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성은 민여진이 오직 민영미 때문에 그 많은 음식을 다 비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박진성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소화제 하나를 꺼내 민여진의 입에 넣어주었다.“이제 가자.”시계를 한 번 확인한 박진성은 민여진에게 외투를 둘러주며 그녀를 데리고 함께 마당 밖으로 나갔다.서원이 두 사람을 따라가려 하자 박진성이 그를 막았다.“넌 오늘 집에 있어. 단둘이 따로 볼 일이 있으니까 굳이 안 따라와도 돼.”박진성이 민여진과 함께 집을 떠나자 강태화는 서원의 팔을 붙잡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넌 참 눈치도 없지. 딱 보면 몰라? 오늘 두 분이 데이트하러 가는 거잖아. 거길 끼려고 해?”“데이트요?”서원이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그럴 리가요?”“왜 말이 안 돼?”자세한 사정을 몰랐던 강태화가 손수건을 털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좀 복잡해 보이긴 하지만, 서로 마음이 있는 건 분명해.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걸 거야. 이제 그 오해가 풀렸으니 같이 밥 먹으러 가고 데이트도 나가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서원은 차가 떠난 방향을 계속 주시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오직 서원만이 둘의 복잡한 사이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박 대표님...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에요...’민여진은 조수석에 올라탔고 운전대는 박진성이 직접 잡았다. 가는 내내 민여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안전벨트를 꼭 잡고 있었다.“진성 씨... 어디 가는 거야?”“가보면 알아.”민여진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또 애견카페 가는 거야?”“아니.”그 말에 박진성이 가볍게 웃었다.“난 똑같은 수법 두 번 안 써. 맞힐 거면 다른 쪽으로 맞혀 봐.”더 이상 떠오르는 게 없었던 민여진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갈피를 못 잡는 민여진에 박진성이 힌트를 주었다.“네가 가고 싶은 곳.”민여진이 가고 싶은 곳이라고?그 말에 민여진은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릴 적, 그녀는 가고 싶은 곳이 아주 많았다. 빈민가에서 자라면서 바깥세상을 볼 기회에 민여진에게는 없었던 탓
그녀가 차에 오르려 하자 박진성은 뒤에서 민여진을 힘껏 끌어안았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민여진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다.박진성은 천천히 민여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그럼 오늘 하루는 나한테 맡겨. 내가 네 눈이 되어줄게. 관람차 위에서 풍경을 볼 수 없다고 해도, 내가 다 설명해줄게. 롤러코스터를 타도 그 스릴 내가 느끼게 해줄게. 눈을 잃었다고 삶의 희망까지 잃을 필요는 없어. 여진아, 나 한 번만 믿어줘.”박진성의 믿어달라는 말에 민여진은 먼 곳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흥분한 듯한 환호성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박진성은 민여진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이 놀이공원 역시 그의 투자로 지어진 곳이었지만 박진성은 민여진과 함께 줄을 서며 그 설렘을 함께 즐겼다. 폐쇄된 공간 안으로 들어가던 그때, 박진성이 입을 열었다.“여긴 관람차야.”민여진은 긴장감으로 식은땀 어린 손을 유리창에 꼭 대고 있었다. 잠시 후, 관람차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박진성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시간이 얼마 없을까 봐 일부러 일정을 좀 앞당겼어. 사실 여긴 밤에 오던 더 예쁘거든. 불빛들이 알록달록해서.”그는 차가운 손으로 민여진의 손을 잡으며 유리창을 함께 매만졌다.“저기엔 회전목마가 있어. 저걸 중심으로 모든 놀이기구가 있는데, 오늘 사람 진짜 많아. 그리고 저기, 이거 다 타면 저기 가서 롤러코스터를 탈 거야.”그는 민여진의 손을 잡고 유리창을 하나하나 짚으며 놀이기구의 방향을 얘기해 주었다. 그 덕에 민여진의 머릿속에는 대충 놀이공원의 그림이 떠올랐다.관람차에서 내리자 민여진은 박진성이 자신에게 가까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둘의 얼굴은 가까이 붙어 있었고, 고개를 돌리면 박진성의 피부에서 전해지는 열기와 고른 숨결이 느껴졌다.민여진은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이게 가자.”뒤에서 민여진을 바라보는 박진성의 시선은
“그럼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민여진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난 그 사람 여자친구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 사람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그래요, 그럴 줄 알았어요!”여자는 기쁜 듯 웃으며 민여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점점 더 못 봐주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뭔 개똥을 밟았나. 어떻게 저런 잘생긴 남자랑 이런 곳을 와요? 뭐, 저 사람도 그쪽이 불쌍해서 같이 데리고 와 준 거겠죠? 못생긴 것도 모자라 눈까지 멀었으니. 여기서 뭐라도 해보려는 거 아니에요?”불쌍하다고?민여진이 잠시 멈칫하자 여자는 뭔가를 알아냈다는 듯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그거 봐요, 내 말 맞죠? 그쪽도 그렇게 생각했죠? 안 그러면 저렇게 완벽한 남자가 왜 그쪽이랑 같이 있겠어요?”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진성이 나타났다. 그는 민여진의 곁에 있던 여자를 보고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여진아, 무슨 일이야?”민여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박진성은 다시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이 여자는 누군데?”여자는 박진성을 보자마자 눈웃음을 치며 쑥스러운 듯 말했다.“이분이 좀 불편해 보이셔서, 지나가다가 걱정돼서 한 번 와 봤어요.”“그래요?”박진성은 여자를 한 번 훑어본 후 입을 열었다.“그럼 이제 가보세요.”여자는 박진성이 자신의 유혹에도 넘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조금 당황한 듯한 걸음 다가갔다.“저기, 이봐요. 여자분 지금 멀미하시는 것 같은데, 저도 예전에 비슷한 증상이 있었거든요. 진짜 잘 드는 약 하나 있는데, 카톡 알려주시면 제가 알려드릴게요.”유치하기 그지없는 헌팅 수법에 박진성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제 여자친구가 여기 있어서요.”“여자친구요?”여자는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여전히 어지럼증에 시달리고 있는 민여진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저기요, 농담도 참. 저분이 어떻게 여자친구예요? 거절할 거면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대셔야죠. 아까 물어보니까 여자친구 아니라고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속죄하려는 거라고 말 안 해도 돼. 비록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짧고 2년 동안 속 깊은 대화를 나눈 횟수도 손에 꼽지만 난 당신이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진짜 박진성이라면, 설령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더라도 돈이나 다른 방법으로 보상하려고 했지 이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녀의 질문에 박진성 자신도 잠시 멍해졌다. 왜냐고?그는 민여진이 마지막 남은 삶의 희망을 잃는 것도, 자신을 미워하는 것도, 무엇보다 민영미의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그래서 민여진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고 그녀의 안식처가 되어주려 했다.하지만 이런 속마음을 털어놓을 순 없었다.민여진은 박진성의 망설임을 느끼고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동정이야? 진성 씨?”속죄가 아니라 동정이었다. 길가의 개나 거지에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동정말이다.그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맴돌았다.“정말 그런 이유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아왔고 이미 익숙해졌으니까. 게다가 어머니를 만나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부족해. 턱없이 부족해!”박진성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민여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입을 열려는데 박진성이 성큼 다가왔다.“내가 왜 이러는지 물었잖아?”박진성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얼굴을 감싸 쥐고 거침없이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민여진의 귓가에 속삭였다.“이게 답이야, 민여진. 난 너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러니 날 계속 사랑해 줘.”민여진은 두 눈이 휘둥그레서 심하게 몸을 떨고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숨을 고르며 고개를 떨궜다. 머릿속이 멍해졌다.결국 민여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이게 박진성의 충동적인 행동인지 아니면 무슨 계획이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문채연도 있지 않은가.나머지 여정은 이어지지 않았다. 민여진은 차에 타 안전벨트를 매면서 물
“좀 더 긴 걸로 주세요.”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의 여지를 주지 않고 변명했다.“짧으면 춥잖아요.”민여진은 집 밖에 잘 나가지 않지만 집에는 그 외에도 강태화와 서원이 있었다. 그래서 치마가 짧아 다리가 드러나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채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알겠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그럼 이건 어떠세요?”“목 부분이 너무 넓어요.”“이건요?”“등이 파였잖아요.”결국 민여진이 직접 하얀 니트를 골랐다. 채리의 눈이 반짝였다.“여기에 검은색 타이트 스커트를 매치하면 딱 좋겠네요. 따뜻하기도 하고 또...”빈틈없이 꽁꽁 싸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채리는 하마터면 뱉을 뻔한 말을 삼키고 화제를 돌렸다.“민여진 씨, 탈의실로 안내해 드릴게요. 먼저 입어 보시겠어요?”“네, 고마워요.”민여진은 옷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만져보니 꽤 비싼 옷감이었다. 박진성의 아내였을 때도 이런 대접은 받았지만 지금은 어쩐지 낯설었다. 조심스레 옷을 입는데, 단추를 덜 풀었는지 아니면 옷을 뒤집어 입었는지 머리에 옷이 걸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민망함에 그녀는 화끈거리는 얼굴로 작게 말했다.“저기요?”탈의실 앞을 지키고 있던 박진성이 대답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거침없이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옷이 머리에 걸린 여자의 나신이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드러난 모습에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무슨 일이야?”박진성은 순간 호흡이 거칠어졌다. 민여진이 이렇게 쉽게 자신을 흔드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민여진은 당황스러웠다. 이렇게까지 티가 나는데 모르겠다는 말인가?“머리가 옷에 끼었어.”“칠칠맞게. 내가 도와줄게.”도와준다더니 박진성의 손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그는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살집이 별로 없었다.민여진은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벗어나려고 했지만 박진성이 말했다.“옷 찢어지면
채리는 미리 직원들에게 일러두었다. 직원은 문채연의 말을 듣고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문채연 씨. 사장님께서 오늘 중요한 손님을 접대하고 계셔서 지금은 시간을 내기 어려우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사장님께서 일이 끝나시는 대로 바로 오실 겁니다.”“뭐라고?”문채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양성에서 거의 모든 매장의 VIP 고객인 그녀가 이정화 앞에서 이런 굴욕을 당하다니. 그녀는 분을 삭이며 물었다.“중요한 손님? 나보다 더 중요한 손님이 있다는 거야?”직원은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바로 박진성 씨입니다.”“진성이?”이정화는 다소 놀란 기색을 보였다. 문채연은 더욱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진성 씨였구나. 그럼 채리를 더 불러야지. 진성 씨 지금 어디 있어? 채리랑 같이 있어?”직원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문채연 씨, 죄송하지만 고객의 개인 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문채연의 미소가 굳었다.“내가 진성 씨랑 무슨 사이인지 몰라서 그래? 개인 정보는 무슨! 내 앞에서 그 사람이 숨길 게 뭐 있어?”“그게...”점원은 망설이며 말했다.“하지만 박 대표님께서 오늘 다른 분과 함께 오셨는데, 문채연 씨와 마주치는 건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다른 사람이랑?”문채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곧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누군데?”“여자분입니다.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문채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누구인지 뻔했다. ‘박진성이 민여진을 데리고 나오다니? 미쳤나? 여기서 아는 사람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큰데? 박진성은 민여진이 자기 눈 버리는 것도 모자라 남들 눈까지 더럽히겠다는 건가?’이정화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진성이가 여자를 데리고 왔다고? 누군데?”문채연은 이정화를 바라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마... 민여진 씨일 거예요. 요즘 진성 씨가 민여진 씨랑 가깝게 지낸다고 하더라고요. 전 진성 씨랑 단둘이 만난 지도 한참됐어요...”“뭐라고?”이정화의 얼굴이 더욱
‘그녀가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이 말은 날카로운 가시처럼 민여진의 가슴에 박혔고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아도 이정화만큼은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이정화의 모든 말, 모든 단어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가슴을 도려냈다.민여진은 몸을 떨었다. 박진성은 그녀를 자신의 뒤로 숨기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어머니, 말씀이 너무 심하세요.”“심하다고?”이정화는 박진성의 굳은 얼굴을 보며 처음으로 아들과 자신 사이에 깊은 골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그녀의 마음은 더욱 차갑게 식었다. “내가 내연녀를 보고 웃으면서 딸처럼 대해야 한다는 거야?”“민여진은 내연녀가 아니에요!”박진성은 이를 악물었다. “민여진과 저는 혼인...”“진성 씨!”그저 구경만 하려던 문채연은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그녀의 눈에는 극심한 불안감과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드러났다.‘박진성은 방금 이정화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 그녀와 그동안 함께 있어 줬던 여자가 실은 그녀가 말하는 내연녀라고?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이야말로 진짜 부부 사이라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어떤 입장이 된단 말인가? 정말 미쳤어!’문채연은 불안감에 이가 덜덜 떨렸다. 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박진성에게 애원하며 이정화의 팔을 붙잡았다.“괜찮아요, 어머니. 진성 씨가 민여진 씨를 데려온 건 그냥 옷을 사주려고 그랬을 거예요. 저... 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 그냥 가요...”가겠다고 말하면서도 억울함을 감추지 못하는 문채연이었다.이정화는 분노와 억울함에 가슴이 답답해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어머니!”“어머니!”박진성은 황급히 달려가 이정화를 부축했다. 민여진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이정화의 병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정화의 곁으로 달려가 가슴팍의 약병을 찾았다.“만지지 마!”이정화는 그녀의 손을 탁 쳐내며 떨리는 목소리
이정화는 민여진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여자는 집에 처박아 두기나 해. 다시는 밖에 데리고 나오지 말고.”말을 마친 이정화는 쇼핑할 마음이 사라졌는지 문채연과 함께 매장을 나섰다.민여진의 얼굴은 창백했다. 부끄러움 같은 건 이제 느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정화의 ‘내연녀’, ‘이런 여자’라는 말에 그동안 쌓아온 의지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민여진, 괜찮아?”박진성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민여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괜찮아.”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박진성의 손길을 피했다.박진성은 손이 허전해지자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민여진의 손목을 붙잡았다.“화났어? 채연이랑 어머니 사이 알잖아. 어머니가 널 내연녀로 오해해서 심한 말씀을 하신 거야. 기분 나쁜 건 당연하지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어.”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난 박 여사의 말이 심해서 기분 나쁜 게 아니야.”“그럼 왜 그래?”박진성은 영문을 몰랐다.민여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돌아가자. 좀 피곤해.”집에 돌아온 민여진은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토라진 게 아니었다. 그냥 이정화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을 뿐이었다.‘그래. 나 같은 여자는 절대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인데 이제 와서 박진성의 말 몇 마디에 흔들리면 안 돼.’민여진은 지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다.‘이대로도 괜찮아. 그냥 햇빛도 못 보는 내연녀로 살지 뭐. 엄마가 살아있는 한 나는 괜찮아. 다른 건 생각할 필요 없어. 생각할 자격도 없으니까.’아침까지 잠을 자던 민여진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 보일러를 켜지 않은 게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깨어나 보니 방은 따뜻했다.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챙겨 입었다. 오늘 민영미가 온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던 것이다. 옷을 입고 문을 열고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
“채연 씨는...”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서 하이힐 소리가 급하게 울려 퍼졌다. 긴장과 걱정이 묻어나는 발걸음이었다.“진성 씨!”문채연이 핸드백을 들고 달려왔다.“왜 나와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은 수술 후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박진성은 변함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병실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아.”“그래도 저한테는 말했어야죠. 그리고 옷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으셨네요. 감기라도 다시 걸리면 어쩌려고요?”문채연은 핸드백을 비서에게 건네고 예쁜 손가락으로 박진성의 옷 단추를 하나씩 채워줬다. 단추를 모두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오히려 잘됐네요. 진성 씨가 다친 뒤로 우리 오랫동안 데이트도 못 했잖아요. 좀 움직이는 것도 좋아요. 오늘 나랑 같이 저 앞에 있는 레스토랑의 커플 메뉴를 먹으러 가요.”공포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민여진은 구석에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나마 압박감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박진성과 문채연의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꽤 가까워 보였다. 만약 박진성이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 계획까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안정적이라면, 민여진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갈 터였다. 그렇다면 설령 박진성이 나중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 생각에 민여진은 비록 안도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억울함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고통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조현준이 말했듯, 권력과 배경을 전부 가진 사람들 앞에서 아무 힘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진 씨? 왜 여기 웅크리고 계세요?”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시우는 창백한 얼굴로 화분 뒤에 웅크려 앉은 민여진을 발견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에요.”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
“그런 사이 아니라고?”조현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깜짝 놀랐잖아.”조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여진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 사회의 다툼에 끼어들어선 안 돼. 권력도 배경도 없는 우리는 그들한테 아무 위협도 안 되는 사람들이야.”조현준의 말에 민여진은 이 충고를 조금 일찍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요. 현준 오빠, 진시우 씨는 안진에 리조트를 건설한다고 자주 다녀서 알게 된 거예요.”“리조트를 건설한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조현준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안진에 리조트를 세운다면 물론 수익은 있을 수 있지만, 진시우를 좀 과소평가한 일 아닌가?”“동진에서는 형이 모든 사업을 독차지해서 따로 나와 독립하는 거라고 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며 계속 말했다.“현준 오빠, 한 사람만 더 조사해 주셨으면 하는데요.”“임재윤?”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조현준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조사할 생각이었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너하고도 접촉이 많은 사람 같아서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불안하거든.”“고마워요. 현준 오빠, 이 신세를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여진아, 우리는 이웃이기 전에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마.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건 아니야.”조현준은 주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넌 일단 쉬어. 나한테 기자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돼. 조사가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네, 수고해 줘요.”통화를 마치고 민여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마음이 놓이자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다시 눈을 뜨자 휴대전화 시계는 이미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민여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씨, 깨셨나요?”“네. 잠시만