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진! 민여진!”순간 박진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는 들고 있던 우산을 거칠게 내던지고 진흙탕에 쓰러진 민여진을 들어올렸다.그녀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이미 흙과 빗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박진성은 곧장 그녀를 방으로 데려갔다.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몸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버렸고 유일하게 따뜻한 것은 고열로 달아오른 얼굴뿐이었다.박진성은 이를 악물었다.“민여진, 정신 차려! 무슨 일이 생길 리 없어.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만약 양경호가 이 장면을 봤다면 틀림없이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박진성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불안이 묻어 있었다.“기절한다고 끝날 것 같아? 그렇게 해서 책임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절대 안 돼. 민여진, 넌 살아서도 내 사람이고, 죽어서도 우리 집안 무덤에 묻힐 사람이야. 내 손에서 벗어날 생각 하지 마.”그는 그녀를 이불로 단단히 감싸고 난방 온도를 최대로 올린 후, 즉시 의사를 불렀다.잠시 뒤, 의사가 도착해 민여진의 상태를 살펴보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이렇게 젖은 옷을 계속 입히고 계셨다면 상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옷을 갈아입혀야 합니다.”의사가 이불을 걷으려 하자 박진성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살기 어린 검은 눈동자로 의사를 꿰뚫어 버릴 듯 쳐다보며 말했다.“제가 할게요.”의사는 움찔하며 말을 삼켰다.“아... 그러시죠. 그럼 저는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의사는 그 눈빛에 기가 눌려 물러났다.‘그저 맥을 짚으려 했을 뿐인데... 상처투성이에 망가진 얼굴, 가까이서 보면 그리 아름답지도 않은데... 왜 박 대표님은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양 저 여자를 감싸는 거지? 누가 손끝이라도 댔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 것처럼 말이야...’의사가 고개를 저으며 방을 나가고 문을 닫고 나서야 박진성은 남겨진 담배를 비벼 끄더니 이불을 걷어냈다.젖은 옷이 그녀의 몸에 밀착되어 있었고 고열로 인해 붉어진 몸은
다행히 부엌의 배치는 변하지 않았다. 민여진은 잽싸게 물 한 잔을 따라 두어 모금 마셨다. 그리고 곧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박진성이 돌아왔네...’민여진은 잔뜩 긴장한 채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곧이어 차가운 시선이 스치듯 훑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옷을 갈아입었음에도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훅 밀려왔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그때 박진성이 먼저 한 마디를 던졌다.“깨어났어?”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 민여진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인 뒤, 컵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마셨다.박진성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더니 바로 눈앞에서 멈춰 섰다.그가 바로 앞에서 멈춰 서자, 그녀의 몸은 잠시 굳어졌다. 그리고 이마에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닿는 것을 느끼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박진성은 그저 이마에 손을 대어 체온을 확인했을 뿐이었다.이는 예상 밖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말 한마디가 그녀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했다.“보아하니 죽진 않겠네. 그럼 이따 나랑 병원에 가서 채연이한테 사과해.”박진성은 역시나 이 일을 잊지 않았다.그녀가 막 열이 내리자마자, 그는 서둘러 문채연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했다.민여진은 손끝에 힘을 주며 옷자락을 꽉 쥐었다.“난...”민여진은 창백해진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그녀의 아이를 죽게 만든 원수에게 사과하라니, 그럴 수는 없었다.“사과하지 않을 거야!”박진성의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짜증이 묻어 있었다.“민여진, 내 한계를 시험하지 마. 네가 무슨 자격으로 사과를 거부하는 거지? 채연이가 밤새 얼마나 아파했는지 알기나 해? 이제 겨우 잠들었어!”그의 말에 민여진의 머릿속이 잠시 멍해졌다.‘어쩐지 몸에서 여자 향수 냄새가 나더라니. 밤새 문채연 곁에 있었던 거였어. 나는 비 내리는 창밖에 무릎 꿇려놓고, 곧장 네가 사랑하는 여자한테 달려갔다는 거네. 단 1분도 허투루 쓰지 않는
어딘가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마치 박진성이 손을 들어 세게 뺨을 후려친 듯한 충격이 밀려와 온몸이 불타오르듯 뜨거웠다.그는 그녀를 괴롭히는 데 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나한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라고? 그것도 병원 복도에서, 사람들 앞에서, 문채연에게? 박진성의 눈에 나는 사람조차 아닌 걸까? 나를 자존심 따윈 아예 없는 존재로 여기는 걸까?’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눈가가 축축해졌지만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이미 울 만큼 울었으니까.“그렇게 할게...”오래전부터 결심한 듯,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고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 만큼 단단히 주먹을 쥐었다.“현수 씨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문채연에게 무릎 꿇고 사과할게.”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이어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박진성이 테이블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그녀는 직접 보지 않아도 소리만으로도 그의 분노가 얼마나 거센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민여진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네가 원하는 대로 했는데도 왜 여전히 분노하는 거야!’민여진은 박진성이 대체 왜 자신을 별장까지 끌고 와서 이런 모욕을 주는지, 심지어 주위에 여자도 많을 텐데 왜 꼭 자신이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문채연이 깨어났고 여전히 고통 속에서 울고 있다는 내용이었다.전화를 끊은 박진성은 싸늘한 눈빛으로 민여진을 한 번 더 노려보았다.“들었어? 채연이가 이 고통을 겪는 건 다 너 때문이야.”민여진은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느꼈다.‘그럼 내가 감옥에서 겪은 고통은... 그건 누구 탓이었는데?’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진성은 그녀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더니 차에 태웠다.차는 빠르게 병원으로 향했다. 복도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문채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마치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었다.박진성은 문을 열자마자 급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고,
문채연은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마치 민여진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운 듯했다. 그러나 그녀가 내뱉은 그 한마디는 때문에 민여진을 병실 문 밖에서 무릎 꿇게 했다.간병인은 추호의 연민도 없이 병실 문을 닫아버렸고, 민여진이 그렇게 복도에서 무릎을 꿇게 되었다.어젯밤 진흙탕 속에서 밤새도록 꿇어 있던 탓에 무릎은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위로 피가 스며들며 쓰라린 고통이 퍼졌다.통증이 밀려오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이마에는 차가운 땀이 맺혔다.그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채연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성 씨, 나 목말라요. 물 좀 떠다 주세요.”병실 안에서는 달콤하고 나른한 분위기가 새어 나올 때, 병실 밖에서 무릎 꿇고 있던 민여진의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맸다. 이내 통증이 극에 달하자 몸이 굳어가며 정신이 아득해지기까지 했다.그녀가 복도에 무릎을 꿇고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시선을 던졌다. 대부분 사정을 몰랐고, 일부는 제멋대로 상황을 추측하며 비웃기 시작했다.“저렇게 무릎 꿇고 있는 거 보면 무슨 잘못을 했나 보네. 병실 안에 있는 여자가 다리를 다쳤다던데, 혹시 저 여자가 일부러 밀어버린 거 아니야?”“역시 여자들이란... 무서워 정말! 생긴 것도 흉한데 하는 짓까지 고약하네.”“저렇게 가만히 놔둘 게 아니라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얼마나 악랄하면 그런 짓을 저질렀겠어?”짧은 시간 만에 민여진은 질투심에 사로잡힌 악녀로 몰려버렸다.한편, 병실 안.문채연이 케이크 한 조각을 먹고 나서 박진성에게 애교를 부렸다.“진성 씨, 사과 먹고 싶어요. 하나 깎아 줄래요?”박진성은 힐끔 창밖을 쳐다보았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신경 쓰였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다리는 괜찮아?”문채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당연히 아프죠. 그래도 참는 거예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식으로 물으세요? 설
박진성은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쏘아붙였다.“민여진, 이게 잘못했다는 태도야?”온몸이 떨릴 정도로 힘이 빠진 민여진은 더 이상 태도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숨을 고를 정도였던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떼며 물었다.“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데?”박진성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문채연이 그의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섰다.“진성 씨, 됐어요. 여진 씨도 이 정도면 충분히 고생했잖아요. 이제 그만 보내줘요.”그녀는 목소리를 한결 낮추며 덧붙였다.“그리고 진성 씨, 오늘 하루만 저랑 같이 있어 줄 수 있나요? 밤에도 가지 말고요. 병원 침대가 생각보다 넉넉하더라고요. 둘이 누워도 충분해요.”마지막 말은 살짝 작아지며 수줍은 듯한 기색이 스쳤다. 그 말이 귀에 닿자, 민여진은 순간적으로 통증조차 희미해지는 기분이었다.박진성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 했으나,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민여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작은 표정 하나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응시했다.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2년 넘게 함께한 세월과 그들의 사랑이 그렇게 쉽게 끝났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알겠어.”박진성은 갑자기 문채연의 부탁에 응하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어차피 그 별장엔 가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네 몸 상태도 아직 안 좋은데, 당연히 남아서 같이 있어 줘야지. 물론 한 침대에서.”그는 ‘한 침대에서’라는 말을 일부러 강조하며 민여진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그녀는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조용히 돌아서서 복도를 따라 걸어 나갔다.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그 모습에 박진성의 가슴속 분노가 터질 듯이 차올라 그녀를 따라 나가려 했다.“진성 씨! 오늘 저랑 같이 있기로 했잖아요!”문채연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붙잡으려 했고 얼굴은 순식간에 불안으로 물들었다.박진성은 주먹을 꽉 쥐고 한참을 참았다. 결국 그는 휴대폰을 꺼내 양경호에게 전화
“큰사모님 같은 시어머님은 정말 보기 드문 것 같습니다.”양경호의 말에 이정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무심코 그의 옆에 서 있는 민여진을 보며 물었다.“이분은 누구시지?”민여진은 그 말을 듣고 급히 고개를 숙였고 머릿속으로 혼란스러웠다.‘설마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이정화를 마주칠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럽게...’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그녀의 얼굴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고 이정화는 지금의 그녀를 알아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채연 씨의 친구분입니다. 앞을 볼 수가 없으셔서 대표님께서 댁으로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앞을 볼 수가 없다고?”이정화는 안타까운 듯한 목소리로 되물으며, 이상하게도 민여진이 어딘가 낯설지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무심결에 손을 뻗어 민여진의 차가운 손끝을 잡았다.“어머, 손이 이렇게 차가워요? 이제 가을인데 얇게 입고 다니면 감기 들어요.”그녀는 곧 입고 있던 숄 머플러를 벗어 민여진의 어깨 위에 가볍게 덮어주었다.“오래 입어서 낡았을지 몰라도 따뜻해요. 일단 걸치고 있어요. 저는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이정화는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손을 놓더니 병실 쪽으로 걸어갔다.민여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윽고 이정화가 사라진 뒤, 양경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여진 씨, 이제 출발합시다.”“네...”나지막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민여진이 고개를 들자,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 졌고 엉망이 돼버린 얼굴도 그대로 드러났다.상처를 소독할 때도 울지 않았고 다리가 떨릴 정도로 무릎이 아팠을 때도 참고 버텼던 그녀가 결국 이정화의 따뜻한 한마디에 무너져 내린 모습에 양경호의 가슴이 순간 아릿하게 찔려왔다.그녀의 떨리는 입술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죄송해요. 우스운 모습 보여드렸네요.”잠시 후,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민여진을 별장에 데려다준 뒤,
박진성은 알 수 없는 짜증과 불쾌한 기분이 밀려왔다.“일단 집에 가서 쉬자. 채연이는 내일 보러 갈 거야.”예상치 못한 대답에 양경호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 제가 모셔다드릴까요?”“차 키 줘. 내가 직접 운전할 거니까.”박진성은 재킷을 벗어 손에 들고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내달리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집에 도착해 거실을 바라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불쾌한 감정이 스쳤다. 그가 늦을 때면 희미하게 켜져 있던 거실 한쪽의 조명이 오늘은 꺼져있었다.박진성은 애써 실망을 외면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눈이 안 보이는데 굳이 불을 켤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소파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언제나 그랬으니까.’박진성은 그렇게 생각하고 성큼성큼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것은 텅 빈 소파와 적막만 감도는 거실이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야식도,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도 없었다.예전의 민여진이라면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밤새도록 그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가 들어오면 기뻐서 활짝 웃으면서도 어딘가 뾰로통한 얼굴로 다가와 ‘배고프지 않냐’고 묻곤 했었다.박진성의 가슴이 뻐근하게 조여오더니 이내 숨이 막힐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원인이 방현수라는 사실이 다시금 그를 자극했다.‘민여진,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더니 결국 방현수에게 빠졌다는 거야? 겨우 그런 남자한테 진심을 다 갖다 바쳤다는 거냐고!’분노가 점점 더 거세지더니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그는 재킷을 거칠게 내던지고 계단을 올라갔다.박진성이 벌컥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침대 위에 누운 민여진이 잠에서 깨어났다. 인기척에 그녀는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담요를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고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이 서렸다.그 순간, 박진성의 남아 있던 이성마저 불길 속으로 타버렸다. 그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침대에 짓누르더니 몸을 밀착시켰다.“박진성! 너 뭐 하는 거야!
“네가 말리는 걸 무시하고 그 아이를 낳으려 했던 게 그렇게 잘못이야?”민여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그 아이는 이미 죽었어. 난 감옥에서 1년을 보냈고, 이제 내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런데 왜 아직도 날 놓아주지 않는 거야? 난 이미 후회했어. 네 아내로 남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날 놓아줘. 더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마지막 말을 내뱉자마자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다.그제야 박진성은 그녀의 손을 놓았지만, 가슴 깊숙이 자리 잡은 묵직한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믿었던 박진성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답답한 가슴을 움켜쥔 그는 억눌린 심정을 달래려 베란다로 나갔다.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다 탈 때까지 연기를 들이마시며 머리를 식히려 했다.박진성은 민여진이 결국에는 그에게로 돌아와 예전처럼 매달릴 거라고 확신했다.지금의 민여진은 시력을 잃었고 얼굴도 망가졌으며 의지할 가족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방현수가 그녀를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한순간의 감정일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끝이 보일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만약 민여진이 순순히 따라오기만 한다면 그는 그녀를 평생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방 안에서 갑자기 울린 휴대폰 벨소리에 민여진은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쑤셨고 무의식적으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그녀는 힘겹게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전화기에서 허스키하지만 힘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누구세요?”“여진아, 나야!”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현수 씨?”방현수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목소리가 왜 이래? 어디 아파?”박진성을 떠올리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표정이 굳어졌지만 손끝에 힘을 주고 애써 담담한 척 대답했다.“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며칠
진시우는 말을 이어가며 웃음을 터뜨렸다.“두 사람 정말 하나같이 고집이 세네요. 한 사람은 어떻게든 가겠다고 하고, 한 사람은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으니. 목숨이 무슨 장난인 줄 아세요?”민여진은 낮에 들은 소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박진성이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과 임재윤의 연락 두절이 너무나도 우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그런 생각을 부정했다.두 남자는 성격부터 행동 방식까지 완전히 달랐다. 박진성은 독선적인 태도로 모든 것을 강제하던 인물이었고, 임재윤은 온화하며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사람이었다.만약 그녀가 조현준에게 전화하는 것을 박진성이 목격했다면, 그는 폭력적으로 핸드폰을 빼앗은 뒤 모욕적인 말을 쏟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임재윤은 그러지 않았다.기분이 상했을지라도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거리를 두며 자신의 기분을 추슬렀다.어쩌면 임재윤은 정말로 어제 전기 배전함을 수리하다 감기에 걸린 것일 수도 있었다.그래서 연락을 할 수 없었던 거였고 깨어나자마자 민여진이 생각나 안진 마을로 오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진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있던 민여진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물었다.“임재윤 씨는 괜찮아요?”“별로 좋지는 않아요.”진시우는 숨길 이유가 없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임재윤은 원래 몸이 약해서 병원 신세를 자주 졌어요. 게다가 고열에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상태가 더 나빠 진 거죠. 오늘 쓰러지지 않았다면 여기 온 사람은 제가 아니라 임재윤이였겠죠.”진시우의 말에 민여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주저 없이 옷을 벗어 자신에게 걸쳐주던 임재윤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추운 날, 눈보라를 맞으며 추위를 버텼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여진 씨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제때 왔으니 다행이지. 이 추운 날씨에 계속 밖에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말 안 해도 알죠?”진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제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진시우 씨
민여진은 임재윤이 비록 자신의 전화번호를 몰랐다고는 하지만, 마을 이장이나 주민들에게 전화할 수도 있었고 진시우의 인맥을 생각하면 연락처를 못 구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 게 아니라면, 오는 길에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늦어지는 거로 생각하며 민여진은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잠시 후 휴게실 문이 열렸다. 민여진이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들자, 들어온 건 마을 사람이었다.“여진아, 9시야.”“늦게까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민여진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채 약봉지를 들고 나섰다.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고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마을 사람이 말했다.“같은 길이니 내가 데려다줄게. 이런 날씨에 혼자 가기 힘들 거야.”민여진은 잠시 망설이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먼저 가세요.”“너 설마 더 기다릴 생각인 거야?”마을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너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기다렸어. 오겠다고 했던 사람이 안 오면 그건 분명히 바람맞힌 거야. 아무리 날씨가 이렇다고는 해도, 계속 기다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온다고 했으니 꼭 올 거예요. 그 사람은 빈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그녀는 추운 날 옷까지 벗어준 그 사람을 위해 조금 더 기다리는 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안 오는 줄 알고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면 어떡해?’민여진은 이런 추운 날에 임재윤이 헛걸음이라 할까 봐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알겠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눈이 점점 더 심하게 오고 있고 날도 추우니까 길어도 30분만 더 기다려. 그 이상은 위험해.”“네. 걱정하지 마세요. 10분만, 정말 10분만 더 기다릴게요.”마을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떠났다.민여진은 문 앞에 웅크려 앉았다. 처마가 눈은 많이 막아주었지만,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져 그녀는 고개를 가슴에 묻고 있었다.‘조금만 더, 조
“아이고.”조인화가 죽을 마시며 의아한 듯 말했다.“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다쳤다고? 무슨 일이야? 저런 사람들은 항상 경호원들이 붙어 다니지 않나? 설마 암 같은 건 아니겠지?”민여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아파져 오는 마음에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고개를 숙인 채 죽을 마셨다.이 화제는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덮어졌고 조인화는 오락프로에 빠져 웃음꽃을 피웠다.아침 식사를 마친 민여진은 얼굴을 씻은 뒤 도구를 들고 말했다.“마당에 잠깐 다녀올게요.”눈이 내린 마당에는 정리할 게 별로 없을 터였지만, 민지연은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언가에 몰두해야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조인화는 만류하지 못하고 그저 안전에 유의하라고 재삼 당부했다.“정말 할 일이 없으면 이내 들어와. 밖이 너무 추워서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 오늘 일기예보 보니까 하루 종일 눈 온다던데.”“네, 조심할게요.”민여진은 특히 조심하며 마당으로 나갔다. 먼저 쌓인 눈을 치우고, 마당에 놓인 물건들을 가능한 한 모두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일을 하다 보니 정말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차츰 몸에서 땀이 나기까지 했다.점심을 먹고 난 후, 민여진은 조인화가 준비해 준 약을 가지고 교회로 향했다.교회 안에는 마을 사람들만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사람을 설득해 휴게실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소파에 앉아 두 시간을 기다리다 몸이 찌뿌둥해 일어나서 스트레칭하고 다시 앉아 기다렸다.그러던 중 누군가 문을 열고 물었다.“여진아, 누구 기다리니? 진시우 씨 일행은 눈 오는 날엔 오지 않아.”민여진은 어색해하며 말했다.“알아요.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거예요.”“다른 사람?”마을 사람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마. 우리도 저녁이면 문 닫고 가야 해.”“네, 너무 늦지는 않을 거예요.”민여진은 임재윤이 말한 오후는 어쩌면 네시나 다섯 시일 수
민여진은 마당 왼쪽에 있는 물탱크 쪽으로 가서 벽을 더듬으며 말했다.“여기 있을 거예요.”임재윤이 휴대전화 불빛을 비추자 바로 전기 배전함이 보였다.전기 배전함을 열어 살펴보던 임재윤은 단순한 누전이 아니라 조금 복잡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다행히 공구 상자가 근처에 놓여 있었다.“휴대전화 좀 들어줄 수 있나요?”그는 불빛을 비춰줄 사람이 필요했다.“네.”민여진이 휴대전화를 받아 들자, 임재윤이 적당한 위치로 조정해 주었다.마당에는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지만, 추위는 여전히 그녀를 떨게 했다. 갑자기 임재윤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남자의 체온이 배어 있는 외투가 그녀의 몸을 감싸자, 순간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하지만 민여진은 임재윤도 옷을 얼마 입지 않은 것 같아 머뭇거리며 말했다.“임재윤 씨, 이럴 거 없어요.”임재윤은 고집스럽게 단추까지 채워준 뒤에야 작업을 계속했다.그의 옷에서 풍겨오는 향기에 민여진은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백화점에서 끝내지 못한 대화가 떠올랐다.‘그때 임재윤은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걸까? 아니면, 무언가를 하려고 했던 걸까?’앞이 보이지 않았던 민여진은 당시 임재윤이 일부러 다가온 건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착각인 건지 알 수 없어 참지 못하고 물었다.“백화점에서 임재윤 씨가 다가오셨죠?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거예요?”그 순간, 공구를 다루는 소리가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졌다.조인화가 문을 열며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고 외치자, 임재윤은 작업을 마치고 민여진의 휴대전화를 돌려받아 글을 입력했다.“내일 오후, 교회 휴게실에서 만나요. 그때 말할게요.”침대에 누운 민여진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었길래 내일이 되어야만 말할 수 있는 건지 너무 궁금했다.마치 큰 결심을 내리기라도 하듯, 그 말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뒤숭숭한 마음을 뒤로한 채 민여진은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 8시였다.민여진이 새로 산 옷을
임재윤은 길을 바라보며 휴대전화로 ‘알겠습니다’라는 음성을 재생했다.집에 도착하자,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민여진이 차 문을 열자 날카로운 바람이 칼날처럼 그녀의 손목을 스쳤다.세 사람은 나란히 집 안으로 들어간 뒤 조인화는 숯을 가져다 임재윤의 방에 화로를 먼저 설치했고, 민여진은 이불을 가져와 임재윤의 침대를 정리하며 이불 커버를 씌웠다.그녀는 눈에 젖은 외투를 벗어 던진 후 분주히 이리저리 움직였다.임재윤은 주변을 둘러보던 중 책상 위에 놓인 사진액자를 집어 들었다. 사진 속에는 네 사람이 있었는데, 두 명의 젊은 여자와 한 명의 소년,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카메라를 향해 브이 사인을 하며 환하게 웃는 소녀는 사진 속 모든 빛을 독차지한 듯 눈부셨다. 그 옆의 소년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지 못한 감정을 눈가에 묻어두고 있었다.임재윤은 손가락 끝으로 소녀가 있는 위치를 살며시 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임재윤 씨, 잠깐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이 이불 모서리 좀 잡아주세요.”민여진이 부르는 소리에 임재윤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액자를 내려놓고 이불 모서리를 잡아주러 갔지만, 민여진은 그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무슨 일 있으세요?”“아니에요.”임재윤은 글을 입력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민여진 씨의 열일곱, 여덟 살 때 사진을 봤어요. 그땐 잘 웃었네요.”“사진이요?”민여진은 기억이 나지 않아 되물었다.“무슨 사진이요?”임재윤이 설명했다.“가족사진 같은 거예요. 한 여자는 젊은 시절의 조인화 씨로 보이고, 소녀는 민여진 씨, 소년은 조현준 씨인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한 분은 민여진 씨의 어머니인 것 같던데요. 많이 닮았더군요.”조현준의 방에 그런 사진이 남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민여진은 멍하니 있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어디 있어요?”임재윤이 사진을 건네주자, 민여진은 손가락으로 사진을 세게 문지르며 두 눈을 크게 떠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래도
그렇다면 사진 속의 그 남자가 누구든 문채연은 상관없었다. 그녀가 신경 쓰는 건 오직 민여진이었다.그전까지 박진성의 입에서 정보를 캐내려 온갖 수를 다 썼지만 소용없었는데, 민여진이 안진에 있다니.문채연은 살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밖으로 나가 라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을 부르는 건 싫어요.”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머리는 하얘졌다. 조현준에 대한 그의 반감은 차가운 기계음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였다.민여진은 마음이 조여와 입술을 깨물었다.“왜... 왜요? 현준 오빠를 아직 못 봐서 그래요. 나중에 한 번 만나보시면 좋을 거예요. 정말 좋은 사람인데...”“아니요.”임재윤은 민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민여진 씨는 그 이유를 알고 싶지 않을 텐데요.”‘알고 싶지 않을 거라고?’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임재윤의 말에 그녀는 순간 답을 알 것도 같았지만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설마, 아닐 거야.’조현준이 그녀를 좋아하는 건 과거의 그녀를 알았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라지만 임재윤은 달랐다. 그들은 고작 며칠 안 된 친구 사이일 뿐,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건 너무 황당했다.생각을 접은 민여진은 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 제가 알고 싶지 않을 거라고?”임재윤이 글을 쳤다.“그럼 알고 싶어요?”그의 시선은 민여진의 얼굴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민여진은 멈칫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네.”그녀의 대답을 듣고도 임재윤은 즉각적인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그가 다가왔다.뜨거운 숨결이 민여진의 속눈썹에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입술이 떨렸고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하지만 임재윤은 마치 처음부터 다가온 적도, 그런 생각도 없었던 사람처럼 미련 없이 물러섰다.“여진아, 임재윤 씨, 너무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안에서 이것저것 고르느라 시간
라미연이 이렇게까지 확신하자, 문채연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제 분명히 박진성을 봤고, 양성에서 안진까지는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어떻게 된 거지?’라미연은 문채연이 아무 반응이 없자 또 불을 지폈다.“채연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네가 사랑하는 남자를 그 여자에게 내줄 셈이야? 민여진은 그저 너랑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됐고, 널 공식 석상에 나오지도 못하게 했어. 이제는 네 남자까지 빼앗으려 하는데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너 이러다 다 빼앗길 수도 있다고!”힘들게 지내던 과거가 떠오르자, 문채연의 눈에는 살기가 스쳐 지났다.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알았어. 미연아, 고마워.”문채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올해 신상으로 나온 핸드백, 사람을 시켜 보내줄게.”라미연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사양했다.“됐어. 친구 사이에 뭘 이런 것 가지고.”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던 문채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혹한의 추위마저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갑게 변했다.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두 손에 힘을 주더니, 다시금 사진을 열었다.사진 속, 그 여자의 환한 미소는 마치 칼날처럼 문채연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왜? 넌 왜 이렇게까지 망가진 꼴을 하고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 건데?’반면 문채연은 이정화가 그 두 해 동안 함께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사실을 안 후로, 완전히 연락을 끊어버렸고 몇 번을 찾아가도 문전박대만 당할 뿐이었다.‘이정화와의 관계도 끝났는데 박진성마저 잃는다면...’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문채연은 이를 악물더니 벌떡 일어나 옷을 걸치고 나갔다.박진성의 병세는 도저히 나아지지 않았다. 복부의 상처가 자꾸만 벌어지며 악화하여 며칠 내내 별장에서 요양 중이었다. 게다가 민여진의 일까지 더해져 그는 식사 시간 외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문채연이 찾아가자, 서원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께서
민여진의 머리가 임재윤의 넓은 가슴에 닿았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향기는 묘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특정할 수 없는 향수 냄새였지만, 오히려 민여진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다만 애매한 이 자세가 불편했다.두 사람의 행동에 여자는 눈이 빨개진 채 말했다.“뭐야? 사귀는 사이였어? 요즘 세상에 왜 잘생긴 남자는 다 못생긴 여자랑 붙는지 모르겠네!”여자는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는 자리를 떠났다.여자의 말에 임재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 민여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익숙해요.”민여진은 임재윤이 자신의 마음이 다친 건 아닌지 신경 쓸까 봐 걱정스러웠다.임재윤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손을 뻗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그녀의 손바닥에 천천히 글씨를 썼다.[민여진 씨가 저 여자보다 훨씬 아름다워요.]한 글자 한 글자 강한 압력으로 글을 쓰는 그의 태도는 단호하고 진심이 어려 보였다.어쩌면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민여진은 웃음을 터뜨렸다.“왜 현준 오빠랑 똑같이 그래요? 현준 오빠는 원래 사람을 잘 달래주는 사람이라 이해가 가는데, 임재윤 씨는 예쁜 여자를 너무 많이 봐서 제 얼굴이 신기한 건가요?”임재윤은 침묵하다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그리고.”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타자를 했다.“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 부르는 건 싫어요.”다른 한편.엘리베이터를 타려던 라미연은 민여진과 임재윤의 모습을 보고 흠칫하며 멈춰 섰다.‘저거 민여진 아니야?’깜짝 놀란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민여진을 찍은 뒤, 엘리베이터에 올라 바로 문채연에게 사진과 함께 음성을 보냈다.“채연아, 방금 너한테 사진 보냈는데 봤어? 이 여자 민여진 아니야?”음성을 보내고 다시 한번 사진을 찬찬히 훑어보던 라미연은 그제야 민여진 옆에 한 남자가 희미하게 찍혀 있는 걸 발견했다.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터라 남자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등만 찍혀 있었는데 체형으로 보니 박진성인
“하지만...”민여진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짧은 시간 안에는 갚기 어려울 거예요.”민여진에게는 자립할 능력도, 돈을 벌 방법도 없었다.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한, 그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짐이 될 뿐이었다.“그냥 돈을 받아주세요. 현준 오빠한테 빚진 건 언제든 갚을 수 있지만, 임재윤 씨는 휴양지 건설이 끝나면 떠나실 거잖아요. 기간이 너무 짧아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평생 안진 마을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집은 여기가 아니었고,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임재윤은 받지 않고 물었다.“민여진 씨의 뜻은 나더러 안진 마을에 좀 더 머물러 달라는 건가요?”차가운 기계음 소리는 임재윤이 지금 농담하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들었다.민여진이 잠깐 멈칫하자, 임재윤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일단 가지고 계세요. 제가 떠나기 전에 갚을 수 있을 거예요.”결국 민여진은 그 돈을 임재윤한테 주지 못한 채 다시 조인화에게 가져갔다.“왜 다시 갖고 왔어? 임재윤 씨가 뭐라고 했는데?”“빌려주는 거래요. 돈이 생기면 갚으라고.”조인화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건 앞으로 다시 만날 계기를 만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오직 순진한 민여진만이 자신에게 매력이 없다고 여기며 그런 쪽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었다.“갚지 못하면 어쩌려고?”민여진도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임재윤 씨의 말로는, 떠나기 전에 내가 갚을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몸으로 갚으라는 거야?”민여진은 흠칫하더니 순간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이모, 장난치지 마세요.”조인화는 웃으며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아이고, 이 바보.”잠시 후, 포장 되어있는 봉투는 아까 전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임재윤이 봉투를 받아 든 뒤, 세 사람은 가계를 나왔다.밖으로 나가던 중 다른 한 가계에서 조인화는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