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와 황후가 마차에 오르고 연상은 마차머리에 올랐다.대소사 대문 앞.멀어지는 마차를 눈빛으로 배웅하는 료공에게 어린 스님이 걱정스레 물었다.“사부님, 황후마마께서는 기도가 끝나기 전에 떠나셨는데 별 문제없겠지요?”료공은 두 손을 합장하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아니, 기도는 원만히 끝났다.”황성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마차에 올라 얼마 가지 않아 봉구안은 의식을 회복했다.하지만 의식이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그녀는 뭔가 고통스러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의원은 그녀가 몸살 기운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상 급하게 사당으로 돌아오느라 제대로 처치하지 못한 상처에 염증이 생긴 것이었다.마차 안은 너무 덥고 갑갑해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창문 가까이로 다가갔다.그런데 이때 커다란 손이 다가와서 그녀를 안쪽으로 잡아당겼다.귓가에 남자의 경고 섞인 목소리가 전해졌다.“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 움직여?”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봉구안은 힘없이 소욱의 어깨에 축 늘어졌다.소욱은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녀를 밀쳐내지는 않았다.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가 그의 코끝을 간지럽히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마치 부드럽고 말캉한 무언가가 그를 감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런데 그녀의 몸에서 이상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자, 소욱은 곧장 그녀를 밀치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불덩이처럼 뜨거웠다.“돌아가야 해…”봉구안은 고열에 횡설수설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몽롱한 의식 속에 그녀는 아직도 말을 타고 황성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소욱은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대소사에 돌아간다고?’그곳은 황후처럼 귀족가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가 오래 있을 곳이 아니었다.고작 두 달 있었을 뿐인데 다 죽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 거기에 더 두었다가는 황후를 다시 간택해야 할 판이었다.“기도를…”그녀가 의식불명의 상태로 중얼거렸다.그 말을 들은 소욱은 마음이 착잡했다.이 상황에서도 기도를 놓지 못하고
연상은 급한 마음에 적당한 핑계를 둘러댔다.“폐하, 마마께서 땀을 많이 흘리신 것 같으니 소인이 몸을 좀 닦아드리겠나이다.”곧이어 소욱은 침전을 떠났다.연상은 살며시 봉구안의 허리띠를 풀고 겉옷을 벗겼다.역시나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당장 처리하지 않으면 피가 스며나왔을 것이다.연상은 늦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바삐 움직였고 소욱은 밖에 앉아 싸늘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자진궁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러다가 구석진 곳에 있는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황후의 혼수품이 든 상자였는데 용과 봉황이 같이 하늘을 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궁에서조차 흔히 볼 수 없는 정교한 공예였다.그는 저도 모르게 그것에 이끌려 다가갔다가 발 밑에서 이상한 느낌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바닥에 깔린 벽돌 하나가 느슨해져 있었다.그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봉구안의 상처는 그리 심각한 게 아니었지만 독을 해독하는 것은 아주 힘든 작업이었다.며칠 동안 매일 피를 쏟아내야 완전히 독을 제거할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의 안색은 유난히 창백했다.게다가 밤낮을 쉬지 않고 말을 타고 달렸으니 몸에 무리가 온 것은 당연했다.그래도 회복력은 빨랐다.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침상 옆에서 지키고 있던 연상은 그녀가 눈을 뜬 것을 보고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마마!”눈을 뜬 봉구안이 갈린 목소리로 물었다.“여긴… 영화궁이냐?”연상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영화궁이에요! 마마께서 어제 의식을 잃고 고열에 시달리셨는데 민간 의원들이 이렇다 할 방도를 찾지 못해서 폐하께서 마마를 모시고 궁에 돌아왔어요. 그래도 태의의 약이 잘 듣네요. 적어도 열은 내렸으니까요.”봉구안은 애써 어젯밤 기억을 떠올렸지만 기억은 그녀가 쓰러지기 전에 머물러 있었다.“마마, 이따가 약이 다 달여지면 가져올 거예요. 며칠 더 드셔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상처는… 간단히 붕대로 감
아침 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영화궁으로 왔다.연상은 급급히 약을 달여 침전으로 가져가다가 황제의 대오를 보고 놀라서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폐… 폐하를 뵈옵니다!”소욱은 조용히 그녀를 지나쳐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황제가 영화궁을 방문해서 가장 기쁜 사람은 최 상궁이었다.연상은 다시 약을 가지러 가고 최 상궁은 남아서 황제의 시중을 들었다.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다과를 들고 나왔다.그런데 내전에 들어서자마자 문밖을 지키고 있던 유사양이 그녀를 저지했다.최 상궁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유사양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폐하께서는 마마와 할 이야기가 있다고 아무도 들지 말라 하였습니다.”최 상궁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연상도 자신을 말리며 황후의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 이제는 유 태감마저 자신을 막아서자 영화궁의 최고 상궁으로서 너무 서럽고 억울했다.한편, 침전 안.소욱은 봉구안이 앉아 있는 침대에 다가가서 앉았다.“몸은 좀 어떠하냐.”그의 질문에 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많이 좋아졌습니다.”곧이어 소욱은 사무적으로 말했다.“맹성주가 황성으로 돌아올 것이다. 전공이 혁혁한 개선장군이니 환영연회는 황후가 맡아서 하는 게 마땅하나…”그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계속했다.“몸이 많이 안 좋아보여서 녕비한테 주관하라고 하였다.”누가 장군 환영연회를 주관하는지 봉구안은 관심이 없었다.단지 곤혹스러운 게 있었다.“맹 소장군은 많이 다치셨다 하지 않았습니까?”그녀는 돌아오기 전에 스승에게 부탁해서 이번 일을 핑계로 오래도록 쉴 생각이었다.“아침에 완쾌되었다는 서신을 받았다. 보름 안에 황성에 당도한다는군.”말을 마친 소욱은 무심한 듯, 봉구안의 안색을 살폈다.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생각을 정리하느라 그의 미묘한 눈빛을 인지하지 못했다.분명 그녀 본인은 여기 있는데 보름 후에 황성에 당도할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황후.”사내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봉구안은
영화궁.북부가 안정되었으니 봉구안은 계속해서 그 배후의 인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단서는 그 두 통의 서신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마치 막다른 골목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마마, 약 드실 시간입니다.”연상이 약을 들고 들어와서 조용히 아뢰었다.봉구안은 한손으로 약그릇을 들고 단숨에 마셔버렸다.연상은 빈그릇을 보며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이렇게나 쓴 약을 한숨에 마셔버리다니!봉구안은 담담히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영화궁 내부에 그림자 시위가 또 추가된 것이 확인되었다.소욱은 왜 또 의심병이 도진 것일까?다음 날.봉 부인이 입궁했다.그녀는 딸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마마, 건강이 우선입니다.”남제에는 수많은 장령들이 있고 굳이 여인인 봉구안이 선봉에 설 이유가 없었다.어머니로서 봉 부인은 자식들이 평온하기만을 바랐다.봉구안은 모친의 걱정 어린 표정을 보고 부드럽게 말했다.“며칠 쉬면 괜찮아질 것입니다.”봉 부인은 연상을 바라보며 말했다.“마마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넌 나가서 망 좀 보고 있거라.”“예, 부인.”연상이 나간 후, 봉 부인은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고 약병 하나를 꺼냈다.봉구안은 상처 치료제인 줄 알고 받으려 했지만 봉 부인이 말했다.“나으리께서 거금을 들여 구해온 약입니다. 이걸 드시면… 평범한 여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봉구안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이게 뭔가요?”봉 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력을 모두 잃게 하는 약입니다.”봉구안은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돋고 항시 평온하던 얼굴도 균열이 생겼다.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봉 부인을 바라봤다. 채 아물지 못한 상처가 다시 벌어졌지만 아픈 느낌은 들지 않았다.육신의 아픔보다 아버지가 친히 그녀의 내력을 폐하려고 약을 구해왔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싸늘하게 했다.따라서 자리에서 일어선 봉 부인은 그녀의 손을 잡고 애원
소욱은 음침한 눈을 하고 말 등에서 정신을 잃은 여인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밑으로 드리운 손은 뻘건 피가 흥건했다.급급히 어마장으로 달려온 연상은 황제가 황후를 안고 오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예를 취했다.“폐하! 마마!”소욱은 그녀를 영화궁으로 안고 간 후에 태의를 불렀다.연상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침대가에 앉은 소욱의 주변으로 강압적인 기운이 풍기고 있어 감히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태의는 봉구안의 상처를 붕대로 감은 후에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폐하, 큰 상처는 아닙니다. 다만 기력이 회복되기 전에는 말을 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태의를 물린 후, 소욱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상을 바라봤다.“황후는 어쩌다 다친 거지?”연상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답했다.“저… 저는 그냥 봉 부인을 궁 밖으로 배웅하라는 명을 받고 나갔다 오느라 자세한 과정은 보지 못했나이다.”“봉 부인이 황후에게 뭐라고 했느냐?”소욱의 차갑고 준수한 얼굴에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연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부인께서 나가 있으라고 하셔서 소인도 상세한 건 듣지 못했나이다.”소욱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찡그렸다.“이만 나가보거라!”연상이 밖으로 나간 후, 침전에는 소욱과 혼수상태의 봉구안만 남았다.소욱은 침울한 눈빛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단순히 기혈 부족과 몸살기운이라면 여러 번 혼수상태에 빠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몸에 다른 부상이 있지 않는 한은...’소욱은 침전에 고이 숨겨져 있던 채찍이 생각 나서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띠를 잡았다.허리띠가 풀리면서 옷섶이 느슨해지고 그녀의 하얀 피부와 가녀린 쇄골이 드러났다.소욱은 천천히 상의 옷섶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살짝만 잡아당기면 몸 어디에 상처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그때, 그는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마차에서 그녀가
성격 온화한 맹 장군마저도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그는 서신을 구겼다가 그래도 분이 안 풀려 불에 태워버렸다.“부인, 신경 쓰지 마시오. 구안이는 우리 딸이고 그 아이가 우릴 버리지 않는 한, 우린 평생 그 아이의 부모요!”맹 부인은 그런 그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약간 기분이 풀린 그녀가 물었다.“교먹이 구안이를 대신하여 황성에 복귀하기로 하였으니 곧 돌아오겠네요?”맹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며칠 안에 당도할 것이오.”맹 부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사실 난 동의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는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기도해야겠네요.”맹 장군은 부드러운 어조로 부인을 달랬다.“폐하께서 매번 구안이를 황성에 부를 때마다 변방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는데 그것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우릴 공훈을 믿고 교만하다고 탄핵 상서를 올렸지 않소.”“이번에 양나라와의 전장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변방은 이미 안정되었다고 폐하께서 환영연회를 베푸셨으니 다른 장령들이 다 가는데 우리만 안 가면 더 많은 비하 발언들이 쏟아질 거요.”“하물며, 안 그래도 북대영에 불만을 품은 장령들이 많은데 이번에도 거절하면 구안이의 명성에 좋지 않소. 특히나 조카를 잃은 손덕방 장군은 호시탐탐 구안이의 공훈을 빼앗을 기회만 노리고 있으니!”“북대영의 전사들이 피 흘려 세운 공훈을 그런 간신배한테 빼앗길 수는 없지 않겠소.”맹 부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하긴, 꾀병을 부리는 것도 방법은 아니지요.”“다른 건 다 괜찮아도 수십 년만에 드디어 장령들 사이에서 후작이 탄생하는데 일을 그르칠까 걱정되오.”맹 장군의 진지한 말에 맹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부군께서는 언제면 후작 자리 하나 꿰차서 저에게 귀부인 자리를 누리게 해주실 건가요?”그렇게 농담하듯 말하고 있었지만 맹 부인은 여전히 불안했다.맹 장군도 그녀의 초조함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위로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교먹이 나이는 어려도 똑똑한 아이이니 실수하지 않을 것이
소욱은 벌떡 몸을 일으키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자진궁으로 돌아간다.”그는 더 이상의 설명도 없이 그대로 영화궁을 떠났다.봉구안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이유를 모르는 연상이 물었다.“마마, 폐하께선 식사 잘하시다가 어찌 갑자기 가신 건가요?”봉구안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해시 초, 장신궁에 불이 켜졌다.소욱은 대전 안에 앉아 한 시진을 기다렸다.늦은 시간이 되자 진길이 말했다.“폐하, 안 올 것 같습니다…”이때, 문밖에서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진길의 눈빛이 순간 빛났다.여자객이 과연 황후인 걸까?소욱이 눈짓하자 진길은 재빨리 가서 문을 열었다.하지만 문밖에 나타난 사람은 여자객이 아닌 어린 태감이었다.어린 태감은 황제를 보자 울먹이며 무릎을 꿇었다.“소… 소인… 폐하를 뵈옵니다.”소욱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진길이 태감에게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들어왔느냐!”태감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소인은 장신궁을 지나가다가 불이 켜져 있는데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길래 혹시 궁녀가 청소를 하나 하여…”진길은 매섭게 상대의 말을 자르고 턱을 치켜올렸다.“폐하의 안전에서 거짓말을 하다니! 참수형에 처할 것이다!”태감이 당황하며 납작 엎드렸다.“폐하,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소인은… 사실 궁녀와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장신궁에 불이 켜져 있기에 궁녀가 약속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한 줄 알고…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폐하!”자리에서 일어선 소욱은 태감 앞으로 다가가서 싸늘한 눈빛으로 상대를 주시하며 말했다.“형자사로 보내거라.”“예!”태감은 곧장 큰절을 올리며 애원했다.“목숨만 살려주십시오, 폐하!”소욱은 애원의 소리를 무시한 채, 밖으로 향하며 목에 있는 은사의 흔적을 닦았다.‘역시 너무 허술해서 안 속았나.’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까이에서 눈으로 직접 봐야 눈치챌 수 있는 것이었다.소욱은 마치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눈
소욱은 냄새에 민감한 편이 아니었기에 그 여자객의 향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그녀의 목을 조르고 손목을 잡은 적은 있지만 자로 잰 것도 아니고 여인의 손목과 목덜미의 굵기는 거의 비슷해서 정확한 추측은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이는 단지 그가 황후를 자극하기 위한 수단이었다.이런 방식은 다른 사람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수많은 전장을 겪으며 수많은 포로들을 상대한 봉구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소욱이 진짜로 그녀가 여자객이라고 확신했다면 이렇게 빙빙 에둘러서 떠볼 리가 없었다.그가 유일하게 장악하고 있는 단서는 그 채찍뿐이었다.그녀는 호수처럼 고요한 표정으로 담담히 그에게 말했다.“그것에 대해서는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신첩의 신변에는 연상을 제외하고도 여자 그림자 호위가 한 명 있습니다. 신첩이 황궁에 입궁할 때 신첩을 보호하려고 같이 들어왔지요. 그 물건들은 그 호위의 것입니다.”소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그림자 호위라?”봉구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그 아이는 신첩이 우연한 기회에 목숨을 구해준 아이이고 신분이 불분명한 아이입니다. 너무 불쌍해서 신첩이 옆에 두기로 했지요. 아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입궁한 뒤, 능연이를 몰래 조사하라고 지시를 내렸었습니다. 능연이의 죄명을 밝히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아이입니다.”소욱의 인상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처음 그 자객을 만났을 때, 그녀가 도망간 방향도 영화궁이었다.들어보니 앞뒤가 맞는 말이긴 하나, 소욱은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그 아이는 어디 있느냐.”소욱이 물었다.봉구안은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신첩은 그 아이와 노예 계약을 하지 않았기에 출입이 자유롭습니다. 신첩이 기도를 올리러 출궁하기 며칠 전에 저에게 작별을 고하더군요. 북부로 가보고 싶다 하였습니다.”소욱이 싸늘하게 말했다.“그대로 보내주기는 아쉬운 재능 아니더냐?”봉구안은 짐짓 한숨을 쉬며 답했다.“본디 우연한 만남이었고 그 아이는 신첩을 도와 능연이의 죄증을 밝혀냈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