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신은 느긋한 태도로 차를 따랐다.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저는 홍련초가 어디에서 자라는지 알아내고, 그곳에서 놈들을 기다릴 생각이었습니다.”“비록 어리석은 방법일지라도, 굳이 따지지는 마십시오.”그는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소탁과 열무신의 솔직한 증언을 통해, 봉구안은 홍련초라는 중요한 단서를 얻게 되었다.그녀는 곧장 물었다.“남제의 다른 지역에서는 홍련초가 자라는 곳이 없습니까?”이번에도 두 사람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동시에 답했다.“없습니다.”소욱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만약 홍련초가 약쟁이의 독을 만드는 필수 재료라면, 그 독을 만들어 온 배후 세력은 절대 죽산진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하지만 소탁과 열무신은 한참을 이곳에서 지켜봤음에도, 단 한 번도 적을 잡아내지 못했다.이건 분명 이상했다.그는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정말로, 홍련초가 필수 재료라는 것이 확실하느냐?”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머뭇거렸다.열무신은 찻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 마셨다.그의 짙은 속눈썹이 검은 눈동자를 가렸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필수인지,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그 말이 떨어지자, 객잔 안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소욱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그리고 문득, 열무신에게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그는 그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바라보았다.‘이 느낌은…?’그런데, 열무신도 마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폐하, 황후마마도 계신데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시면 어찌합니까?”봉구안은 순간, 소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소욱은 흠칫하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그 순간…“!”그의 동공이 급격히 좁아졌다.그는 굳은 얼굴로 봉구안을 향해 저음으로 말했다.“굳이 동방세를 부를 필요 없겠다.”“내가 그때
소욱이 나타나자, 열무신과 봉구안은 그제야 겨우 언쟁을 멈췄다.“대체 무슨 일로 다투고 있는 것이냐?”소욱은 단호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태도에는 묘한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열무신은 입꼬리를 비틀며 피식 웃었다.“별거 아닙니다. 오랜만에 회포를 푼 것뿐이죠. 그렇죠?”그가 하는 말에 좋은 뜻이 담겨 있을 리 없었다. 봉구안은 굳이 반응하지 않고 넘기기로 했다.“네, 그냥 오랜만에 이야기 나눈 것뿐입니다.”소욱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내 귀가 먹은 줄 아나? 다 들었건만...’열무신의 말투를 보아하니, 봉구안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다.아마도 이 사건이 자신과 관련된 것이 밝혀질까 걱정하는 것이겠지.그런데 뜬금없이 약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또 무슨 의도란 말인가?소욱은 속으로 의문을 품었으나, 당장 따지지는 않았다.그때 동방세가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폐하를 뵙습니다.”소욱은 한 손을 들어 가볍게 제지하며 옷자락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았다.“과인은 미복으로 순찰 중이니, 형식적인 예는 필요 없다.”봉구안도 자연스럽게 따라 앉았다.소욱은 무심한 듯 말했다.“먼저 식사부터 하자. 곧 홍련초를 보러 가야 하니.”열무신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지만, 봉구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봉구안은 그의 속마음을 읽고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말했다.“이 사건… 저는 끝까지 파헤칠 겁니다.”열무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그러십시오. 마마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그는 젓가락을 들어 탁자에 맞추고는, 거침없이 가장 좋은 고기 한 점을 집어 들었다.그 모습을 본 동방세의 웃음 띤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마치 보이지 않는 칼날이 스쳐 가는 듯한 분위기였다.“먹성이 꽤나 좋군.”열무신은 무심한 듯 등을 기대며 앉았다.“어릴 때부터 눈이 혹사당한 거 아니시오? 눈을 제대로 뜨고 봐야 반찬이 더 잘 보이지 않겠소?”“내 돌아가면 자네에게 침 몇 번 놔주겠소. 그럼 아마 좀 나아
봉구안이 그 소녀에게 당부했다.“홍련초는 극독이니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곧 조정에서 금령을 내릴 것이니 그렇게 알거라.”소녀는 홍련초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그 말을 따를 생각이었다.“소녀, 알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삼촌들과 함께 전하겠습니다.”소녀가 보내진 뒤, 열무신이 웃으며 봉구안을 향해 말했다.“마마께서는 언제부터 남을 속이고 꼬드기는 수법을 배우셨습니까?”봉구안은 솔직히 말했다.“악쟁이를 상대할 땐 비상한 수단도 써야 합니다.”열무신과 소탁이 사용한 방식은 마치 나무 그늘 아래에서 토끼를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해서는 배후의 자들을 밝혀낼 수 없었다. 그들의 행동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이 죽산진은 엉킨 실타래 같아, 처음 온 이들이 무턱대고 뒤지기만 해서는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그때 동방세가 식사를 마치고 눈빛이 맑아지며 말했다.“홍련초가 정말 필수적이라면, 그들은 반드시 움직일 것이오. 내가 힘을 조금이라도 보태겠소.”열무신이 냉소하며 말했다.“또 하나의 겁 없는 자가 나왔군.”동방세는 크게 웃으며 대꾸했다.“강호의 자식이라면 이미 생사를 초월한 자들이오. 무림맹의 정신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소.”봉구안이 돌아서며 그들에게 말했다.“계획이 있습니다.”그녀가 입을 떼자, 소탁은 대강 짐작한 듯 말했다.“마마께서 저를 미끼로 쓰실 생각이십니까?”봉구안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어제 산속 동굴에서, 그들은 폐하를 죽이려 했습니다. 폐하께서 홍련초의 경작을 금지한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들의 이익이 손해를 볼 걸 알고 다시 움직일 것입니다. 금령이 내려지면 되돌릴 수 없으니 그들은 더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진한길이 바로 반대했다.“안 됩니다, 마마. 너무 위험합니다. 만약에…”소탁이 손짓으로 진한길을 막고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계속 말씀하십시오.”봉구안은 천천히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우리의 움직임은 이미 감시당하고 있으니, 숨으려 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 합니다.
봉구안이 열무신을 바라보는 표정은 몹시 냉랭했다.“각자 알아서 하자더니, 무슨 일로 다시 오셨습니까, 사형.”열무신은 방으로 다시 들어오며 유쾌하게 웃었다.“방금 그건 농담이었습니다, 마마. 마마께서는 도량이 넓으시니 저 같은 소인을 탓하지 않으시겠지요.”봉구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방법이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열무신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켰다가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우리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마마께서 제게 마음을 주시고 폐하를 떠난다. 이에 실망한 폐하께서 황궁으로 돌아가신다... 이런 구도라면 어떻겠습니까?”소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어릴 적 친구?”열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습니다, 폐하. 황후께서 어릴 적 친구인 저를 택하시기 위해 폐하를 떠난다는 설정이지요. 그래서 폐하께서 슬픔에 잠겨 황궁으로 돌아가신다… 이런 흐름으로 이어가는 건 어떻겠습니까?”“한 폭의 연극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소욱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봉구안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한 후, 단호히 말했다.“그 방법은 효과가 없을 것 같군요.”봉구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덧붙였다.“차라리 동방세를 선택하겠습니다.”동방세는 의아해하며 물었다.“네?”'왜 하필이면 '차라리'를 붙여서...'봉구안은 일어나더니 결단의 목소리로 말했다.“저들은 바보가 아니니 쉽게 속지 않을 것입니다.”무엇보다도 그녀는 소욱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다.소욱은 이미 소심한 사람이었다.설령 연극이라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그녀가 다른 사람과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또한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수 없었다.자신이 모습을 드러내면 서여국에서 봉장미가 자신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따라서 열무신의 계획은 적합하지 않았다.소욱은 마음을 놓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봉구안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걱정했었다.열무신은 아쉬운 듯 어깨를 으쓱
서여국 궁 안에, 근위병들이 이미 호원아의 사람들로 교체되었다.호원아는 선제의 신임을 받던 인물로 지금은 보정 대신 중 한 명이었다.그녀는 최근 궁에서 직접 경계를 서며 비어 있는 황제의 침전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안했다.그런데 오늘, 새 황제가 드디어 무사히 도착했다.궁문 앞에서 호원아는 근위병들을 이끌고 성가를 맞이했으며, 봉 부인과와 오양련이 좌우에 서 있었다.마차가 멈추자 송려가 먼저 내려왔고 곧이어 가마발을 열고 봉장미를 부축해 마차에서 내렸다.호원아는 그녀를 직접 보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쌍둥이 자매라는 이야기를 미리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봉장미와 봉구안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사실, 봉장미는 특히나 노력하고 있었다.언니인 봉구안을 대신하기 위해 그녀는 길 내내 언니의 행동과 말투를 따라 연습했다.그저 사람들이 앞에서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미천한 신하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호원아는 즉시 절을 올렸다.봉장미는 급히 입을 열었다.“예를 갖출 필요 없다. 어서 일어나거라.”언니가 서여국의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해준 덕분에, 그녀는 눈앞의 이 기품 있는 장군이 호원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봉장미는 다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봉 부인은 눈물을 머금고 그녀를 응시했다.“어머니.”봉 부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옆에 있던 오양련이 앞으로 나섰다.이미 나이가 들어 지팡이를 짚어야 할 만큼 쇠약해 보였지만, 그녀는 말했다.“폐하,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말을 하며 송려를 바라보았다.“이분이 폐하께서 서신에서 언급한 송 공자이신가요?”송려는 오양련에게 가볍게 예를 올렸다.오양련의 눈빛은 자애로우면서도 날카로워, 송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이 준수한 외모라니, 요염한 소생과는 다르군요. 황부의 자격은 충분하겠습니다.”송려는 약간 굳은 미소를 지었다.서여국에 들어온 그는 다소 불편했다.이곳의 여자들은 남자를 볼 때마다 평가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곤 했다.얼마 전, 그가 마차에서
생포된 자는 독약을 삼키거나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턱이 빠져 있었다. 호위들은 그의 두 팔을 꽁꽁 묶은 채, 뒤에서 무릎을 걷어차 땅바닥에 꿇렸다. 그의 얼굴에는 칼자국이 한쪽 뺨을 가로질렀고, 피가 여전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빛은 마치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무표정하게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봉구안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목숨을 내던지고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로, 보통의 방법으로는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없었다. 그녀가 어떤 수를 써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열무신이 갑자기 방의 들보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얼굴로 하품을 하며 말했다. “제가 심문하겠습니다.” 봉구안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사형께서요?” 열무신은 자객의 턱을 들어올리며 그와 눈을 맞춘 채, 봉구안에게 반문했다. “왜, 못 믿으시겠습니까?” “네. 못 믿겠습니다.” 봉구안은 단호하게 말했다. 열무신은 코웃음을 치며 자객의 턱을 놓고, 한쪽 눈썹을 들어 봉구안을 바라보았다. “너무 솔직하시군요. 그래도 저흰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지 않습니까. 참 제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다.” 소욱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 자… 도무지 겉잡을 수가 없군.’ 그는 과거 맹건이 왜 이 사람과 봉구안을 엮으려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봉구안은 열무신을 보며 말했다. “사형께서 맡으십시오. 다만, 누군가는 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녀는 열무신 혼자만 자객을 심문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열무신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순순히 응했다. “좋습니다. 굳이 장소를 옮길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약에 취해 아무것도 듣지 못하니, 이곳에서 바로 시작하시죠.”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갑자기 상어 이빨처럼 생긴 역날이 달린 단검을 꺼내 자객의 허벅지 바깥쪽을 강하게 찔렀다. 자객은 대단히 강인한지 소리 한 번 내지 않았고, 눈살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하지만 열무신이 단검을 천천
봉구안 일행이 나간 후, 열무신의 심문 방식은 실로 상상을 초월했다. 보통 사람은 도저히 직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동방세조차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방금 전 먹은 산해진미가 다시 역류할 것만 같았다.그는 옆에 있던 진한길을 흘긋 돌아보았다. 진한길은 흔들림 없는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역시 폐하 곁에서 오랫동안 호위를 맡아온 사람이라 다르군’ 하고 속으로 칭찬하는 순간이었다.갑자기 진한길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벽 구석으로 몸을 숙였다.“우웩…”동방세는 생각했다. '역시 어전 호위도 별수 없구나.'곧이어 그도 황급히 다른 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기고는 고개를 숙여 거칠게 토해내기 시작했다.봉구안은 옆방에 있었지만, 자객의 비명 사이로 들리는 심한 구토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누가 저렇게 토하는 거지?'반 시진이 지나자 옆방의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똑똑.진한길이 다가와 방문을 두드렸다.“폐하, 자백을 얻어냈습니다.”문을 열고 들어온 그의 얼굴은 마치 백지처럼 창백했고, 입술마저 핏기 하나 없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오백은 옆에서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 방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열무신이 나오면서 바로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던진 말 한마디는 이러했다.“안 보는 게 좋아. 봤다간 앞으로 며칠은 밥맛을 잃을 테니까.”동방세는 열렬히 공감하며 복도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멍하니 응시했다. 평소 여유롭던 그의 얼굴에 이토록 영혼이 빠진 듯한 표정이 드러난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그때 열무신이 봉구안에게 입을 열었다.“자객의 자백에 따르면, 그들은 운산파 소속이라 합니다.”봉구안의 눈빛이 깊어졌다.운산파.강호에서 꽤 이름이 난 문파다. 그들마저도 이번 약쟁이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여전히 넋이 나가 있던 동방세의 등 뒤로 봉구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한가한가 보오?”동방세는 놀라서 얼른 정신을 차리고 돌아봤다.“나더러 말한 것이오?”그는 사실 봉구안의 명을
죽산진에서 일반 백성들조차 황제의 초상화를 얻어 가졌던 걸 보면, 황제의 미행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듯했다.강주에서 신분이 들킬 것을 우려한 봉구안은 소욱의 얼굴에 무시무시한 가짜 흉터를 만들었고, 처음 보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녀 자신도 반쪽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써 알아볼 수 없게 했다.그러나 성문에서 봉 대인의 눈은 날카로웠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딸이었다. 게다가 그는 일찍이 황제의 미행 소식을 듣고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성문을 지나는 외지인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봉구안과 소욱이 나타나자 그는 금세 낯익음을 느꼈다. 하지만 즉시 달려가 인사를 올리진 않았다. 연기를 할 거라면 끝까지 완벽히 해야 했다. 그도 하루빨리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봉 대인의 모습을 본 소욱이 작은 목소리로 봉구안에게 말했다.“그대의 부친이 예전과는 사뭇 다른 듯하구려.”봉구안은 담담히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일단 성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두 사람이 떠난 뒤 봉 대인은 바로 수하를 불러 그들의 뒤를 쫓게 했다. 그리고 다시 인자한 미소로 백성들에게 죽을 나눠주었다.“어르신 천천히 드시지요! 모두 드립니다. 다들 나눠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백성들은 봉 대인에게 감사해하며 칭송했다.“봉 대인께선 정말 자애로우신 훌륭한 분입니다! 황후마마의 아버님이자 폐하의 장인이시니 역시 다르십니다!”소식을 재빠르게 들은 몇몇은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봉 대인, 혼인을 다시 하신다 들었습니다만 제가 아는 중매쟁이가 있는데 새 부인을 소개해 드릴까요?”“저희 집 여동생도 참 괜찮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아직 혼인도 안 했고 스무 살입니다. 대인처럼 연배가 있는 분을 좋아하는데...”“잠깐만요! 저도 있잖아요. 봉 대인, 저 같은 사람도 괜찮지 않으신가요?”봉 대인은 정신이 없었고, 참견하는 사람들을 야단치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미소를 유지했다. 지금은 분노를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황성으로 돌아가려면 참아야 했다. 하지만
방 안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이는 운산파 장문 구학이 아니라, 그의 자리를 대신한 엄 장로였다.장막을 바라보는 눈빛은 냉기마저 서려 있었고, 그의 머릿속엔 세상을 먼저 떠난 아버지의 모습만이 맴돌았다.이불을 움켜쥔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고, 눈엔 증오가 고였다.부친을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었다.하지만 복수만 좇다간, 남겨진 것을 모두 잃게 될 터였다.운산파를 지키는 것 또한, 그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다.모든 비극의 시작은 사람을 약인으로 만들어 팔아넘긴 자들. 그들이 운산파를 더럽혔다.그 뿌리를 반드시 끊어내리라.그는 자신의 손으로 끝장을 낼 것이라 다짐하였다.……밤은 깊어졌다.운산파에 머무는 외부 문파 제자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혹시라도 운산파 측이 음식을 통해 무언가 꾸민 건 아닐까.그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전진파는 하나의 방에 모여 있었고, 그 옆 방엔 벽력당 제자들이 자리했다.정원아의 죽음으로 침통해 있던 그들은 이 와중에 코 고는 소리까지 들려오자, 마음이 더 뒤숭숭해졌다.“부장문님… 비무대회, 계속 나가야 하나요?”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 말은, 결국 포기를 암시하는 질문이었다.차선아는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내공을 다스리고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일… 하산한다.”방민이 벌떡 일어섰다.“부장문님! 두 경기만 더 이기면 결승이에요! 지금 포기하면, 그간 쌓아온 모든 걸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겁니다!”차선아는 조용하면서도 슬픔이 배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 강호는… 편안하지 않아. 원아는 이미 죽었다.”“더는, 아무도 잃고 싶지 않구나.”운산파에 벌어진 일은 소환을 움직였고, 그것은 곧 조정이 직접 나섰다는 뜻이었다.강호와 조정은 본래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으나… 이번엔 그 선이 무너졌다.운산파가 저지른 일이, 그만큼 무거운 것이었다.이 상황에서 운산파에 머무른다는 건, 전진파도 위험에 휘말릴 수 있다는
봉구안의 느닷없는 한마디에 모두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소욱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고, 동방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닭이…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화로 옆에서 막 비둘기를 집어 들려던 강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급히 손에 들린 걸 들어 보이며 정정했다.“아니, 말했잖소! 이건 닭이 아니라 비둘기라 하지 않았소?”“그것도 제일 비싼 ‘비천비’라오!”“설마… 진짜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 혹시… 독이라도 들어간 아니겠지?”강림은 당황한 얼굴로 비둘기를 얼른 내려놓았다.봉구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건 괜찮소. 자네 비둘기 말고… 내가 말한 건 죽산진의 닭이었소.”그녀는 다른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약인독에 꼭 들어가는 약초 중 하나, 홍련초를 다들 기억하시오?”열무신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당연히 기억합니다. 그걸 조사하려고 죽산진에 사람도 남겨뒀는데…”“잠깐, 마마의 말씀은 혹시…”그는 말을 멈췄다.이미 무언가 감을 잡은 듯했다.동방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그 말인즉, 지금까지 우린 누가 홍련초를 사 갔는지 뒤쫓고 있었지만, 사실 그 약초 자체가 아니라, 그걸 먹고 자란 닭이 진짜 목표였다는 거로군.”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정확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소. 확인이 필요하겠지.”애초에 그녀도 이런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강림이 기르던 ‘비천비’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죽산진의 닭들이 떠올랐다.비둘기가 특별한 먹이를 통해 효능을 갖게 된 것처럼, 홍련초를 먹은 닭도 무언가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었다.소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당장 소탁에게 전하게. 죽산진에서 유통된 닭들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는지 전부 조사하라고.”“알겠습니다.” 봉구안이 짧게 대답했다.이 와중에 여전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는 단 한 명… 강림뿐이었다.그는 두리번거리며 말없이 모두를 쳐다봤다.“…도대체 무슨 소리오? 홍련초가 뭐고, 닭은 왜
소욱은 상자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도대체 구안이 준비한 선물이란 게 뭘까.비단으로 감싼 상자를 열자, 안에는 옥패 하나가 곱게 들어 있었다.투명하게 빛나는 그 옥패는 희고 맑았고, 묘하게도 그의 기품과 잘 어울렸다.황제의 자리에서 진귀한 보물쯤은 셀 수 없이 봐왔지만… 이건 달랐다. 봉구안이 직접 고른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더없이 소중했다.그녀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시간이 좀 촉박했어요. 이 정도밖에 못 구했네요.”소욱은 아무 말 없이 옥패를 목에 걸었다.곧이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그래도 내 탄신일을 잊지 않았구나. 고맙다.”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그 정도로 기억력 나쁘진 않아요.”소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런 정색스러운 대답 말고, 자기가 듣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그냥 자신이라서, 자신의 탄신일이라서 기억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그는 그녀의 어깨를 슬쩍 끌어안았다.똑, 똑.하필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폐하, 강림이 돌아왔습니다!”……원래 강림은 상단을 이끌고 강호를 떠돌고 있었지만, 강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가만있을 수 없었다.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달려왔고, 마침내 때를 맞춘 셈이다.“휴, 아직 안 떠났군!”강림은 선홍색 비단 도포를 입고 자줏빛 금관을 썼다. 허리에는 값비싼 옥이 매달려 있고, 발에는 자수가 놓인 검은 장화를 신었다.걸음마다 은은한 향과 함께 사치가 묻어나는 모습이었다.동방세는 그와 익숙한 사이인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강주 행은 자네의 덕을 많이 봤네. 이 객잔을 쓸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받았네.”강림은 손을 휘휘 저으며 쿡 웃었다.“뭘 그런 걸 갖고 그래. 형제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소? 아, 폐하께서도 계시다던데?”그는 시선을 넘겨 방 안쪽을 바라보았다.봉구안 곁에 앉은 소욱을 발견하자, 급히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강림,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뭐라고요? 가짜라고요?”문을 지키던 제자는 크게 놀라 얼굴이 새파래졌다.관리가 가짜라면, 그럼 장문님은? 장문님이 지금 위험하다는 것이 아닌가!그들은 급히 이 사실을 부장문에게 보고했다.한편, 부장문은 각 문파 인사들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장문님께서는 곧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무술 대회도 예정대로 진행될 것입니다…”“부장문님!”한 제자가 급히 뛰어왔다.부장문은 사정을 듣자마자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가짜라니?그들이 가짜 관리였단 말인가!그는 즉시 정예 제자들을 소집해 추격을 지시했다.그러나, 오백과 은칠은 이미 말을 타고 먼 곳으로 도망친 후였다.……열무신의 혹독한 심문 끝에, 결국 비밀이 밝혀졌다.구학이 마침내 자백했다.자신이 직접 사부인 엄청송을 죽였다고…이 소식을 들은 엄 장로는 분노에 차 방으로 뛰어들었다.이미 심한 고문을 당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구학이었지만, 엄 장로는 여전히 분을 삭일 수 없었다.그는 구학의 목을 움켜쥐고 외쳤다.“왜! 왜 아버지를 죽이셨습니까! 그분은 사형의 스승이자, 사형을 친아들처럼 길러주신 분이셨습니다! 어찌 양심이 이리도 다 썩어 문드러질 수 있냐 말입니다!”구학은 이미 이가 여러 개 빠져, 말할 때마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그러면서도 힘겹게 웃었다.“그야… 스승님이 멍청했기 때문다.”“그 분은 단순히 병에 걸렸을 뿐이었다. 치료하면 나을 수 있었지...”“하지만 그 분께서 약쟁이와 인신매매 사건을 알게 되었다. 이를 관청에 고발하려 했고…”“게다가 내게 준 장문 자리까지 빼앗으려 했어… 난… 난 스승님을 없앨 수밖에 없었다…”엄 장로의 이마에는 핏줄이 튀어나왔다.“이 악랄한 놈!”얼마 지나지 않아, 엄 장로가 방에서 나왔다.그의 두 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그 안에는 봉구안과 소욱도 있었다.엄 장로의 얼굴에는 웃음과 눈물이 뒤섞여 있었다.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
열무신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안에서는 곧 비명이 터져 나왔다.“폐하! 저를 살려주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그러나 소욱은 문 밖에서 이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구학이 결코 무고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차라리 열무신이 직접 심문하는 편이 나았다.그 늙은이가 어떻게든 입을 열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같은 시각, 운산파.운산파 제자들은 산문을 지키며 장문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비무대회가 중단되자, 다른 문파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벽력당에서 비꼬듯 말했다.“운산파는 어쩜 이렇게 말썽이 많은가? 저 구 장문이 정말로 엄 장문을 살해했다면, 운산파는 비무대회에 나설 자격이 없는 것 아니오?”“맞소! 스승을 배신하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악한 문파의 행태와 다를 바 없소!”운산파 제자들은 즉시 반발했다.“우리 장문께선 그런 일을 하신 적 없소! 입 조심하시오!”운산파 부장문은 높은 자리에 앉아 단호하게 외쳤다.“진실은 곧 밝혀질 것이니, 함부로 추측하지 마시오!”그러나 다른 문파들은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이 사건이 언제 해결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우리더러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오? 차 부장문, 어떻게 생각하시오?”그들은 전진파의 차선아를 바라보았다.운산파를 제외하면, 비무대회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것은 전진파였으므로, 그녀 역시 속이 탈 것이라 여겼다.그러나 차선아는 태연한 얼굴로 비무대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그들이 전진파를 자극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다시 운산파를 향해 몰아세웠다.“결국 문제를 일으킨 건 운산파 아니오. 차라리 대회에서 물러나시오! 우리를 마냥 기다리게 할 이유가 없지 않소?”운산파 제자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기다리기 싫으면 떠나시오! 우리 운산파는 붙잡지 않소!”“너희들…!”운산파 제자들이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다른 문파들은 더욱 분노했다.그러나 운산파 내부에서도 불안감이 퍼지고 있었다.문하 대제자가 부장문에
약쟁이 거래의 배후를 묻자, 구학은 당황한 듯 보였다.그는 소욱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모릅니다… 소인은 정말 모릅니다.”“그자들은 항상 밀서로만 연락했습니다. 밀서에 물건을 받으러 갈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고, 저희는 그 지시에 따라 물건을 받은 뒤 구매자에게 가져다주기만 했습니다.”“그들은 매번 신중히 움직였고, 접선 장소도 항상 달랐으며, 저희와는 단 한 번도 직접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폐하, 소인이 드리는 말씀은 모두 진실이며, 감히 속일 생각은 없습니다!”구학은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절을 올렸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는 듯, 그는 말을 이어갔다.“소인은 올해 나이가 예순셋입니다. 무릎 아래 자식 하나 없는데, 제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설령 재물과 명예를 얻는다 한들, 제가 얼마나 더 누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운산파의 천 명 넘는 제자들을 굶기지 않는 것뿐입니다!”소욱은 냉담하게 반응했다.“약쟁이에 관한 얘기를 계속하거라.”구학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털어놓았다.“소인은 약쟁이 거래가 그렇게 돈벌이가 좋다는 걸 보고, 생각했습니다. 약쟁이 한 명을 운송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면, 우리 운산파가 직접 약쟁이를 만들어 팔면 얼마나 큰돈을 벌겠는가 하고요.”그는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아까 짐작한 게 맞습니다. 동쪽 별채에 있던 그 '단약'들은 사실 약쟁이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수년간 실패했고, 약쟁이를 만드는 데 참고할 생각으로 약쟁이 하나를 빼돌렸다가 그자들에게 발각돼 제자 몇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구학은 제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아쉬운 기색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약쟁이 제조가 성공하지 못한 것이었다.봉구안이 차갑게 물었다.“무고한 이들을 납치한 것도 약쟁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느냐?”구학은 싸늘한 질문에 더듬지 않고 대답했다.“맞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골라 약쟁이를 만들기 위해 잡아
구학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 앞에서 가면을 쓴 이들을 찬찬히 살폈다.이내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철통같이 방비했다고 자부했건만, 결국은 이 지경이 되다니.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고도 자신을 구하러 오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결말이 다가올지 뻔히 보이는 듯했다.황제의 손에 떨어지고 만 이상, 자신에게 더 이상 희망이란 없었다.열무신이 손에 든 단도를 툭툭 튕기며 말했다.“모두 나가시오.”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앞둔 늑대처럼 구학을 응시했고, 바라보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사람들이 막 방을 나서려는 찰나, 구학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황제 폐하 좀 만나게 해주시오!”그는 이를 꽉 깨물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폐하가 아니고서는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오!”열무신이 돌아서서 봉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어찌할까요?”봉구안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 이자가 스스로 자백하겠다면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소욱을 방 안으로 들였다.소욱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이들은 나가도, 그녀만큼은 반드시 남아야 했다.열무신은 나가기 전 봉구안에게 당부했다.“우린 밖에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세요.”“네.” 봉구안은 그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문이 닫히자 구학은 소욱을 빤히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정말……폐하이십니까?”소욱은 가면을 벗고 본래 모습을 드러냈다.그의 얼굴을 확인한 구학은 목구멍이 턱 막힌 듯 침을 삼켰다.“소인… 폐하를 뵙습니다!”구학은 아까의 당당함을 온데간데없이 잃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을 올렸다.봉구안은 언제든 돌발 상황이 생길 것을 대비하여 은침 하나를 쥐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운산파의 목적이 줄곧 황제를 암살하고 약쟁이 사건을 덮으려 했던 만큼, 방심할 수 없었다.소욱은 차갑게 구학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무엇을 말하려는 것이냐?”구학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구학은 관아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운산파 장문인 자신이 마치 죄인처럼 끌려가게 될 줄이야.그는 부장문에게 당부했다.“내가 돌아올 때까지 문파의 모든 일을 자네가 맡아 처리하게. 부디 신중히 행동하도록 하게.”부장문은 진중히 고개를 숙였다.“염려 마십시오, 장문!”관아 사람들은 구학뿐 아니라 엄 장로와 봉구안까지 함께 끌고 갔다. 그리고 그 유골 또한 가져갔다.소욱이 운산파에 온 것은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실마리가 보이자 그는 관아 사람들을 따라 함께 이동했다.봉구안은 떠나기 전 바닥에 누운 정원아의 시신을 깊게 바라보았다.정원아는 자신 때문에 죽었다.그녀는 차선아에게 간곡히 부탁했다.“차 부장문, 정 사저를 부디 잘 안장해 주십시오.”차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운산파 밖 공터에는 여러 대의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구학은 의아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죄인을 호송하는데 언제부터 이런 호사가 있었던가?관아 사람들이 각자의 손에 쇠고랑을 채우며 말했다.“당신들은 모두 강호에서 이름난 인사들이니 특별히 비밀리에 심문을 받을 것이오. 백성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마차에 타시오! 가는 길에 소리치거나 소란을 피우면 망신당하는 건 당신들이오!”구학은 떳떳한 척하며 제일 먼저 마차에 올랐다. 마치 이러면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할 수 있는 듯이 말이다.봉구안과 소욱은 한 마차에 타고 침묵 속에서 어두운 눈빛을 주고받았다.관아 사람들은 이들을 산 아래로 호송해 관아 쪽으로 향했다.한참 길을 가던 중 구학은 갑자기 몸이 몹시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이상함을 감지한 그는 자신을 호송하는 두 명의 관아 사람을 바라보았다.“너희들…”관아 사람 중 하나가 그를 보며 냉소를 지었다.“노인네, 눈치는 빠르구나.”말을 마친 관아 사람이 순식간에 구학의 목덜미를 강타했다.구학은 쇠고랑을 찬 상태라 저항이 어려웠고, 그 약간의 미향까지 더해지니 그대로 의식
엄 장로는 싸늘한 눈빛으로 높은 자리에 앉은 구학을 바라보았다.“장문, 제 허락 없이 동쪽 별채에 들어간 건 저의 잘못입니다.”“운산파의 규율대로 이 일에 대한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제 부친의 유골이 왜 동쪽 별채에 있는지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오백도 품에 안긴 유골을 들며 당당히 턱을 들었다.“옳습니다! 남의 아버지 유골을 이런 꼴로 만든 이유부터 제대로 설명하란 말입니다!”구학은 답답한 얼굴로 엄 장로를 쳐다보았다.“이들이 의도적으로 나를 모함하는 게 보이지 않소?”“내가 뭘 설명하길 바라오? 난 이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소!”“조금 전 곳곳에서 불이 난 것도 필시 저들이 벌인 짓이오. 그 틈을 타 유골을 동쪽 별채로 옮긴 것이 분명하오! 저들에게 이용당한 것이오!”“우리는 수십 년을 함께한 사형제이지 않소? 내 사람됨을 아직 모르시오? 내가 어떻게 사부님을 해칠 수 있단 말이오!”엄 장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저는 오늘 그저 진실을 원할 뿐입니다.”봉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이미 모든 물증이 구 장문의 범행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구 장문께서 엄 장문의 자리를 탐내 스승을 살해했고, 혹은 스승에 대한 원한 때문에 시신을 훔쳐 별채에 숨겨두고 모욕한 것이겠죠.”“헛소리다! 감히 나를 욕먹이려고 하다니!” 구학은 봉구안의 말을 강하게 부정하며, 늙고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그는 다시 엄 장로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저 여인의 말을 믿고 나를 의심한단 말이오? 사부님은 나를 친아들처럼 여겨 모든 무공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셨고, 직접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장문직을 물려주셨소. 내가 어찌 그 은혜를 저버리는 죄를 범하겠소? 게다가 내가 무슨 이유로 사부님을 해친단 말이오?”주변 사람들도 동조했다.“맞소. 구 장문은 부족함이 없고, 사형 간의 정이 깊었는데 설마 그런 짓을 했겠소? 이건 분명 무슨 오해가 있는 거요.”“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전 장문님께서는 생전에 구학 장문을 가장 아끼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