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이가 저택의 대문이 거칠게 차여 열렸다.하인들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라 문 앞에 선 인물을 바라보았다.“너, 너는 누구냐!”봉구안은 한 손으로 원가교를 끌고, 다른 손으로 옷자락을 정리하며 천천히 발을 거두었다.그녀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말이 필요 없었다.그녀가 손짓을 하자, 뒤에 대기하던 관군들이 일제히 들이닥쳤다.이 가의 하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어서 대인께 알리거라!”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원가교는 숨이 턱 막혔다.그녀는 봉구안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간절하게 외쳤다.“마마, 제 아이는…!”봉구안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걱정 마라. 아이는 안전할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오백이 아이를 안은 채 사람들 사이를 뚫고 다가왔다.“마마, 아이가 참 순합니다. 낯선 제 품에서도 울지도 않고 얌전합니다.”원가교는 급히 달려와 아이를 품에 안았다.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아기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봉구안에게 감사를 표했다.“마마…! 정말 감사합니다! 제 아이를 구해주셔서…!”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황후는 어떻게 자신의 처지를 알고 계셨던 걸까?그녀는 서방의 감시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그날 다과 자리에서도 완벽하게 감정을 감추었다.그런데도 황후는… 모든 걸 알아챘다.봉구안의 시선이 잠시 아이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아이의 목덜미에 선명한 손자국을 보고 눈빛을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너와 네 아이는 먼저 떠나거라.”그러나 원가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저는 마마 곁에 있겠습니다!”이가 저택은 온통 감시의 눈으로 가득했다.혼자서는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지금 이 순간, 그녀와 아이가 안전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황후의 곁뿐이었다.관군들이 이가 저택을 철저히 수색했으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바로 그때, 그녀의 낭군이 저택으로 돌
이 가 저택의 서재 밀실 안에는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그곳에는 숨을 쉬고 있는,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게다가 전부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었다.각자의 침상 위에 누운 모습은 얼핏 보면 시체 같았다.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보니, 희미하게나마 호흡이 있었다.봉구안은 즉시 의원을 불러 치료하게 했다.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한 가지 의심이 떠올랐다.과거 그녀는 장순의 어머니를 본 적이 있었다.그녀 역시 수년 동안 살아있는 시체와 같은 상태였다.그때 태의가 내린 진단은 약쟁이의 독 때문이었다.지금 밀실에 있는 여자들의 상태 역시 장순의 어머니와 매우 흡사했다.하지만 상성의 의원들은 약쟁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결국, 의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이 여성들에게 독이 퍼진 것은 분명하지만, 소인의 의술로는 어떤 독인지 밝혀낼 수 없습니다.”봉구안은 밀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붉은 비단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방 안에는 은은한 향이 퍼져 있었다.이곳은 단순히 사람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었다.그녀는 곧장 명령했다.“폐하, 저들과 관련된 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의원을 따로 불러 조사해봐야 할 듯 합니다.”소욱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이 밀실은 누가 봐도 단순한 창고가 아니었다.곧 산부인과의 명의가 불려왔다.봉구안은 남성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게 했다.소욱은 밀실을 나가기 전, 그녀의 손을 잡고 단단히 당부했다.“조심하가라.”얼마 지나지 않아, 의원의 검진이 끝났다.그녀는 얼굴이 굳어진 채 보고를 올렸다.“황후마마, 이 여성들은 모두 남성과 동침한 흔적이 있습니다.”“게다가 일부는 심하게 다친 상태입니다.”봉구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운 여성들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의원의 말을 정정했다.“동침이 아니라 겁탈인 듯합니다.”……대옥.봉구안은 체포된 자의 신원을 확인했다.그의 이름은 이원.이 가의 저택은 관저가 아닌, 그들의 개인 사유지
봉구안도 확신할 수 없었다.“이 가의 약쟁이는 이원의 아버지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사형과 이원이 교류가 있었던 만큼, 어쩌면 사형이 이 가문에 드나들다 무언가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추측일 뿐이었다.소욱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그 여자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이냐?”이원의 아버지 때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몇 년 이상은 지났다.봉구안 역시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진실이 밝혀져야만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다 그녀는 화제를 돌려 물었다.“정말 저와 함께 이 사건을 조사하시겠습니까?”“궁에선 폐하를 기다리고 있지 않나요?”소욱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나라에는 하루라도 군주가 없어선 안 된다.”“하지만 그것이 곧 군주가 궁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백성을 다스리려면, 그들의 삶을 직접 보아야 한다.”“내가 즉위한 이후, 미복으로 직접 민정을 살핀 적은 거의 없었지.”“하지만 이번 북행에서 부패한 관리들을 다수 적발했다. 이것만 봐도 미복 시찰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약쟁이 사건을 조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의 현실을 직접 보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일이다.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은 일이지 않겠느냐?”봉구안은 그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의 말을 듣다 보니, 문득 감탄이 나왔다.“폐하께서는 참 좋은 군주입니다.”소욱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스쳤다.칭찬을 들은 것이 기분 나쁘지 않은 듯했다.그는 겸손하게 답했다.“난 그저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야. 아직 진정한 ‘좋은 황제’가 되려면 멀었지.”“아니면 사람들이 날 ‘폭군’이라 부르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그리고, 난 네 앞에서만 좋은 모습을 보여줄 뿐이야. 다른 자들은 나의 이런 진심을 모를 것이다...”봉구안은 슬며시 웃었다.그녀는 서서히 다가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조용히 기대었다.……이원의 죄는 무거웠고, 법에 따라 처벌받았다.
보름 후.소욱은 봉구안을 데리고 죽산진에 도착했다.이곳은 과거 맹성주가 약쟁이의 거점을 조사했던 곳이자, 소욱이 황귀비를 구했던 곳이기도 했다.죽산진은 죽순으로 유명한 곳이었다.지금은 한겨울이라, 죽순 재배가 한창이었다.거리 곳곳에는 겨울 죽순을 파는 상인들이 줄지어 있었다.마침 봉구안에게도 이곳에 친한 지인이 있었다.그녀는 겸사겸사 그를 방문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굳이 소욱과 함께 갈 생각은 없었다.강호의 사내들은 대개 조정 사람들과 엮이는 걸 싫어했다.하물며 상대가 황제라면 더더욱.소욱은 그녀가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기에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원치 않는다고 해서, 그가 따라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결국, 봉구안이 먼저 발걸음을 떼자 소욱은 곧장 몰래 그녀를 뒤쫓았다.소욱은 진한길과 함께 봉구안을 따라 마을 외곽으로 갔다.그녀가 한 초가집에 들어서는 걸 보고, 소욱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진한길은 황제가 도둑 고양이처럼 숨어 있는 광경에 내심 황당했다.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폐하, 사실대로 마마께 얘기하심이 어떻겠습니까…?”그냥 황후께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소욱은 정색하며 말했다.“나는 황후의 안전이 걱정되어 따라온 것뿐이다.”진한길은 작게 중얼거렸다.“안전이 아니라… 황후 마마가 만나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신경 쓰시는 거겠죠.”그러나 그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소욱이 즉시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진한길은 등골이 서늘해지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폐… 폐하 송구합니다. 없던 걸로 해주십시오…!”그가 어찌하다 그 속내를 말해 버린 걸까!두 사람이 숨어 기다린 지 두 시진이 흘렀다.곧 봉구안이 초가집에서 나왔다.그녀와 함께 나온 사람은 하얀 수염이 길게 늘어진 노인이었다.노인은 다정하게 그녀를 마을 어귀까지 배웅했다.이 장면을 본 소욱은 살짝 안도했다.그 자는 젊은 사내가 아니다.또한, 어여쁜 여인도 아니다.그냥 노인일 뿐이었다.그는
소탁은 좋은 뜻으로 마을에 내려와 서당을 열었으나, 지금까지 받은 제자는 고작 한 명이었다.오늘도 학생을 받으려 돌아다녔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된 현실뿐이었다.그는 속으로 씁쓸함을 삼켰다.소욱은 남 일이면 한층 더 흥미로워지는 성격이었다.그는 봉구안을 보며 물었다.“대체 왜 사람들은 폐태자를 싫어하는 것이냐?”봉구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가을걷이가 한창 바쁜 시기에 사람들 자식들을 데려가 글을 가르친다나, 그건 그렇다 쳐도...삶은 계란을 미끼로 아이들을 유혹하는 통에 몇 번이나 유괴범으로 몰렸다고 합니다.”“서당에 보낸 글씨 연습용 종이와 그림들은 아이들이 이해도 못 한 채 불쏘시개로 써버렸고,그걸 보고 폐태자는 설교를 퍼부었죠.”“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제자가 한 명뿐인데 그나마도 배운 글자는 하나도 없고 살만 포동포동 쪘다더군요.”소탁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제발, 그만 말씀해 주십시오.”소욱은 소탁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어쨌든 우리 집안 사람인데 어찌 이 지경까지 망가질 수가 있단 말이냐.”“스승님! 제 닭다리는요!”그때, 통통한 아이 하나가 서당으로 뛰어들어왔다.“스승님! 배고파요! 오늘 닭다리는요?”순간, 모두의 시선이 소탁에게 집중되었다.소욱은 비웃듯 말했다.“제자들 밥이나 챙겨주는 스승이라니. 대체 원…”소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그때, 아이는 사람들을 보며 천진하게 물었다.“다들 우리 서당에 배우러 오신 거예요?”닭다리 경쟁자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소탁은 아이가 더 큰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서둘러 닭 한 마리를 쥐여 주었다.“오늘은 손님이 오셨으니, 수업은 없다. 닭은 줄 테니 어서 집으로 가거라.”“네, 스승님!”아이가 떠나자, 소탁은 한숨을 쉬며 닭장을 살폈다.‘또 한 마리 줄었군.’그는 하늘을 보며 한탄했다.소욱은 냉소적으로 말했다.“정말이지, 하루 스승이면 평생 아버지라는 말
봉구안의 차가운 눈빛 속에, 사형의 참혹한 죽음이 떠올랐다.직접 본 적은 없었다.하지만 스승의 이야기만으로도 머릿속에 그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그 참혹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는 천천히 돌아서며, 소욱을 바라보았다.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었다.“조심하는 것이 나쁠 것 없지 않겠습니까.”“무엇보다… 저는 더 이상 죄 없는 사람들을 이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사형이 남긴 마지막 경고는 분명했다.‘모든 걸 감당할 힘이 없다면, 불필요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라.’소욱은 그녀의 말을 듣고, 천천히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내 부인은 너무나도 마음이 여리구나.”목소리는 낮고도 부드러웠다.……객잔 안. 늦은 저녁.식사를 마친 후, 봉구안이 입을 열었다.“동방세가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그때 폐하께서 본 자의 얼굴을 묘사해 주십시오.”소욱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그가 본 것은 얼굴을 가린 남자일 뿐이었다.그러나 동방세라면, 대략적인 모습이라도 그려낼 수 있을 터였다.그런데 문득, 낮에 본 백발의 노인이 떠올랐다.소욱은 무심한 듯한 어조로 물었다.“그 노인, 허 씨라고 했던가. 대체 무슨 사람이기에 너와 인연이 있단 말이냐?”그는 반쯤 무덤에 들어간 듯한 노인이었다.언뜻 보아서는 평범했으며, 강호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봉구안은 솔직히 답했다.“그 분은 대장장이입니다. 강호를 떠돌던 시절, 무기를 만들기 위해 자주 찾아갔었죠.”“그 분께서 죽산진에 은거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으나, 이제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살짝 괴었다.“그렇군.”봉구안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저는 한때 약쟁이가 동산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지금으로선 그 뿌리가 남제에 있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지고 있습니다.”“전에 붙잡았던 상인이 제공한 정보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허나 장사꾼에게 있어 신뢰는 필수. 한 번 거래한 물건이 사라지면 반드시 다시 채워 넣으
쾅!갑자기 작동한 기계장치가 바닥을 갈라놓았다.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모두가 지하로 추락했다.오백은 끝까지 진한길을 붙잡고 있어 두 사람은 서로 얽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봉구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세우고 곧장 화절자를 꺼내 앞을 밝혔다.“폐하!”그녀는 즉시 소욱을 찾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괜찮으십니까?”소욱은 태연하게 말했다.“난 괜찮다.”그러나 그 순간…“그럴 수밖에. 제가 밑에 깔려 있었으니 말입니다.”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로 아래에서 소탁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봉구안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곧바로 주위를 살폈다.화절자의 빛이 모이자, 이곳이 어디인지 뚜렷이 드러났다.소욱은 벽면을 훑어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곳이 바로 약쟁이들의 본거지였다.”“예전에는 동굴 깊숙이 비밀 통로가 있어 그쪽으로만 접근할 수 있었지.”“하지만… 이곳에 또 다른 출입구가 있을 줄은 몰랐다.”과거 황실은 이곳을 완전히 파괴하라고 명령했다.그러나 여전히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약재를 보관하던 목제 선반들, 그리고 벽에 남겨진 검은 얼룩들.“폐하! 사람이 있습니다!”호위가 외쳤다.구석에는 검은 야행의를 입은 남자가 의식 없이 쓰러져 있었다.그의 팔에서 선홍색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얼굴은 창백했고, 숨이 희미했다.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이상 적일 수도 동료일 수도 있었다.소욱은 단호히 명령했다.“살려라.”그는 더 이상 그 남자를 신경 쓰지 않고, 봉구안과 함께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한편, 소탁은 부상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가지고 있던 금창약을 꺼내 그의 상처에 발라 주었다.……두 시진이 흘렀다.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이제 체력을 아껴야 할 때였다.봉구안은 바닥에 앉아 숨을 골랐다.소욱은 그녀의 옆에 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춥진 않느냐?”그녀는 체질상 한기에 약했다.평소에도 잠들 때면 늘 그를 꼭 껴안고서야 따뜻함을 유지할 수 있었
열무신은 심한 부상으로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소욱은 그를 앉히도록 명했다.호위들이 그를 부축해 자리에 앉히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폐하, 저는 맹 형님과 함께 약쟁이 사건을 추적하던 사람입니다.”“그러나 형님은 희생되었고, 저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죠… 그 후로도 계속 그놈들을 쫓았지만…”그는 숨을 고르며 핏빛 기침을 뱉었다.“놈들은 너무 깊숙이 숨어 있었습니다.”봉구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렇다면, 지금껏 찾은 단서도 거의 없다는 말입니까?”열무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소욱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렇다면, 이번에 다시 이곳을 찾은 이유는 무엇이냐?”열무신은 쓰린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새로운 단서를 찾을 수 없었기에,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 보려 했습니다.”“이틀 전, 이곳에 도착했는데 예상치 못한 함정에 걸려 추락하고 말았습니다.”“그나마 운 좋게 약간의 식량이 있어 굶어 죽지는 않았지만…”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낮게 말했다.“여기가 바로, 그날 맹 형님과 제가 헤어진 곳입니다.”“형님은 절 구하려다 적에게 잡혀갔습니다.”“저는… 저는 그날 가까스로 도망을 쳤죠.”“그때 제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다면, 형님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날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손이 떨립니다…”그의 목소리에는 후회와 고통이 가득했다.봉구안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형님을 죽인 배후를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우입니다.”“그러니 사형께서는 스스로를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맹성주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그는 생사의 기로에서도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사람이었다.열무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반드시 놈들을 찾아낼 것입니다.”그는 곧 주위를 둘러보며 덧붙였다.“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저희가 여기서 나가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소욱은 단호하게 말했다.“이곳 어딘가에 반드시 출구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비무대회가 열리는 날이라 운산파 제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부엌에서는 제자들이 점심 식사 준비로 분주했다.“혹시 내 족발 못 봤어? 방금 쪄서 솥 위에 올려놨는데 어디 갔지?” 한 제자가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족발을 찾고 있었다.다른 제자들은 자기 일로 정신이 없었다.“어디 다른 곳에 뒀겠지.” “넌 항상 뭘 그렇게 잘 잃어버리냐.” “앞마당으로 누가 가져갔을 수도 있지.”부엌 밖 담장 아래에서는 열무신이 족발을 손에 들고 뼈만 남기고 맛있게 뜯고 있었다. 그는 남은 뼈를 마당을 지키는 개에게 던져줬다.개가 뼈를 물고 달아나자 열무신은 즉시 담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땅에 내려선 그는 손에 묻은 기름을 풀잎에 쓱쓱 닦으며 경계하듯 주위를 살폈다.이곳은 운산파의 고위 제자들이 머무는 구역이며, 조금만 더 들어가면 장문의 처소가 있는 곳이었다.그런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아 그는 재빨리 나무 위로 몸을 날렸다.뜻밖에도 나무 위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오백이었다. 그는 열무신을 보자 히죽 웃으며 속삭였다.“이거 참 우연이군.”열무신은 아무 대꾸 없이 기름이 묻은 손을 오백의 옷에 쓱 닦았다.바로 그때 나무 아래를 지나던 운산파 제자들이 코를 킁킁거렸다.“어디서 좋은 냄새 나지 않아? 엄청 향긋한데!” “너 배고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부엌 근처라 냄새가 풍기나 보네.”그들이 지나간 뒤, 오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멀리 운산파 장문의 방을 가리켰다. 열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목적이 같았던 것이다.오백이 다시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여기서 망 볼 테니, 자네가 안으로 들어가시오.”한편, 봉구안은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눈치채고 몇 번이나 따돌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미행이 붙었으니 더는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결국 길을 잃은 척 운산파 제자 하나를 붙잡았다. “실례합니다만, 변소가 어디에 있습니까?”잠시 후 그녀는 다시 비무장
비무대회가 시작되기 전, 운산파의 부장문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오늘 운산파는 이 자리에서 강호의 여러 영웅호걸들을 모시고,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비무대회를 개최하여 무림의 패자를 가리고자 합니다. 최강자의 인도로 강호의 위세를 한층 더 떨치고자 하니, 여러분들의 많은 협조를 바랍니다!”“대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몇 마디 덧붙이겠습니다.”“비무의 규칙은 여러분 모두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느 문파든 먼저 15승을 거두면 승리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학문에 우열이 없고 무예에는 두 번째가 없다고 하지만, 오늘 대회는 어디까지나 친선 비무이니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승리를 얻기 위해 동료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설령 이긴다 해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옳소!” 군중들 사이에서 동조하는 소리가 들렸다.부장문은 군중을 둘러보며 다시 말했다.“더 이상 질문이 없다면, 지금부터 비무대회를 정식으로 시작하겠습니다!”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운산파의 장문인 구학이었다. 그의 이마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어 연로해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매섭고 날카로운 기운을 띠고 있었다.그때 한 제자가 장문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님, 현재까지는 수상한 인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구학은 별다른 반응 없이 입술만 가볍게 움직였다. “알겠다. 물러가라. 대회가 시작되었으니 산문을 닫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도록 하라.”“알겠습니다, 장문님!”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이미 들어올 사람은 모두 군중 속에 섞여 있다는 것을 말이다.봉구안과 소욱 외에도 열무신 일행은 작은 문파로 위장하여 운산파 내부를 몰래 탐색하는 중이었다.비무대 위에서는 모두 늦게 출전할수록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첫 번째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결국 운산파가 먼저 자기 문파 제자를 내보내며, ‘벽돌을 던져 옥을 이끌겠다’고 했다.그 상대는 벽력당의 제자였다.벽력당은 암기 사용에 능숙했으나, 이번엔
봉구안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가면 아래의 얼굴에도 약간의 변장을 더해 두었다.가면을 벗은 후에도 그녀는 당당했고,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지금 뭐 하는 짓이야!”전진파의 한 여제자가 부끄러움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치며 자기 몸에 함부로 손을 대던 운산파 제자를 밀쳐냈다.그러나 상대는 오히려 당당했다.“그건 내가 할 말이지! 당당하지 못하니까 제대로 검사를 못 받는 거 아냐?”“내가 뭐가 당당하지 못하단 거야? 분명히 네가 검사하는 척하면서 날 함부로 만졌잖아…!” 전진파의 여제자는 참을 수 없는 듯 항의했다.그러자 주변의 다른 운산파 제자들이 즉시 그녀에게 반박했다.“헛소리 마라! 우린 정당하게 신분 확인을 했을 뿐이야. 네가 마음에 찔리는 게 있으니 괜히 그러는 거겠지!”주변에 있던 다른 문파 사람들도 슬슬 모여들어 그녀들을 보며 수군거렸다.“전진파 여자들은 하나같이 고고한 척 하더니 결국은 남자들 관심 받고 싶은 거 아니야?”“그러게 말이야. 그냥 신분 검사하는 건데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몰라. 자기들이 그렇게 매력적인 줄 아나 봐!”“강호에 남녀가 따로 있나? 자기들이 속이 더러우니까 남들도 그런 줄 아는 거지. 남자 손 타기 싫으면 무림대회엔 뭐하러 나오나 몰라.”“그래 맞아, 무술 대결하면 당연히 신체 접촉은 불가피한데, 이런 여자들이랑은 싸우기도 싫다니까. 잘못하면 책임지라고 할지도 몰라, 하하!”운산파 제자들은 점점 더 우쭐해졌다.“잘 들었지? 신분 검사받기 싫으면 애초에 무림대회에 나오지 말고 절에나 들어가! 거기엔 남자 없으니까 말이야!”전진파 제자들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성미 급한 방민이 참지 못하고 나서려 하자, 차선아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제지했다. 일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순간, 그녀 옆에서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튀어나가 좀 전의 운산파 제자를 단숨에 발로 차버렸다.차선아는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봉구안임을 알 수 있었다. 늘 평온
강주 관리들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곧바로 운산파에도 전해졌다.운산파 정당 안.장문과 장로들이 심각한 얼굴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한 장로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장문에게 말했다. “장문, 서둘러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아무래도 황제가 강주에 온 것 같습니다.”다른 장로도 급히 덧붙였다. “저도 똑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황제의 장인이 최근 유독 부산을 떨고 있으니, 분명 황제가 강주에 머무는 것이 확실합니다.”운산파 장문은 수염이 희끗희끗한 육십 대 노인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죽산진 쪽 상황은 어떤가?”곧 누군가가 답했다. “아직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암살이 실패한 듯합니다.”장문이 싸늘하게 웃었다.“뻔하지 않느냐? 틀림없이 실패했겠지. 게다가 우리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것도 분명하다.” “아니면 그 황제 놈이 어찌 강주까지 직접 찾아왔겠느냐? 이건 분명히 우리 운산파를 겨냥한 거다!”모두가 근심스러운 눈길로 장문을 바라봤다. 장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지시했다. “제자 몇 명을 내려보내서 황제가 정말 강주에 왔는지 확실히 알아보도록 하고, 다른 이들을 시켜 뒷산의 물건들을 서둘러 처리해라. 나머지 제자들은 움직이지 말고 이틀 뒤 있을 비무대회 준비에만 집중하도록 하여라.”장로들이 즉시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장문.”……전진파.차선아는 명상을 하려 했으나,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눈을 뜨고 앞을 응시했다. 숨소리가 약간 거칠었다.어둠이 내린 후, 봉구안이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을 때 여제자 몇 명이 그녀를 에워쌌다. 새로 들어온 사매가 궁금했던 것이다.“요즘 같은 때 전진파에 들어오다니 신기하네!” “사매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왜 가면을 쓰고 있는 거죠? 같이 온 다른 사매는 하루 종일 안 보이던데… 어디에 계십니까?” “부장문님이랑 무슨 관계십니까? 어떻게 시험도 없이 바로 입문할 수 있었던 거죠?”쉴 새 없이 쏟
방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소욱은 비로소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변조하지 못해 지금껏 말을 못 하고 속만 끓이고 있었다.“그 부장문이라는 사람, 여전히 네게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구나.” 소욱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봉구안은 남녀의 연정 따위를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틀 뒤 열릴 무림대회였다.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면 운산파가 강호에서 가진 세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으니, 이 편이 훨씬 안전한 방법일 터였다.“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것이냐?” 소욱이 그녀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봉구안이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운산파의 실제 실력이 어떨지, 이번 비무대회에서 승산이 얼마나 될지 계산 중입니다.”소욱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고는 귀 가까이 대고 낮게 속삭였다. “내 생각엔 우리가 반드시 이길 것 같구나.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정말 이틀 내내 여기 전진파에 있어야 하는 것이냐?”봉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뿐이니 금세 지나갈 겁니다. 괜히 왔다 갔다 하다가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요.”소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나라의 황제인데 여장을 하고 이렇게 숨어있다니 조상들께 면목이 없구나. 나중에 제대로 보상해 줘야 한다. 알겠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진지하게 말했다. “밖에 있을 땐 행동을 조심하십시오.”한편, 정원아는 새로 온 제자들을 안내하고 나오다가 선배인 방민과 마주쳤다. 방민은 작년 비무대회에서 패한 이후 더욱 부지런히 무공을 닦고 있었다.방민이 정원아를 불러 세우며 물었다. “부장문께서 새 제자를 들였다던데, 그 사람들 자질은 좀 어떤 것 같으냐?”정원아가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도 참 급하십니다. 오늘 막 들어온 사람들의 자질을 제가 벌써 어떻게 알겠어요?”방민의 얼굴에 근심이 묻어났다. “급하지 않을 수가 없지. 이틀 뒤면 비무대회인데, 부장문께서 굳이 이때 새 제자를 받은
전진파의 부장문 차선아는 문을 등진 채 흰 옷을 입고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등은 가냘팠지만 결코 연약해 보이지 않았다.차선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맑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문패를 가져오너라.”제자는 그녀 앞으로 돌아가 두 손으로 방문패를 받들어 올렸다.방문패를 보는 순간, 차선아의 눈빛이 흔들렸다.소환? 소환이 직접 전진파에 왔단 말인가?아니면… 소환이 누군가에게 이 방문패를 주고, 그 사람이 전진파의 도움을 청하는 걸까?차선아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손님을 들여보내거라.”“예, 부장문.”제자가 막 나가려는데 차선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차선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얀 옷자락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올 터이니, 반 시진쯤 지난 후에 손님을 맞이하거라.”제자는 조금 의아했다. 부장문의 옷이 더럽지도 않은데 왜 지금 갈아입으려는 걸까?전진파는 모두 여성 제자들이었고, 일반 제자들은 열 명씩 단체로 거처를 썼지만, 장문과 부장문은 각각 독립된 방이 있었다.차선아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보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방을 나서려다 문득 구리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왜 이렇게 얼굴이 이렇게 초췌하지?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잤나? 안 돼.’‘혹시 소환이 온 거라면, 이런 모습으로 마주할 순 없어.’차선아는 방 안에 별다른 화장품이 없었기에 눈 밑의 푸른 기운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 어이가 없다는 듯 생각했다.‘내가 정말 정신이 나갔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소환이 온다 해도 내가 왜 이렇게 신경 써야 하는 거지?’‘그저 오랜 친구가 찾아온 것뿐인데. 너무 깊이 생각한 모양이야.’그 시각, 전진파 문 밖에서는 봉구안이 몇 번이나 소욱을 힐끗거렸다.그녀는 소욱을 바라볼 때마다 자꾸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소욱은 얼굴이 시퍼렇게 굳어 그녀 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어젯밤 봉구안의 안전을 걱정한 나머지 자기도 함께 전진파에 가
강림의 이 별장은 본래 강호의 벗들을 맞이하려고 사들인 곳이라 객실이 충분했다.봉구안 일행은 각자 방을 골라 휴식을 취했다.소욱은 봉구안과 방을 함께 쓰게 되었는데, 방에 들어서자 문을 닫고 곧바로 물었다.“전진파에는 무슨 일로 가려는 것이냐?”봉구안이 반쯤 농담조로 답했다.“‘옛 정인’을 만나 회포라도 풀까 합니다.”소욱은 그녀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고 가볍게 웃었다. 그는 팔을 뻗어 봉구안을 품에 끌어안고 얼굴을 맞댄 채 살며시 비볐다. 그 모습엔 황제의 위엄이라곤 조금도 없고, 오히려 평범한 낭군 같았다.“나는 소심한 사람이 아니다. 다만 네가 이번 일로 위험에 처하지 않을지 걱정될 뿐이지.”“방금 동방세 앞에서는 말을 아끼던데, 지금 우리 둘뿐이니 내게는 솔직히 말해줄 수 있지 않겠느냐?”봉구안은 그의 품에서 살짝 물러나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에 그려진 가짜 흉터를 어루만졌다. 그 손길엔 어딘가 애틋한 정이 묻어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전진파와 운산파는 서로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첫째는 두 문파가 결탁했는지 확인할 겸 정황을 살피고, 둘째는 차선아와 이번 일을 어떻게 대처할지 의논하려 합니다. 셋째로, 이번 무림대회가 운산파에서 열리니 우리가 전진파 제자로서 참가하면 자연스럽게 운산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차선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소욱은 여전히 찬성하지 않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만약 두 문파가 이미 결탁했다면, 네가 가는 순간 표적이 될 것이다. 전진파가 과연 너를 쉽게 보내주겠느냐?”봉구안은 고개를 저었다.“전진파 제자가 백여 명이 넘으니 모두를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차선아의 인품이라면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이 말을 들으니 소욱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예전에 강림의 무죄를 입증할 때도 그녀는 같은 말을 했었다. 강림과 차선아라면, 그녀는 그 강호의 친구들을 참으로 신뢰하고 있었다.소욱은 그녀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결심을 굳혔다.“
봉구안은 몸을 돌려 자신의 친아버지를 바라보았다.“어머니께 아버지의 뜻을 전해드리겠습니다.”“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당초에 아버지께서 저지른 잘못들…”“안다! 알아!” 봉 대인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그는 꽤나 흥분한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예전에 잘못한 게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내 탓이지!”“다만 네 어미가 날 용서해 주신다면, 앞으로 잘하마. 정말 잘하마…”봉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자기 아내에게 잘하겠다는 게, 대단한 약속이라도 되나요?”여자는 지아비를 내조하며 살림을 돌보는데, 남자는 단지 ‘잘해 줄게’ 한마디로 여자에게 감동을 주려 하다니.이런 공허한 말을 어찌 어머니께 그대로 전할 수 있단 말인가.“차라리 정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어머니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세요…”봉 대인은 이 말을 듣자마자 자존심이 불타오르는 듯했다.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며 반박했다.“지금 와서 무슨 그리 유치한 말을 하란 말이냐?”“그저 네 어미에게 내가 반성하고 있다는 것만 알리면 충분할 거야.”“게다가 내가 네 어미 없이 살 수 없다는 건 너의 생각일 뿐이지 않느냐. 오늘만 해도 중매를 서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단 말이다!”“네 어미처럼 사방으로 떠도는 사람은 오히려 이혼한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라. 난 단지 네 어미에게 체면을 세워주는 것 뿐이란 말이다!”“이제와 이혼이 흔한 세상이지만, 다시 시집갈 수 있는 여자는 대개 젊고 아름다우며 교양 있는 여자들이지. 네 어미처럼 나이 사십, 오십에다 별다른 혼수도 없는 사람은 어디서 그런 기회를 찾겠느냐…”봉구안은 도저히 더 들을 수 없었다.보아하니,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가 하는 말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었다.마치 그의 화해 제안이 어머니를 향한 동정이자 은사라도 되는 듯했다.봉구안은 봉 대인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충고했다.“지금 하신 모든 말씀을 어머니께 그대로 전할 겁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까지도요. 그러
죽산진에서 일반 백성들조차 황제의 초상화를 얻어 가졌던 걸 보면, 황제의 미행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듯했다.강주에서 신분이 들킬 것을 우려한 봉구안은 소욱의 얼굴에 무시무시한 가짜 흉터를 만들었고, 처음 보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녀 자신도 반쪽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써 알아볼 수 없게 했다.그러나 성문에서 봉 대인의 눈은 날카로웠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딸이었다. 게다가 그는 일찍이 황제의 미행 소식을 듣고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성문을 지나는 외지인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봉구안과 소욱이 나타나자 그는 금세 낯익음을 느꼈다. 하지만 즉시 달려가 인사를 올리진 않았다. 연기를 할 거라면 끝까지 완벽히 해야 했다. 그도 하루빨리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봉 대인의 모습을 본 소욱이 작은 목소리로 봉구안에게 말했다.“그대의 부친이 예전과는 사뭇 다른 듯하구려.”봉구안은 담담히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일단 성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두 사람이 떠난 뒤 봉 대인은 바로 수하를 불러 그들의 뒤를 쫓게 했다. 그리고 다시 인자한 미소로 백성들에게 죽을 나눠주었다.“어르신 천천히 드시지요! 모두 드립니다. 다들 나눠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백성들은 봉 대인에게 감사해하며 칭송했다.“봉 대인께선 정말 자애로우신 훌륭한 분입니다! 황후마마의 아버님이자 폐하의 장인이시니 역시 다르십니다!”소식을 재빠르게 들은 몇몇은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봉 대인, 혼인을 다시 하신다 들었습니다만 제가 아는 중매쟁이가 있는데 새 부인을 소개해 드릴까요?”“저희 집 여동생도 참 괜찮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아직 혼인도 안 했고 스무 살입니다. 대인처럼 연배가 있는 분을 좋아하는데...”“잠깐만요! 저도 있잖아요. 봉 대인, 저 같은 사람도 괜찮지 않으신가요?”봉 대인은 정신이 없었고, 참견하는 사람들을 야단치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미소를 유지했다. 지금은 분노를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황성으로 돌아가려면 참아야 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