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도 확신할 수 없었다.“이 가의 약쟁이는 이원의 아버지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사형과 이원이 교류가 있었던 만큼, 어쩌면 사형이 이 가문에 드나들다 무언가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추측일 뿐이었다.소욱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그 여자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이냐?”이원의 아버지 때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몇 년 이상은 지났다.봉구안 역시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진실이 밝혀져야만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다 그녀는 화제를 돌려 물었다.“정말 저와 함께 이 사건을 조사하시겠습니까?”“궁에선 폐하를 기다리고 있지 않나요?”소욱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나라에는 하루라도 군주가 없어선 안 된다.”“하지만 그것이 곧 군주가 궁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백성을 다스리려면, 그들의 삶을 직접 보아야 한다.”“내가 즉위한 이후, 미복으로 직접 민정을 살핀 적은 거의 없었지.”“하지만 이번 북행에서 부패한 관리들을 다수 적발했다. 이것만 봐도 미복 시찰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약쟁이 사건을 조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의 현실을 직접 보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일이다.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은 일이지 않겠느냐?”봉구안은 그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의 말을 듣다 보니, 문득 감탄이 나왔다.“폐하께서는 참 좋은 군주입니다.”소욱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스쳤다.칭찬을 들은 것이 기분 나쁘지 않은 듯했다.그는 겸손하게 답했다.“난 그저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야. 아직 진정한 ‘좋은 황제’가 되려면 멀었지.”“아니면 사람들이 날 ‘폭군’이라 부르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그리고, 난 네 앞에서만 좋은 모습을 보여줄 뿐이야. 다른 자들은 나의 이런 진심을 모를 것이다...”봉구안은 슬며시 웃었다.그녀는 서서히 다가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조용히 기대었다.……이원의 죄는 무거웠고, 법에 따라 처벌받았다.
보름 후.소욱은 봉구안을 데리고 죽산진에 도착했다.이곳은 과거 맹성주가 약쟁이의 거점을 조사했던 곳이자, 소욱이 황귀비를 구했던 곳이기도 했다.죽산진은 죽순으로 유명한 곳이었다.지금은 한겨울이라, 죽순 재배가 한창이었다.거리 곳곳에는 겨울 죽순을 파는 상인들이 줄지어 있었다.마침 봉구안에게도 이곳에 친한 지인이 있었다.그녀는 겸사겸사 그를 방문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굳이 소욱과 함께 갈 생각은 없었다.강호의 사내들은 대개 조정 사람들과 엮이는 걸 싫어했다.하물며 상대가 황제라면 더더욱.소욱은 그녀가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기에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원치 않는다고 해서, 그가 따라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결국, 봉구안이 먼저 발걸음을 떼자 소욱은 곧장 몰래 그녀를 뒤쫓았다.소욱은 진한길과 함께 봉구안을 따라 마을 외곽으로 갔다.그녀가 한 초가집에 들어서는 걸 보고, 소욱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진한길은 황제가 도둑 고양이처럼 숨어 있는 광경에 내심 황당했다.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폐하, 사실대로 마마께 얘기하심이 어떻겠습니까…?”그냥 황후께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소욱은 정색하며 말했다.“나는 황후의 안전이 걱정되어 따라온 것뿐이다.”진한길은 작게 중얼거렸다.“안전이 아니라… 황후 마마가 만나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신경 쓰시는 거겠죠.”그러나 그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소욱이 즉시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진한길은 등골이 서늘해지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폐… 폐하 송구합니다. 없던 걸로 해주십시오…!”그가 어찌하다 그 속내를 말해 버린 걸까!두 사람이 숨어 기다린 지 두 시진이 흘렀다.곧 봉구안이 초가집에서 나왔다.그녀와 함께 나온 사람은 하얀 수염이 길게 늘어진 노인이었다.노인은 다정하게 그녀를 마을 어귀까지 배웅했다.이 장면을 본 소욱은 살짝 안도했다.그 자는 젊은 사내가 아니다.또한, 어여쁜 여인도 아니다.그냥 노인일 뿐이었다.그는
소탁은 좋은 뜻으로 마을에 내려와 서당을 열었으나, 지금까지 받은 제자는 고작 한 명이었다.오늘도 학생을 받으려 돌아다녔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된 현실뿐이었다.그는 속으로 씁쓸함을 삼켰다.소욱은 남 일이면 한층 더 흥미로워지는 성격이었다.그는 봉구안을 보며 물었다.“대체 왜 사람들은 폐태자를 싫어하는 것이냐?”봉구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가을걷이가 한창 바쁜 시기에 사람들 자식들을 데려가 글을 가르친다나, 그건 그렇다 쳐도...삶은 계란을 미끼로 아이들을 유혹하는 통에 몇 번이나 유괴범으로 몰렸다고 합니다.”“서당에 보낸 글씨 연습용 종이와 그림들은 아이들이 이해도 못 한 채 불쏘시개로 써버렸고,그걸 보고 폐태자는 설교를 퍼부었죠.”“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제자가 한 명뿐인데 그나마도 배운 글자는 하나도 없고 살만 포동포동 쪘다더군요.”소탁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제발, 그만 말씀해 주십시오.”소욱은 소탁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어쨌든 우리 집안 사람인데 어찌 이 지경까지 망가질 수가 있단 말이냐.”“스승님! 제 닭다리는요!”그때, 통통한 아이 하나가 서당으로 뛰어들어왔다.“스승님! 배고파요! 오늘 닭다리는요?”순간, 모두의 시선이 소탁에게 집중되었다.소욱은 비웃듯 말했다.“제자들 밥이나 챙겨주는 스승이라니. 대체 원…”소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그때, 아이는 사람들을 보며 천진하게 물었다.“다들 우리 서당에 배우러 오신 거예요?”닭다리 경쟁자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소탁은 아이가 더 큰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서둘러 닭 한 마리를 쥐여 주었다.“오늘은 손님이 오셨으니, 수업은 없다. 닭은 줄 테니 어서 집으로 가거라.”“네, 스승님!”아이가 떠나자, 소탁은 한숨을 쉬며 닭장을 살폈다.‘또 한 마리 줄었군.’그는 하늘을 보며 한탄했다.소욱은 냉소적으로 말했다.“정말이지, 하루 스승이면 평생 아버지라는 말
봉구안의 차가운 눈빛 속에, 사형의 참혹한 죽음이 떠올랐다.직접 본 적은 없었다.하지만 스승의 이야기만으로도 머릿속에 그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그 참혹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는 천천히 돌아서며, 소욱을 바라보았다.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었다.“조심하는 것이 나쁠 것 없지 않겠습니까.”“무엇보다… 저는 더 이상 죄 없는 사람들을 이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사형이 남긴 마지막 경고는 분명했다.‘모든 걸 감당할 힘이 없다면, 불필요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라.’소욱은 그녀의 말을 듣고, 천천히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내 부인은 너무나도 마음이 여리구나.”목소리는 낮고도 부드러웠다.……객잔 안. 늦은 저녁.식사를 마친 후, 봉구안이 입을 열었다.“동방세가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그때 폐하께서 본 자의 얼굴을 묘사해 주십시오.”소욱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그가 본 것은 얼굴을 가린 남자일 뿐이었다.그러나 동방세라면, 대략적인 모습이라도 그려낼 수 있을 터였다.그런데 문득, 낮에 본 백발의 노인이 떠올랐다.소욱은 무심한 듯한 어조로 물었다.“그 노인, 허 씨라고 했던가. 대체 무슨 사람이기에 너와 인연이 있단 말이냐?”그는 반쯤 무덤에 들어간 듯한 노인이었다.언뜻 보아서는 평범했으며, 강호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봉구안은 솔직히 답했다.“그 분은 대장장이입니다. 강호를 떠돌던 시절, 무기를 만들기 위해 자주 찾아갔었죠.”“그 분께서 죽산진에 은거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으나, 이제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살짝 괴었다.“그렇군.”봉구안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저는 한때 약쟁이가 동산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지금으로선 그 뿌리가 남제에 있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지고 있습니다.”“전에 붙잡았던 상인이 제공한 정보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허나 장사꾼에게 있어 신뢰는 필수. 한 번 거래한 물건이 사라지면 반드시 다시 채워 넣으
쾅!갑자기 작동한 기계장치가 바닥을 갈라놓았다.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모두가 지하로 추락했다.오백은 끝까지 진한길을 붙잡고 있어 두 사람은 서로 얽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봉구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세우고 곧장 화절자를 꺼내 앞을 밝혔다.“폐하!”그녀는 즉시 소욱을 찾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괜찮으십니까?”소욱은 태연하게 말했다.“난 괜찮다.”그러나 그 순간…“그럴 수밖에. 제가 밑에 깔려 있었으니 말입니다.”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로 아래에서 소탁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봉구안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곧바로 주위를 살폈다.화절자의 빛이 모이자, 이곳이 어디인지 뚜렷이 드러났다.소욱은 벽면을 훑어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곳이 바로 약쟁이들의 본거지였다.”“예전에는 동굴 깊숙이 비밀 통로가 있어 그쪽으로만 접근할 수 있었지.”“하지만… 이곳에 또 다른 출입구가 있을 줄은 몰랐다.”과거 황실은 이곳을 완전히 파괴하라고 명령했다.그러나 여전히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약재를 보관하던 목제 선반들, 그리고 벽에 남겨진 검은 얼룩들.“폐하! 사람이 있습니다!”호위가 외쳤다.구석에는 검은 야행의를 입은 남자가 의식 없이 쓰러져 있었다.그의 팔에서 선홍색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얼굴은 창백했고, 숨이 희미했다.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이상 적일 수도 동료일 수도 있었다.소욱은 단호히 명령했다.“살려라.”그는 더 이상 그 남자를 신경 쓰지 않고, 봉구안과 함께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한편, 소탁은 부상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가지고 있던 금창약을 꺼내 그의 상처에 발라 주었다.……두 시진이 흘렀다.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이제 체력을 아껴야 할 때였다.봉구안은 바닥에 앉아 숨을 골랐다.소욱은 그녀의 옆에 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춥진 않느냐?”그녀는 체질상 한기에 약했다.평소에도 잠들 때면 늘 그를 꼭 껴안고서야 따뜻함을 유지할 수 있었
열무신은 심한 부상으로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소욱은 그를 앉히도록 명했다.호위들이 그를 부축해 자리에 앉히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폐하, 저는 맹 형님과 함께 약쟁이 사건을 추적하던 사람입니다.”“그러나 형님은 희생되었고, 저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죠… 그 후로도 계속 그놈들을 쫓았지만…”그는 숨을 고르며 핏빛 기침을 뱉었다.“놈들은 너무 깊숙이 숨어 있었습니다.”봉구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렇다면, 지금껏 찾은 단서도 거의 없다는 말입니까?”열무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소욱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렇다면, 이번에 다시 이곳을 찾은 이유는 무엇이냐?”열무신은 쓰린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새로운 단서를 찾을 수 없었기에,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 보려 했습니다.”“이틀 전, 이곳에 도착했는데 예상치 못한 함정에 걸려 추락하고 말았습니다.”“그나마 운 좋게 약간의 식량이 있어 굶어 죽지는 않았지만…”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낮게 말했다.“여기가 바로, 그날 맹 형님과 제가 헤어진 곳입니다.”“형님은 절 구하려다 적에게 잡혀갔습니다.”“저는… 저는 그날 가까스로 도망을 쳤죠.”“그때 제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다면, 형님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날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손이 떨립니다…”그의 목소리에는 후회와 고통이 가득했다.봉구안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형님을 죽인 배후를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우입니다.”“그러니 사형께서는 스스로를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맹성주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그는 생사의 기로에서도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사람이었다.열무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반드시 놈들을 찾아낼 것입니다.”그는 곧 주위를 둘러보며 덧붙였다.“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저희가 여기서 나가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소욱은 단호하게 말했다.“이곳 어딘가에 반드시 출구가 있을 것이다.
가짜 열무신은 진짜 열무신의 손에 죽었다.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모두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진한길이 한참 늦게야 소리쳤다.“폐하, 괜찮으십니까! 어서 폐하를 호위하라!”오백이 비웃으며 말했다.“너무 늦었소.”“이미 자객은 죽었지 않소.”봉구안은 진짜 열무신을 바라보았다.그에게서 묘한 낯섦이 느껴졌다.“자네는 대체 정체가 뭐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이냐.”열무신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피 묻은 단검을 닦아 내며가짜의 시신을 발로 짓밟았다.그의 신발 밑창에 묻은 흙이 잔인하리만치 조용히 바닥에 눌려 퍼졌다.그의 얼굴은 여전히 거칠고도 날카로웠다.“지하 통로에 비밀 출입구가 있습니다. 저는 그곳을 통해 들어왔고요. 그런데 말입니다…”“제가 여기에 들어온 지 꽤 되었는데도, 아무도 저를 눈치채지 못했더군요.”“동굴이 너무 어두운 탓이겠죠...”그는 무심한 듯 말하며, 가짜 열무신의 시체를 뒤졌다.그러고는, 확실히 숨이 끊어졌음을 확인하자 가차 없이 목을 베어 버렸다.그 모습이야말로, 봉구안이 기억하는 열무신이었다.그녀의 사형인 맹성주가 늘 했던 말이 떠올랐다.‘열무신은 마음이 없다고 봐도 돼. 그 자가 악인의 길을 걸으면 반드시 대마두가 될거야. 한번 목표를 정하면 절대 놓지 않지. 그리고…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아.’그 말이 떠올랐다.열무신은 피 묻은 칼을 닦으며 느슨한 미소를 지었다.“이놈은 처음부터 여러분들을 노리고 있었던 놈입니다.”“이제 저 자가 죽었으니, 한동안 여러분들은 안전할 것입니다.”“출구는 저기 있습니다. 올라가면 나갈 수 있죠.”호위들이 즉시 계단을 확인했다.“폐하! 황후마마! 출구를 발견했습니다!”소욱이 봉구안의 손을 잡았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진짜 열무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여전히 시체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입니까?”열무신은 움직이던 손을 멈추더니, 조용히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저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황후께서는 반드시 살아
열무신은 느긋한 태도로 차를 따랐다.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저는 홍련초가 어디에서 자라는지 알아내고, 그곳에서 놈들을 기다릴 생각이었습니다.”“비록 어리석은 방법일지라도, 굳이 따지지는 마십시오.”그는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소탁과 열무신의 솔직한 증언을 통해, 봉구안은 홍련초라는 중요한 단서를 얻게 되었다.그녀는 곧장 물었다.“남제의 다른 지역에서는 홍련초가 자라는 곳이 없습니까?”이번에도 두 사람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동시에 답했다.“없습니다.”소욱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만약 홍련초가 약쟁이의 독을 만드는 필수 재료라면, 그 독을 만들어 온 배후 세력은 절대 죽산진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하지만 소탁과 열무신은 한참을 이곳에서 지켜봤음에도, 단 한 번도 적을 잡아내지 못했다.이건 분명 이상했다.그는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정말로, 홍련초가 필수 재료라는 것이 확실하느냐?”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머뭇거렸다.열무신은 찻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 마셨다.그의 짙은 속눈썹이 검은 눈동자를 가렸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필수인지,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그 말이 떨어지자, 객잔 안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소욱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그리고 문득, 열무신에게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그는 그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바라보았다.‘이 느낌은…?’그런데, 열무신도 마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폐하, 황후마마도 계신데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시면 어찌합니까?”봉구안은 순간, 소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소욱은 흠칫하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그 순간…“!”그의 동공이 급격히 좁아졌다.그는 굳은 얼굴로 봉구안을 향해 저음으로 말했다.“굳이 동방세를 부를 필요 없겠다.”“내가 그때
방 안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이는 운산파 장문 구학이 아니라, 그의 자리를 대신한 엄 장로였다.장막을 바라보는 눈빛은 냉기마저 서려 있었고, 그의 머릿속엔 세상을 먼저 떠난 아버지의 모습만이 맴돌았다.이불을 움켜쥔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고, 눈엔 증오가 고였다.부친을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었다.하지만 복수만 좇다간, 남겨진 것을 모두 잃게 될 터였다.운산파를 지키는 것 또한, 그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다.모든 비극의 시작은 사람을 약인으로 만들어 팔아넘긴 자들. 그들이 운산파를 더럽혔다.그 뿌리를 반드시 끊어내리라.그는 자신의 손으로 끝장을 낼 것이라 다짐하였다.……밤은 깊어졌다.운산파에 머무는 외부 문파 제자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혹시라도 운산파 측이 음식을 통해 무언가 꾸민 건 아닐까.그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전진파는 하나의 방에 모여 있었고, 그 옆 방엔 벽력당 제자들이 자리했다.정원아의 죽음으로 침통해 있던 그들은 이 와중에 코 고는 소리까지 들려오자, 마음이 더 뒤숭숭해졌다.“부장문님… 비무대회, 계속 나가야 하나요?”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 말은, 결국 포기를 암시하는 질문이었다.차선아는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내공을 다스리고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일… 하산한다.”방민이 벌떡 일어섰다.“부장문님! 두 경기만 더 이기면 결승이에요! 지금 포기하면, 그간 쌓아온 모든 걸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겁니다!”차선아는 조용하면서도 슬픔이 배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 강호는… 편안하지 않아. 원아는 이미 죽었다.”“더는, 아무도 잃고 싶지 않구나.”운산파에 벌어진 일은 소환을 움직였고, 그것은 곧 조정이 직접 나섰다는 뜻이었다.강호와 조정은 본래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으나… 이번엔 그 선이 무너졌다.운산파가 저지른 일이, 그만큼 무거운 것이었다.이 상황에서 운산파에 머무른다는 건, 전진파도 위험에 휘말릴 수 있다는
봉구안의 느닷없는 한마디에 모두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소욱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고, 동방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닭이…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화로 옆에서 막 비둘기를 집어 들려던 강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급히 손에 들린 걸 들어 보이며 정정했다.“아니, 말했잖소! 이건 닭이 아니라 비둘기라 하지 않았소?”“그것도 제일 비싼 ‘비천비’라오!”“설마… 진짜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 혹시… 독이라도 들어간 아니겠지?”강림은 당황한 얼굴로 비둘기를 얼른 내려놓았다.봉구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건 괜찮소. 자네 비둘기 말고… 내가 말한 건 죽산진의 닭이었소.”그녀는 다른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약인독에 꼭 들어가는 약초 중 하나, 홍련초를 다들 기억하시오?”열무신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당연히 기억합니다. 그걸 조사하려고 죽산진에 사람도 남겨뒀는데…”“잠깐, 마마의 말씀은 혹시…”그는 말을 멈췄다.이미 무언가 감을 잡은 듯했다.동방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그 말인즉, 지금까지 우린 누가 홍련초를 사 갔는지 뒤쫓고 있었지만, 사실 그 약초 자체가 아니라, 그걸 먹고 자란 닭이 진짜 목표였다는 거로군.”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정확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소. 확인이 필요하겠지.”애초에 그녀도 이런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강림이 기르던 ‘비천비’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죽산진의 닭들이 떠올랐다.비둘기가 특별한 먹이를 통해 효능을 갖게 된 것처럼, 홍련초를 먹은 닭도 무언가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었다.소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당장 소탁에게 전하게. 죽산진에서 유통된 닭들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는지 전부 조사하라고.”“알겠습니다.” 봉구안이 짧게 대답했다.이 와중에 여전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는 단 한 명… 강림뿐이었다.그는 두리번거리며 말없이 모두를 쳐다봤다.“…도대체 무슨 소리오? 홍련초가 뭐고, 닭은 왜
소욱은 상자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도대체 구안이 준비한 선물이란 게 뭘까.비단으로 감싼 상자를 열자, 안에는 옥패 하나가 곱게 들어 있었다.투명하게 빛나는 그 옥패는 희고 맑았고, 묘하게도 그의 기품과 잘 어울렸다.황제의 자리에서 진귀한 보물쯤은 셀 수 없이 봐왔지만… 이건 달랐다. 봉구안이 직접 고른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더없이 소중했다.그녀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시간이 좀 촉박했어요. 이 정도밖에 못 구했네요.”소욱은 아무 말 없이 옥패를 목에 걸었다.곧이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그래도 내 탄신일을 잊지 않았구나. 고맙다.”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그 정도로 기억력 나쁘진 않아요.”소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런 정색스러운 대답 말고, 자기가 듣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그냥 자신이라서, 자신의 탄신일이라서 기억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그는 그녀의 어깨를 슬쩍 끌어안았다.똑, 똑.하필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폐하, 강림이 돌아왔습니다!”……원래 강림은 상단을 이끌고 강호를 떠돌고 있었지만, 강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가만있을 수 없었다.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달려왔고, 마침내 때를 맞춘 셈이다.“휴, 아직 안 떠났군!”강림은 선홍색 비단 도포를 입고 자줏빛 금관을 썼다. 허리에는 값비싼 옥이 매달려 있고, 발에는 자수가 놓인 검은 장화를 신었다.걸음마다 은은한 향과 함께 사치가 묻어나는 모습이었다.동방세는 그와 익숙한 사이인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강주 행은 자네의 덕을 많이 봤네. 이 객잔을 쓸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받았네.”강림은 손을 휘휘 저으며 쿡 웃었다.“뭘 그런 걸 갖고 그래. 형제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소? 아, 폐하께서도 계시다던데?”그는 시선을 넘겨 방 안쪽을 바라보았다.봉구안 곁에 앉은 소욱을 발견하자, 급히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강림,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뭐라고요? 가짜라고요?”문을 지키던 제자는 크게 놀라 얼굴이 새파래졌다.관리가 가짜라면, 그럼 장문님은? 장문님이 지금 위험하다는 것이 아닌가!그들은 급히 이 사실을 부장문에게 보고했다.한편, 부장문은 각 문파 인사들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장문님께서는 곧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무술 대회도 예정대로 진행될 것입니다…”“부장문님!”한 제자가 급히 뛰어왔다.부장문은 사정을 듣자마자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가짜라니?그들이 가짜 관리였단 말인가!그는 즉시 정예 제자들을 소집해 추격을 지시했다.그러나, 오백과 은칠은 이미 말을 타고 먼 곳으로 도망친 후였다.……열무신의 혹독한 심문 끝에, 결국 비밀이 밝혀졌다.구학이 마침내 자백했다.자신이 직접 사부인 엄청송을 죽였다고…이 소식을 들은 엄 장로는 분노에 차 방으로 뛰어들었다.이미 심한 고문을 당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구학이었지만, 엄 장로는 여전히 분을 삭일 수 없었다.그는 구학의 목을 움켜쥐고 외쳤다.“왜! 왜 아버지를 죽이셨습니까! 그분은 사형의 스승이자, 사형을 친아들처럼 길러주신 분이셨습니다! 어찌 양심이 이리도 다 썩어 문드러질 수 있냐 말입니다!”구학은 이미 이가 여러 개 빠져, 말할 때마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그러면서도 힘겹게 웃었다.“그야… 스승님이 멍청했기 때문다.”“그 분은 단순히 병에 걸렸을 뿐이었다. 치료하면 나을 수 있었지...”“하지만 그 분께서 약쟁이와 인신매매 사건을 알게 되었다. 이를 관청에 고발하려 했고…”“게다가 내게 준 장문 자리까지 빼앗으려 했어… 난… 난 스승님을 없앨 수밖에 없었다…”엄 장로의 이마에는 핏줄이 튀어나왔다.“이 악랄한 놈!”얼마 지나지 않아, 엄 장로가 방에서 나왔다.그의 두 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그 안에는 봉구안과 소욱도 있었다.엄 장로의 얼굴에는 웃음과 눈물이 뒤섞여 있었다.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
열무신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안에서는 곧 비명이 터져 나왔다.“폐하! 저를 살려주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그러나 소욱은 문 밖에서 이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구학이 결코 무고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차라리 열무신이 직접 심문하는 편이 나았다.그 늙은이가 어떻게든 입을 열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같은 시각, 운산파.운산파 제자들은 산문을 지키며 장문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비무대회가 중단되자, 다른 문파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벽력당에서 비꼬듯 말했다.“운산파는 어쩜 이렇게 말썽이 많은가? 저 구 장문이 정말로 엄 장문을 살해했다면, 운산파는 비무대회에 나설 자격이 없는 것 아니오?”“맞소! 스승을 배신하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악한 문파의 행태와 다를 바 없소!”운산파 제자들은 즉시 반발했다.“우리 장문께선 그런 일을 하신 적 없소! 입 조심하시오!”운산파 부장문은 높은 자리에 앉아 단호하게 외쳤다.“진실은 곧 밝혀질 것이니, 함부로 추측하지 마시오!”그러나 다른 문파들은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이 사건이 언제 해결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우리더러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오? 차 부장문, 어떻게 생각하시오?”그들은 전진파의 차선아를 바라보았다.운산파를 제외하면, 비무대회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것은 전진파였으므로, 그녀 역시 속이 탈 것이라 여겼다.그러나 차선아는 태연한 얼굴로 비무대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그들이 전진파를 자극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다시 운산파를 향해 몰아세웠다.“결국 문제를 일으킨 건 운산파 아니오. 차라리 대회에서 물러나시오! 우리를 마냥 기다리게 할 이유가 없지 않소?”운산파 제자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기다리기 싫으면 떠나시오! 우리 운산파는 붙잡지 않소!”“너희들…!”운산파 제자들이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다른 문파들은 더욱 분노했다.그러나 운산파 내부에서도 불안감이 퍼지고 있었다.문하 대제자가 부장문에
약쟁이 거래의 배후를 묻자, 구학은 당황한 듯 보였다.그는 소욱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모릅니다… 소인은 정말 모릅니다.”“그자들은 항상 밀서로만 연락했습니다. 밀서에 물건을 받으러 갈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고, 저희는 그 지시에 따라 물건을 받은 뒤 구매자에게 가져다주기만 했습니다.”“그들은 매번 신중히 움직였고, 접선 장소도 항상 달랐으며, 저희와는 단 한 번도 직접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폐하, 소인이 드리는 말씀은 모두 진실이며, 감히 속일 생각은 없습니다!”구학은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절을 올렸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는 듯, 그는 말을 이어갔다.“소인은 올해 나이가 예순셋입니다. 무릎 아래 자식 하나 없는데, 제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설령 재물과 명예를 얻는다 한들, 제가 얼마나 더 누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운산파의 천 명 넘는 제자들을 굶기지 않는 것뿐입니다!”소욱은 냉담하게 반응했다.“약쟁이에 관한 얘기를 계속하거라.”구학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털어놓았다.“소인은 약쟁이 거래가 그렇게 돈벌이가 좋다는 걸 보고, 생각했습니다. 약쟁이 한 명을 운송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면, 우리 운산파가 직접 약쟁이를 만들어 팔면 얼마나 큰돈을 벌겠는가 하고요.”그는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아까 짐작한 게 맞습니다. 동쪽 별채에 있던 그 '단약'들은 사실 약쟁이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수년간 실패했고, 약쟁이를 만드는 데 참고할 생각으로 약쟁이 하나를 빼돌렸다가 그자들에게 발각돼 제자 몇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구학은 제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아쉬운 기색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약쟁이 제조가 성공하지 못한 것이었다.봉구안이 차갑게 물었다.“무고한 이들을 납치한 것도 약쟁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느냐?”구학은 싸늘한 질문에 더듬지 않고 대답했다.“맞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골라 약쟁이를 만들기 위해 잡아
구학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 앞에서 가면을 쓴 이들을 찬찬히 살폈다.이내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철통같이 방비했다고 자부했건만, 결국은 이 지경이 되다니.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고도 자신을 구하러 오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결말이 다가올지 뻔히 보이는 듯했다.황제의 손에 떨어지고 만 이상, 자신에게 더 이상 희망이란 없었다.열무신이 손에 든 단도를 툭툭 튕기며 말했다.“모두 나가시오.”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앞둔 늑대처럼 구학을 응시했고, 바라보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사람들이 막 방을 나서려는 찰나, 구학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황제 폐하 좀 만나게 해주시오!”그는 이를 꽉 깨물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폐하가 아니고서는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오!”열무신이 돌아서서 봉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어찌할까요?”봉구안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 이자가 스스로 자백하겠다면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소욱을 방 안으로 들였다.소욱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이들은 나가도, 그녀만큼은 반드시 남아야 했다.열무신은 나가기 전 봉구안에게 당부했다.“우린 밖에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세요.”“네.” 봉구안은 그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문이 닫히자 구학은 소욱을 빤히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정말……폐하이십니까?”소욱은 가면을 벗고 본래 모습을 드러냈다.그의 얼굴을 확인한 구학은 목구멍이 턱 막힌 듯 침을 삼켰다.“소인… 폐하를 뵙습니다!”구학은 아까의 당당함을 온데간데없이 잃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을 올렸다.봉구안은 언제든 돌발 상황이 생길 것을 대비하여 은침 하나를 쥐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운산파의 목적이 줄곧 황제를 암살하고 약쟁이 사건을 덮으려 했던 만큼, 방심할 수 없었다.소욱은 차갑게 구학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무엇을 말하려는 것이냐?”구학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구학은 관아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운산파 장문인 자신이 마치 죄인처럼 끌려가게 될 줄이야.그는 부장문에게 당부했다.“내가 돌아올 때까지 문파의 모든 일을 자네가 맡아 처리하게. 부디 신중히 행동하도록 하게.”부장문은 진중히 고개를 숙였다.“염려 마십시오, 장문!”관아 사람들은 구학뿐 아니라 엄 장로와 봉구안까지 함께 끌고 갔다. 그리고 그 유골 또한 가져갔다.소욱이 운산파에 온 것은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실마리가 보이자 그는 관아 사람들을 따라 함께 이동했다.봉구안은 떠나기 전 바닥에 누운 정원아의 시신을 깊게 바라보았다.정원아는 자신 때문에 죽었다.그녀는 차선아에게 간곡히 부탁했다.“차 부장문, 정 사저를 부디 잘 안장해 주십시오.”차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운산파 밖 공터에는 여러 대의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구학은 의아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죄인을 호송하는데 언제부터 이런 호사가 있었던가?관아 사람들이 각자의 손에 쇠고랑을 채우며 말했다.“당신들은 모두 강호에서 이름난 인사들이니 특별히 비밀리에 심문을 받을 것이오. 백성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마차에 타시오! 가는 길에 소리치거나 소란을 피우면 망신당하는 건 당신들이오!”구학은 떳떳한 척하며 제일 먼저 마차에 올랐다. 마치 이러면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할 수 있는 듯이 말이다.봉구안과 소욱은 한 마차에 타고 침묵 속에서 어두운 눈빛을 주고받았다.관아 사람들은 이들을 산 아래로 호송해 관아 쪽으로 향했다.한참 길을 가던 중 구학은 갑자기 몸이 몹시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이상함을 감지한 그는 자신을 호송하는 두 명의 관아 사람을 바라보았다.“너희들…”관아 사람 중 하나가 그를 보며 냉소를 지었다.“노인네, 눈치는 빠르구나.”말을 마친 관아 사람이 순식간에 구학의 목덜미를 강타했다.구학은 쇠고랑을 찬 상태라 저항이 어려웠고, 그 약간의 미향까지 더해지니 그대로 의식
엄 장로는 싸늘한 눈빛으로 높은 자리에 앉은 구학을 바라보았다.“장문, 제 허락 없이 동쪽 별채에 들어간 건 저의 잘못입니다.”“운산파의 규율대로 이 일에 대한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제 부친의 유골이 왜 동쪽 별채에 있는지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오백도 품에 안긴 유골을 들며 당당히 턱을 들었다.“옳습니다! 남의 아버지 유골을 이런 꼴로 만든 이유부터 제대로 설명하란 말입니다!”구학은 답답한 얼굴로 엄 장로를 쳐다보았다.“이들이 의도적으로 나를 모함하는 게 보이지 않소?”“내가 뭘 설명하길 바라오? 난 이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소!”“조금 전 곳곳에서 불이 난 것도 필시 저들이 벌인 짓이오. 그 틈을 타 유골을 동쪽 별채로 옮긴 것이 분명하오! 저들에게 이용당한 것이오!”“우리는 수십 년을 함께한 사형제이지 않소? 내 사람됨을 아직 모르시오? 내가 어떻게 사부님을 해칠 수 있단 말이오!”엄 장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저는 오늘 그저 진실을 원할 뿐입니다.”봉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이미 모든 물증이 구 장문의 범행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구 장문께서 엄 장문의 자리를 탐내 스승을 살해했고, 혹은 스승에 대한 원한 때문에 시신을 훔쳐 별채에 숨겨두고 모욕한 것이겠죠.”“헛소리다! 감히 나를 욕먹이려고 하다니!” 구학은 봉구안의 말을 강하게 부정하며, 늙고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그는 다시 엄 장로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저 여인의 말을 믿고 나를 의심한단 말이오? 사부님은 나를 친아들처럼 여겨 모든 무공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셨고, 직접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장문직을 물려주셨소. 내가 어찌 그 은혜를 저버리는 죄를 범하겠소? 게다가 내가 무슨 이유로 사부님을 해친단 말이오?”주변 사람들도 동조했다.“맞소. 구 장문은 부족함이 없고, 사형 간의 정이 깊었는데 설마 그런 짓을 했겠소? 이건 분명 무슨 오해가 있는 거요.”“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전 장문님께서는 생전에 구학 장문을 가장 아끼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