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선이 하루가 멀다하게 태후궁에 드나들 수 있다는 건 태후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뜻이고 이는 모용선이 다른 수녀들과는 완전히 다른 입지에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조카딸인 녕비마저도 요즘 태후에게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녕비는 불만을 가득 가지고 자녕궁으로 향했다.계 상궁이 대문 앞에서 그녀에게 말했다.“마마, 지금은 모용가의 아가씨께서 태후마마를 위해 불경을 읽어드리고 있어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후쯤에 다시 오시지요.”녕비는 불만을 참으며 억지미소를 지었다.“고모가 모용가의 아가씨를 무척 마음에 두셨나 보군. 그럼 이만 물러가겠다.”계 상궁은 실망감이 가득한 녕비의 얼굴을 보고는 다가가서 작은 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마마, 태후께서 하는 모든 것은 마마와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태후마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마마밖에 없습니다.”녕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그건 나도 알아. 고모께 건강 잘 챙기라고 전해드리거라.”밖으로 나온 후, 녕비의 시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모용가의 셋째 아가씨가 수완이 좋나 봐요. 한번 만나본 사람은 다 마음에 들어한다는데 태후마저도 그 아가씨에게 이리도 잘해주시니 나중에 입궁하면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할까 봐 두렵습니다.”녕비가 하찮다는 듯이 코웃음쳤다.“그래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그년의 입궁을 막을 수도 없지 않느냐.”그녀는 영비를 닮지 않은 자신의 얼굴을 탓했다.하지만 그녀가 아는 태후라면 진심으로 모용선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다.영화궁.연상은 봉구안의 필묵 시중을 들며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마마, 모용선 아가씨는 좋은 인품에 영비를 똑 닮은 얼굴을 갖고 있다고 다른 비빈마마들이 긴장하고 계신 건 이해하겠는데 마마도 그 아가씨를 신경 쓰고 계신 건가요?”봉구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모용선을 왜 신경 쓰지?”“아닌가요? 그런데 아침부터 마마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셔서….”봉구안은 붓대를 내려놓고 싸늘한 표정으로
자진궁.목욕을 마친 소욱은 흑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천천히 걸어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그의 싸늘한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채찍에 향했다.날짜를 계산해 보니 어제가 몽화독이 발작할 날이었다.예상대로라면 그녀는 해독약을 구하러 와야 했다.그는 약속대로 진길을 시켜 장신궁에 약을 가져가게 했다.하지만 오래도록 기다렸지만 그녀는 약을 가지러 오지 않았고 오늘 아침에 가서 확인했을 때도 약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소욱이 생각에 잠긴 사이, 외출했던 진길이 돌아와서 아뢰었다.“폐하, 장신궁에 다녀왔는데 해독약은 그대로 있었습니다.”진길 역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몽화독이 발작했다면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릴 것인데 그녀는 무슨 수로 참았을까?소욱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알겠다.”어차피 그녀가 필요하다면 가지러 갔을 것이다.굳이 필요 없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갖다바치고 싶지는 않았다.한편, 봉구안은 봉장미 사건의 배후를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상대는 아주 치밀한 사람이라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봉구안이 걱정되는 건 동생 봉장미였다.그녀는 최근 마음대로 출궁할 수 없었다. 최근 며칠 사이 영화궁에 그녀를 지켜보는 눈동자가 많아진 느낌이었다. 어쩌면 소욱이 감시하라고 보낸 사람들일 수도 있었다.그리하여 그녀는 오백과의 밀서를 통해서만 봉장미의 상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송려의 치료를 받고 봉장미는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더 이상 자해를 하지 않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제정신인 상태도 아니었다.송려는 지금 상황에서 봉장미를 데리고 낯선 곳으로 간다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봉안진은 참장의 관직을 회복한 후에 곧 혼사가 정해졌다.이날 봉 부인이 직접 입궁하여 봉구안에게 희소식을 전했다.“고명부인 자리를 보고 온 거겠지만 주 상서댁 따님은 어여쁘고 현명한 아이이니 안진이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봉구안이 담담히 물었다.“혼례식은 언제로 잡았나
몇 차례의 수녀들이 입장을 하였지만 봉구안이 남긴 수녀는 많지 않았다.뭇 비빈들은 황후가 질투심에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했다.“모용 시랑 댁 모용선 입장!”소리를 들은 비빈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문쪽을 바라보았다.가녀린 몸매에 화려한 비단 예복을 입고 청순한 얼굴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입장했다.“소인 모용선, 황후마마를 뵈옵니다.”녕비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그녀의 얼굴이 죽은 영비와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능연이가 영비와 흡사한 외모를 가졌다면 모용선은 영비와 쌍둥이자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같게 생겼다.비빈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사촌지간이라고 해도 너무 닮은 거 아니야?”“그러니까. 일거수일투족 말투까지 너무 닮았어. 죽은 영비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다니까?”그들은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가빈처럼 폐하의 총애를 받기는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다.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모용선이 얼굴을 드러낸 순간, 모두는 그녀가 능연이보다 더 총애를 받을 거라고 확신했다.사람들의 시선이 봉구안에게로 쏠렸다. 질투 많은 황후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었다.오늘의 후궁 간택은 황후의 말 한 마디에 모든 게 결정되기 때문이었다.봉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물었다.“북대영에 있던 모용 장군이 나중에 남부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는데 아는 사람이더냐?”모용선이 공손히 답했다.“예, 마마. 소인의 오라버니옵니다.”비빈들 중 한 명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북대영이라고? 몇 달 전에 양나라 사신의 초대연에서 북대영에 맹 장군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모용 장군은 대체 누구지?”옆에서 듣고 있던 녕비가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모용 장군도 몰라? 모용걸은 맹성주보다 더 일찍 유명해진 분이야. 맹성주가 장군이 되기 전부터 이름을 날린 대장군이었다고.”“실력으로 따지면 맹성주 장군의 우위에 있는 분이지!”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모용선에게 그렇게 대단한 오라버니가 있었다니!봉
모용가 저택.모용선은 오라버지의 서신을 받고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시종인 유서가 웃으며 물었다.“아가씨, 무슨 일인데 이리 기뻐하시나요?”모용선은 은방울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오라버니께서 승전고를 올리셨다는구나.”유서 역시 환하게 웃으며 환호했다.“너무 잘됐네요!”하지만 곧이어 모용선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왕야께서는 아직도 답신이 없어?”유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아가씨, 괜히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공무가 다망하시어….”모용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거짓말할 필요 없어. 나도 알아. 상의도 없이 간택에 참여한 일로 왕야께서는 화가 나 계신 거야. 그래서 처음부터 숨기려고 했던 거고.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그래도 후회는 없어.”유서가 말했다.“아가씨는 높이 올라가실 운명이고 사당에만 계시기에는 너무 아까운 분인걸요.”모용선은 거울을 통해 사촌언니와 흡사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결연한 말투로 말했다.“왕야께서는 늘 나한테 사당에 머무르며 평온한 삶을 살라고 당부하셨지. 대체 뭐가 두려워서 그러시는 건지 난 지금도 모르겠어.”“그분과 언니, 그리고 폐하께서는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움을 받고 같이 자라며 우애가 깊다는 거 알아. 그래서 언니와 흡사한 얼굴을 가진 나한테도 그리 잘해주신 거지. 그런 분이니 나쁜 마음으로 내 앞길을 막지는 않았을 거야.”“하지만 나도 내가 가야 할 길이 있어. 오라버니가 남부로 발령난 것은 명백한 좌천이야. 폐하께서는 모든 걸 알고 계신 거라고. 난 모용가의 자식이고 가문의 이름을 빛낼 의무가 있어.”그리고 언니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며칠 후, 간택을 받은 수녀들이 입궁하였다.모용선은 수녀들 중에서 가장 높은 품계를 받고 방비전에 살게 되었다.그날 밤, 황제가 그녀를 서재로 불렀다.같이 입궁한 수녀들은 물론이고 비빈들에게마저 없던 대우였다.황제를 처음 알현하는 자리었기에 모용선은 정성 들여 자신을 꾸몄다.황제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소욱은 봉구안이 미동도 없자 짜증스럽게 재촉했다.“짐의 선물이 마음에 안 드는가 보군?”“아닙니다. 단지 궁중에 왜 서신을 나르는 비둘기가 나타났는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봉구안은 태연하게 질문에 답을 했다.소욱은 싸늘한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영화궁에서 날아온 비둘기였다. 황후, 정말 모르고 있었던 것이냐?”그녀를 제외하고 궁 안에 이처럼 담대한 인간이 없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말했다.“신첩은 모르는 일이옵니다.”비둘기가 영화궁에서 날아왔다고 해서 그녀의 소유라는 근거는 없었다.하물며 날아가다가 잡혔어도 소욱의 손에 밀서가 들어갔을 리도 없었다.소욱도 아마 확실한 증거는 없는 것 같았다.“이 탕을 마시거라.”봉구안은 그릇을 받아 꿀꺽꿀꺽 마셨다.보고 있는 연상은 마음이 쓰렸다.그렇게 귀여운 비둘기를 죽여서 탕으로 만들다니!그것도 모자라 그 탕을 황후에게 억지로 먹이다니!봉구안은 속으로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그릇을 비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폐하의 선물에 감사드립니다.”“이만 물러가거라.”소욱은 더 이상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말했다. 바둑판 승부는 끝나지 않았지만 계속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봉구안이 서재를 나간 뒤, 진길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깨끗이 비워진 국그릇을 보고 황제에게 물었다.“폐하, 그 비둘기는 어떻게 처리할까요?”소욱은 싸늘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황후가 비둘기를 기르는 건 별로 문제가 될 게 없었다.하지만 빈번히 궁밖의 사람과 소식을 주고받는 건 궁중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아직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정황에서 적당히 넘어갈 생각이었다.그런데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까지 침착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비둘기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태연하게 비둘기탕까지 마셔버렸다.이렇듯 침착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니 능연이를 죽음으로 몰아갔을 것이다.“날개를 부러뜨려 궁 밖에 던져버리거
독에 당한 상대가 모용선이라는 말을 듣고 소욱은 급급히 방비전으로 달려갔다.태의가 제 시간에 구토를 유발하는 약을 처방했기에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황후인 봉구안도 방비전에 도착했다.소욱은 잔뜩 분노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궁중에서 비빈이 독에 당하다니! 황후, 무슨 일이 있어도 배후를 찾아내거라!”“예, 폐하.”봉구안은 침상에 누운 여인을 힐끗 보고는 담담히 답했다.한참 구토를 했기에 모용선은 무척 허약한 상태였다.소욱은 그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자진궁으로 돌아갔다.자녕궁.“정 귀인이 독에 당했다고?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태후가 놀라며 물었다.모용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정 귀인을 잘 부탁한다는 태황태후의 서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만약 궁에서 정 귀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태황태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계 상궁이 공손히 말했다.“태의가 약을 처방해서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잠시 머무르다 돌아가셨답니다. 아직 승은을 입지도 않았는데 이번 일이 오히려 정 귀인 입장에서는 도움이 되었겠네요.”곧이어 계 상궁이 말을 이었다.“폐하께서는 황후마마께 철저한 조사를 명하셨습니다. 그만큼 황후마마를 신뢰하시나 봅니다.”태후가 정색하며 말했다.“계 상궁,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설마 범인이 황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계 상궁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소인이 어찌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겠나이까. 단지… 이런 일는 태후께서 조사하는 게 더 합당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태후가 정색해서 말했다.“계 상궁 요즘 말이 너무 많군. 황후는 후궁의 주인인데 내 어찌 황후의 권한을 가로채겠느냐. 황상이 황후를 신뢰한다면 황후가 알아서 잘하겠지.”현흥궁.동하는 현비의 약시중을 들며 조용히 말했다.“마마, 모용선이 입궁하면 바로 총비가 될 줄 알았는데 승은을 입기도 전에 독에 당할 줄은 몰랐네요. 황궁은 정말 무서운 곳 같아요.”현비가 담담히 말했다.“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서는 아니된다. 그리고 이제
서재.소욱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증거가 나왔으면 사람을 보내 잡아들일 일이지 여긴 왜 온 거지? 설마 가빈이 평소에 황후랑 가깝게 지낸다고 감싸주려는 것이냐?”봉구안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판단력을 잃을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그녀가 말했다.“가빈은 조사를 받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독약이 무슨 경로로 궁중에 들어왔느냐입니다. 궁밖에서 들어왔다면 신첩은 궁 안에 독극물을 나르는 첩자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그리하여 이 기회를 빌어 그들을 일망타진할 생각이니 허락해 주시지요.”소욱은 그녀의 과감한 일처리가 마음에 들었다.물론 그녀가 능연이를 처단한 사건으로부터 볼 때 그녀는 평범한 안방 여인이 아닌 것 같았다.정조를 잃었지만 황후의 자리에서 내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뜻대로 하거라.”봉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예, 폐하.”곧이어 그녀는 미련없이 서재를 나갔다.소욱은 갑자기 그녀의 이런 태도가 황후가 아닌 자신의 부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두 사람 사이에 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점점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황후가 이성을 잃은 그날 그의 손을 잡고 이상한 말을 지껄였던 것을 제외하면 황후는 항상 그를 마주할 때 상전을 대하듯이 대했다. 공손하고 충직하지만 부군을 대하는 현모양처의 모습은 아니었다.물론 그것에 불만은 없었다.그녀가 총애만 바라지 않는다면 계속 황후의 자리에 두고 힘을 실어줄 수도 있었다.독극물 사건으로 가빈은 조사를 받았다.영화궁.황후를 제외하고도 녕비와 형비가 조사 현장에 도착했다.가빈은 억울한 표정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황후마마, 신첩은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신첩은 정 귀인과 원한도 없는데….”녕비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며 싸늘한 목소리로 가빈의 말을 잘랐다.“가빈, 후궁에서 널 제외하고 얼굴로 폐하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사람이 정 귀인 아니더냐?”“능연이가 유배당한 뒤로 너도 그 자리를 대체하고 싶었겠지? 그래서 정 귀인을 최
모양분이 벌레를 불러온다는 말은 봉구안의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모용선은 바로 사실을 털어놓았다.“마마, 모두 신첩의 잘못입이다. 신첩이 한 게 맞습니다.”유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상전을 바라보았다.귀인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감싸려 할 줄이야.유서는 바로 절을 올리며 절규했다.“마마,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일은 귀인과 무관합니다. 모두 소인이 한 짓이옵니다! 소인이 귀인을 대신해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귀인은 전혀 모르고 당한 것입니다!”정 귀인은 고개를 돌려 유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아니다, 유서야….”“소인이 했습니다! 황후마마, 벌을 하실 거면 소인을 벌하십시오!”참으로 충직한 시종이었다.봉구안은 묘한 눈으로 모용선의 표정을 주시했다.모용선이 울며 사정했다.“마마, 유서가 잘못을 했지만 이 아니는 신첩과 함께 자란 자매와 같은 아이입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신첩이 아랫사람을 잘 가르치지 못하였으니 벌은 신첩이 받겠습니다!”“아니, 아니됩니다! 귀인, 모든 건 소인의 잘못입니다….”정 귀인의 마음에 깊이 감동한 유서는 귀인을 대신해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었다.봉구안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정 귀인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차게 식었다.시종이 이런 짓을 저지를 때 상전이 정녕 아무것도 몰랐을 수가 없었다.봉구안은 궁중법도 대로 유서에게 벌을 내렸다.“곤장 30대를 치고 신형사에 보낸다.”유서가 끌려간 뒤, 모용선은 울며 말했다.“마마, 아랫것들이 허락도 없이 한 일이고 신첩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어서 하마터면 가빈을 해할 뻔하였습니다.”“그러니 신첩도 같이 벌하여 주십시오!”그리고 이때, 태후 신변의 계 상궁이 도착했다.“황후마마를 뵈옵니다.”계 상궁은 봉구안을 단독으로 불러 말을 전했다.“마마는 모르시겠지만 정 귀인은 태황태후의 조카손녀랍니다. 태황태후께서는 일찍이 태후께 정 귀인을 잘 부탁한다고 서신
봉구안과 소군주는 가마 안에 함께 앉아 있었다.그때 벙어리 호위무사가 무심코 몸을 숙여 차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소군주가 단호히 꾸짖었다.“네가 들어오면, 가마는 누가 모는 거야!”벙어리 호위무사는 몸을 잠시 굳혔다가, 결국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봉구안 역시 약간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소군주, 그럼 저는 바깥에서…”소군주는 그의 팔을 힘껏 붙들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제 곁에서 저를 지켜야 해요.”봉구안은 자신의 팔을 빼내며 진지하게 말했다.“소군주, 남녀유별이라 하였습니다.”소군주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수상쩍은 미소를 띠고 나직이 속삭였다.“전 알고 있어요.”가마는 덜컹거리며 흔들렸고, 소군주는 금세 졸음이 밀려와 잠들었다.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정오였다.그녀는 배가 고파 딱딱한 마른 음식을 씹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봉구안은 가마의 커튼을 젖히고 벙어리 호위무사에게 말했다.“잠시 멈추고 쉬게나. 내가 대신 가마를 몰겠소.”하지만 벙어리 호위무사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바람 소리가 너무 커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결국 봉구안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그제야 남자의 눈이 잠시 번쩍였다. 이내 가마를 천천히 멈추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았다.그 시선은 마치 왜 자신을 쳤는지 묻고 있는 듯했다. 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내가 대신하겠소.”그러나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뜻을 표시했다.하지만 그가 이미 반나절 동안 가마를 몰고 있었으니, 체력이 소진되어 소군주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할까 우려한 봉구안은 그를 강제로 마차 안으로 끌어들였다.그 순간 봉구안의 힘이 워낙 강했기에, 벙어리 호위무사는 저항할 겨를도 없이 가마 안으로 주저 앉고 말았다.곧이어 그의 눈빛은 차갑게 변하며 살기가 서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를 보지도 않고 가마를 몰러 나섰다.소군주는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마치 벙어리 호위무사를 깔보는 듯한 태도
반 시진 후. 서왕과 동방세는 선성 진입 계획을 협의한 뒤, 심가오에 머물기로 하였다. 범진은 그들을 안으로 안내하였다. 그때, 서왕이 뜻밖에 봉구안을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부맹주이시군요? 아까는 몰라뵈었습니다.” 봉구안은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때, 활발한 웃음소리를 내며 소소가 달려왔다. 그녀는 익숙한 듯 봉구안의 품에 안겨 부드럽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나 밤이 무서워요. 같이 자요…” 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왕 일행을 보고는 놀란 듯 굳어버렸다. 아이답게 숨길 줄 모르는 기쁜 표정을 짓는 그녀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서왕 오라버니?’ ‘나를 데리러 온 걸까?’ 소군주는 기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서왕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소소를 바라보았다. 소군주가 황성에 자주 가지 않아, 지난번 만난 게 3년 전이었음에도 서왕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게다가 얼마 전 무림맹에서 그녀를 구했다는 보고가 황제에게 들어갔으니, 서왕은 이번 동신성 방문 목적 중 하나가 소군주를 보호하는 것임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서왕은 소군주와 바로 신분을 밝히고자 했지만, 그녀의 눈 속에 드러난 불안감을 보고는 즉시 눈치챘다. ‘어라? 설마 소군주가 이 무림맹 사람들이 아직 자신의 정체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성품이 부드러운 서왕은 그녀의 의도를 맞춰주기로 하고, 모르는 척 물었다. “이 아이는 부맹주의 여동생입니까?” 봉구안은 망설임 없이 소소를 서왕 앞으로 밀어내며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 아이는 주국공의 따님입니다. 서왕께서도 아는 아이일 것입니다.” 이 말에, 소군주는 깜짝 놀라며 작은 얼굴이 금세 창백해졌다. “오라버니, 그… 그럼 제가…” 소군주는 자신이 황족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던가. 꿈에서조차 입을 다물고 조심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소 오라버니는 어떻게 알게 된 걸까?! 한편, 서왕은 난처한 듯 헛웃음을 터
동방세는 비록 봉구안이 무림맹을 떠났던 과거를 못내 섭섭히 여겼으나, 그녀가 홀로 적진에 뛰어드는 것을 차마 묵인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마디 내뱉었다.“변했소. 예전엔 누구보다 자기 목숨을 귀히 여겼었는데... 자네 입으로도 말했지 않소. ‘나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다’고.”봉구안은 팔찌를 단단히 묶으며 담담히 대답했다.“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소.”동방세는 그녀를 막아서며 단호히 말했다.“그러니 모든 일을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시오. 자네는 성이 소씨가 아니지 않소.”봉구안은 그의 말을 무심히 흘려듣는 듯 바라보았으나, 동방세는 그녀를 향해 확고히 선언했다.“소환, 자네는 천룡회 일을 조사하는 데 전념하도록 하시오. 선성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소.”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네가 어떤 방도로 해결할 셈이오?”동방세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황제로 변장하는 방책은 나도 자네 생각과 같소. 그리고 그 역할을 맡을 사람은 아무래도 나보다 적합한 이가 없겠지.”봉구안은 순간 멈칫했다. “자네가 그 일을 하겠다고?”그녀가 뭔가 말하려 했으나, 동방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건 내가 맹주로서 해야 할 일이오. 그러니 더 이상 말리지 마시오. 이런 공훈은 내가 양보할 수 없거든...”농담조로 던진 말이었으나, 그의 태도는 결연했다. 봉구안은 그의 확고한 의지를 깨닫고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동방세는 평소 유순해 보였으나 무공 실력과 폭발력만큼은 그녀에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체격상으로도 남자인 동방세가 황제와 더 흡사해 변장에도 유리했다.…보름 뒤, 조정에서 보낸 사자가 무림맹에 도착했다. 동방세는 연회를 준비해 환대했으나, 사자는 연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황제 폐하께서는 귀하들의 제안을 찬성하시어, 황제로 변장해 반군과 담판을 짓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폐하께서는 이 일에 있어 서왕 전하를 주관자로 삼으셨습니다. 전하께서 약 열흘 후 동신성에 도착할 것입니다.
“주국공의 딸이라면, 곧 소군주, 지금 황제의 사촌 여동생이란 말인가?!”범진이 크게 놀라 외쳤다.강호의 사람들은 대개 조정, 특히 황실과 얽히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법.소군주가 이곳에서 사고라도 나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다른 이들 또한 궁금해하며 물었다.“부맹주, 그 아이가 스스로 인정하였소?”“단지 내 추측일 뿐이오.” 봉구안이 솔직히 대답했다.“그럼 어찌 알아내셨소?”이때 동방세가 나섰다.“그 아이의 옷차림은 소박하나, 신발은 바꾸는 것을 잊었소.”“황금 실로 짠 비단과 은은히 빛나는 자수… 이는 황실에서만 쓰는 특수한 신발이라오.”“아이의 발은 금세 자라기에, 이렇게 호화롭게 장만해 줄 이는 주국공밖에 없을 것이오.”그가 말을 마치고 봉구안을 바라보며,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했다.사실 그녀는 처음 소군주를 보았을 때부터 소녀의 눈썹과 눈매가 소욱과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범진이 자청하여 말했다.“제가 저 아이를 데려다 주겠소! 내 발은 빠르고 힘도 좋아, 충분히 아이를 업고도 뛸 수 있소.”동방세는 이를 막지 않았다.“그럼 그렇게 하겠소. 그럼 이제 적을 물리칠 방도를 의논하도록 하지.”“그나저나, 구호 몇 마디를 정해 사기를 북돋는 것이 어떻겠소?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소. ‘마귀를 베고 용을 수호하라, 무림맹의 영광이다. 바람이 일고 구름이 몰아치니, 오직 우리 무림맹이 주인이다…’”그녀는 옆에 있던 걸레를 집어 동방세의 입을 향해 던졌다.이마에 몇 가닥의 검은 선이 내려앉은 그녀는 냉랭하게 경고했다.“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소?”입구에 세운 암호 정도가 이미 그녀의 인내심 한계였다.동방세는 살짝 억울한 표정으로 물었다.“내 구호가 별로였소?”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억지로 다른 데를 바라보았다.좋고 나쁨을 떠나, 맹주님은 정말로 눈치가 없구나…그 촌구석에서 접선할 때마다 주고받는 암호… 우리 모두가 얼마나 오래 참아 왔는가…!
한 사내가 있었다. 거칠게 만든 청색 옷과 짧은 저고리를 입고, 온몸에 흙이 묻은 채였다. 한 손으로는 닭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과실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엔 풍작의 기쁨이 가득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막 씨를 뿌렸는데, 마침 날씨가 도와주는군.”그 사내는 동방세라 불리며, 준수한 외모와는 달리 검게 그을린 얼굴은 마치 학자 같아 보였으나, 별다른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다.오백은 막 일어나 예의로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살기를 느끼고 멈칫했다.그 순간, 무리 속에서 소환을 발견한 동방세의 눈빛이 번뜩이며 날카로워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닭을 냅다 내던졌다.그 닭은 마치 주인을 알아보듯 날개를 퍼덕이며 봉구안을 향해 날아들었다.“꼬꼬꼬!”동시에 동방세는 바구니 속 과실을 집어 들고는 마치 암기처럼 봉구안을 향해 내던졌다.오백은 그저 입을 벌리고 멍하니 서 있을 뿐, 피할 생각조차 못했다.고개를 돌려 보니, 다른 이들은 이미 방비를 갖춘 듯 모두 재빠르게 피했고, 심지어 소소조차 날렵하게 탁자 밑으로 숨어들었다.다시 보니, 소장군은 어느새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이를 방패처럼 사용하여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우산을 거둔 후에도 추호의 흠집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런 와중에 과실에 머리를 맞고 닭의 배설물까지 뒤집어쓴 오백은 속으로 탄식했다.‘결국 당하는 건 나뿐인가?’동방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이쿠, 실수했네. 다들 무사한가?”봉구안은 평온한 모습으로 우산을 옆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무사하다.”그녀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언제나 식사에 목숨을 거는 동방세가 그들을 먼저 먹게 둘 리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는 분명 그녀의 경계를 풀게 한 후 기습을 가하려는 계략이었다.동방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아 다른 이들에게도 권했다.“모두 앉아들 먹게. 소환이 무려 4년 10개월 12일 5시간 만에 돌아왔으니, 참으로 귀한 자리 아닌가.”
소림성을 벗어나 동남으로 향하면 동신성에 이르게 된다.무림맹의 본거지는 바로 동신성 내의 심가오에 자리 잡고 있었다.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시골 마을일 뿐이었으나, 그 안에는 강호의 고수들이 즐비하여 그 위세를 가늠하기 어려웠다.마을 어귀에는 큰 돌이 하나 서 있었고, 그 위엔 수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가면을 쓴 두 남자와 어린 소녀가 함께 등장하자 마을 입구의 수비병들은 즉시 길을 막아섰다.그중 한 수비병이 세 사람을 주시하며 물었다.“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정체를 밝혀라!”오백은 이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분명 암호를 요구하는 거겠지.’그러자마자 그는 주군을 바라보았다.봉구안은 한 발 물러서더니, 강호의 예를 다하여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이어 중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는 길은 황천길, 돌아가는 길도 황천길! 의로 맺은 형제는 영욕을 함께하고, 강호를 손잡고 전설을 쓴다! 뵙소서! 부맹주 만세!”“풉…”오백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암호가 이렇게 촌스럽다니! 도대체 주군 같은 분이 어떻게 이런 걸 받아들이신 거야?’그의 시선이 닿은 봉구안의 표정에는 미세한 굳음이 엿보였다.‘젠장…! 이래서 내가 무림맹을 오는 것을 싫어한단 말이지.’봉구안이 암호를 마치자, 옆의 소녀 ‘소소’ 역시 흉내를 내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뵙소서! 부맹주 만세!”수비병들은 이를 듣고, 즉시 길을 내주었다.…마을 내부는 겉보기엔 여느 평범한 시골과 다를 바 없었다.무림맹의 위세를 상상했던 오백은, 막상 이러한 모습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이게 정말 강호 최강의 본거지란 말인가? 산속 깊숙한 대저택에, 위엄 있는 무자들이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봉구안은 앞장서며 한 농가의 문을 두드렸다.문을 연 이는 덩치 큰 사내로, 그를 보자마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형제여! 너의 서신을 받고부터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어서 들어와!”오백은 나중에서야 알게
선성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그 원인은 장졸들이 조정에서 내린 미미한 양식과 삯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한 탓이었다. 이에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주국공부가 화를 입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성을 빠져나왔다.이곳 선성은 남제의 중요한 길목으로, 양식을 운반하고 군대를 이동시키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였다. 이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조정과 민간은 큰 충격에 빠졌다.봄날의 찬란한 햇살 아래, 본디 맑고 청명해야 할 하늘은 선성 위로 겹겹이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성문 밖, 오백은 마차를 몰고 가던 중 고삐를 잡아 세웠다. 이윽고 그는 마차 안으로 들리도록 청하며 말했다.“소장군, 선성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래도 길을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마차 안, 봉구안은 그간의 눈병이 이미 나았으나, 며칠 동안 강한 빛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길을 돌아 동쪽으로 가자구나.”세작의 고변에 따르면, 천룡회의 잔당 일부가 방성에 숨어 있다고 하였다. 그녀의 원래 계획은 곧바로 남하하여 방성으로 쳐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러한 전술은 지나치게 수동적이었다.천룡회의 잔당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 방성의 무리를 제거하더라도 여전히 다른 곳에 남아 있는 세력이 있었다. 특히 교주가 은신한 곳은 지금껏 밝혀지지 않았으니, 그녀의 이러한 전략은 효과가 크지 않을 터였다.이에 그녀는 우선 무림맹을 찾아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천룡회 같은 집단을 소멸시키려면 무림의 동도들과 함께 논의하여 정파의 힘을 모아야만 완전한 소탕이 가능하리라 판단한 것이다.“비키시오!”밖에서 오백의 격렬한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마차가 갑자기 멈춰섰다. 봉구안이 마차 커튼을 들어올리니 방금 전 마차가 어린 소녀와 부딪힐 뻔한 상황이었음을 알게 되었다.이 급작스러운 일에 오백의 가면마저 거의 떨어질 뻔하였다. 그는 불쾌한 기색으로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침 식사 후, 최 상궁은 잠시 영화궁에 들렸다.최 상궁은 눈에 띄게 피곤한 모습의 연상을 보며 환심을 사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소인, 흔비마마를 뵙사옵니다!”“어젯밤 수고가 많으셨으니, 이는 제가 직접 고아온 보양탕이옵니다. 부디 몸 보하시옵소서...”최 상궁은 속으로 생각했다.‘이 계집아이를 내가 너무 우습게 봤구나.’‘아무리 말려도 영화궁을 떠나려 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높은 가지에 오르려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높은 가지가 되려 했구나!’최 상궁은 연상의 얼굴을 재차 훑어보았다. 그녀는 경국지색이라 할 수는 없었으나, 단정하고 깨끗한 이목구비는 제법 이 황궁과 어울리는 듯했다.남자들이 그녀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질 만한 얼굴이었다. 황제가 그녀에게 눈길을 줄 만도 했다.최 상궁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며 말했다.“마마, 신첩은 옛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마마께서는 이제 믿을 만한 사람도 곁에 필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첩을 다시 곁에 두시어 모시게 하심이 어떠실지요?”그러나 연상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다.“필요 없다!”최 상궁은 연상의 이러한 태도에 불쾌감을 느끼며, 날카로운 말투로 은근히 그녀를 찔렀다.“마마께서는 처음의 처지를 잊으셨나이까?”“타인들이 마마를 어떻게 보는지 아시옵니까? 폐비마마께서 자리를 비운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미 용상을 차지했다며, 주인을 배신한 노예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하옵니다.”“이 궁궐은 홀로 싸워나가는 곳이 아니옵니다. 마마 곁엔 사람이 필요하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폐하께서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실 때, 영화궁은 다시 냉궁이 될 것이옵니다!”연상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모든 억울함을 꾹꾹 눌러 참았다.“당장 나가거라!”그들은 전혀 몰랐다. 황제가 폐비 봉씨를 잊지 못하고, 그녀를 핑계로 정당하게 영화궁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또 그녀는 어젯밤 황제의 승은을 받아들인 적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황제의 계획에 협조했을 뿐이었다.그녀의 마음속 고통은, 누구에게도 말
영화궁.교지를 전하는 이는 유사양이었으니, 황제가 이 흔비를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엿볼 수 있었다.교지를 읽고 난 유사양은 미소를 띠며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마마, 어서 더는 무릎 꿇지 말고 교지를 받으십시오.”“이건 하늘이 내린 큰 은혜입니다! 노비가 궁에 들어온 지 이렇게 오래되었지만, 바로 빈에 봉해지는 사례는 처음 봅니다.”황제가 영화궁을 자주 찾으신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이전 황후를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떤 여인이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유사양의 눈에는 감탄과 경외가 어렸다.이 궁중에서는 아무도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는 걸 그는 다시금 깨달았다.누가 알았겠는가. 한때 황후마마의 곁을 지키던 궁녀가 이제 신분을 바꾸어 흔비가 되리란 것을.연상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저는… 저는 안 됩니다. 감히 교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그녀가 어떻게 황제의 빈이 될 수 있단 말인가!갑자기 연상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그녀는 무서웠다.황제는 정말 미쳤다!유사양은 난생처음 이런 상황을 보았다.“설마 기뻐서 그러시는 겁니까? 잘못 들으신 거 아닙니다. 이는 비로 봉하는 교지입니다. 어서 일어나시죠…”“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연상은 마치 도망치듯 뛰쳐나갔다.유사양은 깜짝 놀라 외쳤다.“여봐라! 흔비마마를 막아라!”연상은 머리를 감싸 쥐고 귀를 막으며 소리쳤다.“나는 아니다! 나는 흔비가 아니야! 아아아! 다가오지 말거라…”어전.진한길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눈앞의 황제는 짐승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으며, 그는 황제의 심중을 알 수 없었다.연상을 비로 봉한 일은, 전 황후가 듣는다면 분노하지 않을까?마치 곁에 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심정일 테니 말이다.황제는 왜 이런 일을 하는가? 연상의 실언에 대한 복수인가, 아니면 황후에 대한 복수인가.……견가 저택.견여해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확인했다.“뭐라고? 황제가 궁녀를 비로 봉했다고?”진부인은 견여해의 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