 실렸다.봉구안은 내력을 집중하여 중지에 실었기에 그 위력은 상당했다.“푸흡!”조여란의 등이 굽어지더니 입으로 피가 섞인 열물을 토해냈다.그녀는 뒤로 엉거주춤 물러나 가까스로 다시 중심을 잡았다.“철갑옷!”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의 주먹이 그녀의 늑골을 향해 날아왔다.뼈를 관통할 것 같은 위력이 담긴 일격에 조여란은 신음을 내뱉으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네 이년! 숙천설이 대체 너한테 뭘 약속했길래… 악!”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주먹이 눈을 향해 날아왔다.조여란은 눈을 붙잡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숙천설! 자신 있으면 나랑 붙어! 남의 등 뒤에 숨어 있는 게 무슨 황제야! 나와! 숙천설!”서여국 황제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헀다.“조여란, 네 철갑옷이 천하무적은 아니었군.”조여란은 이를 갈았다.“그럴 리 없어!”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헀다.“철갑옷은 날카로운 검이 아니면 상처를 낼 수 없지. 섭정왕,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네가 이긴다면 길을 비키도록 하지.”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뻗었다.“검을 가져오너라!”잽싸게 모습을 드러낸 은육
봉구안은 싸늘한 눈으로 조여란을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웠다.그 유명한 철갑옷 공법을 한번 눈앞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순식간에 봉구안은 발로 땅을 구르며 앞을 향해 튕겨나갔다.조여란은 그 자리에서 자세를 취하고 기를 운용하여 공법을 시전했다. 온몸의 근육이 단단하게 굳기 시작하더니 마치 단단한 방패를 연상케 했다.봉구안은 상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창을 받아라!”그녀가 창술에 능하다는 것을 아는 서여국 황제가 그녀를 향해 무기를 던졌다.봉구안은 창을 받고는 고개도 안 돌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조여란은 음침한 얼굴로 다시 공법을 시전했다.장창이 그녀의 어깨를 찔렀지만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했다.봉구안은 다시 정신을 다잡고 상대의 가슴을 향해 창을 찔렀다.하지만 극한으로 끌어올린 조여란의 철갑옷 공법 때문에 창끝은 그녀의 옷을 찢고도 가슴에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봉구안의 모든 초식은 상대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장창이 부러질 때까지 찔렀는데도 조여란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진기를 응집한 조여란은 산발이 된 머리를 휘날리며 음산한 눈빛으로 소리쳤다.“숙천설,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그녀는 봉구안을 밀치고 서여국 황제에게 달려들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황제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봉구안은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분노한 조여란이 호통쳤다.“주제도 모르는 것, 감히 내 앞을 가로막다니! 그래! 네년부터 죽여주마!”곧이어 조여란의 공세가 이어졌다.두 사람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육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그림자 호위 은삼이 은이에게 말했다.“형님, 도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은이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마마께선 지시를 받고 움직이라 했다.”은삼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조여란 저 여자 꽤 하는데요? 마마께서 다칠까 걱정돼요.”은칠이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마마와 조여란이 결전을 벌이는데 은삼이 재수없는 말만 하며 마마를 저주했습니다.]탁!은
조여란 신변의 병사들이 활시위를 잡았다.이때 누군가가 외쳤다.“당장 그만둬!”조여란은 의아한 얼굴로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수많은 사람들이 광화사 대문을 열고 반란군의 앞으로 다가갔다.서여국의 관원들이었다.문무백관이 거의 다 이곳에 잡혀왔다.황제가 한 짓일 것이다.조여란이 차갑게 말했다.“저들을 인질로 나를 협박하려고? 난 누구든 죽일 수 있어!”대신들은 미친 사람처럼 발악하는 조여란의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섭정왕! 자네가 이런 사람이었을 줄이야!”“조여란, 감히 반역을 꾀하다니!”“우릴 다 죽이면 천하 백성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하려고? 조정에 관원이 한 명도 없으면 넌 황제가 되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조여란은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멍청한 것들은 버려도 좋아!”갑자기 검은 인영이 공중에서 나타났다. 그는 조여란도 익숙한 인물, 숙연을 데리고 있었다.“이 여자도 내칠 것이냐?”봉구안은 숙연을 앞으로 밀치며 싸늘하게 물었다.고공 비행에 숙연은 이미 겁에 질려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상태였다.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조여란을 향해 소리쳤다.“왕야, 나 좀 구해줘!”봉구안은 뒤에서 그녀의 턱을 잡고 비아냥거렸다.“숙연 대인, 이럴 때는 폐하께 살려달라 애원해야 하는 거 아닌가?”조여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사실 그녀 역시 숙연에게 정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장기말이었다.하지만 그것보다는 대의가 더 중요했다.“활시위를 당겨라!”곧 화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 것을 감지한 뭇 대신들이 소리를 질렀다.“조여란, 미쳤어? 우리 같은 편이잖아!”“황시위를 당기라니까!”조여란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숙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조여란을 바라보고 있었다.심지어 조여란이 데려온 병사들마저 모두 죽이라는 말에 동요하고 있었다.황제를 살해하는 것은 황위를 빼앗기 위함이지만 관원들을 죽이면 어떻게 될까?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이었다.병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얼굴을 가린 그림자
광화사.조여란의 대군과 호원아의 대군이 대치 중에 있었다.“호원아, 넌 무단으로 직무지를 떠나 폐하를 해하려고 하였다. 내가 섭정대권으로 너를 처단할 것이다!”호원아는 화가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난 폐하의 명을 받들어 광화사를 지키고 있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조여란, 반역은 네가 했지! 그리고 너희들, 감히 조여란과 결탁하더니! 폐하께 미안하지도 않느냐!”조여란의 옆에 선 한 장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방구 뀐 놈이 성낸다고! 호원아, 당장 비켜! 우린 폐하가 무사한지 확인해야겠다!”친히 광화사 대문을 지키고 선 호원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희를 들여보내? 꿈 깨!”조여란은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전방을 노려보며 손짓했다.“활시위를 당겨라!”그녀가 데려온 대군은 호원아가 이끄는 부대보다 인원수가 훨씬 많았다.아무리 호원아라도 쪽수 앞에서는 별 수가 없을 것이다.갑옷을 입은 호원아가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포진하고 화살을 방어해라!”뭇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광화사 안쪽까지 후퇴했다.화살비가 한바탕 쏟아진 후, 조여란은 마치 충신처럼 안쪽을 향해 외쳤다.“폐하, 소신이 너무 늦게 와서 송구합니다!”쾅!이때 대문이 열렸다.고개를 든 조여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용포를 입고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였다.“섭정왕, 늦었군.”서여국 황제의 신변에는 수십 명의 고수가 지키고 있었다.조여란은 싸늘한 눈빛으로 황제를 가리키며 말했다.“넌 폐하가 아니야!”모신 상궁이 분노한 말투로 반문했다.“섭정왕, 미친 것이냐! 폐하께서 여기 계신데 감히 손가락질을 해?”조여란은 등 뒤에 서 있는 뭇 병사들을 보며 말했다.“최근 폐하와 똑같이 생긴 여인이 광화사에 진입하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폐하를 사칭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호원아 너의 간계였구나.”“호원아, 네가 가짜 황제를 내세우고 진짜 폐하를 해한 게 틀림없어!”호원하가 분통해서 말했다.“조여란, 함부로 사람 모함하지 말거라!”서여국 황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