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채연은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마치 민여진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운 듯했다. 그러나 그녀가 내뱉은 그 한마디는 때문에 민여진을 병실 문 밖에서 무릎 꿇게 했다.간병인은 추호의 연민도 없이 병실 문을 닫아버렸고, 민여진이 그렇게 복도에서 무릎을 꿇게 되었다.어젯밤 진흙탕 속에서 밤새도록 꿇어 있던 탓에 무릎은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위로 피가 스며들며 쓰라린 고통이 퍼졌다.통증이 밀려오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이마에는 차가운 땀이 맺혔다.그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채연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성 씨, 나 목말라요. 물 좀 떠다 주세요.”병실 안에서는 달콤하고 나른한 분위기가 새어 나올 때, 병실 밖에서 무릎 꿇고 있던 민여진의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맸다. 이내 통증이 극에 달하자 몸이 굳어가며 정신이 아득해지기까지 했다.그녀가 복도에 무릎을 꿇고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시선을 던졌다. 대부분 사정을 몰랐고, 일부는 제멋대로 상황을 추측하며 비웃기 시작했다.“저렇게 무릎 꿇고 있는 거 보면 무슨 잘못을 했나 보네. 병실 안에 있는 여자가 다리를 다쳤다던데, 혹시 저 여자가 일부러 밀어버린 거 아니야?”“역시 여자들이란... 무서워 정말! 생긴 것도 흉한데 하는 짓까지 고약하네.”“저렇게 가만히 놔둘 게 아니라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얼마나 악랄하면 그런 짓을 저질렀겠어?”짧은 시간 만에 민여진은 질투심에 사로잡힌 악녀로 몰려버렸다.한편, 병실 안.문채연이 케이크 한 조각을 먹고 나서 박진성에게 애교를 부렸다.“진성 씨, 사과 먹고 싶어요. 하나 깎아 줄래요?”박진성은 힐끔 창밖을 쳐다보았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신경 쓰였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다리는 괜찮아?”문채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당연히 아프죠. 그래도 참는 거예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식으로 물으세요? 설
박진성은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쏘아붙였다.“민여진, 이게 잘못했다는 태도야?”온몸이 떨릴 정도로 힘이 빠진 민여진은 더 이상 태도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숨을 고를 정도였던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떼며 물었다.“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데?”박진성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문채연이 그의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섰다.“진성 씨, 됐어요. 여진 씨도 이 정도면 충분히 고생했잖아요. 이제 그만 보내줘요.”그녀는 목소리를 한결 낮추며 덧붙였다.“그리고 진성 씨, 오늘 하루만 저랑 같이 있어 줄 수 있나요? 밤에도 가지 말고요. 병원 침대가 생각보다 넉넉하더라고요. 둘이 누워도 충분해요.”마지막 말은 살짝 작아지며 수줍은 듯한 기색이 스쳤다. 그 말이 귀에 닿자, 민여진은 순간적으로 통증조차 희미해지는 기분이었다.박진성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 했으나,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민여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작은 표정 하나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응시했다.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2년 넘게 함께한 세월과 그들의 사랑이 그렇게 쉽게 끝났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알겠어.”박진성은 갑자기 문채연의 부탁에 응하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어차피 그 별장엔 가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네 몸 상태도 아직 안 좋은데, 당연히 남아서 같이 있어 줘야지. 물론 한 침대에서.”그는 ‘한 침대에서’라는 말을 일부러 강조하며 민여진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그녀는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조용히 돌아서서 복도를 따라 걸어 나갔다.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그 모습에 박진성의 가슴속 분노가 터질 듯이 차올라 그녀를 따라 나가려 했다.“진성 씨! 오늘 저랑 같이 있기로 했잖아요!”문채연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붙잡으려 했고 얼굴은 순식간에 불안으로 물들었다.박진성은 주먹을 꽉 쥐고 한참을 참았다. 결국 그는 휴대폰을 꺼내 양경호에게 전화
“큰사모님 같은 시어머님은 정말 보기 드문 것 같습니다.”양경호의 말에 이정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무심코 그의 옆에 서 있는 민여진을 보며 물었다.“이분은 누구시지?”민여진은 그 말을 듣고 급히 고개를 숙였고 머릿속으로 혼란스러웠다.‘설마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이정화를 마주칠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럽게...’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그녀의 얼굴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고 이정화는 지금의 그녀를 알아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채연 씨의 친구분입니다. 앞을 볼 수가 없으셔서 대표님께서 댁으로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앞을 볼 수가 없다고?”이정화는 안타까운 듯한 목소리로 되물으며, 이상하게도 민여진이 어딘가 낯설지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무심결에 손을 뻗어 민여진의 차가운 손끝을 잡았다.“어머, 손이 이렇게 차가워요? 이제 가을인데 얇게 입고 다니면 감기 들어요.”그녀는 곧 입고 있던 숄 머플러를 벗어 민여진의 어깨 위에 가볍게 덮어주었다.“오래 입어서 낡았을지 몰라도 따뜻해요. 일단 걸치고 있어요. 저는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이정화는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손을 놓더니 병실 쪽으로 걸어갔다.민여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윽고 이정화가 사라진 뒤, 양경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여진 씨, 이제 출발합시다.”“네...”나지막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민여진이 고개를 들자,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 졌고 엉망이 돼버린 얼굴도 그대로 드러났다.상처를 소독할 때도 울지 않았고 다리가 떨릴 정도로 무릎이 아팠을 때도 참고 버텼던 그녀가 결국 이정화의 따뜻한 한마디에 무너져 내린 모습에 양경호의 가슴이 순간 아릿하게 찔려왔다.그녀의 떨리는 입술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죄송해요. 우스운 모습 보여드렸네요.”잠시 후,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민여진을 별장에 데려다준 뒤,
박진성은 알 수 없는 짜증과 불쾌한 기분이 밀려왔다.“일단 집에 가서 쉬자. 채연이는 내일 보러 갈 거야.”예상치 못한 대답에 양경호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 제가 모셔다드릴까요?”“차 키 줘. 내가 직접 운전할 거니까.”박진성은 재킷을 벗어 손에 들고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내달리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집에 도착해 거실을 바라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불쾌한 감정이 스쳤다. 그가 늦을 때면 희미하게 켜져 있던 거실 한쪽의 조명이 오늘은 꺼져있었다.박진성은 애써 실망을 외면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눈이 안 보이는데 굳이 불을 켤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소파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언제나 그랬으니까.’박진성은 그렇게 생각하고 성큼성큼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것은 텅 빈 소파와 적막만 감도는 거실이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야식도,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도 없었다.예전의 민여진이라면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밤새도록 그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가 들어오면 기뻐서 활짝 웃으면서도 어딘가 뾰로통한 얼굴로 다가와 ‘배고프지 않냐’고 묻곤 했었다.박진성의 가슴이 뻐근하게 조여오더니 이내 숨이 막힐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원인이 방현수라는 사실이 다시금 그를 자극했다.‘민여진,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더니 결국 방현수에게 빠졌다는 거야? 겨우 그런 남자한테 진심을 다 갖다 바쳤다는 거냐고!’분노가 점점 더 거세지더니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그는 재킷을 거칠게 내던지고 계단을 올라갔다.박진성이 벌컥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침대 위에 누운 민여진이 잠에서 깨어났다. 인기척에 그녀는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담요를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고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이 서렸다.그 순간, 박진성의 남아 있던 이성마저 불길 속으로 타버렸다. 그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침대에 짓누르더니 몸을 밀착시켰다.“박진성! 너 뭐 하는 거야!
“네가 말리는 걸 무시하고 그 아이를 낳으려 했던 게 그렇게 잘못이야?”민여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그 아이는 이미 죽었어. 난 감옥에서 1년을 보냈고, 이제 내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런데 왜 아직도 날 놓아주지 않는 거야? 난 이미 후회했어. 네 아내로 남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날 놓아줘. 더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마지막 말을 내뱉자마자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다.그제야 박진성은 그녀의 손을 놓았지만, 가슴 깊숙이 자리 잡은 묵직한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믿었던 박진성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답답한 가슴을 움켜쥔 그는 억눌린 심정을 달래려 베란다로 나갔다.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다 탈 때까지 연기를 들이마시며 머리를 식히려 했다.박진성은 민여진이 결국에는 그에게로 돌아와 예전처럼 매달릴 거라고 확신했다.지금의 민여진은 시력을 잃었고 얼굴도 망가졌으며 의지할 가족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방현수가 그녀를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한순간의 감정일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끝이 보일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만약 민여진이 순순히 따라오기만 한다면 그는 그녀를 평생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방 안에서 갑자기 울린 휴대폰 벨소리에 민여진은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쑤셨고 무의식적으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그녀는 힘겹게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전화기에서 허스키하지만 힘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누구세요?”“여진아, 나야!”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현수 씨?”방현수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목소리가 왜 이래? 어디 아파?”박진성을 떠올리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표정이 굳어졌지만 손끝에 힘을 주고 애써 담담한 척 대답했다.“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며칠
박진성은 갑자기 나타나 민여진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뼈가 으스러질 듯한 힘으로 꽉 쥐었다.민여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박진성이 두 사람의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그는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정말 대단하네. 민여진,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내 침대에 누워 있더니, 감히 다른 남자 앞에서 꼬리 치고 있어? 내가 조금만 더 늦었으면 너희 둘 호텔로 직행했겠네?”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현수의 주먹이 박진성의 얼굴을 세차게 강타했다.“박진성! 사람이 되어서 어쩜 매번 짐승만도 못한 말을 지껄여? 여진이를 어떻게 이런 식으로 모욕할 수 있어!”박진성은 날아오는 방현수의 주먹을 맞고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입가에서는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는 반격하는 대신 입술을 비틀며 야비한 미소를 보였다.“방현수, 이러고도 네가 양성에서 그렇게 순탄하게 지낼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모양이지?”그 말을 듣자, 민여진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안 돼!”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박진성에게 설명하려 했다.“오해야! 난 그냥 현수 씨에게 모든 걸 정리하려고 나온 것뿐이야. 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닥쳐!”박진성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고, 그의 목소리는 살기를 띠고 있었다.“네가 눈이 멀었다고 해서 나도 그런 줄 알아? 네가 저 자식과 함께 도망치려고 한 거 다 알고 있어. 내가 했던 말들을 귓등으로도 안 들은 모양이네?”‘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두 사람은 이미 해외로 도망쳤을 거야. 이 배은망덕한 년! 처음부터 관대하게 용서해 주지 말았어야 했어.’“아니야! 난 도망치려고 한 적 없어!”“아니라고? 나에게 말도 없이 여기까지 나와서 방현수를 만나고 있는데도 아니라고?”박진성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비웃음을 터뜨렸다.“어젯밤 내가 널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나 보네. 그래서 이렇게 다른 남자한테 달려가야 할 만큼 간절했던 건가?”그는 민여진의 셔츠를 거칠게 잡아당겨 풀어헤쳤다. 그러자 목덜미 위
이어서 박진성은 다시 방현수를 노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방현수와는 아직 끝난 정산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지. 남의 여자를 탐내는 버릇을 확실히 고쳐주겠어.”민여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 이대로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직감한 그녀는 박진성의 팔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애원했다.“박진성!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야? 이건 우리 둘만의 문제야. 나한테 화풀이하는 건 괜찮으니까 제발 남한테까지 피해주지 마! 현수 씨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마!”박진성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냉랭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남이라니?”그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방현수랑 끌어안고 도망치려고 할 때는 죽고 못 사는 연인 같더니, 이제 와서 남이라고?”그는 독하게 쏘아붙였다.“정말 피도 눈물도 없네. 저 녀석은 이런 널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민여진의 눈가가 뜨거워졌다.‘피도 눈물도 없는 게 대체 누구지?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돼버린 거야...’그녀는 혼란스러웠다.'2년 전 자선행사장에서 누구보다 따뜻하게 웃던 그 남자는 어디로 간 걸까? 내가 첫눈에 반했던 박진성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사랑에 눈이 멀었던 걸까...'“내가 잘못했어... 진성 씨,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용서해 줘. 다시는 그 사람과 만나지 않을게. 다시는 연락도 안 할게. 그러니까 제발 현수 씨만은 놔줘.”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흐트러진 옷차림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울먹이며 머리를 조아렸다.방현수의 눈은 붉게 충혈되었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숨이 막혀 울부짖었다.“여진아! 일어나! 나 때문에 그 악마에게 무릎 꿇지 마! 그럴 필요 없어! 박진성은 네가 상대할 가치도 없는 놈이야!”박진성은 조용히 지켜보다가 천천히 손뼉을 쳤다.“참 보기 좋은 한 쌍이네. 내가 참 나쁜 놈이야, 그렇지? 이렇게 아름다운 한 쌍을 찢어놓은 거잖아.”그의 말에 민여진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가 이를 악물며
보디가드들의 차가운 조롱은 멈출 기미가 없었고, 민여진의 가슴속에서 분노와 절망이 소용돌이쳤다.‘왜 이렇게 냉정할 수 있지? 난 감정 없는 인형이 아니야. 왜 박진성의 뜻에 굴복해야 하지? 그와 결혼하겠다고 했던 과거가 지금의 나를 이렇게 무너뜨려야만 하는 거야?’고통은 극에 달했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두 눈은 점점 깊은 공허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을 스친 한 가지 생각이 그녀를 다시 깨웠다.‘현수 씨... 혹시 맞고 있는 건 아니겠지?’손끝이 떨리며 감각이 둔해졌지만, 그녀는 끝까지 집중했다. 본능적으로 좌석 밑에 손을 뻗어 상자를 꺼냈고, 안에 들어 있는 칼을 찾아 단단히 쥐었다.민여진의 손끝에서 미끄러진 칼은 이미 그녀의 목을 베고 있었고, 붉은 피가 셔츠를 물들이며 흘러내렸다. 그 광경을 본 두 명의 보디가드는 경악하며 외쳤다.“뭐 하는 겁니까! 당장 그 칼 버리세요!”그들은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다가오려 했다.“오지 마!”민여진은 칼끝을 더 깊이 밀어 넣으며 경고했다. 칼날이 피부를 파고들자 피는 마치 값싼 물처럼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시력을 잃은 그녀였지만, 눈빛만큼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그들이 조금이라도 다가오기만 하면 바로 목숨을 끊겠다는 단호함이었다.좁은 차 안은 그녀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보디가드들이 그녀에게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고, 그녀는 이를 알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만둬. 그를 놔주고 박진성을 데려와.”보디가드들은 당황해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좋아요, 알았어요! 제발 칼 놓지 마시고 가만히 계세요. 당장 박진성 대표님을 데려올게요!”그들은 급히 박진성을 부르러 달려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진성은 서둘러 차에 다가왔다. 차창 너머로 보인 것은 목에 칼을 대고 있는 민여진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셔츠를 이미 새빨갛게 물들였다. 박진성은 그 광경을 보고 폭발할 듯한 분노에 몸을 떨었다.“민여진!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그의 목소리는 분노와 두려움으
라미연이 이렇게까지 확신하자, 문채연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제 분명히 박진성을 봤고, 양성에서 안진까지는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어떻게 된 거지?’라미연은 문채연이 아무 반응이 없자 또 불을 지폈다.“채연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네가 사랑하는 남자를 그 여자에게 내줄 셈이야? 민여진은 그저 너랑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됐고, 널 공식 석상에 나오지도 못하게 했어. 이제는 네 남자까지 빼앗으려 하는데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너 이러다 다 빼앗길 수도 있다고!”힘들게 지내던 과거가 떠오르자, 문채연의 눈에는 살기가 스쳐 지났다.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알았어. 미연아, 고마워.”문채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올해 신상으로 나온 핸드백, 사람을 시켜 보내줄게.”라미연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사양했다.“됐어. 친구 사이에 뭘 이런 것 가지고.”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던 문채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혹한의 추위마저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갑게 변했다.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두 손에 힘을 주더니, 다시금 사진을 열었다.사진 속, 그 여자의 환한 미소는 마치 칼날처럼 문채연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왜? 넌 왜 이렇게까지 망가진 꼴을 하고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 건데?’반면 문채연은 이정화가 그 두 해 동안 함께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사실을 안 후로, 완전히 연락을 끊어버렸고 몇 번을 찾아가도 문전박대만 당할 뿐이었다.‘이정화와의 관계도 끝났는데 박진성마저 잃는다면...’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문채연은 이를 악물더니 벌떡 일어나 옷을 걸치고 나갔다.박진성의 병세는 도저히 나아지지 않았다. 복부의 상처가 자꾸만 벌어지며 악화하여 며칠 내내 별장에서 요양 중이었다. 게다가 민여진의 일까지 더해져 그는 식사 시간 외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문채연이 찾아가자, 서원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께서
민여진의 머리가 임재윤의 넓은 가슴에 닿았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향기는 묘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특정할 수 없는 향수 냄새였지만, 오히려 민여진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다만 애매한 이 자세가 불편했다.두 사람의 행동에 여자는 눈이 빨개진 채 말했다.“뭐야? 사귀는 사이였어? 요즘 세상에 왜 잘생긴 남자는 다 못생긴 여자랑 붙는지 모르겠네!”여자는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는 자리를 떠났다.여자의 말에 임재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 민여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익숙해요.”민여진은 임재윤이 자신의 마음이 다친 건 아닌지 신경 쓸까 봐 걱정스러웠다.임재윤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손을 뻗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그녀의 손바닥에 천천히 글씨를 썼다.[민여진 씨가 저 여자보다 훨씬 아름다워요.]한 글자 한 글자 강한 압력으로 글을 쓰는 그의 태도는 단호하고 진심이 어려 보였다.어쩌면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민여진은 웃음을 터뜨렸다.“왜 현준 오빠랑 똑같이 그래요? 현준 오빠는 원래 사람을 잘 달래주는 사람이라 이해가 가는데, 임재윤 씨는 예쁜 여자를 너무 많이 봐서 제 얼굴이 신기한 건가요?”임재윤은 침묵하다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그리고.”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타자를 했다.“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 부르는 건 싫어요.”다른 한편.엘리베이터를 타려던 라미연은 민여진과 임재윤의 모습을 보고 흠칫하며 멈춰 섰다.‘저거 민여진 아니야?’깜짝 놀란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민여진을 찍은 뒤, 엘리베이터에 올라 바로 문채연에게 사진과 함께 음성을 보냈다.“채연아, 방금 너한테 사진 보냈는데 봤어? 이 여자 민여진 아니야?”음성을 보내고 다시 한번 사진을 찬찬히 훑어보던 라미연은 그제야 민여진 옆에 한 남자가 희미하게 찍혀 있는 걸 발견했다.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터라 남자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등만 찍혀 있었는데 체형으로 보니 박진성인
“하지만...”민여진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짧은 시간 안에는 갚기 어려울 거예요.”민여진에게는 자립할 능력도, 돈을 벌 방법도 없었다.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한, 그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짐이 될 뿐이었다.“그냥 돈을 받아주세요. 현준 오빠한테 빚진 건 언제든 갚을 수 있지만, 임재윤 씨는 휴양지 건설이 끝나면 떠나실 거잖아요. 기간이 너무 짧아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평생 안진 마을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집은 여기가 아니었고,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임재윤은 받지 않고 물었다.“민여진 씨의 뜻은 나더러 안진 마을에 좀 더 머물러 달라는 건가요?”차가운 기계음 소리는 임재윤이 지금 농담하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들었다.민여진이 잠깐 멈칫하자, 임재윤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일단 가지고 계세요. 제가 떠나기 전에 갚을 수 있을 거예요.”결국 민여진은 그 돈을 임재윤한테 주지 못한 채 다시 조인화에게 가져갔다.“왜 다시 갖고 왔어? 임재윤 씨가 뭐라고 했는데?”“빌려주는 거래요. 돈이 생기면 갚으라고.”조인화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건 앞으로 다시 만날 계기를 만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오직 순진한 민여진만이 자신에게 매력이 없다고 여기며 그런 쪽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었다.“갚지 못하면 어쩌려고?”민여진도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임재윤 씨의 말로는, 떠나기 전에 내가 갚을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몸으로 갚으라는 거야?”민여진은 흠칫하더니 순간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이모, 장난치지 마세요.”조인화는 웃으며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아이고, 이 바보.”잠시 후, 포장 되어있는 봉투는 아까 전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임재윤이 봉투를 받아 든 뒤, 세 사람은 가계를 나왔다.밖으로 나가던 중 다른 한 가계에서 조인화는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민여진이 옷을 내려놓자, 조인화가 다가오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가게로 가요.”“왜? 현준이가 나한테 이 가게를 추천했는데, 겨울옷이 보온성이 좋다더라.”말하던 중 조인화는 뭔가를 깨달은 듯 미소를 지었다.“돈 걱정은 하지 마. 현준이가 너한테 옷을 사주라면서 돈을 푼푼이 보내줬어. 한 푼도 남기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하면서. 그러니까 현준이 말을 들어야겠지?”조인화가 민여진을 데리고 계산대로 가 결산을 하려 하자, 한 직원이 임재윤을 바라보며 말했다.“금액은 저분이 이미 결제하셨습니다. 옷은 포장해 드릴까요, 아니면 주소를 알려주시면 저희가 따로 배송해 드릴까요?”직원의 말에 조인화와 임여진은 깜짝 놀랐다.임재윤이 시내까지 태워다 준 것만 해도 이미 큰 도움인데 갑자기 옷까지 사준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얼마를 내셨죠?”민여진이 묻자, 직원은 웃으며 대답했다.“이 매장 전체를 살 수 있을 정도예요.”조인화는 탄성을 내뱉었다.“임재윤 씨가 부자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브랜드 매장인데 이 매장을 통째로 살 수 있을 만큼 줬다니, 도대체 얼마를 준 거야?”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대가 없는 호의는 받을 수 없어.'그녀는 차라리 조현준에게 신세를 지더라도 임재윤에게 더 이상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서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이모, 현금 가지고 계세요? 제가...”“가지고 있지!”조인화는 서둘러 지갑에서 돈을 꺼내 민여진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이모도 알아. 너와 임재윤 씨 사이가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는걸. 그러니까 이렇게 받는 건 아닌 거 같아. 어서 가서 돌려줘.”민여진은 돈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려다가 너무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아 미소를 지었다.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카운터를 짚으며 입구로 향했다.문어 구에 있던 임재윤은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가 휴대전화로 물었다.“왜요? 옷 다 골랐어요?”민여진이 손에 든 현금을 임재
“이모...”조인화의 말에 민여진은 당황스러워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차가 다시 멈추더니 앞에서 휴대전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도착했습니다.”“임재윤 씨, 고생하셨어요”문을 열려던 조인화는 문득 임재윤에게서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날카롭게 각진 그의 턱선은 불편할 정도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고, 미간에 잡힌 가느다란 주름이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임재윤의 태도에 조인화의 머릿속에는 순간 한가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임재윤이 휴대전화로 물었다.“돌아갈 방법은 생각해 두셨나요?”민여진이 대답했다.“오후 5시에 안진 마을로 돌아가는 버스가 있어요.”“너무 늦네요.”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다섯 시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잖아요. 저도 할 일이 없으니 같이 쇼핑하다가 다시 모셔다드릴게요.”“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민여진이 사양하려는 찰나, 임재윤은 차가운 표정으로 타자했다.“그냥 이렇게 하는 거로 하죠.”완강한 그의 태도에 민여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수고해 주세요.”조인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재윤과 민여진 사이를 관찰하고 있었다.한 매장에 들어간 뒤 임재윤이 입구에서 기다리자, 조인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여진아, 너랑 임재윤 씨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민여진도 두 사람 사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몰라 두루뭉술하게 답했다.“임재윤 씨는 모두에게 친절하시잖아요.”“글쎄다.”조인화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임재윤 씨가 널 보는 눈빛은 분명히 다르더라. 게다가 성격도 원래 냉정한 걸로 보이는데, 우리랑 쇼핑하겠다고 하다니. 분명히 너 때문이야. 그리고...”게다가 민여진이 조현준과 통화할 때, 임재윤은 불편한 기색을 훤히 드러냈다.“그리고요?”민여진은 묻다가 바로 웃으며 말했다.“임재윤 씨는 겉보기에는 차갑지만 속은 따뜻하고 세심한 사람이잖아요. 이모도 그날 축하 자리에서 보셨잖아요.”조인화는
“우리도 좀 태워주시겠어요?”조인화가 말했다.“시내에 가서 여진이 겨울옷 좀 사주려고요.”“그럼요.”진시우는 자신의 차를 잠깐 바라보다가 말했다.“근데 제 차는 자리가 꽉 찼네요. 앞에 차가 임재윤 차인데 저쪽에는 자리 남았을 거예요.”“임재윤 씨요?”조인화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임재윤에 대해 더 이상 거부감은 없었지만, 그래도 편하지는 않아 어색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괜히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무슨 소리세요.”진시우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다 한 식구 아닙니까. 도움 줄 수 있다면 좋아할 거예요.”“알겠어요.”조인화는 민여진의 손을 잡고 임재윤의 차 옆에 다가가 차창을 두드렸다.임재윤이 차창을 내리자, 날렵하면서도 깔끔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조인화를 스치듯 흘깃 보고는 민여진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조인화는 순간 당황했으나 바로 말을 이었다.“임재윤 씨, 저희 시내에 가서 옷 좀 사려고 하는데 태워주실 수 있나요?”임재윤은 볼품없이 낡아빠진 민여진의 옷을 보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조인화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두 사람이 모두 뒷좌석에 타는 건 임재윤을 운전기사 취급하는 것 같아, 조인화는 조수석에 올라탔다.차가 출발하자마자 민여진의 전화가 울렸다. 그녀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받자, 전화기 너머에서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여진아.”“현준 오빠.”의외의 전화에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던 민여진은 운전석에 있는 임재윤이 미동하는 게 느껴져, 그가 시끄럽다고 생각할까 봐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전화를 다 하고?”조현준은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일 없으면 전화도 못 해?”“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민여진은 약간 당황해하며 말했다.“전화해 줘서 당연히 반갑죠. 그런데 지금 출근 시간 아니에요?”“맞아.”조현준은 미소를 머금었다.“그런데 갑자기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민여진이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너무 자연스러운 임재윤의 행동에 민여진은 또다시 혼란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털어 버렸다.‘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런 행동은 박진성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계속 앞으로 걸어가자, 눈은 어깨에도 쌓일 정도로 점점 더 많이 내렸다. 하지만 손이 잡혀 있어서인지, 그다지 춥지 않았다.문 앞까지 왔을 때, 임재윤은 멈춰 서서 휴대전화로 말했다.“도착했어요.”민여진은 옷에 묻은 눈을 털며 말했다.“고마워요.”민여진이 대문을 여는 순간까지 임재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민여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임재윤 씨, 들어가서 따뜻한 차 한잔하실래요?”“다음에요.”임재윤은 빠르게 글을 쓰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어젯밤, 제게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물어볼 말이 있어요. 다음에 만날 때 물을 테니까 그때는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요.”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임재윤의 발소리가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민여진이 안뜰로 들어가자, 불을 피우고 있던 조인화는 민여진을 보자마자 수건을 들고 와서 그녀의 옷에 묻은 눈을 털어 주며 말했다.“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방금 불을 피워 놓고 너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어.”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마당에 마무리할 게 조금밖에 안 남아서, 그냥 두고 오기가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했어요.”“이 바보야, 안 추웠어? 내가 여기 있는 옷 몇 벌만 손보고 나가서 도와줄 테니, 너는 일단 앉아서 불 쬐고 있어. 따뜻한 물 좀 떠올게.”“네.”민여진은 앉아서 얼굴로 전해지는 따스함을 느꼈다. 손을 내밀어 차가웠던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자, 아까 임재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뜻은 원래 어젯밤에 할 말이 있었다는 거 아닌가?’민여진은 머리가 아파져 왔다.‘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눈이 한번 내리자, 기온은 뚜렷하게 떨어졌다.민여진이 입고 있는 옷들은 하나같이 얇은 옷들이었고 유일하게 맞는 건 조인화의 낡은 옷뿐이었다
임재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민여진에게 물었다.“됐어요?”그의 가슴은 여전히 드러난 채 있었고, 귀가 달아오른 민여진은 보이지 않음에도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네.”임재윤은 다시 옷을 내려 입고 단추를 채운 뒤, 천천히 글을 썼다.“당신 마음속에 있다는 그 사람, 저와 매우 비슷한가요?”민여진은 잠깐 멈칫하더니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마... 조금은요. 하지만 많이 닮진 않았어요.”“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요?”‘어떤 사람이냐고? 독단적이고 냉혈 하면서도 무자비한 사람.’민여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박진성의 모습은 항상 높은 곳에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살얼음처럼 차가운 모습뿐이었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정반대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무슨 황당한 생각으로 두 사람을 겹쳐 본 걸까?“잊어버렸어요.”민여진은 박진성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는 생각하기 싫어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요.”어쩌면 이건 민여진의 바람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박진성이라는 이름조차 잊고 아픈 과거를 모두 떨쳐내고 새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임재윤은 눈치껏 화제를 바꿨다.“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민여진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교회 내부 구조를 잘 모르는 한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해 줘요.”임재윤은 잠시 침묵했다. 약간 불쾌해 보이긴 했지만 크게 드러내지 않고 민여진의 손목을 잡은 채 밖으로 이끌었다.들어올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가보니 땅에는 얇게 눈이 쌓여 있었다.민여진이 손을 내밀자, 눈이 손바닥에 닿아 차갑게 녹아내렸다.“집까지 데려다줄게요.”임재윤이 휴대전화로 글을 썼다.“괜찮아요.”민여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안진 마을에 오신 것도 일 보러 오신 거잖아요. 저 때문에 이미 시간을 많이 낭비하셨는데 일 보러 가세요. 여기서부터는 길을 아니까
임재윤은 더 이상 휴대폰으로 타자를 하지 않았고 대신 조용히 민여진의 손을 붙잡았다.그의 손은 크고 따뜻했고 그 사람이 지니던 차가운 손과는 전혀 달랐다. 임재윤의 손은 피부가 델 듯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다.민여진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살짝 떨었고 임재윤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자신의 몸쪽으로 이끌었다.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가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리고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가슴과 복부 사이 어디쯤 조심스럽게 얹었다.마침 그 자리는 심장이 뛰는 곳이었고 손등 너머로 전해지는 맥박은 뜨겁고 강했다. 그 울림에 민여진은 마치 전신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민여진은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임재윤이 더욱 단단히 그녀의 손을 잡고는 아래로 이끌었다.그의 허리로 내려간 손끝에는 단단하고 잘 단련된 근육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압도적인 힘과 긴장감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잠시 후, 임재윤은 그녀의 손을 놓았고 옷을 더 걷어 올렸다.그건 마치 마음껏 확인해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다.민여진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피가 터질 것처럼 귀 끝까지 달아올랐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이건 그저 확인일 뿐이야. 그 사람인지 아닌지만 알아보면 되는 거야.’하지만 시야가 보이지 않는 만큼 감각은 모든 걸 더욱 생생히 느꼈다.그의 숨소리 피부에서 나는 미묘한 향기 손끝에 닿는 근육의 결까지도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그녀는 예전에 박진성과 수없이 많은 밤을 함께 했지만 이렇게 집중해서 그의 몸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그들은 서로의 몸만 공유한 낯선 사이였을 뿐이다.감정도 사랑도 없었다.감옥에 들어가기 전에도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임재윤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고 그제야 민여진도 정신을 차리고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해요.”그러고는 손을 그의 왼쪽 허리로 옮겼다.그녀는 눈을 꼭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그날 그녀가 칼을 찔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