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허궁을 떠난 봉구안은 바로 형자사로 갔다.형자사의 형실은 어둡고 습하여 쥐가 자주 들락거렸다.공기 중에는 썩은 냄새와 피비린내가 가득했다.춘하와 궁인들은 수감되어 있었지만 심문은 받지 않았다.형실로 끌려간 춘하는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불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황후를 본 춘하의 안색은 변했다.“황후 마마를 뵙습니다.”춘하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태도는 영소전 대궁녀답게 의젓했다.형실 안에는 그들 둘뿐이었다.그늘의 어둠 속에 있는 봉구안의 표정은 알 수가 없었다.봉구안은 조검의 수찰 복각본을 춘하에게 던졌다.“이것 좀 봐!”춘하는 뭔지 모르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열었다.수찰 내용을 본 춘하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했다.‘조검이 언제 이런 것들을 기록했지?’‘왜?’‘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황후의 손에…’불안한 춘하는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들어 봉구안을 바라보았다.“황후마마, 이… 이게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춘하는 모른 척하려고 했다.봉구안은 불타는 화롯가에 가서 부집게로 빨갛게 달아오른 숯을 휘저었다.한참 후, 부집게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적막한 실내에는 나무가 불에 타는 소리가 들렸다.춘하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고 있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 했다.봉구안은 부집게를 들어 무심코 춘하의 얼굴 옆으로 갖다 댔다.갑작스러운 열기에 춘하는 놀라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춘하는 눈을 감고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황후마마, 노비 정말 모르겠습니다…”칙!부집게가 춘하의 머리카락에 닿아 순간 탄내가 났다.춘하는 순간 숨이 턱 막히었다.‘황후가 뭘 하려는거지?’봉구안의 눈빛은 늠름하였다.“춘하, 너 올해 스물넷이라고 했지. 내년이면 궁을 나가 시집갈 거고…”“고향에 정인이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는데…”“너도 너의 주인처럼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 이 혼사 성사될까?”순간 춘하는 눈을 번쩍 떴다.춘하는 자신의 사적인 일을 귀비도 모르게 꽁꽁 숨겨두었다. ‘황후가 어떻게 아셨지?’궁은 사
황제의 서재.소욱은 대신들과 양국 평화 회담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폐하, 양나라가 백만 황금을 물어내라고 하는 것은 너무 과분합니다. 절대 동의해서는 안 됩니다.”“진 장군, 만약 그들의 이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맹성주를 양나라 도성에 보내 사죄해야 합니다.”“그것도 안 됩니다. 맹성주는 남제의 공신입니다. 그런 수모를 당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멩성주가 지금 중상을 입었는데…”맹성주 얘기가 나오자 서왕의 표정이 엄숙해졌다.서왕은 공수하여 인사하며 간절하게 말했다.“폐하, 백만 황금을 지불할지언정 맹소장군을 희생시킬 수 없습니다.”“양나라의 속셈이 뻔한데, 만약 맹소장군을 양나라에 보내면 그가 살아서 돌아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다른 대신들도 이 말에 맞장구를 쳤다.“돈은 몸 밖의 물건일 뿐입니다. 백만 황금은 조만간에 다시 벌 수 있지만 맹소장군 같은 인재를 잃으면 남제의 북경이 위태로워집니다.”하지만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소신 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남제의 운수가 좋지 않아 세수가 해마다 줄어들고 있지요. 백만 황금이면 남제 백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맹성주… 이제 전쟁도 끝났으니 싸울 일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그렇지요. 석고대죄로 백만 황금을 대신할 수 있다면 맹성주는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석고대죄하여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려야 하거늘… 그리고 맹성주의 무공이 정말 그렇게 뛰어나다면 양나라의 음모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폐하, 이 대인의 말에 일리가 있지요. 소신도 몇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맹성주가 자신의 공로를 믿고 무척이나 자부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군권이 있어 위험성도 높고… 이번 기회에 맹성주의 충성심을 시험해 보고, 그의 오만함을 죽이는 것도…”두 진영의 사람들은 각자가 도리가 있다며 계속 다투었다.소욱의 차갑고 엄숙한 미간에 그늘이 졌다.소욱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백만 황금과 맹성주의 석고대죄 둘 다 양나
쳐들어온 호위대는 어각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각에는 책장과 서책이 있었고 창이 열려 있었다. 벽에 걸린 그림은 바람에 날려 화족과 벽이 부딪치면서 소리를 냈다.봉구안은 이미 도망쳐 나온 지 오래다.영화궁.위장을 벗은 봉구안의 눈빛은 엄숙했다.봉구안은 소욱이 어떻게 몸속의 천수지독을 억제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청허궁.능연은 외출하지는 못하지만 마당에서 돌아다닐 수는 있었다.능연은 긴 복도를 지나면서 하녀 둘이 구석에서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귀인님 정말 총애를 잃은 것은 아니겠지?”“총애를 잃은게 분명해. 청허궁은 어디냐? 냉궁이나 다름이 없잖아. 귀인이 여기로 온 후 폐하께서 한번도 오시지 않았고…”“귀인은 얼굴이 망가졌으니 총애를 잃을 수밖에…”능연 옆에 있던 궁녀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궁녀는 앞으로 가서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어디서 감히 주인을 논한다냐!”궁인들은 즉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귀인,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능연은 옷자락을 힘껏 움켜쥐었다. 손등의 혈관이 튀어나왔다.“이들의 손발을 자르고, 혀를 뽑아낸 후 장살하거라!”“살… 살려주십시오. 마마!”능연은 그들의 용서를 무시했다.‘멍청한 것들, 내가 총애를 잃었다고?’‘내가 총애를 잃을 리가 없지!’‘폐하가 날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능연은 차가운 얼굴로 옆에 있는 궁녀를 노려보았다.“너도 본궁이 총애를 잃었다고 생각하느냐?”겁에 질린 궁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마마의 풍채와 재능으로 무조건 다시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능연은 궁녀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내가 영원히 이 후궁에서 가장 총애를 받는 여인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알릴 거야.’‘내가 냉궁에 있더라도 폐하는 나를 가장 총애해…’능연은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능연의 눈에는 확신이 가득했다.‘폐하는 곧 오실 거야.’…능연이 강들된 후 많은 비빈들은 영소전 주인을 목표로
비록 털 빠진 봉황이 닭보다 못하다고는 하지만 능연은 후궁의 총애를 한 몸에 얻었던 여자였다. 얼굴이 망가져도 황제는 여전히 며칠 동안이나 연이어 그녀를 총애했었다. 여기서 능연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연상은 황후의 말대로 움직였지만 최 상궁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최 상궁은 능 귀인이 훗날에 다시 총애를 얻어서 자신을 죽일까 봐 두려웠다.황후가 좋은 일을 하려고 그들을 데리고 나온 것은 아닌 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을 시킬 줄은 몰랐다.최 상궁은 제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연상은 혼자서 능연을 꽉 잡을 수 없었다. 오히려 능연에게 밀렸다.“봉장미! 네가 감히 본궁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폐하는 결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궁에는 폐하 외에 아무도 감히 본궁의 옷을 벗기지 못해! 네가 무슨 자격으로…”봉구안은 차가운 눈으로 최 상궁을 바라보았다.“벗겨라!”최 상궁은 봉구안의 눈빛에 겁을 먹고 힘들게 움직였다.“능 귀인, 실례하겠습니다.”내전에는 능연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악!”동시에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능연은 이런 굴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능연은 봉구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봉구안은 두려운 기색도 동정하는 기색도 없이 계속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작 이것도 못 견딘단 말이냐? 장미가 수모를 당하고 있을 때 왜 가만히만 있었니?’봉구안은 지금 당장 능연을 죽이고 싶었다.청허궁의 시녀는 귀인의 비명 소리를 듣자 얼른 몰래 곁문으로 나가서 황제를 찾았다.…내전.능연의 웃옷을 다 벗긴 후, 봉구안은 한곳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눈빛이 식었다.봉구안은 손을 흔들었다.“그만, 너희들도 물러가라.”연상과 최 상궁은 바로 동작을 멈추고 물러갔다.이때 능연은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매서운 눈빛으로 봉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능연은 봉구안이 산적의 일로 자신에게 복수한다고 생각했다.“봉장미, 본궁은 오늘의 치욕을 똑똑히 기억할 거야! 지금까지
황제가 왔다는 말을 들은 능연은 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그는 재빨리 눈물 몇 방울을 짜내고 괴롭힘을 당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폐하…”소욱이 들어오자 능연은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그의 품에 안겨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폐하, 황후 마마께서 사람을 시켜 신첩의 옷을 찢어 모욕했어요. 다행히 신첩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마지막 체면을 지켰지만… 폐하께서 조금만 늦게 왔으면, 신첩…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능연의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지키지 못한 것은 자신의 존엄뿐만 아니라 가슴의 상처, 황제의 천수지독의 비밀도 있었다.소욱은 한 손으로 능연의 어깨를 감싸고 가볍게 몇 번 두드리며 소리 없이 위로했다.동시에 차갑고 매서운 눈빛으로 봉구안을 바라보았다.“영화궁으로 썩 물러가거라! 짐의 허락 없이는 청허궁에 한 걸음도 디디지 말거라!”봉구안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예, 폐하.”능연은 소욱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봉구안에게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봉구안이 떠난 후, 소욱은 다른 사람들을 내보냈다.능연은 애처롭게 울었다.“폐하, 황후가 기세등등하게 와서 신첩의 옷을 벗기려고 했지요. 자칫하면 황후께 들킬 뻔… 폐하, 신첩 너무 무서워요.”“청허궁에는 신첩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없네요…”소욱은 능연을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옷부터 입거라.”능연은 다시 소욱의 품에 기대려 했다.“신첩 머리가 어지러운데… 폐하, 신첩을 침대까지 안고 가주실 수…”소욱은 미간이 찌푸렸다.“똑바로 서거라.”소욱은 여인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능연도 눈치껏 그만두고 애처롭게 소욱을 바라보았다.“폐하, 겉옷이 황후마마 때문에 찢어졌어요.”넓게 벌어진 목둘레 사이로 그녀의 몸매가 드러났다.소욱은 능연을 등지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여기에 호위들을 보낼게.”소욱이 가려고 하자 능연은 얼른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폐하, 신첩 너무 무서운데… 옆에 있어 주실 수…”소욱은 미간을 찌푸렸다.“짐의 말을
황제가 청허궁에 가서 능 귀인을 보호한 사실은 하루 만에 궁에서 퍼졌다.태후는 매우 초조했다.“황제가 아직도 능연을 포기하지 못했느냐?”계 상궁도 걱정하며 말했다.“황후가 청허궁에서 능 귀인을 괴롭혀서 폐하가 청허궁에 갔다고 합니다.”“폐하가 사람들 앞에서 황후를 호통치고 황후가 다시는 청허궁에 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마마, 능 귀인의 수단이 대단한데… 머지않아 다시 총애를 받을 수도…”태후가 말했다.“황후도 참, 왜 능연을 건드려서… 이건 능연에게 기회를 주는 거지…”원래 능연을 괴롭히려던 비빈들도 황제의 태도를 보고 모두 생각을 접었다.다들 계 상궁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능 귀인이 조만간에 다시 총애를 받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적을 만들지 말자는 생각이었다.현흥궁.하녀 동하는 유난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마마, 능 귀인의 운이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바닥까지 추락했는데 다시 일어설 수 있다니요… 달기의 화신인 게 분명합니다. 폐하가 능 귀인에게 빠질 것 같습니다.”현비는 약을 마시다가 엄숙한 태도로 정정했다.“상나라 주왕은 망국의 군주이다. 어찌 그를 폐하와 비교를 해?”동하가 바로 잘못을 인정하다.“마마, 노비가 말실수를 했습니다.”동하는 질투가 났을 뿐이다. 다들 영비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왜 능 귀인만 이렇게 총애를 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이렇게 좋은 현비를 황제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해 질 녘의 경치는 아름다웠다.황제의 서재.제왕의 그림자가 병풍의 만리강산 위에 비치었는데 마치 거대한 용이 그 위에 누워있는 듯하였다.황제는 상주서를 보고 있었다. 표정은 차갑고 엄숙하여 아무도 감히 방해할 수 없었다.유사양이 아뢰었다.“폐하, 저녁식사를 해야 하는데 자진궁으로 돌아가셔서 드실 겁니까? 아니면…”소욱은 필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있었다. 소욱의 목에 은선이 조금씩 나타났다.소욱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영소전.”유사양이 난처해 했다.“폐하, 능 귀인은 이
소욱이 옷을 반쯤 벗었는데 여자가 기다리라고 했다.‘뭘 기다려?’봉구안이 말을 이었다.“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곳을 찾아 주시오. 이틀을 사용해서 한꺼번에 폐하의 독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소욱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전에 한 번의 시침으로 독을 빼면 중독자의 몸에 해가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소욱은 그녀가 그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다.봉구안은 아주 침착하게 대답했다.“방법을 찾았습니다.”“걱정되신다면 사람을 시켜서 지키면 되잖습니까.”소욱은 그녀의 두 눈을 주시했다.그녀의 눈은 잔잔한 호수처럼 깊고 무정했다.하지만 교활한 기색은 없고 당당해 보였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몽화지독에 중독되어 그가 죽으면 해독제를 얻을 수 없어 그녀도 죽을 것이다.게다가, 소욱도 하루빨리 이 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매번 독이 발작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소욱은 도박꾼이 아니지만 도박꾼의 천성을 가지고 있었다.심사숙고한 끝에 소욱은 동의했다.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그녀를 최대한 통제할 수 있는 곳은 화청궁의 지하 밀실이다.그들은 화청궁에 왔다. 진한길도 따라 내려가려 했지만 소욱에게 제지당하였다.“넌 밖에서 잘 지키거 있거라. 이틀 후에 짐이 나오지 않으면 궁궐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이 자를 죽이거라.”진한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폐하, 다시 한번만 생각하십시오.”소욱이 내린 결정은 변하지 않았다.소욱은 의연히 밀도로 들어갔다.봉구안은 소욱의 뒤를 따라가면서 진한길을 한번 돌아보았다.“잘 지키거라.”누군가가 쳐들어오면 봉구안과 소욱은 둘 다 죽을 것이다.진한길이 대답했다.“예.”‘내가 왜 자객의 말을 들어야 하지?’…밀실의 벽에 촛불이 있었지만 바깥보다는 훨씬 어두웠다.소욱은 백옥 침대에 앉아 가슴을 드러내고 봉구안에게 침을 놓게 하였다.첫날밤의 침술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봉구안은 침을 놓는데 집중하였다. 손놀림이 민첩했다.소욱의 이번에 발작한 시간은 봉구안이 예상한
봉구안은 극한 상황에 처한 경험이 많기 때문에 볼일 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물을 적게 마시고 조금만 참으면 된다.하지만 곱게 자란 황제도 참을 수 일을 줄은 몰랐다.모래시계가 반쯤 흘렀을 때 백옥 침대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봉구안의 시선을 마주했다.“뭘 그렇게 쳐다봐?”소욱은 봉구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봉구안이 직접 물었다.“뭔가 볼일을…?”‘볼일?’‘대담도 하지!’소욱은 대답이 없었다. 소욱의 안색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깊은 눈동자에는 혹독함이 묻어났다.봉구안은 자신의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봉구안은 자신이 매우 완곡하게 물었다고 생각했다.황제의 반응이 오히려 이상했다.먹고 싸는 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생리 현상이다.‘어쩌면 제왕이라서 자신을 일반인으로 여기지 않을 수도…’봉구안의 시선은 소욱의 배와 다리 사이에 두었다.“오래 참으면 좋지 않습니다.”봉구안은 착해서가 아니라 소욱이 체면을 챙기느라 고생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만약 침으로 독을 빼고 있을 때 소욱이 참지 못한다면 그것도 큰일이었다.실내 온도가 갑자기 떨어졌다.소욱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눈빛으로 그녀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괴롭히려는 것 같았다.봉구안은 소욱이 체면을 너무 중시한다고만 생각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봉구안은 진한길이 가져다준 만두를 집어 입에 넣었다.소욱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몰래 짐에 대해 조사했느냐?”봉구안은 잠시 멍해졌다.‘무슨 조사?’소욱은 그녀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소욱은 자신이 괜한 생각을 했다고 생각해 말머리를 돌렸다.“그럼 왜 입궁하였느냐?”봉구안이 진지하게 반문했다.“폐하는 현명한 군주이십니까?”소욱은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입을 열어 말했다.“현명한 군주인지 아닌지는 세상 사람들의 평가다.”“짐이 만약 현명한 군주라고 하면 믿겠느냐?”봉구안의 눈빛에서 확신이 드러났다.“믿습니다.”‘
“운산파, 풍고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소욱은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며,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살한 기운을 느꼈다. 풍고는 술에 취한 듯 흐릿한 눈으로 소욱을 노려보았다.“여자군…”그 음흉한 말투에는 분명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풍고의 악명은 이미 다른 문파에도 퍼져 있었다. 수법이 음험하고 독해, 전진파의 제자조차도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는 평이 자자했다. 하물며 이번은 그의 첫 시합이기도 했기에 체력 면에서도 절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벽력당 측 인사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이건 너무하잖소! 애초에 싸움이 되겠습니까!”운산파 부장문은 그저 태연하게 웃었다.“풍고도 우리 운산파의 정식 제자입니다. 어찌 출전하지 못하겠습니까?”벽력당 인사가 다시 차선아를 부추겼다.“차 부장문, 이걸 그냥 넘기시려는 것입니까? 운산파, 이건 명백한 갑질이 아닙니까?”다른 문파 사람들도 거들었다.“풍고가 손을 쓰면 죽든 다치든 뻔한 일입니다! 차 부장문, 정말 제자를 아끼신다면 지금이라도 막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술 대회 하나로 또 사람이 죽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풍고는 혀로 입술을 훔치며, 소욱을 노려보았다.“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군요… 마음에 듭니다.”소름이 끼치는 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겁먹고 물러섰을 상황이었다.하지만, 소욱이 누구인가? 어린 나이에 황제로 등극해 수차례 친정했고, 봉구안과 함께 강호를 누비며 구중탑의 흉인, 천룡회 교주, 지하 투기장의 악인들까지 직접 상대해왔다.그런 자들에 비하면 풍고는 그야말로 하찮은 졸개에 불과했다.시합대 아래서 차선아가 걱정스레 소욱을 바라보다가 봉구안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멈출지 묻는 신호였다.봉구안은 소욱의 눈빛을 마주하고, 그 안에 담긴 의지를 읽어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차선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전진파는 시합을 계속하겠습니다.”운산파 부장문이 비웃듯 중얼였다.“정말, 승부에 제자들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여자군.”시합이
비무대 위.소욱의 맞상대는 운산파 제자였다.그 눈빛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무언의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관중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외쳤다.“전진파의 그 고수야! 어제도 혼자서 전진파 승리를 이끌었다더라!”“맞아, 나도 싸워봤어! 가면만 썼을 뿐, 체격이 어마어마했지. 여자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어!”“은사성이 독을 써서 겨우 이긴 상대야.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도 계속 이겼을걸!”하지만 오늘 소욱에겐,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눈 한 번 깜빡할 틈도 없이, 상대의 검을 튕겨낸 소욱은 곧장 배를 노려 발을 찼다.“푸억!”상대는 땅에 구르며 쓰러졌다.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내가 졌단 말인가…”운산파 부장문이 벌떡 일어나, 무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무슨 짓을 한 거지… 단 한 합 만에 끝났다고?’그 이후로도 경기는 속속 이어졌다.하지만… 누가 올라와도, 결과는 같았다.소욱은 마치 무쇠처럼 단단했고, 폭풍처럼 매서웠다.불과 반 시진 만에 열 판을 내리 이겼다.심지어 피곤한 기색 조차 내비치지 않았다.부장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이대로라면… 운산파가 패배하고 말 거야!’더는 전진파가 이기게 둘 수 없었다.저 여인을 지금 당장 끌어내려야 했다.운산파 부장문은 부랴부랴 제자들을 내세웠다.그러나 출전하는 자마다, 줄줄이 무대 위에서 나가떨어졌다.“전진파, 승!”심판의 외침이 또다시 울려 퍼지자, 운산파 측은 물론이고, 다른 문파들마저 할 말을 잃었다.“이게 말이 되나… 저 운산파 제자들이 당해내질 못하는군…”“벌써 열한 판째 연속으로 승리하고 있어. 전진파가 이 정도였어?”“차선아가 돌아온 이유, 이제야 알겠네. 저 고수 하나 믿고 온 거야.”“지금쯤 운산파 부장문,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겠지.”무대 위의 소욱은 검이면 검, 권이면 권. 허술한 틈 하나 없었다.이미 운산파 제자들의 버릇과 약점을 완전히 꿰뚫은 듯했다.이제 싸움은 더 이상 ‘승부’가 중요치 않았다.이 싸움은 소욱의
서여국에서 도착한 편지를 받아든 봉구안은 혹여 장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먼저 걱정이 앞섰다.서둘러 봉투를 뜯고 펼쳐 보니, 편지엔 어머니 봉 부인의 안부가 담겨 있었다.봉장미에 따르면, 봉 부인은 현재 병환을 앓고 있지만 크게 위중한 상태는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다만 현재 봉 부인은 남제 땅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였다는 것이었다.봉구안에게 이 일은 그리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억지로 머물게 할 이유도 없었다.봉 부인의 뜻이 정해졌다면, 곧장 사람을 보내 모셔오면 그만이었다.그녀는 곧장 붓을 들어 답장을 써내려갔다.어머니의 뜻을 존중하고, 직접 맞이하러 가겠다는 내용이었다.편지를 막 봉했다 싶을 무렵… 방 안에서 소욱이 갈아입은 옷차림으로 나왔다.봉구안이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를 본 순간, 순간적으로 시선이 멈췄다.오늘 그가 입은 옷은 색감이 수수했지만, 오히려 그런 담백함이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긴 머리는 아직 묶지 않아 어깨 너머로 흘렀고, 뒷모습만 보면 전진파 제자라 해도 믿을 만했다.마치 세속을 벗어난 신선 같다고 해야 할까.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려 얼굴이 보이는 순간, 봉구안은 애써 눈길을 거뒀다.그만 보면 좋겠는데, 이상하게도 더 보게 되는 얼굴이었다.……운산파.비무대회는 예정대로 이어지고 있었다.운산파 장문 구학이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은 철저히 은폐된 채, 그저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부장문이 대회를 관장하게 되었다고만 알려졌다.오전 내내 각 문파가 격돌했지만, 가장 큰 수확을 거둔 건 운산파였다.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우승에 한 발 더 가까워졌고, 비록 은사성이 사망했지만 그 자리를 채울 인재가 운산파엔 여전히 남아 있었다.그 사이, 벽력당은 가장 먼저 전멸한 상황이었다. 오직 신검종만이 한 번 운산파를 꺾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운산파가 이번에도 무림 수장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그 순간, 전진파가 돌아왔다.산문이 열리자, 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는 전진파 제자들이 줄지
“폐하, 조금 지칩니다.”봉구안이 조용히, 그러나 깊은 피로가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소욱은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늘 강인하던 그녀가 이토록 나약하고 아득한 얼굴이라니.그는 이내 다가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봉구안은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움켜쥐었다.“사람을 살리고 싶었을 뿐… 저를 좋아하라고도, 대신 죽어 달라고도 한 적 없습니다.”“마음이… 너무 무겁습니다.”소욱은 그녀의 등을 천천히 두드리며 말했다.“그것이 바로 인연이 아니더냐.”“네가 선한 뜻으로 씨를 뿌렸기에, 그들이 너를 따르는 것이다.”“그리고 네가 살아 있다면, 더 많은 이를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봉구안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이내,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눈빛을 바로 세웠다.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객잔 밖으로 나섰다.가던 길을 멈춘 차선아를 향해 그녀가 소리쳤다.“끝은 내야하지 않겠느냐.”“전진파는 두 번만 더 이기면 된다, 얼마 남지 않았다.”차선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차가운 바람이 지나갔다.두 사람의 머릿결이 날리고, 봉구안의 음성이 그 틈을 뚫고 나왔다.“많은 이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물러서는 게 올바르다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그 판단이 옳지만은 않았던 것 같구나.”그녀는 곧 말을 이었다.“네게… 말 못한 일을 하나 알려줄까 한다.”그다음, 봉구안은 약쟁이 사건의 시작과 끝을 차근히 풀어냈다.차선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운산파가 그런 일에 가담하고 있었다니요…!”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결정을 차선아에게 맡겼다.“약쟁이는 나라를 좀먹는 독이다.”“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어. 더는 미룰 수 없다.”“전진파가 물러설 수도 있겠지만… 다른 선택도 있지 않겠느냐?”차선아는 그녀의 말을 끊고 나섰다.그 눈빛은 한겨울 설산처럼 차갑고 단단했다.“저희가 걷는 길은 정도입니다.”“황후마마. 이토록 중대한 일이라면… 누구도 물러서선 아니 되지
방 안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이는 운산파 장문 구학이 아니라, 그의 자리를 대신한 엄 장로였다.장막을 바라보는 눈빛은 냉기마저 서려 있었고, 그의 머릿속엔 세상을 먼저 떠난 아버지의 모습만이 맴돌았다.이불을 움켜쥔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고, 눈엔 증오가 고였다.부친을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었다.하지만 복수만 좇다간, 남겨진 것을 모두 잃게 될 터였다.운산파를 지키는 것 또한, 그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다.모든 비극의 시작은 사람을 약인으로 만들어 팔아넘긴 자들. 그들이 운산파를 더럽혔다.그 뿌리를 반드시 끊어내리라.그는 자신의 손으로 끝장을 낼 것이라 다짐하였다.……밤은 깊어졌다.운산파에 머무는 외부 문파 제자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혹시라도 운산파 측이 음식을 통해 무언가 꾸민 건 아닐까.그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전진파는 하나의 방에 모여 있었고, 그 옆 방엔 벽력당 제자들이 자리했다.정원아의 죽음으로 침통해 있던 그들은 이 와중에 코 고는 소리까지 들려오자, 마음이 더 뒤숭숭해졌다.“부장문님… 비무대회, 계속 나가야 하나요?”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 말은, 결국 포기를 암시하는 질문이었다.차선아는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내공을 다스리고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일… 하산한다.”방민이 벌떡 일어섰다.“부장문님! 두 경기만 더 이기면 결승이에요! 지금 포기하면, 그간 쌓아온 모든 걸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겁니다!”차선아는 조용하면서도 슬픔이 배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 강호는… 편안하지 않아. 원아는 이미 죽었다.”“더는, 아무도 잃고 싶지 않구나.”운산파에 벌어진 일은 소환을 움직였고, 그것은 곧 조정이 직접 나섰다는 뜻이었다.강호와 조정은 본래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으나… 이번엔 그 선이 무너졌다.운산파가 저지른 일이, 그만큼 무거운 것이었다.이 상황에서 운산파에 머무른다는 건, 전진파도 위험에 휘말릴 수 있다는
봉구안의 느닷없는 한마디에 모두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소욱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고, 동방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닭이…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화로 옆에서 막 비둘기를 집어 들려던 강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급히 손에 들린 걸 들어 보이며 정정했다.“아니, 말했잖소! 이건 닭이 아니라 비둘기라 하지 않았소?”“그것도 제일 비싼 ‘비천비’라오!”“설마… 진짜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 혹시… 독이라도 들어간 아니겠지?”강림은 당황한 얼굴로 비둘기를 얼른 내려놓았다.봉구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건 괜찮소. 자네 비둘기 말고… 내가 말한 건 죽산진의 닭이었소.”그녀는 다른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약인독에 꼭 들어가는 약초 중 하나, 홍련초를 다들 기억하시오?”열무신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당연히 기억합니다. 그걸 조사하려고 죽산진에 사람도 남겨뒀는데…”“잠깐, 마마의 말씀은 혹시…”그는 말을 멈췄다.이미 무언가 감을 잡은 듯했다.동방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그 말인즉, 지금까지 우린 누가 홍련초를 사 갔는지 뒤쫓고 있었지만, 사실 그 약초 자체가 아니라, 그걸 먹고 자란 닭이 진짜 목표였다는 거로군.”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정확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소. 확인이 필요하겠지.”애초에 그녀도 이런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강림이 기르던 ‘비천비’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죽산진의 닭들이 떠올랐다.비둘기가 특별한 먹이를 통해 효능을 갖게 된 것처럼, 홍련초를 먹은 닭도 무언가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었다.소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당장 소탁에게 전하게. 죽산진에서 유통된 닭들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는지 전부 조사하라고.”“알겠습니다.” 봉구안이 짧게 대답했다.이 와중에 여전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는 단 한 명… 강림뿐이었다.그는 두리번거리며 말없이 모두를 쳐다봤다.“…도대체 무슨 소리오? 홍련초가 뭐고, 닭은 왜
소욱은 상자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도대체 구안이 준비한 선물이란 게 뭘까.비단으로 감싼 상자를 열자, 안에는 옥패 하나가 곱게 들어 있었다.투명하게 빛나는 그 옥패는 희고 맑았고, 묘하게도 그의 기품과 잘 어울렸다.황제의 자리에서 진귀한 보물쯤은 셀 수 없이 봐왔지만… 이건 달랐다. 봉구안이 직접 고른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더없이 소중했다.그녀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시간이 좀 촉박했어요. 이 정도밖에 못 구했네요.”소욱은 아무 말 없이 옥패를 목에 걸었다.곧이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그래도 내 탄신일을 잊지 않았구나. 고맙다.”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그 정도로 기억력 나쁘진 않아요.”소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런 정색스러운 대답 말고, 자기가 듣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그냥 자신이라서, 자신의 탄신일이라서 기억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그는 그녀의 어깨를 슬쩍 끌어안았다.똑, 똑.하필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폐하, 강림이 돌아왔습니다!”……원래 강림은 상단을 이끌고 강호를 떠돌고 있었지만, 강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가만있을 수 없었다.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달려왔고, 마침내 때를 맞춘 셈이다.“휴, 아직 안 떠났군!”강림은 선홍색 비단 도포를 입고 자줏빛 금관을 썼다. 허리에는 값비싼 옥이 매달려 있고, 발에는 자수가 놓인 검은 장화를 신었다.걸음마다 은은한 향과 함께 사치가 묻어나는 모습이었다.동방세는 그와 익숙한 사이인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강주 행은 자네의 덕을 많이 봤네. 이 객잔을 쓸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받았네.”강림은 손을 휘휘 저으며 쿡 웃었다.“뭘 그런 걸 갖고 그래. 형제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소? 아, 폐하께서도 계시다던데?”그는 시선을 넘겨 방 안쪽을 바라보았다.봉구안 곁에 앉은 소욱을 발견하자, 급히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강림,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뭐라고요? 가짜라고요?”문을 지키던 제자는 크게 놀라 얼굴이 새파래졌다.관리가 가짜라면, 그럼 장문님은? 장문님이 지금 위험하다는 것이 아닌가!그들은 급히 이 사실을 부장문에게 보고했다.한편, 부장문은 각 문파 인사들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장문님께서는 곧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무술 대회도 예정대로 진행될 것입니다…”“부장문님!”한 제자가 급히 뛰어왔다.부장문은 사정을 듣자마자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가짜라니?그들이 가짜 관리였단 말인가!그는 즉시 정예 제자들을 소집해 추격을 지시했다.그러나, 오백과 은칠은 이미 말을 타고 먼 곳으로 도망친 후였다.……열무신의 혹독한 심문 끝에, 결국 비밀이 밝혀졌다.구학이 마침내 자백했다.자신이 직접 사부인 엄청송을 죽였다고…이 소식을 들은 엄 장로는 분노에 차 방으로 뛰어들었다.이미 심한 고문을 당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구학이었지만, 엄 장로는 여전히 분을 삭일 수 없었다.그는 구학의 목을 움켜쥐고 외쳤다.“왜! 왜 아버지를 죽이셨습니까! 그분은 사형의 스승이자, 사형을 친아들처럼 길러주신 분이셨습니다! 어찌 양심이 이리도 다 썩어 문드러질 수 있냐 말입니다!”구학은 이미 이가 여러 개 빠져, 말할 때마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그러면서도 힘겹게 웃었다.“그야… 스승님이 멍청했기 때문다.”“그 분은 단순히 병에 걸렸을 뿐이었다. 치료하면 나을 수 있었지...”“하지만 그 분께서 약쟁이와 인신매매 사건을 알게 되었다. 이를 관청에 고발하려 했고…”“게다가 내게 준 장문 자리까지 빼앗으려 했어… 난… 난 스승님을 없앨 수밖에 없었다…”엄 장로의 이마에는 핏줄이 튀어나왔다.“이 악랄한 놈!”얼마 지나지 않아, 엄 장로가 방에서 나왔다.그의 두 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그 안에는 봉구안과 소욱도 있었다.엄 장로의 얼굴에는 웃음과 눈물이 뒤섞여 있었다.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
열무신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안에서는 곧 비명이 터져 나왔다.“폐하! 저를 살려주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그러나 소욱은 문 밖에서 이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구학이 결코 무고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차라리 열무신이 직접 심문하는 편이 나았다.그 늙은이가 어떻게든 입을 열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같은 시각, 운산파.운산파 제자들은 산문을 지키며 장문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비무대회가 중단되자, 다른 문파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벽력당에서 비꼬듯 말했다.“운산파는 어쩜 이렇게 말썽이 많은가? 저 구 장문이 정말로 엄 장문을 살해했다면, 운산파는 비무대회에 나설 자격이 없는 것 아니오?”“맞소! 스승을 배신하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악한 문파의 행태와 다를 바 없소!”운산파 제자들은 즉시 반발했다.“우리 장문께선 그런 일을 하신 적 없소! 입 조심하시오!”운산파 부장문은 높은 자리에 앉아 단호하게 외쳤다.“진실은 곧 밝혀질 것이니, 함부로 추측하지 마시오!”그러나 다른 문파들은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이 사건이 언제 해결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우리더러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오? 차 부장문, 어떻게 생각하시오?”그들은 전진파의 차선아를 바라보았다.운산파를 제외하면, 비무대회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것은 전진파였으므로, 그녀 역시 속이 탈 것이라 여겼다.그러나 차선아는 태연한 얼굴로 비무대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그들이 전진파를 자극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다시 운산파를 향해 몰아세웠다.“결국 문제를 일으킨 건 운산파 아니오. 차라리 대회에서 물러나시오! 우리를 마냥 기다리게 할 이유가 없지 않소?”운산파 제자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기다리기 싫으면 떠나시오! 우리 운산파는 붙잡지 않소!”“너희들…!”운산파 제자들이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다른 문파들은 더욱 분노했다.그러나 운산파 내부에서도 불안감이 퍼지고 있었다.문하 대제자가 부장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