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한 번 왔을 뿐이지만 봉구안은 이곳이 그녀와 소욱이 싸웠던 화청궁 지하 암실인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그 옥 침대는 아직도 있었다.당시 소욱은 옥 침대에서 해독했었고 심지어 벽에는 그들이 싸우던 흔적도 고스란히 있어 절대 틀릴 리가 없었다.여기는 화청궁이다!봉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영소전이 어찌 화청궁과 통할 수 있을까?’봉구안은 이것이 궁금했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조검의 서찰을 찾는 것이니 그녀는 즉시 이곳을 떠나 원래의 길로 돌아가려 했다.조검이 물건을 숨긴 곳은 아주 은밀해서 단서가 없었다. 마치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이 누구인가? 아무리 막연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4일 밤을 거쳐 봉구안은 마침내 소주방 안의 장작을 쌓아 놓은 구석진 곳의 한 느슨한 벽돌 아래에서 서찰을 발견했다.그 서찰에는 조검이 그동안 능연을 위해 한 일들이 적혀 있었는데 크고 작든 간에 모두 구체적인 시간이 적혀 있었다.그중에는 산적 납치 사건도 있었다. 봉구안은 그 서찰을 챙겨 넣으며 눈빛에 살기가 감돌았다....조검의 서찰은 강력한 범죄 증거지만 봉구안은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소전의 비밀 통로, 또 능연이 말했던 황제가 자신을 떠날 수 없다고 한 이유...‘그 두 사람 사이에 남녀의 정 외에 또 어떤 연관이 있을까?’봉구안은 이 일과 모종의 연관이 있음을 직감했다. 이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으면 그녀가 아무리 많은 증거를 찾아도 헛수고가 될 것이다.다음 날 아침, 봉구안은 청허궁으로 갔다. 능연이 며칠 동안 소란을 피운 탓에 청허궁은 조용하지 않았다.봉구안이 청허궁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능연의 고함이 들렸다.“꺼져! 내 앞에서 꺼져! 너희들이 시중들 필요 없어. 난 폐하를 뵈야겠어.”봉구안은 연상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명하고 혼자 내전으로 들어갔다.청허궁은 냉궁과 다름없었다. 작은 창문 하나가 열어져 있으나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음침했다.능연은 중간에 놓인 커다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청허궁을 떠난 봉구안은 바로 형자사로 갔다.형자사의 형실은 어둡고 습하여 쥐가 자주 들락거렸다.공기 중에는 썩은 냄새와 피비린내가 가득했다.춘하와 궁인들은 수감되어 있었지만 심문은 받지 않았다.형실로 끌려간 춘하는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불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황후를 본 춘하의 안색은 변했다.“황후 마마를 뵙습니다.”춘하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태도는 영소전 대궁녀답게 의젓했다.형실 안에는 그들 둘뿐이었다.그늘의 어둠 속에 있는 봉구안의 표정은 알 수가 없었다.봉구안은 조검의 수찰 복각본을 춘하에게 던졌다.“이것 좀 봐!”춘하는 뭔지 모르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열었다.수찰 내용을 본 춘하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했다.‘조검이 언제 이런 것들을 기록했지?’‘왜?’‘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황후의 손에…’불안한 춘하는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들어 봉구안을 바라보았다.“황후마마, 이… 이게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춘하는 모른 척하려고 했다.봉구안은 불타는 화롯가에 가서 부집게로 빨갛게 달아오른 숯을 휘저었다.한참 후, 부집게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적막한 실내에는 나무가 불에 타는 소리가 들렸다.춘하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고 있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 했다.봉구안은 부집게를 들어 무심코 춘하의 얼굴 옆으로 갖다 댔다.갑작스러운 열기에 춘하는 놀라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춘하는 눈을 감고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황후마마, 노비 정말 모르겠습니다…”칙!부집게가 춘하의 머리카락에 닿아 순간 탄내가 났다.춘하는 순간 숨이 턱 막히었다.‘황후가 뭘 하려는거지?’봉구안의 눈빛은 늠름하였다.“춘하, 너 올해 스물넷이라고 했지. 내년이면 궁을 나가 시집갈 거고…”“고향에 정인이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는데…”“너도 너의 주인처럼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 이 혼사 성사될까?”순간 춘하는 눈을 번쩍 떴다.춘하는 자신의 사적인 일을 귀비도 모르게 꽁꽁 숨겨두었다. ‘황후가 어떻게 아셨지?’궁은 사
황제의 서재.소욱은 대신들과 양국 평화 회담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폐하, 양나라가 백만 황금을 물어내라고 하는 것은 너무 과분합니다. 절대 동의해서는 안 됩니다.”“진 장군, 만약 그들의 이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맹성주를 양나라 도성에 보내 사죄해야 합니다.”“그것도 안 됩니다. 맹성주는 남제의 공신입니다. 그런 수모를 당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멩성주가 지금 중상을 입었는데…”맹성주 얘기가 나오자 서왕의 표정이 엄숙해졌다.서왕은 공수하여 인사하며 간절하게 말했다.“폐하, 백만 황금을 지불할지언정 맹소장군을 희생시킬 수 없습니다.”“양나라의 속셈이 뻔한데, 만약 맹소장군을 양나라에 보내면 그가 살아서 돌아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다른 대신들도 이 말에 맞장구를 쳤다.“돈은 몸 밖의 물건일 뿐입니다. 백만 황금은 조만간에 다시 벌 수 있지만 맹소장군 같은 인재를 잃으면 남제의 북경이 위태로워집니다.”하지만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소신 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남제의 운수가 좋지 않아 세수가 해마다 줄어들고 있지요. 백만 황금이면 남제 백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맹성주… 이제 전쟁도 끝났으니 싸울 일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그렇지요. 석고대죄로 백만 황금을 대신할 수 있다면 맹성주는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석고대죄하여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려야 하거늘… 그리고 맹성주의 무공이 정말 그렇게 뛰어나다면 양나라의 음모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폐하, 이 대인의 말에 일리가 있지요. 소신도 몇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맹성주가 자신의 공로를 믿고 무척이나 자부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군권이 있어 위험성도 높고… 이번 기회에 맹성주의 충성심을 시험해 보고, 그의 오만함을 죽이는 것도…”두 진영의 사람들은 각자가 도리가 있다며 계속 다투었다.소욱의 차갑고 엄숙한 미간에 그늘이 졌다.소욱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백만 황금과 맹성주의 석고대죄 둘 다 양나
쳐들어온 호위대는 어각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각에는 책장과 서책이 있었고 창이 열려 있었다. 벽에 걸린 그림은 바람에 날려 화족과 벽이 부딪치면서 소리를 냈다.봉구안은 이미 도망쳐 나온 지 오래다.영화궁.위장을 벗은 봉구안의 눈빛은 엄숙했다.봉구안은 소욱이 어떻게 몸속의 천수지독을 억제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청허궁.능연은 외출하지는 못하지만 마당에서 돌아다닐 수는 있었다.능연은 긴 복도를 지나면서 하녀 둘이 구석에서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귀인님 정말 총애를 잃은 것은 아니겠지?”“총애를 잃은게 분명해. 청허궁은 어디냐? 냉궁이나 다름이 없잖아. 귀인이 여기로 온 후 폐하께서 한번도 오시지 않았고…”“귀인은 얼굴이 망가졌으니 총애를 잃을 수밖에…”능연 옆에 있던 궁녀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궁녀는 앞으로 가서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어디서 감히 주인을 논한다냐!”궁인들은 즉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귀인,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능연은 옷자락을 힘껏 움켜쥐었다. 손등의 혈관이 튀어나왔다.“이들의 손발을 자르고, 혀를 뽑아낸 후 장살하거라!”“살… 살려주십시오. 마마!”능연은 그들의 용서를 무시했다.‘멍청한 것들, 내가 총애를 잃었다고?’‘내가 총애를 잃을 리가 없지!’‘폐하가 날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능연은 차가운 얼굴로 옆에 있는 궁녀를 노려보았다.“너도 본궁이 총애를 잃었다고 생각하느냐?”겁에 질린 궁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마마의 풍채와 재능으로 무조건 다시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능연은 궁녀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내가 영원히 이 후궁에서 가장 총애를 받는 여인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알릴 거야.’‘내가 냉궁에 있더라도 폐하는 나를 가장 총애해…’능연은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능연의 눈에는 확신이 가득했다.‘폐하는 곧 오실 거야.’…능연이 강들된 후 많은 비빈들은 영소전 주인을 목표로
비록 털 빠진 봉황이 닭보다 못하다고는 하지만 능연은 후궁의 총애를 한 몸에 얻었던 여자였다. 얼굴이 망가져도 황제는 여전히 며칠 동안이나 연이어 그녀를 총애했었다. 여기서 능연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연상은 황후의 말대로 움직였지만 최 상궁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최 상궁은 능 귀인이 훗날에 다시 총애를 얻어서 자신을 죽일까 봐 두려웠다.황후가 좋은 일을 하려고 그들을 데리고 나온 것은 아닌 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을 시킬 줄은 몰랐다.최 상궁은 제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연상은 혼자서 능연을 꽉 잡을 수 없었다. 오히려 능연에게 밀렸다.“봉장미! 네가 감히 본궁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폐하는 결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궁에는 폐하 외에 아무도 감히 본궁의 옷을 벗기지 못해! 네가 무슨 자격으로…”봉구안은 차가운 눈으로 최 상궁을 바라보았다.“벗겨라!”최 상궁은 봉구안의 눈빛에 겁을 먹고 힘들게 움직였다.“능 귀인, 실례하겠습니다.”내전에는 능연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악!”동시에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능연은 이런 굴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능연은 봉구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봉구안은 두려운 기색도 동정하는 기색도 없이 계속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작 이것도 못 견딘단 말이냐? 장미가 수모를 당하고 있을 때 왜 가만히만 있었니?’봉구안은 지금 당장 능연을 죽이고 싶었다.청허궁의 시녀는 귀인의 비명 소리를 듣자 얼른 몰래 곁문으로 나가서 황제를 찾았다.…내전.능연의 웃옷을 다 벗긴 후, 봉구안은 한곳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눈빛이 식었다.봉구안은 손을 흔들었다.“그만, 너희들도 물러가라.”연상과 최 상궁은 바로 동작을 멈추고 물러갔다.이때 능연은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매서운 눈빛으로 봉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능연은 봉구안이 산적의 일로 자신에게 복수한다고 생각했다.“봉장미, 본궁은 오늘의 치욕을 똑똑히 기억할 거야! 지금까지
황제가 왔다는 말을 들은 능연은 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그는 재빨리 눈물 몇 방울을 짜내고 괴롭힘을 당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폐하…”소욱이 들어오자 능연은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그의 품에 안겨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폐하, 황후 마마께서 사람을 시켜 신첩의 옷을 찢어 모욕했어요. 다행히 신첩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마지막 체면을 지켰지만… 폐하께서 조금만 늦게 왔으면, 신첩…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능연의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지키지 못한 것은 자신의 존엄뿐만 아니라 가슴의 상처, 황제의 천수지독의 비밀도 있었다.소욱은 한 손으로 능연의 어깨를 감싸고 가볍게 몇 번 두드리며 소리 없이 위로했다.동시에 차갑고 매서운 눈빛으로 봉구안을 바라보았다.“영화궁으로 썩 물러가거라! 짐의 허락 없이는 청허궁에 한 걸음도 디디지 말거라!”봉구안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예, 폐하.”능연은 소욱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봉구안에게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봉구안이 떠난 후, 소욱은 다른 사람들을 내보냈다.능연은 애처롭게 울었다.“폐하, 황후가 기세등등하게 와서 신첩의 옷을 벗기려고 했지요. 자칫하면 황후께 들킬 뻔… 폐하, 신첩 너무 무서워요.”“청허궁에는 신첩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없네요…”소욱은 능연을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옷부터 입거라.”능연은 다시 소욱의 품에 기대려 했다.“신첩 머리가 어지러운데… 폐하, 신첩을 침대까지 안고 가주실 수…”소욱은 미간이 찌푸렸다.“똑바로 서거라.”소욱은 여인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능연도 눈치껏 그만두고 애처롭게 소욱을 바라보았다.“폐하, 겉옷이 황후마마 때문에 찢어졌어요.”넓게 벌어진 목둘레 사이로 그녀의 몸매가 드러났다.소욱은 능연을 등지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여기에 호위들을 보낼게.”소욱이 가려고 하자 능연은 얼른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폐하, 신첩 너무 무서운데… 옆에 있어 주실 수…”소욱은 미간을 찌푸렸다.“짐의 말을
황제가 청허궁에 가서 능 귀인을 보호한 사실은 하루 만에 궁에서 퍼졌다.태후는 매우 초조했다.“황제가 아직도 능연을 포기하지 못했느냐?”계 상궁도 걱정하며 말했다.“황후가 청허궁에서 능 귀인을 괴롭혀서 폐하가 청허궁에 갔다고 합니다.”“폐하가 사람들 앞에서 황후를 호통치고 황후가 다시는 청허궁에 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마마, 능 귀인의 수단이 대단한데… 머지않아 다시 총애를 받을 수도…”태후가 말했다.“황후도 참, 왜 능연을 건드려서… 이건 능연에게 기회를 주는 거지…”원래 능연을 괴롭히려던 비빈들도 황제의 태도를 보고 모두 생각을 접었다.다들 계 상궁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능 귀인이 조만간에 다시 총애를 받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적을 만들지 말자는 생각이었다.현흥궁.하녀 동하는 유난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마마, 능 귀인의 운이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바닥까지 추락했는데 다시 일어설 수 있다니요… 달기의 화신인 게 분명합니다. 폐하가 능 귀인에게 빠질 것 같습니다.”현비는 약을 마시다가 엄숙한 태도로 정정했다.“상나라 주왕은 망국의 군주이다. 어찌 그를 폐하와 비교를 해?”동하가 바로 잘못을 인정하다.“마마, 노비가 말실수를 했습니다.”동하는 질투가 났을 뿐이다. 다들 영비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왜 능 귀인만 이렇게 총애를 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이렇게 좋은 현비를 황제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해 질 녘의 경치는 아름다웠다.황제의 서재.제왕의 그림자가 병풍의 만리강산 위에 비치었는데 마치 거대한 용이 그 위에 누워있는 듯하였다.황제는 상주서를 보고 있었다. 표정은 차갑고 엄숙하여 아무도 감히 방해할 수 없었다.유사양이 아뢰었다.“폐하, 저녁식사를 해야 하는데 자진궁으로 돌아가셔서 드실 겁니까? 아니면…”소욱은 필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있었다. 소욱의 목에 은선이 조금씩 나타났다.소욱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영소전.”유사양이 난처해 했다.“폐하, 능 귀인은 이
소욱이 옷을 반쯤 벗었는데 여자가 기다리라고 했다.‘뭘 기다려?’봉구안이 말을 이었다.“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곳을 찾아 주시오. 이틀을 사용해서 한꺼번에 폐하의 독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소욱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전에 한 번의 시침으로 독을 빼면 중독자의 몸에 해가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소욱은 그녀가 그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다.봉구안은 아주 침착하게 대답했다.“방법을 찾았습니다.”“걱정되신다면 사람을 시켜서 지키면 되잖습니까.”소욱은 그녀의 두 눈을 주시했다.그녀의 눈은 잔잔한 호수처럼 깊고 무정했다.하지만 교활한 기색은 없고 당당해 보였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몽화지독에 중독되어 그가 죽으면 해독제를 얻을 수 없어 그녀도 죽을 것이다.게다가, 소욱도 하루빨리 이 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매번 독이 발작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소욱은 도박꾼이 아니지만 도박꾼의 천성을 가지고 있었다.심사숙고한 끝에 소욱은 동의했다.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그녀를 최대한 통제할 수 있는 곳은 화청궁의 지하 밀실이다.그들은 화청궁에 왔다. 진한길도 따라 내려가려 했지만 소욱에게 제지당하였다.“넌 밖에서 잘 지키거 있거라. 이틀 후에 짐이 나오지 않으면 궁궐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이 자를 죽이거라.”진한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폐하, 다시 한번만 생각하십시오.”소욱이 내린 결정은 변하지 않았다.소욱은 의연히 밀도로 들어갔다.봉구안은 소욱의 뒤를 따라가면서 진한길을 한번 돌아보았다.“잘 지키거라.”누군가가 쳐들어오면 봉구안과 소욱은 둘 다 죽을 것이다.진한길이 대답했다.“예.”‘내가 왜 자객의 말을 들어야 하지?’…밀실의 벽에 촛불이 있었지만 바깥보다는 훨씬 어두웠다.소욱은 백옥 침대에 앉아 가슴을 드러내고 봉구안에게 침을 놓게 하였다.첫날밤의 침술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봉구안은 침을 놓는데 집중하였다. 손놀림이 민첩했다.소욱의 이번에 발작한 시간은 봉구안이 예상한
대하국의 지원군은 초조함에 휩싸였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리 옥석비가 있다지만, 겨우 소수 병력만 이끌고 있는 남제 황제가 그들의 10만 대군과 싸우려 하다니, 너무나 오만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그러나 곧 이어진 광경은 그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땅이 갑자기 들썩이며 사방에서 수천의 병사가 솟아나 그들을 포위해 버렸다.대하국 선봉 지휘관은 망연자실했고, 후방 병사들은 무기를 움켜쥔 채 외쳤다.“장군님, 매복입니다!”소욱의 눈은 서늘하게 얼어붙어, 차갑기만 했다.“항복하는 자는 살려줄 것이다.”대하국 병사들은 전투용 쇠뇌를 준비하며 진영을 구축했고, 선봉 장수는 큰 소리로 외쳤다.“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 남제군을 모두 쓸어 버려라!”소욱의 얼굴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했고, 그는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멀리서 준비를 마친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올렸다.같은 시각, 북부에서는 북연의 10만 대군이 남제군의 기습을 받았다.맹건은 북방군을 이끌고 어디선가 나타났고, 그의 옆에는 옥석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북연 병사들은 맹건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북방군은 이미 궤멸된 게 아니었나? 어째서 여기에 나타난 거지?”맹건은 흙 언덕 위에 서서 강렬한 눈빛과 함께 살기를 뿜어냈다.남제를 공격하는 여러 나라들이 한창 공세를 펼칠 때, 그는 이미 황제와 봉구안으로부터 비밀 지령을 받아두고 있었다.처음에는 북방을 포기하라는 명령이 너무 터무니없이 들렸지만, 곧 남제가 이미 ‘거미줄’로 불리는 비밀 통로를 구축해 놓았음을 알게 되었다.북방군은 패한 척하며 은밀히 거미줄 통로 속에서 숨었고, 그동안 백성들을 대피시키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이제야말로 반격의 때가 온 것이다.맹건은 장검을 뽑아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선조의 옥석비가 우리를 지키고 있다! 남제의 국토를 침범한 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갇혀 있던 늑대처럼 전의를 불태우던 북방군은 순식간에 몰려들어 포효했다.“돌격하라!”북연의 주
단춘의 손이 떨렸다.“뭐라고? 죽였다고?”보고하던 병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는 무릎을 꿇으며 성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음병들이 지나간 후, 병사 수십 명이 살해당했습니다. 너무도 참혹한 광경이었습니다. 장군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단춘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그 자신도 답을 몰랐다.평생 사람과의 전투만 치러왔던 그에게, 이번에는 귀신과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주국공부.시위병이 황제의 침실로 뛰어들어왔다.“폐하! 음병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북연의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말했지! 귀신이면 귀신도 베란 말이다! 당장 음병들을 모두 없애라!”황제의 광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광기가 귀신을 향해 번졌다.시위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폐하, 그들은 음병입니다. 신출귀몰하며 잡으려 하면 금세 사라집니다.”“야간 경계 중인 우리 병사들이 수십 명 죽임을 당했고, 그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습니다. 도저히 손쓸 수가 없습니다!”북연 황제의 눈에 차가운 기운이 어렸다.설마, 이 선성에 진짜 귀신이 있다는 것인가?그는 고심하며 생각을 이어가다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을 만지더니, 문득 얼굴이 굳어졌다.“내 옥쇄가 어디 갔느냐!”시위병들은 놀라며 어리둥절해했다.황제의 옥쇄가 사라졌다니!제국의 상징이자 중요한 물건이 어째서 사라진 걸까?……다음 날, 선성 밖.남제군은 성 안에서 음병이 나타났다는 사실과, 몇몇 적군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이야기는 너무도 황당해서 믿기 힘들었다.본진 안.장수들은 일제히 갑옷을 입고 대기하고 있었다.봉구안도 차분히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머리가 빠른 자들은 이미 이 모든 것이 황후의 계략임을 간파했다.음병들은 분명 살아 있는 병사들이었다.남제군이 비밀 통로를 통해 이동한 전례가 있는 만큼, 선성 내부에도 비밀 통로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음병으로 적군의 사기를 꺾은 만큼, 이제 공격 명령이 내려질 것이
귀신이 출몰했다는 한 병사의 외침에, 선성을 경계하던 병사들은 순간 굳어버렸다.텅 비었던 선성 내부의 광장에 갑자기 수많은 장병들이 나타난 것이다.그들은 남제 갑옷을 입고, 천둥소리가 어우러진 밤하늘 아래 규칙적으로 걸어갔다.그들 몸에서는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성벽 위, 누군가 공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음병이다! 음병이 나타났다!”음병이 길을 지나간다는 전설은 여러 나라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사람들은 평소 죄를 짓지 않으면 한밤중에 귀신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다는 말을 흔히 하곤 했다.하지만 현실에서는 비겁한 자들뿐만 아니라 겁이 많은 사람들도 귀신을 무서워했다.세상에는 겁이 많은 사람이 더 많았으니, 음병의 등장에 병사들은 모두 몸을 떨었다.그래도 그나마 용기를 내는 병사들이 장군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러 갔다.음병들의 창백한 얼굴만 봐도 등골이 서늘해졌던 그 순간, 단춘 장군은 바로 갑옷을 챙겨 입고 성벽으로 나왔다.그조차도 음병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남제 장병들이 기괴하게 행진하는 모습을 보자, 단춘은 잠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병사들에게 단호히 명령했다.“고개를 돌려라! 눈을 감아라! 그들을 보지 말아라!”이는 오래된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었다.음병이 길을 지나갈 때 이를 보면, 음병들이 자신도 같은 동료로 착각해 데려간다는 것이다.여기서 데려간다는 건, 결국 목숨을 잃는다는 뜻이었다.귀신과 신령은 가까이하기보다는 멀리해야 했다.단춘 뿐만 아니라 다른 장수들 역시 병사들에게 같은 지시를 내렸다.천둥소리가 계속 이어졌고, 이는 번개의 울림인지 음병들의 말발굽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한편, 북연의 황제는 선성의 국공부에서 자다가 바깥의 소리에 잠에서 깼다.“밖에 무슨 일이냐!”경호병이 급히 보고했다.“폐하, 음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음병?”황제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이건 틀림없이 남제의 계략이다. 무장을 갖춰라! 그 음병들이란 놈들을
성문이 잠긴 것은 자명했지만, 그 열쇠를 쥔 자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명백한 것은 이 일이 연합군 내부의 소행일 리 없다는 것이다.즉, 그들 사이에 이미 남제의 첩자가 스며들었다는 뜻이었다.연합군은 차가운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놀람이 가시자마자, 각 군대는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수화부 연합군은 대하국 동부 연합군을 비난하며 말했다.“첩자는 분명 당신들 안에 숨어있을 것이오! 동방군과 교전한 건 당신들밖에 없지 않소!”“우리 수화부는 남부에서 바로 온 병사들이란 말이오!”단춘은 즉각 반박했다.“북연 연합군도 마찬가지로 남제와 싸웠소!”“그리고 남부에서 왔다고 해서 첩자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소?”“오히려 이미 섞여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소!”북연 황제는 이때 상대적으로 침착한 태도로 그들의 다툼을 제지했다.“그만하라! 너희의 소리가 귀를 찌르니 멈추거라!”“첩자가 어디에 있든 간에, 지금 중요한 건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성문이 잠겼다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적도 성문을 뚫지 못하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황제의 이 말은 언뜻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단춘 같은 경험 많은 장수에게는 부족함이 있었다.단춘은 그의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며 물었다.“폐하, 혹시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계신 겁니까?”“저희가 성문을 나갈 수 없다는 건, 결국 여기서 갇혀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이 말이 나오자, 군대는 순식간에 동요하기 시작했다.포위된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남제군이 서두르지 않고 성을 공격하지 않는 것도, 시간을 두고 연합군의 식량을 고갈시켜 스스로 무너지게 하려는 전략임이 분명했다.……선성 밖.남제군은 자리를 잡고 주둔 중이었다.지휘소에서는 봉구안이 침착한 표정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한 장군이 허리를 굽혀 물었다.“황후마마, 병사들이 선성을 언제 공격하냐고 묻고 있습니다.”봉구안은 그
선성 밖에서는 매서운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수십만 남제 장병이 다양한 무기를 들고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그 소리는 선성 위를 울려 퍼지며, 마치 갇혀 있던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위압감을 주었다.성 안에서도 그 소리가 선성을 흔들 만큼 강렬하게 울렸다.봉구안은 전마를 타고 성벽을 응시하고 있었다.갑옷 아래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대단한 힘이 느껴졌다.성문은 이미 단단히 닫혀 있었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상태였다.성루 위에서는 단춘이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그 옆의 부장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장군, 저건 동방군입니다. 대체 어떻게 선성에 나타난 걸까요?! 분명 감주에 있어야 할 자들인데…”하늘에서 날아온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북연의 황제는 성 밖 동방군의 존재에 크게 분노했다.그는 단춘의 옷깃을 움켜잡고 호통을 쳤다.“감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그런데 이게 대체 뭐냐! 단춘, 정말 잘도 해냈구나!”단춘은 당혹스러웠다.본인도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이었기에 황제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그때 수화부 연합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남제가 당신들을 속인 게 확실하군!”황제는 점점 격분하며 단춘을 더욱 매섭게 쏘아봤다.“동방군이 너희 뒤를 따라왔는데도 모르다니, 이런 실력으로 남제를 우리 북연과 나누겠다고? 정말 가소롭구나!”단춘은 황제의 손을 뿌리치며 반박했다.“폐하, 성 밖에 있는 건 일부 동방군에 불과합니다.”“게다가 우리 동부 연합군만 속은 것도 아닙니다.”“남부 연합군인 수화부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남제군을 알아챘습니까? 똑같이 속았으면서 왜 저희에게만 책임을 묻습니까?”동부 연합군의 장수들도 이에 동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남제의 계략은 워낙 교묘합니다. 감주를 언제 빠져나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폐하, 북부 연합군이라고 해서 뒤따라오는 남제군을 완벽히 파악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그만들 하십시오.
강력한 적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어리석은 동맹이었다.단춘은 선성의 옥석비를 손에 넣고 싶었지만,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그는 정정당당히 조유관을 공략하며 남제에 진입했다.그런데 수화부 연합군은 도대체 뭘 하는가?공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동부 연합군의 성과를 가로채려는 것은 아닐까?그들의 이런 태도는 단춘을 화나게 했다.그렇다고 이미 도착한 연합군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결국 단춘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모두 들어라. 먹을 것도 쉬는 것도 뒤로 미뤄라.”“다른 나라보다 앞서 선성에 도달해야 한다!”“예!”……감주.대하국 연합군은 성 밖에서 남제 동부군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남제 황후 봉구안이 이미 거미줄이라 불리는 비밀 통로를 통해 대군을 이끌고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녀는 소수의 병력을 남겨 감주에 대규모 병력이 주둔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이 계책에 말려든 동부 연합군은 발이 묶이고 말았다.그 사이, 봉구안의 동부군은 비밀 통로를 통해 이미 묵성에 도착해 있었다.그곳에서 그녀는 동방세를 만났다.동방세는 거미줄 비밀 통로의 마지막 관문을 개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그는 고된 작업 중에도 농담을 잊지 않았다.“이번 거미줄 개조를 위해 황제께서 이 장군의 10만 대군을 내게 맡기셨소.”“덕분에 난 한동안 대장처럼 군림하며 유세를 떨었네.”황제가 보낸 인력 덕분에 그는 북부와 동부의 거미줄 비밀 통로를 효율적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이제 마지막 관문만 마무리하면 되는 상황이었다.봉구안은 그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동방세, 남제 장병들을 대신해 깊이 감사의 뜻을 전하네.”“선성으로 갈 계획이오?”동방세가 웃으며 물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소.”동방세는 들고 있던 망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여기 작업만 끝내면 범진과 함께 선성에서 보도록 하세.”그는 선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직감
남강.서왕은 수화부 연합군의 갑작스러운 철수가 단순한 계략일 것이라 의심했다.하지만 밤중에 직접 확인한 결과, 그들의 철수는 패주와 다름없었다.식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떠난 흔적이 역력했으며, 모닥불조차 꺼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조사를 거듭한 끝에, 수화부 연합군이 선성의 보물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서왕은 당황스러웠다.적군이 사라졌으니, 그는 계속 방어를 유지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한편, 수화부 연합군은 선성을 향해 급히 북진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병사들은 강추위를 뚫고 말을 달리며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선두에서 말을 탄 장수가 외쳤다.“장군의 명령이다! 속도를 더 내라!”병사들은 지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우리가 가봤자 보물이 우리 손에 들어올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서둘러야 하나?”“그러게! 선성 보물 얘기를 듣자마자 진지를 철수했지만, 보물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잖아. 그 유명한 옥석비도 하나뿐인데, 그게 우리 차지가 되겠어?”“명령이 내려왔으니 따를 수밖에. 우리가 무슨 선택권이 있겠어?”……동산국 황궁.동산국 황제는 어마장에서 여전히 기력이 넘쳤다.오십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이어 과녁 중심을 명중시켰다.곁에 있던 신하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폐하, 수화부 연합군이 남강 공격을 포기하고 북상하여 조유관으로 향했다고 합니다.”조유관은 대하국 연합군이 최초로 돌파한 약점이었다.더 많은 연합군이 조유관으로 몰려드는 상황은 연합군에게 유리했다.그러나 그로 인해 남부 방면의 공격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황제는 활을 내려놓았다.머리칼에는 은빛이 드리워졌지만, 여전히 강인한 모습이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담대연의 소식은 알아왔느냐?”“담대연은 여전히 남제에 억류되어 천옥에 갇혀 있습니다.”황제는 다시 활을 들어 두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한 번의 발사로 과녁을 뚫자, 곁에 있던 신하가 찬사를 보냈다.“폐하, 화살로 만물을
남강.서왕의 어깨는 부상으로 아파왔고, 완부옥은 표면적으로는 화목한 부부처럼 행동하며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러나 막상 군막 안에 들어가면 두 사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뉜 듯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완부옥은 저녁을 지나치게 많이 먹고 배가 부른 상태였다. 갑작스런 복통에 허리를 구부린 그녀를 보자, 서왕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유화! 군의를 데려오라!”그는 완부옥의 뱃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완부옥은 그저 체한 것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필요 없습니다!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십시오.”내심 불안했던 그녀는 거짓 임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벌레가 최근에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 태아의 상태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군의가 와서 진찰을 하면, 모든 게 드러날 위험이 컸다.서왕은 그녀의 상태가 진정되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그녀를 침대에 앉힌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이는 괜찮은가?”그의 시선은 그녀의 배로 향했다. 완부옥은 워낙 마른 체형이라 배가 불러도 잘 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느슨한 옷을 입고 그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서왕은 그녀의 진짜 상태를 전혀 알지 못했다.일반적인 임산부라면 나타날 만한 불편함이 완부옥에게는 전혀 없었다. 이런 점들이 서왕에게 의심을 품게 했다.그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우리 아이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드디어 이 남자가 의심하기 시작한 걸까? 완부옥은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초조해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어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이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어미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겠어요?”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옷깃을 살짝 건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솔직히 말해라.”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완부옥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평소에는 성격이 부드럽던 이
대하 연합군은 묵성을 함락한 뒤, 곧바로 선성을 향해 진격했다.장수들 중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 말했다.“단 장군, 지금까지의 남제 원정이 너무 순조롭습니다.”“선성에서 매복을 준비한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단춘 역시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동부군은 현재 감주에 주둔 중이었다.그는 전력을 선성으로 보내면서도 일부 병력을 감주로 보내 허위 공격을 감행하고, 동부군을 묶어두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만약 선성에 매복이 있다 해도, 우리의 10만 대군에 북부 연합군까지 합하면 수십만 병력인데, 선성 하나를 못 뚫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그럼에도 신중한 장수는 여전히 망설였다.“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남제의 전략은 적을 깊이 유인하려는 술책 같습니다.”“단 장군, 처음 계획대로 동부군을 견제하며 진격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단춘은 인내심이 바닥난 듯 짜증을 드러냈다.“유인이라니? 남제가 그렇게 어리석어 감주를 내놓고 선성에 매복을 펼친다는 말인가?”“만약 남제가 유인책을 쓴다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감주로 끌어들이는 것이겠지!”“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둬라. 만약 북연이 먼저 선성에 도달해 옥석비를 차지한다면, 우리는 북연의 손발 노릇을 하게 될 거야!”“북연이 동부를 맡으라고 한 것은 그들이 다 해먹으려는 술책일 뿐이다.”“기다릴 테면 기다려 봐. 하지만 대하는 그렇게 바보처럼 속지 않는다!”선성은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북연 황제 역시 선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그들은 남하하는 도중 남제 잔병들에게 여러 차례 매복 공격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시키며 계속해서 진격했다.남제군이 계속 후퇴하면서, 연합군의 사기는 높아졌다.그러다 어느덧 설날 전야가 되었다.하지만 그날은 평소와 달리 정적이 감돌았다.백성들은 해가 지자마자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설날을 맞이하기보다는 다가오는 전란을 피해 숨으려는 모습이었다.황성.궁궐 안, 후궁들은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의지하며 밤을 지새웠다.그들은 한 손에 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